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죄를 짓는 이유는 무엇인가?
① 하나님 때문이다.
- 하나님이 잘못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 혹은 하나님이 바르게 창조하셨지만, 통치를 잘못 하셨기 때문이다.
② 사람 때문이다.
- 하나님은 바르게 창조하셔서 바르게 통치하셨지만, 그 모든 것을 사람이 거역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상기한 문장이 모두 틀렸다는 것이다.
- 왜냐하면, 죄가 사람 때문이라고 하면, 하나님의 전지전능함이 부정된다.
- 반대로 죄가 하나님 때문이라고 하면, 하나님은 죄에 대해 심판할 수 없게 된다.
- 그래서 죄의 원인을 양 편에 돌리는 것은 문제가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 사람이 죄를 짓는 이유는 사람이 하나님을 거역하기 때문이다. 즉 사람 때문이다.
- 동시에 사람이 죄를 짓는 이유는 하나님이 계획하셨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 때문이다.
- 죄의 원인을 사람과 하나님 양 편에 모두 돌린다.
그래서 성경을 읽으면 이 부분이 굉장히 헷갈린다.
- 어떤 부분에서는 사람이 하나님을 거역했서 사람 때문에 죄를 짓는다고 말한다.
- 반면에 어떤 부분에서는 사람은 절대로 하나님을 거역할 수 없기에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사람이 죄를 짓는다고 말한다.
- 특히 이번 본문은 이사야 예언을 인용하여 사람의 죄가 구약에서부터 예견된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말한다.(40)
- 또한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보다 사람의 영광을 더 사랑했기 때문에 죄를 지었다고 말한다.(43)
그렇기 때문에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죄의 원인이 하나님인지 사람인지 '성경을 근거로' 논쟁한다.
- 대표적으로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사이의 논쟁이다.
- 칼빈주의는 죄의 원인을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알미니안주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이 문제가 어려운 것이, 죄의 원인이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도,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도, 하나님과 사람 모두에게 있다고 말하는 것도, 하나님과 사람 모두 아니라고 말하는 것도 전부 오류가 있기 때문이다.
- 즉, 논리로는 죄의 원인을 설명할 수 없다. 비논리기 때문이다.
본문에서도 예수님은 불신앙의 원인을 하나님이라고 했다가 사람이라고도 하신다.
- 왜 이렇게 헷갈리게 말씀하시는지 의문이 든다.
- 하지만 큰 그림을 그리고나서 보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 최선임을 알게 된다.
하나의 우주의 역사가 하나님의 역사와 인간의 역사로 구분되어 흘러간다는 것을 알면, 죄의 원인도 하나님과 사람으로 구분하여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 그러한 큰 그림을 가지고 보면, 길을 잃지 않고 본문 말씀을 따라갈 수 있게 될 것이다.
내용 설명
37-41절: 불신앙의 이유 ① - 하나님의 역사 관점에서
그 때가 왔다.
- 이제 예수님은 죽으셔서 영광 받으실 때가 왔다.
-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어 열매를 많이 맺듯이, 예수님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영생을 얻게 될 때가 왔다.
- 유능 사역이 끝나고 무능 사역을 시작하실 때가 왔다.
- 예수님에 대해 다 알려주셔서, 더 이상 가르침을 주실 필요가 없는 때가 왔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다.
- 예수님께서 다 알려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알지 못했다.
- 더 이상 가르침을 받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알지 못했다.
- '인자가 누구입니까?'라며, 자신들의 무지를 드러낸다.
이러한 상태를 본문은 이렇게 진단한다.(37)
- 그들은 예수님의 많은 표징을 보고도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
- 예수님을 믿을 이유가 충분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
이는 굉장히 부자연스러운 상황이다.
- 이는 마치, "밥은 많이 먹었지만, 배는 부르지 않다."와 같다.
- 가르침을 충분히 받았으면, 알아야 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부자연스러운 상태가 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부자연스러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 밥을 많이 먹었지만 배가 부르지 않다면, '갑상선기능항진증'을 의심해봐야 한다. 이 병에 걸린 사람은 이유 없이 식욕이 급증하고, 많이 먹어도 살이 빠진다.
- 마찬가지로 충분한 기적을 보고 가르침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이유가 설명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38-43절이다.
크게 보아, 38-41절과 42-43절로 나눠진다.
① 38-41절은 '하나님의 역사'의 관점에서 설명한다.
- 부자연스러운 상태의 원인이 하나님 때문이라는 것이다.
- 주님께서 그들의 눈을 멀게 하셨기 때문이다.
- 눈이 멀었기 때문에 눈 앞에서 일어난 표징을 보고도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 그래서 예수님을 믿지 못한 것이다.
② 반면에 42-43절은 '인간의 역사'의 관점에서 설명한다.
- 원인이 사람 때문이라는 것이다.
-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보다 사람의 영광을 더 사랑했기 때문이다.
- 하나님의 영광을 눈 앞에서 봤지만, 사람의 영광만 쫓아갔기 때문이다.
- 그래서 예수님을 믿지 못한 것이다.
먼저 38-41절에서 본문은 이사야서를 인용한다. 53:1과 6:10이다.
- 이를 통해 사람들의 불신앙, 특히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는 유대 사람들의 불신앙은 구약에서부터 예견된 일이며, 하나님께서 일부러 의도하신 일이라는 것을 증거한다.
- 유대인의 불신앙이 이방인인 우리에게는 중요한 이슈가 아니지만, 유대인이 예수님을 믿을 때 반드시 납득되어야 할 문제였다.
- 만약 유대인의 불신앙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없게 되면, 유대인의 불신앙을 규정한 예수님의 말씀 역시 부정되기 때문이다.
- 따라서 유대인의 불신앙이 구약에서 예고되었다는 것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입증하는데 중요한 증거가 된다.
① 첫번째 인용문은 이사야 53:1이다.(38)
이는 이사야 예언자가 하나님께 고백하는 탄식이다.
- 구원자가 나타났음에도 믿지 않는 이스라엘 민족을 비판하는 것이다.
이사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믿지 않았고, 하나님의 팔, 즉 하나님의 기적이 이스라엘에게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았다.
- 이를, 예수님이 가르침을 주시고 표징을 일으키셨지만 사람들이 믿지 않는 상황과 동일시한 것이다.
본문은 이러한 상황을 이사야의 예언이 성취된 것으로 보았다.
- 이를 통해, 불신앙은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필연적'인 것임을 증거한다.
이는 곧 이러한 예언을 성취하신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증거한다.
② 두번째 인용문은 이사야 6:10이다.(40)
비슷한 인용문이 마가복음 4:12, 사도행전 28:26, 로마서 11:8에도 나온다.
[막 4:12] 그것은 '그들이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셔서, 그들이 돌아와서 용서를 받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 우리에게 익숙한 구절이다.
이전 인용문이 불신앙에 필연성을 강조했다면, 이번 인용문은 불신앙의 '의도성'을 강조한다.
- 하나님의 의도와는 상관 없이, 어쩔 수 없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일으키신 것이라는 뜻이다.
- 특히 본문은 이러한 불신앙을 일으킨 주체가 예수님이었다는 것을 이사야가 이미 알고 있었다고 전제한다.(41)
이는 불신앙의 원인이 예수님의 무능함(어쩔 수 없음) 때문이 아니라 유능함(의도성) 때문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 예수님께 불신앙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믿도록 하는 능력도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 만약 불신앙의 원인이 예수님의 무능한 때문이었다면, 예수님은 누구도 믿도록 만들 수 없었을 것이다.
이는 곧 예수님이 믿게 하시고 구원하실 수 있는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한다.
따라서 불신앙의 필연성과 의도성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진리를 강화하는 단서가 된다.
- 필연성을 통해서, 불신앙은 예수님이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신 그리스이심을 증거한다.
- 의도성을 통해서, 예수님은 유능하며, 믿음에 이르게 하실 수 있는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한다.
42-43절: 불신앙의 이유 ② - 사람의 역사 관점에서
이렇게 구약을 통해서조차 예수님이 증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영광보다 사람의 영광을 더 사랑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많았다.(43)
그런 사람은 특히 '지도자' 중에 많았다.(42)
- 그들은 다양한 증거를 통해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 하지만 믿음을 드러내지는 못했다.
- 왜냐하면 회당, 즉 유대인 공동체에서 쫓겨날까봐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 믿음 때문에 공동체에서 배척되는 두려움과 믿지 않음 때문에 하나님께 배척되는 두려움 중에 공동체를 더 두려워한 것이다.
이러한 경고가 무서운 이유는 경고의 대상이 불신자가 아닌 교회 안의 신자를 향하고 있다는 점이다.
- 본문은 분명히 '예수님을 믿는 사람'으로 타겟을 정하고 있다.
- 따라서 이 경고는 바로 '우리'를 향하고 있다.
-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다양한 증거 때문에 예수님을 믿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여전히 예수님 외에 다른 것을 두려워하고 사랑하는 우리에게 경고한다.
- 사람에게 인정 받고 사랑 받길 원하는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고 경고한다.
- 말씀 보고 기도하겠다는 하나님과의 약속은 소홀히 여기면서, 사람과의 약속은 중요하게 여기는 우리를 향한 경고이다.
- 말씀 기도의 외형만 지킬 뿐, 시간만 때우고 있는 나를 향한 경고이다.
- 설교 준비조차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하기보다, 사람들 눈치보며 비위 맞추려는 나를 향해 경고한다. 하나님만 사랑하라고!
우리의 이런 불신앙도 결국 구약에서 예고된 것이다.
- 우리의 불신앙으로 인해, 우리는 지금 예수님과의 관계가 점점 멀어지고 있다.
- 동시에 우리의 불신앙으로 인해, 예수님이 그리스도 되심은 점점 더 확증되고 있다.
- 즉, 우리가 믿지 않으면 믿지 않을수록, 우리 안에 믿어야 할 증거가 많아지는 꼴이다.
- 우리를 통해 예수님이 증거되지만, 그 증거의 수혜자에 우리는 배제되고 있다.
만약 우리 안에 쌓여가는 증거를 통해 마음을 돌이켜 예수님을 믿는다면, 영생에 이를 것이다.
하지만. 쌓여가는 증거를 외면하고 사람을 사랑하며 산다면, 종말에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쌓여있는 증거가 우리를 정죄하고 심판할 것이다.
- '내'가 '나'를 심판하여 '내'가 '나'를 지옥에 보낼 것이다.
- 나 스스로가 나를 심판할 것이다.
44-50절: 불신앙의 결과 - 스스로를 심판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말씀이 이어진다.
- 언듯 보면 다양한 주제를 맥락 없이 산발적으로 나열된 것 같아서 해석이 어려웠다.
- 하지만 나름의 맥락을 가지고 있다.
44-50절 분석
본문의 전체 구조는 교차대구구조(a - b - a')이다.
a(44-45절): 예수님과 하나님의 관계 - 동일성과 종속성
b(46-48절): 예수님으로 인해 일어나는 일 - 구원과 심판
a'(49-50절): 예수님과 하나님의 관계 - 동일성과 종속성
- 이러한 구조는 b를 강조한다.
- 즉, 예수님으로 인해 일어나는 구원과 심판을 강조하고 있다.
의미 연결 관계
- 나(예수님) = 나를 보내신 분(하나님)
- 믿는 것 = 보는 것
- 보는 것 ⇨ 빛 = 나(예수님) ⇨ 구원
- 나를 보내신 분(하나님) ⇨ 세상에 오신 분(예수님)
- 빛 ⇔ 어둠
- 어둠 = 내 말을 듣고서 지키지 않는 사람 = 나를 배척하고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 ⇨ 심판
- 심판 ⇨ 내가 아니라 내가 말한 바로 이 말
- 내 말 =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명령하신 말씀 = 아버지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것
- 아버지의 명령 ⇨ 영생
이렇게 얽혀 있는 내용에서 메시지를 뽑아보면 다음과 같다.
①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일'하신 분이시다.
하나님을 믿고자 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44, 45)
- 특히 유대인의 경우,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부정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예수님을 믿을 때에만 하나님을 바르게 믿을 수 있다. 예수님과 하나님은 동일하기 때문이다.
- 예수님 없는 하나님은 없다.
② 예수님은 하나님께 '종속'되신 분이시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이다. 즉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복종하는 분이다.(44, 45)
-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스스로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이다.
그 중에 특히 예수님의 말씀은 특별히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이다.(49, 50)
-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명령해주셨고, 예수님은 하나님께 들은대로만 말씀하셨다.
③ 믿는 것은 '빛'이신 예수님을 보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구체적으로 말해서, 빛을 보고 빛으로 나아가는 것이다.(46)
[요 3:21] 그러나 진리를 행하는 사람은 빛으로 나아온다. 그것은 자기의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 빛의 속성은 어둠을 밝혀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믿는 것은, 단순히 예수님의 존재를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빛으로 믿는 것이다.
- 그래서 그 빛 앞에 자신의 인생, 삶, 특히 죄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다.
[요 15:22] 내가 와서 그들에게 일러주지 않았던들 그들에게는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이 자기 죄를 변명할 길이 없게 되었다.
-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빛으로 오시면, 숨겨져 있던 사람들의 죄가 드러난다.
-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빛으로 나아오는 사람은 드러난 죄를 고백하고 인정한다.
- 반면에 예수님을 믿지 않고 어둠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드러난 죄를 숨기기 위해 발악한다.
④ 빛으로 드러내는 것이 구원이다.
죄는 아담의 숨김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아담은 선악과 먹은 것을 하나님께 숨겼다.
- 그래서 인류의 인생 전체는 숨기기 위한 발악으로 전락했다.
- 인류는 숨기기 위해 거짓말, 도둑질, 살인 등을 범한다.
- 특히 하나님으로부터 숨어,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진다.
예수님은 우리를 더 이상 숨을 필요 없게 하셨다. 빛으로 밝히셨다.
- 숨기 위한 발악으로부터 건져지는 것이 구원이다.(47)
- 우리의 모든 행위를 두려움 없이 그대로 드러낼 수 있는 것이 참 자유이다.
⑤ 빛은 어둠이 어둠임을 드러낸다. 그러나 빛이 어둠을 어둠 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빛이 없으면 어둠은 드러나지 않는다. 빛이 와야 어둠이 드러난다.
- 즉, 예수님이 오셔야, 하나님을 믿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구분된다.
- 그래야 바리새인이 얼마나 하나님을 반역하는지 드러난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드러내는 수단은 예수님의 말씀이다.(48)
- 예수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어둠 속에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렇게 예수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 자체가 심판이다.
- 심판은 단순히 죽어서 지옥 가는 것 이상이다.
- 심판은 빛이신 예수님을 피해 어둠 속으로 자신을 숨기기 삶 전체이다.
[요 3:17-20] 하나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것이다. [18]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심판을 받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19] 심판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빛이 세상에 들어왔지만, 사람들이 자기들의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좋아하였다는 것을 뜻한다. [20] 악한 일을 저지르는 사람은, 누구나 빛을 미워하며, 빛으로 나아오지 않는다. 그것은 자기 행위가 드러날까 보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 그래서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 자체가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이 심판의 주체는 아니시다.(47)
- 예수님으로 인해 죄와 의가 구분되지만, 예수님이 죄를 심판하지 않으신다.
- 예수님은 구원만 하신다.
정확한 심판의 주체는 다양하게 표현될 수 있다. ①예수님의 말씀, ②하나님, ③자기 자신
- 예수님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이 사람을 찔리게 하고 두려워 숨게 한다.(48) 예수님은 사람들 두려워하게 할 의도가 없으셨다.
- 이렇게 말씀이 사람을 두려워 숨게 하는 심판을 행한다.
-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전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왔다. 따라서 심판의 주체는 하나님이다.
- 그러나 실제로 예수님의 말씀에 반응하여 자신을 얽어 매고, 숨으려 발악하도록 하는 주체는 자기 자신이다. 굳이 하나님이 개입하시지 않아도, 자기가 자기 자신을 이렇게 심판한다.
[요 3:19] 심판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빛이 세상에 들어왔지만, 사람들이 자기들의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좋아하였다는 것을 뜻한다.
어쩌면 종말의 날 심판대 앞에서 하나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실 수도 있다.
- 가만히 앉아서 팔짱만 끼고 계실 수 있다.
- 그러면 예수님을 믿고 빛으로 나아와 자신을 숨길 필요가 없는 사람은 스스로 하나님께 걸어갈 것이다.
- 반면에 예수님을 믿지 않아 어둠을 좋아하고 끊임없이 자신을 숨기는 사람은 스스로 하나님이 싫어서 지옥을 선택할 것이다.
- 심판은 자기 스스로가 자신에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44-50절 말씀이 강조하는 것은, '예수님으로 인해 세상에서 일어난 일들'이다.
-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의와 죄, 믿음과 믿음 없음이 구분되지 않고 숨겨져 있었다.
- 그러나 예수님으로 인해 무엇이 죄이고 의인지, 누가 믿고 믿지 않는지가 밝혀진다.
- 그래서 의인은 예수님을 믿고 받아들이게 되고, 죄인은 스스로 예수님을 떠나며 스스로 자신을 심판하도록 한다.
그렇다면, 요한복음은 전반부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단락에 왜 이런 내용을 써넣었을까?
- 내가 특히 강조하는 것인데, 내용을 이해하고 주제를 알았어도, 그 주제가 왜 이 맥락에 배치되어 있는지 알지 못하면,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 예수님 말씀의 의미를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왜 이 시점에 하셨는지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
- 많은 설교자가 이것을 간과한다. 의미에만 집중하다보니 맥락을 놓친다.
요한복음는 1-12장까지 예수님은 자신이 그리스도시며 반드시 믿어야 할 하나님이심을 증명하셨다.
- 그 증명은 타당했고, 아무도 반박할 수 없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
- 특히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유대 사람들은 더욱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 도리어 죽이려 들었다.
그 이유를 본문의 37-43절에서 설명했다.
- 하나님의 역사의 관점에서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신 것이다.
- 동시에 인간의 역사의 관점에서 말로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고 실상은 믿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그 불신앙의 결과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 그것을 말해주는 것이 마지막 44-50절이다.
그렇기 때문에 44-50절 본문의 핵심은 예수님과 하나님이 아니다.
- 예수님으로 인해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일들의 결과이다. 즉 구원과 심판이다.
그런데 그 중 특히 심판에 강조가 있다.
- 단어 빈도수만 봐도 구원은 1번, 심판은 4번이나 나온다.
- 그리고 이어져오는 맥락이 불신앙에 대해 다루고 있다.
- 예수님을 믿을 완벽한 증거에도 믿지 않은 유대 사람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그들에게 합당한 결과는 심판이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그 심판이 뭐냐?
- 심판 안에는 다양한 의미가 있다.
- 크게 현세의 심판과 내세의 심판으로 구분할 수 있다.
- 그런데 본문은 특히 현세의 심판을 강조하고 있다.
본문이 말하는 심판은,
- 평생동안 예수님께 들은 말씀이 마음에 남아 있는 것이다.
- 그 말씀으로 인한 충분한 증거 때문에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알면서도, 계속해서 믿지 않으려고 발악하는 것이다.
- 계속해서 자신을 속이며, 마음 속에 있는 진리의 말씀을 숨기려는 것이다.
- 그렇게 자신이 아닌 자신으로 살아가는 것이 심판이다.
- 진리를 인정하고, 본재 자신을 인정하면, 자신의 죄를 인정해야 하는데, 그것이 너무 비참하니까,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 진리도 부정하고, 자신의 죄도 부정하고, 결국 자기 전부를 다 부정하는 것이다.
- 그렇게 자신이 아닌 자신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심판은 다른 누가 주는 것이 아니다.
- 자기가 자신을 심판하는 것이다.
- 그렇기 때문에 벗어 날 수 없는 진짜 무서운 심판이 되는 것이다.
주제
① 불신앙의 이유 - 하나님의 역사와 인간의 역사
불신앙은 하나님의 역사의 관점에서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일으키신 것이고, 인간의 역사의 관점에서 인간이 자발적으로 거역한 것이다.
- 사실 이러한 설명은 논리적이지 않다.
하지만 어떻게 하겠는가?
- 우리는 논리 세계 안에 갖혀있는 사람이고, 하나님은 논리 세계를 초월하시는 분인데,,
- 사람이 하나님을 이해하고 설명하기 위해서는 비논리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비논리적'이 되면 안된다.
- '비논리'와 '비논리적'의 차이는 분명하다.
- '비논리'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한계를 초월하신 하나님을 상상하는 것이다.
- 반면에 '비논리적'인 것은 자신의 한계를 모르고, 하나님을 자신 마음대로 규정하는 것이다.
- 한끝 차이지만,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 굉장한 차이다.
이러한 인식은 죄에 대한 인식에서도 그대로 반영된다.
- 죄의 원인이 사람이냐 하나님이냐 다투는 것은 '비논리적'인 신앙이다. 결국 지옥이다.
- 하나님 탓이라고 돌리며 노력하지 않고, 나는 할 수 없다며 핑게대며 기도하지 않는 것도 '비논리적'이다.
반면에 바른 신앙은 죄의 원인이 사람이며 동시에 하나님이심을 인정한다.
- 나의 죄 때문이기에 내가 스스로 해결하고 노력해야 할 것이며, 동시에 전적으로 하나님으로 인한 것이기에 절박하게 기도해야 한다.
정말로 노력해 본 사람만이 자신의 한계를 알 수 있고, 자신의 한계를 제대로 아는 사람만 절박하게 하나님께 의지할 수 있다.
② 불신앙의 결과 - 자기 심판
불신앙이 정말 무서운 것은 자기가 자기 스스로를 파괴(심판)한다는 것이다.
- 대표적인 예가 예수님의 죽음이다.
- 예수님으로 인해 유대 사람들의 무지와 어리석음이 드러났다.
- 그들에게는 무지를 인정하는 것과 무지를 숨기기 위해 예수님을 제거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었는데, 후자를 선택한 것이다.
- 그 때문에 유대 사람들은 자기 민족의 정체성이자 본질이신 하나님을 자기 스스로 죽인 것이다.
- 자신의 무지를 숨기기 위해 자신들의 본질을 스스로 파괴한 것이다.
이것이 죄인의 인생이다.
- 자신의 죄를 부정하기 위해서 인생 전체를 파괴한다.
- 예를 들어, 자신의 능력 없음을 인정하지 않고 숨기기 위해, 평생을 사람들에게 능력을 인정 받기 위해 낭비한다.
- 능력 없음을 인정하고, 부족한 능력 가지고 만족하며 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 사람들에게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정작 자신을 잃어버린다.
하지만 의인은 다르다.
- 의인도 똑같이 무지하고, 어리석고, 능력 없다.
- 요한복음에서 의롭다고 인정 받은 사람들도 모두 어리석었다. 사마리아 여인이 그랬고, 눈먼 사람도 그랬으며, 마리아도 그랬다. 모두 처음에는 예수님을 바르게 알아보지 못했다.
- 하지만 자신의 무지를 인정했고, 자신의 한계 안에서 예수님을 따랐다.
- 누군가에게 인정 받으려고 애쓰지 않았고, 할 수 있는 것에 충실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것은 물론이고, 자기 자신과의 관계도 회복되었다.
-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된 것이다. 자신을 되찾았다.
- 정말 추하고, 어리석고, 무능하며, 누구에게도 칭찬 받을 가치 없는 보잘 것 없는 인간임을 알게 되었다.
- 그게 정말 자신임을 인정하니, 정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보게 된 것이다.
이것이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구원과 심판이다.
- 예수님의 말씀으로 인해, 자신을 가두고, 위장하고 파괴하는 것이 심판이다.
- 반대로, 예수님의 말씀으로 인해,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참된 자신을 찾아서, 있는 그대로 자신을 예수님께 드리며, 자유롭게 사는 것이 구원이다.
결론
우리는 어떠한 삶을 살고 있는가?
구원을 누리며 살고 있는가, 심판 속에서 전전긍긍하며 살고 있는가?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구원은 특별한 영적인 체험이 아니다.
단지 내가 나인 것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 내가 얼마나 머리가 나쁜지
- 내가 얼마나 힘이 없는지
- 내가 얼마나 못생겼는지
- 내가 얼마나 성경이 나쁜지
- 내가 얼마나 까칠한지
- 내가 얼마나 게으른지
하지만 우리는 평생을 이러한 나를 부정하는 것에 모든 시간을 쏟는다.
- 머리가 나쁘다는 것을 숨기기 위해, 스펙을 쌓고
- 힘이 없는지를 숨기기 위해, 돈을 벌고
- 못생겼는지를 숨기기 위해, 쇼핑을 한다.
- 우리는 나로서 나를 드러내며 사는 것이 아니라, 나를 부정하며 나를 숨기며 산다.
- 진짜 나가 드러날까봐 전전긍긍하며 조마조마하며 산다.
이것이 죄인의 인생이다. 이것이 진짜 심판이다.
여기서 벗어나자. 나를 찾자.
- 예수님이 나를 '못나게' 만드셨음을 인정하다.
그럴 때 나를 드리는 헌신이 뭔지 알게 될 것이다.
- 참 자유가 뭔지 알게 될 것이다.
- 예수님을 의지한다는 것이 뭔지 알게 될 것이다.
- 예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게 될 것이다.
- 예수님이 우리를 얼마나 완벽하게 창조하셨는지 알게 될 것이다.
- 그리고 예수님이 서로를 얼마나 완벽하게 창조하셨는지 알게 되어, 비로소 서로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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