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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서

예레미야(46) 23:1-8 하나님이 왕이 되도록 하는 새로운 왕

<미양교회 팟캐스트 양따양>

미양교회에서 했던 설교를 바탕으로 진솔하게 신앙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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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양을 따르는 어린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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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저주’와 ‘회복’을 함께 말한다.

- 하나님은 하나님의 양 떼를 죽이고 흩어 버린 목자들을 저주하신다.

[렘 23:1] 내 목장의 양 떼를 죽이고 흩어 버린 목자들아, 너희는 저주를 받아라. 나 주의 말이다.

- 동시에 하나님은 목자 때문에 흩어진 하나님의 양 떼를 모아서 회복하겠다고 하신다.

[렘 23:3] 이제는 내가 친히 내 양 떼 가운데서 남은 양들을 모으겠다. 내가 쫓아냈던 모든 나라에서 모아서, 다시 그들이 살던 목장으로 데려오겠다. 그러면 그들이 번성하여 수가 많아질 것이다.

그렇다면 본문은 저주와 회복 중에 어떤 것에 초점을 두고 있을까?

- 저주일까, 회복일까, 아니면 둘 다일까?

 

결론적으로, 본문은 ‘저주’에 초점이 있다.

- 회복은 저주를 설명하는 도구이다.

이렇게 결론 내리는 이유는 단 하나 때문이다.

- 본문에서 하나님 말씀이 내려진 대상이 ‘목자’이기 때문이다.

[렘 23:2] 그러므로 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내 백성을 돌보는 목자들에게 말한다. 너희는 내 양 떼를 흩어서 몰아내고, 그 양들을 돌보아 주지 아니하였다. 너희의 그 악한 행실을 내가 이제 벌하겠다. 나 주의 말이다.

본문은 목자, 특히 ‘이스라엘 왕’을 향한다.

- 왕은 백성을 잘 돌봤어야 했다.

[렘 22:3] 나 주가 말한다. 너희는 공평과 정의를 실천하고, 억압하는 자들의 손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하여 주고, 외국인과 고아와 과부를 괴롭히거나 학대하지 말며, 이 곳에서 무죄한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하지 말아라.

- 그러나 왕은 백성에게 관심이 없었다.

[렘 22:17] 그런데 너의 눈과 마음은 불의한 이익을 탐하는 것과 무죄한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하는 것과 백성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것에만 쏠려 있다.

 

그래서 22장에서 여러 왕의 이름을 부르며 그들을 저주한다.

- 요시야 왕 다음 왕 살룸(여호아하스)

[렘 22:11~12] 부왕 요시야의 대를 이어서, 유다 왕이 되어 다스리다가, 이 곳에서 포로가 되어 잡혀 간, 유다 왕 요시야의 아들 살룸을 두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그는 영영 이 곳으로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12) 그는 잡혀 간 곳에서 죽을 것이며, 이 땅을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다.”

- 그 다음 왕 여호야김

[렘 22:18] 그러므로 주님께서 유다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을 두고 이렇게 말씀하신다. “아무도 여호야김의 죽음을 애도하지 않을 것이다. 남자들도 ‘슬프다!’ 하지 않고 여자들도 ‘애석하다!’ 하지 않을 것이다. ‘슬픕니다, 임금님! 슬픕니다, 폐하!’ 하며 애곡할 사람도 없을 것이다.

- 그 다음 왕 고니야(여호야긴)

[렘 22:24] 나 주의 말이다. 내가 내 삶을 두고 맹세한다. 여호야김의 아들 유다 왕 고니야야, 네가 내 오른손에 낀 옥새 가락지라고 하더라도, 내가 너를 거기에서 빼버리겠다.

그리고 이번 본문에서는 그다음 왕인 동시에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까지 간접적으로 저주한다.

- 시드기야는 히브리어로 צִדקִיָה(Tsidqiyyahu, 치드키야후)이다.

- 이는 체데크(의로움)와 야훼(여호와)를 합친 말로, ‘여호와께서는 의로우시다’를 의미한다.

- 그런데 하나님께서 새로 보내실 왕의 이름이 ‘주님은 우리의 구원이시다’이다.

[렘 23:6] 그 때가 오면 유다가 구원을 받을 것이며, 이스라엘이 안전한 거처가 될 것이다. 사람들이 그 이름을 ‘주님은 우리의 구원이시다’라고 부를 것이다.

- 그 이름을 히브리어로 하면 iצֶדֶק iיְהוָה(야훼 체데크)이다.

- 시드기야(체데크 야훼)를 정확하게 반대로 뒤집었다.

- 그러니까 시드기야는 새로운 왕과 정반대 이름을 가졌기에,

- 새로운 왕의 의로움과 정반대로 불의하다는 뜻이며,

-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으로서, 이스라엘을 멸망시켰다.

 

이렇게 본문의 초점은 이스라엘 왕이다.

- 이스라엘 왕이 목자 역할을 바르게 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멸망했다.

- 그래서 목자가 마땅히 돌봐야 할 양 떼가 전부 죽거나 흩어졌다.

- 이스라엘 왕이 얼마나 목자 역할을 바르게 하지 못했는지 이름까지 하나하나 부르며 지적했다.

이스라엘 멸망의 책임을 전적으로 왕에게 돌렸다.

 

그런 다음 회복을 예고한다.

먼저 외적 회복이다.

- 흩어졌던 백성이 돌아와서, 민족과 국가가 회복된다.

[렘 23:3] 이제는 내가 친히 내 양 떼 가운데서 남은 양들을 모으겠다. 내가 쫓아냈던 모든 나라에서 모아서, 다시 그들이 살던 목장으로 데려오겠다. 그러면 그들이 번성하여 수가 많아질 것이다.

다음으로 내적 회복이다.

- 하나님이 세우신 참 목자가 백성을 돌보아 두려움이 사라질 것이다.

[렘 23:4] 내가 그들을 돌보아 줄 참다운 목자들을 세워 줄 것이니, 그들이 다시는 두려워하거나 무서워 떠는 일이 없을 것이며, 하나도 잃어버리는 일이 없을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이렇게 이스라엘은 외적, 내적으로 회복된다.

 

게다가 회복에서 강조하는 점은 회복을 일으키는 주체이다.

[렘 23:3] 이제는 내가 친히 내 양 떼 가운데서 남은 양들을 모으겠다. 내가 쫓아냈던 모든 나라에서 모아서, ・・・・

[렘 23:4] 내가 그들을 돌보아 줄 참다운 목자들을 세워 줄 것이니, ・・・・

[렘 23:5] 내가 다윗에게서 의로운 가지가 하나 돋아나게 할 그 날이 오고 있다. ・・・・ 

- 회복 주체는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다.

하나님이 백성을 모으신 후(외적 회복), 새로운 목자를 보내셔서(내적 회복)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신다.

 

하지만 본문에서 회복 메시지를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니다.

- 본문은 회복이 아닌 저주에 초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회복 메시지가 어떻게 저주가 되는가?

회복 메시지가 향하는 대상 때문이다.

- 회복 메시지가 향하는 대상이 ‘회복될 백성’이 아니라 ‘멸망시킨 왕’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백성을 회복할 것이고, 새로운 왕을 세울 것이라고 예언하셨다.

- 그런데 문제는 이 회복에 지금까지 권력을 잡았던 왕이 배제된다는 것이다.

- 지금까지 권력을 잡았던 왕과 집권자는 이스라엘이 회복하는데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고,

- 그들이 잃었던 권력은 회복되지 않는다.

- 그들이 가졌던 권력은 전부 하나님께서 가져가신다.

- 왜냐하면 그들이 백성을 돌보라고 부여된 권력을 바르게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회복 메시지가 왕에게 저주가 되는 것이다.

- 본문 안에 저주와 회복이 함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 정작 메시지를 들었던 왕은 저주로만 들었을 것이다.

- 회복에서 자신은 배제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나님을 떠난 왕에게 내려진 심판이다.

 

그런데 모든 문제의 원인은 왕에게만 있고 백성에게는 아무 죄가 없는가?

다시 말하는데, 본문은 왕에게 초점을 두고 있다.

- 왕의 죄를 지적하고, 왕을 심판하는 것이 본문의 목적이다.

- 본문은 백성을 다루지 않는다.

- 그런 점에서 백성의 죄는 본문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을 백성이라고 생각하는 우리에게 백성의 죄는 큰 의미가 있다.

- 과연 백성은 누군가를 돌볼 의무가 없기에, 그리고 누군가를 착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 백성과 같은 우리는 무죄하고 의로운 존재인가?

 

목자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양을 판단하면, 

- 다시 말해서, 왕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백성을 보면, 백성은 잘못이 없다.

- 백성은 누구도 착취하지 않았다.

- 그런 점에서 백성은 이스라엘 멸망을 일으키지 않았다.

- 오히려 이스라엘 멸망을 일으킨 왕 때문에 피해를 당했다.

하지만 더 근원적으로, 왕정 체제가 누구 때문에 생겼냐?

- 바로 백성이 요구했기 때문이다.

- 성경에서 왕은 하나님이 주신 것도, 왕 자신이 만든 것도 아니다.

[삼상 8:4~5] 그래서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가 모여서, 라마로 사무엘을 찾아갔다. (5) 그들이 사무엘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어른께서는 늙으셨고, 아드님들은 어른께서 걸어오신 그 길을 따라 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모든 이방 나라들처럼, 우리에게 왕을 세워 주셔서, 왕이 우리를 다스리게 하여 주십시오. 

그런 점에서 백성은 이스라엘 멸망에 대한 책임이 있다.

- 왕이 아닌 백성 때문에 이스라엘은 멸망한 것이다.

- 백성이 왕을 요구했기 때문에 왕정 체제가 생겼고,

- 왕정 체제가 갖는 태생적인 문제 때문에 이스라엘이 멸망한 것이다.

 

게다가 이스라엘 백성은 왜 왕을 요구했냐?

- 왕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 원래 이스라엘 백성의 왕은 하나님이셨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을 요구한 것은 하나님을 왕으로 삼기를 거부한 것이다.

- 즉, 백성이 새로운 왕을 요구한 이유는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을 자신의 왕 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삼상 8:6~7] 그러나 사무엘은 왕을 세워 다스리게 해 달라는 장로들의 말에 마음이 상하여, 주님께 기도를 드렸더니, (7) 주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 “백성이 너에게 한 말을 다 들어 주어라. 그들이 너를 버린 것이 아니라, 나를 버려서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한 것이다.

따라서 왕정 체제 자체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반역했다는 증거이다.

 

또한 하나님은 백성에게 왕정 체제 때문에 생길 착취를 이미 예고하셨다.

- 하나님은 왕을 주시겠다고 하시며, 왕 때문에 당할 착취를 자세히 경고하신다.

[삼상 8:9~18] 그러니 너는 이제 그들의 말을 들어 주되, 엄히 경고하여, 그들을 다스릴 왕의 권한이 어떠한 것인지를 알려 주어라.” (10) 사무엘은 왕을 세워 달라고 요구하는 백성들에게, 주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을 그대로 전하였다. (11) “당신들을 다스릴 왕의 권한은 이러합니다. 그는 당신들의 아들들을 데려다가 그의 병거와 말을 다루는 일을 시키고, ・・・・ (12) ・・・・ 왕의 밭을 갈게도 하고, 곡식을 거두어들이게도 하고, 무기와 병거의 장비도 만들게 할 것입니다. (13) 그는 당신들의 딸들을 데려다가, ・・・・ (14) 그는 당신들의 밭과 포도원과 올리브 밭에서 가장 좋은 것을 가져다가 ・・・・ (15) 당신들이 둔 곡식과 포도에서도 열에 하나를 거두어 ・・・・ (16) 그는 당신들의 남종들과 여종들과 가장 뛰어난 젊은이들과 나귀들을 끌어다가 ・・・・ (17) 그는 또 당신들의 양 떼 가운데서 열에 하나를 거두어 갈 것이며, 마침내 당신들까지 왕의 종이 될 것입니다. (18) 그 때에야 당신들이 스스로 택한 왕 때문에 울부짖을 터이지만, 그 때에 주님께서는 당신들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 특히 백성이 왕의 착취 때문에 고통당할 테지만, 하나님이 도와주지 않겠다고까지 경고하셨다.

이는 단순한 경고가 아니다.

- 하나님께서 백성에게 제발 왕을 구하지 말라는 절박한 호소이다.

- 왕보다 하나님께 돌봄을 받는 것이 백성에게 훨씬 좋기 때문이다.

- 왕 때문에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백성이 고통당할 것이고,

- 그보다 하나님이 더 괴로우신 것은 왕 때문에 백성이 하나님과 멀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 그래서 하나님은 경고의 형태로 백성에게 떠나지 말라고 애원하신 것이다.

 

그러나 백성은 매정했다.

- 하나님의 애원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왕을 요청한다.

[삼상 8:19] 이렇게 일러주어도 백성은, 사무엘의 말을 듣지 않고 말하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도 왕이 있어야 되겠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멸망이라는 비극이 시작되었다.

- 그리고 그 시작은 백성 때문에 일어났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은 왜 그토록 간절하게 왕을 요청했을까?

백성에게 왕은 어떤 의미였을까?

- 왜 백성은 하나님을 버리고 왕을 선택했을까?

 

여기서 하나님은 사랑을, 왕은 거래를 상징한다.

-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사랑의 관계를 맺기를 바라셨지만,

- 이스라엘 백성은 거래를 원했다.

왜 사랑을 버리고 거래를 원했냐?

- 욕망 때문이다.

- 필요한 것 이상으로 원하는 것을 얻고 싶었기 때문이다.

- 그런데 하나님은 사랑으로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시지만, 아무리 달라고 해도 그 이상을 주시지 않는다.

- 하지만 거래에서는 돈만 주면 필요 없어도 원하는 것을 뭐든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 그 욕심 때문에 다른 사람이 희생당할 수 있음에도 말이다.

- 다른 사람의 희생에 함께 고통스러워하는 것보다, 자신의 욕망을 더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백성은 사랑의 하나님을 버리고 거래의 왕을 요구한 것이다.

- 자신의 욕망을 이뤄줄 강한 힘을 가진 왕 말이다.

- 강한 힘으로 이방 나라를 공격하여 원하는 것을 대신 얻어줄 왕 말이다.

- 단, 왕의 강한 힘으로 이방 나라뿐만 아니라 백성을 공격할 수 있다는 것을 외면한 채 말이다.

- 이미 하나님께서 그것을 경고하셨는데도 말이다.

 

원하는 것을 얻을 수만 있다면, 백성은 왕 때문에 생기는 불편함을 충분히 감수(지불)할 수 있었다.

- 그래서 하나님이 왕 때문에 일어날 착취를 그토록 경고하시는데도, 백성은 듣지 않았다.

- 욕망 성취를 위해서라면 그 정도는 충분히 지불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백성은 사랑의 세계에서 나와서 거래의 세계로 뛰어든 것이다.

- 거래의 세계가 얼마나 치열하고 참혹한 전쟁터인지 모른 채 말이다.

- 오직 욕망 성취를 위해서 말이다.

- 그 선택 때문에 결국 자신이 파괴될 것인데도 말이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이 가진 근원적인 죄이다.

- 이 죄 때문에 왕을 요청한 것이다.

 

이 점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이스라엘 왕과 완전히 똑같다.

자신의 선택이 자신을 파괴하였다.

- 자승자박이다.

이스라엘 왕도 그랬다.

-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했던 선택 때문에 결국 권력을 빼앗겼다.

- 권력 유지를 위해 강대국을 의지했고,

- 강대국을 의지하기 위해 무리한 조공을 바쳤으며,

- 조공을 하기 위해 백성을 착취했다.

- 그러니 결국 백성이 약해져서 더 이상 착취할 수 없게 되고,

- 그러니 조공을 할 수 없게 되었으며,

- 그러니 강대국을 의지할 수 없게 되어,

- 다른 나라의 침략을 방어할 수 없게 되었다.

- 그래서 결국 나라도 멸망하고, 권력도 잃게 되었다.

 

이 모든 과정이 일어난 근원적인 원인이 무엇이냐?

- 욕망 성취를 위해 사랑의 세계에서 나와서 거래의 세계로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 권력을 유지하려는 욕망에 매몰되었기 때문이다.

- 권력 유지를 위해 넓은 시야에서 나라 전체를 살피고, 우선 백성을 돌봐야 하는데,

- 욕망에 매몰되어 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여, 권력 유지 자체만 집중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랑이 아닌 거래는 백성도 왕도 자신을 파괴한다.

 

그런 관점으로 본문을 다시 보자.

본문에 드러난 내용만 보면, 백성은 무죄하고 돌봐야 할 대상으로 보인다.

- 이스라엘 멸망 원인은 오직 왕에게만 있고, 백성은 아무 잘못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 그래서 목자인 왕은 저주 받아야 하고, 양 떼인 백성은 회복되어야 할 것처럼 보인다.

- 그래서 하나님이 참 목자를 세우셔서, 세상에 공평과 정의를 실현하시겠다는 약속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희망을 주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 하나님께서 직접 ‘참다운 목자’, ‘다윗에게서 돋아난 의로운 가지’를 세우시겠다는 것은 기존의 왕정 체제를 무너뜨리시겠다는 것이며,

- 이는 왕정 체제를 요청한 백성을 심판하시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목자인 이스라엘 왕’만을 저주하시는 것이 아니라, ‘양 떼인 이스라엘 백성’까지 파괴하시겠다는 뜻이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왕정 체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세계 질서를 만드시겠다고 선포하신다.

- 그래서 왕정 체제 안에서 목자와 양의 역할을 했던 왕과 양 떼 모두 멸망하시겠다고 하신다.

- 그런 후에 왕과 왕을 요구했던 백성은 배제하고, 새로운 이스라엘을 만드시겠다고 하신다.

새로운 이스라엘에는 새로운 왕과 새로운 백성만 있다.

- 이전 왕과 왕을 요구했던 이전 백성은 모두 저주받고 멸망해 없다.

- 하나님께서 새롭게 세우신 참다운 목자만 있고,

[렘 23:4] 내가 그들을 돌보아 줄 참다운 목자들을 세워 줄 것이니, ・・・・

- 하나님께서 새롭게 모으신 남은 양들만 있다.

[렘 23:3] 이제는 내가 친히 내 양 떼 가운데서 남은 양들을 모으겠다. ・・・・ 

 

그렇다면 새로운 왕과 새로운 백성은 누구냐?

새로운 백성은 단순하다.

- 버려진 이전 백성은 ‘하나님을 버려서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한’ 사람이다.

[삼상 8:7] ・・・・ 그들이 너를 버린 것이 아니라, 나를 버려서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한 것이다.

- 따라서 새로운 백성은 하나님을 자기들의 왕으로 삼는 사람이다.

이를 예레미야서 24장에서 이렇게 표현한다.

[렘 24:7] 이제는 내가 그들에게 나를 그들의 주로 알아볼 수 있는 마음을 주겠다. 그러면 그들이 온전한 마음으로 나에게 돌아와서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 새로운 백성은 하나님을 왕 또는 주로 알아보는 사람이다.

-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삼는 사람이다.

물론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삼는 것’은 정의하기 어렵다.

- 하지만 간단하게 말하면, 거래가 아닌 사랑의 관계,

- 상대를 거래 도구가 아닌 인격 그 자체로 인정하는 것,

- 자기가 유익을 얻기 위한 관계가 아니라 상대에게 유익을 주기 위한 관계,

- 섬긴 보상으로 대가를 바라는 관계가 아니라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것을 넘어서 죽음까지 감수하고 헌신하는 관계이다.

하나님과 그런 관계를 맺는 백성이 새로운 백성이다.

 

하나님은 이미 태초부터 그런 관계를 맺어 오셨다.

- 인류를 사랑하셨고, 도구가 아닌 인격 그 자체로 인정하셨고, 인류의 유익을 위하셨고, 인류에게 죽음을 감수하고 헌신하셨다.

- 그래서 하나님은 인류에게도 동일한 사랑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 게다가 그 사랑을 요구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사랑의 마음을 주시겠다고까지 하신다.

[렘 24:7] 이제는 내가 그들에게 나를 그들의 주로 알아볼 수 있는 마음을 주겠다. ・・・・

하나님께서 사랑의 마음을 주시는 이유도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다.

- 사랑할 때만 우리가 참된 충만함과 자유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새로운 왕은 누구일까?

- 이전 왕과 어떻게 다를까?

먼저 이전 왕이 갖는 본질을 생각해보자.

- 이전 왕은 백성이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이 자기 왕이 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세워졌다.

- 시작이 그랬기 때문에 왕정 체제가 된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멀어질 수밖에 없었고,

- 하나님과 멀어진 이스라엘은 정통성과 정체성을 잃고 멸망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새로운 왕은 이전 왕이 가진 문제를 극복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새로운 왕의 역할은 단순하다.

- 백성이 하나님과 관계 맺고, 하나님을 자기 왕으로 삼도록 해야 한다.

- 그래야 이스라엘이 정통성과 정체성을 회복하여, 멸망하지 않는 나라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왕 되도록 하는 새로운 왕’은 누구겠는가?

- 하나님 자신뿐이다.

- 하나님이 왕이 되도록 하는 왕은 하나님뿐이다.

그렇게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왕으로 삼을 때,

- 왕정 체제 이전에 하나님께 직접 돌봄을 받으며 사랑의 관계를 맺었던 순간으로 돌아갈 수 있다.

- 그것만이 이스라엘 정체성을 회복하는 유일한 길이다.

- 하나님과 관계 맺는 것 자체가 이스라엘을 이스라엘이라고 부르는 핵심 이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문이 말하는 ‘참다운 목자’, ‘다윗에게서 돋아난 의로운 가지’ 역시 하나님이다.

- 그래서 그가 왕이 되어 슬기롭게 통치하고,

- 세상에 공평과 정의를 실현할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렘 23:5] 내가 다윗에게서 의로운 가지가 하나 돋아나게 할 그 날이 오고 있다. 나 주의 말이다. 그는 왕이 되어 슬기롭게 통치하면서, 세상에 공평과 정의를 실현할 것이다.

 

물론 우리는 참다운 목자가 예수님이라는 것을 안다.

- 그런 점에서 시시할 수 있다.

그런데 본문은 예수님의 의미를 더욱 풍성하게 한다.

- 예수님은 ‘하나님이 왕이 되도록 하는 새로운 왕’이다.

이것을 풀어 말하면, 

- 사람은 하나님께 돌봄 받을 때만 죽임당하고 흩어지지 않고, 번성하여 수가 많아질 수 있다.

[렘 23:2] ・・・・ 너희는 내 양 떼를 흩어서 몰아내고, 그 양들을 돌보아 주지 아니하였다. ・・・・ 

[렘 23:3] ・・・・ 그러면 그들이 번성하여 수가 많아질 것이다.

- 그러나 사람은 욕망 때문에 하나님이 자신의 왕 되는 것을 싫어한다.

- 그래서 사람 왕을 요구했고, 하나님은 어쩔 수 없이 왕을 주신다.

- 그러나 하나님이 예고하신 대로 왕정 체제는 이스라엘을 멸망시킨다.

- 이 과정을 통해 자신의 죄를 깨달은 이스라엘은 다시 하나님을 자신의 왕 되어달라고 요청한다.

- 그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 되기 위해 보내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다.

- 하나님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오셔서 자신이 왕으로서 세상을 직접 다스리시는 동시에,

- 참된 왕은 하나님뿐이라는 것을 세상이 깨닫도록 한다.

- 그렇게 ’하나님이 왕 되도록 하는 새로운 왕‘ 역할을 완벽하게 해내신다.

이렇게 하나님이 왕이 되어 직접 백성을 다스리는 형태가 새로운 왕과 새로운 백성의 모습이다.

 

결론 - 우리는 하나님 대신에 무엇을 왕 삼고 있는가?

본문이 고발하는 이스라엘 왕과 백성의 죄는 하나님을 거부하는 마음이다.

- 하나님이 아닌 대상을 왕 삼고자 하는 마음이다.

- 사랑의 세계가 아닌 거래의 세계를 바라는 마음이다.

거래의 세계를 바라는 이유는 하나이다.

- 욕망을 성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단, 욕망 성취의 대가로 존재 그 자체 혹은 정체성을 지불해야 하는 문제가 있지만 말이다.

그래서 왕을 요구했던 이스라엘 백성과 권력 유지에 매몰되었던 이스라엘 왕이 결국 멸망한 것이다.

- 욕망을 성취한 대신 자신의 존재와 정체성을 잃었기 때문이다.

- 그래서 결국 정제성과 함께 욕망 성취조차 잃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인류 그리고 우리를 사랑의 세계로 절박하게 부르시는 것이다.

- 사랑의 세계 안에서만 있는 그대로의 자신이 수용될 수 있고,

- 그래야 자신의 존재를 되찾고 정체성을 회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래야 결국 욕망 성취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 마치 이스라엘이 왕이 아닌 하나님을 의지할 때, 이방 나라의 공격을 방어할 수 있고, 

- 국력이 강화되어 국가를 유지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 그럴 때 백성도 평안할 수 있고, 왕도 권력을 유지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사랑의 세계에서만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할 수 있고, 

- 자신의 존재를 되찾고, 정체성을 회복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현실은 어떠한가?

우리는 끊임없이 새로운 왕을 찾는다.

- 표현을 바꿔서, 새로운 취미 거리, 안락 거리, 재미 거리를 찾고 있다.

- 자신을 안정시킬 거리 혹은 자신을 흥분시킬 거리를 찾고 있다.

- 소소하게는 게임, 영상 시청, 운동, 담배, 술 등이고,

- 더 나아가, 주식, 부동산 투자, 룸살롱, 매춘, 외도 등이며,

- 또 그 위에 재산, 직업, 인맥, 커리어 등이고,

- 가장 위에 자본주의 체제가 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거부하기 위해 왕정 체제를 요구했듯이, 

- 우리는 하나님을 거부하기 위해 자본주의 체제를 요구한다.

 

이는 전부 거래가 지배하는 세상이다.

- 뭔가를 얻기 위해서는 투자해야 하고,

- 투자를 많이 한 사람은 많이 얻는다.

- 그 결과 피라미드 형식으로 상하 관계가 생긴다.

- 강한 자는 약한 자를 통제할 수 있고,

- 약한 자는 강한 자에게 굴복하는 대신, 강한 자를 이용해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

- 서로 암묵적인 계약을 맺고, 서로 원하는 것을 주고받는다.

 

거래 세상을 이렇게만 표현하면 이게 왜 나쁘냐고 반박할 수 있다.

- 서로 윈-윈 하는 거래 아니냐고 물을 수 있다.

- 서로 잘 도와서 사는데 무슨 문제냐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거래 세상이 얼마나 큰 문제가 있는지는 셀 수 없이 많이 말할 수 있지만,

- 가장 중요한 것 딱 하나만 말하겠다.

- 그것은 자신의 존재와 정체성을 잃는 것이다.

- 자신의 존재를 가진 돈, 돈을 얻을 수 있는 지위, 돈을 얻을 능력으로만 판단한다.

- 그래서 인생 전부를 그것을 개발하는 것에만 투자(투신)한다.

- 또한 다른 사람을 볼 때도 그것만을 기준으로 판단한다.

그 결과 정말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 전혀 돌아볼 수 없다.

- 자신이 잘 팔리는지 아닌지에 대해서만 관심 갖는다.

- 그래서 잘 팔리는 작은 부분만 남겨두고, 나머지 부분은 숨기고, 억누르고, 고치려 하고, 제거하려 한다.

- 그러다가 그것에 실패하면 자신을 혐오한다.

- 또한 그렇게 다른 사람도 억누르고, 고치려 하고, 제거하려 하며, 혐오한다.

이것이 사랑의 세상에서 나와 거래 세상에서 사는 우리의 현실이다.

- 하나님을 떠나 세상을 왕 삼는 우리의 현실이다.

 

본문은 단호하게 말한다.

- 거래 세상에 사는 우리와 거래 세상 자체는 이스라엘 백성과 왕처럼 멸망할 것이라고

-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와 거래 세상이 배제된 새로운 백성과 새로운 왕을 세워주실 것이라고.

- 그 새로운 세상에는 ‘모든 사람이 온전한 마음으로 주라고 인정하는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내 백성이라고 인정한 사람’만 있을 거라고.

- 나머지 이전 사람은 모두 파괴되어 사라질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니 이제라도 어서 빨리 거래 세계에서 탈출하여 사랑의 세계로 들어오라고 말이다.

 

지금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 사랑의 세계인가, 거래의 세계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