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양교회 팟캐스트 양따양>
미양교회에서 했던 설교를 바탕으로 진솔하게 신앙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팟캐스트도 많이 들어주세요.
https://www.podbbang.com/channels/1790233/
어린양을 따르는 어린양
예배 대신 예수님, 설교 대신 성경, 건물 대신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미양교회가 만드는 방송입니다.토끼와 개구리가 진솔하게 신앙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어린양과 같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
www.podbbang.com
본문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왕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 왕이 가진 권력을 포기하는 것이다.
- 왕정 국가에서 왕은 유일한 주권자이다.
-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는 오직 왕에게만 있다.
- 그 외 사람들은 왕의 자유에 의해 제한된다.
따라서 왕은 누구에게도 희생할 필요가 없다.
- 누구를 위해 자유를 제한할 필요가 없다.
- 원하는 것을 전부 할 수 있다.
- 이것이 왕이 가진 권력이다.
그래서 화려한 궁전이 짓고 싶은데, 궁전을 지을 재료와 노동력이 없을 때,
- 왕이 해야 할 일은 딱 하나 바로 '명령'이다.
- 그러면 누군가가 노동력을 착취해서 돈을 모으고, 모은 돈으로 나무를 산 후,
- 또 노동력을 착취해서 궁전을 짓는다.
왕은 궁전을 짓는 과정에 관심 가질 필요도 없다.
- 왕이 명령했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그 일을 해야 한다.
- 그 과정 중에 누군가 피해를 본다고 해도 무조건 감수해야 한다.
왕은 다 지어진 화려한 궁전에서 감탄만 하면 된다.
그런데 하나님은 왕에게 그 자유를 포기하라고 하신다.
- 화려한 궁전을 짓고 싶어도, 참으라는 것이다.
- 백성을 희생시키지 말고, 백성을 위해 희생하라는 것이다.
왜?
- 단순하게 말해서, 왕의 자유 때문에 백성의 자유가 제한되니까.
- 왕의 명령에 따라 궁전 짓는 일에 강제로 투입되어 생업을 포기해야 하고,
- 그것 때문에 한 가족 전체가 굶게 되며,
- 그런 가족이 한둘이 아니라, 전체 백성이 그렇기 때문이다.
- 그래서 가난한 사람과 억압받는 사람이 생기기 때문이다.
[렘 22:17] 그런데 너의 눈과 마음은 불의한 이익을 탐하는 것과 무죄한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하는 것과 백성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것에만 쏠려 있다.
그러니 백성이 자유롭도록 왕의 자유를 제한하라는 것이다.
- 그래서 백성이 소박하게나마 배불리 먹고 살 수 있도록 말이다.
본문을 겉으로만 보면, 왕이 의도적으로 불의한 이익을 얻기 위해 죄 없는 사람을 죽이고 백성을 억압하고 착취한 것처럼 보인다.
- 왕이 명백한 죄를 지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제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 왕은 단지 '말'만 했을 뿐이다.
- 신하에게 일정한 형식을 갖춰서 구체적인 명령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 지나가면서 '궁전이 좀 소박하네.'라는 혼잣말을 중얼거렸을 수도 있다.
- 그런 후에 자신이 그런 말을 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과도하게 충성스러운 신하들이 왕도 모르게 궁전을 지은 것이다.
- 그런 면에서 왕은 결백하다.
- 죄 의식이 없을 것이다
- 그런데도 하나님은 착취에 대한 모든 죄값을 왕에게 물은 것이다.
그러니 왕이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 자신이 한 일도 아니고, 자신이 시킨 것도 아닌 일 때문에 정죄 받고 멸망해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 더 나아가, 자신이 왕인데, 이 정도 자유와 권리도 누리지 못하냐며,
- 하찮은 백성이 조금 훼손된 것이 뭐 그리 대수냐고 소리칠 것이다.
왕이 백성을 착취할 수 있다는 생각은 왕뿐만 아니라 백성도 가지고 있었다.
- 당시에 왕이 백성의 희생을 감수하고 자유를 누리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 현실에 맞게 재해석하면,
- 자본주의 관점에서 사유재산을 자유롭게 사용하는 우리에게,
- 사회주의 관점에서 자유를 제한하여 우리의 사유재산을 공공에 분배하겠다는 것과 같다.
- 그래서 사유재산을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우리의 자유를 제한하여,
- 돈이 없어서 자유가 제한된 사람을 자유롭게 해주겠다는 것이다.
- 마치 백성을 마음껏 착취할 수 있는 왕의 자유를 제한하여,
- 백성을 자유롭게 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처럼 말이다.
이념 논쟁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 백성을 위해 왕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그만큼 이상한 명령이라는 것이다.
- 왕이 느낀 당혹감이 마치 우리의 사유재산 사용이 제한될 때 느끼는 당혹감과 같다는 뜻이다.
- 내가 받은 월급으로 치킨을 시켜 먹었더니, 마음대로 치킨 시켜 먹은 죄를 지었다며 정죄를 당한 꼴이다.
- 나는 치킨을 사 먹는데 누구의 것을 착취한 것이 아니라, 내 돈으로 사 먹었다고 항변할 것이다.
- 마치 왕이 내 백성을 내가 사용하는 것이 왜 문제냐고 항변하는 것처럼 말이다.
- 왕에게 백성은 사유재산 같은 것이니 말이다.
말하고자 하는 바는, 하나님이 자유를 포기하라는 명령이 왕에게 상당히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무리한 명령을 내리신 이유는 무엇일까?
왜 왕에게 백성을 이용(착취)할 자유를 포기하라고 하셨으며,
- 왜 우리에게 사유재산을 이용할 자유를 포기하라고 하신 것일까?
알다시피, '사랑' 때문이다.
- 하나님이 정말 하고 싶은 말씀은, '자유의 포기'가 아니라, '사랑'이다.
- 왕이 백성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 물론 그 과정에 자유의 포기가 동반된다.
- 마치 결혼 과정에서 배우자 외의 모든 사람과의 성적 관계의 포기가 동반되는 것처럼 말이다.
- 그러나 성적 관계 포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배우자를 사랑하라는 것이 핵심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명령하신 자유 포기와 결혼에서 동반하는 성적 관계 포기에는 차이가 있다.
- 성적 관계 포기는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자유 포기는 낯설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길까?
- 정말 두 가지가 다른 것이기 때문에 생기는 차이일까?
- 아니면 원래는 똑같은 것인데, 우리가 다르다고 착각하기 때문일까?
왕은 왜 자유를 포기해야 하는가?
- 우리는 왜 사유재산을 이용할 자유를 포기해야 하는가?
- 우리는 왜 배우자 외의 사람과 성적 관계 맺을 자유를 포기해야 하는가?
모두 사랑하기 때문이다.
- 왕이 백성을 사랑하기 때문에 백성에게 자유를 준다.
- 그에 따라 왕이 자유를 포기한다.
- 우리는 내가 번 돈을 사용할 자유를 가족에게 준다.
- 그에 따라 내가 사고 싶은 것을 사는 자유를 포기한다.
- 우리는 배우자에게만 자신과 성적 관계 맺을 자유를 준다.
- 그에 따라 배우자 외의 사람과 성적 관계 맺을 자유를 포기한다.
이렇게 사람은 사랑 때문에 자유를 포기한다.
- 사랑 안에 자유 포기가 전제된다.
- 자유를 지키면서 사랑할 방법은 없다.
- 오히려 자유 포기가 사랑을 고백하는 방법의 하나이다.
그렇다면 내가 번 돈을 사용할 자유를 가족에게 주기 위해 돈 쓸 자유를 포기하는 것이 무리인가?
- 배우자를 위해 다른 사람과 성적 관계 맺을 자유를 포기하는 것이 무리인가?
- 전혀 아니다.
그런 측면에서 왕이 백성의 자유를 위해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는 것 역시 전혀 무리가 아니다.
- 즉, 하나님이 왕에게 백성을 사랑하여 자유를 포기하라는 명령은 마땅한 것이다.
- 마치 결혼식 주례가 외도하지 말고 배우자만 사랑하라는 주례사를 하는 것과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에게 자유를 포기하라는 명령이 쉽게 납득되지 않는 이유는,
- 왕이 백성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 왕에게 백성은 자신과 동등한 존재로서, 존중받아야 할 대상이 아니라,
- 소유물이고, 이용 대상, 거래 대상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 왕이 백성을 보호하긴 하지만,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소유물로써 이용하려는 이유 때문이다.
- 마치 내가 자동차를 소중히 여기는 것처럼 말이다.
그랬기 때문에 왕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 왕은 사랑을 거부했다.
- 거래의 덪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것이 이스라엘이 멸망한 결정적인 원인이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왕에게 백성을 사랑하라는 명령을 하셨을까?
왜 실현 불가능한 명령을 하셔서 왕이 거부할 수밖에 없게 하셨을까?
- 왜 거부할 수밖에 없는 명령을 하신 후, 거부한다고 멸망하도록 하셨을까?
이 명령은 우리에게도 내려졌다.
- 우리에게도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생존의 자유를 포기하고, 죽음을 감수하고 사랑하라고 명령하셨다.
- 그런 후 우리가 사랑하지 않으면, 사랑하지 않았다는 죄로 심판하신다고 경고하셨다.
이렇게만 생각하면 하나님은 폭군이고 깡패이다.
그러나 사랑의 명령은 전적으로 우리를 위한 것이다.
- 하나님이 사랑받고 싶어서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다.
- 사랑이 가장 필요한 사람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물론 사랑은 언제나 양방향이다.
- 내가 사랑하면, 사랑의 유익이 나에게만 머무르지 않는다.
- 하나님과 이웃에게 전달된다.
- 사랑하라는 명령은 분명히 하나님과 이웃에게 유익을 준다.
하지만 하나님의 목적이 그것이었다면, 그것을 위한 더 좋은 방법이 있다.
- 사랑이 필요한 이웃이 있어서, 그들에게 사랑을 주시고자 우리에게 명령한 것이라면,
- 이는 어리석은 방식이다.
- 사랑이 필요한 이웃이 있다면, 하나님이 직접 그들을 사랑하면 되지, 왜 우리에게 명령하시겠는가.
- 하나님이 직접 사랑하시는 것이 우리를 통해 간접적으로 사랑하시는 것보다 더 나은데 말이다.
게다가 하나님은 우리의 사랑이 필요 없다.
- 삼위일체 안에서 충분한 사랑을 누리시기 때문이다.
- 그런 점에서 하나님은 사랑받고자 사랑을 명령하시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사랑하라는 명령은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다.
- 하나님도 아니고 이웃도 아니다.
이 논리를 이스라엘 왕에게 적용하면,
- 하나님이 왕에게 백성을 착취하지 말고 사랑하라고 명령하신 이유는 왕을 위해서이다.
- 물론 왕이 사랑으로 자유를 제한하면, 백성에게 자유가 늘어나는 유익이 생긴다.
- 하지만 만약 하나님이 백성에게 자유를 주시길 원하셨다면, 이 방식은 잘못되었다.
- 광야에서 맛나가 내리듯, 하나님이 직접 백성에게 음식을 주시면 된다.
- 그러면 배고픔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성이 아닌 왕에게 명령하신 이유는 왕에게 유익을 주시기 위해서이다.
- 하나님이 착취당하는 백성을 직접 보호하시기 위한 것이 아니다.
- 하나님을 위한 것은 더욱 더 아니고 말이다.
그러면 사랑의 명령이 어떻게 왕에게 유익을 주는가?
하나님은 왕에게 사랑으로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라고 하셨다.
- 왕을 위해 백성을 이용(착취)하지 말라고 하셨다.
- 대신 백성에게 자유를 주라고 하셨다.
자유 포기가 어떻게 왕에게 유익을 주겠는가.
- 오히려 손해를 끼치는 것 아닌가?
우리가 신앙에 대해 막연한 두려움일 가진 것도 역시 이 때문이다.
- 신앙을 가지면, 누리던 풍요 다 빼앗기고, 험한 오지에 가서 선교하다가, 풍토병에 걸려 비극적으로 죽는 것 아닌가하는 걱정을 하게 된다.
- 왜냐하면 사랑으로 자유를 포기하는 것을 손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신앙을 자유롭게 누리던 풍요가 박탈당하는 것에 초점을 두기 때문이다.
- 마치 결혼이 한 사람의 배우자를 얻는 것이 아니라,
- 35억의 잠재적 배우자를 잃어버리는 것에 초점을 두는 것과 같다.
다시 말하지만, 사랑에는 박탈과 포기가 전제된다.
- 결혼은 배우자 외의 성적인 관계를 박탈당하고 포기하게 된다.
그러나 그렇게 박탈과 포기가 있다고 결혼이 손해인가?
- 오히려 박탈과 포기를 감수할 가치가 있기 때문에 결혼하는 것이다.
- 박탈과 포기가 있지만, 그럼에도 결혼은 유익이다.
- 결혼은 박탈과 포기가 없기 때문에 유익이 아니라,
- 박탈과 포기를 상쇄하고서도 남는 충분한 유익이 있기 때문에 결혼하는 것이다.
- 그 유익을 얻기 위해 결혼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도 우리에게 사랑을 명령하신 것이다.
- 우리에게 유익을 주시기 위해서 말이다.
그렇다면 사랑이 어떻게 자신에게 유일을 주냐?
사람이 사랑하면, 상대방에게 사랑받을 것이라고 기대하게 된다.
- 여기서 말하는 기대는 대가나 보상이 아니라 반응 혹은 관계이다.
- 준 것만큼 받을 것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나눌 사랑을 기대한다.
물론 사랑한다고 항상 사랑받지는 못한다.
- 단순히 반응이 없을 수도 있고,
- 사랑을 빌미로 착취하려는 사람도 있다.
그러면 당연히 실망하고 상처받는다.
- 이것 때문에 사람은 사랑하기를 주저한다.
- 사랑했을 때, 사랑받는 경우보다 그렇지 못한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 실망을 반복해서, 마음을 닫아버리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그럼에도 사랑하는 사람은 마음 한구석에 기대를 품고 산다.
-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을 사랑해서, 마음껏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사는 풍요로운 인생을 말이다.
-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온전히 신뢰하여, 자신의 전부를 드러내도 전혀 거리낌 없는 대상, 자신의 치부까지도 전부 사랑해줄 대상을 만난 것을 기대한다.
- 그래서 지금은 사랑받고 지지받지 못해서 잔뜩 웅크려 있지만,
- 사랑과 지지로 활짝 피게 될 그날을 기대한다.
- 그렇게 아무런 두려움, 아무런 억압 없이 나다움을 찾고 회복할 날을 기대한다.
- 물론 현실이 그렇지는 못하지만, 이렇게 사랑이 성취되는 꿈을 갖고 산다.
이것이 사랑이 사람에게 주는 유익이다.
- 이것이 사랑의 능력이다.
- 나답게, 사람답게 하는 능력 말이다.
- 그래서 사람은 상처받고 실망할 것 알면서도 또 다시 사랑을 시작한다.
- 사랑받을 기대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반면에 사랑하지 않고 거래하는 사람은 반대의 삶을 산다.
- 사람이 거래하면, 상대방도 자신에게 거래할 것이라는 두려움을 갖게 된다.
- 나는 상대방에게 10 주고 15 가져갔는데, 상대방은 나에게 10 주고 20 가져가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 그래서 나에게 손해가 생기지 않을까 걱정한다.
물론 거래는 유익을 준다.
- 10 주고 15 가져갔으니, 5만큼 유익이 생긴다.
- 사랑보다 거래는 훨씬 더 눈에 보이는 유익을 즉시 준다.
- 마치 편의점에서 물건 사듯 말이다.
- 돈을 지불하는 즉시 물건을 받는다.
이것이 거래의 매력이며, 거래의 덫이다.
- 거래에서 쉽게 빠져나올 수 없는 이유이다.
- 이스라엘 왕도 그랬고, 우리도 그렇다.
하지만 그렇게 거래로 유익을 얻고, 얻은 유익으로 자유롭게 살아도, 언제나 마음 한구석에 두려움이 깔려 있다.
- 언제 뒤통수 맞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 내가 상대방 모르게 10 주고 15 가져간 것처럼, 상대방도 나 모르게 10 주고 20 가져갈 수 있다는 두려움 말이다.
이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하냐?
- 더 교묘하게 상대방을 속여서, 더 악착같이, 집요하게 돈을 모은다.
- 그래야 만약에 나도 모르게 뒤통수를 맞아서 손해를 본다고 해도,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 살아남아야만, 나도 상대방 모르게 뒤통수를 쳐서, 손해를 복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거래하는 사람은 불신 속에 산다.
- 누구도 믿고 의지하지 않는다.
- 모든 사람을 잠재적인 적으로 본다.
- 물론 앞에서는 믿는 척, 의지하는 척한다.
- 그래야 상대방과 거래할 수 있고, 거래해야 유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언제나 자신의 본 모습을 숨겨야 한다.
- 자신을 숨겨야 자신이 다른 사람을 속이기는 쉽고, 다른 사람이 자신을 속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 마치 전쟁에 나가는 군인이 방탄 조끼를 입고 위장을 해야, 공격하기는 쉽고, 공격당하기는 어려운 것처럼 말이다.
- 동시에 자신의 본 모습이 드러나 약점 잡힐까 봐 노심초사한다.
- 언제나 불안과 두려움 속에 있다.
이 때문에 결국 본 모습은 잊혀지고, 위장된 모습을 자신이라고 착각하게 된다.
- 자신을 잃어버린 채 살면서도, 잃어버린 줄조차 알지 못한다.
- 그렇지만 위장된 모습으로 살아가느라,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과 같은 찝찝함을 언제나 마음에 품고서 말이다.
이것이 거래가 주는 해악이다.
그랬기 때문에 이스라엘 왕도 언제나 불안해했다.
- 화려한 궁전에서,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지만,
- 언제든지 믿었던 신하가 배신할 수 있다는 두려움을 가졌다.
- 그리고 자신에게 착취당하는 백성을 보며, 언젠가는 백성이 봉기하여 혁명을 일으키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하며 살았다.
그 때문에 왕은 점점 더 마음의 벽을 쌓았고, 마음의 성 안에서 홀로 외로웠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의 명령을 내리신 것이다.
- 황폐한 마음의 성에서 꺼내주기 위해서 말이다.
- 무거운 방탄 조끼 벗고, 피부에 트러블 일으키는 위장 크림 지우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다.
왕이 백성을 거래 대상이 아니라 사랑 대상으로 봐서,
- 백성도 왕을 신뢰하고 지지하여, 왕은 백성이 봉기할 잠재적 위험에서 벗어난다.
- 게다가 백성은 왕의 지원과 사랑으로 더 많은 농작물을 생산하고,
- 그로 인해 백성이 강해질 뿐만 아니라, 국가 재정도 튼튼해진다.
- 그러면 국방력을 강화하여, 전쟁의 위협에서 벗어나고,
- 안정된 국력으로 강대국과 능동적인 외교를 하여, 강대국의 지나친 조공 요구를 방어할 수 있다.
- 그래서 국가 재정은 더 튼튼해지고, 백성의 삶은 더 안정되며, 왕권은 더 굳건해진다.
- 그 결과 이러한 선순환 속에서 왕도 백성도 하나님께 감사하며, 참된 신앙을 회복할 수 있고,
- 하나님의 부르심 받은 백성인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도 확립할 수 있다.
물론 사랑하는 과정에서 배신자가 나타날 수 있다.
- 왕이 사랑으로 누군가는 배신할 수 있다.
- 사랑으로 응답하지 않고, 거래로 반응하여 오히려 백성이 왕을 착취할 수 있다.
- 그 때문에 국가 재정이 악화되고, 백성의 삶이 피폐해질 수 있다.
- 사랑의 관계는 배신자에게 언제나 취약하다.
하지만 하나님을 통해 참된 사랑을 깨닫고, 희생을 감수하며 사랑하려는 사람은 누구보다 하나님이 지켜주신다.
- 사람에게는 참되게 사랑하려는 마음을 갖는 것도 불가능하고,
- 좋은 마음 가지고 사랑을 행하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 사랑하는 마음을 갖도록 하는 것도 하나님이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랑을 행하도록 하시는 분 역시 하나님이다.
[빌 1:6] 선한 일을 여러분 가운데서 시작하신 분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그 일을 완성하시리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그래서 지난 본문에서 이스라엘 왕이 사랑을 행하려고 하면,
- 배신자의 거래로 사랑의 관계가 깨질 위협이 있더라도,
- 하나님께서 직접 거래로부터 사랑을 지켜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신 것이다.
- 사랑이 선순환되어, 이스라엘이 정체성을 회복하도록 하실 것이라고 예고하셨다.
[렘 22:3~4] 나 주가 말한다. 너희는 공평과 정의를 실천하고, 억압하는 자들의 손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하여 주고, 외국인과 고아와 과부를 괴롭히거나 학대하지 말며, 이 곳에서 무죄한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하지 말아라. (4) 너희가 이 명령을 철저히 실천하면, 다윗의 보좌에 앉는 왕들이 병거와 군마를 타고, 신하와 백성을 거느리고, 이 왕궁의 대문 안으로 들어올 것이다.
사랑을 거래로부터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특히 예수님을 죽음 부활을 통해 드러난다.
- 예수님께서 일관되게 사랑하셨다는 것과 바리새인이 일관되게 거래했다는 것은 명백하다.
- 그래서 예수님의 사랑은 거래에 의해 무참히 짓밟혔다.
- 예수님의 사랑에 거래로 반응한 바리새인 때문에, 사랑의 선순환이 파괴되는 듯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류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방법으로 사랑을 지키신다.
- 그것이 바로 '부활'이다.
- 하나님은 사랑하다가 거래에 배신당해 죽임당하는 예수님을 다시 살리신다.
- 이는 단순히 사람 하나가 다시 살아난 것을 넘어서,
- '사랑이 영원하다.'는 진리를 철저히 지키시는 하나님의 열정을 보여준다.
이렇게 사랑에 열정적인 하나님 덕분에 우리는 마음 놓고 사랑에 몰입할 수 있는 것이다.
- 사랑은 취약하지만, 하나님은 강하시기 때문이며,
- 하나님은 모든 열정을 사랑에 쏟아부으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도 거래의 덫에서 벗어나 사랑해야 한다.
- 하나님 때문에, 주변 사람들 때문이 아니다.
- 자기 자신 때문이다.
- 사랑하는 것만이 자신을 사랑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사랑할 때만 다른 사람도 자신을 사랑할 것이란 기대를 할 수 있고,
- 그 기대가 있을 때만 자신이 있는 그대로 사랑받을 존재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고,
- 그럴 때만 자신의 약점조차 숨길 필요 없이 드러낼 수 있고,
- 그럴 때만 자신의 치부를 인식하여 자세히 살펴볼 수 있고,
- 그럴 때만 그 치부 때문에 생긴 인격을 이해할 수 있고,
- 그럴 때만 자신의 전부를 이해할 수 있고,
- 그럴 때만 자신의 전부를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신의 전부를 사랑하는 사람만 다른 사람의 약점과 치부까지 사랑할 수 있다.
- 동시에 다른 사람의 치부까지 사랑하려는 사람만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치부까지 사랑받을 수 있다.
이렇게 자신의 치부까지 사랑하고 사랑받은 사람만 두려움 없이 자유로울 수 있다.
- 어떤 억압에도 억눌리지 않고, 나다움을 마음껏 드러낼 수 있다.
결론 - 함부로 사랑하지 말라! 그러나 과감히 사랑하자.
사랑은 정말 취약하다.
- 100명 중의 99명이 사랑해도 1명만 거래하면, 100명의 공동체는 신뢰가 깨진다.
-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며, 누구도 사랑하지 않게 된다.
이것 때문에 모든 사람이 사랑을 원하지만, 어디서도 참된 사랑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 참된 사랑을 지레 포기했기 때문이거나,
- 어렵게 시도했지만, 한 명의 배신자 때문에 좌절하여 포기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기 위해서는 배신자를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 배신자는 무조건 어디에나 있다.
- 지금 내가 행하는 사랑이 사랑으로 돌아올 가능성보다 배신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훨씬 높다.
- 사랑에 사랑으로 반응하는 사람은 극히 적다.
이렇게 죄악 된 세상이 현실이다.
그래서 '함부로 사랑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이다.
- 내가 사랑하면 상대방도 사랑할 것으로 기대하면, 결코 사랑을 지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
-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 세상은 낙원이 아니며, 내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 세상은 정글이며, 먹잇감을 찾아 배회하는 맹수로 가득하다.
세상을 그렇게 낙관적으로 생각하고, 아무런 각오 없이 함부로 사랑하려 한다면,
- 오히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낫다.
- 괜히 실망하여, 정말 사랑해야 할 때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 혹은 사랑으로 위장한 거래를 하며, 참되게 사랑하고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 그 착각 때문에 참된 사랑을 할 기회조차 잃기 때문이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때를 기다리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는 것이 낫다.
- 성경과 공동체를 통해서 말이다.
그러나 정말 사랑할 마음이 생겼다면, 과감히 사랑하자.
- 세상은 정글이기에, 조금이라도 무장을 해제하고 자신을 희생하려는 사람이 보이면,
- 그에게 마구 달려들어 뼛조각까지 남김없이 물어뜯는다는 것을 알았는데도,
- 그리고 세상은 사랑하려는 사람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밖아 죽였듯이 참혹하게 죽인다는 것을 알았는데도,
- 그래도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이 남아있다면,
- 물불 가리지 말고, 사랑만을 위해 살자.
다시 말하지만, 그렇게 사랑하면 반드시 죽을 것이다.
- 육체가 죽지 않더라도, 마음에 큰 상처를 받아 정신이 죽거나,
- 크게 돈을 빼앗기거나, 주변 사람들에게 비난받아 사회에서 죽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육체, 정신, 돈, 사회보다 사랑을 더 원하는 사람은 사랑하자.
왜 그래야 하냐?
- 좋으니까.
- 사람에게 최고의 기쁨을 주니까.
- 나다움을 회복할 수 있고, 주변 사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할 수 있으니까.
- 그렇게 살 때만 사람답게 살 수 있으니까.
- 특히 사랑하다 죽은 사람에게 부활이 주어지니까.
이것이 사랑만이 줄 수 있는 생명이다.
결국 우리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 적당히 사랑하고 적당히 거래하며, 그저 그렇게 살다가 죽던지,
- 사랑만 하다가 사랑 때문에 죽고 부활하던지.
실제로 사랑하느냐 마느냐는 우리가 결정할 수 없다.
-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사랑할 의지'를 갖는 것이다.
- 그 의지를 갖고 사랑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뿐이다.
과연 우리는 무엇을 기도하고 있는가?
- 적당히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는가,
- 사랑하다가 죽게 해달라고 기도하는가.
우리의 기도가 우리의 의지를 드러내 보여줄 것이다.
'예레미야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레미야(46) 23:1-8 하나님이 왕이 되도록 하는 새로운 왕 (0) | 2022.11.05 |
---|---|
예레미야(45) 22:24-30 이스라엘의 미련을 완전히 짓밟으시는 하나님 (0) | 2022.10.22 |
예레미야(43) 22:6-23 너의 눈과 마음은 불의한 이익을 탐하는 것에만 쏠려있다. (1) | 2022.10.07 |
예레미야(42) 21:11-22:5 이스라엘의 지독한 죄와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 (2) | 2022.10.01 |
예레미야(41) 21:1-10 바벨론 군대에 항복하는 사람은 죽지 않을 것이다. (0) | 2022.09.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