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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서

예레미야(52) 26:1-24 이스라엘에 대해 틀린 예상을 하신 하나님 - 예언의 참뜻

<미양교회 팟캐스트 양따양>

미양교회에서 했던 설교를 바탕으로 진솔하게 신앙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팟캐스트도 많이 들어주세요.

https://www.podbbang.com/channels/1790233/

 

어린양을 따르는 어린양

예배 대신 예수님, 설교 대신 성경, 건물 대신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미양교회가 만드는 방송입니다.토끼와 개구리가 진솔하게 신앙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어린양과 같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

www.podbbang.com

 

 

예언에 대한 오해가 있다.

- 예언을 단순히 ‘미래 예측’으로 생각한다.

- 그래서 하나님이 예언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 그 일을 일으키실 강력한 의지가 있다는 뜻이고,

- 따라서 하나님이 예언하시면, 그 일은 반드시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예언은 전혀 쓸모없다.

- 하나님이 예언자의 죽음을 감수하며 어렵게 전한 예언이 아무런 가치가 없어진다.

- 왜냐하면 만약 예언이 예언 그대로 성취된다면,

- 그래서 예언이 거두어질 가능성이 전무하다면,

- 그래서 예언을 들은 사람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예언 성취에 영향을 줄 수 없다면,

- 그래서 예언 내용을 아는 것과 알지 못하는 것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면,

- 예언자가 죽음을 감수하고 예언하는 행위는 무의미한 자살 행위일 뿐이다.

- 예언에 아무런 효과가 없기 때문이다.

- 마치 시속 100km로 자동차가 질주하는 차도를 무작정 뛰어드는 어리석은 행위이다.

그런데 차도를 뛰어드는 행위가 가치 있을 때가 있다.

- 바로 튕겨 나간 공을 잡겠다고 자녀가 차도로 뛰어갈 때이다.

- 어느 부모라도 자녀를 잡기 위해 죽음을 감수하고 차도로 뛰어들 것이다.

- 이 행위는 어리석지만, 가치 있다.

물론 차도로 뛰어드는 부모의 행위는 자녀와 함께 부모까지 봉변당할 수 있다.

- 그래서 그 행위는 무가치해질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는 차도로 뛴다.

- 1%의 가능성이라도 잡기 위해서이다.

- 자녀를 살릴 수 있는 가능성이 1%라도 있으면, 

- 100번 중의 99번은 죽더라도 1번이라도 살릴 가능성이 있으면,

- 부모는 무조건 도전한다.

- 자녀를 위해 부모가 무모한 도전을 하는 것에 의문을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것이 사랑이다.

 

그런 점에서 예언자가 죽음을 감수하고 예언하는 행위는 무의미할 가능성이 높다.

- 마치 1%의 가능성 때문에 죽음을 감수하고 차도로 뛰어드는 부모처럼 말이다.

- 이스라엘은 공을 잡겠다는 하찮은 ‘욕망’ 때문에 죽을 위기에 처해있다.

- 그런데 예언자는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듯 이스라엘을 사랑하기에, 

- 죄악으로 죽을 위기에 있는 이스라엘을 가만히 볼 수 없었다.

- 예언자는 자신이 죽더라도 이스라엘을 살리기 위해 무엇이든 한다.

- 이스라엘을 살릴 가능성이 아무리 작더라도, 그래서 아무리 무모해 보이더라도, 

- 단 1%의 가능성만 있어도 무작정 달려 나간다.

이것이 바로 예언의 참뜻이다.

-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이다.

- 죽음을 감수하는 무모한 사랑이다.

 

따라서 예언은 단순한 ‘미래 예측’이 아니다.

- 절박한 구애이다.

- 자동차가 질주하는 차도 한복판에 서 있는 자녀를 향해 소리 지르는 부모의 절규이다.

- 제발 돌아오라는 울부짖음이다.

- 99%의 확률로 죽을 수 있지만, 1%의 가능성을 믿고 자녀를 구하기 위해 차도로 뛰어드는 부모의 애절함이다.

그래서 이미 99번이나 예언자는 죽었다.

- 예레미야 이전에 많은 예언자가 이미 살해당했다.

- 예언자와 함께 하나님도 죽임당하셨다.

- 그래서 또 죽임당하실 것을 아시지만, 하나님은 그래도 또 다시 차도로 뛰어드신다.

- 이스라엘을 구하기 위해서 말이다.

- 이스라엘을 하찮은 욕망에서 건져내기 위해서 말이다.

- 하찮은 욕망 때문에 생명을 잃을 위기에 있는 이스라엘을 살리기 위해서 말이다.

이 과정에서 운 좋게 살아남은 사람이 예레미야이고,

- 이전에 예언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죽임당한 사람이 우리야이다.

- 물론 예레미야가 이번에 죽음을 피했다고 완전히 죽음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다.

- 예레미야는 죽음을 감수한 예언을 반복하고, 계속해서 죽을 위기에 처한다.

 

왜 예언자들이 죽는가?

- 이스라엘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사랑하면 반드시 죽어야 하는가?

- 그렇지 않다.

- 그러나 죽을 위기에 있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는 죽음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 그래서 사랑하면 죽는 것이다.

- 마치 차도에 뛰어든 자녀를 살리려면, 함께 차도로 달려가 죽음을 감수해야 하는 것처럼.

- 마치 물에 빠진 자녀를 구하려면, 함께 물에 뛰어들어 죽음을 감수해야 하는 것처럼.

- 지금 당장은 자녀가 안전하기 때문에, 사랑하지만 죽음을 감수할 필요가 없다.

- 그러나 만약 자녀가 위험한 곳에 있다면, 누구든 위험을 감수하고 그곳으로 간다.

- 이 때문에 사랑하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을 감수하지 않으면 진정한 사랑이 불가능한 것이다.

- 동시에 진정으로 사랑하면, 죽을 위기에 처할 수밖에 없고,

- 죽을 위기가 반복되면, 결국 실제로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야도 죽은 것이고, 예레미야도 반복해서 죽을 위기에 처하는 것이다.

- 억울하게 죽은 우리야를 보며 우리는 가슴 아파한다.

- 혹은 자신도 신앙 때문에 억울하게 죽을까 봐 두려워한다.

- 그런 점이 우리가 신앙에 헌신하는 것을 방해한다.

하지만 사랑의 관점에서 우리야의 죽음은 지극히 당연하다.

- 차도 한복판에 있는 아이를 구하려는 부모가 죽는 것이 당연하듯,

- 급류에 휩쓸린 아이를 구하려는 부모가 죽는 것이 당연하듯,

- 멸망 직전에 있는 이스라엘을 구하려는 예언자가 죽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예수님도 죽으신 것이다.

- 이스라엘이 죽을 위기에 있었고, 예수님은 그들을 너무 사랑하셨다.

- 사랑은 죽음 외의 다른 선택을 생각하지 못하게 한다.

- 그들을 구하기 위해 위기 상황 속으로 들어가신 것이다.

- 그래서 표면적으로 결국 아무도 구하지 못하고 비참한 죽음만 당하셨다.

- 마치 계곡에 빠진 자녀를 구하기 위해 뛰어든 부모가 자녀와 함께 죽은 수많은 신문 기사처럼.

- 사랑 때문에 일어난 자연스러운 죽음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신문 기사의 부모와 달랐다.

- 죽음까지 감수할 만큼 사랑이 얼마나 절박했는지 드러낸 것까지는 똑같다.

- 그런 점에서 부모와 예수님의 사랑은 똑같다.

- 그러나 예수님은 죽은 이후 부활하셨고, 성령을 보내셔서 결국 이스라엘을 살리셨다.

 

이스라엘은 하찮은 욕망에 빠져 자신까지 부정하고 죽을 이스라엘을 위기에 있었다.

- 그런데 예수님은 죽음과 부활을 통해 죽음에서 이스라엘을 건지셨다.

- 그래서 이스라엘이 정체성을 찾아 하나님의 백성답게, 이스라엘답게, 사람답게, 자기답게 살 수 있도록 하셨다.

- 그래서 예수님처럼 진정한 사랑으로 자기 자신을, 이웃을,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하셨다.

특히 예수님처럼 죽음을 감수한 사랑을 하도록 하셨다.

- 진정한 사람에 감격하여,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도록 하셨다.

- 사랑의 기쁨이 넘쳐흘러, 모든 것을 넉넉히 이기도록 하셨다.

그래서 우리도 사랑을 위해 죽도록 하신다.

-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그러셨던 것처럼.

- 스데반이 그랬던 것처럼.

- 베드로와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 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그랬던 것처럼.

- 우리도 무모하게, 비참하게, 처량하게, 아무런 명예도 없이 치욕스럽게 죽게 하신다.

이유는 단 하나, 사랑하기 때문이다.

- 이것이 어떤 것보다 강력한 사랑의 능력이다.

 

지금의 관점에서 이러한 미래를 생각하면 끔찍하다.

- 나는 목사라서, 담력이 커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다.

- 당장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면 누구보다 빨리 도망갈 것이다.

- 죽음이 아니라, 작은 상처, 작은 손해만 생겨도, 상대에게 욕을 퍼부을 것이다.

- 상대가 하나님이어도 전혀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예수님처럼 비참한 죽음을 소망하는 이유가 있다.

- 내가 분명하게 믿는 것은, 육체적, 정신적, 사회적 고통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사랑의 기쁨에 도취하도록 만드는 사랑의 능력이다.

- 그래서 가장 비참하게 죽을 때만 느낄 수 있는 사랑의 기쁨이다.

- 그 기쁨이 죽음을 소망하게 한다.

 

물론 지금은 사랑의 기쁨이 무언인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 그러나 이렇게 유추해서 간접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 육체적, 정신적, 사회적 죽음의 고통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부정적 경험 중에 가장 극단에 있다.

- 상상만 해도 몸서리칠 만큼 싫다.

- 그런데 진정한 사랑의 기쁨은 그 고통의 크기를 능가한다.

그랬기에 예수님도, 스데반도, 베드로도, 바울도 기쁘게 죽을 수 있었다.

- 이들이 그만큼 용감하고 고통을 잘 참기 때문이 아니다.

- 사랑의 기쁨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 그 사랑이 용감하게 보이도록 만들었고, 고통을 하찮게 만든 것이다.

- 그들이 대단하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하면 누구나 그렇게 된다는 뜻이다.

 

그 사랑의 능력을 믿기 때문에, 예수님처럼 치욕스러운 죽음을 소망하는 것이다.

- 나를 비롯해서 미양 교회 전부가 치욕스럽게 죽기를,

- 동시에 치욕스러운 죽음이 하찮게 여겨질 정도로 사랑의 기쁨에 도취되길 소망한다.

 

본문 해석

본문에서 예레미야와 우리야도 치욕스러운 죽음의 위협을 당한다.

- 제사장, 예언자, 모든 백성은 예레미야의 예언을 듣고 살해 계획을 짠다.

[렘 26:8] 이와 같이 예레미야가 주님의 명대로, 모든 백성에게 주님의 모든 말씀을 선포하니, 제사장들과 예언자들과 모든 백성이 그를 붙잡고 소리를 질렀다. “너는 반드시 죽고 말 것이다.

[렘 26:11] 제사장들과 예언자들이 그 고관들과 온 백성에게 말하였다. “이 사람은 사형 선고를 받아야 마땅합니다. 여러분이 직접 귀로 들으신 바와 같이, 그는 이 도성이 멸망한다고 예언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와 같은 예언을 한 우리야는 죽고, 예레미야는 간신히 산다.

[렘 26:23] 그들이 이집트에서 우리야를 붙잡아 여호야김 왕에게 데려오자, 왕은 그를 칼로 죽이고, 그 시체를 평민의 공동 묘지에 던졌다.

[렘 26:24] 그러나 예레미야는 사반의 아들 아히감이 보호하여 주었으므로, 그를 죽이려는 백성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 당시 예레미야를 죽이려는 시도가 계속되었는데,

- 고관(통치자)의 무죄 판정 때문에 합법적으로 죽일 수 있는 길이 막혔다.

- 그러자 제사장과 예언자는 우리야가 당한 것처럼 불법적으로 예레미야를 죽이려 했다.

우리야 죽음 사건은 우리야 개인을 부각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 같은 예언을 했던 우리야가 죽을 만큼 예레미야의 상황이 심각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 우리야를 죽이기 위해 이집트까지 따라올 만큼 예레미야에 대한 살해 의지가 강했다.

- 그만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했고,

- 예레미야는 그런 이스라엘을 사랑했기에, 죽음을 감수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야는 예레미야가 처한 위험한 상황을 보여주는 도구이다.

 

여기서 우리야의 죽음은 치욕스럽고 무모하다.

- 첫째로, 우리야는 죽음을 감수하고 이스라엘을 돌이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완전히 실패했다.

- 그래서 무모했다.

- 둘째로, 결과는 얻지 못했더라도 우리야의 순수한 마음이라도 알아줬으면 좋았을 텐데, 그것도 실패했다.

- 아무도 우리야가 가진 사랑의 마음을 알지 못했다.

- 셋째로, 게다가 우리야가 단순히 잊혀졌다면 무모하기만 했을 텐데, 이스라엘은 우리야를 매국노라고 죽은 후에도 조롱했다.

- 나라의 멸망을 도모했다가 정의롭게 죽임당한 범죄자로 몰락했다.

- 그의 죽음은 합당한 심판으로 여겨졌기에, 더욱 더 치욕스러운 죽음이었다.

왜 우리야는 치욕스러운 죽임을 당해야 했을까?

- 왜 성경은 치욕스러운 죽음을 담았을까?

- 왜 하나님은 사랑하는 예언자를 치욕스럽게 죽도록 놔두셨을까?

 

사랑의 본질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 예레미야와 우리야가 가진 사랑의 순수성을 부각하기 위해서이다.

- 예레미야와 우리야는 보상을 바라기는커녕, 손해와 조롱을 감수하고 사랑했다.

- 사랑에 대한 어떤 기대도 없었다.

- 단지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했다.

그러면 그동안 하나님은 뭐하셨냐?

- 아무것도 안 하고 사랑하는 예언자가 죽는 것을 보고만 계셨을까?

- 하나님 자신이 죽지 않은 것에 안도하셨을까?

- 불똥이 자신에게 튈까 봐 두려워하셨을까?

- 토사구팽하듯, 쓸모없어진 예언자를 버리신 것일까?

어쩌면 이 사건 하나만으로는 하나님의 마음을 정확하게 알기 어렵다.

- 사랑하는 예언자가 하나님 자신이 시킨 말을 하다가 죽는 모습을 보고 어떠셨을까?

- 과연 책임감을 느끼셨을까?

 

하나님의 진짜 마음은 예수님을 통해 완전히 드러난다.

-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정말 사랑하셨다.

- 그래서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예언자 대신에 세상 안으로 직접 오셨다.

- 이는 마치 우리 집을 보호하기 위해 파출소 경찰이 아니라 경찰청장이 온 것과 같다.

- 이스라엘은 셀 수 없이 하나님의 손길을 뿌리쳤지만, 

- 하나님은 포기하지도, 지치지도 않고, 또 다시 이스라엘에게 오셨다.

게다가 하나님은 예언자들도 사랑하셨다.

- 그동안 있었던 예언자들의 희생을 마음 아파하셨다.

- 더 이상의 무고한 피해자를 만들고 싶지 않으셨다.

- 그들도 하나님의 소중한 자녀니까.

- 그래서 이번에는 자신이 직접 오셨다.

-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고, 그 피해를 하나님 자신이 직접 감당하셨다.

이것이 바로 ‘악한 포도원 농부 비유’이다.(눅 20:9~16)

- 포도원 농부가 포도원 주인이 보낸 종을 연속해서 거부했다.

- 그래서 주인은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지만, 농부는 그마저 죽인다.

- 여기서 왜 주인은 처음부터 직접 가지 않고, 종과 아들을 보냈을까?

- 종을 보낸 것은 주인이 직접 간 것과 전혀 다르지 않다.

- 게다가 아들을 보낸 것은 주인이 직접 간 것과 완전히 똑같다.

- 주인 입장에서 종과 아들이 하찮기 때문에 보낸 것이 아니다.

- 특별히 신뢰하고 소중한 이들이기 때문에 보낸 것이다.

따라서 농부가 종과 아들을 죽인 것은 주인을 죽인 것과 똑같다.

- 그렇기 때문에 결국 마지막에 주인이 농부를 죽인 것이다.

[눅 20:16] 주인은 와서 그들을 죽이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줄 것이다. …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다.

-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셔서 특별히 사랑하는 예언자를 보내신다.

- 하지만 이스라엘은 예언자를 거부하고 죽이기까지 한다.

- 이는 곧 하나님을 거부한 것과 같기 때문에 하나님은 마음 깊이 아파하신다.

- 게다가 사랑하는 예언자가 죽었기에 더욱 슬퍼하신다.

- 그러나 어리석게도, 무모하게도, 처량하게도 이스라엘의 죄를 용서하신다.

- 그리고 또 다시 사랑하는 예언자를 보내신다.

- 하지만 이스라엘은 또 거부하고, 이러기를 반복한다.

하나님은 왜 예언자를 계속 보내실까?

- 왜 무고한 예언자를 계속 죽게 놔두실까?

- 하나님은 예언자를 기계 부품과 같이 생각하셔서, 예언자의 죽음 따위는 안중에도 없으신 것일까?

- 하나님은 예언자를 사랑하지 않은 것일까?

아니다. 사랑하신다. 끔찍하게 말이다.

- 그러나 예언자를 사랑한 만큼 이스라엘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 자신이 보낸 예언자를 죽여서 자신까지 거부한 이스라엘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 그들을 어떻게든 구원하기 위해서이다.

- 결국 자기 아들의 죽음을 감수할 만큼 절박하게 말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애절한 사랑이다.

 

그렇다면 죽을 위협을 당하게 한 예레미야의 말은 무엇인가?

성전과 도성의 멸망이다.

[렘 26:4~6] 너는 나 주가 한 말을 그들에게 이렇게 일러주어라. ‘너희가, 내가 너희에게 준 법에 따라서 순종하여 살지 않으면, (5) 내가 거듭하여 보내고 너희에게 서둘러서 보낸 내 종 예언자들의 말을 너희가 듣지 않으면, (6) 내가 이 성전을 실로처럼 만들어 버리고, 이 도성을 세상 만민의 저줏거리가 되게 하겠다.

[렘 26:9] 어찌하여 네가 주님의 이름을 빌려, 이 성전이 실로처럼 되고, 이 도성이 멸망하여 여기에 아무도 살 수 없게 된다고 예언하느냐?” 그러면서 온 백성이, 주님의 성전 안에 있는 예레미야를 치려고, 그 주위로 몰려들었다.

[렘 26:11] 제사장들과 예언자들이 그 고관들과 온 백성에게 말하였다. “이 사람은 사형 선고를 받아야 마땅합니다. 여러분이 직접 귀로 들으신 바와 같이, 그는 이 도성이 멸망한다고 예언을 하였습니다.

- 사실상 성전과 도성은 하나이다.

- 성전은 예루살렘 도성을 이스라엘의 중심지로 만드는 핵심이다.

- 따라서 성전과 도성의 파괴는 단순히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의 멸망을 넘어선다.

- 만약 도성만 파괴되었다면, 다시 전쟁을 준비하여 도성을 수복하면 된다.

- 그러나 성전까지 파괴되었다는 것은 단순히 국가 영토를 잃은 것을 넘어,

- 국가의 정체성, 국가의 정신적 기반, 국가의 존립까지 박탈된 것이다.

- 즉, 회복 불가능을 상징한다.

이런 말을 했으니, 사형 선고는 합당하다.

[렘 26:11] 제사장들과 예언자들이 그 고관들과 온 백성에게 말하였다. “이 사람은 사형 선고를 받아야 마땅합니다.

- 국가와 민족을 향한 최악의 모독이다.

그러니 어찌 살아남을 수 있었겠는가.

- 우리야의 죽음은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다.

- 오히려 예레미야가 살아남은 것이 더 이상하다.

 

그렇다면 예레미야는 왜 칠푼이처럼 맞아 죽기 딱 좋은 말을 했을까?

- 자신이 한 말 때문에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했을까, 모르고 했을까?

- 이전에 말했다시피, 예레미야는 단순히 하나님 말씀을 받아서 말하는 앵무새가 아니다.

- 오히려 당시 정치, 외교, 사상을 섭렵한 지식인에 가깝다.

- 그런 사람이 어떻게 자신이 하는 말의 진의를 몰랐겠는가.

- 자신의 말 때문에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어찌 몰랐겠는가.

따라서 알고도 한 것이다.

- 목숨을 내걸고 한 것이다.

- 죽음을 감수하고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선포한 것이다.

 

이를 또 이렇게 오해하면 안 된다.

- 예언자니까, 하나님께서 명령하셨으니까, 수동적, 소극적으로, 자기 생각이나 소신과는 무관하게, 하라는 대로 ‘순종’한 것이 아니다.

- 오히려 처음에는 순종하기를 저항했다.

- 자기 생각에, 그렇게 말하면 효과도 없고, 핍박만 당할 것이라며 거부했다.

이는 상상이 아니라, 예레미야서가 이미 밝힌 것이다.

- 예레미야는 회복 예언이 아닌 멸망 예언을 하라는 하나님께 저항하며, 

- 하나님을 ‘힘 잃은 용사’라고 조롱하기까지 한다.

[렘 14:9] 어찌하여, 놀라서 어쩔 줄을 모르는 사람처럼 되시고, 구해 줄 힘을 잃은 용사처럼 되셨습니까?

그러면서 하나님을 ‘믿을 수 없는 분’이라며 부정한다.

[렘 15:18] 어찌하여 저의 고통은 그치지 않습니까? 어찌하여 저의 상처는 낫지 않습니까? 주님께서는, 흐르다가도 마르고 마르다가도 흐르는 여름철의 시냇물처럼,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분이 되셨습니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예레미야가 결코 앵무새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 예레미야는 이해되지 않는 하나님의 뜻을 거부한다.

- 순종이라는 명목으로 자신을 억누르지 않는다.

- 이해될 때까지 하나님께 저항하며 질문한다.

간혹 이해와 합리적 의심을 반신앙적인 것이라고 치부하는 경우가 있는데,

- 그것이 진정한 반신앙이다.

- 전 생애와 목숨까지 걸고 하는 것이 신앙인데,

- 이해와 동의 없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 신앙의 겉모습을 따라 할 수 있지만, 절체절명의 순간에 동의 없는 신앙은 무너져 내린다.

 

결국 예레미야는 긴 반박과 질문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다.

- 왜 회복 예언이 아니라 멸망 예언을 해야 하는지 이해하고 동의한다.

- 그러면서 하나님을 부정했던 자신을 회개한다.

[렘 17:13~14] 주님, 이스라엘의 희망은 주님이십니다. 주님을 버리는 사람마다 수치를 당하고, 주님에게서 떠나간 사람마다 생수의 근원이신 주님을 버리고 떠나간 것이므로, 그들은 땅바닥에 쓴 이름처럼 지워지고 맙니다. (14) 주님, 저를 고쳐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나을 것입니다. 저를 살려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살아날 것입니다. 주님은 제가 찬양할 분이십니다.

그리고 나서야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온전히 동참한다.

- 죽음을 감수하고 순종한다.

 

이것이 참 순종이다.

- 하나님의 뜻이기에 ‘의심 없이, 이해 없이, 동의 없이’ 단순히 앵무새처럼 따라 하는 것이 아니다.

- 간혹 의심 없는, 이해 없는, 동의 없는 신앙을 순수하다고 생각하는데,

- 이는 전형적인 가스라이팅이다.

- 스스로 주체적, 능동적, 합리적 사고를 못 하게 하여, 사람을 조정하려는 목사의 탐욕이다.

- 이러한 성직자의 탐욕은 중세 교회를 필두로 인류 역사 내내 항상 있었다.

참 순종은 의심하여 이해한 후 동의한 다음에 행동하는 것이다.

- 단순히 시켜서 수동적, 소극적으로 심부름하듯 하는 것이 아니다.

- 주체적, 능동적, 자발적으로, 독립된 인격으로서 하는 것이다.

- 하나님의 마음이 온전히 공감된 후에, 하나님과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하는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예레미야는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 더 정확히 말해서,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 물론 죽음이 두려웠다.

- 예레미야는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는 이유로 억울하게 고통당하는 자신의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렘 15:10] 아! 어머니 원통합니다. 왜 나를 낳으셨습니까? 온 세상이 다 나에게 시비를 걸어오고, 싸움을 걸어옵니다. 나는 아무에게도 빚을 진 일도 없고, 빚을 준 일도 없는데, 모든 사람이 다 나를 저주합니다.

하지만 죽음의 두려움보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향한 사랑이 더 컸다.

- 그래서 죽음을 감수하고 하나님께 순종했다.

- 동시에 죽음을 감수하고 멸망 위기에 빠진 이스라엘을 구하기 위해 헌신했다.

하나님이 시켜서 억지로 가 아니라,

- 아무런 이유 없이 하나님이 좋아서, 그리고 이스라엘을 사랑해서 말이다.

- 자신에게 돌아올 것은 보상도, 명예도,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조차 들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 결국 치욕스럽게 죽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말이다.

- 마치 부모가 자녀를 구하기 위해 당연히 죽음을 감수하듯,

- 자녀를 위해 죽으면서도 부모는 아무런 보상조차 기대하지 않듯이 말이다.

- 자녀를 위해 죽은 부모에게는 명예라도 주어지지만,

- 이스라엘을 위해 죽은 예레미야에게는 명예는커녕 조롱과 모욕만 남았다.

 

마지막으로 예레미야는 왜 죽음을 감수하며 성전과 도성 파괴를 예고했을까?

이유는 딱 하나이다.

- 이스라엘이 회복될 수 있다는 실낱같은 가능성 때문이다.

- 이스라엘이 악한 길에서 돌아서서, 재앙을 피하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다.

- 마치 급류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자녀를 구하기 위해 무작정 뛰어드는 부모처럼 말이다.

[렘 26:2~3] “나 주가 말한다. 너는 주의 뜰에 서서, 내가 너에게 전하라고 명한 모든 말을, 유다의 모든 성읍에서 주의 성전에 경배하러 오는 사람에게, 한 마디도 빼놓지 말고 일러주어라. (3) 혹시 그들이 그 말을 듣고서, 각자 자신의 악한 길에서 돌아설 수도 있지 않겠느냐? 그러면 내가, 그들의 악한 행실 때문에 그들에게 내리기로 작정한 재앙을, 거둘 것이다.

 

당시 이스라엘은 백척간두에 서 있었다.

- 이스라엘은 앗수르가 멸망하는 사이에 이집트를 의지하여 국력을 강화했다.

- 그러나 국제 정세가 기존 강국 이집트는 추락하고, 신흥 세력 바벨론이 급부상하는 상황이다.

- 그러면 이집트와 바벨론 사이에 패권 다툼이 생길 것이 뻔하고,

- 이스라엘이 외교적으로 어떤 선택을 하냐에 따라 흥망성쇠가 결정되는 위험한 상황이다.

- 나비 효과와 같이 작은 선택 하나가 이스라엘의 미래를 어떻게 뒤흔들 줄 모르는 혼돈의 상황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지배층은 국내 정치만 신경 쓰고 있었다.

- 이집트와 바벨론의 패권 다툼을 면밀히 관찰해도 모자랄 판에,

- 친-이집트파와 친-바벨론파가 집권만을 위해 경거망동하고 있었다.

- 친-이집트파는 대놓고 바벨론을 무시하고, 친-바벨론파는 대놓고 이집트를 무시했다.

- 외교는 무시한 채 오로지 집권만을 위해서 말이다.

- 그래서 이집트와 바벨론 모두에게 적대시될 위기에 빠졌다.

- 둘 모두에게 환심을 사도 모자랄 판국에 말이다.

 

왜 이렇게 되었냐?

- 하찮은 욕망 때문이다.

- 자신이 동네에서 ‘일짱’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 자신들 세력이 집권하여, 정치적, 경제적, 영적 주도권을 잡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욕망 자체도 비난받기 충분하다.

- 그러나 너무 많은 사람이 이 욕망을 타당하다고 생각하기에, 

- 이 욕망을 비판하는 것은 나중으로 미루겠다.

더 큰 문제는 이 욕망 때문에 국내 정치 싸움하느라, 외교 문제를 소홀히 한 것이다.

- 이집트와 바벨론 중 아직 누구도 패권을 장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 이스라엘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은 ‘줄타기’이다.

- 이집트와 바벨론 사이에서 누구의 편도 들지 않으면서도 둘 모두에게 환심을 사는 것이다.

- 이를 ‘전략적 모호성’이라고 말한다.

- 우리나라도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그런 전략을 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친-이집트파는 바벨론을 무시하고, 친-바벨론파는 이집트를 무시했다.

- 단지 집권을 위해서 말이다.

- 그 때문에 엄청나게 외교적인 손실을 보고 있음에도 말이다.

- 그것이 정작 국가를 망하게 하고 있다는 것을 모른 채 말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공 주우러 차도로 뛰어든 아이에 비유한 것이다.

- 공을 줍기 위해 생명을 포기하듯, 이스라엘이 정권을 얻기 위해 국가를 포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 그래서 집권 욕망을 하찮다고 하는 것이다.

- 국가가 멸망하면 집권은 소용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배층의 욕망은 백성과 하나님께도 뻗어갔다.

- 재산을 늘리기 위해 백성을 착취했고,

- 하나님보다 더 큰 물질적 보상을 주는 우상을 섬겼다.

- 그 때문에 이스라엘의 물질적 토대가 되는 백성이 사라져갔고,

- 이스라엘의 정신적 토대가 되는 하나님과 멀어졌다.

그 때문에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자신과도 멀어졌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처한 현실이다.

- 그러니 이스라엘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겠는가.

- 이스라엘의 멸망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예레미야는 회복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았다.

- 이스라엘에게 자신들이 처한 상황의 심각성을 알려주면, 

- 그래서 하찮은 욕망 때문에 얼마나 많은 것을 잃었는지 깨닫게 해주면,

- 그래서 지금 이대로 가면 무조건 멸망이라고 말해주면,

- 돌이킬 수 있지 않을까? 이스라엘의 멸망을 막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소망을 품었다.

그것이 멸망 예언을 한 하나님과 예레미야의 마음이다.

 

물론 알았을 것이다.

- 멸망 예언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 욕망에 매몰되어 있는 이들에게 욕망 성취를 막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지 말이다.

- 예언자를 죽일 수 있다는 것을 이미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방법이 없었다.

- 이미 이전에 다른 방법을 모두 써봤지만, 소용없었다.

- 게다가 이전과 달리 지금은 특별히 위급한 상황이다.

- 실제로 멸망 일보 직전이다.

- 당장 하찮은 욕망을 거두고, 국내 정치 싸움으로 인한 외교적 결례를 멈추어,

- 전략적 모호성을 취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죽음을 감수하고 이렇게 예언을 한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다.

- 마지막까지 이스라엘을 구하고 싶은 마음 말이다.

- 성공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예언자를 보내는 마음 말이다.

- 실낱같은 가능성에 생명 전체를 쏟아붓는 마음 말이다.

- 그래서 무모하고 치욕스럽게 죽는 마음 말이다.

그것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이 보여주신 사랑이다.

 

결론 - 하나님의 예상은 틀렸다. 그러나 사랑하셨다.

하나님은 멸망 예언을 하면 이스라엘이 돌아올 것이라고 기대하셨다.

[렘 26:3] 혹시 그들이 그 말을 듣고서, 각자 자신의 악한 길에서 돌아설 수도 있지 않겠느냐? 그러면 내가, 그들의 악한 행실 때문에 그들에게 내리기로 작정한 재앙을, 거둘 것이다.

-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이제라도 돌아서면, 세상 기적 전부를 동원해서 어떻게든 이스라엘이 멸망하지 않도록 하실 작정이셨다.

- 누구보다 이스라엘 멸망을 슬퍼하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예상은 틀렸다.

- 이스라엘은 돌아서지 않았다.

- 하찮은 욕망에 매몰되어 차도로 돌진했다.

- 이스라엘을 잡으려고 죽음을 감수하며 차도로 함께 뛰어들었지만,

- 이스라엘도 살리지 못하고, 예언자도 잃었다.

이렇게 하나님은 완벽하게 실패하셨다.

 

왜 하나님은 실패하셨을까?

- 하나님이 어리석기 때문일까?

- 방법이 잘못되었기 때문일까?

-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가장 지혜로운 존재이다.

- 아무리 생각해봐도 더 좋은 방법은 없다.

실패 원인은 사랑 때문이다.

-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 그래서 합리적으로 판단하지 못하셨기 때문이다.

- 감정적으로 판단하셨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에게 돌아서라고 이렇게 많이 말했는데도 돌아오지 않았다면, 

- 하나님은 포기하셨어야 했다.

- 그것이 합리적이다.

게다가 이스라엘이 이 정도 위기에 처했다면, 포기하셨어야 했다.

- 잘못했다가는 괜히 휘말릴 수 있기 때문이다.

- 그것이 이성적이다.

1%의 가능성에 생명 전체를 거는 것은 어리석은 판단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포기할 수 없었다.

- 돌아오라고 아무리 많이 말했어도, 또 말할 수밖에 없었고,

- 아무리 심각한 위기에 처했다고 해도, 구하러 뛰어들 수밖에 없었으며,

- 1%가 아니라 0.01%의 가능성만 있다고 해도, 생명 전체를 걸 수밖에 없었다.

이유는 단 하나, 사랑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사랑하신다.

- 무모하고, 무식하고, 비합리적으로, 비이성적으로 말이다.

- 그렇게 이스라엘을 사랑하셨고,

-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신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이다.

- 마치 개미를 살리기 위해 아들을 죽이듯, 사람을 살리기 위해 하나님을 죽였다.

- 무식하고 무모한 선택이다.

- 100% 순수하게 손해만 생기는 선택이다.

하나님이 어리석기 때문이 아니다.

- 사랑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랑으로 우리를 부르신다.

- 이 사랑의 세계 안으로 들어오라고 하신다.

- 사랑의 세계 밖은 죽음의 세계라고 하신다.

- 죽음의 세계 속에서 하찮은 욕망 때문에 목숨 포기하지 말고,

- 하찮은 욕망 포기하고, 참되고 바른 욕망에 따라 목숨 건지라고 하신다.

- 하찮은 욕망 성취하고 목숨 잃으면 뭐 하냐고 하신다.

- 사랑의 세계에서만 참 생명 있다고 하신다.

그래도 하나님의 사랑을 믿지 못하겠는가?

- 걱정하지 말라.

- 우리가 숨이 넘어가 죽기 일보 직전까지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고 우리에게 계속 말씀하실 것이다.

- 사랑한다. 돌아오라. 고 말이다.

- 이스라엘에게 그러셨던 것처럼 말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 그러니 우리도 끝까지 우리를 포기하지 말자.

- 하나님의 사랑을 반드시 깨닫게 될 것이다.

- 그래서 반드시 사랑의 세계에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