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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요한복음(35) 12:20-36 그 때가 왔다.(The time has come.)

내용 정리

20-26절: 예수님의 무능 사역 시작 -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

지난 본문에서 예수님의 인기는 절정이었다.

- 모든 사람이 예수님께 환호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않으셨다.

- 구질구질한 어린 나귀를 타시며, 기대에 찬물을 끼얹으셨다.

- 찬물 끼얹기는 예수님의 주특기다.

이러한 모습은 예수님의 당하실 죽음(=영광)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 오직 죽음을 통해서만 예수님이 영광 받으실 수 있기 때문이다.

- 즉,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일환으로 예수님은 '유능' 사역을 멈추시고 '무능' 사역을 시작하신다.

- 대표적으로 제자들의 발을 닦아 주시는 사역이 그런 것이다.

- 그러면서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가르침을 통해서도 예고하신다.

그런데 이러한 '무능' 사역으로의 전환을 알리는 신호탄이 바로 20절의 그리스 사람이다.

- 그리스 사람의 면담 요청에 대한 응답으로, 예수님은 "그 때가 왔다.(The time has come.)"이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이전에도 예수님은 '그 때'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모두 미래였다.

[요 2:4] 예수께서는 어머니를 보시고 "어머니, 그것이 저에게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러십니까? 아직 제 때(the time)가 오지 않았습니다." 하고 말씀하셨다. 

[요 7:30] 그러자 그들은 예수를 잡고 싶었으나 그에게 손을 대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예수의 때(the time)가 아직 이르지 않았던 것이다.

[요 8:20] 이것은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헌금궤가 있는 곳에서 하신 말씀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잡지 않았다. 때(the time)가 오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처음으로 '그 때'가 현재이며, 특히 현재성을 더욱 강조한 현재 완료이다.

그러면 왜 굳이 그리스 사람을 이용해서 '그 때'의 시작을 알리느냐?

- 그리스 사람들은 21절에서 예수님을 뵙고 싶다는 말을 끝으로 완전히 사라진다.

- 예수님은 이들의 질문에 답변도 하지 않으신다.

- 맥락에서 아무런 존재감도 없다.

- 이들의 등장은 굉장히 불실요하다.

- 하지만 이렇게 불필요해 보이는 사건일수록 그 이면에 더 중요한 의미가 숨겨져 있을 수 있다.

본문에 명시적으로 나오지 않아 분명하지 않지만, 이렇게 추측할 수 있다.

- 이제 드디어 예수님의 이름과 능력이 예루살렘을 넘고, 이스라엘을 넘어, 이방인에게 도달했다는 것이다.

- 이는 예수님이 이제 더 이상 유능한 능력으로 자신을 알릴 필요가 없을 만큼 유명해졌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 무능 사역을 시작해야할 시점이다.

- 또한 복음의 울타리 안에 유대인 뿐만 아니라 이방인까지 들어옴으로써, 예수님이 온 인류의 메시야로서 확증되었음을 뜻하기도 한다.

- 로마서에서도 이방 사람이 복음을 믿도록 하는 것이 온 인류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한 하나님의 필수 전략이었다.

- 그와 동일한 전략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요한복음에서는 이렇게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 사람의 등장을 신호로 유능 사역을 통한 외연 확장을 그만 두시고, 무능 사역을 통해 본질에 집중하시는 것이다.

그리스 사람은 빌립에게 예수님을 뵙고 싶다는 요청을 하고, 빌립은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빌립과 안드레는 예수님께 그 말을 전한다.(21, 22)

- 왜 그리스 사람들이 빌립에게 갔는지, 빌립은 왜 안드레에게 갔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가 없다.

- 빌립이라는 이름이 그리스식 이름이라서 그리스 사람에게 낮익었기 때문이라는 추측까지 하지만, 별다른 메시지를 찾을 수가 없다.

- 어쨋든 제자를 통해 예수님은 그리스 사람의 요청을 듣는다.

예수님은 그 요청을 신호로, 그 때가 왔음을 선포하신다.(23)

- 그 때는 영광을 받을 때인데, 그 받을 영광이 무엇인지 설명하는 것이 24-26절이다.

24-26절은 두 가지 관점에서 봐야 한다. ①예수님의 관점과 ②사람의 관점이다.

- 관점에 따라, 씨, 열매, 영광의 의미가 달라진다.

① 예수님의 관점에서

<씨>는 예수님이고, <열매>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다.(24)

- 따라서 씨이신 예수님이 죽어야, 예수님이 메시야임이 확증되는 영광을 받게 된다.

- 그리고 그 영광을 보고 열매인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비로소 나타나게 된다.

만약 예수님이 자기 목숨을 사랑해서 죽지 않으면, 예수님이 메시야임이 확증될 수 없고, 예수님은 모든 것을 잃어버릴 것이다.(25)

- 반면에 예수님이 자기 목숨을 미워해서 죽으면, 예수님이 메시야임이 확증되고, 예수님은 영원토록 메시야로서 살아가실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렇게 죽어서 메시야이심이 확증되는 것이 예수님이 받게 될 <영광>이다.

② 사람의 관점에서

<씨>는 사람이고, <열매>는 영생이다.<24>

- 따라서 씨인 사람이 예수님을 따라 예수님과 함께 죽어야, 사람의 믿음이 확증되고, 열매로서 영생을 얻게 된다.

만약 사람이 자기 목숨을 사랑해서 죽지 않으면, 믿음이 확증될 수 없고, 영생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죽음에 이르게 될 것이다.

- 반면에 목숨을 미워해서 죽으면, 영생을 얻게 된다.

게다가 예수님을 섬기려면, 즉 예수님의 종이 되려면, 예수님을 따라가야하는데,(26)

- 그 도착지는 십자가 죽음이다. 즉 죽어야 한다는 뜻이다.

- 따라서 예수님과 함께 죽어야, 예수님과 함께 영생하며 모든 것을 얻는다.

그런데 그 얻는 모든 것이 뭐냐면?

- 하나님 아버지께서 높여주시는 것, 즉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영광>이다.(26)

이렇게 23절에 예수님이 받으실 <영광>으로 시작하여, 26절에 사람이 받을 <영광>으로 끝난다.

- 예수님께서 죽음으로 영광을 받으시듯, 사람도 예수님과 함께 죽음으로 영광을 받는다.

정리하면, <영광>이란?

- 예수님이 죽어서, 그리스도라는 것이 확증되는 것이며,

- 사람이 예수님을 섬김으로(높임으로) 예수님과 함께 죽어서, 하나님으로부터 높임 받는(영광 받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예수님과 사람이 영광 받는 때가 바로 '이 때'이다.

- 그 '이 때'가 딱 지금을 시점으로 시작되었으며, 오늘 이 시간까지 지속되고 있는 중이다.

- '이 때'는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종말이 되어야 끝이 난다.

- 왜냐하면 그 때가 되어야, 예수님이 죽어서 열매를 맺을 필요가 없고, 사람도 죽어서 영생을 얻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 다른 말로 하면, 종말이 되기 전까지, 예수님은 계속 죽으셔서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반복해서 확인시켜 주실 것이고, 사람도 계속 죽어서 반복해서 믿음을 확증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때'가 진행 중에 있는 현재에도 반드시 예수님과 사람이 영광 받는 것을 볼 것이다.

- 즉, 실제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이 증명되고, 하나님에 의해 높여지는 그리스도인을 많은 사람들이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예수님과 그리스도인의 죽음도 계속해서 보게 될 것이다.

- 예수님이 모욕 당하고, 무시 당하고, 얻어 터지고, 아무도 믿지 않는 일은 계속 일어날 것이다.

- 또한 그리스도인도 바보 취급 당하고, 인정 못받고, 사회적, 경제적, 윤리적, 종교적으로 무시당하는 일도 계속 일어날 것이다.

이런 것이 정말 죽음이다.

- 육제의 죽음은 오히려 사회적, 경제적, 윤리적, 종교적 죽음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준다.

- 그렇기 때문에 가장 쉬운 죽음이다.

- 육체적 죽음은 십자가 죽음을 회피하는 최고의 방법이다.

- 그렇기 때문에 본문에서 말하는 죽음은 육체의 죽음이 아니다.

오히려 죽지 않고 살아서, 사회적, 경제적, 윤리적, 종교적 죽음을 계속해서 당하는 것이 본문에서 말하는 죽음이다.

- 굳이 말하면, 고문 같은 것이다. 죽이지는 않고 계속해서 죽음을 맛보게 한다는 점에서.

- 더 무섭게 말하면, 하나님은 잔혹한 고문관이다. 우리를 계속 고문해서 예수님만 믿겠다는 자백을 받아내시는 것이다.

- 차이는, 실제 고문관은 자신에게 유익한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고문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믿음을 자백하여 영생을 얻게 하시려고 고문하시는 것이다.

27-33절: 예수님의 기도와 하나님의 응답 -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드러내십시오.

이런 것이 신앙 생활이기 때문에, 예수님도 괴로워하시는 것이다.(27)

- 예수님도 고문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하신 것이다.

- 예수님처럼 고문에서 벗어나게 해달라는 탄식이 나와야 바른 신앙 생활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괴로움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인생이 바른 신앙 생활이라는 것을 알고 인정하는 것이 또한 신앙 생활이다.(27)

-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도 고문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 예수님은 '열두 군단 이상의 천사들'을 불러서 죽음을 피하실 수도 있었다.(마26:53)

- 그리고 자살로도 죽음을 피하실 수 있었다.

- 그러나 예수님은 괴로운 신앙 생활을 계속해서 이어가셨다.

왜냐? 그 방법만이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28)

- 능력으로 혹은 자살로 괴로운 신앙 생활을 피하는 것은 자신 스스로에게 영광은 되지만,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 그래야만 결국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 아무도 고문 당하기를 즐기지 않는다. 어떻게든 피하거나 극복하려 한다. 인지상정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교회는 다니지만 영생을 얻지 못한다.

- 왜냐하면 이들이 신앙 생활을 한 근원적인 목적이 자기 자신의 영광이기 때문이다.

-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자신의 영광이 훼손되는 상황을 견디지 못한다. 하나님의 고문을 참지 못한다.

- 그래서 하나님의 고문을 피하거나 극복하여 예수님을 부정한다.

반면에 믿는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고문을 참는다.

- 참을만 하기 때문에 참는 것이 아니다. 고문의 목적이 참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참을만 한 것은 고문이 아니다.

- 자신이 고문을 당하는 것만이 하나님께 영광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 하나님께서 받으실 영광을 바라며 참는 것이다.

- 그리고 그런 사람만이 하나님께 영광을 받는다.

그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직접 소리로 응답하셨다.(28)

-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드러내 달라'는 기도에 "내가 이미 (내 이름을) 영광되게 하였고, 또 앞으로도 영광되게 하겠다."라고 응답하신다.

- 정말 즉각적인 응답이다.

여기서 다룰 것은, 하나님께서 영광되게 하실 시점이 과거와 미래로 구분되었다는 것이다.

- 과거는 당연히 지나간 영광이고, 미래는 앞으로 올 영광이다.

- 무엇이 지나갔고, 무엇이 올 것인가?

지나간 영광은, 예수님께서 '유능' 사역으로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한 것이다.

- 예수님은 수많은 기적을 통해서, 특히 죽은 나사로를 살리심으로 하나님이 영광되도록 하셨다.

[요 11:4]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병이다.

- 그런데 이렇게 드러난 영광은 이제 과거의 일이다. 지나간 영광이다.

따라서 새로운 방식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한다. 그것이 '무능' 사역을 통한 영광이다.

- 이제부터 예수님은 자신의 능력을 부정하고 감추는 방향으로 사역하신다

- 대표적인 예로, 제자들의 발을 씻는 것과 십자가 죽음이다.

이렇게 하나님도 소리를 통해 새로운 사역의 문을 여신 것이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하나님의 소리를 들었던 것 같다.(29)

- 단순히 천둥 소리로 들은 사람도 있었지만, 천사의 '말'로 들은 사람도 있었다.

- 그러니까 성경에 기록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바르게 이해하지 못했다.(29)

- 이는 기적이 일어나는 순간에도 여전히 기적에서 배제된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드러낸다.

- '인간의 역사'에서는 한낱 천둥이었지만, '하나님의 역사'에서는 말씀이었다.

예수님은 그 소리의 의미를 '하나님의 역사'의 관점에서 설명해주신다.(30)

결론부터 말하면, 그 소리는 너희에게 예수님 죽음의 의미를 알려주기 위한 것이다.(30, 33)

- '인간의 역사'에서 일어난 한 남자의 죽음이 '하나님의 역사'에서는 온 세상의 변혁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죽음의 의미를 세 가지로 말씀해주신다.

① 세상에 대한 심판(31)

예수님 죽음의 가장 원론적인 의미는 <심판>이다.

- 여기서 <심판>의 의미는 벌을 준다는 것보다는 참 신앙과 거짓 신앙을 구분한다는 것이다.

[요 15:22] 내가 와서 그들에게 일러주지 않았던들 그들에게는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이 자기 죄를 변명할 길이 없게 되었다.

어떻게 예수님의 등장이 그러한 구분을 하냐?

- 거짓 신앙을 가진 사람은 예수님을 보고 적개심을 느끼고, 결국 신앙의 이름으로 예수님을 죽인다.

- 반면에 참 신앙을 가진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며, 결국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평생 믿는다.

 예를 들어,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다면, 바리새인과 바울 사이를 구분할 수 없었을 것이다.

- 하지만 예수님 때문에 바울은 바리새인과 확연히 구분되었다.

이렇게 예수님의 죽음은 의인과 죄인이 뒤섞여서 구분할 수 없는 세상을 의인과 죄인이 확연히 구분되도록 한 것이다.

- 그 결과 의인은 예수님께 이끌림을 받고, 죄인은 예수님에 의해 추방을 당한다.

② 세상의 통치자 추방(31)

추방당한 죄인들의 우두머리는 세상의 통치자이다.

- 세상 통치자는 모든 죄인들을 통제하여, 자신을 <주>로 삼아 자신만을 위해 살도록 한다.

- 그래서 예수님이 참 <주>라는 것을 잊어버리게 만들고, 나의 삶을 방해하는 예수님을 죽이도록 만든다.

로마서에서는 세상의 통치자를 비유적으로 '죽음'과 '아담'으로 설명했다.

[롬 5:17] 아담 한 사람의 범죄 때문에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죽음이 왕노릇 하게 되었다면,

- '아담'은 모든 죄인의 근원을 상징하는 존재로서, '죽음'이라는 미끼로 죄인들을 통제한다.

- 따라서 죄인의 인생은 본질적으로 죽음의 두려움으로만 가득 차있다.

- 기쁨, 행복, 만족 등 모든 것은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하거나 회피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죽음과 부활로서, 죽음이 왕노릇 하지 못하게 만드신 것이다.

- 예수님은 죽음과 부활로 '죽음'을 죽인 것이다.

- '죽음'을 무력화시켜서, 더 이상 세상 통치자가 사람들을 통제할 수 없도록 한 것이다.

- 그래서 예수님을 믿어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 사람은 세상 통치자로부터 벗어나 예수님께 헌신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예수님은 세상 통치자를 추방하신 것이다.

[창 3:15] 여자의 자손은 너[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고

- 예수님이 뱀, 즉 악의 근원인 세상 통치자를 공격하신다는 말씀이 창세기부터 나온다.

[막 3:27] 또 누가 힘센 사람의 집에 들어가서 그 세간을 털어가려면 그는 먼저 그 힘센 사람을 묶어놓아야 하지 않겠느냐? 그래야 그 집을 털 수 있을 것이다.

- 다른 복음서에서도 예수님은 '그 집의 힘센 사람', 즉 세상의 통치자를 먼저 공격하신다는 말씀이 있다.

- 이는 시간적인 선후 관계가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통치자 먼저, 세상의 피지배자 나중이 아니다.

- 완결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세상 통치자를 비롯하여 세상의 피지배자인 죄인들까지 모조리 다 추방시킨다는 의미이다.

그와 함께 의인에 대해서도 처방하신다.

③ 믿는 사람을 이끔(32)

예수님은 <땅에서 들려서 올라가실 때>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어 오신다>고 한다.

<올라가실 때>는 여러가지 의미가 있다.

-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올라가 매달리실 때

- 예수님께서 죽음 부활 이후 승천하실 때

-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왕의 보좌에 올라가실 때

시점은 모두 다르지만, 의미는 모두 동일하게, 예수님이 그리스도심이 확증될 때이다.

그 때 예수님은 사람들을 <내게로 이끌어 오신다>.

- 이는 곧 관계이다.

- 예수님과 사람이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 상하 관계도, 수평 관계도 아닌,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대상은 누구냐? <모든 사람>이라고 말한다.

- 물론 믿던지 믿지 않든지 상관 없이 모든 사람은 아니다.

- 믿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끌어 당겨도 오지 않는다.

- 따라서 당연히 믿는 사람이다.

그러면 왜 '모든' 사람이라고 표현했을까?

두 가지로 추측해 볼 수 있다.

① 모든 사람을 구원하고자 하는 예수님의 의지에 대한 표현이다.

[딤전 2:4]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얻고 진리를 알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다 사랑하고 구원하길 원하셨다.

② 그런데 특히 이번 본문의 그리스 사람을 특정한 것일 수 있다.

- 이방인의 구원은 없다고 단정지어진 현실에서, 그러나 하나님의 전체 구원 계획 속에 이방인의 구원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하는 상황에서, 그리스 사람을 비롯하여 전체 이방인을 염두한 것이다.

- 예수님께서 유대인 뿐만 아니라 이방인까지 구원하고자 계획하셨다는 것은 구약과 신약에 모두 두루 나온다.

- 그렇기 때문에 구원 대상에 이방인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

이렇게 예수님의 죽음은 심판, 추방, 이끔의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밝히신다.

- 이것이 '인간의 역사' 속에 재설계된 '하나님의 역사'이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대중에게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를 가르치시는 마지막 말씀이다.

34-36절: 사람들의 무지와 그 때의 임박함 - 인자가 누구입니까?

이 중요한 가르침에도 사람들은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한다.

이들은 질문을 하지만, 오히려 그 질문이 사람들의 무지를 더욱 드러낼 뿐이다.

이들의 질문은 나름 논리정연하다.

- 대전제: 그리스도, 곧 인자는 영원히 살아 계시다.

- 소전제: 그런데 당신은 인자가 들려서 떠난다고 말한다.

- 결론: 따라서 당신이 말하는 인자는 이상하다. 당신이 말하는 인자가 누구인가?

요한복음을 이어서 보고 있는 우리로서는 이러한 사람들의 논리가 어리석고 답답해 보인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 당시 사람들 입장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질문이었을 것 같다.

- 예수님이 인자의 때가 왔다고 하면서, 어디로 갈 것처럼 이야기 하시기 때문이다.

- 하지만 사람들에게 인자가 떠난다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사실이었다.

- 그래서 능력있는 예수님의 말씀을 무시할 수도 없고, 그리스도가 어디론가 떠난다는 말을 받아들일 수도 없고, 사람들의 머리 속이 굉장히 복잡했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들이 생각하는 그리스도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인자가 다른 존재인가라는 의심까지 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인자가 누구냐는 질문을 한다.

그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대답하지 않으신다.(35)

- 왜냐하면 예수님 사역 3년 내내 하신 말씀이 인자가 누구인지에 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 더 이상의 가르침은 필요 없다고 생각하신 것이다.

- 사역을 5일 남겨둔 시점에서 스스로의 고민과 결단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결단을 촉구하신다.(35)

예수님의 말씀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 지금은 빛이 있지만, 잠시 후 빛은 사라지고 어둠이 올 것이다.

- 어둠 속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 빛이 있을 때 그 빛을 믿어서, 빛의 자녀가 되라! 는 내용이다.

한 마디로 하면,

- 빛은 잠시 후에 사라질 것이니, 빨리 빛의 자녀가 되라! 는 것이다.

- 이렇게 예수님은 예수님을 믿을 시간이 촉박하다는 것을 강조하신다.

그런데 이 구절이 전하는 몇 가지 메시지가 더 있다.

35절의 "빛이 있는 동안에 걸어다녀라."는 표현을 36절의 "빛이 있는 동안에 너희는 그 빛을 믿어서"라고 표현한다.

- 이로 보아, '걷는 것'은 '믿는 것'이다.

따라서 빛이신 예수님을 믿어야, 어둠이 와도 이길 수 있다는 뜻이다.

- 여기서 어둠은 세상 통치자이다.

- 즉 예수님을 믿어야, 세상 통치자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다는 뜻이다.

반대로 어둠 속에 다니는 사람, 즉 예수님을 믿지 않고 세상 통치자의 영향을 받는 사람의 특징은 '모름'이다.

- 이는 아마도 여전히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고 '인자가 누구냐'는 질문을 한 사람들을 염두한 것 같다.

- 즉, 예수님께 '인자가 누구냐'는 질문을 하는 것은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조차 모르는 어둠 속을 다니는 사람이라는 것을 반증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속히 예수님을 바로 알라!고 예수님은 촉구하신다.


주제

① 예수님이 죽어야 하는 이유

결론부터 말해서, 하나님만 영광스럽게 드러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28)

풀어서 말하면, 현 시점은 '유능 사역'으로 모든 영광을 예수님이 독차지하고 있는 상황이다.

- 예수님이 살아 계시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 돌아가야 할 영광을 막고 있다.

- 예수님이 빨리 사라져야, 모든 영광이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다.

- 게다가 멋있게 죽어도 안된다. 사람은 멋있는 죽음에도 영광을 돌리니까.

- 그래서 추하게 죽어야 한다. 한 사람도 거들떠 보지 않도록.

예를 들어, 쑈미더머니 우승자가 우승 소감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 내가 했던 랩은 다 립씽크였다. 모두 '도끼'가 만들고 부른 것이다.

- 이렇게 모든 영광을 '도끼'에게 돌리며, 자신은 완전히 사라진 것과 같다.

- 게다가 알고 봤더니, 이 모든 것이 '도끼'의 음악성을 세상에 알리려는 자작극이었던 것이다.

만약 이 우승자가 자기만을 사랑했다면, 이렇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

- 정말 '도끼'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자기를 사랑하지 않고 미워해야만, 그리고 하나님을 정말로 사랑해야만 죽을 수 있다.(25)

- 그래야 자신은 조롱과 저주만 남겨진 죽음으로 사라지고, 하나님만 영광스럽게 드러나도록 할 수 있다.

이것이 예수님이 비참하게 죽어야만 하는 이유다.

② 예수님 따라 우리도 죽어야 하는 이유

예수님의 인생은 인류의 구원을 위한 희생양으로서의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다.

- 예수님의 인생은 모든 인류가 따라야 할 모범 인간의 인생이다.

예수님의 인생은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드러내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유일한 교과서이다.

- 예수님처럼 살 때에만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

물론 어떤 사람도 예수님처럼 살 수 없다.

- 반면에 예수님처럼 산 바울같은 사람도 있다.

정리해서 말하면, 

- 예수님의 인생은 모든 인류가 지향해야 할, 그러나 '스스로는' 이룰 수 없는 완전히 이상적인 목표이다.

- 동시에,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해야할, 그리고 '성령의 능력으로' 능히 이룰 수 있는 목표이기도 하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나를 따라오라!'고 말씀하신다.

- 즉, 예수님이 죽은 것과 같이 죽으라고 말씀하신다.

- 우리 '스스로가' 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능히 할 수 있으니까.

-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그래야 하니까.

결과적으로 보면,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은 예수님처럼 살다가 죽게 될 것이다.

- 반대로, 예수님처럼 살다가 죽은 사람이 아니라면, 예수님을 바르게 믿은 것이 아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믿는다면, 비참하게 죽을 것이다. 조롱과 저주를 받으며. 아무런 영광 없이.

- 그것만이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드러내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지금 시점에서 생각하면, 과연 내가 그럴 수 있을까 의심이 든다. 

- 하지만 두고 보자. 나의 죄성이 센가, 성령의 능력이 센가.

- 나는 죄성보다 성령의 능력이 더 세다는 것을 믿는다.

하나님은 나를 예수님처럼 비참하게 죽이실 것을 믿는다.

③ 죽음의 의미 - 고문

죽음의 의미를 오해하기 너무 쉽다. 

- 왜냐하면 세상에는 '영광스러운 죽음'이 실제로 있기 때문이다.

- 죽음을 통해 죽은 사람의 명예가 더 높아지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 게다가 적어도 죽으면 더 이상의 고통은 없다.

-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 죽는 것을 이런 영광스럽고 명예로운 죽음으로 착각한다.

- 죽음을 고통의 끝으로 착각한다.

- 그래서 '나는 빨리 죽을거야.'라는 말을 신앙 고백의 일부인 것처럼 말한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죽음은 그런 것이 아니다. 오히려 고문에 비유될 수 있다.

- 죽음이 주는 고통은 느끼되, 죽음이 주는 명예는 제거한 것이다.

- 그래서 죽도록 고통스럽게 하지만, 죽지는 못하게 하는 고문과 비슷한 것이다.

- 영원토록 수치스럽게 만드는 것이다. 

- 실제로 십자가 형벌은 사형 방법이라기 보다는 고문 방법이었다.

-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벌거벗고 매달리셔서 수치를 당하셨다.

예수님은 이렇게 죽으신 것이고, 우리를 이러한 죽음으로 초청하신 것이다.

- 그래야 하나도 남김 없이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기 때문이다.

④ 이 때가 왔다는 의미

결국 무능의 때, 죽음의 때, 부활의 때, 영광의 때이다.

- 예수님은 자신의 능력을 다 보여주셨고,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아무도 부정할 수 없었다.

- 하물며 이방인들까지도 예수님의 능력을 알아보았다.

-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예수님은 자신에게 쏠린 영광을 하나님께 돌릴 시점이 온 것이다. 물론 그 방법은 죽음이다.

⑤ 그렇다면 지금은 어느 때인가?

이것이 정말 중요한데,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때'가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 지금도 예수님은 무능하게 죽으시고 계시고, 또 부활하고 계시며, 그리스도라는 것이 확증되며 영광을 받고 계신다는 뜻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지금도 동일하게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 빛이 있는 동안에 빨리 빛을 믿으라고!

이것이 성경의 오묘한 시간 관념이다.

- 본문의 이 시점부터, 오늘을 지나, 종말까지가 '이 때'라는 것이다.

- 다른 말로, 성경은 본문의 시점부터 종말까지를 짧은 순간으로 보고 있다는 뜻이다.

- 또 다른 말로, 성경은 예수님의 죽음, 부활, 승천 그리고 재림까지의 기간을 하나로 보고 있다.

- 그래서 성경에서 종말이 속히 올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 그래서 성경에서 예수님이 '회개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종말이 임박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때가 왔다.(The time has come.)"는 현재 완료 시제가 여전히 유효한 것이다.

- 즉,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2000년 전에 있었던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에 막 완료되어 지금도 생생하게 일어나고 있는 일인 것이다. 

- 그래서 지금도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 그래서 바울이 매일 죽는다고 말한 것이다. '그 때'가 매일매일 계속되기 때문이다.


결론

'그 때'를 살고 있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 우리가 '그 때'를 살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기쁜 소식이기도 하고 나쁜 소식이기도 하다.

나쁜 소식인 이유는,

- 이제 곧 '그 때'가 끝나, 빛이 사라지고 어둠이 오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 우리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 어둠이 오면,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기회 자체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좋은 소식인 이유는

- 아직 '그 때'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 아직 우리에게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뜻이다.

- 여전히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시기 위해 노력하시는 중이라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아직 기회가 있다는 소망과 이미 기회가 많이 사라졌다는 절망을 함께 가지고 살아야 한다.

- 소망만 가지고 있으면 방종하게 된다. 세속적이 된다.

- 절망만 가지고 있으면 포기하게 된다. 사이비 종말론자가 된다.

- 함께 가지고 있을 때에만, 다 포기하고 예수님께 나아갈 수 있는 힘이 생긴다.

막연히 잘 될거라는 소망 버리고, 이미 틀렸을 거라는 절망도 버리고, 또한 반드시 예수님 알게 될거란 소망 가지고, 하지만 그 기회가 얼마 없다는 절망 가지고 힘차게 신앙 생활하자!

- 우리가 넋놓고 기다리고 있는 '그 때'는 지금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