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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서

예레미야(47) 23:9-24 거짓 예언 권하는 사회

<미양교회 팟캐스트 양따양>

미양교회에서 했던 설교를 바탕으로 진솔하게 신앙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팟캐스트도 많이 들어주세요.

https://www.podbbang.com/channels/1790233/

 

어린양을 따르는 어린양

예배 대신 예수님, 설교 대신 성경, 건물 대신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미양교회가 만드는 방송입니다.토끼와 개구리가 진솔하게 신앙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어린양과 같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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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거짓 예언자를 정죄한다.

- 정죄 핵심은 거짓 평화를 선포한 것이다.

- ‘만사가 형통할 것이고, 어떠한 재앙도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렘 23:17] 그들은 나 주의 말을 멸시하는 자들에게도 말하기를 ‘만사가 형통할 것이다. 주님의 말씀이다’ 한다. 제 고집대로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도 ‘너희에게는 어떠한 재앙도 내리지 않을 것이다!’ 하고 말한다.

그 거짓 예언 때문에 ‘어느 누구도 죄악에서 떠날 수 없게’ 되었다.

[렘 23:14] 그런데 이제 내가 예루살렘의 예언자들에게서 끔찍한 일들을 보았다. 그들은 간음을 하고 거짓말을 한다. 악행을 저지르는 자들을 도와서, 어느 누구도 죄악에서 떠날 수 없게 한다. 

- 죄악에서 돌이켜 하나님께 돌아가도록 하는 것이 예언자의 역할인데,

[렘 23:22] 그들이 나의 회의에 들어왔다면, 내 백성에게 나의 말을 들려주어서, 내 백성을 악한 생활과 악한 행실에서 돌아서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 거짓 예언자는 거짓 예언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죄악에 그대로 머물도록 했다.

이러한 예언자의 죄를 하나님은 음행, 간음, 거짓말이라고 하신다.

[렘 23:10] 진실로 이 땅에는 음행하는 자들이 가득 차 있다. …

[렘 23:14] 그런데 이제 내가 예루살렘의 예언자들에게서 끔찍한 일들을 보았다. 그들은 간음을 하고 거짓말을 한다. …

- 배우자 외에 다른 사람을 사랑하듯, 예언자가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사랑하도록 했기에 ‘음행’, ‘간음’이며,

-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사랑해도 괜찮다고 했기에 ‘거짓말’이다.

특히 이들은 공신력 없는 가짜 예언자가 아니었다.

- 성전에 등록된 진짜 예언자였다.

- 거짓 예언을 성전에서 공인된 절차를 거쳐서 행했다.

[렘 23:11] 예언자도 썩었고, 제사장도 썩었다. 심지어, 나는 그들이 나의 성전 안에서도, 악행을 저지르는 것을 보았다. 나 주의 말이다.

-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거짓 예언 행위가 일부 몰지각한 예언자에게 있는 문제가 아니라,

- 예언자 집단 전체, 더 넓게는 성전 시스템 자체, 더 넓게는 국가 통치 이념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 즉, 단순히 예언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거짓 예언을 수용하고 권장한 사회 전체의 문제였다.

따라서 본문은 예언자를 통해 이스라엘 사회 전반을 비판한다.

- 문제가 있는 일부 예언자만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 예언자와 더불어, 예언자에게 거짓 예언을 할 수 있도록 허가해 준 집권층, 거짓 예언을 듣고도 문제 삼기는커녕 기쁘게 들은 백성까지 이스라엘 전체를 비판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이스라엘은 ‘거짓 예언 권하는 사회’였다. 

 

이스라엘은 왜 거짓 예언 권하는 사회가 되었을까?

본문은 거짓 예언을 거짓 평화 선포에 한정한다.

- 이는 현실을 ‘긍정적’으로 왜곡하는 거짓말이다.

- 이러한 예로 ‘시크릿’이라는 자기계발서가 있다.

하지만 반대 방향을 가진 거짓 예언도 있다.

- 예를 들어, 사이비 종말론이다.

- 이는 현실을 ‘부정적’으로 왜곡하는 거짓말이다.

따라서 거짓 예언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가 아닌, 긍정적 혹은 부정적 방향으로 왜곡하는 것이다.

 

이런 왜곡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는지 말할 필요도 없다.

- 사이비 종말론 때문에 집단 자살에 희생된 사람이 많다.

그런데 간혹 현실을 긍정적으로 왜곡하는 것을 좋은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 대표적으로, ‘시크릿‘이 있다.

- 원하는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믿고 계속 생각하면, 실제로 그 일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 반대로 원치 않는 사고가 생기는 것은 그 일을 계속 걱정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그러니 원치 않는 일은 생각하지 말고, 원하는 일을 반복해서 생각하라는 것이다.

- 이는 현실을 긍정적으로 왜곡하는 것이다.

이러한 극단적인 경우 말고도, 일상에서도 이러한 왜곡은 널리 퍼져있다.

- 갑작스러운 사고로 괴로워하는 사람에게 ‘괜찮아. 잘 될 거야.’라는 위로 역시 긍정적인 왜곡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말을 할까?

- 왜 현실을 긍정적 혹은 부정적으로 왜곡하는 말을 듣고 싶어 하고, 하게 만들까?

- 왜 이스라엘 사회는 거짓 평화 선포가 유행처럼 퍼졌으며,

- 왜 ‘시크릿’이 전세계적으로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 왜 사이비 종말론이 반복해서 나타나고 있으며,

- 왜 ‘잘 될 거야.’라는 거짓 희망의 메시지를 주고받는 것일까?

 

이유는 하나이다.

-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들기 때문이다.

-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가지 반대 방향으로 왜곡하는 것이다.

- 긍정적으로 왜곡하여, 현실이 괴롭고 힘들지만, 조금만 지나면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는 근거 없는 기대를 갖는다.

- 그 기대감으로 괴로운 현실을 참아낼 힘을 얻는다.

- 그러나 실상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 반대로 부정적으로 왜곡하여, 괴로운 현실은 아무리 노력해도 결코 바꿀 수 없기에 포기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 그래서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사이비 교주에게 전 재산을 바치고 집단 자살에 동참한다.

- 그러면 비관적인 현실에서 벗어나 낙원에 들어갈 수 있다고 스스로 속일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래야 괴로운 현실에서도 마음을 편하게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시크릿’의 교주와 사이비 교주가 여전히 영향력을 갖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괴로운 현실을 받아들이기보다 왜곡하려 하나?

- 더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 현실을 왜곡하면, 아무 노력하지 않아도, 힘들게 문제를 해결하지 않아도, 당면한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러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그 안에 자신이 해결해야 할 문제가 보이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실제 노력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단순한 예를 들어보면,

- 한 달 전부터 계획된 중요한 시험이 바로 내일이다.

- 그런데 한 달 동안 차일피일 미루다가 공부하지 않았다.

- 지금 상태라면 내일 시험에서 불합격할 것이 뻔하다.

이런 상황에서 이상적인 반응은 무엇일까?

- ‘지난 한 달을 반성하고, 지금부터라도 최선을 다하자!’이다.

- 물론 하루 공부한다고 결과가 크게 달라지지 않을 수 있다.

- 그러나 합격을 위해 할 수 있는 노력은 공부밖에 없기에, 노는 것보다 공부하는 것이 낫다.

- 게다가 어차피 반드시 합격해야 하는 시험이라면, 다음 기회를 위해서라도 지금 공부하는 것이 낫다.

그러나 많은 경우 현실을 왜곡한다.

- 긍정적으로 왜곡하여, ‘어떻게든 잘 될 거야. 내일을 위해 컨디션 조절해야 하니까, 영화 한 편 보고 푹 자아겠다.’라고 생각하거나,

- 반대로 부정적으로 왜곡하여, ‘이미 너무 늦었어. 지금 공부한다고 달라질 게 있겠어? 어차피 해도 안 될 거, 그냥 놀자.’라고 생각한다.

왜 왜곡하는 것일까?

- 공부를 하자니, 공부하는 노력을 하기는 싫고,

- 그냥 놀자니, 내일 시험 때문에 불안해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 현실을 왜곡하면, 아무 노력 없이 당장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 힘들게 공부하지 않고, 마음 편하게 놀 수 있는 명분을 만들어 자신을 속일 수 있기 때문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현실을 왜곡한다고 정말 현실이 왜곡되는 것은 아니다.

- 긍정적으로 생각한다고 현실이 긍정적으로 바뀌지 않고,

- 부정적으로 생각한다고 현실이 부정적으로 바뀌지 않는다.

- 현실은 언제나 있는 그대로 있다.

-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이 있는데, 그러나 말만 한다고 현실이 바뀌지 않는다.

- 실력이 있으면 합격할 것이고, 실력이 없으면 불합격할 것이다.

물론 때로는 실력 없이 합격하는 운 좋은 경우도 있고,

- 실력이 있는데도 불합격하는 운 나쁜 경우도 있다.

- 그러나 ‘운’은 말 그대로 정규분포의 양 끝에 있어서, 일어날 확률이 아주 적은 경우이다.

- 결국 시간이 지날수록 정규분포의 가운데인 확률이 가장 큰 경우로 수렴한다.

- 이는 수학으로도 증명할 수 있을 정도로 자명한 결론이다.

- 즉, 자기 실력에 따른 결과로 수렴한다.

따라서 현실을 왜곡하는 것은 불필요한 것이다.

 

그럼에도 현실을 왜곡하는 이유는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이다.

- 원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일어난다.

- 현실을 왜곡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 내일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공부하기 위해 책상에 앉았다.

- 공부하려고 보니, 모르는 것이 너무 많고, 공부해야 할 분량이 너무 많다.

- 한시도 쉬지 않고 공부한다고 해도, 합격할 자신이 없다.

- 그러자 지난 한 달 동안 공부하지 않고 놀았던 시간이 후회된다.

- 어리석은 선택을 했던 자신이 부끄럽다.

- 게다가 알아서 잘할 것이라고 믿어 준 아버지를 생각하니 너무 미안하고,

- 반대로 제까짓 게 뭘 하냐며 의심의 눈초리로 본 어머니를 생각하니 너무 화가 난다.

- 그런 생각에 공부하지 않은 것이 더 후회되고, 더 부끄럽고, 더 화가 난다.

- 그래서 공부에 집중하려 하지만, 속상한 감정 때문에 글이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다.

- 그러니 더 애타고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다.

이렇게 절체절명의 상황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는 선택이 왜곡이다.

- ‘어떻게든 잘 될 거야.’ 혹은 ‘아무리 해도 안 돼.’라고 스스로 결론짓는다.

- 현실 왜곡을 할 때만 공부해야 한다는 부담감, 공부하지 않았다는 죄책감, 공부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불안함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 부담감, 죄책감, 불안함을 직면하지 않고 회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러면서 공부하지 않을 명분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부담감, 죄책감, 불안함의 근원은 무엇일까?

만약 한 달 내내 열심히 공부한 사람은 불안함이 전혀 없을까?

- 오히려 이런 사람은 한 달 전부터 너무 불안했기 때문에 한 달 내내 열심히 공부한 것이다.

- 불안함은 공부했다고 없어지지 않는다.

- 어떤 면에서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은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더 불안하다.

- 즉, 공부했건 하지 않았건, 똑같이 불안하다.

 

불안함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딱 한 부류밖에 없다.

- 시험의 결과가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다.

- 합격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그 부류의 사람은 언제나 불안하지 않을까?

- 마음에 병이 있어서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 자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꼭 잘하고 싶은 시험, 보고서, 프레젠테이션, 발표회 등에서는 여전히 불안하다.

- 사람마다 중요하게 여기는 분야가 다르기 때문에, 불안함을 느끼는 분야가 다를 뿐이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 불안하다.

- 열심히 하지 않아서 불안하고,

- 불안해서 열심히 하며,

- 열심히 했기 때문에 더 불안하다.

- 그런 점에서 열심히 하지 않은 사람도, 열심히 한 사람도 불안하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현실을 왜곡한다.

-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말이다.

- 그래서 모든 사회는 결국 ‘거짓 예언 권하는 사회’가 될 수밖에 없다.

 

왜 불안할까?

- ‘성과’를 원하기 때문이다.

- 그런데 원하는 대로 ‘성과’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 왜냐하면 항상 노력한 만큼 성과가 나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 그래서 성과를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안함의 근원은 ‘성과 중심 사고’이다.

- 성과를 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불안하다.

- 통제할 수 없는 성과를 통제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이다.

 

그런데 왜 성과를 내야 하냐?

- 성과만이 상대적 비교가 가능하기에 거래 가치가 있어서, 다른 것과 교환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세상은 성과를 기준으로 사람을 1등부터 70억 등까지 순위를 매겨야,

- 성과를 낸 사람만 많은 사람을 통제할 자유가 생기고,

- 성과를 내지 못 한 사람은 많은 사람에게 통제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거래의 세계에 사는 사람이 불안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따라서 불안함의 근원은 거래 가치관이다.

- 거래의 세계 속에서 자신을 거래 대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결국 불안하다.

- 그 불안함 때문에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고 방종하다가, 결국 ‘어떻게든 잘 될 거야.’라고 낙관하거나 ‘아무리 해도 안돼.’라고 비관한다.

- 혹은 반대로 그 불안함 때문에 누군가는 지나치게 열심히 한 후, 결국 ‘열심히 했으니 잘 될 거야.’라고 낙관하거나 ‘열심히 해도 안 돼.’라고 비관한다.

- 이렇게 현실을 왜곡하여 불안함을 모면한다.

그래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게 만든다.

 

그런 상황에서 거짓 예언이 나오는 것이다.

거짓 예언자가 선포하는 거짓 평화가 거짓인지 모르기 때문이 아니다.

- 오히려 그 거짓말을 듣고 싶어서 거짓 예언자를 찾아오는 것이다.

- 성과를 내야 한다는 불안함이 있는데,

- 아무리 노력해도 성과를 낼 자신이 없기에,

- 단지 불안함을 모면하기 위해 거짓 예언자를 찾는다.

- ‘만사가 형통할 것이고, 어떠한 재앙도 내리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을 듣기 위해서 말이다.

- 그 말로 자신을 세뇌하여, 당장 마음을 편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 현실에서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말이다.

거짓 평화 선포를 듣고 싶어 하는 마음 이면에는 자신에게 재앙이 내릴 것이라는 불안함이 있다.

- 여기서 말하는 재앙은 성과를 내지 못해 거래 가치가 떨어져서, 경쟁에서 밀리고 사회에서 도태되는 것이다.

- 그 불안함을 거짓 평화로 억누르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종교는 아편’이라는 말로 표현된 종교의 폐단이다.

- 현실을 전혀 바꾸지 않고 현실을 왜곡하여, 마음만 편하게 만들어주는 꼴 말이다.

- 마치 마약이 현실과 상관없이 쾌락을 주는 것처럼 말이다.

- 영화 ‘밀양’에서 유괴범이 현실 문제 해결에는 상관없이 혼자 평안을 얻은 것처럼 말이다.

- 이는 유괴범에게도 잘못이 있지만, 죄 용서의 확신을 갖도록 거짓 평화를 선포한 목사 잘못 더 크다.

본문이 비판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 거짓 평화 선포로 현실을 왜곡하고 외면하게 하는 것 말이다.

이는 단지 예언자만의 문제도 아니고, 거짓 예언을 구하는 백성만의 문제도 아니다.

- 거짓 예언을 권하게 한 사회 전체의 문제이며,

- 성과에 따라 거래 가치를 매기는 거래 가치관의 문제이다.

거래 가치관은 반드시 거짓 예언 권하는 사회를 만들어서 현실을 왜곡시킨다.

 

현실 왜곡의 문제는 무엇이냐?

생각해보지 않아도 문제가 많다는 것은 알 수 있지만, 가장 중요한 문제 하나만 꼽으면,

-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알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현실을 왜곡하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왜곡되고,

- 왜곡된 눈은 자신조차 왜곡해서 인식한다.

- 그래서 자신을 긍정적 혹은 부정적으로 왜곡한다.

어떤 부분은 지나치게 자부심을 갖고, 어떤 부분은 지나치게 자격지심을 갖는다.

- 그래서 지나친 자부심 때문에 할 수 없는 일을 하려다가 실패하고,

- 반대로 지나친 자격지심 때문에 할 수 있는 일도 미리 포기해 버린다.

이런 상태는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한다는 것도 문제지만,

- 그보다 성과를 내는 과정에서 자신을 알아갈 기회를 잃는 것이 더 문제이다.

- 왜곡된 인식 때문에 자신에게 잘 맞는 일은 해보지도 않고 포기하고,

- 잘 맞지 않는 일만 하다가 인생을 낭비한다.

그래서 결국 불만족 속에서 자신을 혐오하거나, 세상과 하나님을 원망하고,

- 불안함 속에서 거짓 예언을 의지하며 현실을 외면한다.

- 그렇게 자신은 소멸한다.

이것이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게 되는 과정이다.

 

이러한 과정을 다른 사람에게도 똑같이 반복한다.

- 왜곡된 눈으로 다른 사람을 왜곡해서 인식한다.

- 지나치게 긍정적으로 혹은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인식하여,

- 할 수 있는 것을 하지 말라고 비난하고,

- 할 수 없는 것을 하라고 강요한다.

- 결국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상대방에게 실망하고,

- 있는 그대로 사랑하지 못한다.

이렇게 자신을 포함하여 누구도 사랑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현실 왜곡의 결정적인 문제이다.

 

그렇기 때문에 거래의 세계에서 사랑의 세계로 탈출해야 하는 것이다.

사랑의 세계에서는 현실을 왜곡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 현실을 직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자신과 타인을 왜곡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래서 서로를 있는 그대로 용납하고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왜냐?

- ‘성과’가 아니라 ‘존재’로 사람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 사람을 1등부터 70억 등까지 수직적으로 줄 세우지 않고, 

- 각 사람을 수평적으로 각자가 가진 개성에 따라 있는 그대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지 않을 때,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드러내 보일 수 있다.

- 그러니 ‘현실 속에 있는 자신’과 ‘자신이 처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

- 왜곡 없이 말이다.

그러면 거짓 예언은 설 자리를 잃는다.

- 누구도 찾지 않고, 누구도 권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럴 때야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도 있는 그대로 들린다.

[렘 23:19~20] 보아라, 나 주의 분노가 폭풍처럼 터져 나온다. 회오리바람처럼 밀려와서 악인들의 머리를 후려칠 것이다. (20) 나 주는 나의 마음 속에 뜻한 바를 시행하고 이룰 때까지, 분노를 풀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 날이 오면, 너희가 이것을 분명히 깨달을 것이다.

- 이전에는 하나님의 심판 메시지가 왜곡해서 들렸다.

- 긍정적으로 왜곡하여, ‘하나님의 저주는 다 우리 잘 되라고 하시는 말씀이지, 정말로 우리를 저주하시는 것은 아니야. 결국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실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라고 한다.

- 반대로 부정적으로 왜곡하여, ‘하나님은 이상해. 어떻게 우리에게 이렇게 화를 내실 수가 있어. 저런 하나님이라면 결국 우리를 전부 멸망하실 거야. 노력해도 소용없어.’라고 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의도는 저주만도 회복만도 아니다.

- 우리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도록 하시는 것이다.

- 그것을 위해 잘못된 부분을 명확하게 인식하도록 하는 것이다.

- 잘못된 부분이 얼마나 문제인지 지적하기 위해 저주하시는 것이고,

- 그것을 인식하고 인정하여,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도록 회복시키시는 것이다.

 

참고로, 하나님은 잘못된 부분, 즉 죄를 고치는 것에 목적이 있지 않다.

- 죄를 인식하고 인정하는 것에 있다.

어떻게 이것을 확신 있게 말하냐면, 레위기의 제사 율법 때문이다.

- 제사 율법을 정확하게 정의하면, ‘죄를 지었을 때 용서받는 방법’이다.

- 물론 율법에 어느 정도 죄 억제 효과가 있다.

- 제사에 상당한 비용이 들어가기 때문에, 범칙금과 같은 역할을 한다.

- 그래서 죄를 고치는 효과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를 고치지 않아도, 죄에 대한 적법한 제사를 드리기만 해도 충분히 만족해하신다.

- 제사 율법을 충실히 따르면 죄를 다시 묻지 않으신다.

- 이는 제사 제도 자체가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때문이 아니다.

- 제사 비용을 감수할 만큼 자기 죄를 인식하고 인정했기 때문이다.

- 죄 인식만 있으면 죄 자체는 하나님과 관계 맺는 것에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죄 인식을 가진 사람은 자연스럽게 죄와 멀어지기 마련이다.

- 죄와 멀어지는 과정이 진정성 있는 죄 인식을 증명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죄 인식이 본질이고 죄 없음은 부-작용(side-effect)이라는 것이다.

- 하나님은 죄 인식에 진정성이 있냐만 보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이 ‘바른 인식’에 있기 때문이다.

- 자신을, 타인을,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보고 사랑하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 그래서 우리가 우리답게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이 하나님답게 우리의 하나님으로 삼는 것이다.

- 그것이 우리 자신과 하나님을 바르게 인식한다는 것이다.

[렘 24:7] 이제는 내가 그들에게 나를 그들의 주로 알아볼 수 있는 마음을 주겠다. 그러면 그들이 온전한 마음으로 나에게 돌아와서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결론 - ‘성과’가 아닌 ‘존재’에 가치를 두자.

‘거짓 예언’을 권하는 이유,

- 거짓 예언을 통해 ‘현실 왜곡’을 하는 이유,

- 현실을 왜곡할 수밖에 없도록 ‘불안함’을 갖는 이유,

- 불안함을 유발하는 ‘성과’를 기대하는 이유는, 

- ‘존재’를 잃었기 때문이다.

-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지 못하고, 거래 대상으로 보기 때문이다.

- 같은 관점에서 자신, 타인, 하나님까지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과에 가치를 두면 자신과 사랑하는 타인에게 불만이 생긴다.

 

따라서 가치관이 바뀌어야 한다.

- ‘성과’가 아닌 ‘존재’에 가치를 둬야 한다.

- 자신이 세상에 얼마나 큰 유익을 주는지가 아니라,

-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에 가치를 두어야 한다.

- 자신이 얼마나 자기다운가에 가치를 둬야 한다.

그래야만 자기다움을 회복할 수 있고,

- 자기를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다.

 

그것을 위해 우리는 성과를 포기해야 한다.

- 성과를 내고자 하는 마음 자체를 포기해야 한다.

- 한 걸음 더 나아가, 성과를 포기해서 성과를 내겠다는 마음조차 포기해야 한다.

성과를 내야 한다는 불안감에서 벗어날 때만 있는 그대로의 자기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 성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감에 둘러싸인 상태에서 자기를 알고 싶다는 기도는 무의미하다.

- 그 기도는 성과를 파괴하는 것으로 응답된다.

 

성과가 아니라 존재 자체에 의미를 둬야 한다.

- 먹고, 자고, 숨 쉬며, 주변 사람과 상호 작용하는 그 자체에 의미를 둬야 한다.

- 아무 성과도 내지 못한다고 해도, 매 순간이 귀하고 가치 있게 여겨질 때,

-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나로 기뻐할 수 있다.

자기가 자신을 있는 그대로 기뻐할 때, 타인에 대해서도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다.

- 사랑하는 사람에게 성과를 강요하지 않을 수 있다.

- 아무 성과를 내지 않아도 너는 존재 자체로 사랑받기 합당한 존재라는 인식을 자녀에게 심어줄 수 있다.

그리고 결국 같은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

- 그래서 내가 하나님의 백성인 것과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인 것에 만족할 수 있다.

이 상태가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계획하시고 약속하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