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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요한복음(41) 14:22-31 관계는 무엇인가?

관계의 중요성 - 관계는 신앙과 인생 그 자체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을만큼 '관계'가 중요하다는 것을 안다.

- 신앙에서 뿐만 아니라 인생 전체에서 '관계'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에 공감하고 있다.

엄밀히 따지면, 우리가 기쁨을 느끼는 것도, 슬픔을 느끼는 것도 모두 관계이다.

- 또한 돈을 버는 이유도 관계 때문이다. 

- 절대 빈곤에서 벗어난 이후에도 사람은 여전히 더 많은 돈이 필요하다.

- 왜냐하면 상대적 박탈감, 즉 다른 사람과의 관계 때문이다.

- 건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역시 관계 때문이다. 

- 건강 악화로 소외 혹은 이별을 겪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신앙에서도 마찬가지이다.

- 성경에서 공간적으로 설명했던 모든 개념은 비유적으로 관계를 표현했던 것이다.

- 천국도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은 상태, 구원도 하나님과 관계 회복, 죄도 하나님과 관계 단절, 믿음, 사랑, 의로움 등 모든 것이 관계의 좋고 나쁨을 설명하는 개념이다.

결국 신앙은 하나님과 끊어진 '관계'를 회복하고, 그 '관계'를 지켜나가고, 또한 더욱 깊은 '관계'를 맺는 일련의 행위이다.

-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된 사람은 사람과의 관계가 회복되는데, 그것이 전도나 교회로 나타난다.

- 그리고 사람 사이에 관계가 회복되면, 올바른 관계가 무엇인지 더 구체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 그 경험으로 인해 하나님과 더 올바른 관계를 맺게 되는 선순환을 이룬다.

- 즉, 하나님을 통해 사람 간의 관계를 깨닫게 되고, 사람 간의 관계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욱 긴밀해지는 것이다.

- 이러한 선순환을 반복하는 것이 신앙 생활이다.

그렇게 회복된 관계를 맺으면 세상에서도 기쁨을 느낄 수 밖에 없다. 

- 그것이 세상에서 누리는 천국이다.

- 그러나 동시에 관계를 추구하는 사람은 이용하려고만 하는 세상에서 이용당하고 버림받는다. 

- 그것이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마땅히 당해야 할 고난이다.

- 예수님께서 죽으신 이유도 이것 때문이며, 제자들도 같은 이유로 대부분 죽었다.

-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서 누리는 천국에 안주하지 않고, 종말에 있을 참된 천국을 소망하게 된다.

여기까지가 신앙과 인생 전체에서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 다룬 것이다.

관계를 이해하는데 방해하는 것 - 관계에 대한 우리의 경험

그렇다면 그 중요한 '관계'가 도대체 뭐냐?

- 특히 관계를 정의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이미 관계를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 정확하게 말해서, 관계에 대한 오해와 선입견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 우리는 가정, 학교, 직장 등에서 맺은 수 많은 관계 중에, 좋았던 것은 받아들이고, 나빴던 것은 부정하는 방법으로 이상적인 관계의 기준을 이미 가지고 있다.

- 하지만 그 기준의 근거는 나의 경험일 뿐이다.

- 나의 경험이 왜곡되어 있듯, 관계에 대한 나의 기준 역시 왜곡되어 있다.

- 그렇기 때문에 관계를 바르게 아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특히 이러한 선입견이 가장 잘 드러나는 때는, 성경을 읽을 때이다.

- 우리는 예수님의 행위를 볼 때 불편해진다.

- 저래서 어떻게 주변 사람들을 전도할 수 있을까 불안해한다..

- 예수님께 사람들이 다 떨어져 나갈까봐 걱정한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우리가 가진 관계의 기준을 벗어나시기 때문이다.

- 예수님께서 관계를 맺기 위해서라면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계속 하시기 때문이다.

- 그렇기 때문에 제자들조차 예수님께 그러지 말라고 말리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베드로가 예수님의 죽음을 말린다. 적극적으로 그리고 강압적으로.

[막 8:32] 예수께서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바싹 잡아당기고, 그에게 항의하였다.

또한 이번 본문에서 유다도 예수님을 비판한다.

[요 14:22] 가룟 유다가 아닌 다른 유다가 물었다. "주님, 주님께서 우리에게는 자신을 드러내시고, 세상에는 드러내려고 하지 않으시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 이는 이전에 예수님 형제들의 비판과 비슷하다.

[요 7:3-4] 예수의 형제들이 예수께 말하였다. "형님은 여기에서 떠나 유대로 가셔서, 거기에 있는 형님의 제자들도 형님이 하는 일을 보게 하십시오. [4] 알려지기를 바라면서 숨어서 일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형님이 이런 일을 하는 바에는, 자기를 세상에 드러내십시오."

- 두 비판은 어투만 다르지, 의도는 같다.

우리도 같은 이유 때문에 예수님을 불편해하는 것이다.

- 이것이 관계를 바르게 깨닫는데 방해하는 가장 큰 장애물이다.

- 관계에 대한 잘못된 기준, 선입견 때문에, 참 관계를 맺으려는 예수님을 비판한다.

- 그리고 잘못된 선입견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간다.

- 그래서 노력은 했지만 아무런 성과가 없게 된다. 

- 결국 예수님과 관계 맺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 대표적으로, 바리새인이 그런 경우이다.

그렇기 때문에 관계에 대해 명확한 정의를 내리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

- 바른 관계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만이 예수님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고, 그 예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

관계를 배우는 방법 - 사람과 하나님의 상호 관계

그렇다면 관계가 무엇인지 어떻게 아느냐? 방법은 두 가지다.

① 일반 계시: 자연 현상을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되는 하나님의 뜻

관계에 대해 인문학, 철학, 심리학과 같은 일반 학문에서 답을 찾아보는 것이다.

- 그런 후에 그것을 가지고 예수님의 행동을 평가하는 것이다.

- 이렇게 인간의 영역을 통해서 신의 영역을 유추하는 방법이다.

이 방법의 장점은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쉽다는 것이다.

- 이미 인정된 학문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설득력을 갖는다.

또 사람에서 출발된 것이기 때문에 적용하기도 쉽다.

- 육아서를 읽을 때 많이 느낀다.

- 육아서의 핵심도 결국 관계인데, 성경보다 훨씬 이해하기 쉽고 적용하기 쉽게 설명해준다.

- 육아서를 통해 예수님의 행위가 얼마나 바른 부모의 모습이었는지 깨닫게 된다.

하지만 단점은 부정확하다는 것이다.

- 그런 학문들은 모두가 인정하지만, 동시에 아무도 절대 불변하다고 인정하지 않는다.

- 언제나 오류 가능성과 부정확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방법만으로는 관계가 무엇인지 완전히 알 수 없다.

- 이와 반대의 방법이 있다. 신의 영역에서 인간의 영역으로 확장하는 방식이다.

② 특별 계시: 성경 말씀을 통해 직접적으로 전달되는 하나님의 뜻

예수님의 행위에 근거해서 관계를 정의하는 것이다.

- 그런 후에 그러한 관계가 사람에게도 정말 좋은 것인지 평가하는 것이다.

이 방법의 장점은 관계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이다.

- 예수님의 행위는 사랑의 정점이며, 사랑은 관계의 정점이다.

- 따라서 예수님은 관계를 정의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다.

- 예수님의 행위는 우리가 관계를 바르게 알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다.

하지만 단점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 예수님의 말씀은 제자들도, 초대 교회에서도, 중세 교회에서도, 종교 개혁 이후에도, 지금도 여전히 오해되고 있다.

- 예수님이 잘못 말씀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너무 정확하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 예를 들어, 상대성 이론도 대충 설명하면 대부분 이해할 수 있지만, 정확하게 설명하면 대부분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 뭐든지 정확하게 말할수록 오해의 여지가 커진다.

그리고 적용하기는 더 어렵다.

- 예수님처럼 욕을 하고 소리지르면 환자 취급 당한다.

- 예수님 말씀의 진의를 알지 못하고 겉모습만 따라한다고 적용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관계를 깨닫기 위해서는 이 두 가지 방법이 병행되어야 한다.

- 세상에서 말하는 관계를 통해 예수님의 행위를 이해해보려고 노력해야하며, 또한 예수님의 행위를 근거로 일상의 관계를 재고해 보아야 한다.

- 그렇게 사람의 입장에서 하나님을 이해하려는 노력과 하나님의 입장이 되어서 사람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모두 필요하다.

- 이러한 하나님과 사람의 상호 작용을 통해서만 관계를 이해하고 적용할 수 있다.

- 즉, 관계를 깨닫기 위해서 하나님과 사람이 상호 작용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것을 위해 우리는 함께 모이는 것이다.

- 일반 계시적 측면으로서, 자신들의 경험과 세상 이야기를 하며, 그것이 신앙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함께 고민한다.

- 또한 반대로 특별 계시적 측면으로서, 성경을 읽고 고민하며, 그것이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함께 고민한다.

- 이러한 교제를 통해 참 관계가 무엇인지 배우며, 또한 그러한 교제 자체가 관계가 무엇인지 가르쳐준다.

- 이것이 관계를 배우는 방법이다.

관계의 속성 - 존재의 근원

'사람은 무엇인가?'와 '관계는 무엇인가?' 중에 어떤 것이 더 근본적인 질문일까?

- 사람을 위해 관계가 필요한 것일까, 관계를 위해 사람이 만들어진 것일까?

- 사람과 관계 중 무엇이 더 근원적일까?

인간 역사의 관점에서 본다면, 사람을 위해 관계가 만들어졌을 것이다. 즉, 사람이 근본적일 것이다.

- 원래 사람이 있었고, 생존을 위한 수단 중에 관계를 선택한 사람들만 살아남아 진화한 것이다.

- 사람들이 서로 관계 맺고 협력하는 것이 생존에 가장 효율적이었기 때문이다.

- 그래서 우리는 관계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 역사의 관점에서 본다면, 관계를 위해 사람이 만들어졌다. 즉 관계가 근본적이다.

- 태초부터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 안에 관계가 있었고, 그 관계를 확장하기 위해 사람이 창조된 것이다.

- 사람에게 있는 관계 욕구는 진화론적으로 습득된 것이 아니라, 관계 욕구가 먼저 있고 욕구 실현을 위한 도구로서 사람이 생긴 것이다.

이 둘 중에 뭐가 옳으냐는 논쟁을 하는 것은 의미 없다. 아무도 밝힐 수 없으니까.

- 그보다 관계라는 것이 사람의 근원과 우열을 가릴 수 없을만큼 중요하다는 것이다.

한 단계 더 들어가서, '존재란 무엇인가?'와 '관계는 무엇인가?' 중에 어떤 것이 더 근본적일까?

- 존재를 위해 관계가 생긴 것일까, 관계를 위해 존재가 생긴 것일까?

- 관계를 전제하지 않는 존재는 존재할까?

만약 색이 존재한다면, 관계를 전제하지 않고 색이 존재할 수 있을까?

- 색은 언제나 다른 색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존재한다.

- 만약 이 세상에 빨간색만 존재한다면, 모든 것이 흑백처럼 보일 것이다.

- 즉, 색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 따라서 두 가지 이상의 다른 색이 서로 관계를 맺을 때에만 색이 존재할 수 있다.

만약 온 우주에 딱 한 사람만 존재하고 그 외에 아무 것도 없다면?

- 동물, 식물, 땅, 하늘이 아무 것도 없이 무한히 빈 공간에 사람이 혼자 있다면?

- 아무 것도 만질 수, 볼 수, 들을 수 없다면?

- 그 사람은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조차 알 수 없을 것이다.

- 적어도 땅이라도 있어야, 땅을 딛고 있는 자신의 존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우주도 만들어지기 전에 신이 홀로 있다면, 그 신은 존재하는 것일까?

- 마찬가지 이유로, 그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신조차도 존재하기 위해서는 관계가 전제되어 있어야 한다.

- 그래야 상호 관계 속에서 자의식이 생길 수 있고, 그래야 존재가 된다.

- 그래서 하나님이 삼위일체로 존재하실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가 무조건 옳다는 것은 아니다.

- 반박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인류의 존재, 세상 만물의 존재 뿐만 아니라, 신의 존재까지도 관계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 사람을 이해하고, 세상을 이해하고, 하나님을 이해할 때 관계를 고려하지 않았다면,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뜻이다.

-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관계의 본질을 우리에게 알리시고, 또 그러한 관계를 우리와 맺으시려는 것이다.

- 그래야 사람과 세상을, 그리고 비로소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 관계는 존재를 정의하는데조차 필수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관계란? - 뉴럴링크

그렇다면 이제 정말로, 관계는 무엇일까?

- 단순한 앎도 아니고, 이해하는 것도, 함께 하는 것도, 필요한 것을 주는 것도, 솔직한 것도, 배려하는 것도, 사랑하는 것도, 다 아니다.

- 사랑이라는 명목으로 얼마나 많은 폭력을 저지르며, 솔직함이라는 명목으로 얼마나 많은 상처를 주며, 배려하고 구제한다는 이유로 얼마나 많은 사람을 무시했는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 관계를 단편적으로만 보기 때문에 바리새인들과 제자들이 예수님을 오해했던 것이다.

참 관계는, 마치 '뉴럴링크' 같은 것이다.

- 뉴럴링크는 엘론 머스크가 설립한 회사인데, 뇌에 전선을 심어 생각을 업-다운로드할 수 있도록 컴퓨터와 연결하는 기술을 개발한다.

- 이 기술이 있으면, 이론적으로 두 사람의 뇌가 완전히 하나로 연결된다.

- 그러니까 관계는, 내가 나를 생각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의 생각, 감정 등 모든 것을 완전히 아는 것이고, 또한 다른 사람이 나를 그렇게 완전히 알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관계를 이렇게 표현하신 것이다.

[마 22:39] 둘째 계명도 이것과 같은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한 것이다.

- 이는 막연하게 이웃을 소중하게 여기라는 것이 아니다.

- 우리에게 가장 큰 상처를 주는 사람은 언제나 우리를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다.

- 소중히 여기는 것만으로는 관계를 맺을 수 없다.

이 말씀은 나와 이웃의 뇌가 완전히 하나로 연결되어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 그럴 때에만 나의 몸만 지키려는 생존 본능을 통해 이웃의 몸까지 지킬 수 있게 된다.

- 그것이 내 몸처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럼 우리는 이웃과 뇌를 어떻게 연결할 수 있을까?

- 바로 성령님이다.

-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면, 우리의 뇌와 하나님의 뇌가 연결되는데, 그 연결 고리가 성령님이다.

- 각 사람과 연결되어 있는 성령님은 한 분이시다.

- 그렇기 때문에 성령님을 통해 각 사람도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엡 2:21] 그리스도 안에서 건물 전체가 서로 연결되어서, 주님 안에서 자라서 성전이 됩니다.

[엡 4:3] 성령이 여러분을 평화의 띠로 묶어서, 하나가 되게 해 주신 것을 힘써 지키십시오.

이렇게 뇌가 연결된 것과 같은 관계를 또 찾을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이다.

- 삼위일체란, 하나님이 완전히 구분된 세 분이지만, 동시에 아무런 구분되지 않는 한 분이라는 뜻이다.

- 이러한 상태는 독립된 인격을 가진 세 사람의 뇌가 완전히 하나로 연결된 것에 비유할 수 있다.

- 이럴 때, 완전히 구분된 세 인격이 완전히 하나 된 생각, 감정, 행동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 이러한 관계를 하나님 안에서 이미 가지고 계셨고, 하나님은 그 관계를 사람과 맺으려고 하시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우리 몸을 어떻게 사랑하는지를 자세히 보자.

- 우리가 무한히 우리 몸을 공감하나?

- 우리가 무한히 우리 몸을 배려하나?

- 우리가 우리 몸이 달라고 하는 것을 모두 주나?

- 우리가 우리 몸에 항상 솔직한가?

- 모두 아니다.

- 이런 것들은 사랑이 아니다.

예를 들어보자.

- 우리가 더 건강해지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 몸에 항상 공감하고 배려하면 안된다.

- 피곤해서 쉬고 싶어도 운동을 해야 하고, 먹기 싫어도 채소를 먹어야 하며, 먹고 싶어도 야식을 먹으면 안된다.

- 우리는 우리 몸의 요구를 묵살하고, 우리 몸을 쳐서 굴복시켜야 할 때가 있다.

[고전 9:27] 나는 내 몸을 쳐서 굴복시킵니다.

우리가 왜 이러느냐?

- 우리가 우리 몸을 정말로 사랑하기 때문이다.

-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를 공감하고 배려하여 원하는 것을 행하기도 하지만, 같은 이유로 우리 스스로를 무시하고 채찍질하기도 한다.

같은 이유로 우리는 자녀를 공감하기도 하고 공감하지 않기도 한다.

- 또한 같은 이유로 예수님은 우리를 배려하시기도 하고 그렇게 하지 않으시기도 하는 것이다.

- 따라서 우리가 우리 몸을 배려하는 것도 그리고 배려하지 않는 것도 모두 우리 몸을 사랑해서인 것처럼, 하나님은 사랑'만'을 위해 모든 행위를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정말로 사랑하신다. 

-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자신의 몸처럼 대하신다.

- 다시 말해서, 하나님 쪽에서는 우리 뇌에 전선을 꽂고, 우리 뇌에 있는 모든 생각과 감정을 전부 보고 듣고 느끼고 계신다. 모든 것을 공감하시지 않지만 말이다.

- 즉, 하나님 쪽에서 우리를 향한 관계는 이미 맺어져 있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무엇인가?

- 우리 쪽에서 하나님을 향한 관계를 맺는 것이다.

- 즉, 우리가 하나님의 뇌에 전선을 꽂고 하나님의 생각과 감정을 느끼는 것이다.

- 우리가 하나님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 따라서 하나님께서 아담 때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종말까지 하실 일은 바로 이것이다.

-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모든 말과 행동은 전부 이 관점에서 봐야 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문을 보자.

- 예수님께서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뇌에 전선을 꽂도록 하시는지 보자.

- 예수님께서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이해하고 공감하며 사랑하도록 만드시는지 보자.

- 이를 위해 예수님께서 죽고 부활하시며, 성령님을 보내주신다는 것을 기억하며, 본문을 보자.


내용정리

22-26절: 예수님이 제자들에게는 자신을 드러내시고, 세상에는 드러내시지 않는 이유

유다의 질문은 일견 타당하다.(22)

- 인류 전체가 보고 믿어야 할 그리스도라면, 일단 인류 전체가 볼 수는 있어야 한다.

- 볼 수도 없는 그리스도를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 그런데 예수님은 인류 전체 중에 '세상'은 배제하고 일부에게만 드러낼 것이라고 말씀하신다.(19, 21)

- 이는 마땅히 그리스도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직무유기이다.

예수님의 대답은 단순하다.(23, 24)

제자들(23절): 나를 사랑하는 사람 ➔ 내 말을 지킴 ➔ 하나님이 사랑하심 ➔ 예수님을 드러내심(21) ➔ 하나님과 예수님이 함께 거하심

세상(24절):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 ➔ 내 말을 지키지 않음 ➔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으심 ➔ 예수님을 드러내지 않으심 ➔ 하나님과 예수님이 함께 거하지 않으심

- 포인트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예수님을 드러내신다는 것이다.

- 즉, 하나님과 사람 간의 관계는 하나님 편에서 사람을 향한 사랑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사람 편에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동반될 때에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 이는 관계가 언제나 양방향이라는 전제에서 당연한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지 않겠다고 하신 이유는, 관계가 양방향임을 밝히시기 위함이다.

- 이를 통해, 우리로 하여금 적극적으로 예수님 자신을 사랑할 것을 권면하시기 위한 것이다.

- 그리고 여기서 사랑이란, 예수님 말씀을 기억하는 것이다.

한 단계 더 나아가서, 예수님 말씀을 기억하는 것은, 사람이 예수님의 뇌에 전선을 연결하여 예수님의 생각, 감정 등 모든 것을 나의 것처럼 생각하고 느끼는 것이다.

- 이것이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연결을 누가 시켜주냐? 말했듯이 성령님이시다.(26)

- 예수님이 함께 계실 때에는, 예수님이 직접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말씀해주셨다.

- 사람들은 예수님의 생각과 감정을 전달받을 수 있었다.

- 물론, 이러한 전달은 육체라는 장벽을 둔 간접적인 전달이다.

하지만 예수님이 떠나시면, 성령님이 예수님의 생각과 감정을 직접적으로 전해주신다.

- 그 때는 육체라는 장벽 없이, 전선을 뇌에 직접 꽂아서 전해주신다.

- 비로소 예수님을 내 몸처럼 생각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을 내 몸처럼 생각하는 것이 참 사랑이며 참 관계이다.

-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우리 편에서 예수님을 사랑하는 행위가 반드시 필요하다.

27-29절: 예수님의 작별 인사 - 내 평화를 준다.

하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지 않았다.

- 예수님께 공감하지 못했다.

- 그래서 예수님께서 떠나신다는 말씀을 여전히 두려워했다.(2)

- 예수님이 떠나시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 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신다.(27)

- '평화'는 구약말 '샬롬'에서 온 단어로서, 만날 때와 헤어질 때 모두 사용하는 흔한 인사말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인사말은 단순한 인사말임과 동시에 그 이상이었다.

- 왜냐하면 예수님은 '평화'의 주체시기 때문이다.

- 예수님께 '평화'는 단지 기원하는 대상이 아니라 직접 성취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 그래서 예수님은 '내' 평화라고 말씀하셨다.

- 예수님만이 하나님과 우리가 관계를 맺는 참 평화을 성취하시기 때문이다.

- 그러기 위해서는 아버지께 갔다 오셔야 했다.

만약 제자들이 예수님을 사랑했고, 예수님 뇌에 전선을 꽂은 것처럼 예수님 말씀을 이해했다면, 근심하지 않았을 것이다.(28)

- 기뻐했을 것이다.

- 왜냐하면 예수님보다 크신 분, 즉 예수님을 보내신 분께 돌아가기 때문이다.

[요 13:16] 종이 주인보다 높지 않으며, 보냄을 받은 사람이 보낸 사람보다 높지 않다.

- 보냄 받은 자가 보낸 자에게 돌아가는 것은 임무를 완수했다는 것이며, 이를 통해 참 평화가 성취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회복될 참 평화를 미리 말씀하신다.(29)

- '그 일', 즉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서 하나님께 돌아가는 일이 일어났을 때, 그것이 헤어짐으로 인한 절망이 아니라, 참 만남을 통한 참 평화라는 것을 제자들이 믿도록 하려는 것이다.

30-31절: 세상 통치자의 임박한 도래 - 그러나 그에게는 아무런 권한이 없다.

이제 그 때가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불과 몇 시간 전이다.

- 더 이상 많은 말을 할 시간도 없다.(30)

곧 세상 통치자, 즉 사탄은 예수님을 죽일 것이다.

- 이를 통해 사탄은 세상을 정복하려 한 것이다.

- 하지만 반대로, 이를 통해 사탄은 세상을 완전히 잃어버린다.

왜냐하면 사탄에게는 예수님의 권한을 좌지우지할 아무런 영향력이 없기 때문이다.

- 오로지 드러나는 것은, 독보적인 예수님의 권한만 드러나게 된다.

- 이는 마치 계란과 돌맹이가 겉보기에는 비슷해보이지만, 맞부딪칠 때 비로소 돌맹이의 강함이 드러나는 것과 같다.

- 즉, 하나님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 그로 인한 철저한 순종이 드러난다.(31)

한마디로, 하나님과 예수님의 독보적인 관계가 드러나는 것이고, 그 일을 통해 그 관계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는 것이다.(31)

- 그것을 위해 예수님이 죽으시는 것이다.

끝으로,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가시는 것을 통해, 가르침이 일단락 되었음을 밝히신다.


주제

관계는 역지사지이다.

그런데 막연히 '상대방은 이럴거야'라는 망상을 하는 것이 아니다.

- 단순히, 방에 앉아서 저 사람의 입장이라면 어떨까? 라는 질문으로트 턱없이 부족하다.

- 얄팍한 역지사지는 미봉책일뿐, 오해와 갈등을 부추긴다.

- 차라리 '죽었다 깨나도 저 사람의 입장은 이해할 수 없을거야'라는 전제가 더 낫다.

바른 역지사지는 실제로 그 사람이 되는 것이다.

- 그 사람의 몸을 입고, 그 사람이 산 세월동안, 그 사람의 환경에서, 그 사람과 같은 선택을 하며 사는 것이다.

- 그럴 때에만 이해와 공감이 가능하고, 비로소 그 사람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이다.

불가능한 일 같지만, 역사 속에서 일어난 일이다.

- 바로 예수님이시다.

-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사람과 관계 맺기 위해 실제로 사람이 되신 것이다.

- 하나님의 자리에서 사람의 입장을 생각하신 것이 아니라, 사람의 자리로 내려오셨다.

- 이것만이 유일한 관계이다.

이것만이 관계라면, 세상에 누가 관계를 맺을 수 있겠는가?

- 그래서 세상에 관계는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 전부 서로를 이용하기만 하고 있다는 것이다.

- 가장 가까워야할 부부 관계, 부모 자식 관계도 서로 이용하기만 하는 관계이다.

- 그러니 그 외의 관계는 얼마나 심각하겠는가!

- 내가 다른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 불가능한 이상,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 것도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관계를 요구하신다.

- 나 예수를 사랑하라고 하시고,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다.

- 이는 우리보고 사람 자리에 있지 말고 하나님 자리로 올라와서, 하나님이 되어서, 하나님으로 살아본 후, 하나님을 이해하고 공감하라는 뜻이다.

- 말도 안된다.

- 하지만 이 일을 이루신 분이 예수님이시다.

어떻게? 성령님을 통해서이다.

- 성령님은, 여러번 말했지만, 하나님의 영이다.

- 따라서 우리 안에 성령님이 오신다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이 된다는 뜻이다.

-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님을 보내신 이유는, 우리를 하나님의 자리로 끌어 올려서 하나님과 교제하도록 하신 것과 같은 것이다.

- 이것이 유일한 참 관계이고,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사랑이다.

- 이것을 하는 것이 신앙 생활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예수님 뜻대로 항상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 관계가 양방향이기 때문이다.

- 우리의 의지와 선택이 필요하다.

- 그래서 의지와 선택이 없는 '세상'은 예수님과 관계에서 배제되는 것이다.

- 이것이 본문이 말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어떻게 우리에게 예수님에 대한 의지와 선택이 생길 수 있을까?

- 여기서 전제는, 예수님은 너무나 매력적이어서 사랑에 빠질 수 밖에 없는 분이라는 점이다.

-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할 의지와 선택이 없는 이유는, 단 하나이다. 잘 몰라서일 뿐이다.

- 세상의 모든 미남 미녀, 세상의 모든 부자, 모든 천재, 모든 예술가, 모든 연예인을 다 합친 것보다 더 매력적인 분이시다.

이러한 전제 속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예수님을 아는 것 뿐이다.

- 말씀, 교제, 기도를 통해서 아는 것 뿐이다.

- 알면 누구나 의지를 가지고 사랑할 수 밖에 없고, 예수님만 사랑하기로 선택할 수 밖에 없다.


결론

우리 관계는 어떠한가?

- 좋다면 좋고, 나쁘다면 나쁘다.

나쁜 점은, 아무도 예수님이 하신 참 역지사지를 하지 않았다.

- 누구도 상대방의 몸을 입고 다시 태어나 본 적이 없다.

- 결국 우리는 아무도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하지 못하고 있다.

- 육체라는 절대 넘을 수 없는 장벽을 사이에 두고 각자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좋은 점은, 한 성령님이 우리 모두를 연결시키고 계시다는 점이다.

-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는 육체의 장벽을 넘어서고 있다.

- 때때로 누구보다 상대방을 이해하고 공감하고 있다.

- 성령님을 통해서, 서로를 내 몸과 같이 사랑하고 있다.

우리가 정말로 관계를 맺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 아마 그곳은 틀림없이 천국일 것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우리가 아직 천국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천국에 들어섰다는 것이다.

- 왜냐하면 함께 예수님을 두고 교제하고 있으니까.

이 교제의 끝을 보기 소망한다.

- 우리의 뇌가 모두 성령님이라는 전선으로 다 연결되는 날을.

- 그래서 나와 너의 구분이 사라지고, 우리를 내 몸과 같이 사랑하게 될 날을.

- 우리가 정말로 하나되는 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