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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요한복음(4) 2:1-11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정통성을 계승하시며 초월하시는 분

표면적 내용

갈릴리 가나에 혼인 잔치가 있었고, 예수의 어머니, 예수, 제자들이 참석했다.

그런데 포도주가 떨어졌고, 그 사실을 어머니는 예수께 알렸다.

그러나 예수는 "그것이 나와 당신에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아직도 내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일꾼을을 준비시켰다.

예수는 일꾼들에게 물항아리에 물을 채우고, 잔치를 맡은 이에게 가져다 주라고 하니, 그대로 했다.

그러자 잔치를 맡은 이는 포도주의 맛이 너무 좋다며 감탄했다.

마지막으로, 이 표징을 본 제자들은 예수를 믿게 되었다.

주제: 표징을 통한 예수의 정체성 선포와 제자의 삶 제시

- 예수님께서 맹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기적을 일으키셨다. 이를 통해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 예수님은 물로 포도주도 만드실 수 있는 능력 있으신 분이시다.

- 우리도 필요한 것이 있을 때 예수님께 간절히 구하면, 예수님께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구하라!


내면적 내용

비유 해석

 비유

 뜻

 설명

 혼인 잔치

종말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은 종말의 시작을 의미한다. 예) 계 19:9

 그런데, 종말의 시작은 참 안식의 시작이기도 하다. 그래서 7일째 되는 날이다.

 어머니

제자(신자) 

 본문에서 예수님의 정체성을 아는 유일한 인물로서 제자를 대표한다.

 포도주

 이스라엘의 정통성

 포도주가 떨어진 것은 이스라엘이 정통성을 상실한 상태를, 포도주가 채워진 것은 이스라엘이 정통성을 회복한 상태를 말한다. 따라서 포도주는 이스라엘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런데, 옛 포도주보다 새 포도주가 더 좋다고 평가한다. 이는 예수로 인해 회복된 새 이스라엘이 구약의 이스라엘보다 더 좋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현실은 처음 포도주보다 나중 포도주가 못하다. 이는 현재 이스라엘이 예전 이스라엘보다 못하다는 현실을 고발한다.

 물항아리

 이스라엘 민족

 포도주를 담을 그릇이며, 유대 정결 예법을 위한 것이기에 이스라엘 민족을 의미한다.

 숫자도 6개, 즉 불완전한 상태에 있다는 뜻이다. 예) 666

물 

 성령

 요한복음에서 물은 자주 성령을 의미한다. 예) 4:10 생수

 일꾼들

 제자

 일꾼들은 예수의 명령을 따른 대가로 포도주로 변한 물이 어디에서 났는지 아는 영광을 누린다.

 잔치를 맡은 이

 종교지도자

 행사를 주관하지만, 포도주의 정체를 알지 못하는 종교지도자들을 상징한다.

내용 정리

혼인 잔치, 즉 종말의 때에 예수님, 어머니, 제자들이 참석하였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실상은 포도주 없음, 즉 정통성을 상실한 상태이다.

이를 어머니가 예수께 말하자, (중략)

예수께서는 성령으로 제자들을 통해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신다.

그것을 본 일꾼들은 예수님을 알아본다.

하지만 종교지도자들은 그것을 보고 깜짝 놀라지만, 회복의 주권자이신 예수님을 알지 못한다.

핵심

예수님의 오심은 종말의 시작이며, 이는 곧 심판과 회복의 시작이다.

- 심판과 회복의 결과는 안식이기 때문에, 종말은 안식의 시작이기도 하다.

- 심판과 회복은 예수님의 초림으로 인해 이미 시작되었으며, 예수님의 재림 때 끝난다.

- 따라서 예수님은 심판자로서 우리를 두렵게 하고, 회복자로서 소망하게 하며, 안식자로서 평안하게 하신다.

제자는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께 기대하는 사람이며, 변화된 현상의 주관자이신 예수님을 아는 영광을 누린다.

반면에 현재 이스라엘은 정통성을 상실한 불완전한 상태이며,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의 표징을 보긴 하지만, 표징의 주권자가 누구인지 아는 영광에서 배제된다.

정통성을 상실한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분은 예수님, 특히 성령이시며, 회복된 이스라엘은 이전의 이스라엘을 초월하는 훨씬 더 좋은 것이다.

- 즉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계승자이시며 동시에 이스라엘 정통성을 초월하시는 분이시다.


비판적 질문

질문1: 포도주가 떨어진 의미는 알겠는데, 왜 그 소식을 어머니가 알렸을까?

예수님께서 직접 미리 아신다던지, 제자들을 통해 아신다면, 더 일반적이었을텐데,, 딱히 어머니가 없어도 될 것 같은데,,

어머니의 역할이 불필요해 보이는데 들어간 것은 독특한 메시지가 있을 것 같다.

답1: 어머니의 역할은 제자의 정체성을 밝히기 위한 장치 같다.

어머니와 일꾼들의 역할이 비슷하다. 둘 다 예수님의 사역에 불필요하지만 동역자 역할을 한다. 이것이 제자의 정체성이다.

그런데 의문은, 어머니 대신에 제자들이 같은 역할을 해도 괜찮았을 것 같은데, 왜 하필 어머니일까?

- 제자들이 이제 막 모아져서, 아직 예수님에 대해 잘 몰랐기 때문으로 보인다. 

- 그래서 포도주를 달라는 부탁조차, 예수님이 포도주를 만드실 것이란 기대조차 하지 못한 시기이기 때문에 그래도 예수님을 가장 잘 아는 어머니를 통해 이야기를 시작한 것 같다.

질문2: 어머니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 "여자여, 그것이 나와 당신에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아직도) 내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의 의미는?

대화의 흐름은 이렇다.

- 어머니의 요청 --> 예수님의 거절(?) --> 어머니의 기대 --> 예수님의 승락

예수님의 대답을 어머니의 말에 대한 거절로 본다면, 이후 예수님의 행동이 어색하다.

- 예수님이 어머니의 요청을 말로는 거절하고 행동으로는 승락하는 언행 불일치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 게다가, 예수님이 거절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기대를 가지고 일꾼들을 준비시키는 모습도 이상하다.

- 예수님의 거절을 어머니가 무시하는듯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학자들은 예수님의 대답을 거절로 본다.

- 해석은, 표적 행위의 주도권이 어머니가 아닌 자신에게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 어머니가 요청한 때는 예수님의 때가 아니고, 예수님 스스로 행동하신 때가 예수님의 때라는 것이다.

- 그리고 어머니의 기대는 무시가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믿음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는 예수님의 말씀을 지나치게 좁게 해석한 것 같다.

- 예수님의 때는 십자가 죽음 부활을 의미하는 것으로, 예수님 사역의 전반에서 가장 중요한 표현인데, 그런 표현을 이렇게 단순하게 사용했을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만약 예수님의 말씀이 거절이 아니라면? 

- 예수님은 언행 일치하신 분이 된다.

- 어머니도 예수님의 말씀을 무시하지 않은 것이 된다.

답2: "내 때"와 포도주 기적과의 관계

만약 "내 때"와 포도주 기적의 때가 같은 것이라면, 예수님은 어머니의 말을 거절한 것이 된다.

- 예수님의 말씀은, "아직 포도주 기적을 일으킬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것이라면, 거절이 아니다.

-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내 때"를 십자가 죽음 부활의 때라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 따라서 직접적인 거절은 아닌데,, 그 이상은 잘 모르겠다.


주제

① 현재 시대: 혼인 잔치이며 7일째 날, 즉 종말, 심판 그리고 안식의 때이다. 

성경의 세계관에서 예수님의 재림과 초림 사이의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 기간이다.

- 예수님의 초림은 곧 종말, 심판이 시작된 때이다.

- 그래서 침례 요한은 예수님이 오실 것을 알고 곧 종말이 올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고, 그래서 종말의 심판에 대비해 회개를 선포한 것이다.

하지만 알 수 없는 하나님의 뜻에 의해, 종말은 시작되었지만, 유예되어 종결되지 않은 상태가 되었다. 그 때가 지금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초림 이후의 시간은 심판이 진행 중인 과정이고, 그 과정은 재림 때 끝난다고 보는 것이 성경의 관점이다.

- 그래서 흔히 현 시점을 말세지말, 즉 종말의 과정 중에 마지막 때라고 하는 것이다.

- 그렇기 때문에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오신 때를 혼인 잔치에 비유하여 종말이 시작되었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러나 종말은 심판의 날일 뿐만 아니라 안식의 날이다.

- 종말은 믿지 않는 사람에겐 심판 받아 지옥가는 날이지만, 믿는 사람에겐 더 이상 유혹, 시련, 시험이 없이 안식하는 날이다.

- 믿는 사람은 천국을 소망하며 안식의 일부를 느낄 수 있지만, 불완전한 형태이다. 여전히 죄의 유혹과 지옥의 가능성 속에 있다.

- 그래서 믿는 사람은 기쁨 속에서 두렵워하고, 두려움 속에서도 기뻐한다.

- 반면에, 믿지 않는 사람은 긍정의 힘으로 기뻐하기만 하거나, 세상 속에서 좌절하기만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님의 첫 표적을 혼인 잔치이자 안식일인 날에 행하신 것이다.

② 현재 이스라엘 상태 진단: 포도주가 떨어져 정체성을 상실한 상태이다.

구약에서도 이스라엘은 정체성을 상실하고, 하나님에 의해 회복되기를 수차례 반복했다. 그리고 또 다시 상실한 상태이다.

게다가 포도주는 언제나 점차 나빠진다고 말한다. 즉 과거에 비해 현재 이스라엘은 신앙으로부터 더 멀어졌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잔치를 맡은 이, 즉 이스라엘의 리더들은 표징을 보고도 예수님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리더, 즉 종교지도자들과 이스라엘 정통성의 상징인 율법, 성전 등을 비난하시는 것이다.

③ 제자의 정체성: 어머니와 일꾼들은 예수님의 사역에 동참하고, 그로인해 예수님을 알게 되는 영광을 누린다.

어머니는 포도주가 없는 현실을 고발하고, 예수님을 기대한다. 

- 침례 요한의 사역도 현재 세상의 타락을 고발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것이었다.

- 베드로의 첫 번째 선포도 "너희가 구약에 예고된 메시야를 죽였으니, 회개하라!"였다.(행2장)

- 바울도 로마서 전반부에서 세상에 의인은 하나도 없다고 고발한다.(롬3장)

일꾼들은 예수님의 일을 대신 한다. 

- 베드로와 바울을 비롯한 제자들은 예수님 대신 기적과 말씀 선포를 행하고, 고난과 박해까지도 대신 받는다.

- 이러한 과정을 통해 예수님의 정체성을 점차 더 알아가게 된다.

우리도 그래야 한다.

④ 예수님의 정체성: 떨어진 포도주 대신에 물을 가득 채우셔서 더 좋은 포도주를 만드시는 분이시다.

예수님은 포도주를 채우셔서, 상실된 이스라엘의 정통성을 회복, 계승하신다.

그런데, 예수님으로 회복된 이스라엘은 기존의 이스라엘보다 더 좋은 것, 초월하는 것이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민족 개념에 한정된 것이었지만, 신약의 이스라엘은 어떤 것에도 한정되지 않는 초월적인 것이다.

- 새 이스라엘은 민족, 율법, 성전 등 모든 한계를 초월, 해체, 파괴한 것이기에, 더욱 더 본질에 집중, 응축, 결집된 것이다.


결론 밎 적용

이러한 예수님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이러한 예수님의 정체성에 따른 제자의 정체성은?

예수님께서 구약에서 나타난 이스라엘의 정통성을 얼마나 잘 계승했는지 확인해야 한다.

- 이를 알기 위해서 먼저 구약에서 말하는 이스라엘의 본질, 신앙의 본질을 알아야 한다.

- 그리고 신약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신앙의 본질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

- 그래야 이 둘이 얼마나 철저하게 같은지 확인할 수 있다.

- 이를 통해, 구약과 신약을 관통하는 신앙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정통성을 어떻게 초월하셨는지 알아야 한다.

- 예수님께서는 구약에서 말하는 신앙 중에 본질은 유지하시되, 나머지 것들은 초월하셨다.

- 우리도 본질을 바르게 구분하지 못하면, 초월한다는 명문으로 본질을 버리고, 비본질을 취하여, 거짓 신앙, 불신앙이 될 수 있다.

그러한 계승과 초월이 우리 삶에서도 적용되야 한다.

- 신앙 생활을 할 때에도, 그 동안 교회에서 배워왔던 것 중에 계승해야 할 본질과 초월해야 할 비본질을 구분해야 한다.

더 확장해서, 현실의 삶은 우리가 계승해야 할까, 초월해야 할까?

- 신앙 생활은 일상 생활을 계승하는 것인가, 일상 생활을 초월하는 것인가?

- 신앙은 일상의 삶에서 드러나는 것인가, 일상의 삶과는 철저히 구분되는 특별한 것인가?

- 신앙은 일상 안에 있는가, 밖에 있는가?

- 우리는 돈을 계승하고 인정하며 살아야 할까, 초월하고 무시하며 살아야 할까? 직장은? 가정은? 육아는? 

- 직장에서 충실한 것이 신앙에 충실한 것일까, 직장을 초월하여 대충 다니고 교회에 충실한 것이 신앙에 충실한 것일까?

정확한 답은 잘 모르겠지만, 확실한 것만 얘기하겠다.

- 신앙 생활은 일상 생활을 계승한 것이기 때문에, 신앙 생활과 일상 생활을 동일시하여, 직장 생활 잘하는 것이 신앙 생활 잘하는 것일까?

- 반대로, 신앙 생활은 일상 생활을 초월한 것이기 때문에, 신앙과 일상을 구분하여, 말씀, 기도, 교회에만 헌신하는 것이 신앙 생활 잘하는 것일까?

- 또한, 신앙은 일상의 삶이 중요하다란 핑게로, 직장만 열심히 다니고, 말씀, 기도, 교회를 소홀히 여긴다면?

- 반대로, 신앙은 일상을 초월하는 것이라는 핑게로, 직장, 가정, 육아 대충 게으르게 한다면?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을 계승하신 동시에 초월하신 것처럼, 우리도 일상 생활을 계승하며 동시에 초월해야 한다.

- 직장, 가정, 육아에 그리고 말씀, 기도, 교회가 우리 신앙의 본질이라 믿고 최선을 다해야 하는 동시에, 진짜 신앙은 오직 예수님 한 분 뿐이라는 믿음으로 예수님만 바라봐야 한다.

- 직장, 가정, 육아, 말씀, 기도, 교회에 헌신하되, 헌신하지 말아야 한다.

- 헌신을 통해 예수님을 알아야 하고, 헌신을 초월해서 또 예수님을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