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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요한복음(38) 13:21-38 사랑의 결과는 배신

사랑과 배신은 정말 어울리지 않는 단어이다.

- 사랑은 자신을 희생하여 상대방에게 유익을 주는 것이다.

- 반면, 배신은 자신의 유일을 위해 상대방을 희생시키는 것이다.

- 완전히 반대되는 단어이다.

그렇기 때문에 두 단어가 함께 있으면, 서로를 강하게 부각시킨다.

- 마치 보색 효과와 같다.

- 예수님의 지극한 사랑은 유다의 배신을 더 악독해 보이도록 한다.

- 동시에, 유다의 배신은 예수님의 사랑을 더 신실해 보이도록 한다.

만약 예수님의 사랑에 유다가 배신하지 않고, 지극 정성으로 보답했다면?

- 아름다운 러브 스토리일 수는 있겠지만, 예수님도 유다도 부각되지 않을 것이다.

- 그저 그런 뻔하 사랑 이야기일 뿐이다.

반대로 유다의 배신에 예수님이 복수하셨다면?

- 짜릿한 액션 영화가 될 수는 있겠지만, 마찬가지로 뻔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독보적인 사랑>과 <사람의 인면수심의 배신>을 다룬다.

- 이를 통해, 하나님의 우리를 얼마나 많이 사랑하시는지, 그러나 우리 사람은 하나님을 얼마나 강하게 저항하고 있는지를 말해준다.

- 이 두 가지를 평생토록 더 정교하게 알아가는 것이 신앙 생활이다.

처음 신앙을 알았을 때 사랑과 배신의 간극이 <10>이라고 해보자.

- 이때 알게된 사랑과 배신은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정도의 드라마틱한 모습일 것이다.

- 하지만 분명히 우리가 인생에서 한 번쯤은 경험할 수 있을 정도이다.

그런데 신앙 생활이 길어지고, 신앙에 진지해져서 사랑과 배신의 간극이 <100>이 되었다고 해보자.

- 이때 알게된 사랑과 배신은 영화에서조차 쉽게 볼 수 없지만, 정신 병원에서는 간혹 볼 수 있는 흉칙한 모습일 것이다.

- 하지만 이 역시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범위 안에 있다.

그렇다면 평생을 치열하게 신앙 생활하다가 신앙 때문에 처참하게 죽임 당한 신앙의 대 선배가 천국에 가서 알게된 사랑과 배신의 간극이 <10000>이라고 해보자.

- 이때 알게된 사랑과 배신은 죽었다가 깨어나도 이해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일 것이다.

- 하지만 그렇다고 끝이 아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사람의 배신>의 간극은 무한대이기 때문이다.

- 감히 상상할 수 없지만, 천국에 가서도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다 알지 못할 것이다.

- 천국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영원토록 새롭게 느낄 것이다.

- 그래서 사랑과 배신의 간격이 영원토록 계속 커질 것이다.

성경이 사랑과 배신에 대해 말하면, 우리는 경험과 논리, 상상력의 범위 안에서 그것들을 이해한다.

-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해야할 일이다. 당연한 것이고 좋은 것이다.

- 최선을 다해 경험과 접목시키고, 이해하며, 공감하고, 상상해야 한다. 신앙의 진지한 태도이다.

그러나 동시에 사람의 상상력이 굉장히 제한적이라는 것도 알아야 한다.

- 내가 알고 있는 가장 큰 사랑과 하나님의 사랑을 같은 수준에 놓는 것은 자신을 하나님 위치까지 올려놓은 교만이고, 또한 하나님을 사람 위치까지 끌어 내리는 신성모독이다.

-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경험, 우리의 상상보다 항상 그 이상이다.

-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최선을 다해 이해하고, 공감하고, 상상한 다음에, 언제나 그 이상으로 가정해야 한다.

반대로 우리의 죄성에 대해 고민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 우리가 당해본 최고의 수모, 모욕, 아픔, 슬픔, 고통, 배신, 치욕, 수치, 악의를 생각하고, 또 그 이상을 상상해 본 다음에, 하나님께서 내게 느끼시는 감정이 그 이상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 우리는 사람이 상상할 수도 없는 지독한 미움으로 하나님을 미워하고 있다.

내가 상상 이상으로 하나님을 미워하고 있음을 알 때,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하게 된다.

- 그저 그런 흔해빠진 아름다운 사랑으로 변질되지 않는다.

- 하나님의 사랑에 빠져, 그 외에 아무 것도 볼 수 없게 된다. 베드로, 바울, 요한처럼 말이다.

또한 하나님이 상상 이상으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 때, 우리 죄에 대해 혐오하며 몸부림치게 된다.

- 절대로 스스로를 용납하고 위로하지 못한다. 

- 죄를 보상하기 위한 선행과 노력을 시도조차 못한다.

- 예수님을 위해 죽어가면서도,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했던 바울처럼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본문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되, 끝까지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는 모습'과 '자신을 사랑하시는 예수님께 배신하는 유다의 모습'을 함께 담고 있는 것이다.

- 사랑과 배신은 함께 있을 때에만 그 참 의미가 전달되기 때문이다.

- 사랑 없는 배신과 배신 없는 사랑은 모두 흔해 빠진 인생 쪼가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 사람의 인생이 하찮다는 것이 아니라, 그 만큼 예수님의 사랑과 유다의 배신을 통해 전하는 메시지가 특별하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님의 사랑의 가르침 중간에 유다의 배신을 반복해서 넣은 것이다.

- 이번 본문도 앞과 뒷 부분에 유다와 베드로의 배신이 나오고, 가운데 예수님의 사랑이 나온다.

- 이러한 구조가 주는 메시지를 기억하면서, 본문을 보자.


내용 정리

21-30절: 유다의 배신 - 예수님께서 마음이 괴로우셨다.

예수님은 괴로우셨다.(21)

- 그 이유는 분명하다. 유다의 배신 때문이다.

유다의 배신이 왜 그렇게 예수님을 괴롭게 했을까?

-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 예수님을 죽이려 했던 사람도 많았고, 다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배신하고 떠났었지만, 이렇게 괴로워하시지 않았다.

[요 6:66] 이 때문에 제자 가운데서 많은 사람이 떠나갔고, 더 이상 그와 함께 다니지 않았다.

괴로움의 의미는 뭐였을까?

- 배신에 대한 분노, 증오보다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슬픔, 아쉬움이 크셨을 것이다.

- 사랑하는 제자를 보내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더욱 괴로우셨을 것이다.

- 유다가 떠나야, 예언이 성취되고 예수님이 그리스도로 확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께 십자가의 길은 이별의 길이었다.

- 십자가의 길은 죽음의 고통, 배신의 아픔, 형벌의 수치 때문에도 힘드셨을 것이다.

- 하지만 관계라는 측면에서 볼 때, 3년 동안 동고동락하며 사랑을 나누었던 제자들과 헤어지는 것이 가장 힘드시지 않았을까?

이는 사도행전에서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체포당하러 가는 도중 에베소에서 했던 이별을 떠올린다.

[행 20:36-38] 바울은 말을 마치고 나서, 무릎을 꿇고 그들과 함께 기도하였다. [37] 그리고 모두 실컷 울고서, 바울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38] 그들을 가장 마음 아프게 한 것은, 다시는 자기의 얼굴을 볼 수 없으리라고 한 바울의 말이었다. 그들은 배타는 곳까지 바울을 배웅하였다.

- 바울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예루살렘에 체포 당하러 가는 길이다. 죽음이 예상되었다.

- 가는 도중에 바울은 에베소에서 성도들을 만나 고별 설교를 했다. 마지막 유언 같은 것이었다.

- 바울은 자신이 체포되어 죽을 것을 알았지만, 죽음의 슬픔보다 순종의 기쁨이 더 컸다.

- 그러나 바울을 가장 슬프게 했던 것은, 사랑했던 성도들을 다시 볼 수 없는 것이었다.

- 바울에게는 죽음의 고통보다 이별의 슬픔이 더 컸던 것이다.

우리도 서로 이런 관계가 되면 좋겠다.

- 서로 너무 사랑해서, 자신의 죽음보다 이별이 더 큰 슬픔이 되는 관계가 되길 바란다.

- 지금은 자신의 죽음 앞에서 상대방과의 이별이 보이지 않지만, 상대방과의 이별 때문에 자신의 죽음이 보이지 않게 되는 관계 되길 바란다.

제자들은 배신을 예고하시는 예수님 말씀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22)

- 하지만 예수님 말씀의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는 못했다.(28, 29)

그때 베드로는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 즉 요한으로 추정되는 제자에게 신호를 보낸다.(24)

- 그래서 그 제자는 배신자가 누구인지 여쭤본다.(25)

- 예수님은 빵조각을 통해 배신자가 유다임을 말씀해주신다.(26)

우선, 빵조각을 식초에 찍어 먹여주는 행위는 잔치의 호스트가 게스트에게 하는 관습이었다.

- 이는 공경, 우정, 사랑을 의미한다.

- 그랬기 때문에 예수님이 이런 행동을 하실 때, 제자들은 전혀 어색하지 않았던 것이다.(28)

그러나 이는 유다를 지목하는 신호였다.

[시 41:9] 내가 믿는 나의 소꿉동무, 나와 한 상에서 밥을 먹던 친구조차도, 내게 발길질을 하려고 뒤꿈치를 들었습니다.

- 이렇게 예수님은 구약 예언을 성취하신다.

동시에 예수님은 배신자를 지목하는 행위조차 <사랑>이었다. 

- 예수님은 끝까지 사랑으로 유다를 붙잡은 것이다.

- 이렇게 예수님은 유다조차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 것이다.

하지만 사탄은 일을 시작했고, 예수님은 이 시작을 명령하신다.(27)

여기서 이런 의문을 가질 수 있다.

- 유다가 행동을 하는데, 유다 안의 사탄이 조정했고, 이 모든 것을 예수님이 통제했다.

- 유다가 배신한 행위의 주체는 누구인가? 유다인가, 사탄인가, 예수님인가?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 하나님은 사람에게 주권, 즉 자유 의지를 주셨다. 사람 행위의 주권은 사람에게 있다. 그래야 죄에 대한 심판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 사탄은 공중의 권세 잡은 자이다. 세상 통치자이다.(골 2:15) 따라서 세상의 실질적 통치는 사탄이 한다.

- 예수님은 우주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시다.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결론은 너무 복잡해서 잘 모르겠다. 분명한 것 몇 가지만 다루겠다.

① 세 종류의 주권은 철저하게 대등해야 한다. 

- 하나가 다른 하나에 종속되어 소멸되면, 성경의 세계관은 완전히 무너진다.

② 하지만 동시에 수직적인 권력 관계가 존재한다. 

- 하나님 > 사탄 > 사람 순으로 힘이 약해진다.

③ 마지막으로 주권, 즉 하나의 사건을 일으킨 주체는 반드시 하나여야 한다. 

- 하나의 사건에 주체가 셋이라는 것은 비논리적이다.

이 세 가지 주장은 서로 완전히 모순된다. 

- 하나님, 사탄, 사람의 역학 관계가 이렇게 복잡하다는 것을 알고 넘어가자. 

- 이것을 모르면,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를 다 알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된다.

- 그러면 결국 하나님을 부정하게 된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유다를 배신자로 지목하셨지만, 제자들은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다.(28)

- 오히려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심부름 혹은 구제를 명령하신 것으로 오해했다.(29)

제자들이 이렇게 오해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 때가 유월절 저녁 식사이기 때문이다.

- 유월절 다음 날인 무교절은 7일 동안 무교병을 먹으며 출애굽에 감사하는 날이다.

- 그런데 때마침 유월절 다음날, 무교절 첫 날이 안식일이라 쇼핑을 하지 못한다.

- 그래서 무교절을 지키려면, 안식일이 되기 전에 무교병을 미리 사놓아야 했다.

-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유다에게 무교병을 사놓으라고 시켰을 것이라고 오해한 것이다.

- 또한 유월절에는 구제하는 것이 관례였다. 유월절 밤에 성전 문을 개방해서 거지들이 성전 안에 모일 수 있도록 하였다.

- 그랬기 때문에 제자들이 이런 오해를 하게 된 것이다.

결국 유다는 나갔고, 예수님을 은전 30전에 판다.(30)

- 은전 30은 120일의 일당이다. 약 1000만원 정도이다.

- 특히 은전 30은 노예 한 사람의 값이었다.

- 예수님은 노예 가격에 팔리신 것이다.

- 3년을 동고동락했던 스승을 배신하는 대가치고는 적다.

- 아마 유다는 돈보다는 다른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 때가 '밤'이라고 명시하여, 유다의 행위가 얼마나 불의한지 강조하고 있다.

31-35절: 예수님의 죽음 예고

유다가 나갔다.(31)

- 이는 곧 유다가 예수님을 잡으러 병사들과 올 것이라는 뜻이다.(18:3)

- 시간이 얼마 없기 때문에, 예수님은 구체적으로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신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영광이란 단어로 표현하신다.(31)

- 12장에서도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죽음을 예고하실 때 영광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었다.

[요 12:28]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드러내십시오." 그 때에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 왔다. "내가 이미 영광되게 하였고, 앞으로도 영광되게 하겠다."

- 예수님은 과거에 유능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을 영광되게 하셨고, 이제부터 죽음을 통해 영광되게 하실 것을 예고하셨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이름을 영광되게 하는 과정이 중요하다.

① 예수님 사역 ➔ 사람들: 예수님이 유능/무능 사역을 하신다. 

② 사람들의 영광 ➔ 예수님: 사람들의 이목이 쏠리고 예수님이 영광되게 된다.

③ 예수님 ➔ 하나님: 그 때 예수님은 이 사역의 기원이 하나님이심을 밝히신다.

④ 사람들의 영광 ➔ 하나님: 이를 통해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

- 여기까지가 그 동안 예수님께서 행하신 사역의 과정이다.

그러한 과정을 31절에서 설명했다.

- 인자이신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①, ②), 그 다음 인자로 인해 하나님도 영광을 받으신다.(③, ④)

그런데 이제 여기에 한 단계가 더 추가된다.(32)

[32] 하나님께서도 몸소 인자를 영광되게 하실 것이다. 

- 하나님께서 받으신 영광을 다시 예수님께 돌리시는 것이다.(하나님 ➔ 예수님)

- 이전에는 예수님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는데(③), 이번에는 그 반대이다.

- 예수님으로 인해 모든 관심이 하나님께 집중되었는데, 하지만 하나님은 받으신 관심을 누리지 않으시고, 다시 예수님께 되돌려주시는 것이다.

이로서 하나님과 예수님 모두에게 똑같은 영광이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 예수님도 하나님도 영광을 누리지 않고 서로에게 돌릴 때에만, 예수님과 하나님 모두가 영광을 받으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되돌려 받으실 영광 무엇인가? 

① 죽음

[12:23]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

- 하나님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심으로 그리스도이심을 확증하신다.

- 이 죽음이 예수님께서 받으실 영광이다.

② 승천

[요 17:5] 아버지,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누리던 그 영광으로, 나를 아버지 앞에서 영광되게 하여 주십시오.

- 예수님의 죽음은 승천하여 하나님과의 참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과정이었다.

- 그 회복될 관계는 창세 전부터 맺었던 관계이다.

- 하나님과의 '발 씻기' 관계가 예수님께서 받으실 최고의 영광이다.

이렇게 죽음과 승천은 영광이란 단어로 묶여있다.

- 전에 강조해서 말했지만, <성육신> ➔ <죽음> ➔ <부활> ➔ <승천> ➔ <재림> ➔ <종말>은 '인간의 역사 관점'에서는 순차적으로 일어난 일이다.

- 반면에 '하나님의 역사 관점'에서는 '한 순간'의 일이다. 순차적이지 않고 동일 시점이다. 

- 그래서 구약에서는 그리스도의 오심 자체가 종말이었다.

[사 29:6] 만군의 주님께서 너를 찾아오시되, 우레와 지진과 큰 소리를 일으키시며, 회오리바람과 폭풍과 태워 버리는 불길로 찾아오실 것이다.

-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음과 승천을 동일한 영광으로 표현한 것이다.

지금까지 예수님은 유능 사역으로 자신이 받으신 영광을 하나님께 드렸다.

- 그러나 앞으로는 하나님께서 무능하신 예수님을 죽이시고, 부활시키시고, 승천케 하셔서 하나님 자신이 받으신 영광을 예수님께 드릴 것이다.

그런 후, 예수님은 죽음의 시점이 임박해 있음을 제자들에게 알리신다.(33)

- 그리고 잠시 후에 예수님은 떠나실 것이고, 제자들은 예수님을 찾으나 찾지 못하게 될 것을 예고하신다.

- 알다시피, 예수님께서 떠나실 곳은 죽음 혹은 승천이다. 이 세상이 아닌 저 세상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7:33-34에서 유대 사람들에게 이미 하신 말씀이다.

- 그 때도 사람들은 예수님이 이방 지역으로 가신다거나, 자살하신다고 착각했었다.

하지만 제자들도 동일하게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다.

[요 16:17-18] 그의 제자 가운데서 몇몇이 서로 말하였다. "그가 우리에게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게 되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볼 것이다' 하신 말씀이나, '내가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에'라고 하신 말씀은 무슨 뜻일까?" [18] 그들은 말하기를 "도대체 '조금 있으면'이라는 말씀이 무슨 뜻일까? 우리는, 그가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모르겠다" 하였다.

- 이렇게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특히 죽음, 부활, 승천에 대해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다.

우리가 보기에는, 예수님이 자신의 죽음을 전부 다 '드러내놓고' 말씀하신 것 같다.(21) 

- 제자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

- 하지만 제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죽음'과 '죽은 자의 부활'은 상상의 한계를 넘는 사건이기 때문에, 아무리 들어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 예수님을 이해의 한계, 상상의 한계로 제한시키면, 절대로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다.

- 이해할 수 없음, 상상할 수 없음이라는 가정 속에서만 지금보다 내일은 말씀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다.

그러면서 갑자기 새 계명을 주신다.(34)

- 이 구절은 죽음 예고와 어울리지 않는 문맥 때문에, 나중에 첨가된 것이라는 논란까지 있다.

-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충분히 연결되는 문맥으로 볼 수 있다.

지난 본문에서도 예수님은 '발 씻기'를 행하신 이후, 서로 '발 씻기'를 명령하셨다.(14, 15)

- 즉,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한 사랑으로서 '자기 죽음'을 행하신 후, 제자들이 서로 사랑하도록 '서로를 위한 죽음'을 명하신 것이다.

이번 본문도 같은 문맥으로 전개된다.

- 제자들을 위한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신 후, 제자들도 서로 사랑하여 '서로를 위한 죽음'을 명하신 것이다.

또 다른 근거로서, 사랑을 명하실 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라고 단서를 단 것이다.

- 문맥에서 예수님의 사랑은, 곧 죽음이다.

- 예수님이 죽어야 제자들이 참 생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 마찬가지로, 제자들의 사랑 역시 죽음이다.

- 내가 죽어야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

- 이렇게 예수님은 죽음을 통해서 '본'을 보여 주신 것이다.(15)

마지막으로, 그런 사랑과 죽음만이 예수님의 제자, 즉 정체성을 드러낸다고 말씀하신다.(35)

- 다른 말로 하면, 교회 공동체의 관계가 교회의 참/거짓을 구분하는 기준이라는 뜻이다.

- 또 다른 말로 하면, 세상에 참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은 교회 말고 아무도 없다는 뜻이다.

-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부부 관계, 부모 자식 관계, 스승 제자 관계, 친구 관계 등을 모두 무시하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세상에는 아름다워 보이는 관계가 많은데, 그것을 다 무시할 수 있을까?

- 이에 대한 답을 잠시 미루고, 다른 측면으로 접근해보겠다.

사람에게 구원을 주신 분은 예수님이 유일하다는 것을 우리는 믿는다.

[행 4:12] 이 예수 밖에는, 다른 아무에게도 구원은 없습니다.

- 이는 증명할 수 없지만, 그리스도인과 아닌 사람을 나누는 분명한 기준이다.

이는 예수님만이 참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요 14:6]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 예수님만이 생명이고, 예수님을 통해서만 참 생명을 얻을 수 있다.

- 이 사실 역시 모든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믿는 진리이다.

그런데 이 진리를 반대로 말하면?

- 예수님을 제외하면, 이 세상에 생명을 없다는 뜻이다.

- 예수님을 믿지 않은 사람은 생명이 없는 사람, 즉 죽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죽어있다는 뜻이다.

이 사실이 의미하는 것은 생각보다 무섭다.

-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서 살아있다고 판단한 나의 분별력 전체를 부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 사람이 살았냐, 죽었냐하는 기본적이고 단순한 판단에서조차 나의 생각을 부정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 만약 사람들이 살아있다는 자신의 판단을 부정하지 않는 사람은, 예수님이 유일한 생명이심을 부정하는 것이고, 이는 예수님이 유일한 구원자, 그리스도심을 부정하는 것이다.

- 바리새인은 실상을 죽은 자였으면서 자신을 살아있다고 착각했기 때문에, 자신을 생명이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죽일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 예수님 이전에도 수 많은 유대 사람들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했다.

-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 예수님으로 인해, 유대 사람들이 하나님과 관계 맺지 못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과 관계 맺을 수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또한 하나님은 구약에서부터 이스라엘 민족이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 되기를 바라셨다.

[레 19:18] 다만 너는 너의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여라. 나는 주다.

- 하지만 이스라엘 민족은 남북으로 갈라져 서로 죽일듯 싸웠다. 즉, 서로 함께 있을 뿐, 전혀 관계 맺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을 따라 서로 '발 씻기'를 명하셨다.

- 그리고 그런 사랑의 관계는 예수님이 죽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베드로가 첫 설교를 한 직후 비로소 예수님을 통해 이뤄졌다.

[행 2:44-45]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45] 그들은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주었다.

- 이는 단지 물질적인 연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발 씻기' 하는 참 관계가 예수님으로 인해 성취되었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따라서 참 생명이 예수님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처럼, 참 관계 역시 예수님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 반대로, 예수님을 통한 관계가 아니면, 아무 관계가 아니라는 뜻이다.

이것을 믿는 것만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것이다.

- 이것을 믿지 않으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지 않는 것이다.

- 만약 내가 부모와, 배우자와, 자식과, 형제와, 친구와, 스승과, 제자와, 이웃과 단 한 번이라도 관계를 맺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예수님을 부정하는 것이다.

모두가 살아있지만, 실상은 죽은 것처럼, 모두가 관계를 맺고 살지만, 아무도 관계를 맺지 못하고 살고 있는 것이다.

- 모두가 실상은 죽어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생명을 지키려고 아웅다웅하며 산다.

- 마찬가지로, 실상은 모두가 관계 끊긴 채로 살고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관계에 목매달고 사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을 알지 못하면, 그래서 내가 이미 관계를 맺고 산다고 착각하면, 아무 것도 얻지 못한다.

- 하나님과의 관계도 불가능하며, 교회 공동체의 관계도 불가능하다. 

- 뿐만 아니라 '나''와의 바른 관계도 불가능하다.

바리새인도 그랬다.

- 자신이 이미 하나님과 관계 맺고 있다고 착각했다.

- 그래서 하나님이신 예수님과의 참 관계를 거절했다.

- 게다가 사람과의 관계도 실패했다.

- 율법을 빌미로 괜한 사람들을 정죄했고, 특히 아무 죄 없는 한 사람, 예수님을 거짓말로 십자가에 잡아 죽였다. 

- 이것이 관계 맺지 못하고 사는 사람의 인생이다.

- 이것이 관계를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의 숙명이다.

우리는 한 번도 관계를 맺어보지 못했다는 전제에서 출발해야 한다.

- 관계는 서로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이라는 단순한 명제에서 출발해야 한다.

- 그 관계가 하나님과 맺어질 수 있도록, 실제로 모든 것을 포기해봐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과 관계 맺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똑같이 해야 한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나'라는 세계 안에 갖혀서, '나'의 세계에서 단 한 발자국도 나가보지 못한 채 비극적으로 죽게 될 것이다.

36-38절: 베드로의 배신 예고 -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 나를 부인할 것이다.

죽음을 예고하시는 예수님의 말씀 앞에 베드로는 동문서답 한다.(36)

- 무지를 드러낸다.

무슨 말을 해도 알아 듣지 못할 베드로에게 즉답은 피하시고, 베드로의 인생을 예고하신다.

- 이 예고 역시 중의적이다.

- '나중에 올 수 있다'는 말씀은 구원을 의미한다. 나중에는 예수님과 함께 할 것이란 뜻이다.

- 동시에, 예수님이 가실 곳, 즉 십자가 죽음을 의미한다. 즉 순교할 것이라는 뜻이다.

- 이 말씀을 통해, 베드로의 순교를 예고한 것이다.

하지만 베드로는 여전히 알아듣지 못한다.(37)

- 죽어도 따라가겠다고 말한다.

이 말 역시 중의적이다.

- 우선, 어디 가는지도 모르고 따라 가겠다는 베드로의 무지를 드러낸다.

- 동시에,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예고하는 것이다.

- 결국 실제로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르다 죽임을 당한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베드로의 인생을 또 한 번 예고하신다.(38)

- 이전에는 베드로 인생의 끝을 예고하셨다.

- 이번에는 당장 오늘 밤을 예고하신다.

-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할 것을 예고하시고, 안타깝게도 그 예고는 성취된다.

이렇게 베드로의 인생에도 사랑과 배신이 공존한다.

- 자신이 예수님을 죽인 배신자라는 인식 속에서만, 예수님의 사랑의 참 뜻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 또한, 예수님의 신실한 사랑을 아는 사람만이 자신이 행한 배신이 얼마나 절망적인지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바울의 인생도 똑같았다.

[행 9:5] 그래서 그가 "주님, 누구십니까?" 하고 물으니,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 예수님을 핍박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사랑이 더 절박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 바울은 죽이려 달려들었든 예수님이 자신을 사랑하셔서 모든 것을 주셨음을 깨달았다.

- 그랬기 때문에, 자신의 모든 인생을 예수님께 드려야만 기쁨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의 인생도 똑같아야 한다.

- 오늘부터 예수님을 핍박하고 죽이자는 것이 아니다.

- 이미 우리의 전 생애가 예수님을 죽이고자 달려드는 발악이라는 것을 깨닫자는 것이다.

회심 전 베드로도 바울도, 나름 최선을 다해 열심히 인생을 살았을 뿐이다.

- 하나님께 반역하고자 하는 마음은 눈꼽만큼도 없었다.

- 오히려 하나님을 위해 살고자 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인생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 그냥 나름의 인생을 살았을 뿐인데, 실상은 하나님을 죽이려고 발악하는 인생이었던 것이다.

- 우리는 전혀 인식하지 못하지만 말이다.

문제는 이것을 깨닫는 방법이다.

- 어떻게하면 베드로와 바울처럼 우리 인생의 실상을 깨달을 수 있을까?

전혀 도움 되지 않는 답이지만, 유일한 답은 이것이다.

- 성경 읽고 교제해서, 하나님의 사랑의 크기와 배신하는 인간의 죄악을 계속해서 알아가는 것이다.

- 그리고 기도를 통해, 기적적으로 깨달아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 결국, 말씀, 기도, 교제 그리고 구제, 봉사, 전도 등 신앙 생활을 열심히 하는 수 밖에 없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죄악이 얼마나 큰지 깨닫게 해주시기를 간절히 바란다.


주제

① 예수님의 사랑과 사람의 배신

성경은 예수님의 사랑과 사람의 배신을 함께 다룬다. 왜일까?

- 사람 인식의 한계 때문이다.

- 사람이 흰색 바탕에 흰색 글씨를, 검은색 바탕에 검은색 글씨를 읽지 못하기 때문이다.

- 사람이 회색 바탕에 흰색 글씨를, 회색 바탕에 검은색 글씨를 잘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 검은색 바탕에 흰색 글씨만, 흰색 바탕에 검은색 글씨만 잘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 사람은 언제나 상대적으로만, 비교를 통해서만 인식하기 때문이다.

- 어떤 비교 없이 그 자체로는 아무 것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예수님의 사랑만 말한다면 예수님의 사랑을 이해할 수 없고, 사람의 배신만 말한다면 사람의 죄악을 알 수 없다.

- 그래서 예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더 알게 될 때에만, 나의 죄가 얼마나 큰지 더 알게 된다.

- 또 나의 죄가 얼마나 큰지 더 알게 될 떄에만, 예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더 알게 된다.

그렇게 예수님의 사랑을 알게 될 때에만, 사람에게 예수님께 다가가고 싶은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그리고 유일하게 사랑하는 예수님께 다가갈 수밖에 없다.

그렇게 예수님과 사람 간의 간격이 좁아지면, 결국 사람은 목숨까지도, 인생 전체까지도 예수님께 드리게 되는 것이다.

- 모든 관계가 그렇듯, 예수님과 사람의 관계도 긴 시간 동안 점진적으로 쌓여가는 것이다.

그 관계를 위해, 오늘 하루 예수님의 사랑과 사람의 배신을 알아가는 것에 초점을 두자.

- 시간이 걸리겠지만, 그 날은 반드시 올 것이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② 관계의 모범: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

예수님 사랑의 기원은 하나님과 예수님 간의 사랑이다.

그 예로서, 본문에서 예수님과 하나님은 영광을 주고 받으신다.

- 예수님은 평생동안 받으신 사람들로부터의 영광을 하나님께 드린다.

- 하나님 역시 예수님을 죽이시고 부활케 하셔서 받으신 사람들로부터의 영광을 예수님께 드린다.

이것을 친숙한 예를 들어보면,

- 남편과 아내가 각각 1억원 씩 가지고 있다고 해보자.

- 남편이 평생 모은 재산 1억을 전부 아내에게 주고, 아내는 받은 1억과 자신의 1억을 합쳐 2억을 다시 남편에게 줘서, 총 2억을 주고 받는다면?

- 그러면 남편과 아내 모두 각각 2억을 갖게 된다.

- 그러나 남편은 아내의 1억을 어떻게 뺏앗을까 생각하고, 아내도 남편의 1억을 어떻게 뺏앗을까 생각한다면?

- 남편도 이 1억이 언제 빼앗길지 몰라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아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 그러면 남편과 아내 모두 아무 것도 제대로 갖지 못하게 된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 더 많은 영광을 얻으려고 서로 싸운다면, 결국 아무도 영광을 얻지 못하게 된다.

- 하지만 자신이 받은 영광조차 모두 상대방에게 주려하면, 자신과 상대방 모두가 영광을 얻게 된다.

뿐만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이렇게 서로 주고 받는 관계가 주는 가장 큰 유익은, 바로 상대방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 서로 주고 받는 부부는, 남편은 아내를 얻고, 아내는 남편을 얻게 된다.

- 하나님은 예수님을 얻고, 예수님은 하나님을 얻게 된다.

물론 둘 중에 한 사람이라도 상대에 대한 신뢰를 포기하고 욕심을 부린다면, 두 관계는 바로 깨진다.

- 그 결과 신뢰를 포기한 사람은 2억을 다 갖지만, 신뢰를 지킨 사람은 알거지가 된다.

- 그렇기 때문에 신뢰를 지켜서 관계가 유지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게임이론을 통해 설명했었다.

하지만 이러한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관계에 우리 인생을 투자할 가치가 있다.

- 그 이유는 다음에서 설명하겠다.

③ 관계의 실제: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

예수님은 죽음과 부활로 사람들에게 세상 창조주로서 가지신 모든 능력 전부를 사람에게 주셨다.

- 그 중에는 생명, 구원, 자유, 사랑 등이 있다. 

그런데 사람은 예수님께 받은 능력을 예수님께 돌려드리지 않고, 자기가 모두 사용했다.

- 그래서 그 능력으로 예수님을 죽였다.

- 예수님은 신뢰를 지키셨지만, 결국 파산당하셨다.

하지만 얼마 후, 다시 신뢰를 지키는 사람이 생겨났다.

- 베드로, 바울 등이 자신의 생명과 자유를 예수님께 돌려드렸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들에게 더 큰 능력을 주셨다.

- 그 결과 기적을 일으키며, 많은 사람으로부터 칭송과 영광을 받기까지 한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영광을 소유하려하지 않고, 다시 예수님께 돌려드렸다.

- 모든 능력은 예수님께로부터 온 것이며, 자신은 여전히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한다.

-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그 결과 예수님은, 자신이 당하셨던 것과 똑같이, 그들을 죽이셔서 영광 받게 하셨다.

- 그리고 자신과 똑같이 그들도 부활시키셔서, 지금도 여전히 예수님과 주고 받는 관계를 맺고 있을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과 주고 받는 관계를 맺는 것이 신앙 생활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관계에 우리 인생을 투자할 가치가 있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로, 투자 대비 수익이 크기 때문이다.

- 우리가 투자할 것은 우리의 생명이다. 인간의 목숨이다.

- 반면 우리가 받을 것은 예수님의 생명이다. 신의 목숨이다.

- 인간의 복숨보다 신의 목숨이 크다는 것은 자명하다.

- 고수익의 투자이다.

둘째로, 투자가 지극히 안정적이기 때문이다.

- 말했듯이, 주고 받는 관계는 굉장히 위태로운 관계이다. 깨질 수 밖에 없는 관계이다.

- 단, 조건은 사람 사이에서이다.

- 그런데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예수님은 절대로 우리에 대한 신뢰를 포기하지 않으신다.

- 우리가 포기하지 않는다면, 예수님과의 관계는 절대 안정적이다.

- 예수님은, 어떤 것도 돌려 받지 못하신다 할지라도, 우리에게 주고 주고 또 주실 것이다.

- 우리가 받고 되돌려드리기만 하면, 에수님과의 관계는 안정적으로 유지된다.

- 저위험 투자, 아니 무위험 투자이다.

고수익 무위험 투자에 어떻게 투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무조건 남는 장사이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끊임없이 관계 맺고자 하신다. 그것이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이 세상 역사이다.

- 예수님께서 주시는 것을 받고 돌려드리고, 또 받고 또 돌려드시는 것이 신앙 생활이다.


결론

이 원리가 똑같이 반복되는 것이 교회 공동체이다.

- 나와 상대방이 자기 자신 전부를 주고 받음을 반복하는 모임이다.

- 그러면 공동체 모든 사람이 하나의 목숨을 가지고 오지만, 열 명의 공동체라면, 열 개의 목숨을 가지고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물론 교회 공동체는 사람이기 때문에, 예수님과 사람의 관계만큼 안정적이지 못하다.

- 그래서, 예수님처럼, 배신 당해 죽임 당하는 일이 생긴다.

- 한 사람이 헌신한 생명을, 나머지 아홉 명이 갈기갈기 찢어 나눠갖는 일이 생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 죽은 그 사람을 부활케 하실 것이다.

- 그래서 교회에 헌신하다가 죽임 당해도 괜찮다.

- 이것이 하나의 안전 장치이다.

또 하나의 안전 장치가 있는데, 성령님이다.

- 성령님께서 교회 공동체 각 사람의 마음에 들어 앉으셔서, 배신하지 않고 헌신하도록 우리를 일깨워주신다.

이러한 것이 예수님 뿐만 아니라 교회 공동체에 투자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

- 예수님과 동일하게 고수익 무위험 투자이다.

- 목숨 하나 투자해서, 열 개의 목숨을 그리고 예수님의 목숨까지도 받을 수 있는 투자이다.

아직 투자의 기회가 끝나지 않았다.

- 하지만 그 기한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다.

- 속히 투자금을 넣지 않으면, 수익을 얻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고, 투자금마저 빼앗기게 될 것이다.

우리 모두 속히 투자(공동체)에 투신하여, 참 생명, 참 구원, 참 자유, 참 관계 얻는 은혜를 누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