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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요한복음(40) 14:15-24 예수님이 떠나도 걱정할 필요가 없는 이유2 - 삼위일체

이번 본문을 해석하는데 어려운 점은 역시 문맥이다.

- 16-17절은 '성령님'의 오심, 18-20절은 '예수님'의 다시 오심, 23-24절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오심, 25-26절은 '성령님'의 오심을 말하고 있다.

- 여기서 문제는 각각의 시점이다.

직관적으로 생각해보면, 

- 성령의 오심은 예수님의 부활 승천 이후 '오순절 성령 강림' 때이다.

- 예수님의 다시 오심은 '부활' 때이다.

- 하나님과 예수님의 오심은 시점을 특정할 수 없다.

- 이렇게 같은 맥락 안에서 시점이 중구난방이기 때문에 해석이 어렵다.

해석 방법은 여러가지이다.

- 각각의 중구난방 시점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해석하려는 노력.

- 혹은 시점을 통일해서 해석하는 경우.

그 중에 나는 모든 시점을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통일해서 해석할 것이다.

- 각각의 해석이 나름의 타당한 논거를 갖기 때문에 전부 비판하거나 설명하지 않겠다.

단지 내가 왜 이렇게 선택했는지만 말하면,

- 13장에서 예수님은 떠날 것을 예고하셨다.

- 14장 전반부에서 걱정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하신다.

- 그 이유는 예수님이 없어도, 기도하면 예수님이 다 이루어주실 것이기 때문이다.(14:13, 14)

이를 볼 때, 예수님은 단순히 죽음으로 인한 3일 간의 부재만을 위해 가르치시는 것은 아니다.

- 죽음 부활 후 승천까지 하셔서 완전히 제자들만 남겨진 상태까지 염두하신 것이다.

- 예수님 없이 제자들이 홀로 예수님 믿고 살아가는 상황 전체를 의미한다.

-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인 기도를 알려주신 것이다.

- 따라서 이는 곧, 초대 교회 시기부터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기까지를 모두 포함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 <성령님의 오심 = 예수님의 다시 오심 = 하나님과 예수님의 오심>인 것이다.

- <성령님 = 예수님 = 하나님>이라는 전제 하에서 제자들의 신앙 샹활을 가르치신 것이다.

- 바로 삼위일체이다.

지금 제자들은 에수님의 부재에 대해 근심하며 두려워하고 있다.

[27]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아라.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근심하지 말라고 하신다.

[27] 나는 평화를 너희에게 남겨 준다. 나는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그 이유는 제자들이 성령을 통해 예수님과 하나님과 계속해서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이다.

[23] 내 아버지와 나는 그 사람에게로 가서 그 사람과 함께 살 것이다.

즉, 예수님이 승천하신 이후, 제자들을 시작으로 수 많은 신앙의 선배들을 비롯하여 우리까지 신앙 생활을 한다는 것은, 성령님, 예수님, 하나님을 완전히 각각 다르게, 그리고 그 세 분을 완전한 한 분으로 경험하고 사는 것을 의미한다.

- 그렇기 때문에 삼위일체를 알지 못하면, 신앙 생활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다.

- 신앙 생활은 삶 속에서 예수님 따로, 성령님 따로, 하나님 따로 각각을 경험하면서, 그 세 분이 한 분이심을 깨달으며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 그만큼 삼위일체가 중요한 것이다.

이렇게 14장은 혼자 남겨진 제자들이 신앙 생활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시기 시작하는 본문이다.

- 우리도 본문을 통해, 신앙 생활의 본질인 삼위일체 하나님께 깊이 빠져드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내용 정리

15-17절: 걱정할 필요 없는 이유① - '다른 보혜사'를 보내시겠다는 약속

시작부터 사랑하라는 명령이 나온다. 맥락과 연결되지 않는다.

- 지난 본문은 위로의 말씀이었다.

- 이번 본문 역시 성령 강림을 통한 위로이다.

- 위로 사이에 있는 사랑하라는 명령은 부자연스럽다.

그리고 '계명'의 내용 역시 명확하지 않다.

- 특히 계명을 십계명처럼 우리가 반드시 행해야 할 조항이라고 한다면,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을 믿어라!', '서로 사랑하라!' 외에 행해야 할 다른 조항이 없다. 

- 게다가 이전 본문에도 계명과 연관시킬 내용이 없다.

따라서 계명을 지키라는 것은, 예수님의 명령을 행하라는 의미보다는, 예수님의 말씀 전체, 특히 예수님이 지금 하려고 하시는 말씀을 잘 기억하라는 뜻이다

- 지킨다는 뜻도, obey가 아니라 keep에 가깝다. 행하라는 것이 아니라 간직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또한, 비슷한 구절이 21절에 나온다.

- 21절은 예수님 말씀의 끝이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말씀 양 끝에 '사랑하고 계명을 지키라'는 말씀을 하신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이 말씀을 반드시 기억하라는 강조의 말씀으로 보인다.

- 그 중요한 말씀이 뭐냐? 성령님이시다.(17) 강조할만 하다.

예수님은 자신이 떠나도 제자들이 근심하지 않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 성령님을 구하신다.

- 예수님은 성령님을 '다른 보혜사'라고 말씀하신다.

- 보혜사(paraklétos)는 정확하게 번역하기 어려운데, 대략 helper(도우미), counsellor(상담자), advocator(옹호자) 등의 의미가 합쳐진 정도이다.

- 도와주기도 하고, 위로하거나 격려하기도 하며, 변론해주기도 하는 역할이다.

- 이것이 성령님의 역할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성령님을 '다른' 보혜사라고 하셨다.

- 이는 '또 다른' 보혜사가 있다는 뜻인데, 그는 다름 아닌 예수님이시다.

- 성령님은 이전 보혜사이신 예수님의 역할을 똑같이 이어가시는 분이시다.

- 예수님께서 가르키신 것을 생각나게 해주고, 가르침대로 행하게 해주며, 배운 것을 전하게 해주고, 가르침대로 살지 못하는 우리에게 책망을, 가르침대로 살려고 하는 우리에게 위로를 주시는 분이시다.

[요 14:26] 그러나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며, 또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다.

그리고 보혜사가 오는 방법도 삼위일체적이다.

- 예수님이 구하시고, 하나님이 보내셔서, 성령님이 오신다.

그렇게 오신 성령님은 영원히 함께 하신다.

- 예수님은 오셨다가 가시지만, 성령님은 죽는 날까지, 그리고 죽음 이후에도 영원토록 같은 역할을 지속하신다.

- 그렇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이별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다음으로, 예수님은 성령님을 진리의 영이라고 설명하신다.

- 하지만 그 의미가 분명하지 않다.

- 진리를 말씀하신다는 것인지, 진리 그 자체시라는 것인지.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진리의 영이시기 때문에, 세상은 성령님을 볼 수, 알 수, 받을 수 없다.

- 왜냐하면 세상 속에는 진리가 없기 때문이다.

[요 8:44] 또 그는 진리 편에 있지 않다. 그것은 그 속에 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가 거짓말을 할 때에는 본성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는 거짓말쟁이이며, 거짓의 아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자들은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을 안다. 그래서 받을 수 있다.

[요 8:31-32] "너희가 나의 말에 머물러 있으면, 너희는 참으로 나의 제자들이다. [32] 그리고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그런데 그 이유를 말하는 구절이 요상하다.

- 미래에 '너희 안에 계실 것이다'라는 구절은 타당하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 오실 거니까.

- 그러나 현재 '그가 너희와 함께 계시다'는 구절은 이상하다. 

- 예수님은 아직 죽으시기도 전이다. 성령님은 아직 오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구절부터 예수님은 자신과 성령님의 구분을 모호하게 하기 시작하신다.

- 왜냐하면 지금 제자들 옆에는 예수님 말고는 없는데, 성령님이 제자들과 함께 계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 추측해보면, 예수님은 자신 안에 성령님이 계신다고 가정하신 것으로 보인다.

- 그렇기 때문에 성령님이 지금은 제자들과 '함께' 계시고, 예수님의 승천 이후에는 제자들 '안에' 계실 것이라고 예고하시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은 혼자 남겨질 제자들이 걱정하지 않도록, 영원토록 함께하실 성령님을 예고하시는 것이다.

- 그리고 그 성령님이 바로 예수님 자신임을 암시하신다.

18-21절: 걱정할 필요 없는 이유② - '예수님'이 다시 돌아오겠다는 약속

예수님은 제자들의 현재 심정을 충분히 공감하셨던 것 같다.

- 현재 제자들의 정서는 '고아'였다.(18)

- 제자들은 단순히 '이별의 슬픔' 정도가 아닌 '버려짐의 아픔'을 느꼈다.

- 예수님께 의존적이었던만큼 아픔도 컸던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예수님은 더 확고하게 다시 돌아올 것을 약속하신다.(18)

- 어린이집 안가겠다고 울며 불며 달라붙는 자녀에게 꼭 데릴러 오겠다고 약속하는 것처럼.

그런데 그 다시 오심은 육신의 예수님이 아니라, 영의 예수님이신 성령님이다.

- 육신으로 '함께' 있기 위해서가 아니라, 영으로 '안'에 있기 위해서이다.

그 예수님이자 성령님을 '조금 있으면' 세상은 보지 못하고, 제자들은 볼 것이다.(19)

- 현재 시점에서는 세상도 제자들도 모두 예수님을 보고 있다. 육신의 예수님은 누구나 볼 수 있었다.

- 그러나 죽음, 부활, 승천 후 성령으로 강림하시면, 세상은 영의 예수님을 볼 수 없다.

- 믿는 제자들만 볼 수 있다.

이렇게 세상과 제자들 사이의 차이가 생기는 이유는 '생명' 때문이다.(19)

[요 11:25-26]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26]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이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

- 예수님은 생명의 근원이시니, 살아계시는 것은 당연하다.

- 게다가 제자들은 그 예수님을 믿고 있으니, 예수님으로 인해 살아 있게 될 것이다.

- 이렇게 예수님으로 살아 있는 사람만이, 영의 예수님이신 성령님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 때가 되면 비로소 알게 되는 것이 있다.(20)

- 이 때는 더 이상 예수님이 '함께' 계시지 않는 때이다. 승천하셨기 때문이다.

- '육체'의 예수님은 없고, '영'의 예수님만 계신 상황이다.

세 가지를 알 수 있다.

① 예수님이 하나님 안에 있음

예수님의 승천으로 밝혀진 예수님의 자리는 '하나님 안', 다른 표현으로 '하나님 우편'이다.

[행 2:33] 하나님께서는 이 예수를 높이 올리셔서, 자기의 오른쪽에 앉히셨습니다. 

[행 7:55] 그런데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쳐다보니, 하나님의 영광이 보이고, 예수께서 하나님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였다.

- '우편' 역시 실제 위치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 가장 가까운 관계를 넘어서 동일하다는 의미까지 있다.

- 승천을 통해 예수님은 하나님께 속하신 분, 즉 하나님이심이 확증된 것이다.

② 제자들이 예수님 안에 있음

예수님이 참 하나님으로서 실질적 통치자이시다.

-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 통치 받는 제자들 역시 예수님 안에 있다.

③ 예수님이 제자들 안에 있음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하시지는 못하지만, 성령님을 통해 제자들 '안'에 계신다.

- 이것이 예수님이 승천하신 이후 지금까지 우리가 예수님과 관계 맺는 방법이다.

-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을 넘어서 우리 안에 계신다.

이런 의문을 갖는 경우가 있다.

- 예수님을 직접 본 제자들과 우리 중에 누가 더 예수님과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

- 이는 우리가 보이지 않는 예수님과 교제한다는 것이 막연하게 생각될 때 갖는 생각이다.

- 예수님을 보고 만지며 교제한 제자들에 대한 막연한 부러움에서 나온 생각이다.

하지만 실상은 반드시 그렇지 않다.

-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했다.

- 반면에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신다.

'함께'와 '안' 중에 뭐가 더 가까운가? 

- 함께'는 육체라는 장벽이 있다. 장벽을 사이에 두고 맺는 관계이다.

- 반면에 '안'은 아무런 장벽이 없다. 우리의 인격과 예수님의 인격이 직접 부딪치는 것이다.

따라서 실상은 제자들보다 우리가 예수님과 더 깊은 관계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 제자들은 자신의 '눈'으로 본 예수님만 알고 있지만, 우리는 네 사람의 '눈'으로 본 예수님을 알고 있다. 복음서가 네 개라서 제자들보다 네 배 더 잘 알고 있다.

- 더구나 성령님께서 우리 '뇌' 속까지 들어오셔서 예수니 말씀의 참 의미를 이해시켜 주신다.

-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육체'의 예수님은 떠나시고, '영'의 예수님이 오신 것이다.

- 더 가깝고 깊은 관계를 맺으시기 위해서 말이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는 계속 더 가까워지고 있다.

- 막연히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관계 맺었던 아담을 시작으로, 

- '언약'이란 매개로 관계를 맺었던 아브라함, 

- 민족이라는 수단으로 관계 맺었던 야곱(이스라엘), 

- 성소를 통해 관계 맺었던 다윗을 거쳐, 

- 예언자를 통해 관계 맺는 시기를 지나서, 

- '육체'라는 장벽을 두고 관계 했던 예수님 이후, 

- 성령님을 통해 '육체'를 뛰어 넘는 관계를 맺는 우리,

- 마지막으로 종말에는 하나님과 우리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한 하나가 될 것이다.

따라서 현재 우리는 인류 역사상 하나님과 가장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 우리는 존재했던 모든 인류 중 가장 충복받은 사람이다.

반면에 시간이 지날수록 하나님과의 관계는 상상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더 가까워질 것이다. 

-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 아직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

- 앞으로 알게 될 것을 기대하자.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다시 성령님에 대한 말씀을 꼭 기억하라고 당부하신다.(21)

- 그것이 곧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그래야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그래야 예수님의 사랑도 받기 때문이다.

- 그런 사람에게만 예수님이 나타나서, 예수님을 알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22-24절: 걱정할 필요 없는 이유③ - '하나님과 예수님'이 함께 살 것이라는 약속

예수님은 17, 19절에서 성령님과 예수님을 세상은 보지 못하고 제자들만이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 왜냐하면 예수님이 승천하신 이후에는 더 이상 '육체'의 예수님은 없기 때문이다.

- '영'의 예수님은 믿는 사람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자 유다는 이해할 수 없었다.(22)

- 예수님이 참 그리스도라면, 제자들 뿐만 아니라 세상에도 드러나야 했기 때문이다.

- 그래서 왜 세상에는 드러내려 하지 않는지 질문한다.

이는 여전히 그리스도에 대해 알지 못하는 제자들의 무지를 드러낸다.

- 그들에게 그리스도는 세상 전체에 나타나셔야 했다.

- 그래야 세상이 그리스도께 굴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래야 자신들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세상 위에 굴림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여전히 욕슴일 버리지 못했고, 그래서 여전히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다.

예수님의 대답은 제자들에게 만족스럽지 않았을 것이다.(23)

- 세상에서 인정받고 싶은 자신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 하지만 예수님은 이 기회를 통해 삼위일체를 완성하신다.

예수님 21절의 말씀을 반복하시며 확장하신다.(23)

-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

- 그런데 특히 그런 사람에게 예수님을 드러내시는데(21), 그 방식이 구체화된다.

- 단순히 예수님만 드러내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예수님이 그 사람과 함께 살 것'이라고 구체적으로 말씀하신다.

이 구절을 자세히 보면, 번역이 충실하지 못하다.

- 정확하게는, we will come to him and we will make home with him.

- 우리(하나님과 예수님)는 그에게 와서 그와 함께 있을 곳을 만들 것이다.

- 여기서 home은 2절에서 아버지의 집에 있을 곳, 즉 친밀한 가족 관계이다.

그러니까 이제까지 가만히 명령만 하셨던 하나님도 친히 사람과 관계를 맺는 것이다.

- 드디어 삼위일체가 완성된다.

- 예수님을 통해 성령님이 보냄을 받고, 성령님을 통해 예수님과 하나님과 사람이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구절이 요한계시록에도 나온다.

[계 21:3] "보아라, 하나님의 집이 사람들 가운데 있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실 것이요,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나님이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시고,

[계 21:22] 나는 그 안에서 성전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전능하신 주 하나님어린 양그 도성의 성전이시기 때문입니다.

- 믿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의 집'이 들어서는데, 그것은 곧 성전이다. 

- 그런데 그 성전은 보이지 않는 성전인데, 왜냐하면 하나님과 어린 양 예수님이시기 때문이다.

- 하나님과 예수님과 믿는 사람이 맺는 관계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 보이지 않는 성전, 즉 관계가 천국에 있을 새 예루살렘 성전인 것이다.

- 그리고 관계는 당연히 예수님을 사랑하여 예수님 말씀을 믿고 지키는 사람에게만 허락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고, 말씀을 지키지 않는 사람, 즉 세상은 이 보이지 않는 성전, 즉 관계를 볼 수 없는 것이다.(24)

- 이것이 유다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 예수님의 대답은 세상을 지배하려 했던 제자들에게는 실망스러운 대답이지만, 예수님과 관계 맺으려 하는 사람에게는 가장 원했던 대답일 것이다.

- 예수님을 믿으면, 삼위일체이신 하나님 전부를 온전히 관계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말씀이 참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끝으로 말씀을 마무리 하신다.


주제

① 성령님은 또 다른 예수님이시다.(16)

성령님의 역할을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기보다는, 하나님께 종속된 힘, 에너지 정도로 생각한다.

- 치유나 기적을 일으키는 원동력으로서 성령님을 구하는 경우가 많다.

- 하지만 성령님 역시 분명히 '신'이시며, 그렇기에 '인격'이시다.

그러면 어떤 인격이시냐? 예수님과 똑같은 인격을 가지신 분이다.

- 예수님과 같은 생각을 갖고, 같은 말씀을 하시고, 같은 일을 행하신다.

- 예수님이 3년간 하신 사역을 계속해서 이어가시는 분이시다.

그렇다면 차이는? 

-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하셨던 분이지만, 성령님은 우리 '안'에 계시는 분이시다.

'안'이라는 개념을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 범신론이나 만유재신론과 같이 모든 사람 안에 신이 있으며, 모두가 신이라는 뜻이 아니다.

- '안'을 소유의 측면에서 보기 때문에 생기는 오해이다.

- 관계라는 측면에서 봐야 한다.

'함께'와 '안'의 차이는 관계의 깊이 차이이다.

- '함께'는 살을 맞대고 동고동락하는 관계이다. 

- 사람 사이에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관계이다.

- 반면 '안'은 그것을 초월하는 관계이다.

- 육체의 한계,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서 더 깊은 관계를 맺는 상태이다.

- 물론 이러한 관계의 깊이는 우리의 이해와 상상의 한계를 넘어서기 때문에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따라서 성령님의 역할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맺었던 관계를 지금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경험토록 하시는 분이시며, 그 이상을 경험하도록 하시는 분이시다.

② 하나님은 계속해서 사람과 점점 더 가까운 관계를 맺으신다.(17)

우리는 제자들 그리고 신앙의 선배들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다.

- 그들은 우리와는 다른 특별한 예수님을 경험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 특별한 신비를 보고, 각별한 관계를 맺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 그들은 특별한 시대에 특별한 신앙을 가진 특별한 사람으로 치부한다.

그래서 평범한 일상을 사는 우리와는 다르다고 선을 긋는다.

- 너무 특별해서 남 일 같이 느껴진다.

과연 그럴까?

- 조금만 차분해게 생각해도, 누구나 말이 안된다는 것을 알 것이다.

- 위인전만 봐도, 다들 액션 히어로 같다. 

- 눈이 띄는 일들만을 모은 후에, 과장 약간 섞어 놓아서 그렇다.

- 우리의 평범한 인생도 재밌는 일만 골라서 MSG 살짝 치면, 남부럽지 않은 위인이 될 것이다.

제자들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 물론 다이나믹 했겠지만, 손에 닿지 않을만큼의 특별함은 아니었을 것이다.

- 특별한 삶 사이에 길고 지루하고 평범한 일상이 이어졌을 것이다.

- 제자들도 우리와 똑같이 예수님이 깨달아지지 않아 고민했을 것이다.

- 교회 역사를 자세히 보면, 도전을 받기도 하지만, 오히려 위로를 얻기도 한다.

- 지금 우리가 하는 고민을 이천 년전 사람들도 똑같이 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에게는 성경도, 성경 해석 자료도, 교회 역사에 있었던 수 많은 시행 착오도 있다.

- 특히 2000년 동안 성령님께서 일하신 자취를 가지고 있다.

- 이런 것들이 우리를 예수님과 더 바른 관계를 맺도록 한다.

따라서 우리는 제자들보다 예수님과 더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 어느 시대보다 예수님의 계시는 더 많고 더 분명하다.

- 그 말씀을 지키고 따르면 된다.

오히려 우리가 동경해야 할 사람들은 신앙의 선배가 아니라 후배이다.

- 초대 교회 ➔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 공인 ➔ 중세 교회 ➔ 종교 개혁 ➔ 세계 전쟁 ➔ 현대 신학에 이르기까지 신앙은 상상할 수 없게 정교해졌다.

- 이보다 더 정교해질 수 없을 것 같이 정교해졌다.

- 그러나 초대 교회 사람들이 기독교가 공인될 것을 상상할 수 없었듯, 중세 교회 사람들이 종교 개혁을 상상할 수 없었듯, 종교 개혁 시대 사람들이 지금 현대 신학을 상상할 수 없었듯, 우리는 앞으로 얼마만큼 신앙이 더 정교해질지 절대로 예상할 수 없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우리에게 더 가까이 다가오실 것이다.

- 우리 상상 이상으로 하나님 자신을 더 자세하게 계시하실 것이다.

- 우리가 몰랐던 진실을 신앙의 후배들은 누릴 것이다.

- 그리고 우리도 그들과 함께 천국에서 그 신앙을 나눌 것이다.

우리가 관심 갖고 동경해야 할 대상은 과거에 있었던 신앙의 선배가 아니라 미래에 있을 신앙의 후배들이다.

- 그렇게 미래를 볼 때, 지나간 과거의 신앙, 나의 신앙에 매이지 않고, 참 신앙에 한 발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 그래야 더 많이 계시해주시는 하나님과 더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이다.

③ 예수님께서 천국에 만드실 집은 삼위일체 하나님과 맺는 관계이다.(23)

2절에서 아버지 집에 마련될 있을 곳도, 23절에서 하나님과 예수님이 그와 함께 있을 곳도 요한계시록의 새 예루살렘 성전도 모두 관계이다.

[계 21:1-2] 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이전의 하늘과 이전의 땅이 사라지고, 바다도 없어졌습니다. [2] 나는 또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이,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와 같이 차리고,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 새 하늘과 새 땅도 천국에 있을 새로운 장소가 아니다.

- 하나님과 맺을 완전한 관계를 뜻한다.

- 그 관계는 두 인격 사이에 있는 모든 장벽을 넘어서서, 결국 두 인격이 완전히 하나가 되는 경지의 관계이다.

- 분명히 구분되는 두 개의 인격이지만, 하나가 되어 구분조차 할 수 없이 깊은 관계를 맺은 상태이다.

- 이것만이 천국, 구원, 생명, 진리, 부활, 자유이다.

그런데 그것은 삼위 하나님의 상호 복종 관계를 통해 이뤄진다.

- 하나님께서 모든 계획을 세우시고, 예수님께서 그 계획에 따라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시며, 성령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아 예수님의 일생을 지금도 반복해서 재현하고 계시다.

- 이 모든 과정은 삼위 하나님의 상호 신뢰, 상호 복종의 관계를 통해 이뤄지고, 또한 이러한 과정을 통해 삼위 하나님의 관계는 더욷 깊어진다.

- 그래서 결국 '삼위' 하나님은 '일체'의 경지까지 관계가 깊어지는 것이다.

어떤 관점에서 보면, 아직 완전한 삼위일체는 이뤄지지 않았다.

- 삼위일체 역시 종말이 되야 완성된다.

- 왜냐하면 하나님과 예수님은 함께 계시지만, 성령님은 지금 따로 떨어져서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 완전한 관계를 맺을 때, 그 때에야 비로소 삼위 하나님이 재회하게 되는 것이다.

- 그리고 그 때는 종말의 때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아직 하나님은 온전한 하나님으로 완성되지 못하신 것이다.

- 완성의 때는 종말인데, 완성의 열쇠를 누가 가지고 있냐?

- 바로 우리 사람이 가지고 있다.

- 우리가 예수님과 온전한 관계를 맺을 때, 삼위 하나님의 관계도 온전해지기 때문이다.

- 즉, 우리의 믿음이 나 하나 살리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천지 창조주 하나님께 생명을 드리기도 한다는 뜻이다.

- 그만큼 우리의 믿음이 가치있다는 뜻이다

이러한 거시적인 관점에서 신앙이 삼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복잡하게 얽혀있는 관계라는 것을 알 때에만, 예수님 말씀의 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결론

나는 이런 생각을 할 때가 많다.

- 조선왕조실록을 볼 때나, 신문을 볼 때, 주변 사람들의 소식을 들을 때, 다른 사람들은 다 멋있고 의미있게 사는데, 나만 소외되어 무의미한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에 의기소침해질 때가 있다.

- 나도 나름 열심히 살고 있는데, 아무런 성과 없이 도태되는 것 같은 두려움이 있다.

물론 우리는 이런 생각이 들 때, 지금 하는 일을 더 열심히 하고, 또한 해보지 않은 새로운 일에 도전해야 한다.

- 나도 노력 중이다.

하지만 그것과 함께 나의 삶을 다른 관점에서 볼 필요도 있다.

- 신앙 생활을 하는 것은, 한편으로, 나 하나 구원 받기 위해 아무 것도 생산하지 않고 소모하기만 하는 낭비 생활 같다.

- 그러나 실상은 모든 존재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생명을 불어넣는 행위기도 하다.

간혹 신앙 생활을 하나님의 도움 받아 힘든 인생을 좀 덜 힘들게 살아가는 것 정도로 과소평가할 때가 있다.

- 하지만 실상은 천지 창조 행위와 비견될만한 생산적인 행위이다.

- 왜냐하면 천지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원동력이 바로 우리의 신앙 생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우리의 신앙 생활을 무비판적으로 과대평가하자는 것이 아니다.

- 문제도 많고, 구멍도 많다. 

우리 신앙의 가치가 얼마나 큰지 제대로 알고, 그 가치에 더 많은 투자를 하자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사람은 단순한 피조물이 아니다.

- 지음 받은대로 사는 수동적 존재가 아니다.

창조주의 형상을 받은 유일한 존재이다.

- 창조주의 창조 행위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며 간섭하는 '창조자'이다.

- 창조주의 창조 행위를 방해할 수도, 촉진할 수도 있는 존재이다.

- 우리야말로 세상에서 참된 생산자이다.

이렇게 신앙 생활이 낭비 생활이 아니라 참된 생산 생활이라는 것을 기억하자.

- 즉각적으로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가 말씀, 기도, 교제하는 시간을 통해, 참된 창조가 완성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