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양교회 팟캐스트 양따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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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양을 따르는 어린양
예배 대신 예수님, 설교 대신 성경, 건물 대신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미양교회가 만드는 방송입니다.토끼와 개구리가 진솔하게 신앙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어린양과 같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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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멸망은 양면성이 있다.
- 만약 이스라엘의 멸망이 이스라엘의 죄 때문이고,
- 하나님이 죄악된 이스라엘을 심판하신 것이라고 한다면,
- 이스라엘의 멸망은 하나님의 권위를 강화한다.
- 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증명한다.
하지만 반대로 이스라엘의 멸망은 하나님의 권위를 실추시킨다.
-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선택한 민족으로서, 하나님의 존재를 드러내는 통로이다.
- 그런데 이스라엘이 멸망했다는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는 것이고,
- 이는 하나님의 무능력을 증명한다.
- 마치 자녀가 잘못하면 그 책임이 부모에 있는 것과 같다.
그래서 우리도 이스라엘의 멸망을 보면서 두 가지 마음을 동시에 갖는다.
- 이스라엘의 죄를 엄격하게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보며,
- 우리에게 죄를 짓는 악인들을 하나님은 엄격하게 심판하실 것이고,
- 악인들로부터 우리를 철저하게 보호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갖는다.
- 그래서 죄를 심판하시고 정의를 지키시는 하나님을 통해 안정감을 얻는다.
하지만 동시에 불안감을 느낀다.
- 하나님이 명시적으로 선택하셔서 보호하고 돌보신 이스라엘조차 죄로부터 보호받지 못했고,
- 그래서 죄에 빠져 심판을 받아 멸망했다면,
- 나도 그렇게 될 수 있는 것 아닐까?
- 과연 하나님은 내가 죄에 빠지지 않도록 보호할 능력이 있으실까?
- 나도 죄를 지어 멸망당하면 어떡하지?
- 하나님이 이스라엘도 지키지 못하셨다면, 나도 지키지 못하시는 것 아닐까?
- 그러면 결국 나도 이스라엘처럼 죄를 지어 심판받아 멸망하는 것 아닐까 하는 불안감을 갖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불안감은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 멸망 후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민족도 똑같은 고민을 했다.
- 우리는 도대체 왜 멸망한 것일까?
- 우리에게 잘한 것이 없다는 것은 알겠지만, 하나님이 지키는 이스라엘이 어떻게 멸망할 수 있지?
- 혹시 하나님이 바벨론의 신보다 약한 것은 아니었을까?
- 바벨론의 신보다 하나님의 능력이 부족해서 멸망한 것은 아니었을까?
- 만약 정말 그렇다면, 이제 무능력하고 나약한 하나님을 어떻게 믿어야 하지?
이것이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민족의 가장 큰 고민이었다.
- 마음 같아서는 무능력한 하나님을 포기해버리고 새로운 바벨론의 신을 의지하고 싶었다.
- 그러나 하나님을 포기하자니, 하나님은 이스라엘 정체성의 토대이기에 포기할 수도 없었다.
-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포기하면, 자신의 정체성이 전부 와해되기 때문이다.
- 그래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불안감 속에서 나날을 보냈다.
그런 불안감을 잘 보여주는 성경이 에스겔서이다.
제사장이었던 에스겔은 성전에서 봉사했었다.
- 그에게 성전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었고, 너무 거룩해서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곳이었다.
- 특히 지성소는 대제사장만이 정해진 절차를 따라 들어갈 수 있고,
- 절차를 따르지 않고 들어가면 즉시 죽는 곳이었다.
그런데 그 거룩한 성전이 이방인에 의해 처참히 박살 났다.
- 이는 제사장 입장에서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이었다.
- 이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때 에스겔은 의문을 품었다.
- 어떻게 성전이 파괴될 수 있지?
- 어떻게 성전을 범하고도 이방인들은 멀쩡할 수가 있지?
- 도대체 하나님은 뭐 하고 계셨을까?
- 혹시 바벨론의 신이 너무 강해서 하나님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
- 그랬기 때문에 성전을 범하고도 멀쩡했던 것일까?
- 과연 하나님이 이토록 무능력하다는 말인가?
이것이 에스겔이 내릴 수 있는 유일한 결론이었다.
에스겔은 그런 의문을 품고 바벨론의 그발 강 가에서 허망하게 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겔 1:1] 때는 제 삼십년 넷째 달 오일이었다. 그 때에 내가 포로로 잡혀 온 사람들과 함께 그발 강 가에 있었다. 나는 하나님이 하늘을 열어 보여 주신 환상을 보았다.
- 그때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성전 파괴 이유를 알려주셨다.
- 이유는 이스라엘의 죄 때문에 성전이 너무 타락해서, 하나님이 성전에 더 이상 머무르실 수 없었다고 하신다.
- 그래서 하나님은 이미 성전을 떠나셨다는 것이다.
[겔 8:6] 그가 또 나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아, 이스라엘 족속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보이느냐? 그들은 여기서 가장 역겨운 일을 하여, 나의 성소에서 나를 멀리 떠나가게 하고 있다. 그러나 너는 더 역겨운 일들을 보게 될 것이다.”
[겔 10:18] 주님의 영광이 성전 문지방을 떠나, 그룹들 위로 가서 머물렀다.
이것이 성전이 파괴될 수 있는 결정적인 이유이다.
- 하나님이 성전에 계시지 않기 때문이다.
- 하나님이 성전을 떠나셨기 때문이다.
- 이스라엘의 죄 때문에 말이다.
- 그랬기 때문에 이방인들이 성전에 마구 들어와도 아무 문제도 없었다.
하나님이 바벨론 신에게 졌기 때문이 아니라,
- 하나님이 무능력하기 때문이 아니라,
- 바벨론 신과 상관없이, 이스라엘의 죄 때문에 하나님이 이미 성전을 떠나셨기 때문이다.
그것 때문에 에스겔서는 하나님을 특별하게 표현한다.
- 하나님을 얼굴도 넷, 날개도 넷, 바퀴도 넷인 이상한 괴물처럼 묘사한다.
[겔 1:4~6] 그 때에 내가 바라보니, 북쪽에서 폭풍이 불어오는데, 큰 구름이 밀려오고, 불빛이 계속 번쩍이며, 그 구름 둘레에는 광채가 나고, 그 광채 한가운데서는 불 속에서 빛나는 금붙이의 광채와 같은 것이 반짝였다. (5) 그러더니 그 광채 한가운데서 네 생물의 형상이 나타나는데, 그들의 모습은 사람의 형상과 같았다. (6) 얼굴이 각각 넷이요, 날개도 각각 넷이었다.
[겔 1:15] 그 때에 내가 그 생물들을 바라보니, 그 생물들의 곁 땅 위에는 바퀴가 하나 있는데, 그 바퀴는 네 얼굴을 따라 하나씩 있었다.
이렇게 하나님을 표현한 이유는 ‘이동성’ 때문이다.
- 하나님께는 사방으로 얼굴, 날개, 바퀴가 있어서, 굳이 방향을 바꾸지 않고도 어디든 자유롭게 가실 수 있는 분이다.
- 이는 곧 하나님이 성전에 매여계신 분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한다.
-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어디든 계실 수 있는 분이다.
이것을 표현하기 위해 이상한 괴물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이다.
[겔 1:12] 그들은 영이 가고자 하는 곳으로 갈 때에는, 각각 앞으로 곧게 나아갔다. 그들은 몸을 돌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겔 1:14] 그 생물들은 이쪽 저쪽으로 번개처럼 빠르게 달렸다.
[겔 1:17] 그 바퀴들은 사방 어디로 가든지, 방향을 돌이키지 않고서도 앞으로 나아갔다.
따라서 ‘이동성’이 중요한 이유는 성전 파괴의 정당성을 증명하기 위해서이다.
- 성전이 파괴되었다고 하나님이 무능력한 것이 아니라,
- ‘이동성’을 가지신 하나님은 성전에 매여계신 분이 아니기에,
- 타락한 성전을 이미 떠나셨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없이 껍데기만 남은 성전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본문도 같은 메시지를 전한다.
이스라엘이 멸망했다고 하나님까지 무능력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다.
- 오직 이스라엘의 죄 때문이라는 것이다.
- 그것을 1~11절까지 장황하고 세밀하게 설명한다.
- 특히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은 이스라엘의 죄를 여섯 번이나 반복해서 말한다.
[렘 25:3~4] “아몬의 아들 요시야가 유다 왕이 되어, 십삼 년이 되던 해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십삼 년 동안, 주님께서 나에게 계속하여 말씀하셨고, 나는 그것을 여러분에게 열심히 전하였으나, 여러분은 그 말을 전혀 듣지 않았습니다. (4) 주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주님의 종 예언자들을 보내시되 꾸준히 보내셨으나, 여러분은 예언자의 말도 듣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들은 들으려 하지도 않았고,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습니다.
[렘 25:7] 그런데도 너희는 나 주의 말을 듣지 않았고, 오히려 손으로 만든 우상을 섬겨서, 나 주를 격노케 하였으며, 너희는 재앙을 당하고 말았다’ 하셨습니다.
[렘 25:8] 그래도 듣지 않으니, 이제 만군의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을 강조하는 이유는 하나이다.
- 이스라엘 멸망 원인이 하나님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 이스라엘 멸망 원인은 하나님의 무능력함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죄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강조하는 이유는,
- 멸망 원인을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 이스라엘로 돌려서,
- 단지 누명을 벗으려는 것이 아니다.
- 하나님이 무능력하다는 생각에 혼란스럽고 무기력해 있는 이스라엘을 회복하기 위해서이다.
이 논리가 재밌는데,
- 이스라엘 입장에서 멸망 원인이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다고 보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
- 그렇게 하나님 탓을 해야, 멸망에 대한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 죄책감에서 벗어나야, 떳떳하고 당당하게 하나님을 원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멸망이 하나님 탓이 되면, 하나님이 무능력한 존재가 되고,
- 그렇게 되면 도움이 절박하게 필요한 시점에서 하나님이 아무런 도움을 주실 수 없게 되어,
- 이스라엘은 절망과 낙담에 빠질 수밖에 없다.
포로에서 회복될 가능성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 혼자 힘으로 바벨론과 싸워서 독립을 쟁취할 가능성도 없고,
- 하나님이 무능력하기에, 바벨론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해주실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멸망 원인이 하나님께 있다고 보는 것은 결국 이스라엘을 절망하게 한다.
반면 이스라엘 입장에서 멸망 원인이 자기 죄 때문이라고 보는 것은 이스라엘을 더욱 괴롭게 할 것 같다.
- 어느 누가 멸망 원인이 자기 죄 때문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싶겠는가.
- 어느 누가 죄책감을 좋아하겠는가.
- 그런 점에서 자기 죄를 인정하는 것보다 하나님 탓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하지만 멸망 원인이 자기 죄 때문이라는 것을 인정하면,
-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손상되지 않는다.
- 그렇기 때문에 죄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멸망에서 회복될 것이라는 소망을 가질 수 있고,
- 그 소망을 전능하신 하나님이 이뤄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 절망하지 않고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멸망 원인이 이스라엘의 죄 때문이라는 것을 강조하신 이유이다.
이것을 들은 이스라엘 민족은 이전보다 한결 마음이 회복되었을 것이다.
- 이스라엘의 멸망이 하나님의 무능력함 때문이라고 생각했을 때는 회복 가능성이 전무했다.
- 문제 원인을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문제도 해결할 수 없었다.
-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은 낙담했고 절망했다.
그런데 문제 원인이 자신의 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 물론 정죄당하는 것이 좋을 리 없다.
- 이스라엘도 자신의 멸망이 자신의 죄 때문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 어쩌면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멸망 원인을 하나님께 돌렸을 수도 있다.
하지만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문제 해결 가능성이 열린다.
- 죄 때문에 멸망했다는 것을 바꿔 말하면, 죄에서 벗어나면 회복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 멸망 원인이 하나님의 무능력함일 때는 회복 가능성이 전무했지만,
- 멸망 원인이 이스라엘의 죄라면, 회복 가능성이 생긴다.
그랬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은 소망을 갖게 되었다.
- 죄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회복될 수 있다는 기대를 갖게 되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소망을 꺾는 현실 문제가 있었다.
그것이 바로 바벨론이다.
- 이스라엘이 회복되려면 결국 바벨론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하는데,
- 이스라엘이 바벨론을 전쟁에서 이기고 자유를 쟁취할 수 있는 가능성은 전무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통제 영역이 이스라엘에서 세계 열방, 특히 바벨론까지 확장되어야 했다.
- 하나님이 바벨론조차 통제하고 있다는 믿음 속에서만 이스라엘이 회복될 것이라는 믿음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벨론의 멸망을 예고하시는 것이다.
[렘 25:12~14] 이렇게 칠십 년이란 기한이 다 차면, 내가 바빌로니아 왕과 그 민족과 바빌로니아 땅의 죄를 벌하며, 그 곳을 영원한 황무지로 만들어 버리겠다. 나 주의 말이다. (13) 내가 그 땅을 치겠다고 한 나의 모든 약속을 실천할 터이니, 이는 뭇 민족이 받게 될 벌을 예레미야가 예언한 대로, 이 책에 모두 기록된 대로 성취하는 것이다. (14) 참으로 이번에는 바빌로니아 사람들이 많은 강대국들과 대왕들을 섬길 것이다. 이와 같이 나는 바빌로니아 사람들이 직접 행하고 저지른 일을 그대로 갚아 주겠다.’ 이렇게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 이는 바벨론을 위해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 낙담하고 있는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 죄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회복될 것이라는 소망을 주시기 위한 말씀이다.
- 바벨론이라는 현실 문제는 이스라엘이 회복되는 데 아무런 장애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 하나님은 이스라엘 회복을 위해 영원불변할 것같이 굳건하게 서 있는 바벨론을 멸망시킬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벨론 멸망은 상징하는 바가 크다.
- 이스라엘의 죄가 이스라엘의 회복을 방해하는 ‘내부 문제’ 전체를 상징한다면,
- 바벨론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방해하는 ‘외부 문제’ 전체를 상징한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시는 바를 한마디로 줄이면,
- “이스라엘아, 너는 아무것도 신경 쓸 거 없어. 내가 다 해결해줄게.
- 너는 너만 신경 써.” 이다.
물론 ‘너만 신경 써’라는 말은 많은 것을 함축한다.
-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죄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 그런데 이는 단순히 우상숭배 안 하고, 율법 지키고, 성전 제사 잘 드리는 것이 아니다.
- 핵심은 사랑이다.
- 사랑할 때만 내가 나 자신으로 회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 사랑하지 않을 때 나 자신으로부터 떠나서 타락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너만 신경 써’라는 말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만 신경 쓰라는 것이다.
- 그것만이 자신을 회복시켜주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게 사랑만 하면, 현실 문제는 어떻게 하냐는 의문이 생긴다.
- 사랑이 밥 먹여주냐?
- 그렇게 사랑하려고 해도 결국 돈이 필요한 것 아니냐?
- 돈이 없으면 일단 배가 고파서 고통스러우니, 나를 사랑하기 위해서라도 돈이 필요한 것 아니냐?
-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려 해도,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려면 돈이 필요한 것 아니냐?
- 하나님을 사랑하는데도 헌금도 해야 하고, 봉사하려면 돈이 드는데 말이다.
그러니 사랑도 중요하지만, 사랑을 어느 정도 희생해서라도 돈을 벌어야 하는 것 아니냐?
- 그래야 사랑이 조금 줄어들긴 해도, 사랑이 효과를 발휘할 수 있지 않겠냐는 것이다.
- 사랑에 올인해서, 돈 없이 말로만, 마음으로만 하는 사랑은 효과가 없지 않겠냐는 것이다.
이스라엘도 같은 의문을 가졌다.
- 과연 하나님 말씀 잘 듣고 우상숭배 하지 않는다고 바벨론 포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 오히려 바벨론 집권층에 로비도 하고, 비밀 군대도 양성하는 것이 더 효과적인 방법 아닐까?
- 그런 과정에서 어느 정도 우상숭배가 필요한데, 그런 것은 하나님이 이해해주시지 않을까?
그런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단호하게 ‘No’라고 하신다.
- 하나님은 한결같이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말고, 너만 신경 써.’라고 하신다.
- 외부 문제는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할 테니까, 내부 문제만 집중하라고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말씀하신다.
- 사랑에 돈이 필요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어.
- 돈이 필요할 때도 있고, 마음과 말만으로도 충분한 사랑이 전해질 수도 있어.
- 그런데 꼭 알아야 할 것은, 그건 네가 신경 쓸 것이 아니야.
- 내가 알아서 할 거야.
- 돈을 주든 말든 상황에 맞게 필요한 외부 상황을 내가 만들어 줄 거야.
- 너희는 외부 문제 신경 쓸 필요 없어.
- 너는 너만 신경 써.
-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사랑하려고 노력하고,
- 사랑을 방해하는 너희 자신의 문제만 고민해.
- 돈이 있으면, 있는 돈 가지고 사랑하고,
- 돈이 없으면, 돈 없이 사랑해.
- 돈이 있어야 사랑할 수 있을 때는 돈을 줄 거고,
- 돈 없이도 사랑할 수 있을 때는 돈 안 줄 거야.
- 다시 말해서, 돈이 있다는 것은 돈으로 사랑하라는 뜻이고,
- 돈 없다는 것은 돈 없어도 사랑할 수 있다는 뜻이야.
- 그냥 너는 사랑하기만 하면 돼.
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냐?
-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로, 정말로 하나님은 외부 문제를 전부 해결하실 능력이 있으시기 때문이다.
- 대표적인 예가 예수님의 죽음이다.
- 예수님은 인류 전체의 구원자로 이 땅에 내려오셨지만,
- 인류 전체 구원 문제를 고민하지 않으셨다.
- 시간과 공간에 제한된 자신이 어떻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온 인류를 구원할지 고민하지 않으셨다.
- 왜냐하면 그것은 외부 문제이기 때문이다.
-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영역이지, 예수님이 고민할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오직 자신 앞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에만 집중하셨다.
- 그런 점에서 예수님은 ‘근시안적’이다.
- 멀리까지 내다보지 않고, 지금 당장 내 앞에 있는 상황에 집중하셨다.
- 눈 앞에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사랑할지 고민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예수님의 사역은 제한된 시간과 공간 안에서 끝날 수밖에 없다.
-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사셨고, 정말 내일 없는 죽음을 맞이하셨다.
- 눈 앞에 있는 사람 사랑하는 것에 집중하다가, 오해만 일으키셨고,
- 그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다.
- 그래서 몇 명 있는 제자들도 전부 잃고, 아무런 영향력도 없이 무의미하게 죽으셨다.
이것이 ‘근시안적 사랑’의 처참한 결과이다.
- 외부 문제는 완전히 배제한 채 내부 문제만 집중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결국 어떻게 되었느냐?
- 처참한 ‘근시안적 사랑’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온 인류를 위한 ‘영원한 사랑’이 되었다.
- 예수님은 내부 문제만 집중했는데,
- 결과적으로 외부 문제까지 해결되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부활시키셔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존재로 바꾸셨다.
- 부활이라는 이해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는 방법으로 외부 문제를 해결하셨다.
때로 우리는 예수님의 ‘근시안적’ 태도가 답답하다.
- 예수님은 왜 이렇게 어리석게, 근시안적으로, 허망하게 죽으셨을까?
- 좀 더 지혜롭게, 장기적인 안목으로 행동하셨으면 좋지 않았을까?
- 그러면 죽지 않고도 더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실 수 있지 않았을까?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 담대하게 말씀하시되, 조금만 조절하셔서 죽지 않을 정도로만 말씀하셨다면,
- 그래서 오래오래 살아서 더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셨다면,
- 더 많은 사람이 복음을 듣고 구원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랬다면 예수님의 복음이 온 인류에게 전해질 수는 없었을 것이다.
- 예수님이 근시안적으로 사랑하시다가 죽으셨기 때문에,
- 구원이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초월하여 온 인류에게 전해질 수 있었다.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이고,
- 이것이 하나님이 능력을 발휘하시는 방법이다.
- 죽음의 문제조차 해결하신다.
둘째로, 외부 문제가 해결될 것이란 믿음 속에서만 우리는 내부 문제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다른 말로, 외부 문제를 고민하면, 결코 내부 문제를 고민할 수 없다.
- 또 다른 말로, 이스라엘이 바벨론을 두려워하면, 결코 자신, 이웃,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
- 쉬운 예를 들어, 만약 1억 빚을 당장 갚아야 한다면, 직원을 닦달할 수밖에 없다.
- 직원의 입장을 공감하고 배려하여 사랑할 수 없다.
우리는 1억 빚(외부 문제)이 있어도 직원을 사랑(내부 문제)할 수 있다고 착각한다.
- 자기는 그 정도 아량을 가진 사람이라고 착각한다.
- 하지만 결코 아니다. 착각하지 말자.
즉, 사랑의 관계를 맺는 일은 너무 어려운 것이어서, 아무리 작은 문제만 있어도 언제나 사랑은 뒷전으로 밀린다.
- 다르게 말하면, 모든 외부 문제에서 벗어난 사람만 자신, 이웃,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
- 더 정확하게 말하면, 어떤 외부 문제보다 사랑을 우선시하겠다는 결단이 없으면, 결코 사랑을 할 수 없다.
- 또 다르게 말하면, 외부 문제를 고민하는 사람은 이웃과 하나님은 말할 것도 없고,
- 자신조차 사랑하지 못하고 내팽개쳐버린다.
그래서 이스라엘도 이 지경이 된 것이다.
-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 아니다.
- 사랑하고 싶었지만, 사랑을 방해하는 외부 상황이 생겼기 때문이다.
- 외세가 침략해오고, 누군가가 권력을 빼앗으려 하고, 자연재해와 흉년으로 인한 기근이 생겼다.
-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강대국을 의지해야 했고,
- 강대국을 의지하기 위해서는 조공하기 위한 돈과 강대국의 우상 숭배가 필요했다.
-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착취와 우상 숭배가 일어났다.
- 하나님 사랑을 하찮게 여겨서가 아니라, 외부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급박한 상황 때문이다.
- 그래서 하나님 사랑을 잠시 뒤로 밀어둔다는 것이 순식간에 500년이 흘러버렸고,
- 멸망까지 이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외부 문제를 해결하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필요하다.
그 믿음을 주시기 위한 것이 바로 본문이다.
하나님은 바벨론을 멸망시키실 것이다.
- 그래서 외부 문제를 해결하실 것이다.
- 그러니 우리 자신만 신경 쓰라는 것이다.
- 자신, 사랑하는 이웃, 하나님 사랑하는 것만 집중하라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 그래서 사랑하는 것에 집중하지 않으면,
- 그래서 외부 문제 해결에 매몰되면,
- 돈과 우상 숭배에 빠질 수밖에 없고,
- 더 심각하게는, 사랑하는 이웃과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는 것뿐만 아니라,
- 자신조차 사랑하지 못하고 혐오하여,
- 자기 정체성을 상실한 채 멸망할 것이기 때문이다.
- 이스라엘이 자기 정체성을 상실한 채 멸망한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상 숭배를 하지 않으면, 재앙을 내리지 않겠다고 호소하신 것이다.
[렘 25:6] 또 너희는 다른 신들을 쫓아다니며 섬기거나 경배하지도 말고, 손으로 만든 우상을 섬겨서 나의 분노를 격발시키지도 말아라. 그러면, 나도 너희에게 재앙을 내리지 않겠다고 하였다.
- 우상 숭배가 대단한 죄이기 때문이 아니라,
- 우상 숭배 하는 마음 속에는 필연적으로 자신조차 사랑하지 못하고 혐오하고 부정하는 마음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자기조차 자신을 부정하는데,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결론 - 나는 왜 사랑하지 못하는가?
사랑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사랑할 수 없는 존재인가?
- 원래 그렇게 태어났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렇지 않다.
-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 즉 사랑할 수밖에 없는 존재로 태어났다.
그런데 왜 사랑하지 못하고 사는가?
- 우리 안에 바벨론에 대한 두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 과연 하나님이 바벨론을 이길 수 있을까? 라는 의심이 있기 때문이다.
- 하나님이 외부 문제를 전부 해결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 그러니 외부 문제 해결을 위해 고민하게 되고,
- 사랑을 조금 희생해서라도 돈을 벌어야 외부 문제가 해결될 것이고,
- 그래야 사랑도 사랑답게 할 수 있다는 착각 때문이다.
그 착각으로 사랑을 정말로 조금만 희생했다면,
- 그래서 상당한 정도로 사랑을 할 수 있었다면, 문제가 안 될 수 있다.
- 그러나 사랑을 조금만 희생하겠다는 생각이 결국 사랑을 완전히 포기해버리게 만든다.
- 마음은 그렇지 않더라고, 돈이 우리 몸 전체를 잠식해버린다.
그래서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존재라고 규정하게 된다.
그런 마음과 몸의 괴리 때문에 이런 하소연을 하는 것이다.
- 사랑하려는 마음은 있는데, 왜 사랑이 안되는지 모르겠다.
- 사랑하고 싶은데 왜 안 되지?
- 나는 원래 사랑할 수 없는 존재인가 봐.
- 아니면 사랑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데 안 도와주시는 것 보면,
- 하나님이 무능력한가 봐.
이 착각이 우리를 더욱 무기력하게 만든다.
그래서 본문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네가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너의 죄 때문이야.
- 하나님이 무능력해서가 아니야.
- 하나님은 돈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하실 수 있는 분인데,
- 네가 믿지 않기 때문이야.
- 그래서 너의 몸이 돈에 잠식당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니 믿음을 가져야 해.
-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야.
- 돈 문제, 외부 문제를 전부 해결하실 수 있어.
- 그 고민에서 해방시켜주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야.
사람은 외부 문제에서 해방될 때만, 내부 문제를 고민할 수 있어.
- 하나님이 돈 문제를 해결하실 것이라는 믿음 속에서만 너는 사랑할 수 있어.
네가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전부 돈 때문이다.
- 하나님이 무능력해서가 아니고.
- 너희가 원래 사랑할 수 없는 존재라서가 아니고.
하나님은 바벨론을 멸망하듯, 너희의 돈 문제도 해결하실 거야.
- 그러니 그딴 문제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마. 하나님이 다 해결하실 거야.
넌 너만 신경 써.
- 가장 먼저 자신을 사랑해.
- 사랑받기 위해 아무것도 증명하지 마.
- 있는 그대로 자기를 사랑해.
- 넌 사랑받기 충분한 존재이고, 반드시 사랑받아야만 하는 존재야.
- 네가 가치 있는 존재라고 힘겹게 증명하지 않아도, 너는 누구보다 가치 있고 사랑스러운 존재야.
- 그것을 믿어야 하고, 믿음대로 자신을 사랑해야 해.
그럴 때만 자기 파괴의 멸망에서 벗어날 수 있어.
- 이스라엘처럼 멸망하지 않을 수 있어.
- 자기를 사랑하지 않고,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 애쓰는 사람은 100% 멸망할 거야.
- 평생 노력해서 성공한 이건희가 죽음 직전까지 사랑받으려고 발버둥 쳤자나.
- 성공한다고, 주변 모든 사람이 자기 가치를 인정한다고 해도,
- 외부 문제가 전부 해결된다고 해도,
- 자기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은 사람은 결국 이건희처럼 비극적으로 죽어.
- 그게 참 멸망이다.
너희가 외부 문제 해결에 몰입하는 이유는
- 문제를 해결해야 자기 가치를 증명할 수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야.
- 또한 자기 가치를 증명하려는 이유는 자신이 자기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 자기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야.
- 또한 자기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누구도 사랑할 수 없는 거야.
- 너희가 원래 사랑할 수 없는 존재라서가 아니고.
그렇기 때문에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회복의 시작이야.
- 그러면 자기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발버둥 칠 필요가 없어.
- 그러면 외부 문제 해결에 몰입하지 않아.
- 그제야 사랑하는 이웃과 하나님이 보여.
- 그리고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몸까지 전해져서, 실제로 사랑을 하게 돼.
물론 사랑만 하다가 돈이 없어지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될 거야.
- 마치 이스라엘이 강대국 의지하지 않아서 멸망하면 어떻게 하나 걱정했던 것처럼.
그런데 이스라엘은 오히려 그 걱정 때문에 멸망했어.
- 멸망하지 않으려고 강대국 의지했다가, 강대국 때문에 멸망했어.
마찬가지로 우리도 돈 걱정 때문에 멸망할 거야.
- 멸망하지 않으려고 돈 걱정 했다가, 돈 걱정 때문에 멸망할 거야.
그러니 돈 걱정 하지 말자.
- 하나님이 책임져주신다는 믿음 갖자.
이 믿음 있을 때만 사랑할 수 있어.
- 자기 자신도, 사랑하는 가족과 이웃도, 하나님도 사랑할 수 있어.
돈 걱정이 우리의 사랑을 막는 주범이라는 것 기억해. 라고 말이다.
본문은 이스라엘의 멸망이 이스라엘의 죄 때문이라고 정죄한다.
- 왜냐?
- 모든 문제 원인을 이스라엘에게 떠넘겨, 하나님은 면피하려고?
아니다.
- 이전에 말했듯, 멸망은 자기 죄(내부 문제) 때문이고,
- 바벨론(외부 문제)은 하나님이 처리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주기 위해서이다.
- 그래서 낙심해있는 이스라엘에게 소망을 주기 위해서이다.
그런 점에서 본문은 우리를 정죄한다.
-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는 전부 우리 자신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 하나님께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못 박는다.
왜냐?
- 모든 책임을 우리에게 떠넘기려고?
아니다.
- 우리에게 소망 주시려는 것이다.
우리가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 하나님 탓이 되면,
- 당장은 자신에게 잘못이 없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해진다.
- 하지만 하나님께 문제가 있다는 생각은 하나님을 무능력한 존재로 만들고,
- 그 생각은 사랑하지 못하는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전혀 없기에, 무기력에 빠지도록 한다.
- 나는 어쩔 수 없이 사랑하지 못하는 존재인가 봐.
- 그냥 이렇게 사랑하지 못하며 살아야 하나 봐. 라며 낙담하게 한다.
그러나 본문은 문제 원인이 우리라고 정죄한다.
- 하나님은 여전히 전능하시다고 주장한다.
- 우리만 바꾸면 사랑할 수 있다고 말한다.
처음에 이 정죄를 들으면 불편하다.
- 잘못 없다고 항변하고 싶다.
그러나 이 정죄만이 우리에게 소망을 준다.
-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지켜준다.
- 내가 돈 문제, 외부 문제 떨쳐버리고, 자기를 사랑하기만 하면,
-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소망을 준다.
그러니 본문의 정죄에 귀를 열고 소망을 듣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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