그 동안 요한복음 함께 열심히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드린다.
- 함께 읽었던 어떤 성경보다 어렵고 골치 아팠지만, 다른 어떤 성경보다 더 많이 깨달은 것 같다.
- 함께 어려움에 동참해준 교회 식구들에게 정말 감사하다.
이게 빈말이 아니라 얼마나 진심인지 꼭 전해졌으면 좋겠다.
- 이렇게 성경을 읽는게 이제 우리에게는 익숙해져서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목사, 선교사 다 포함해서 이 정도로 진지하게 성경 읽는 사람 우리나라 기독교 인구 중에 1%도 안될 것이다.
- 우리가 이렇게 성경을 읽는 것이 얼마나 기적 같은 일인지 꼭 알길 바란다. 정말 감사하다.
지금까지 요한복음을 열한 장 봤고, 앞으로 열 장 남았다.
- 읽은 분량과 읽을 분량이 비슷해서, 지금까지 고생한 만큼 또 고생해야 한다는 생각에 막막하다.
- 앞으로 또 얼마나 많은 사건이 있을지 생각하면 암담하다.
- 하지만 생각 외로, 이제 남은 사건은 몇 개 되지 않는다. 생각보다 더 짧다.
남은 요한복음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장 |
구분 |
주제 |
11 |
연계부 |
죽음 부활 예고 |
12 |
죽음 준비 |
|
13 |
십자가 행 |
주의 만찬 |
14 |
고별사1 |
|
15-16 |
고별사2 |
|
17 |
예수님의 기도 |
|
18-19 |
체포, 재판, 죽음 |
|
20 |
결론 |
예수님의 부활 |
21 |
결론 |
- 남은 사건은, 마리아의 향유 옥합 사건, 예루살렘 입성, 주의 만찬, 체포, 재판, 죽음, 부활, 끝으로 예수님과 제자들의 재회 정도가 전부이다.
- 열한 장을 보느라 굉장히 힘들고 오래 걸렸는데, 남은 열 장은 생각보다 빨리 끝날 것이다.
본문의 배경도, 벌써 예수님이 죽으시기 일주일 전이다.
- 3년의 공생애 기간이 벌써 다 지나고, 이제 고작 일주일 남았다.
아마도 남은 일주일 동안 예수님은 오로지 십자가 죽음 부활에만 초점을 두실 것이다.
- 이제 십자가 죽음 부활만 알면 된다.
- 이것 하나에만 집중하면 되니까, 이전보다 훨씬 단순하고 명확할 것이다. 그래서 쉬울 것이다.
- 그리고 이 일주일의 가르침을 통해 제자들과 함께 우리의 인생도 변혁될 것이다.
힘들겠지만, 이 믿음 가지고 남은 요한복음 재미있고 신나게 읽자.
- 분명히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 주실 것이다.
- 어려운만큼 우리에게 임할 하나님의 은혜가 클 것이다.
내용 정리
38-44절: 나사로 부활 - 그들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나사로는 죽었고, 믿음 없는 사람들은 울었다.
그리고 예수님도 사람들의 믿음 없음 때문에 울었다.
- 사람들이 운 것은 '죽음' 때문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통제할 수 없는 '죽음'의 위력에 짓눌렸기 때문이다.
반면 예수님 눈물의 원인은 '죽음'이 아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신다. '죽음'을 통제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 예수님께서 통제하실 수 없는 유일한 대상은 '사람'이다. 통제 되지 않는 '사람' 때문에 우신 것이다.
- 믿음을 주시려 했지만, 계속해서 믿지 않는 '사람'에 대한 안타까움, 속상함, 분노, 짜증, 애절함, 애통함 때문에 비통하여 눈물을 흘리신 것이다.
예수님은 애초부터 '죽음'에 관심도 없으시다.
- '죽음'에 관심있는 것은 사람 뿐이다.
- 그래서 사람은 예수님도 '죽음'에 관심 가져주길 바란다.
- 그래서 예수님도 '죽음'에 관심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 그래서 예수님도 '죽음' 때문에 운다고 착각한다.(36, 37)
하지만 예수님은 '죽음' 때문에 비통해하지 않으신다. '죽음'을 통제 안에서 이용하신다.
[4] 예수께서 들으시고 말씀하셨다.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병이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 영광을 받게 될 것이다."
[14-15] 이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밝혀 말씀하셨다. "나사로는 죽었다. [15] 내가 거기에 있지 않은 것이 너희를 위해서 도리어 잘 된 일이므로, 기쁘게 생각한다. 이 일로 말미암아 너희가 믿게 될 것이다.
- 예수님은 '죽음'을 도구 삼아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드러내신다.
- 그리고 또 '죽음'을 사용하여 사람들이 믿음을 갖도록 하신다.
예수님의 유일한 관심은 '믿음'이다.
- 예수님을 기쁘게 하는 것도 '믿음'이고 예수님을 슬프고 분노하고 비통하게 하는 것도 '믿음' 뿐이다.
- 예수님이 '죽음' 때문에 눈물을 흘리신다고 오해하는 것은 믿음 없는 사람(유대 사람)의 특징이다.(36, 37)
- 예수님이 '믿음' 이외에 다른 것에 기뻐하거나 슬퍼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은 예수님을 모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사로의 죽음을 통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유일한 것은 '믿음'이다.
- 죽은 나사로와 그의 누이에 대한 사랑 아니다.
- 죽음의 권세에 대한 심판과 경고 아니다.
- '믿음'을 증언하시는 것에 대한 기쁨과 '믿음' 없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와 비통함이 유일하다.
예수님께는 '우리의 관점에서' 사이코패스 기질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잊으면 안된다.
- 예수님이 우리처럼 기뻐하시고, 우리처럼 슬퍼하실 것이라고 착각하면 안된다.
- 예수님은 우리가 기뻐할 때 화내시고, 우리가 화 날 때 기뻐하실 수 있다. 사이코패스처럼.
-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에 우리처럼 슬퍼하실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은 유대 사람들 같이 믿음 없는 사람이나 하는 짓이다.
- 예수님은 우리의 기쁨과 슬픔에 공감하시긴 하지만, 우리와 같은 기준으로 감정을 갖지 않으신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어서 모두가 슬퍼할 때, 혼자 기뻐하신다. 사이코패스처럼.(15)
- 왜냐하면 '믿음'을 증언할 절호의 기회이기 때문이다.
- 요한복음 11장이 이러한 맥락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나사로 죽음의 의미가 바르게 이해된다.
예수님은 무덤에 가셔서, '돌을 옮겨 놓으라'고 말씀하셨다.(39)
하지만 마르다는 거부한다.
이에 예수님은 믿음 없음을 책망하시며, 믿을 것을 촉구하신다.
-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은 이때나 지금이나 계속해서 쉬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신다는 것이다.
- 나사로의 죽음 부활 역시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시려고 행하신 일이다. 나사로 한 명 살리자고 하신 일이 아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믿음이 없으면, 눈 앞에서 기적을 보아도, 급기야 기적에 참여해도,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 즉, 눈 앞에서 기적이 일어나도, 그 기적에서 완전히 배제된다는 것이다.
- 기적은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이 목적인데, 믿음이 없어서 아무 것도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아마도 지금 우리 주변에도 수 많은 기적이 일어나고 있을 것이다.
- 그 기적을 보고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하고 있을 것이다.
- 그러나 믿음 없는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기는 커녕, 기적이 일어났는지조차 모르고 있다.
게다가 우리가 알지도 못하게, 우리가 예수님의 기적에 사용되었는지도 모른다.
- 믿는 사람들은 우리를 통해 일어난 기적을 보고 하나님의 영광을 봤을지도 모른다.
- 마치 대제사장 가야바가 예수님의 죽음 부활을 예언했고, 그 예언을 통해 구원 받은 사람이 많지만, 정작 자신은 그 예언에서 철저히 배제되어, 자기가 예언을 했는지조차 모르는 것처럼 말이다.
- 정말 비극적이다.
그래서 '믿음'이 중요하다.
- '믿음'만이 중요하고, 나머지는 아무 것도 중요하지 않다. 전부 수단이다. 기적도 수단이다.
예수님 말씀에 따라 사람들은 돌을 옮긴다.(41)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하나님께 기도를 하신다.(41, 42)
-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 총 3번 기도를 하시는데, 그 중 첫 번째이다.(12:27-28, 17:1-26)
기도의 내용은 두 가지다.
① 하나님께 감사의 고백: 아버지, 내 말을 들어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 본문에 나오지는 않지만, 예수님은 나사로를 다시 살려달라는 기도를 이미 하셨고, 그에 대한 응답까지 받으셨다.
- 그 응답에 대해 예수님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 이로 보아,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가 단순한 순종 관계가 아니라, 예수님이 요청도 할 수 있는 상호 관계임을 알 수 있다.
- 그런데 반전이 있다. 하나님에 대한 감사 고백이 하나님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② 감사 고백의 이유: 이렇게 말씀을 드리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해서 입니다.
-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것이 아니라, 둘러선 무리가 듣고 믿도록 하신 것이다.
- 믿음의 내용은,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보냄 받았다는 것이다.
- 결과적으로, 나사로는 살아났고, 예수님의 신뢰성이 입증되었으며, 따라서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보냄 받았다는 것이 증명된 것이다.
- 나사로를 살리시며 이런 기도를 하신 것은 이를 증명하시기 위한 것이었다.
이렇게 예수님의 목적은 언제나 하나다.
- 예수님이 누군신지를 증명하여 자신을 '믿도록' 하는 것이다.
- 사람 한 명 살리는 것이 아니다.
- 괜히 보이지도 않는 '죽음의 세력'과 싸울 이유가 없다.
기도 후, 예수님은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너라."라고 외치자, 죽었던 나사로가 살아 나왔다.(43, 44)
그런데 살아 나오는 나사로의 모습이 흡사 공포영화 같이 자세히 표현되어 있다.(44)
- 그 당시 시신은 하나의 긴 천으로 발부터 시작해서 목까지 갔다가 다시 발까지 휘감았다.
- 그리고 얼굴은 다른 천으로 감쌌다.
- 그랬기 때문에 걸어 나온 것이 아니라, 양 발이 묶이 채로 뒤뚱거리며 나왔을 것이다.
- 아마도 자세한 표현을 통해 부활 사건의 신빙성을 높이려는 의도로 보인다.
끝으로 예수님은 나사로의 몸을 풀어서 자유롭게 다닐 수 있도록 하신다.
- 이로서 나사로는 부활한다.
- 이는 예수님의 말씀이 거짓이 아니며, 따라서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분으로서 믿음의 대상이심이 증명된다.
45-46절: 사람들의 반응 - 믿음 & 밀고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면, 예수님에 대한 분석은 더 이상 필요 없어져야 마땅하다.
- 일단 예수님의 말씀은 옳다고 봐야 한다.
- 예수님의 말씀을 고민해볼 수는 있어도, 부정할 수는 없어야 한다.
-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보냄 받았다는 말씀도 깊이 상고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사로를 조문 온 많은 유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45)
- 안믿는게 더 이상하다. 믿은 이유에 대해 논의할 필요도 없다.
- 그러나 요한복음의 특성상, 이들의 믿음은 신뢰할 수 없으며 피상적이다.(2:23-25, 8:30)
반면에 예수님을 믿지 않고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밀고하는 사람들이 있었다.(46)
- 죽은 사람을 살리는 능력을 가진 예수님이 두려울 법도 한데, 용기있게 바리새인에게 간다.
- 아마도 두려움보다 더 큰 유익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본문에서는 말하지 않지만, 이들이 밀고한 내용을 추측해보면,
- 예수님이 큰 '사고'를 쳤고,
- 그로 인해 예수님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고 있기 때문에,
- 바리새인을 비롯한 예루살렘 지도자들의 위상이 더욱 위협 받고 있다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47-53절: 대제사장과 바리새인의 공의회 소집 - 그들은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였다.
그 내용을 듣고, 공의회가 열렸다.(47)
- 공의회는 이스라엘의 입법, 사법, 행정을 모두 담당하는 최고 기관이다.
- 구성원은 대다수가 사두파 소속인 '제사장들'이었고, 소수의 바리새파 소속인 '서기관'과 지주 귀족 계급인 '장로들'이었다.
- 특히 바리새인들은 소수였지만, 일반 백성들의 신뢰가 높아서 공의회에서 영향력도 컸다.
공의회가 소집되었다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입장이 이스라엘 전체에서 확정되었다는 것이다.
- 그 동안 바리새인 주도로 예수님께 돌을 던지고,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성전 경비병에 의해 예수님을 체포하려는 시도가 있었는데, 그것이 결국 최고 기관인 공의회에서까지 의결된 것이다.
의결을 하게 된 이유는 예수님의 기적 때문이다.
- 이 기적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기에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 이스라엘 전체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으면, 결과적으로 이스라엘 전체가 로마의 황제를 부정하는 꼴이 된다.
- 그러면 로마 군대가 이스라엘에 주둔하게 될 것이고, 이스라엘의 내정을 더 깊이 관여하여 땅과 민족을 약탈해 갈 것이라고 예상한 것이다.
이는 설레발이 아니다. 현실적으로 정확한 판단이다. 이는 정말 굉장히 위험한 상황이었다.
- 지난 3세기 동안 계속된 로마의 압제를 간신히 견뎠던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로마에 민감했다.
- 그래서 로마의 신경을 거슬리게 할 일은 극도로 꺼려했다. 어떻게든 자체적으로 해결하려 했다.
- 어떤 이유에서든 로마 군대가 들어오면, 그 피해가 막대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특히 이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이 손상되는 것이 가장 큰 걱정이었을 것이다.
- 로마가 약탈하는 만큼 자신들의 수입이 줄기 때문이다.
그래서 민족 전체를 위해, 그리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해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 예수님의 영향력이 이스라엘 전체로 퍼지기 전에, 그래서 로마가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되기 전에 빨리 해결해야 했다.
그 때 대제사장 가야바가 최종 정리를 한다.(49)
결론은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다.(50)
- 그래야 이스라엘 민족을 지킬 수 있으니까.
- 그래서 지도자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것이다.
이는 공의회의 최고 의결자인 대제사장으로서 자신과 공의회 의원들,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을 지키기 위한 합당한 판단이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여기에 해석을 덧붙인다. 이게 진짜 무섭다.(51)
- 예수님을 죽이자는 판단은 단순히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속셈이었다.
- 하지만 하나님은 그 대제사장의 말을 통해 예언하신다.
- 예수님의 죽음은 인류 전체의 구원을 위한 대속적 죽음이라는 것이다.
대제사장은 '자신들을 위해' 예수님을 죽어야 한다고 말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같은 말을 '인류 전체를 위해' 죽어야 한다고 말씀으로 바꾸신 것이다.
- 하나님께서는 지도자들의 '살인'을 '대속을 위한 희생 제사'로 만드신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의 죽음이 인류의 대속을 위한 희생 제사라는 것이 밝혀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죽음 부활의 의미를 아는 것과 함께 또 중요한 것이 있다. 하나님께서 이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을 아는 것도 중요하다.
- 하나님은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인 십자가 죽음을 한낱 기득권을 지키려는 소수 집단의 계략을 통해 일으키신다.
- 그리고 그 사건의 의미를 사건의 주동자인 대제사장의 입을 통해 제시하신다. 자기 의도와는 전혀 상관 없이, 자기도 알지 못한채 말이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 대제사장이 의도와 상관 없이 하나님의 뜻을 예언하듯,
- 공의회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살인이 인류의 대속 사건을 일으키듯,
- 우리는 전혀 알지 못한채 하나님의 도구로 이용당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보이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 그리고 우리를 그 기적으로부터 배제될 수 있다는 것이다.
- 이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영광을 아무도 모르게 보이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는 당사자조차도 모르게 말이다.
이게 진짜 무서운 일이다.
- 하나님의 이러한 방식 때문에, 바리새인은 '직장' 잃지 않으려는 최선의 노력 때문에 하나님을 죽이는 역사에 기록될 죄를 저지른 것이다.
바리새인은 나름 소신을 가지고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는 선량한 사람이었다.
- 이들의 소신이 얼마나 바른 것이었으며, 그것을 위해 얼마나 최선을 다했는지, 이 당시 바리새인의 평판은 최고였다.
- 그런 사람이 선의로, 합리적인 판단으로 한 것이 하나님을 죽이는 일이었던 것이다.
이게 무서운 이유는, 똑같은 일을 지금 우리도 얼마든지 저지를 수 있다는 것 때문이다.
- 내가 직장에서, 가정에서, 교회에서 했던 합리적, 이성적 판단으로 인해, 나도 모르게 인류 전체에 최악의 비극을 선사할 수도 있다. 그 결과로 지옥에 빨려 들어가고 있을 수도 있다.
- 하나님을 위해 산다고 맹세하며, 실제로 그렇게 산 바리새인도 하나님을 죽였는데, 우리 밖에 모르고 우리만을 위해 사는 우리는 얼마나 더 많이 하나님을 죽였겠는가!
- 우리 삶 속에 우리도 모르는 기적이 얼마나 많이 일어나고 있겠는가!
- 우리가 그 기적의 주인공임과 동시에 그 기적에서 배제되는 일이 얼마나 많겠는가!
그러니, 정신 똑바로 차리고, 내가 지금 하나님을 죽이고 있는지 아닌지 잘 생각해서, 앞으로 절대 하나님을 죽이지 말아야 한다! 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 정말 강조해서 말하지만, 우리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다.
-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스스로의 힘으로 알 수 있는 능력이 없다.
- 우리는 하나님의 어처구니 없는 이 방식에 속절없이 당할 수 밖에 없다.
-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최악의 가해자로 만드실 만반의 준비가 되어 계시다.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것은, '이미'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우리는 하나님을 죽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 바리새인이 자신의 양심에 따라 최선을 다해 합리적인 판단을 했을 때, 하나님을 죽였다.
- 마찬가지로, 만약 우리가 양심에 따라 합리적으로 살고 있다면, 우리도 이미 하나님을 죽였을 것이다.
- 내 인생의 주인이 '나'라는 생각을 한 번이라도 했다면, 내 인생을 '나'를 위해 한 번이라도 사용했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죽인 것이다.
- 만약 내가 바리새인처럼 내 인생을 '나'를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았다면, 우리는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최선을 다해, 잔혹하게 난도질하여 하나님을 죽인 것이다.
- 단순히 상징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을 죽인 것과 같은 삶'을 살았다는 것이 아니라, 바리새인처럼 '실제로 하나님을 죽였다'는 뜻이다.
- 우리가 현재의 삶에서 예수님을 또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기회는 있다.
- 바리새인의 문제는 예수님을 죽인 것이 아니었다.
-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께 회개하지 않고 믿지 않은 것이다.
- 만약 바리새인 중에 자신의 끔찍한 살인을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었다면, 구원에 이르렀다.
바울이 그런 사람이다.
-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자신이 하나님을 박해하고 죽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 그런 후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았다. 그 이후는 말할 필요도 없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믿음'이다.
- 그리고 그 '믿음'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죄 인식'이 있어야 한다.
- 왜냐하면,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나의 죄 인식으로 인한 자신에 대한 불신, 실망, 혐오에서 오기 때문이다.
- 그리고 자신에 대한 불신, 실망, 혐오는 자신의 죄에 대한 정확한 인식에서 온다.
- 마지막으로 성경이 말하는 정확한 죄 인식은 창조주 하나님을 피조물인 내가 죽였다는 것이다.
- 상상도 할 수 없는 죄를 전혀 알지도 못한채 범했다는 것을 알 때, 나에 대한 불신, 실망, 혐오가 생긴다.
그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나를 믿고 살래야 살 수 없게 된다.
- 그래야 '어쩔 수 없이' 그리고 '자발적으로' 예수님을 믿을 수 있게 된다.
- 사람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니면 절대로 자발적인 믿음을 가질 수 없다.
- 그래야 예수님을 믿지 않고는 살 수 없게 된다.
혹시나 해서 말하지만, 이런 믿음 아니면 전부 다 가짜다.
- 믿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꼭 기억하길 바란다.
- 그래서 믿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위조하기 쉬운 것인지 꼭 알기 바란다.
- 우리에게도 바리새인과 같은 위조된 믿음이 얼마나 많은지 기억하자.
- '믿음' 말고는 아무 것도 없다는 믿음만이 '믿음'이다.
- 내가 바리새인처럼 하나님을 죽였다는 믿음 속에서만 '믿음'이 생긴다는 것을 기억하자.
- 이것 까먹으면, 어느덧 위조된 '믿음'으로 바리새인처럼 신앙 생활하고 있는 척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로서 예수님이 죽임 당하실 모든 조건은 채워졌다.
- 공의회 의결까지 했으니, 예수님이 죽는 것은 시간 문제다.
- 실제로 이 때는 유월절 일주일 전, 즉 예수님이 죽으시기 대략 일주일 전쯤이다.(55)
- 보통 유월절 일주일 전에 예루살렘에 올라와 몸을 성결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제 예수님은 본격적으로 죽음을 준비하신다.
54-57절: 유월절에 예수님을 잡을 계획을 세운 대제사장과 바리새인
이 때를 끝으로 예수님은 일체의 모든 접촉을 끊으신다.
- 18장에서 체포되시기 전까지 제자들과만 교제하신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20km 떨어진 에브라임에 잠시 머무신다.
- 이 곳은 예루살렘에 마지막 유월절을 지내기 전에 제자들과 조용히 머물기 좋은 곳으로 보인다.
- 왜냐하면 예루살렘과 반나절 거리로 가깝고, 광야라서 인적도 드물기 때문이다.
이제 마지막 유월절이 다가온다.(55)
- 예수님이 죽으시는 날이다.
- 긴장감이 고조된다.
유월절 일주일 전이라 명절을 준비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다.(55)
- 그들의 대화 주제는 단연 예수님이었다.(56)
- 공의회에서 예수님에 대한 사형이 결정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 호감이든 비호감이든 영향력이 최고조에 오른 예수님의 사형은 초미의 관심사였을 것이다.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명절을 지내러 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56)
- "그가 명절을 지키러 오지 않겠습니까?"의 문법이 부정 대답을 염두한 표현이다.
- 즉, "그가 오지 않겠죠?"가 정확한 번역이다.
- 예루살렘에 오면 잡혀 죽을 것이 뻔한데, 예수님의 능력이 아무리 크더라도 일단 몸을 숨길 것이라고 대중은 생각했다.
- 하지만 알다시피, 예수님은 무모하게 예루살렘으로 돌진하셔서 장렬히 전사하신다.
이러한 사람들의 생각이 얼마나 합당했는지 바로 다음 절에서 근거를 제시한다.(57)
- 실제로 공의회 사람들은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예수님을 잡을 계획을 세운다.
따라서 이제 예수님이 잡히는 것은 시간 문제다.
- 하지만 아이러니하게, 그 시간을 결정하는 열쇠는 예수님이 쥐고 계신다.
- 예수님이 어떻게 그 시간을 스스로 결정하시는지 관심을 갖고 이후의 본문을 보자.
주제
하나님은 창세부터, 예수님 당시에도, 지금도 여전히 쉬지 않고 반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 보이신다.
- 계속해서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주, 유일한 통치자, 전능자이심을 우리에게 알리신다.
- 그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와 관계 맺고 교제하기 위해 오늘도 우리에게 다가오신다.
- 그리고 그 사랑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부활을 통해 누구도 부정할 수 없게 분명히 드러났다.
우리는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셔서 우리의 사랑을 받기 합당하신 하나님을 마땅히 사랑하면 된다.
- 그것이 사랑 받은 자의 합당한 반응이다.
- 그것이 피조물을 사랑하는 창조주에 반응할 수 있는 피조물의 유일한 반응이다.
- 하나님께 감사하고 사랑하는 것은 너무 당연해서 이유를 설명할 필요조차 없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긴 커녕, 관심도 없다는 것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 그 이유를 본문은 마르다와 대제사장을 통해 알려준다.
마르다는 인류 역사에 기록될 기적 사건을 눈 앞에 두고 있는 사람이다.
- 단순히 제 3자로 지켜보는 관중이 아니라, 기적의 직접적인 수혜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기적을 저지하는 방해꾼 역할만 한다.
- 무덤 문을 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은근히 조롱한다.
이것이 우리 사람이 처해있는 현실이다.
- 기적을 눈 앞에 두고도,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현장에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방해꾼 역할만 할 뿐, 하나님의 뜻을 전혀 알지 못한다.
- 이는 단순히 마르다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 전체의 문제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현재에 살고 있지만,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살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도 마르다와 똑같다.
- 하나님을 사랑하는 척 하지만, 정작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눈 앞에서 기적이 일어나고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다.
- 그러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그래서 결국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것이다.
- 그러니까 하나님께 관심조차 가질 수 없는 것이다.
- 우리 주변에서 아무리 큰 기적이 일어나도, 우리는 묵묵히 우리 갈 길만 가는 것이다.
- 마치 포탄과 총알이 오가는 전쟁터 한복판에, 나 홀로 헤드폰 끼고 내 갈길 가는 사람처럼 말이다. 죽음을 눈 앞에 두고도 태평하게 음악 감상만 하는 어리석은 사람처럼 말이다.
대제사장도 똑같다.
- 자신의 말이, 자신의 의도와 전혀 상관 없이, 인류의 구원을 예고하는 예언이 된다.
- 그 말을 통해 많은 사람이 구원을 받았다.
- 그러면서 그 구원에 자신은 배제된다.
- 오히려 그 구원의 주이신 예수님을 죽이는 주범이 된다.
이러한 비극이 또 어디있겠는가!
- 마치 천국 입장권을 열심히 나눠줘놓고, 자신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처지와 같다.
- 평생을 대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을 위해 살았는데, 하나님을 죽인 주범이라니,,
하지만 이 비극이 지금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 이렇게 열심히 설교도 준비하고 교회 위해 애쓰는데, 정작 나만 구원 못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 내 설교를 듣고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이 다 구원 받는 기적이 일어났는데, 그 설교를 한 나만 구원 받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이다.
- 기적에 참여했지만 기적에서 배제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 설교 그만 둬야 할까? 직장 그만 둬야 할까? 육아 그만 둬야 할까?
- 하던 일 전부 다 포기하고 기도, 말씀, 예배만 해야 할까?
해라!
- 그런 마음이 조금이라도 든다면, 과감히 뛰어 들어라!
- 분명히 그러한 도약이 신앙 생활에 도움이 될 것이다.
못하겠다면, 그런 객기조차 없는 우리 스스로에 대해 비통해하라!
- 예수님은 생명 전체를 주셨는데, 내 인생 일부조차 포기하지 못하는 스스로를 정죄하라!
- 참 믿음은 삶 속에서 믿는 것이라는 핑게로 설교, 직장, 육아를 유지하고 있는 자기 기만을 인정하자.
그리고 정죄에서 멈추지 말고, 기도하자! 자신을 위해.
- 그런 도약을 할 수 있도록.
- 다 포기하고 예수님만 믿을 수 있도록.
바울이 그랬듯, 대제사장도 그 이후에 예수님 믿었으면, 구원 받았을 것이다.
-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내 인생이 아니다.
- 내 일, 내 직장, 내 자녀가 아니다.
- 예수님을 믿는 믿음 뿐이다.
기적의 현장 속에서 기적에서 배제되었다 하더라도, 믿음은 단번에 우리를 과거의 기적 속으로 소환한다.
- 2000년을 거슬러 예수님의 죽음 부활을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 안에서 경험하게 한다.
신앙에서 시간은 무의미하다.
- 우리가 어떤 잘못을 했건, 믿음으로 단번에 2000년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 이것이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이다.
- 시간을 초월하시는 분의 능력이다.
결론
우리는 모두 기적을 바란다.
그런데 본문은 우리에게 기적이 일어나도 우리가 기적을 알아차리지 못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기적을 알아차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믿음'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말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 우리에게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느끼는 이유는, 정말 기적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 우리에게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느끼는 것은 착각이다.
- 진짜 이유는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 기적이 일어나도 기적에서 배제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적이 아니라 '믿음'이다.
기적은 우리에게 정말 중요하지 않다.
- 기적이 우리 신앙에 무용하기 때문이 아니다. 유용하다.
- 기적 없이 우리는 신앙 생활 할 수 없다.
-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 기적을 일으키셨기 때문에 우리는 구원받는다.
- 그런데 그 기적도, 우리의 믿음 없음으로 인해 무용해진다.
- 그래서 기적은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 이제 기적 기다리며, 막연히 먼 미래에 있을 부활 꿈꾸지 말고, 지금 믿자!
- 믿음은 논리적 인과 관계로 깨닫는 것이 아니라, 도약이다.
- 낭떠러지에서 몸을 던지는 것이다.
- 그냥 눈 딱 감고 해보는 것이다.
그렇게 믿을 때에만, 기적이 보일 것이다.
- 그러면 평온했던 일상이 온통 기적으로 도배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나도 어떻게 '믿음'을 가질 수 있는지 모르지만, 그래도 믿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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