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양교회 팟캐스트 양따양>
미양교회에서 했던 설교를 바탕으로 진솔하게 신앙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팟캐스트도 많이 들어주세요.
https://www.podbbang.com/channels/1790233/
어린양을 따르는 어린양
예배 대신 예수님, 설교 대신 성경, 건물 대신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미양교회가 만드는 방송입니다.토끼와 개구리가 진솔하게 신앙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어린양과 같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
www.podbbang.com
해석의 세 단계는 다음과 같다.
① 내용 파악 - 본문의 표면적인 내용을 이해하는데, 본문의 배경에 근거한다.
② 주제 파악 - 내용 안에서 부각해서 드러내려는 메시지를 찾는다.
③ 주제 적용 - 주제 메시지를 현대 상황에 맞게 재해석하고 적용한다.
- 이 세 가지는 해석의 기본 단계이다.
- 셋 중에 하나라도 빠지면, 잘못된 해석이 된다.
- 여기서 잘못된 해석이란, 본문이 전하는 메시지에 충분히 귀 기울이지 않아서, 의도하지 않게 해석자의 주관이 해석에 개입되는 것이다.
- 그래서 본문이 전하는 메시지에 잡음이 끼는 것이다.
해석자의 주관은 없애겠는 마음으로 없어지지 않는다.
- 누구도 의도적으로 해석에 주관을 주입하는 사람은 없다.
- 누구나 해석할 때 주관을 배제하려고 한다.
- 그러나 자기도 모르게 일어나는 일이다.
- 그래서 단순히 마음만 먹는다고 가능하지 않다.
유일한 방법은 본문에서 가능한 많은 정보를 얻어서, 주관이 개입될 가능성 자체를 줄이는 것이다.
- 반대로 말해서, 해석자의 주관이 주입되는 이유는 본문에서 얻은 정보가 충분하지 않아서, 중간에 빈 구멍이 뚫려있기 때문이다.
- 해석자는 '자기도 모르게' 빈 구멍을 자기 경험으로 채워 넣는다.
- 그러면서 자신의 의도가 반영된 해석이 된다.
이것이 본문 해석이 왜곡되는 이유이다.
- 따라서 바르게 본문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해석의 세 단계를 충실하게 거쳐야 한다.
- 본문을 많이 읽고, 자세히 읽고, 본문의 배경도 정확하게 알아야 하고,
- 본문에 대한 다양한 사람의 글을 많이 읽어야 한다.
- 그래서 본문 안에 있는 정보를 가능한 한 많이 캐내야 한다.
그것만이 왜곡 없이 본문을 바르게 해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런 관점에서 이번 본문은 비교적 자세하게 읽어보겠다.
- 특히 이번 본문은 잘 짜여 있기에 읽기 연습하기에 좋다.
① 내용 파악
본문은 다음과 같이 구분된다.
- a(6~9절): 이스라엘 멸망 선포 - 예루살렘 도성의 폐허화
- b(10~12절): 이스라엘 멸망의 참혹함 - 죽음보다 못한 삶을 사는 살룸 왕
- c(13~17절): 멸망 원인을 구체적으로 제시 - 불의한 이익을 탐한 것
- b'(18~19절): 이스라엘 멸망의 참혹함 - 죽음을 슬퍼할 사람조차 없는 여호야김 왕
- a'(20~23절): 이스라엘과 동맹국의 멸망 선포 - 해산하는 여인의 진통과 같은 아픔
본문은 a - b - c - b' - a'로 교차 대구 구조이다.
- 이런 구조는 c에 핵심 주제가 담겨 있고, a와 b가 주제를 강화한다.
- 그래서 a, b, c의 개별적인 메시지를 이해한 후, c를 중심으로 전체를 재해석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럼 관점에서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의 핵심은 '멸망 원인'이다.
- 이스라엘 집권층은 권력 유지를 위해 백성을 억압하고 착취했다.
- 집권층에게 권력이 주어진 것은 백성을 보호하기 위한 것인데도 말이다.
[렘 22:17] 그런데 너의 눈과 마음은 불의한 이익을 탐하는 것과 무죄한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하는 것과 백성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것에만 쏠려 있다.
집권층의 착취가 극단적으로 드러난 사건은 지난 본문에서 '전쟁'이었다.
- 그들은 국가 유지가 아닌 권력 유지를 위해 바벨론을 상대로 무모한 전쟁을 벌였다.
- 전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백성을 더욱 가혹하게 착취했다.
- 그러면서 자신은 아무런 희생도 하지 않고, 여전히 사치스러운 삶을 유지했다.
- 그 결과 국가의 기반인 백성은 모든 힘을 소진했고,
- 그로 인해 국가까지 무너지게 되었다.
- 게다가 국가와 함께 집권자의 권력도 사라졌다.
즉, 집권자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했던 행동 때문에 오히려 권력을 잃게 되었다.
그런데 이번 본문에서는 집권자에 대한 비판 포인트가 살짝 다르다.
- 백성을 착취했다는 것은 동일하다.
- 집권자는 백성에게 일을 시키고 적절한 품삯을 주지 않았다.
[렘 22:13~14] 불의로 궁전을 짓고, 불법으로 누각을 쌓으며, 동족을 고용하고도, 품삯을 주지 않는 너에게 화가 미칠 것이다. (14) ‘내가 살 집을 넓게 지어야지. 누각도 크게 만들어야지’ 하면서, 집에 창문을 만들어 달고, 백향목 판자로 그 집을 단장하고, 붉은 색을 칠한다.
- 이전에도 백성을 전쟁에 내몰고, 조공품을 강제로 거두면서도, 적절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전에는 전쟁 때문이었다면, 이번에는 '궁궐과 누각' 때문이다.
- 궁궐과 누각을 화려하고 사치스럽게 짓는다.
[렘 22:14] ・・・・ 집에 창문을 만들어 달고, 백향목 판자로 그 집을 단장하고, 붉은 색을 칠한다.
c 해석의 핵심은 '왜 궁궐과 누각을 화려하게 지었는가?'이다.
단순하게 '집권자의 사치에 대한 비판'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 그러나 그렇게 해석하면, 맥락에서도 벗어나고, 우리에게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 사치만 하지 않으면 충분히 바른 신앙인 것으로 오해하게 만든다.
화려한 궁궐과 누각을 통해 비판하고자 하는 핵심은 '국가 유지를 염두에 두지 않은 권력 강화'이다.
- 집권자가 궁궐을 화려하게 짓는 이유는 단순히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취향 때문이 아니다.
- 정치적인 계산에 의한 것이다.
화려한 궁궐은 권력 강화를 위해 행해진 많은 작업의 결과물이다.
- 궁궐을 화려하게 짓기 위해서는 많은 돈이 필요하고,
- 돈을 모으기 위해서는 강력한 세금 제도가 필요하며,
- 세금 제도를 만들기 위해서는 집권자의 명령을 잘 따르는 전략가가 완비되어야 하고,
- 세금 제도에 따라 세금을 거두기 위해서는 전국에 행정 시스템이 구축되어야 하며,
- 걷힌 세금을 문제없이 가져오기 위해서는 교통망도 정비되어야 하고,
- 산적에게 세금을 도둑맞지 않기 위해 경찰력도 조직되어야 하는 등 많은 과정이 필요하다.
따라서 화려한 궁궐은 단순히 사치스러운 취향이 드러난 것이 아니다.
- 권력 강화를 위해 치밀하게 준비하였고, 그 작업이 완료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 그 작업의 결과가 화려한 궁전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 이는 이스라엘만의 특수한 케이스가 아니라, 역사에서 반복되는 패턴이다.
그런데 권력 강화가 무조건 나쁘냐?
- 역사에서도 권력을 강화하고 화려한 궁궐을 지어서 국가가 안정된 경우와 불안정해져서 멸망한 경우 모두 있다.
- 왜 이러한 차이가 생기냐면, 강화된 권력으로 무엇을 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권력은 마치 칼과 같다.
- 날카로운 칼은 공격해오는 적을 무찔러서 자신을 보호할 수도 있지만,
- 잘못 쓰면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기도 한다.
- 따라서 강화된 권력은 외부의 침략을 방어하고, 국가의 기반인 백성을 보호하는 데 사용될 수도 있지만(요시야 왕),
- 반대로 백성을 착취하여 국가의 기반을 흔들면서까지 집권자의 욕망을 실현하는 데 사용될 수도 있다(여호야김 왕).
그런데 이스라엘 집권층은 후자를 선택했다.
- 국가 유지가 아닌 권력 유지만을 위해 권력을 강화했고,
- 강화된 권력으로 국가 기반을 흔들면서까지 백성을 착취했다.
이러한 집권층의 태도가 '화려한 궁궐과 누각'으로 드러난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 화려한 궁궐로 좋은 왕이 될 수 없다고 말이다.
- 이전 왕 요시야는 화려한 궁궐 없이도, 가혹한 착취 없이도, 법과 정의를 실천하면서도 충분히 먹고 마셨는데,
- 왜 여호야김 왕은 가난한 사람과 억압받는 사람의 사정을 헤아리지도 않고, 가혹하게 세금을 거두어서, 그 돈을 전부 화려한 궁궐을 지어 권력을 강화하는 데만 사용하냐는 것이다.
- 그것 때문에 국가의 기반이 흔들려서 멸망할 위기에 처하는데도 말이다.
- 그래서 권력을 강화하려다가 오히려 권력이 사라질 위기에 있는데도 말이다.
- 그런 위기 속에서도 어떻게 계속해서 집권자의 눈과 마음은 불의한 이익을 탐하는 것, 무죄한 사람의 피를 흘리는 것, 백성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것에만 쏠려서, 어떻게든 세금을 더 거두는 것에만 쏠려있냐는 것이다.
[렘 22:15~17] 네가 남보다 백향목을 더 많이 써서, 집 짓기를 경쟁한다고 해서, 네가 더 좋은 왕이 될 수 있겠느냐? 네 아버지가 먹고 마시지 않았느냐? 법과 정의를 실천하지 않았느냐? 그 때에 그가 형통하였다. (16) 그는 가난한 사람과 억압받는 사람의 사정을 헤아려서 처리해 주면서, 잘 살지 않았느냐? 바로 이것이 나를 아는 것이 아니겠느냐? 나 주의 말이다. (17) 그런데 너의 눈과 마음은 불의한 이익을 탐하는 것과 무죄한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하는 것과 백성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것에만 쏠려 있다.
특히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과 억압받는 사람의 사정을 헤아려서 처리하는 것',
- 지난 본문의 표현으로, '공의롭게 판결하는 것'을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렘 22:16] 그는 가난한 사람과 억압받는 사람의 사정을 헤아려서 처리해 주면서, 잘 살지 않았느냐? 바로 이것이 나를 아는 것이 아니겠느냐? 나 주의 말이다.
- 여기서 하나님은 사람을 거래의 대상으로 착취하지 않고 사랑의 대상 삼는 것과 하나님을 사랑의 대상 삼는 것을 동일시하신다.
- 이는 사람 사랑과 하나님 사랑이 모두 사랑이라는 동일한 가치관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 그래서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가치관 아래에서 하나님도 사랑할 수밖에 없고,
- 사람과 거래하는 사람은 거래의 가치관 아래에서 하나님과도 거래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현재 이스라엘 집권층은 백성을 거래 대상으로 착취했고,
- 이는 그들이 거래 가치관을 가졌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며,
- 따라서 필연적으로 하나님도 거래 대상으로 삼아 이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범한 죄는 단순히 백성을 착취한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부정하고 모독한 것이다.
이러한 집권자의 태도가 바로 이스라엘이 멸망한 원인이다.
- '국가 유지를 염두에 두지 않은 권력 강화', 다른 말로 '권력만을 위한 권력 강화' 때문이다.
- 그리고 더 근원적으로 '거래의 가치관'을 가졌기 때문이다.
- 이러한 집권자의 태도는 국가도 멸망시키고 권력도 빼앗긴다.
이것이 본문 전체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핵심이다.
그런데 b에서 그 멸망이 얼마나 가혹하다고 말하냐?
b(10~12절)와 b'(18~19절)는 반대로 말한다.
- b에서는 슬퍼하라고 말한다.
[렘 22:10] 너희는 죽은 왕 때문에 울지 말며, 그의 죽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오히려, 너희는 잡혀 간 왕을 생각하고 슬피 울어라. 그는 절대로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 다시는 고향 땅을 보지 못한다.
- 반면에 b'에서는 슬퍼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렘 22:18] 그러므로 주님께서 유다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을 두고 이렇게 말씀하신다. “아무도 여호야김의 죽음을 애도하지 않을 것이다. 남자들도 ‘슬프다!’ 하지 않고 여자들도 ‘애석하다!’ 하지 않을 것이다. ‘슬픕니다, 임금님! 슬픕니다, 폐하!’ 하며 애곡할 사람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슬퍼할 이유와 슬퍼하지 않을 이유가 똑같다.
- 둘 다 멸망 때문이다.
b에서 왜 슬퍼해야 하냐면,
- 이전 왕 요시야는 전쟁에서 고통스럽게 죽었다.
- 그런데 다음 왕인 살룸(여호야김)은 살아남지만, 죽음보다 못한 삶을 산다.
- 포로로 끌려가서 죽음보다 더 큰 고통을 겪을 것이기 때문이다.
- 그래서 이스라엘 멸망의 고통을 더욱 참혹하게 겪을 것이다.
- 이것이 슬퍼해야 할 이유이다.
반면에 b'에서 슬퍼하지 않을 이유는,
- 이스라엘 전체가 너무나 참혹하게 멸망해서, 왕의 죽음을 슬퍼할 사람조차 남아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 왕의 죽음조차 하찮게 여겨질 만큼 참혹하게 멸망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왜 이런 참혹한 멸망이 일어났느냐?
- 집권자가 '국가 유지를 염두에 두지 않은 권력 강화', '권력만을 위한 권력 강화'를 했기 때문이다.
- 자승자박이며, 제 살 깎아 먹기이다.
- 이것이 거래의 결과이다.
그러한 이스라엘에게 자멸하지 말고, 생존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절박한 외침이다.
- 그러기 위해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a에서 하나님은 왜 생존이 아닌 멸망을 선포하시냐?
이스라엘을 그토록 사랑하신다면, 멸망이 아닌 생존시키셔야 하는 것 아닌가?
- 왜 하나님은 멸망으로 사랑을 표현하실까?
하나님은 a(6~9절)에서 멸망을 선포하신다.
- '길르앗'과 '레바논 산 꼭대기'는 이스라엘 근방에서 가장 비옥한 땅이었다.
-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비옥한 땅처럼 소중히 여겼고 사랑했었다.
- 그러나 이제는 '사막'과 '아무도 살지 않는' 황무지로 만들겠다고 선포하신다.
[렘 22:6] 이것은 나 주가 유다 왕실을 두고 하는 말이다. 네가 나에게 길르앗과도 같고 레바논 산 꼭대기와 같았으나, 이제는 내가 너를 사막으로 만들고 아무도 살지 않는 성읍으로 만들겠다. (7) 내가 너를 무너뜨릴 사람들을 불러다가, 그들에게 연장을 마련하여 줄 것이니, 그들이 너의 가장 좋은 백향목들을 찍어 내어, 불 속으로 집어 던질 것이다.
a'(20~23절)에서도 멸망 때문에 고통스럽게 통곡할 것이라고 선포하신다.
[렘 22:20] 예루살렘아, 너는 레바논 산에 올라가서 통곡하여라. 바산 평야에서 소리를 지르고, 아바림 산등성에서 통곡하여라. ・・・・
[렘 22:22] ・・・・ 참으로 그 때에는, 너의 온갖 죄악 때문에, 네가 수치와 멸시를 당할 것이다.
- '레바논 산'과 '백향목 나무'로 상징되는 현재 누리는 풍요를 전부 잃고, 오직 고통의 신음 소리만 남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렘 22:23] 네가 지금은 레바논 산 위에 터를 잡고 사는 듯하고, 백향목 나무 위의 보금자리에 깃들이고 있는 것 같지만, 해산하는 여인의 진통 같은 아픔이 너에게 덮쳐 오면, 너의 신음이 땅을 뒤흔들 것이다.
a와 a' 모두 멸망을 선포한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그러나 a와 a'는 멸망의 원인을 간략하게 제시하는데, 서로 약간 다르다.
- a에서 멸망 원인은 '우상 숭배로 인한 언약 파기'이다.
[렘 22:9] 그들이 또한 서로 대답하기를 ‘그들이 주 그들의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깨뜨리고, 다른 신들을 경배하면서 섬겼기 때문이다’ 할 것이다.
- 반면 a'에서 멸망 원인은 '이스라엘이 목자처럼 따랐던 동맹국의 멸망'이다.
[렘 22:20] ・・・・ 너의 모든 동맹국이 멸망하였다.
[렘 22:22] 너의 목자들은 모두 바람에 휩쓸려 가고, 너의 동맹국 백성은 포로가 되어 끌려갈 것이다. 참으로 그 때에는, 너의 온갖 죄악 때문에, 네가 수치와 멸시를 당할 것이다.
- 참고로, c에서 멸망 원인은 '백성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것'이다.
사실상 이 세 가지는 동일한 상황을 바라보는 세 가지 다른 관점이다.
- 그것은 근원적으로 '거래의 가치관'이고,
- 구체적으로 '집권자의 이집트 의지'이다.
집권자는 국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권력 유지를 위해서 이집트를 의지했다.
- 이미 바벨론이 지역의 패권을 잡았고, 이집트는 주도권을 빼앗겼음에도 말이다.
- 그래서 이집트를 의지하는 것이 국익에 도움을 주기는커녕, 국가를 위기에 빠뜨리는데 말이다.
- 집권자는 이집트를 의지하는 것이 국가를 위기에 빠뜨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 그러나 '나쁜 의미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정파적 목적 때문에, 단순히 권력을 갖기 위해 이집트를 의지한다.
- 그것이 국가를 위기에 빠뜨린다는 것을 알면서도, 당장 자신의 집권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먼저 '백성의 착취'가 일어난다.
- 이집트를 의지하여 동맹을 맺는 과정에서 조공을 바치기 때문이다.
[왕하 23:33~35] 이집트의 바로 느고 왕이 ・・・・ 유다가 이집트에 은 백 달란트와 금 한 달란트를 조공으로 바치게 하였다. (34) 또 바로 느고 왕은 요시야를 대신하여 요시야의 아들 엘리야김을 왕으로 삼고, 그의 이름을 여호야김으로 바꾸게 하였다. ・・・・ (35) 여호야김은 바로의 요구대로 그에게 은과 금을 주었다. 그는 바로의 명령대로 은을 주려고 백성에게 세금을 부과하였고, 백성들은 각자의 재산 정도에 따라 배정된 액수대로, 바로 느고에게 줄 은과 금을 내놓아야 하였다.
- 그런데 그것을 위해 백성에게 세금을 부과했고, 백성의 처지를 헤아리지 않고 과도하게 징수했다.
- 결국 이렇게 국가의 기반인 백성이 소진되어 버리자, 국가도 멸망한다.
- 이것이 c에서 멸망 원인으로 다룬 것이다.
게다가 이집트와 동맹을 맺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우상을 숭배할 수밖에 없다.
- 이집트와 조약체결식은 강대국인 이집트의 방식을 따를 수밖에 없고,
- 거기에는 우상 숭배 의식이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 게다가 이집트와의 조약체결을 기념하기 위해 성전에까지 우상 제단을 놓는다.
- 이것이 a에서 멸망 원인으로 다룬 것이다.
특히 동맹국 이집트는 바벨론에게 갈그미스 전투에서의 패배를 기점으로 내리막 길을 걷는데,
- 결국 바벨론 이후 페르시아의 속국이 된다.
- 그렇게 동맹국 이집트가 힘을 잃고 이스라엘을 지켜줄 수 없게 되자,
- 이스라엘은 바벨론에게 멸망한다.
- 이것이 a'에서 멸망 원인으로 다룬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런 비극을 일으킨 근원적인 원인은 무엇인가?
- 이스라엘 집권자가 가진 '거래의 가치관'이다.
- 그들은 주변 모든 대상을 자신의 생존을 위한 이용 수단으로 봤다.
- 그래서 이집트로, 이스라엘 백성도, 하나님도 거래의 대상으로 봤다.
- 그들에게 적절한 대가를 지불하면 자기 뜻대로 이용할 수 있고,
- 그렇게 이용할 때 자신이 생존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 그것이 거래의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생각이다.
하지만 그들의 믿음대로 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 이집트도 몰락하면서 자신을 도와줄 수 없었고,
- 백성도 모든 힘을 소진하여 더 이상 착취할 수 없었고,
- 하나님도 자신의 구원이 아니라 멸망을 선포하시며 도와주시지 않았다.
- 그래서 결국 그들의 계획과 달리, 생존을 위해 했던 선택 때문에 멸망하게 되었다.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 그랬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구원이 아닌 멸망을 선포하신 것이다.
- 이스라엘이 가진 거래의 가치관을 무너뜨리시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계획을 성취시켜주셨다면?
- 그래서 만약 이스라엘 집권층이 계획대로 이집트를 통한 권력 유지가 성공했더라면?
- 그래서 거래의 가치관이 무너지지 않고 유지되었다면?
이스라엘의 백성은 계속해서 착취당할 것이고, 하나님과의 관계는 회복될 수 없을 것이다.
- 백성이 착취당하는 국가가 멸망하는 것은 시간 문제이다.
- 국가에 의해 백성의 생존이 위협받는 국가는 반드시 멸망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멸망을 반드시 선포하셔야 했다.
- 그것만이 무죄한 백성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렇게 국가의 멸망과 함께 거래의 가치관이 파괴되어야,
-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거래가 아닌 사랑의 관계를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
- 국가의 멸망을 통해서만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렇기 때문에 멸망만이 하나님의 사랑을 바르게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이것이 a와 a'를 통해 하나님께서 멸망을 선포하신 이유이다.
여기까지가 내용 파악이고, 다음에 주제 파악과 주제 적용을 해보겠다.
질문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가?
- 우리는 어떻게 이스라엘 집권층의 길을 따라가고 있는가?
- 우리가 의지하는 대상은 누구이고, 우리가 착취하는 대상은 누구인가?
-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이용하고 있는가?
- 이런 우리는 자신을 어떻게 파괴하고 있는가?
- 과연 우리는 어떻게 될까?
- 또한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인도하실까?
'예레미야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레미야(45) 22:24-30 이스라엘의 미련을 완전히 짓밟으시는 하나님 (0) | 2022.10.22 |
---|---|
예레미야(44) 22:6-23 함부로 사랑하지 말라! 그러나 과감히 사랑하자. - 거래에 갇힌 이스라엘 왕 (0) | 2022.10.15 |
예레미야(42) 21:11-22:5 이스라엘의 지독한 죄와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 (2) | 2022.10.01 |
예레미야(41) 21:1-10 바벨론 군대에 항복하는 사람은 죽지 않을 것이다. (0) | 2022.09.15 |
예레미야(40) 20:7-18 신앙의 본질 - 세상에서 거부, 상실 그리고 죽음 (0) | 2022.09.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