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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서

예레미야(48) 23:25-40 예언 대신 말씀 - 역사신학의 관점에서

<미양교회 팟캐스트 양따양>

미양교회에서 했던 설교를 바탕으로 진솔하게 신앙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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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양을 따르는 어린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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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예언을 비판한다.

- 25~32절에서는 ‘꿈’이라는 단어로 예언을 부정하고,

[렘 23:25] “나의 이름을 팔아 거짓말로 예언하는 예언자들이 있다. ‘내가 꿈에 보았다! 내가 꿈에 계시를 받았다!’ 하고 주장하는 말을 내가 들었다.

- 33-40절에서는 ‘부담(맛사)’이라는 단어로 예언을 부정한다.

[렘 23:33] “이 백성 가운데 어느 한 사람이나 예언자나 제사장이 너에게 와서 ‘부담이 되는 주님의 말씀’이 있느냐고 묻거든, 너는 그들에게 대답하여라. ‘부담이 되는 주님의 말씀’이라고 하였느냐? 나 주가 말한다. 너희가 바로 나에게 부담이 된다. 그래서 내가 이제 너희를 버리겠다 말하였다고 하여라.

참고로, ‘부담(맛사)’는 ‘예언’과 ‘짐’이라는 두 가지 뜻을 갖는다.

- 그래서 본문은 맛사(예언)를 구하는 사람이 하나님께 맛사(짐)가 되기에,

- 그 사람은 벌을 받을 것이라고 말한다.

- 전형적인 ‘말장난(wordplay)’이다.

 

왜 예언을 비판하냐?

- 하나님의 이름 혹은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고 부정하기 때문이다.

[렘 23:27] 그들은, 조상이 바알을 섬기며 내 이름을 잊었듯이, 서로 꿈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내 백성이 내 이름을 잊어 버리도록 계략을 꾸미고 있다.

[렘 23:36] … ‘그렇게 말하는 것은 살아 계신 하나님, 우리의 하나님, 만군의 주의 말씀을 왜곡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하여라.

엄밀하게 말하면, 이들이 하나님께 잘못했기 때문에 벌을 받는 것이 아니다.

-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에게 잘못했기 때문이다.

- 왜곡된 예언으로 그들을 그릇된 길로 빠지게 만들었다.

[렘 23:32] … 그들은 거짓말과 허풍으로 내 백성을 그릇된 길로 빠지게 하는 자들이다. …

- 이스라엘 백성이 당한 피해 때문에 하나님은 예언을 비판하는 것이다.

 

따라서 예언으로 백성을 속이는 이들에게 멸망이 선포되는 것은 합당하다.

- 하나님은 예언을 ‘도둑질’, ‘제멋대로 놀리는 혀’, ‘허황된 꿈’이라고 하시며 대적하신다.

[렘 23:30~32] 그러므로 보아라, 내 말을 도둑질이나 하는 이런 예언자들을, 내가 대적하겠다! 나 주의 말이다. (31)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제멋대로 혀를 놀리는 예언자들을, 내가 대적하겠다! 나 주의 말이다. (32) 허황된 꿈들을 예언이라고 떠들어대는 자들은 내가 대적하겠다. 나 주의 말이다. …

예언하는 자들뿐만 아니라 이스라엘까지 파괴하겠다고 하신다.

- 왜 예언자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까지 심판받는지에 대해서는 지난번에 말했다.

- 예언자가 활개 칠 수 있는 이유는 사회 전체가 가진 문제 때문이다.

- 예언 권하는 사회였기 때문이다.

- 따라서 심판은 사회 전체를 향했다.

[렘 23:39~40] 내가 그들을 뽑아서, 멀리 던져 버리겠다 하더라고 전하여라. 그들뿐만 아니라 그들과 그들의 조상에게 준 이 도성도 함께 뽑아서, 멀리 던져 버리겠다 하더라고 전하여라. (40) 내가 이와 같이 하여, 그들이 잊을 수 없는 영원한 수치와 영원한 치욕들을 당하게 하겠다 말했다고 전하여라.

 

본문의 표면적 메시지와 근원적 메시지

여기까지가 본문이 전면에서 전하는 메시지이다.

- 본문은 표면에서 예언을 강하게 비판한다.

하지만 표면 메시지 안에 근원 메시지가 있다.

- 그것은 예언과 대비하여 ‘하나님 말씀’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 말씀을 다루기 전에,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

- 왜 예언을 이렇게 가혹하게 비판하냐는 것이다.

- 예언이 이렇게 나쁜 것인가?

- 예언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되는가?

그렇지 않다.

- 예언이 나쁜 것이 아니라는 증거는 많지만, 딱 하나만 말하면,

- 예언을 비판하는 것 자체가 예언이다.

- 예레미야는 예언자가 심판받을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다.

즉, 본문이 비판하는 것은 예언 전체가 아니라 거짓 예언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거짓 예언을 규정하는 기준이다.

- 왜 예언을 비판하는 예레미야의 예언은 참 예언이고,

- 왜 다른 예언은 거짓 예언인가?

이 부분에서 본문은 빈약하다.

- 지난 본문에서는 ‘긍정 왜곡’이 예언을 비판하는 기준이었다.

- 그러나 이번 본문에서는 기준이 모호하다.

 

본문이 제시하는 유일한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은 참 예언이라는 것이다.

[렘 23:28~29] 꿈을 꾼 예언자가 꿈 이야기를 하더라도, 내 말을 받은 예언자는 충실하게 내 말만 전하여라. 알곡과 쭉정이가 서로 무슨 상관이 있느냐? 나 주의 말이다. (29) 내 말은 맹렬하게 타는 불이다. 바위를 부수는 망치다. 나 주의 말이다.

- 그리고 ‘맛사(부담이 되는 주님의 말씀)’가 있냐고 묻는 대신에, ’하나님 말씀‘이 뭐냐고 물으라고 한다.

- 이는 거짓 예언을 부정하고 하나님 말씀에 따른 참 예언을 옹호하는 뜻이다.

[렘 23:35] 친구나 친척끼리 서로 말할 때에는 ‘부담이 되는 주님의 말씀’이라고 말하는 대신에 ‘주님께서 무엇이라고 대답을 하셨느냐?’ ‘주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느냐?’ 하고 물어야 한다고 일러주어라.

[렘 23:37] 이제 예언자에게 물을 때에는 ‘주님께서 무엇이라고 대답을 하셨느냐? 주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느냐? 하고 물어라.

 

하지만 문제는 예언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 것인지 아닌지 어떻게 아냐는 것이다.

- 하나님은 꿈을 통해 말씀을 전하실 때가 있는데,

- 꿈만 보고 하나님의 말씀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며,

- ‘맛사(부담이 되는 주님의 말씀)’와 ‘하나님 말씀’을 어떻게 구분하냐는 것이다.

참고로 나는 지난주에 참 예언의 기준을 이렇게 말했다.

- 예언 자체만으로 참 거짓은 구분할 수도 없고, 구분할 필요도 없다.

- 오히려 예언이 미치는 영향력이 더 중요한 기준이다.

- 아무리 참된 사실을 예언했다고 해도, 그 예언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 아닌, 자신에게 집중하도록 하여 욕망을 부추겼다면, 거짓 예언이 된다.

- 반면 아무리 거짓을 예언했다고 해도, 그 예언이 자기 욕망에서 벗어나,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으로 이끌었다면, 참된 예언이 된다.

- 결국 기준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다. 라고 했다.

 

그러나 이는 내가 성경을 두루두루 읽고 느낀 점을 말한 것일 뿐이다.

- 진리가 아니며, 틀릴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본문인데, 본문은 참 예언과 거짓 예언을 구분하는 기준을 제시하지 않는다.

- 단지 ‘하나님 말씀’이 예언을 구분하는 기준이라고 말할 뿐이다.

- 그러나 정작 하나님 말씀이 무엇인지는 말하지 않는다.

- 이는 사실상 아무 의미 없는 하나 마나 한 말이다.

- 하나님 말씀이 중요하다는 것을 누가 모르겠는가.

- 이것으로는 참 예언과 거짓 예언을 구분할 수 없다.

그런 관점에서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본문 안에서 찾기 어렵다.

 

그렇다면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본문 안에서 본문의 메시지를 알기 어려우니, 시야를 넓혀서 생각해보겠다.

- 역사신학의 관점에서 본문을 읽어보겠다.

- 역사신학이란, 성경이 진공 상태에서, 세상과 아무런 교류 없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 전적인 하나님의 계시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 역사가 흐르는 과정 중에, 세상과 끊임없는 상호 작용 속에서, 주체적인 사람이 자발적인 필요에 따라 기록한 것이라는 뜻이다.

- 그렇다고 성경에 하나님의 계시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 하나님이 역사를 이용해서 성경에 계시가 담기도록 했다는 뜻이다.

쉽게 말해서, 바울이 하나님께 말씀을 받아서 기계적으로 받아쓴 것이 아니라,

- 바울은 자발적, 주체적으로 글을 썼는데, 

- 하나님은 바울이 글을 쓰는 정황과 역사까지 통제하고 이용하여, 

- 그 글 속에 하나님의 계시를 담았다는 것이다.

- 그러니까 성경이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쓰인 것도 아니고,

- 반대로 전적으로 사람에 의해서 쓰인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 전적으로 하나님이 쓰신 것인 동시에 역사 속에 살고 있는 사람이 썼다는 것이다.

- 즉, 하나님의 주체성과 사람의 주체성이 어느 것 하나 훼손되지 않고 공동-존재한다.

- 성경을 하나님과 사람이 각 50%씩 나눠서 ‘함께’ 쓴 것이 아니라,

- 하나님과 사람이 모두 100% ‘공동’으로 썼다는 것이다.

- 마치 삼위일체가 존재하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이미 느꼈겠지만, 역사신학의 관점은 보수적 신앙을 가진 사람에게 비판받는다.

- 이단이라는 누명까지 쓴다.

- 거룩한 성경을 사람이 쓴 책으로 깎아내린다고 비난한다.

하지만 성경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책이 아니다.

- 역사 속에서 살아 숨 쉬었던 사람이 쓴 책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록한 사람이 역사 속에서 처한 정황을 이해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는 관점이다.

 

 

그렇다면 본문은 어떤 역사 속에서 기록되었을까?

먼저 말해야 할 것은, 성경 기록의 역사를 추적하는 일은 어렵다는 것이다.

- ‘역사’라는 것 자체가 갖는 모호성이 있다.

- ‘역사는 과거와 끊임없는 대화’라는 말처럼 말이다.

- 그래서 성경 기록의 역사 역시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기억하자.

성경 기록이 하나님과 사람의 공동-작업이었건 것처럼,

- 성경 해석 역시 하나님과 사람의 공동-작업이다.

- 하나님도 우리에게 성경을 이해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시지만,

- 동시에 우리도 최선을 다해 성경을 탐구해야 한다.

 

그러면 예레미야서는 어떻게 기록되었을까?

- 다른 모든 구약 성경이 그런 것처럼, 예레미야서도 한 사람에 의해, 한 자리에서, 한 번에 기록된 것이 아니다.

- 참고로, 신약 성경은 한 사람에 의해, 한 자리에서, 한 번에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구약 성경은 아무리 적게 잡아도, 최소 두 번에 나눠서 기록된다.

첫 번째는, 예레미야 시대이다.

-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은혜로 동시에 자발적인 깨달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전할 때,

- 예레미야 자신이 직접, 혹은 예레미야 말을 들은 누군가가 대신 기록했다.

- 당연하게도, 그 글은 지금 우리가 보는 예레미야서처럼 하나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책 형태가 아니라,

- 예레미야가 이곳저곳에서 했던 말을 짤막하게 기록해서 모아둔 글 모음집이었다.

- 연결되지 않는 다양한 주제의 글을 단순하게 모아만 둔 책이었다.

- 물론 지금은 그 모음집의 실체를 파악할 수 없다.

두 번째는, 포로 시기 혹은 포로 귀환 시기이다.

- 단순하게 말해서,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 구약 전체가 이 시기에 기록되었다.

- 정확하게 말해서, 천 년 이상 전부터 파편적으로 기록되어 남겨진 글 모음집이 이 시기에 정리되어서, ‘정경’, 즉 이스라엘 신앙을 규정하는 권위 있는 책으로 완성되었다.

 

그렇다면 왜 이 시기이냐?

그전에도 책은 많이 있었지만, 이 정도의 권위 있는 책은 없었다.

- 왜냐하면 굳이 책에 권위를 부여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 다르게 말해서, 책 대신에 이스라엘 신앙을 규정할 다른 대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대상이 뭐냐?

- 당연하게도, 성전이다.

- 성전에서 드리는 제사를 통해 제사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기억할 수 있었고,

- 그 하나님이 이스라엘 신앙의 중심이며, 이스라엘 정체성 그 자체였다.

- 그랬기 때문에 성전 외에 이스라엘 신앙과 정체성을 규정할 새로운 권위는 필요 없었다.

 

그런데 성전이 파괴되었다.

- 그래서 이스라엘을 규정할 권위가 사라졌다.

- 여기서 만약 성전이 파괴되면서 이스라엘의 신앙과 정체성도 함께 사라졌다면,

- 성경은 기록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성전은 파괴되었지만, 이스라엘의 신앙과 정체성은 사라지지 않았다.

- 그들은 포로가 되어서도 신앙과 정체성을 지켰다.

- 그랬기 때문에 그들은 성전을 대신해서 이스라엘을 규정해줄 새로운 권위가 필요했다.

 

그것이 바로 ‘책’이다.

- 포로가 되어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처지에서 ‘책’은 권위를 부여하기 좋은 대상이다.

- 왜냐하면 책은 작아서 언제나 들고 이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래서 불안정한 미래에도 언제나 이스라엘 민족과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포로 시기에 이스라엘은 신앙과 정체성의 기준으로 책을 삼은 것이다.

- 그래서 권위를 가진 ‘책’을 기록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 책은 어떤 메시지를 전해야 할까?

책이 기록되기 이전 상황을 상상해보자.

- 왕도 없고, 성전도 없으며, 이스라엘 신앙과 정체성을 규정할 기준이 전부 사라졌다.

- 오직 생존을 위해 새로운 환경과 제국의 법에 적응하려는 노력할 뿐이다.

그 결과 신앙과 정체성은 파편화되고 무질서해졌다.

- 같은 이스라엘 민족이라도 처한 환경과 제국의 영향력에 따라 다른 신앙과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

- 게다가 그에 따라 하나님의 뜻도 서로 다르게 이해했다.

- 그로 인해 이스라엘 사회에 내부 갈등이 생겼다.

이 내부 갈등이 결국 신앙과 정체성을 규정할 권위가 없기 때문에 생긴 결과이다.

 

그렇기 때문에 권위 있는 책을 만든 것이다.

- 새롭게 부여된 권위를 통해 분열된 사회를 통합하여 내부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이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모세오경에 있는 ‘율법’이다.

- 사실상 왕과 성전이 있을 때는 굳이 율법이 필요 없었다.

- 율법이 없어도 왕과 성전이 신앙과 정체성을 규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누구도 그것에 반기를 드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 그런데 율법이 필요하다는 것은 그만큼 왕권과 신권이 약해졌다는 것이고,

- 그만큼 다양한 주장이 충돌한다는 뜻이며,

- 그만큼 내부 갈등을 해결할 다른 방법이 없었다는 뜻이다.

정확하게 말해서, 포로 시기 이전에도 율법은 있었다.

- 그러나 굳이 권위가 부여될 필요가 없었다.

- 그런데 왕과 성전이 사라진 후, 왕과 성전 대신 율법이 이스라엘 신앙과 정체성의 권위를 이어받은 것이다.

 

그렇다면 율법이 담긴 책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하겠나?

- 책이 어떤 메시지를 전해야 하겠나?

- 당연히 ‘사회 통합’이다.

- 사회 전체가 책이 제시하는 기준을 받아들여서, 일관된 기준으로 통합되어야 한다.

- 그래서 내부 갈등을 해결해야 한다.

그런데 이를 다르게 말하면, 책이 제시하는 기준 이외의 다른 기준을 배제하는 것이다.

- 책의 기준만 옳고 나머지는 전부 틀렸다는 것이다.

- 그래야만 서로 다른 기준 때문에 생기는 갈등을 없앨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책 이외의 다른 기준을 배제하기 위해서 명분이 필요했는데,

- 그것이 바로 ‘책은 하나님의 말씀이다.’라는 주장이다.

- 따라서 책의 기준을 따르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고,

- 책의 기준을 거부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이라고 설득했다.

물론 이 명분을 통해 어떻게 사회가 통합되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 그러나 분명한 것은 효과가 있었다는 것이다.

- 이스라엘은 다시 신앙과 정체성을 회복했다.

- 그래서 결국 포로에서 해방되어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올 수 있었고,

- 다시 성전을 지었으며,

- 미약하게나마 이전 이스라엘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었다.

- 게다가 그렇게 회복된 신앙과 정체성이 2000년이 지나서, 지구 반대편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까지 이어져 왔다.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이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회복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모른다.

- 하나님이 전적으로 의도하신 것인지,

- 이스라엘 사람 성향이 워낙 강직하기 때문인지,

- 이도 저도 아니면 단순한 우연인지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우연을 하나님의 의도이며 사랑이라고 믿는 것이다.

- 믿기 충분한 근거가 있기 때문이 아니다.

- 오히려 어느 날 눈을 떠보니 이것을 믿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 것뿐이다.

- 다르게 말하면, 이것을 믿겠다고 스스로 선택한 것이다.

이것이 신앙의 실체이다.

 

이러한 역사신학의 관점에서 이번 본문을 다시 보자.

본문이 전하는 메시지는 너무 단순하다.

- ‘하나님의 말씀만이 참 예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것은 거짓 예언이다.’가 전부이다.

- 정말 중요한 메시지이지만, 너무 당연한 메시지이다.

- 그래서 이 말을 굳이 왜 해야 하는지 이해되지 않는다.

이것이 본문을 이해하는데 어려운 점이다.

 

그런데 이 메시지가 기록된 상황에서 이 메시지를 다시 들어보자.

- 포로 시기이다.

- 왕과 성전은 없고, 신앙과 정체성을 규정할 권위도 없다.

- 그러다 보니 서로 자기 기준이 맞는다고 싸우며, 사회는 분열했다.

- 지역마다 영향력 있는 인물이 있었고, 인물마다 자기만의 독특한 신앙을 주장했다.

- 모두 자기만 옳다고 주장했다.

- 그로 인해 지역 간에 갈등이 생겼고, 분열은 점차 심해졌다.

-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통일된 신앙과 정체성이 필요했다.

- 그래서 만든 것이 ‘책’이다.

- 사회 통합을 위해 신앙과 정체성을 규정할 책을 만들었다.

- 그리고 그 책은 ‘하나님의 말씀만이 참 예언이다.’라고 말한다.

왜 그렇게 말하냐?

- 책에 ‘하나님 말씀’이라는 신적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서이다.

- 동시에 책 외에 다른 모든 주장을 ‘거짓 예언’이라며 억누르기 위해서이다.

- 그래서 책의 권위를 중심으로 사회를 통합하고,

- 동시에 지역의 영향력 있는 인물의 권위를 억누르기 위해서이다.

-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만이 참 예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것은 거짓 예언이다.’가 말하고자 하는 바이다.

 

그러니까 본문이 말하는 ‘하나님 말씀’은 바로 ‘책’이다.

- 바로 우리가 읽고 있는 성경 말이다.

지금이야 성경이 하나님 말씀이라는 것이 당연한 말이지만,

- 당시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 일단 하나님 말씀이 책이라는 형태를 갖는다는 것 자체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 이스라엘 역사에서 이전까지 하나님 말씀이 책으로 전달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권위는 오직 왕과 성전에 있었고,

- 그랬기 때문에 다른 것은 필요 없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권위가 책에 부여된 것은 엄청난 혁신이다.

- 이전에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방법이고,

- 동시에 왕과 성전이 사라진 현실을 해결할 기발한 발상이다.

 

그랬기 때문에 처음에는 누구도 책을 하나님 말씀이라고 받아들이지 못했다.

- 특히 그 책이 배척하는 주장을 하는 사람은 더욱 그랬다.

그래서 본문은 이렇게 말한다.

- ‘꿈’과 ‘맛사(부담이 되는 주님의 말씀)’로 ‘책’의 기준에서 벗어나는 주장을 하는 사람은 심판받을 것이라고 말이다.

[렘 23:32] 허황된 꿈들을 예언이라고 떠들어대는 자들은 내가 대적하겠다. …

[렘 23:38~39] 내가 사람을 보내서 ‘부담이 되는 주님의 말씀’이라는 말을 쓰지 말라고 했는데도 내 명령을 어기고 ‘부담이 되는 주님의 말씀’이라는 말을 써서 말한다면,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반드시 (39) 내가 그들을 뽑아서, 멀리 던져 버리겠다 하더라고 전하여라. …

이를 통해 ‘책’이 제시하는 기준을 중심으로 사회 분열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다.

- 그것을 위해 ‘책’과 다른 주장을 하는 지역의 영향력 있는 인물을 억누르려는 것이다.

 

이를 한마디로 하면, ‘중앙집권화’이다.

- 물론 독립된 국가가 아니기 때문에 이 표현이 적절하지 않을 수 있다.

- 하지만 포로 상태에 있는 이스라엘을 중앙에서 제시한 일관된 기준으로 통합한다는 측면에서,

- 동시에 지역에서 활동하는 인물의 영향력을 억누른다는 측면에서,

- 본문이 제시하는 메시지는 ‘중앙집권화’이다.

 

여기까지가 포로 시기 시점에서 한 해석이다.

 

예레미야 시대에서 새롭게 본 본문 해석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 책을 통해 중앙에서 제시한 이스라엘 신앙과 정체성이 어떻게 하나님의 권위를 갖게 되었을까?

- 어떻게 지방의 영향력 있는 인물이 자신을 부정하는 그 책을 하나님 말씀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을까?

- 책에 하나님의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 어떤 내용을 담아야 책에 권위가 생길까?

 

일단 논리적으로,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게, 잘 써야 한다.

- 책 자체에 설득력이 있어야 한다.

- 성경은 이런 책이다.

- 당시에 가장 똑똑한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고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 고민해서 쓴 글이다.

- 게다가 그렇게 기록된 많은 글 중에 2500년 동안 후대 사람들의 비평과 검증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몇 안 되는 글 중의 하나가 성경이다.

우리가 언뜻 보기에 성경이 ‘글’이라는 관점에서 시시해 보이지만,

- 그것은 우리에게 글을 보는 안목이 없기 때문이지, 성경이 정말 시시하기 때문이 아니다.

- 이렇게 말하는 것은 나에게 안목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2500년 동안 살아남은 성경의 생존력 때문이다.

- 2500년 동안 수많은 똑똑한 사람들이 성경을 부정하려고 노력했지만, 전부 실패한 역사에 근거한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설득력만으로는 부족하다.

- 아무리 설득력이 있어도, 그 책이 하나님 말씀이라는 권위를 갖기는 어렵다.

- 뭔가가 더 필요하다.

그렇다면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무엇을 했냐?

- 백지에서 전부 기록한 것이 아니라,

- 포로 시기 사람들이 하나님 말씀이라고 인정한 기록을 토대로 책을 만들었다.

- 그러면 사람들이 책을 하나님 말씀이라고 믿기 쉬워지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기록이 바로 ‘예레미야의 예언’이다.

- 여기서 말하는 ’예레미야의 예언‘은 우리가 보고 있는 예레미야서가 아니다.

- 예레미야서를 기록하는데 토대가 된 원자료이다.

포로 시기에 대부분은 예레미야를 알았고, 그가 했던 예언을 기억했다.

- 포로 시기 이전 예레미야가 예언했던 당시에 예레미야의 예언을 들은 사람은 소수였다.

- 게다가 그의 말을 듣고 수긍하는 사람은 더욱더 소수였다.

- 당시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고하는 예레미야를 믿고 따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 그랬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예레미야를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멸망했고,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다.

- 예레미야의 예언은 성취되었다.

- 예레미야가 옳았다.

그제야 예레미야의 예언이 하나님 말씀이라는 권위가 생겼다.

- 그제야 사람들이 예레미야의 예언을 다시 회상했다.

- 그래서 예레미야의 예언을 전부 모아 기록하였고,

- 그 기록을 하나님 말씀이라고 믿었다.

- 왜냐하면 역사를 통해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 이 과정은 특정한 소수가 주도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일어난 일이다.

이렇게 예레미야의 예언은 하나님 말씀이라는 권위를 가진 채 포로 시기 사람들의 마음 속에 담겨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예레미야의 예언을 토대로 새로운 ‘책’을 만들었다.

- 그러면서 이 ‘책’이 이스라엘의 신앙과 정체성을 규정하는 새로운 권위라고 주장했다.

- 그러니 어찌 믿지 않을 수 있겠는가.

- 예레미야의 권위가 입혀진 책이기에, 사람들은 ‘책’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을 수 있었다.

그렇게 기록된 것이 바로 우리가 읽는 예레미야서이다.

- 포로 시기 사람들은 예레미야서를 읽으면서, 예레미야서에서 제시한 기준만이 하나님 말씀이라고 믿었고,

- 그 믿음으로 이스라엘 사회는 통합되어 갔다.

 

그렇다면 예레미야의 예언은 어떤 메시지였을까?

예레미야의 예언도 중앙집권화를 통한 사회 통합을 전했을까?

- 그렇지 않다는 것이 성경의 묘미이다.

예레미야의 예언은 완전히 반대 메시지를 전했다.

- 그것은 중앙에 집중된 권력을 해체하는 것이다.

 

본문은 예레미야와 거짓 예언자를 대비한다.

- 그런데 포로 시기 관점에서 거짓 예언자는 누구였을까?

- 중앙의 일관된 기준을 거부하고 자기 기준을 주장하는 지역 인물이었다.

따라서 예레미야는 중앙의 일관된 기준을 상징하고,

- 거짓 예언자는 지역 인물을 상징한다.

 

그러나 시점을 예레미야가 예언하는 때로 옮겨보자.

- 이때 거짓 예언자는 누구인가?

- 그들은 집권자가 권력 강화를 정당화하기 위해 국가에 소속된 예언자였다.

- 그래서 그들은 언제나 ‘만사가 형통할 것이다.’라고 예언했다.

- 그렇게 하나님조차 집권자를 옹호하신다고 예언해야 권력을 강화할 수 있고, 

- 집권자에 대한 불만을 억누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그 예언을 거짓 예언이라고 하여, 집권자의 권력을 비판한 것이다.

- 하나님은 집권자를 부정하시기에, 집권자는 지금과 같은 통치를 지속하면 안 되고,

- 지역의 인물이 들고일어나 불만을 표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예레미야는 지역 인물을 대표하고,

- 거짓 예언자는 중앙 집권자를 대표한다.

 

이것이 바로 성경의 묘미이다.

- 원래 예레미야의 예언은 ‘중앙 권력 해체’를 전했다.

- 그런데 포로 시기에 그 예언을 토대로 ‘중앙집권화’를 전한다.

예언은 하나이다.

- 메시지는 ‘하나님 말씀을 따르지 않는 예언은 거짓 예언이며, 하나님 말씀만이 참 예언이다.’이다.

- 그런데 그 하나의 예언이 완전히 반대되는 두 가지 메시지를 전한다.

- 하나님 말씀으로 중앙 권력을 해체하기도 하고,

- 똑같은 하나님 말씀으로 중앙에 권력을 집중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는 권력을 집중시켜야 할까, 해체해야 할까?

- 하나님은 권력을 집중시키실까, 해체하실까?

- 교회와 사회는 권력이 집중되어야 할까, 해체되어야 할까?

여느 때와 다름없이 말하면, 둘 다 틀렸다. 혹은 둘 다 맞다.

- 정확하게 말하면, 집중해야 할 때가 있고, 해체해야 할 때가 있다.

-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은 권력이 집중되는지 해체되는지 관심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디에 관심이 있나?

- 오직 ‘사랑’이다.

- 먼저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서로 사랑하는 것,

- 그리고 그 사랑으로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는 것,

- 그래서 세상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 게다가 세상 안에서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만이 하나님의 유일한 관심이다.

 

그런데 서로 사랑하기 위해 권력이 필요하다면, 하나님은 권력을 집중시키신다.

- 포로 시기에 권력이 해체되어, 옳고 그름을 판단할 일관된 기준이 없었다.

- 그래서 사랑하고자 해도, 서로 다른 기준 때문에 사랑할 수 없었다.

-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 말씀을 통해 권력을 집중시키고 사회를 통합한다.

- 그래서 원활하게 서로 사랑할 수 있도록 하신다.

하나님이 권력을 집중시키시는 또 다른 예로, 베드로를 중심으로 한 초대 교회가 있다.

- 복음이 처음으로 선포되고 영향력을 넓혀가기 위해서 응축된 힘이 필요했다.

- 그것을 위해 베드로에게 권력을 집중시켰다.

- 그 힘으로 교회 안에서 서로 더욱 사랑하도록 했고, 교회 밖으로 사랑을 전했다.

- 대표적인 예가, 헬라파 과부가 음식 받는 일에 소외되었을 때, 교회는 집중된 권력을 행사하여 누구도 소외당하는 일이 없도록 했다.

 

하지만 집중된 권력 때문에 사랑이 방해될 때, 하나님은 권력을 해체하신다.

- 예레미야 시대에 권력이 집중되어, 집권자가 권력 유지에만 집착했다.

- 그 결과 백성들은 착취당했다.

- 백성을 사랑하는 것이 집권층의 책임인데, 집중된 권력으로 백성을 이용하기만 했다.

- 그래서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권력을 해체했다.

- 그래서 백성들이 집권자의 착취에서 벗어나, 서로 사랑할 수 있도록 하셨다.

하나님이 권력을 해체하는 또 다른 예로, 예루살렘 교회에 일어난 큰 박해가 있다.

- 제사장을 중심으로 예루살렘 교회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는데,

- 스데반이 노골적으로 제사장 집단을 비판한다.

- 그러자 제사장 집단은 스데반을 죽인 후, 본격적으로 예루살렘 교회를 박해하기 시작한다.

[행 8:1] 사울은 스데반이 죽임 당한 것을 마땅하게 여겼다. 그 날에 예루살렘 교회에 큰 박해가 일어났다. 그래서 사도들 이외에는 모두 유대 지방과 사마리아 지방으로 흩어졌다.

그런데 박해로 인해 무슨 일이 일어났냐면, 예루살렘 교회에 집중된 권력이 해체되었다.

- 박해 이전에 교회는 유대인 중심이었다.

- 여전히 복음이 인류 전체를 위한 것이라는 인식이 없었다.

- 복음 전도 대상은 유대인에게 한정되었다.

하지만 박해로 인해 그리스도인이 예루살렘을 떠나 이방 지역을 떠돌아다녔고,

- 그로 인해 이방인에게까지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

[행 8:4] 그런데 흩어진 사람들은 두루 돌아다니면서 말씀을 전하였다.

그렇게 권력이 해체되자, 그 즉시 복음은 이방인에게 퍼졌다.

- 처음으로 집사 빌립은 사마리아에서 복음을 전한다.

- 여기서 사마리아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중간 단계이다.

[행 8:5] 빌립은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선포하였다.

- 다음으로 집사 빌립은 에티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을 전한다.

- 이 사람이 성경에서 복음을 듣고 침례를 받은 최초의 이방인이다.

[행 8:27] 빌립은 일어나서 가다가, 마침 에티오피아 사람 하나를 만났다. 그는 에티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고관으로, 그 여왕의 모든 재정을 관리하는 내시였다. 그는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이렇게 하나님은 권력을 해체하여, 

- 예루살렘 교회에서 유대인 사이에만 머물던 사랑을 사마리아를 지나 이방인에게까지 확장하신다.

 

결론 -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거부 반응

정리하면, 하나님은 권력을 집중시키기도, 해체하기도 하신다.

- 서로 사랑할 수 있도록 권력을 이용하신다.

- 사랑이라는 본질을 위해 하나님은 모든 것을 수단 삼으신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을 싫어한다는 것이다.

- 왜냐하면 우리는 사랑보다 권력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 오히려 나에게 권력을 집중시키기 위해 혹은 남의 권력을 해체하기 위해 사랑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 권력을 위해 사랑을 포기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 남에게 있는 돈, 명예, 인기, 성과를 해체해 나에게 집중될 수 있도록 혼신을 다하기 때문이다.

- 그래서 그 과정에 사랑을 잃어버렸는지조차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권력을 ‘자기 마음대로’ 줬다가 뺐었다 하신다.

- 하나님은 ‘폭력적으로’ 권력을 주무르신다.

- 나에게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안중에도 없으시다.

- 이스라엘을 마음대로 멸망시키기도 하시고, 또 마음대로 회복시키기도 하신다.

이런 하나님을 우리가 어찌 수용할 수 있겠는가.

- 당연히 싫어할 수밖에 없지.

 

우리가 이런 하나님을 싫어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 하나님이 싫기 때문이 아니다.

- 사실상 우리는 하나님께 별 관심이 없다.

- 그래서 싫어하기조차 하지 않는다.

우리가 싫어하는 것은 권력을 빼앗기는 것이다.

- 돈, 명예, 인기, 성과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 권력을 위해 인생 전부를 내걸었는데,

- 하나님이 ‘폭력적으로’ ‘자기 마음대로’ 권력을 줬다가 뺐었다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스라엘의 멸망을 보며 함께 슬퍼하고,

- 이스라엘의 회복을 보며 함께 기뻐한다.

- 우리와 이스라엘을 동일시한다.

- 왜냐하면 권력을 빼앗기는 것이 싫고, 권력을 얻는 것이 좋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스라엘과 함께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하나님께 함께 삿대질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더 외롭고 애처롭다.

- 누구도 하나님과 함께하지 않기 때문이다.

- 누구도 하나님의 마음을 몰라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 사랑이냐, 권력이냐?

- 권력 역시 사랑받기 위해 원하는 것 아닌가.

- 인생이라는 것이 ‘사랑받기 위한 권력’을 얻기 위해, 사랑을 포기하고 있는 것 아닌가.

- 이런 어리석음 때문에 언제나 공허함을 느끼는 것 아닌가.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주시려는 것이다.

- 그래서 하나님은 필요에 따라 우리에게 권력을 집중시키기도, 해체하기도 하시는 것이다.

- 그래서 우리를 어떻게든 사랑으로 채워주시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하나님을 폭력적이라며 비난하고 있다.

 

이런 상태에 있는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두 가지이다.

- 첫째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뿐이고, 사랑 외에는 아무것도 필요 없다.

- 둘째로, 하나님만이 사랑을 주실 수 있고, 하나님 외에는 어디서도 사랑을 얻을 수 없다.

이 두 가지를 알 때, 인생 전부를 걸고 하나님께 헌신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떠한가?

- 사랑이 간절히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 하지만 사랑 말고도 돈, 명예, 안정, 인정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 또한, 하나님이 사랑을 주실 수 있다고 생각한다.

- 하지만 하나님 외에도 돈, 명예, 안정, 인정이 있으면 사랑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신앙 생활 한다.

- 하나님이 간절히 필요한 사랑을 주실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께 헌신하지 않는다.

- 하나님 없어도 사랑을 얻을 수 있으며,

- 굳이 사랑 없어도 돈, 명예, 안정, 인정 있으면 부족하게나마 만족하며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는 결국 하나님을 믿는 척하는 것일 뿐 믿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바르게 믿을 수 있을까?

- 어떻게 해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뿐이고, 하나님만 사랑을 주실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까?

결국 살아봐야 한다.

- 사랑에 취해도 보고, 사랑에 목말라도 봐야 한다.

- 하나님께 사랑을 받아보기도 하고, 하나님께 사랑받지 못해 방황도 해보아야 한다.

이것을 위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권력 집중과 권력 해체를 반복해서 주실 것이다.

- 그런 과정을 통해 하나님 사랑만이 유일한 내 생명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 그러면 자연스럽게 하나님께 헌신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좋은 것은 권력 집중과 해체를 더 이상 경험하지 않고 믿는 것이다.

- 예수님도 그렇게 말씀하셨다.

[요 20:29] 예수께서 도마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필요한지 더 경험해봐야 아는가?

- 이미 충분히 경험하지 않았는가?

- 우리가 사랑에 얼마나 굶주려 한다는 것을, 

- 사랑 말고는 어떤 것으로도 우리를 채울 수 없다는 것을,

- 돈, 명예, 인정, 안정도 결국 사랑받기 위한 것이었다는 것을,

- 그 사랑을 세상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었다는 것을,

- 하지만 하나님은 주실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더 비참해지기 전에, 세상 욕심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