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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서

예레미야(45) 22:24-30 이스라엘의 미련을 완전히 짓밟으시는 하나님

<미양교회 팟캐스트 양따양>

미양교회에서 했던 설교를 바탕으로 진솔하게 신앙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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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양을 따르는 어린양

예배 대신 예수님, 설교 대신 성경, 건물 대신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미양교회가 만드는 방송입니다.토끼와 개구리가 진솔하게 신앙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어린양과 같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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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에게 여호야긴 왕이 상징하는 것은 '미련'이다.

- 이스라엘은 멸망하여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서도, 이스라엘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 지금은 잠시 어려운 처지에 있지만, 이스라엘은 곧 회복될 것이고, 

- 다윗 혈통의 왕도 다시 일어날 것이라고 믿었다.

- 그래서 자신들이 이스라엘을 재건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 믿음을 가질 수 있었던 근거가 바로 '여호야긴 왕'이다.

- 그는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 바로 이전 왕이다.

- 그런데 시드기야는 바벨론이 세운 왕이기에 정통성이 없다.

[왕하 24:17] 바빌로니아 왕이 여호야긴의 삼촌 맛다니야를 여호야긴 대신에 왕으로 세우고, 그의 이름을 시드기야로 고치게 하였다.

- 따라서 여호야긴 왕은 이스라엘 정통성을 가진 마지막 왕이다.

그런 그가 집권 6개월 만에 포로로 사로잡혀 갔다.

[왕하 24:15] 느부갓네살은 여호야긴 왕을 바빌론으로 사로잡아 갔다. 그의 어머니와 왕비들과 내시들과 그 땅의 고관들을 모두 예루살렘에서 바빌론으로 사로잡아 갔다.

- 그러나 그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오랫동안 살아남았다.

[왕하 25:27~30] 유다의 여호야긴 왕이 포로로 잡혀간 지 서른일곱 해가 되는 해 곧 바빌로니아의 에윌므로닥 왕이 왕위에 오른 그 해 열두째 달 이십칠일에, 에윌므로닥 왕은 유다의 왕 여호야긴 왕에게 특사를 베풀어, 그를 옥에서 석방하였다. (28) 그는 여호야긴에게 친절하게 대접하여 주면서, 그와 함께 있는 바빌로니아의 다른 왕들의 자리보다 더 높은 자리를 여호야긴에게 주었다. (29) 그래서 여호야긴은 죄수복을 벗고, 남은 생애 동안 늘 왕과 한 상에서 먹었다. (30) 왕은 그에게 평생 동안 계속해서 매일 일정하게 생계비를 대주었다.

 

이스라엘은 여호야긴 왕이 살아있다는 사실 때문에 여전히 자신에게 가능성이 있다고 믿었다.

- 이스라엘이 멸망해서 땅도 잃고, 주권도 잃었고, 성전도 파괴되었지만, 

- 그래도 아직 왕의 혈통이 남아있기 때문에, 자기 힘으로 이스라엘 민족 재건을 기대했다.

- 여호야긴 왕이 직접 할 수 없으면, 그의 아들 혹은 아들의 아들이라도 이스라엘을 회복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왜 이 지경까지 이른지, 자기 죄는 무엇인지는 외면한 채 말이다.

- 하나님에 대한 소망은 저버리고 말이다.

 

이렇게 이스라엘은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순간에도, 포로로 잡혀가는 길에도, 모든 것을 잃고 포로로 살아가는 중에도 말이다.

- 그들은 포로로 잡혀가서 37년을 살아갈 때까지 여전히 미련을 가졌다.

- 여전히 자기 죄를 외면한 채, 여전히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은 채 말이다.

그런 점에서 본문 메시지는 다양한 시대와 장소에 있는 이스라엘에게 의미가 있다.

-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 멸망을 직면한 사람에게도, 

- 고생스럽게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던 사람에게도, 

- 낯선 땅에서 포로로 외롭게 살아가던 사람에게도 의미가 있다.

- 시대와 장소가 달랐지만, 예루살렘에서도, 포로 길 중에도, 바벨론에서도 동일한 메시지가 필요했다.

그것은 바로 미련을 버리라는 것이다.

- 왜냐하면 여전히 자기 죄를 깨닫지 못한 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 힘으로 이스라엘을 재건하려고 계획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본문은 여호야긴 왕을 두 가지 방식으로 설명한다.

- 귀중한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하찮은 사람으로 말하기도 한다.

본문은 여호야긴 왕을 '내 오른손에 낀 옥새 가락지'에 비유한다.

- 그만큼 귀중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렘 22:24] 나 주의 말이다. 내가 내 삶을 두고 맹세한다. 여호야김의 아들 유다 왕 고니야야, 네가 내 오른손에 낀 옥새 가락지라고 하더라도, 내가 너를 거기에서 빼버리겠다.

- 여기서 고니야가 여호야긴이다.

- 그런데 그 귀중한 것조차 빼버리겠다고 하신다.

- 그만큼 하나님이 여호야긴을 비롯하여 이스라엘에게 화가 나셨다는 뜻이다.

- 가장 귀중하게 여겼던 것조차 포기하실 만큼 크게 실망하셨다는 뜻이다.

얼마큼 실망하셨냐?

- 참혹하게 죽도록 넘겨주실 만큼이다.

[렘 22:25] 네 목숨을 노리는 사람들의 손과, 네가 무서워하는 사람들의 손과, 바빌로니아 왕 느부갓네살의 손과, 바빌로니아 사람들의 손에, 내가 너를 넘겨 주겠다.

- 여호야긴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까지 자국 땅이 아닌 이국 땅에서 비극적으로 죽을 만큼이다.

[렘 22:26~27] 나는 너와 네 친어머니를, 너희가 태어나지 않은 곳인 이국 땅으로 쫓아내어, 거기에서 죽게 할 것이다. (27) 마침내 그들은 그처럼 돌아가고 싶어하던 고향으로 영영 돌아갈 수가 없을 것이다.

- 이를 통해 여호야긴이 결코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확언한다.

그러니 멸망한 이스라엘이 회복될 것이라는 미련을 갖지 말라는 것이다.

 

동시에 본문은 여호야긴 왕을 하찮은 것에 비유한다.

[렘 22:28] 이 사람 고니야는 깨져서 버려진 항아리인가? 아무도 거들떠보려고 하지 않는 질그릇인가? 어찌하여 그는 자신도 모르는 낯선 땅으로 가족과 함께 쫓겨나서, 멀리 끌려가게 되었는가?

- 그만큼 여호야긴을 비롯하여 이스라엘이 가혹하게 멸망할 것이기 때문이다.

- 깨져서 버려질 것이고, 아무도 거들떠보려고 하지도 않게 될 것이다.

왜냐?

- 그만큼 이스라엘이 큰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 그만큼 하나님이 실망하셨고 화가 나셨기 때문이다.

- 그만큼 하나님이 이스라엘 멸망에 대한 마음이 굳건해서, 돌이킬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땅'을 세 번이나 부른다.

[렘 22:29] 땅이여, 땅이여, 땅이여, 주님의 말씀을 들어라.

- 세 번 반복하는 것은 엄청난 강조이다.

- 두 번 반복은 비교급과 같은 것이고, 세 번 반복은 최상급과 같은 것이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땅에게 말씀하신다.

- 여호야긴에게 아무런 기대도 하지 말라는 것이다.

- 왜냐하면 그에게는 자녀가 없어서, 다윗의 왕위를 지킬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렘 22:30] 나 주가 말한다. 너희는 이 사람을 두고 ‘그는 자녀도 없고, 한평생 낙을 누리지도 못할 사람’이라고 기록하여라. 다윗의 왕위에 앉아서 유다를 다스릴 자손이, 그에게서는 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굳이 '땅'에게 말씀하실까?

- 땅 말고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사람이 없다는 것을 문학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 이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 멸망의 정도가 극심하여 살아남은 사람이 전혀 없다는 뜻일 수도 있고,

- 살아남은 사람이 있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마음이 있는 사람이 없다는 뜻일 수도 있다.

- 그만큼 상황이 심각하다는 뜻이다.

그러니 멸망한 이스라엘이 회복될 것이라는 미련을 갖지 말라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내용 파악이다.

- 이것을 근거로 주제 파악을 해보겠다.

 

그렇다면 왜 이스라엘은 이토록 미련을 버리지 못했을까?

왜 이스라엘은 자기 힘으로 이스라엘을 재건하려는 마음을 여전히 가지고 있었을까?

- 땅, 주권, 성전까지 모두 잃어서, 회복될 여지가 보이지 않음에도 말이다.

- 포로가 된 지 37년이 지나서까지 말이다.

- 마치 죽은 지 37년 된 자녀 시체를 여전히 품으며, 되살아나리라 기대하고 사는 어리석은 부모처럼 말이다.

그렇다고 이스라엘이 재건될 꿈 자체를 포기하라는 것은 아니다.

- 이스라엘 정체성을 완전히 버리고, 바벨론에 철저히 동화하라는 것이 아니다.

- 조선이 일본에 30년 넘게 지배당했다고 조선의 정체성을 포기하고 일본인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듯 말이다.

이스라엘은 회복될 소망을 지켜야 한다.

 

따라서 '미련을 갖지 말라'는 것의 핵심은 이스라엘 재건 자체를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라,

- '자기 힘으로' 재건되기를 포기하라는 것이다.

- '하나님의 은혜로' 재건되기를 기대하라는 것이다.

- 즉,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것이고,

- 자기를 위해 거래하지 말고 하나님을 위해 사랑하라는 것이며,

-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하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멸망하여 포로가 된 원인 역시 하나님과 관계 단절이었다.

-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이용하려 했다.

- 동시에 이스라엘 집권층은 백성도 사랑하지 않고 이용했다.

- 하나님을 이용하고 백성을 착취해서 권력을 얻는 것에만 몰입했다.

- 그에 따라 착취당한 백성은 무너져내렸고,

- 백성과 함께 국가도 무너져내렸다.

- 그 결과 집권층은 권력을 얻으려는 선택 때문에 오히려 권력을 잃고,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다.

이것이 이스라엘 멸망 원인이다.

- 거래를 선택하고 사랑을 버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멸망하여 포로가 된 이스라엘이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멸망 원인 분석이다.

- 자신이 사랑을 버리고 거래했다는 '죄 인식'이 먼저이다.

-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거래로 하나님을 이용하여 유익만 얻으려 했고,

- 백성을 사랑하지 않고, 거래로 유익을 얻기 위해 착취했다는 것을 먼저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죄를 인정하고 깨달아, 자기 죄 때문에 자멸했다는 부끄러움에 몸부림쳐야 한다.

- 자기 과거를 전부 부정하고, 그 안에 의로움은 전혀 없었다는 것에 괴로워해야 한다.

- 자기 죄 때문에 고통받은 하나님과 백성에 대해 말할 수 없는 미안함을 가져야 하고,

- 미안함이 전달될 수 있도록 마음 다해 표현해야 한다.

- 그래서 하나님과 백성이 자기 죄를 용서할 때까지 회개와 사과를 반복해야 한다.

이것이 죄를 인식하고 회개하는 사람이 가져야 할 진정성 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다.

- 회개는 의롭게 변화되는 과정에서 시작 단계이다.

- 회개했으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

- 사고 방식이 거래에서 사랑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더 이상 하나님과 백성을 거래 대상으로 삼아 이용하고 착취하지 말아야 한다.

- 자기 죄를 용서하고 자기를 용납해준 하나님과 백성에 대해 감사하고,

- 하나님과 백성을 평생토록 사랑해야 한다.

- 그들을 위해 자기 전부를 내어주고 희생하여 섬겨야 한다.

- 예수님이 인류를 사랑하셔서 죽으셨듯, 하나님과 백성을 죽기까지 사랑해야 한다.

 

이럴 때만 이스라엘은 회복된다.

-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하나님과 백성을 사랑하는 것이 회복 그 자체이다.

- 포로에서 풀려나서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와 성전을 새로 짓느냐 마느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 바벨론에 있든지 예루살렘에 있든지 상관없이, 

- 성전이 새로 지어졌는지 무너진 채로 있는지 상관없이,

- 사랑의 가치관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자체로 이스라엘은 정체성을 완전히 회복한 것이다.

- 가나안 땅에 살지 않았을 때부터, 성전이 지어지기 전부터, 율법이 생기기 전부터 하나님과 사랑하는 관계를 맺는 것이 이스라엘 정체성이었기 때문이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의롭다는 인정을 받은 것도 율법 준수가 아니라 '사랑하는 관계' 때문이었다.

- 왜냐하면 시간 상으로 율법 이전에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롭다고 여기셨기 때문이다.

- 여기서 믿음이 바로 사랑하는 관계이다.

[롬 4:10~13] 그러면 어떻게 아브라함이 그러한 인정을 받았습니까? 그가 할례를 받은 후에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할례를 받기 전에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할례를 받은 후에 된 일이 아니라, 할례를 받기 전에 된 일입니다. (11) 아브라함이 할례라는 표를 받았는데, 그것은 그가 할례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 이미 얻은 믿음의 의를 확증하는 것이었습니다. ・・・・ (13) 아브라함이나 그 자손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 곧 그들이 세상을 물려받을 상속자가 되리라는 것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정체성 회복은 땅, 성전, 율법에 있지 않다.

- 하나님과 관계에 있다.

- 하나님과 사랑하는 관계를 회복했으면, 땅, 성전, 율법이 없어도 이미 완전한 회복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땅, 성전, 율법도 회복시켜주신다.

- 왜냐하면 그것이 회복될 가치가 있기 때문이 아니다.

- 땅, 성전, 율법은 이스라엘 정체성 회복에 아무런 역할도 없다.

- 단지 땅, 성전, 율법이 회복된 것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이미 회복되었다는 것을 인류에게 확실하게 보여주시기 위해서이다.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은 이유도 이와 같다.

- 율법 준수가 아브라함을 의롭게 해주기 때문이 아니다.

- 율법 준수에는 아무런 효력이 없다.

- 마치 결혼식이 행복한 결혼 생활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 단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이미 의롭게 되었다는 것을 세상에 확증하기 위해서이다.

- 마치 결혼식이 서로 사랑한다는 것을 세상에 확증하기 위한 것처럼 말이다.

[4:11] 아브라함이 할례라는 표를 받았는데, 그것은 그가 할례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 이미 얻은 믿음의 의를 확증하는 것이었습니다. ・・・・

이 전체가 이스라엘이 회복하는 과정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 과정을 거부했다.

이스라엘은 '자기 힘으로' 이스라엘이 재건되기를 기대했다.

- '하나님의 은혜로' 재건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왜냐하면 회개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 멸망한 원인이 자기 때문이라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 자신이 하나님을 이용하고 백성을 착취했기 때문이라고 인정하기 싫었다.

- 자신이 사랑을 거부하고 거래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믿고 싶지 않았다.

- 멸망한 이유가 자기 죄 때문이라는 것을 부정하고 싶었다.

그런데 멸망 원인이 사랑을 거부하고 거래한 자기 죄 때문이라 하면,

-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로만 재건될 수 있다고 하면,

- 이는 자기 힘으로 이스라엘을 재건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고,

- 동시에 이는 자신이 무능하고 무가치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꼴이다.

- 거래 사고 방식을 가진 이에게 무능하고 무가치하여 교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은 가장 비극적인 평가이다.

- 그랬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자기 죄를 인정할 수 없었다.

- 끝까지 미련을 갖고 자기 힘으로 이스라엘을 재건하려 했다.

 

이스라엘은 멸망한 이유가 '재수 없음' 혹은 '단순 실수' 때문이라고 믿고 싶었다.

- 그래서 조금만 운이 좋고, 조금만 주의하면 멸망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고 믿었다.

- 자기에게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멸망한 핵심 원인이 자신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 자기 문제는 자기 힘으로 충분히 고칠 수 있으며,

- 몇 가지 문제만 고치면 이스라엘을 충분히 재건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여호야긴 왕이 살아있다는 것에 안도감을 가진 것이다.

- 그가 살아 있어서 다윗의 혈통을 유지할 수만 있으면, 다른 문제는 전부 자기 힘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굳이 회개하지 않아도,

- 굳이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하지 않아도,

- 굳이 착취당한 백성에게 사과하거나, 그들에게 희생하지 않아도,

- 굳이 자기 과거 인생을 송두리째 부정하지 않아도,

- 굳이 미안한 마음과 감사한 마음으로 부채 의식을 갖고 억눌려 살지 않아도,

- 굳이 힘겹게 거래에서 사랑으로 가치관을 바꾸지 않아도 말이다.

지금 상태도 이스라엘을 재건하기에 충분하다고 믿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실체이다.

- 자기를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

- 거래 가치관으로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

- 누구에게도 빚진 것이 없으며, 미안함과 감사함을 가질 필요 없다는 것.

- 이용하고 착취했지만, 정당한 대가를 지불했기 때문에 문제 없다는 것.

- 하나님과 관계는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것.

이러한 잘못된 인식은 멸망 이후에 생긴 것이 아니다.

- 멸망 이전부터 계속 그랬다.

- 어찌 보면 이러한 인식 때문에 이스라엘이 멸망한 것이다.

- 이스라엘은 멸망 이전에도 이렇게 생각해서 멸망했는데,

- 멸망 후에도 이전과 똑같이 생각했다.

- 멸망으로 변한 것은 없었다.

이것이 여전히 미련을 가진 이스라엘이 보여주는 자기 실체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토록 미련을 버리라고 명령하시는 것이다.

- 그래서 여호야긴 왕이 '옥새 가락지'라고 빼버리겠다는 것이고,

- 그가 '깨져서 버려진 항아리'이고 '거들떠보려고 하지 않는 질그릇'과 같이 하찮다는 것이다.

- 왜냐하면 여호야긴 왕이 생존한 것이 이스라엘 회복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 이렇게 여전히 자기 힘으로 회복할 수 있다는 믿음은 착각이기 때문이다.

- 그래서 본문은 여호야긴 왕에게 '유다를 다스릴 자손이 그에게서 나지 않을 것'이라고 명확하게 말씀하신다.

그러니 어리석은 미련 버리라는 것이다.

- 그리고 회개하고 돌이켜 하나님 의지하라는 것이다.

 

게다가 이것이 바로 우리의 현실이다.

우리도 똑같이 미련을 가지고 산다.

- 내 힘으로 원하는 성취를 이룰 수 있다고 믿는다.

- 하나님이 조금만 도와주시면, 굳이 큰 변화 없이도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신앙 생활을 하는 것이다.

- 나 자신을 밑바닥부터 바꿔서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가 아니다.

- 나에게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미 지금도 충분하기에,

- 하나님이 조금만 도와주시면, 손에 잡힐듯한 목표를 이룰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 만족스러운 지금 삶에 맛깔나는 양념을 치기 위해 신앙 생활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토록 신앙 생활을 오래 하면서도, 조금도 변하지 않는 것이다.

- 애초부터 변할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 신앙을 갖기 이전과 이후에도 사고 방식에 변화가 없기 때문이다.

- 거래를 통해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하는 것은 똑같기 때문이다.

- 그것을 오로지 나 혼자 할 것인가, 하나님의 도움을 조금 받을 것인가의 차이이다.

정작 그 거래 때문에 우리 인생이 망가지고 있는데 말이다.

 

이런 마음을 가진 우리가 멸망한다고 달라질까?

- 결코 아니다.

- 하던 일이 잘 풀리지 않고, 건강이 나빠지며, 소중히 여겼던 사람이 떠나가면, 

- 이 멸망을 하나님이 주신 기회라고 생각하고, 죄를 회개하여 하나님과 사랑을 회복할까?

- 아니면 하나님을 더욱 원망하고,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로지 자기 힘으로 고군분투할까?

단순한 예를 들어,

- 사람이 원하는 일을 이루고 풍요로워질 때, 여유를 갖고 신앙 생활에 헌신할까?

- 아니면 풍요로워질수록 굳이 하나님이 필요가 없어지니, 신앙에서 멀어질까?

- 반대로 사람이 원하는 일에 실패하고 가난해질 때, 절박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을까?

- 아니면 가난해질수록 가난을 더욱 악착같이 극복하기 위해, 하나님에게서 멀어질까?

이 네 가지 질문을 듣는 순간 느끼겠지만, 원하는 것을 얻는다고 혹은 얻지 못한다고 신앙이 어떻게 되지 않는다.

- 신앙은 사람의 의지와 하나님의 은혜로 생기는 것이지,

- 환경 때문에 저절로 생기는 경우는 없다.

- 신앙이 생기기 좋은 환경이란 것도 없다.

- 멸망도 회복도 신앙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

 

그러면 하나님은 굳이 왜 멸망하시냐?

- 멸망이 어차피 아무 도움 안 되는 것 아니냐?

 

이 질문에 답을 하기 이전에 다른 질문을 먼저 하겠다.

-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이 원하는 것을 주시지 않고 멸망하시는 경우와 원하는 것을 주셔서 회복하시는 경우 중에 뭐가 더 많은가?

- 대충만 훑어봐도, 야곱이 이집트 총리 된 사건, 많은 사사들의 기적, 출애굽 사건, 광야에서 많은 기적, 가나안 입성 전쟁 승리, 주변 이방 나라의 침략 전쟁 승리 등 셀 수 없이 많다.

하나님은 왜 이스라엘이 원하는 것을 주셔서 회복시키셨는가?

- 답은 하나다.

- 이스라엘과 사랑하는 관계를 맺기 위해서이다.

- 원하는 것을 주셔서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 그래서 그때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사랑을 고백했다.

 

그러니까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이 회복과 멸망 중에 훨씬 더 회복을 많이 주셨다.

- 요즘 계속 멸망만 말하니까, 하나님이 파괴주의자처럼 들릴 수 있는데,

- 실제로 하나님은 평화주의자처럼 계속해서 회복하셨다.

- 하나님은 회복을 통해 사랑을 고백하셨다.

- 우리가 그런 것처럼 말이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이때 멸망을 선택하셨냐?

- 단순하다.

- 회복으로는 관계가 회복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 멸망으로만 관계가 회복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목적은 하나다. 관계 회복이다.

- 그것을 위해 가급적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주시는데,

- 원하는 것을 준다고 관계 회복이 안 될 때는 어쩔 수 없이 원하는 것을 주시지 않고 멸망하시는 것이다.

 

당시 이스라엘이 그랬다.

-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당연히 회복시켜주실 것이라고 믿었다.

- 회복을 지나치게 당연하게 여겼다.

-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이스라엘에게 회복은 아무런 메시지를 전달하지 못한다.

- 이스라엘이 회복된다고 사랑하지 않던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지 않는다.

- 오히려 그런 이스라엘이 회복되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상태가 지속될 뿐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멸망을 선택하신 것이다.

- 분명히 멸망을 선택하신 하나님은 누구보다, 이스라엘보다 더 괴로우셨을 것이다.

- 자녀를 훈육할 때 자녀보다 부모 마음이 더 아픈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 방법밖에 없었다.

- 이스라엘이 멸망하여, 자의가 아닌 타의로 거래할 수 없는 상황에 내몰려야 했다.

- 그것만이 거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 마치 마약 중독자를 치료하기 위해 초기에는 절대 마약을 구할 수 없는 곳으로 강제 입원시키는 것처럼 말이다.

- 혼자 힘으로 마약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전혀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은 어쩔 수 없이 멸망을 선택하신 것이다.

 

결론 -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상태에 있는가?

거래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가?

- 거래로 찌들어있는 과거 인생에서 완전히 벗어나길 바라는가?

아니면 거래에 중독되어 불편함 없이 거래하고 있는가?

- 여전히 세상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자기 힘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가?

 

만약 전자라면,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주실 것이다.

- 멸망이 아닌 회복으로 하나님 사랑을 표현하실 것이다.

- 그래서 우리가 원하는 대로, 거래에 지배된 과거 인생 전체를 부정하고,

- 돌이켜 회개하여, 사랑으로 살도록 하실 것이다.

- 누구도 거래로 이용하지 않고,

- 하나님과 사랑하고, 교회와 이웃을 사랑하도록 하실 것이다.

- 우리 혼자 힘으로는 결코 할 수 없는 사랑을 하나님 은혜로 이루실 것이다.

그러나 만약 후자라면,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주지 않으실 것이다.

- 회복이 아닌 멸망으로 하나님 사랑을 표현하실 것이다.

- 그래서 우리가 원했던 것인 돈, 명예, 건강, 소중한 사람 등 거래 도구가 될 수 있는 모든 것을 전부 빼앗으실 것이다.

- 그래서 강제로 무능력하고 무가치한 존재로 전락시키실 것이다.

- 그래서 누구와도 거래할 수 없도록 만드실 것이다.

- 미련조차 갖지 못하도록 처참하게 멸망하실 것이다.

그렇게 멸망해서 자존감을 박살 내실 것이다.

- 자신을 누구도 거래하려 하지 않는 무의미한 존재로 인식하게 하실 것이다.

- 여기서 자존감은 거래를 통해 얻은 것이기에, 불안정하고 헛된 것이다.

- 상황이 조금만 바뀌어, 자신의 거래 가치가 훼손되면 바로 사라질 자존감이다.

 

그런 후에 하나님은 이제야 사랑을 가르쳐주실 것이다.

- 자신이 거래 가치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존재 자체로 사랑받기 충분하다는 것을 알려주실 것이다.

- 그래서 이전에는 거래 가치를 높이기 위해 죽음을 감수하고 내달렸는데,

-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려주실 것이다.

-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사랑받기 충분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실 것이다.

- 이렇게 참된 자존감을 높여주실 것이다.

그때야 비로소 사랑에 눈이 떠진다.

- 거래에 가려져 하찮게 보였던 사랑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알게 된다.

- 이전에는 사랑을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하여 거래를 방해하는 귀찮은 것으로 생각했는데,

- 이제는 사랑을 인간 존재의 본질이며,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유일한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러니 죽음을 감수하고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 사랑을 통해서만 생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 사랑 없는 생명은 죽음보다 못하기 때문이다.

- 사랑 없이 사는 것보다 사랑하다가 죽는 것이 훨씬 좋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고 방식의 변화가 신앙이다.

- 이러한 사고 방식으로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고, 교회와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

- 특히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다.

- 자신을 거래 대상이 아닌 존재 자체로 볼 수 있다.

자신을 거래 대상으로 보는데, 어떻게 자기 정체성을 회복할 수 있겠는가.

- 거래 사고 방식에서는 자신을 더 가치 있는 거래 대상으로 만들기 위해 자기 정체성을 억눌러 죽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자기 정체성도 억눌러 죽이는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의 정체성을 회복시키겠는가.

- 자기를 대하듯 소중한 사람도 더 가치 있는 거래 대상으로 만들기 위해 그의 정체성을 억눌러 죽일 것이다.

-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신앙이 필요한 것이다.

- 신앙만이 거래에서 사랑으로 사고 방식을 바꿔줄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렇게 바뀔 때만 자기와 소중한 사람을 거래 대상이 아니라 존재 자체로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렇게 바뀔 때만 자기와 소중한 사람의 정체성을 죽이지 않고 회복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