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부터 말하면,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정통성을 계승하시며 동시에 초월하신 분이시다.
- 만약 계승과 초월 중 한 편에 치우쳐 생각하면, 신앙을 바르게 이해할 수 없고, 결국 불신앙에 빠질 수 밖에 없다.
계승에 치우치면, 그래서 구약에서부터 이어져 온 하나님 계시 방법에 매여있다면, 율법주의, 선민사상, 보수주의 등에 빠진다.
- 구약의 계시 방법은 ①민족, ②율법, ③성전이었데, 이것을 계승하여 신앙의 척도로 삼는다.
- ①민족을 한정된 집단 개념으로, ②율법을 특정한 기준 혹은 사상 개념으로, ③성전을 특별한 장소 개념으로 이해한다.
- 그래서 ①하나님이 특정 집단이라는 이유로 더욱 보살피신다던지, ②특정 사상만이 옳은 것이라던지, ③특별한 장소에 가야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다는 주장을 한다.
- 예를 들어, ①신천지처럼 우리 교회에 있다는 이유로 구원 받는다던지, ②칼빈주의 개혁사상만이 진리라던지, ③교회 건물에 와야 기도가 잘된다고 주장한다.
초월에 치우치면, 그래서 성경에도 초월하여, 모든 것이 예수님의 죽음 부활을 나타내기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해서 죽음 부활에만 집중하면, 개인 기복 신앙으로 전락한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훼손된 성전을 정화하심으로 성전을 계승하셨고, 참 성전이 자기 몸이라고 선포하심으로 성전을 초월하셨다.
- 이렇게 계승과 초월의 균형은 예수님의 말씀에서도, 사도 요한에게서도 나타나지만, 바울의 사상에서도 중요한 축을 이룬다.
- 로마서에서 복음은 율법으로부터 벗어나서 초월하게 하는 것(7:3)임과 동시에, 복음은 율법을 굳게 세워 계승하는 것(3:31)이라고 말한다.
계승/초월, 완성/폐함, 율법/복음, 행위/믿음 등은 반대 의미를 갖지만, 성경은 양 편을 모두 인정한다.
- 이러한 성경 개념을 이해하면, 예수님에 대한 이해가 올라가고,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이해도 올라간다.
내면적 내용
이전의 본문과는 달리, 표면적 내용보다 내면적 내용 이해가 더 쉽기 때문에 내면적 내용 먼저 다룬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훼손된 성전을 정화하심으로 성전을 계승하셨고, 참 성전이 자기 몸이라고 선포하심으로 정형화된 성전을 초월하신다.
- 1장 끝에서부터 시작된 계승과 초월 개념은 혼인잔치를 지나서 이번 본문까지 이어진다.
예수님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는데, 왜 계승과 초월의 개념을 사용하셨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신앙의 본질, 하나님의 본질을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 예를 들어, 대화를 할 때, 우리가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를 '말'이라는 형태에 담아 표현한다.
- 여기서 메시지를 본질, 말을 수단이다.
- 우리가 상대방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수단인 말 자체를 정확하게 들어야 한다. 이것이 계승이다.
- 일단, 상대방의 말을 그대로 이어 받아 계승하지 않으면, 대화는 불가능하다.
다음에는, 말 안에 있는 메시지를 다시 읽어내야 한다.
- 말 그대로가 아니라 말을 초월하여, 행간에 있는 복잡, 미묘, 섬세한 메시지를 파악해야 한다. 이것이 초월이다.
- 말을 초월한 행간의 메시지를 얻지 못하면, 대화는 불가능하다.
즉, 본질을 잘 전달하기 위해서는, 본질과 수단이 언제나 함께 갈 수 밖에 없는데, 전달 받을 때 중요한 것이 두 가지 있다.
① 본질을 담은 수단을 얼마나 잘 받았는지(계승), ② 수단을 초월한 본질을 얼마나 잘 파악하는지(초월)
- 이렇게 기본적인 대화에서도,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계승과 초월 개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계승만 하고 초월하지 않으면, 행간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고 답답한 대화가 되고, 계승은 하지 않고 초월만 하면, 동문서답하는 대화, 대화가 아닌 대화를 하게 된다.
이와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대화하시기 위해 본질과 수단을 사용하셨는데, 본질은 하나님 자신이고, 수단은 이스라엘이다.
- 그래서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정통성을 정확하게 계승하시며 동시에, 이스라엘을 초월하여 본질이신 하나님을 드러내신다.
비판적 질문
가버나움에는 왜 가셨을까?
성전 뜰에서 장사를 하는 것은 합법인가 불법인가?
성전 뜰에서 장사꾼을 내쫓은 것은 합법인가 불법인가?
유대 사람들은 예수께 왜 표징을 보여달라고 했는가?
표징 보여달라는 요청에 예수님은 뜬금없이 왜 성전을 재건하겠다고 하시는가?
표면적 내용
12절: 예수님, 어머니, 형제들, 제자들은 가버나움에 가셔서 잠깐 계신다.
일단, 이 구절에 신학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관련 연구도 없다. 그래서 역사적 사실 기록이라고 본다.
- 왜 하필 가버나움이냐면, 공관복음서에서 가버나움은 베이스 캠프이다.
- 베드로의 집이 있는 곳으로서, 갈릴리 사역의 중심지다. 중요한 사역을 행한 후 항상 가버나움으로 돌아가신다.
13절: 예수님께서 유월절을 보내러 예루살렘에 가신다.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3대 절기 중 하나인 유월절을 지키신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정통성을 지키신다는 의미다.
- 유월절에 있었던 예수님의 기행과 그에 따른 논쟁은, 앞으로 유월절에 있을 예수님의 죽음을 암시한다.
14-16절: 예수님께서 동물 파는 사람들과 돈 바꿔주는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성전 뜰에서 동물을 팔고 돈을 바꿔주는 것은 불법일까 합법일까? 관점에 따라 합법이기도 하고 불법이기도 하다.
합법인 이유: 관례적으로 예전부터 그래왔을 것으로 추정된다.(신명기 14:24-26)
- 유월절 제사에 사용되는 동물은 흠 없이 구별된 것이어야 한다. 하지만 먼 지역에서 흠 없는 동물을 가져오기는 어렵다.
- 그래서 성전 주변에 흠 없는 동물을 파는 시장이 있었고, 사람들은 손 쉽게 돈을 가지고 제물을 샀다.
- 또 유월절에는 성전세라는 것을 내야 하는데, 이는 반 세겔이었다.
- 그런데 이 세겔이라는 동전 단위가 일상적으로 유통되는 화폐가 아니었다.
- 그래서 쉽게 낼 수 있도록, 성전 주변에 세겔 시장이 있었고, 사람들은 각자의 화폐로 세겔을 사서 냈다.
- 원래 동물 시장과 세겔 시장은 탐욕의 상징이 아니라, 성전 율법을 쉽게 지킬 수 있게 해주는 배려의 상징이다.
불법인 이유: 배려로 시작된 시장은 타락의 장이 되었다.
- 시장 상인과 성전 관리인 사이에 커넥션이 생겼다.
- 상상컨데, 시장 상인들은 성전 관리들에게 로비를 하여, 제물의 합격 수준을 높이는 방법으로 시장에서 동물을 살 수밖에 없도록 유도한 후, 비싼 수수료를 붙여서 팔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 이렇게 성전 관리들은 뇌물을 통해 시장 상인들은 수수료를 통해 이득을 취했을 것이다.
따라서, 누가 보느냐에 따라, 예수님의 상 엎기는 기행이 될 수도 있고, 성전 정화가 될 수도 있다.
- 성전 관리는 예수님을 성전 규율을 어기는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 이들은 예수님으로 인해 명예 실추 뿐만 아니라, 재산 손실까지 입었다.
- 반면에 제물을 구입하는데 재정적인 부담을 느꼈던 보통 사람들은 성전 제도가 바로잡힌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 성전의 부정부폐에 대해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을 것이고, 예수님의 행동에 속시원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전 관리들은 예수님께 다짜고짜 따질 수가 없었던 것이다.
- 자신들이 분명한 손해를 입고 있기 때문에 화가 났지만, 많은 사람들의 호응 때문에 어찌할 수 없었다.
- 그래서 성전 관리들은 18절처럼 질문을 통해 드러나지 않는 공격을 하는 것이다.
17절: 제자들은 성경 말씀을 기억한다.
제자들이 성경 말씀을 기억한 시점이 성전 정화 당시인가, 22절처럼 부활 이후인가에 대한 논쟁이 있다.
하지만, 단서가 없기 때문에 뭐라 말할 수 없고, 또 뭐라 생각해도 결론은 같기 때문에 의미 없는 논쟁이다.
편의상 성전 정화 시점이라고 가정하겠다.
인용된 성경 말씀에 두 가지 포인트가 있다. ①주님의 집을 생각하는 열정 ②나를 삼킬 것이다
① 제자들은 예수님의 행동을 보고 주님의 집, 즉 성전을 생각하는 열정이 대단하다고 판단했다.
- 예수님의 행동을 제자들도 멋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제자들도 성전 시장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었지만, 성전 관리들의 위세에 눌려 표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 그래서 제자들은 시편 69:9 말씀을 떠올린 것이다.
[시 69:9] 주님의 집에 쏟은 내 열정이 내 안에서 불처럼 타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모욕하는 자들의 모욕이 나에게로 쏟아집니다.
- 하지만, 과연 제자들은 그 열정의 결과까지도 예상했을까?
② 시편에서도 열정으로 인해 모욕을 당한다. 본문에서도 열정은 예수님을 삼켜서 없에버린다고 말한다.
- 제자들은 아직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알지 못했지만, 무의식적으로 열정의 결과 죽임 당할 것을 고백한 것이다.
- 이렇듯, 주님의 집을 향한 열정은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태도이지만, 그리스도인을 삼켜 죽게 만든다.
18-20절: 유대 사람들이 표징을 보여달라고 요청하자, 예수님은 성전을 다시 세우겠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그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포인트는 두 가지다. ① 유대 사람들의 요청은 적절한가? ② 그에 대한 예수님의 응답은 적절한가?
① 성전에 와서 정화 혹은 난동을 부린 예수님께 유대 사람들은 왜 표징을 구하나?
- 일단, 유대 사람들은 분명히 성전 관리일 것이다. 자기 구역에서 설쳐대는 예수란 놈을 처리하기 위해 온 것이다.
- 그렇다면 이들은 왜 와서 예수를 때려 잡아가든가 심문하지 않을까?
- 함부로 처리하지 않은 이유 중 하나는, 주변 사람들의 동요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의 예수님의 행동에 동의했다.
- 그래서 이들은 흑심을 숨기고 접근해야만 했다. 겉으로는 띄워주지만, 속으로는 책잡을 질문을 한 것이다.
- 표면적 의미는, 당신이 성전 정화를 한 것을 보니 예언자인 것 같은데, 표징을 통해 당신이 누군지 제대로 알려주시오.
- 하지만 내면적 의미는, 네깟 놈이 영업 방해를 했는데, 표징도 못보여주면 죽을 줄 알아!
- 이들은 불가능한 표징 요청을 통해 예수님을 곤궁에 빠뜨릴 생각이었다.
② 그래서 예수님 대답의 목적도 이중적이다. 표면적인 요청에 응답하며, 내면적인 공격도 방어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무너진 성전도 다시 세울 수 있는 권세가 있다고 말씀하신다.
- 그렇기 때문에 내가 성전 시장을 부순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제대로 복구하면 되니까!
- 따라서 나에게 성전 정화를 할 수 있는 권세가 충분히 있다고 하시며, 표면적 요청에 응답하신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내면적 공격에도 방어하기 위해 단서를 다셨다. 단, 너희가 먼저 성전을 허물라는 것이다.
- 성전 관리들은 불가능한 요청을 하고, 실패하면 잡아갈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덪을 놓고 기다린 것이다.
- 하지만 예수님은 덪에 걸리지 않고, 도리어 덪을 놓으셨다.
- 그들이 실행할 수 없는 단서를 달아서, 겉으로는 요청에 응답한 것 같지만, 속으로는 공격을 되받아친 것이다.
- 그들은 성전을 허물어야 예수님의 무능함을 드러내 책잡을 수 있는데, 그럴 수는 없었다.
- 반면에, 성전을 허물지 않으면, 예수님의 능력을 인정할 수 밖에 없는데, 그럴 수도 없었다.
- 딜레마에 빠진 것이다.
이로인해, 그들은 예수님을 잡아 넣을 기회를 잃어버린 동시에, 예수님께 성전을 정화할 수 있는 권세가 있다는 것을 어쩔 수 없이 인정해버린 꼴이 된 것이다.
21-22절: 게다가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말씀에 한 가지 의미를 또 덪붙인다. 새롭게 세워질 성전이 예수님의 몸이라는 것이다.
요한복음은 진짜 복잡한 책이다. 예수님의 말씀 하나에 세 가지 뜻을 동시에 전하기 때문이다.
어쨋든, 유대 사람들이 요청한 표징은 예수님께서 죽고 부활하심으로 정말로 성취된다.
- 물론 이 당시에는 아무도 알지 못했지만 말이다.
- 제자들조차 부활 후에 예수님의 말씀의 참 뜻을 깨닫게 되고, 더욱 더 예수님을 믿게 된다.
한 가지 더 생각해 볼 것은, 예수님의 몸이 새로운 성전이라는 것을 완전히 깨닫게 된 시점이다.
- 근거는 없지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곧 성전임을 여러가지 방법으로 말씀해주셨을 것 같다.
- 이유는, 복음을 이해하는데 너무 중요한 개념이며 동시에, 자세히 설명해주지 않으면 깨닫기 어려운 개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들어도, 멀쩡히 있는 성전 건물이 예수님이란 인격으로 대체된다는 개념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 본문의 말씀이 예수님께서 죽고 3일만에 부활하신다는 의미라는 것은 알 수 있었겠지만, 예수님이 성전이라는 것은 부활 후라고 하더라도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럼 이 개념을 언제 이해했을 것이냐면, AD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었을 때일 것이다.
- 구약시대부터 언제나 그랬듯, 유대인이라면 어느 누구도 성전이 파괴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 솔로몬 성전의 파괴를 경험한 후라도,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 전능하신 하나님의 집인 성전이 파괴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 그런 유대인에게 멀쩡하게 건재한 성전이 예수님으로 대체된다는 생각도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 하지만, 파괴되었고, 한참은 멘붕이었을 것이고, 파괴의 이유를 찾다보니까 뒤늦게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했을 것이다.
따라서, 성전이 파괴되고 나서야 비로소 예수님이 참 성전이라는 개념을 이해했을 것이다.
- 성전이 있을 때는, 예수님의 정체성 안에 성전은 배제되어 있었지만, 성전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예수님의 정체성 안에 성전 개념이 온전히 들어오게 되었다.
- 그리고 하나님은 성전 건물 안에 거하신다는 오해가 비로소 바로잡혔을 것이다.
- 예배라는 개념 안에 장소 개념이 완전히 배제되어, 언제 어디서나 어떤 방법으로든 예수님 안에 거하기만 하면 그것이 예배고, 그 곳이 성전이기에, 거룩함, 의로움이 특정한 장소, 시간, 방법, 절차 등 어떤 것에도 제한되지 않고, 예수님 그 자체이심을 이제야 이해했을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제자들은 예수님을 더욱 더 바르게 믿게 된 것이다.
- 제자들의 믿음의 여정을 보면, 처음부터 계속해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바르게 고백한다.
- 하지만, 처음에는 그리스도라는 개념 안에 오해와 편견이 가득하다.
-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제자들의 믿음을 불신앙이라고까지 말씀하신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가지 사건을 통해, 오해와 편견이 부서지고 예수님 한 분만 남게 된다.
- 즉 신앙은, 예수님이 전부이며 유일하고, 예수님 외에는 어떤 것도 없다.는 진실이 사람 안에 점차 확장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진실은 한 번 듣고, 성령 받으면 한 번에 완전히 깨달아지는 것이 아니다.
- 제자들도 짧게는 3년의 기간이 걸렸고, 길게는 성전이 파괴되기까지 40년이 걸렸다.
-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경험이 예수님에 대한 이해를 계속해서 확장시켰다.
그래서 기다림이 필요하다.
23-25절: 표징을 보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많아졌지만, 예수님은 그 사람들을 믿지 않으셨다(몸을 맡기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여전히 그들이 자신을 알지 못하고 믿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 이렇듯, 표징은 사람들에게 믿음 같은 것을 준다. 하지만 믿음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믿음 있다고 착각하게 한다.
- 아마도, 이런 사람에 대한 구체적인 예가 다음 본문에 니고데모를 통해 드러나는 것 같다.
주제
①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을 계승, 초월하시듯, 우리도 우리의 신앙, 경험, 인생, 설교, 교회, 전통 등을 계승, 초월해야 한다.
계승, 초월의 목적은 본질이다. 본질되신 예수님을 더욱 선명하고 정확하게 알아가는 것이다.
예수님의 정체성을 명확하게 알수록, 나의 정체성, 제자의 정체성,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인생의 정체성을 바르게 알 수 있고, 그래야 바르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② 주님의 집을 향한 열정이 예수님을 삼켜버렸듯이, 우리도 삼켜버려 죽일 것이다.
성전, 교회, 신앙 등을 아우르는 하나님에 대한 열정, 사랑, 소망, 믿음은 세상에서의 모욕, 고난, 죽음을 일으킨다.
- 하나님 사랑은 곧 나 미워함이라는 등식이 성립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 사랑은 나 미워함, 곧 죽음이라는 결과가 온다.
- 그래서 나 사랑함, 세상 두려움이 있으면, 하나님 미워함이라는 결과가 올 수 밖에 없다.
그러니 이 공식을 잘 기억하자. <하나님 사랑 = 나 미워함>, <나 사랑함, 세상 두려움 = 하나님 미워함>
③ 신앙의 성숙과 완성은 정말 오래 걸리는 것이다. 제자들도 40년 걸렸다.
그러니 마음 굳게 먹고 기다리자. 마라톤 선수처럼.
- 단거리 선수처럼 마라톤을 뛰면, 절대로 완주 못한다. 볼트도 못한다.
- 우리 같은 아마추어라면, 기록보다는 완주에 목표를 둬야한다. 꼴찌로라도 천국 가자!
우리가 보통 생각하길, 많은 것을 배우면, 특별한 기적을 경험을 하면, 신앙이 생길 것이라 기대한다.
- 하지만, 신앙은 인생 전체를 통해 생기는 것이다.
- 제자들도 예수님이 성전이라는 개념 하나 이해하는데, 3년간의 가르침, 예수님의 죽음 부활, 성전 건물의 파괴 전체가 필요했다.
- 이것들 중에 제자들이 계획한 것은 없다. 제자들은 예수님 믿고 따르고, 예수님 전하기 위해 살았을 뿐이다.
- 그런 과정 중 예상치 못한 인생 경험을 통해 알게 된 것이다.
분명한 것은, 우리의 신앙도 예상치 못하게 생기고 자랄 것이다.
- 그러니까 신앙 생활 대충하자는 것이 아니라, 정말 예수님께 집중하면,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다 처리해주신다는 것이다.
- 하나님께서는 멀쩔한 성전 건물도 박살내셔서 신앙을 가르쳐주시는 분이다. 신앙을 위해 수단 방법 가리지 않으신다.
- 그런 하나님 믿고 열심히 신앙생활 하자!
결론 및 적용
우리는 무엇을 계승하고, 또 무엇을 초월해야 할까?
먼저, 우리 교회를 자랑하자면, 계승과 초월을 잘 하려고 생긴 교회다.
① 예배 대신 예수님: 예배라는 전통을 잘 계승하되, 예배 형식을 초월하여 본질이신 예수님을 추구하려는 교회다.
② 설교 대신 성경: 설교라는 전통을 잘 계승하되, 설교 형식을 초월하여 본질이신 성경을 추구하려는 교회다.
③ 건물 대신 사람: 교회라는 전통을 잘 계승하되, 교회 건물을 초월하여 본질인 사람을 추구하려는 교회다.
- 예배, 설교, 교회 건물은 수단일 뿐이다. 무시하면 안되지만, 초월하여 본질인 예수님, 성경, 사람을 추구해야 한다.
우리 교회는 지금도 여전히 계승과 초월을 위해 힘쓰고 있다. 성취는 적어도 40년은 걸린다는 심정으로 인내하며 기다리고 있다.
- 이를 위해, 계승만 하려는 계승파와도 싸우고, 초월파와도 싸운다.
- 예배를 하던대로 해야지 왜 바꾸냐는 계승파에도 맞서고, 형식 따위에 매이지 말고 집어치우자는 초월파와도 맞선다.
- 힘든 싸움이고, 단번에 되지 않을거라 생각하지만, 예수님께서 가신 길이니, 우리도 가자!
문제는, 이렇게 주님을 향한 열정 하나 믿고 싸우면, 이 열정이 우리를 삼켜버려 죽일 것이라는 사실이다.
- 신앙에 대한 진보적인 사람도, 보수적인 사람도 다 우리 교회를 욕할 것이다.
- 이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욕을 피하지도 말고, 욕을 두려워하지도 말고, 우리는 우리 가던 길 계속 가자.
- 종착지는 결국 모욕, 고난, 죽음일테제만, 동시에 그 곳은 예수님 품 안일 것이다.
'요한복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요한복음(7) 3:16-21 진리를 행하는 사람의 특징은 예수님께 나아감이다. (0) | 2019.06.24 |
---|---|
요한복음(6) 3:1-15 니고데모의 흑심으로 드러난 예수님의 진심 (0) | 2019.06.24 |
요한복음(4) 2:1-11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정통성을 계승하시며 초월하시는 분 (0) | 2019.06.24 |
요한복음(3) 1:35-51 예수님의 정체성과 제자의 정체성 (0) | 2019.06.24 |
요한복음(2) 1:19-34 나는 빛이 아니라 빛을 증언하러 왔다. (0) | 2019.06.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