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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서

예레미야(54) 28:1-17 예언의 모호성 - 정체성 회복의 참뜻

<미양교회 팟캐스트 양따양>

미양교회에서 했던 설교를 바탕으로 진솔하게 신앙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팟캐스트도 많이 들어주세요.

https://www.podbbang.com/channels/1790233/

 

어린양을 따르는 어린양

예배 대신 예수님, 설교 대신 성경, 건물 대신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미양교회가 만드는 방송입니다.토끼와 개구리가 진솔하게 신앙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어린양과 같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

www.podbbang.com

 

 

신앙 생활에서 자주 하는 오해가 ‘하나님의 말씀’이다.

-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임할 것이며,

-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바른 선택하기 쉬울 것이라는 오해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한다.

- 하나님, A와 B 중에 무엇을 선택해야 합니까?

- 무엇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바른길이며, 무엇이 저에게 좋은 길입니까?

그런 후 내심 초자연적으로 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대한다.

- 기도 중에 환청을 기대하고,

- 꿈에 계시가 나타나길 기대하고,

- 성경이나 설교에서 관련된 말씀이 나오길 기대한다.

 

하지만 결국 실망한다.

- 의심할 여지 없는 확실한 하나님의 말씀은 임하지 않는다.

그러면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자책한다.

- 이렇게 중요한 결정을 하나님 말씀대로 하겠다는데,

- 내가 욕심부리겠다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 뜻대로 하겠다는데,

- 하나님은 어떻게 말씀하지 않으실 수 있냐며 따진다.

- 그런 하나님을 어떻게 믿고 따를 수 있냐고 원망한다.

- 혹은 반대로, 나에게 죄가 많고, 열심이 부족하며, 영적인 귀가 닫혀있다고 자책하면서,

- 죄 없고 영적인 귀가 열려 있는 용하다는 집사님을 찾아가 상담한다.

 

게다가 이러한 태도는 단편적인 선택에 국한되지 않는다.

- 신앙 전반에 영향을 준다.

- 신앙의 본질인 믿음에서도 하나님이 ‘믿음 덩어리’를 내려 주실 것이며,

- 그렇게 믿음 덩어리를 받아 믿게 되면, 믿음이 생겨서 신앙 생활하기 쉬우리라 생각한다.

-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듯, 믿음도 하늘에서 뚝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믿음을 달라고 기도한다.

- 믿음 덩어리를 주시면, 평생 하찮은 욕망을 억누르고 하나님만을 위해 살겠다는 것이다.

- 그러면서 언제나 믿음 덩어리를 기다린다.

- 그러면 언젠가는 목뒤 쪽이 찌릿하면서 성경이 믿어지고, 성경대로 살 것이라고 기대한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고, 실망만 쌓인다.

- 같은 기도를 일주일, 한 달, 일 년 반복하고,

- 매너리즘에 빠져 자포자기하게 된다.

- 그냥 적당히 말씀 기도 하고, 예배 참석하는 것이 신앙생활이겠거니 하며 산다.

- 물론 찝찝한 마음이 있지만, 묻어두고 굳이 들춰보지 않는다.

 

결론부터 말해서, 이것은 신앙생활이 아니다.

-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길, 믿음 덩어리가 떨어지길 기대하며 기도하는 것은 틀린 신앙이다.

- 단호히 말하는데, 하나님 말씀이 임하면 따르겠다는 마음은 하나님을 따르지 않기 위한 핑계이다.

-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임해도 따르지 않는다.

- 처음부터 따를 마음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기도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달라는 기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 ‘따르지 않기 위한 기도’이다.

 

그러나 바른 신앙은 ‘이미’ 주어진 말씀을 따르는 것이다.

- 너무 당연해서 논란의 여지가 없는 말씀부터 따르는 것이다.

- 말씀 기도하는 것부터, 주변에 소중한 사람 사랑하는 것부터, 자신을 사랑하는 것부터 행하는 것이다.

-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다.

즉, 하나님의 말씀은 말씀을 구하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따르는 사람에게 임한다.

 

그렇다고 이렇게 오해하면 안 된다.

- ‘무조건 순종’하라는 것이 아니다.

- 순종만이 정답이라는 하나 마나 한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 단순히 양심의 가책 느끼게 해서 굴복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 이는 기존 교회가 잘 써먹는 가스라이팅이다.

- 교회에서 착취하기 위한 빌드업이다.

말하고자 하는 것은, 자신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인정하자는 것이다.

- 순종하지 못하는 이유가 하나님의 말씀이 없기 때문이며,

- 하나님의 말씀만 임하면 순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 그것은 합리화이며 핑계일 뿐이다.

- 순종하지 못하는 정확한 이유는 순종하기 싫기 때문이다.

- 순종하기 싫은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이 없다는 것으로 포장한다.

이러한 자신의 실체를 정확하게 알자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다.

 

순종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 그렇기 때문에 지금 당장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가 아니다.

- 미래에 주어질 과제이다.

- 순종은 현재의 우리와는 관련이 없다.

그러니 순종할 생각 버리자.

- 현재 우리가 순종하려 하면, 100% 율법주의로 빠진다.

- 자발적으로 우러나온 순종이 아니라, 의무감에서 나온 순종이기 때문에,

- 순종 후에 반드시 대가를 요구하게 되고,

-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하나님을 향해 분노를 쏟아낼 것이다.

- 율법주의였던 바리새인이 분노에 휩싸여 예수님을 죽인 것과 같이 말이다.

 

따라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 인식’이다.

- 다른 말로, 회개이다.

- 순종하기 싫은 마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안’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려운 순종을 들먹이며, 신앙 전체를 싸잡아 내치고 있다.

- 그런 자신을 포장하기 위해 하나님 말씀이 없다고 핑계 대고 있다.

- 기도조차 자기 합리화를 위해 이용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여기에서부터 바른 신앙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제시하시는 바른길을 알면, 그 길로 가기 쉬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 아직은 내가 가는 신앙의 길이 확실하게 맞는지 몰라 머뭇거리며 방황하지만,

-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여 확실하게 맞는 길을 알기만 하면, 망설임 없이 그 길을 향해 돌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반대로 말해서, 지금 내가 신앙의 길에서 머뭇거리고 망설이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를 다르게 표현하면,

- 지금 내가 신앙에 헌신하지 못하는 이유는 나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이라는 뜻이다.

- 하나님이 말씀을 주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 하나님만 잘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

- 하나님이 잘해야, 방황하고 망설이는 신앙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에게 잘못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잘못이 크다는 것이다.

 

하지만 상황을 이렇게 오해하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 우물에서 숭늉 찾으면, 아무리 노력해도 100% 헛수고다.

- 노력의 크기도 중요하지만, 노력의 방향도 중요하다.

- 크기와 방향 중에 하나라도 빠지면 아무 소용 없다.

숭늉 찾으려면 부엌에 가야 한다.

- 나의 문제를 하나님 탓으로 돌리면, 아무리 노력해도 100% 헛수고다.

- 방향을 잘 맞춰야 한다.

- 나의 문제는 나에게 돌아갈 때 해결할 수 있다.

 

그렇다고 모든 문제가 자기 때문이라는 뜻은 아니다.

- 자기를 돌아보고 이해할 때 문제의 원인을 섬세하게 구분할 수 있다.

 

문제를 구분하면 다음과 같다.

자각한 문제 안에는 거짓 문제와 참 문제가 섞여 있다.

 

- 거짓 문제란 불편함을 느꼈지만 실제로는 문제가 아니고,

- 참 문제란 불편함에 대한 분명한 원인이 있는 것이다.

- 그런데 원인이 있더라도 적극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는 반면, 

- 어떤 문제는 해결할 필요 없이 받아들이고 순응해야 할 문제가 있다.

 

이렇게 구분하여, 거짓 문제와 해결 불가능한 문제에서 벗어나 해결 가능한 문제에 집중할 때,

- 실제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 거짓 문제와 해결 불가능한 문제에 매여있으면, 인생이 미궁 속으로 빠진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서 문제를 구분해보자.

- 신앙 생활을 하면 가진 것을 전부 잃어버릴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다.

- 여기서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문제를 자각한다.

그러면 먼저 참 문제와 거짓 문제를 구분해야 한다.

- 우리가 잃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 중에 정말 가지고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있다.

- 그런데 가지고 있지 않은 것조차 잃어버릴 두려움을 갖는다.

- 이것이 거짓 문제이다.

- 문제라고 느끼지만 실제로는 문제가 아니다.

- 오해이며 착각이다.

 

예를 들어, 만약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지 않았으면, 

- 평생 ‘안정감’ 속에서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며, 

- 성공적인 인생을 살다가 평안히 죽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 즉, 안정과 인정을 이미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 그래서 신앙 때문에 평생 누릴 안정과 인정을 빼앗길까 봐 두려워한다.

- 신앙 때문에 하지 않아도 될 불안정한 생활을 하다가 사람들에게 소외되어 외롭게 죽을까 봐 걱정한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사실인가?

- 신앙 없이 지금과 같은 삶을 지속하면, 정말 안정된 삶과 사람들의 인정을 지킬 수 있나?

아니다! 오히려 반대이다.

-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 누구도 등 떠밀지 않았는데, 자발적으로 교회에 와서 신앙 생활을 하는 이유가 현재 불안감과 소외감을 느끼기 때문에 아닌가?

- 지금까지 평생 불안감과 소외감을 채워보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세상에서 채울 방법이 전무하기 때문에,

- 영적이고 신비로운 방법으로라도 채우려고 교회에 온 것 아닌가!

- 교회에 왔다는 것이 현재까지 지속해서 불안감과 소외감을 느끼고 있고, 

- 앞으로도 안정과 인정을 얻을 방법을 알아낼 수 없을 것이라고 예상되기 때문에 아닌가!

- 교회에 있다는 것은, 불안감과 소외감을 가진, 안정과 인정을 원하는,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안정과 인정을 얻지 못한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따라서 우리 중 누구도 안정과 인정을 가지지 못했다.

 

그런데 도대체 왜 안정과 인정을 잃어버릴 두려움을 갖는가!

- 이미 지금도 가지고 있지 않은데 말이다.

- 그것 때문에 교회에 왔는데 말이다.

- 왜 가지고 있지도 않은 것을 잃을까봐 두려워하는가.

- 왜 그 두려움 때문에 교회에 와서까지 신앙 앞에서 주저하는가.

이는 거짓 두려움이며, 거짓 문제이다.

- 따라서 해결할 필요도 없고, 논의할 필요도 없다.

 

우리에게는 잃을 안정과 인정이 없다.

- 인생에서 이미 가장 밑바닥이다.

- 더 이상 떨어질 곳도 없고, 잃을 것도 없다.

- 오직 하나님을 통해 안정과 인정을 얻을 일만 남은 존재이다.

여기까지가 거짓 문제에 대한 답이다.

 

그럼에도 신앙 때문에 실제로 잃는 것이 있다.

- 참 문제가 있다.

- 분명한 것은 신앙에 집중해서 신앙에 지금보다 많은 에너지와 시간을 쏟으면, 

- 반대로 지금보다 돈을 위해 쏟는 에너지와 시간이 줄어든다.

- 그래서 지금의 경제적 지위보다 낮아진다.

따라서 이는 해결할 필요가 있는 참 문제이다.

 

그러면 또 참 문제를 ‘해결 가능한 문제’와 ‘해결 불가능한 문제’로 구분해보자.

- 돈의 역할을 두 가지이다.

- ‘생존’과 ‘생활’이다.

여기서 ‘생존’은 사람다움을 유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기준이다.

- 단순히 배고프고 춥지 않음을 넘어서,

- 빌어먹지 않고 당당하게 먹을 수 있으며, 

- 남의 눈 피해 간신히 추위를 피하는 수준이 아닌 안락하고 편안하게 쉴 수 있는 것이다.

- 생존이 보장되지 않으면,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욕망의 화신이 된다.

- 배고픈 사람에게 사람다운 품위를 요구하는 것은 폭력이다.

하지만 ‘생활’은 사람다움, 자기다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것 이상이다.

- 시대와 장소마다 기준이 다르기에 2023년 한국 기준으로 하면,

- 핸드폰과 자동차는 생존을 위해 필요하다.

- 하지만 매년 핸드폰과 자동차를 바꾸는 것은 생존 이상의 것으로 재미와 풍요를 위한 생활이다.

- 핸드폰과 자동차가 있어야 자기다움을 지키며 생존할 수 있지만,

- 핸드폰과 자동차로 자기를 드러내려는 것은 오히려 자기다움을 포기하는 선택이다.

 

그런 점에서 ‘생존에 필요한 돈 부족’은 해결 가능하고 해결해야만 하는 영역이다.

-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존을 책임지겠다고 약속하셨다.

-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정체성을 지킬 수 있는 생존을 책임져주시겠다고 하셨다.

[마 6:31~33]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32) 이 모든 것은 모두 이방사람들이 구하는 것이요,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아신다. (33)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

- 여기서 ‘이 모든 것’은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으로, 

- 정체성, 존엄성, 인간다움, 자기다움을 상징한다.

이 약속이 있기에, 우리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신앙에 인생을 걸 수 있다.

 

반면에 ‘생활에 필요한 돈 부족’은 해결 불가능하고 해결할 필요가 없는 영역이다.

- 엄밀하게 말해서, 최신형 핸드폰과 자동차는 정체성을 오염시키는 악이다.

- 정체성의 근거가 자기 내부에 있어야 하는데,

- 저런 것은 정체성의 근거를 내부에서 외부로 옮겨서,

- 겉은 화려하지만 속은 텅 빈 무가치한 존재로 전락시킨다.

- 따라서 재미와 풍요를 위한 생활은 절제되어야 한다.

- 그래야만 정체성을 지킬 수 있다.

그렇다고 재미와 풍요가 무조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 다윗도 풍요로움 속에서 삶의 재미를 누렸다.

- 중요한 것은 재미와 풍요에 에너지를 쏟느라, 정체성까지 잃어버리는 것이다.

- 하찮은 욕망(핸드폰, 자동차) 성취하느라 중요한 욕망(정체성 회복) 성취 기회를 상실한다.

- 돈 벌다가 소중한 사람도 잃고, 자기 자신까지 잃는다.

그러면 결국 소중한 욕망이 성취되지 못하여 더욱 괴로워진다.

- 그래서 당장에는 재미와 풍요를 포기하고 정체성을 회복하는 단순한 순종이 필요하다.

- 그래야 미래에는 정체성을 지키면서 재미와 풍요까지 누리는 역설적 순종이 가능할 것이다.

- 다윗처럼 말이다.

 

이렇게 문제를 구분하여,

- 참 문제와 거짓 문제를 구분하고,

- 해결 가능한 문제와 해결 불가능한 문제를 구분하면,

- 현재 자신의 상태를 인식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가?

누군가는 거짓 문제 때문에 괴로울 수 있다.

- 가지고 있지 않은 안정과 인정을 잃을까 봐 두려워할 수 있다.

- 그런 사람은 자신에게 이미 안정과 인정이 없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 지금까지 평생 안정과 인정을 얻기 위해 노력했지만, 전부 실패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 지금 자신의 상태가 이미 밑바닥이고, 더 이상 떨어질 곳조차 없다.

교회에 왔다는 것은 무의식에서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다는 뜻이다.

- 직장, 재산, 가족, 친구, 사회적 지위가 있지만, 어떤 것도 자신에게 안정과 인정을 주지 못하고 있음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 물론 의식 영역에서는 직장을 잃으면 안정과 인정을 잃을 두려움 때문에, 신앙을 거부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 하지만 우리를 교회로 이끈 무의식은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니 거짓 문제에서 벗어나 참 문제에 집중하자.

 

그런데 만약 지금 자신은 안정과 인정을 가지고 있고,

- 신앙 없이도 안정과 인정을 얻을 방법을 이미 알고 있으며,

- 그래서 신앙 때문에 안정과 인정을 잃는 것이 참 문제라고 생각한다면,

- 그런 사람은 신앙에서 얻을 것은 없다.

신앙은 ‘병든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다.

- ‘건강한 사람’에게는 도움을 줄 수 없다.

[마 9:12] 예수께서 그 말을 들으시고서 말씀하셨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사람에게는 필요하다.”

 

따라서 자신이 얼마나 병들었는지, 

- 얼마나 안정과 인정이 없는지, 

- 얼마나 땅 바닥까지 추락했는지, 

- 그래서 얼마나 고통받고 있는지, 

- 얼마나 고통을 피할 방법이 없는지

- 정확하게 인식하자.

그럴 때만 예수님의 복음을 ‘복된 소식’으로 들을 수 있을 것이다.

- 그렇지 않다면, 복음은 ‘망할 소식’이 될 것이다.

 

또 누군가는 해결 불가능한 문제 때문에 괴로울 수 있다.

- 풍요와 재미를 위한 생활의 욕망 때문에 고민할 수 있다.

- 신앙 때문에 이 욕망 성취가 좌절될까 봐 두려울 수 있다.

- 육체의 안락함과 사회적 지위를 잃을까 봐 걱정할 수 있다.

그러나 욕망은 없어지지 않는다. 해결할 수 없다.

- 아무리 노력해도 욕망을 억누를 수는 있어도, 제거할 수는 없다.

- 자신이 욕망의 굴레에 종속된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고 순응해야 한다.

- 편한 것을 좋아하고 굴복하기보다 군림하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욕망을 조절할 방법이 딱 하나 있다.

- 욕망은 오직 다른 욕망에 의해 조절된다.

- 흡연 욕구는 폐암에 걸려 생존 욕구가 발동되면 자동으로 조절된다.

- 돈 욕구는 강도가 목에 칼을 겨눠 생존 욕구가 발동되면 자동으로 조절된다.

- 곧바로 담배를 끊고, 강도에게 돈을 준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욕망을 제대로 아는 것이다.

- 자신에게 어떤 욕망이 있는지 알아야 하고,

- 각 욕망 간의 경중을 따져야 한다.

 

쉬운 예를 들어, 자신에게 몸짱 욕망과 식욕이 모두 있는데,

- 먹는 것이 너무 좋지만 배 나오는 것이 더 싫다.

- 그러면 인생의 방향이 명확해진다.

- 먹는 것을 조심하면서 열심히 운동하면 된다.

- 그래야 몸짱 욕망이 성취된다.

즉, 사람은 어떤 욕망을 성취해도 그 즉시는 만족하지만,

- 장기적으로는 하찮은 욕망이 억제되고 중요한 욕망이 성취될 때만 만족한다,

따라서 이렇게 욕망이 정리되어야, 

- 하찮은 욕망은 절제되고 중요한 욕망은 성취되어,

- 인생 전체가 만족스러워진다.

 

그런데 반대로, 자신의 욕망을 모르고, 욕망 간의 경중을 모르면,

- 상황 따라, 기분 따라, 분위기 따라 그때그때 생각나는 욕망을 따르게 되고,

- 욕망을 성취한다고 해도 알 수 없는 불만족이 쌓인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냐면,

- 자신의 욕망을 모르는 사람은 헬스장에서는 몸짱 욕망에 취하고, 집에 오면 식욕에 취한다.

- 하지만 동시에 운동하면서도 먹을 생각에 운동에 집중하지 못하고,

- 먹으면서도 몸짱 욕망 생각에 맛있게 먹지 못한다.

- 그래서 매 순간 욕망에 집중하는 듯 보이지만,

- 실제로는 어떤 욕망도 제대로 성취하지 못한다.

- 마음껏 맛있는 음식을 즐기지도 못하고, 몸짱이 되지도 못한다.

그래서 마음 속에 언제나 욕구 불만이 쌓이고, 인생 전체가 불만족해진다.

- 결국 자신이 원하는 것은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는 회의와 원망이 생긴다.

 

회의와 원망은, 이제 짐작하겠지만, 욕망을 성취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다.

- 역사 전체로 볼 때 우리는 누구보다 욕망을 많이 성취하는 인류이다.

- 불만족의 원인은 자신의 욕망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 자신에게 어떤 욕망이 있는지, 그리고 각 욕망 간의 경중을 모르기 때문이다.

- 그런 상태에서는 아무리 욕망을 채워도 여전히 만족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회의와 원망의 원인은 욕망을 지나치게 많이 성취했기 때문이다.

- 예를 들어, 된장찌개가 너무 먹고 싶을 때 된장찌개, 공깃밥, 밑반찬만 있다면 정말 만족스러운 식사를 할 수 있다.

- 그런데 된장찌개와 함께 스테이크, 초밥, 피자, 치킨, 짜장면, 짬뽕, 탕수육, 떡볶이, 김밥, 햄버거까지 전부 있어서,

- 호기심에 이것저것 한 숟가락씩 먹다 보면, 

- 이미 배는 부른데, 정작 먹고 싶었던 된장찌개는 제대로 먹지 못해서,

- 오히려 불만족스러운 식사가 된다.

우리 인생이 이와 같다.

 

따라서 만족스러운 식사를 위해서는 더 많고 더 새로운 요리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 오히려 요리를 줄여야 한다.

- 그래서 정말 먹고 싶은 것을 먹을 수 있는 상황으로 바꿔야 한다.

마찬가지로 만족스러운 인생을 위해서는 더 많은 욕망 성취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 오히려 욕망 성취를 절제해야 한다.

- 그래서 정말 성취하고 싶은 욕망을 성취할 수 있는 상황으로 바꿔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진짜 문제가 시작된다.

- 문제는 자신이 정말로 원하는 것,

- 즉, 자기 욕망의 종류와, 각 욕망의 경중을 모른다는 것이다.

- 이를 다르게 말하면, 자기 정체성을 모른다는 것이다.

이것이 모든 문제의 근본 원인이다.

- 회의와 원망의 원인이고,

- 인생이 불만족스러운 원인이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아무리 욕망을 성취해도 만족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이 해결 가능하고, 반드시 해결해야만 하는 문제이다.

- 바로 정체성 문제이다.

- 우리는 이것에 집중해야 한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 때, 자신이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고,

- 욕망의 종류와 경중을 알 때, 선택과 포기를 하면서도 아쉬움과 미련을 갖지 않을 수 있으며,

- 그렇게 선택과 집중을 할 때, 욕망 성취를 통한 만족감을 느낄 수 있다.

따라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 더 많은 욕망 성취가 아니라,

- 욕망의 종류와 욕망의 경중을 정확하게 알아서,

- 중요한 욕망 성취를 위해 하찮은 욕망을 포기하는 것이다.

이것이 정체성 회복의 참뜻이다.

 

그렇다면 정체성이 도대체 뭐냐?

정확하게 말해서, 정체성은 존재와 기능이 합쳐진 것이다.

- 존재와 기능 모두 중요하다.

- 존재가 없는 기능도, 기능이 없는 존재도 생각하기 어렵다.

- 둘 다 온전한 정체성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문제는 세상의 현실이다.

- 자본주의 사회, 즉 모든 것을 돈의 가치로 환산하는 사회는 기능을 강조한다는 문제이다.

- 왜냐하면 존재는 돈의 가치로 환산할 수 없지만, 기능은 환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래서 우리는 기능이 강조 왜곡된 상태를 정상으로 느끼고 있다.

이것 때문에 우리는 정체성과 직업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다.

- 정체성을 기능에 편향된 상태로 인식하고 있고,

- 기능을 발휘하는 대표적인 도구가 직업이기 때문이다.

- 그래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직장인, 사업가, 유튜버, 종교인과 같은 기능 외에는 말할 수 있는 것이 없다.

- 말한다고 해 봤자, 운동을 좋아하고, 음악을 좋아하고, 음식을 좋아한다는 등 하찮은 욕망이 전부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점점 존재가 없는 기능으로 전락하고 있다.

- 존재가 없는 기능은 기계와 다르지 않다.

- 사람은 점점 파괴되어 기계가 되고 있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존재 욕망과 기능 욕망이 모두 있다.

- 둘 중의 하나라도 채워지지 못하면, 사람은 반드시 후회하고 인생을 회의한다.

- 사람은 세상에서 기능으로 가치를 인정받기를 원하지만,

- 동시에 세상에서 평가되는 가치와 상관 없이,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 존재하길 원한다.

그런데 세상에 휩쓸려 기능은 성장하지만, 존재는 억눌린 채 살기에 언제나 불만족스러운 것이다.

- 대표적인 예가, 이건희 회장이다.

- 그는 대한민국에서 기능으로 최정점에 섰다.

- 그러나 누구도 그를 존재 자체로 인정하지 않았다.

- 자기 자신마저도 말이다.

- 그래서 매춘에 빠진 것이다.

- 그 쾌락의 순간만큼은 기능이 없는 순수한 존재로 존재한다는 착각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 마치 인생의 의미를 잃은 사람이 마약이나 도박 중독에 쉽게 빠져, 그 안에서 살아있음을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 그것이 결국 자신을 파괴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그만큼 사람에게 존재 욕망 성취가 절실하다는 것이다.

- 아무리 기능 욕망이 채워져도, 기능으로 대한민국 1등이 되어도, 존재 욕망은 여전하다.

 

그래서 하나님은 기능이 아닌 존재를 강조하시는 것이다.

기능은 이미 세상이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 기능을 너무 강조해서, 존재가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느낄 만큼 말이다.

- 그래서 정체성을 직업으로 착각하는 정도로 말이다.

 

이러한 현실 때문에 첫째로, 하나님은 어쩔 수 없이 사람을 ‘광야’로 이끄신다.

- 하고 싶어도 기능을 발휘할 수 없는 상황으로 이끄신다.

-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자기 존재와 마주할 수밖에 없도록 하신다.

둘째로, 그와 동시에 하나님은 기능을 발휘할 필요가 없는 상황을 만드신다.

- 그래서 매일 ‘만나’를 주신다.

- 생존을 위협받으면, 사람이 살기 위해 기능에 몰입하기 때문이다.

- 그러면 또 다시 존재에서 멀어지기 때문이다.

마지막 셋째로, 하나님은 우리를 존재로 사랑하신다.

- 아무 기능 없어도, 세상의 기준에서 아무런 가치 없어도,

- 우리가 이미 충분히 사랑받을 자격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려주시며,

- 실제로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우리를 친밀하게 돌보시고 보호하신다.

이것이 존재가 회복되는 유일한 방법이다.

 

이렇게 먼저 존재가 회복될 때,

- 그래서 자신이 세상에서 인정받는 기능을 가져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벗어날 때,

- 그래서 기능이 없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사랑할 수 있을 때,

- 그래서 기능이 없는 존재로 당당하게 서 있을 수 있을 때,

- 그래서 자기 존재를 정확하고 선명하게 인식할 수 있을 때,

- 그때 그 존재가 발산하는 자기 고유의 진정한 기능이 발휘된다.

- 세상의 강압에 의해, 세상에서 인정받기 위해 억지로 짜낸 기능이 아니라,

- 정체성을 명확하게 인식한 가운데 나온,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 없는 자신만의 기능 말이다.

이렇게 존재와 기능이 회복되는 것이 정체성 회복이고,

- 이렇게 정체성이 회복될 때 자기 욕망을 이해할 수 있고,

- 욕망을 이해할 때 중요한 욕망으로 하찮은 욕망을 제어할 수 있고,

- 그럴 때 욕망 성취로 인한 만족감을 얻을 수 있다.

 

그렇게 산 사람만이 그 상태로 영원히 살고 싶다는 소망이 생길 수 있고,

- 그 소망이 있는 사람만이 영생을 얻어 구원 받아 천국을 누릴 수 있다.

- 반대로, 정체성 회복이 되지 않아 만족감이 없는 사람은 영원히 살고 싶다는 소망이 없고,

- 그 소망이 없는 사람은 영생을 얻지 못해 구원받아 천국을 누릴 수 없다.

그래서 정체성 회복이 절박하게 필요한 것이다.

 

결론 - 본문 이해

이런 말을 한 이유는, 본문이 말하는 ‘예언의 모호성’ 때문이다.

- 예레미야는 예언 그 자체로는 진위를 알 수 없다고 강조한다.

- 오직 예언이 성취된 이후에만 참 예언인지, 거짓 예언인지 구분할 수 있다고 말한다.

[렘 28:7~9] 그러나 당신은 이제 내가 당신의 귀와 온 백성의 귀에 이르는 이 말을 들으시오. (8) 옛날부터 우리의 선배 예언자들은 많은 나라와 큰 왕국에 전쟁과 기근과 염병이 닥칠 것을 예언하였소. (9) 평화를 예언하는 예언자는, 그가 예언한 말이 성취된 뒤에야, 비로소 사람들이 그를 주님께서 보내신 참 예언자로 인정하게 될 것이오.

그런데 이는 단편적인 예언뿐만 아니라 하나님 말씀 전체에 확장할 수 있다.

- 이 세상 누구도 하나님 말씀의 진위를 확증할 수 없다.

- 이를 더 확장하면, 우리의 삶도 하나님 말씀을 기준으로 옳은지 옳지 않은지도 알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 이를 더 확장하면, 세상에서 옳은지 옳지 않은지 확증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 말씀의 진위 여부도 부정하지만,

- 세상의 말도 부정한다.

- 세상은 많은 기능을 가지고, 세상에서 성공하여, 다른 사람에게 굴복하지 않고 군림하면,

- 안정과 인정을 얻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다.

- 하지만 이 역시 정말 그런지 진위를 확증할 수 없다.

- 계속 말하지만, 최고의 성공 뒤에도 안정과 인정이 없어 매춘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이건희 회장이 이를 증명한다.

이렇게 ‘예언의 모호성’은 ‘만물의 모호성’으로 확장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렇게 하나님 말씀도, 세상의 말도 확실하게 증명할 수 없다면,

- 우리는 무엇을 근거로 선택하고 살아야 하는가?

 

우리에게는 두 가지 세계가 있다.

- 하나님 중심의 사랑의 세계와 세상 중심의 거래의 세계이다.

- 사랑의 세계는 존재를 강조하고, 거래의 세계는 기능을 강조한다.

- 두 세계는 배타적이어서, 결국 하나는 선택하고 다른 하나는 포기해야 한다.

우리는 평생 거래의 세계에서 살았다.

- 언제나 기능을 강요받았다.

- 사랑조차 거래를 기반으로 생각했다.

- 그래서 사랑하는 것은 좋은 기능을 발휘하는 것이고,

- 누군가가 좋은 기능으로 가치를 제공할 때 사랑받는다고 느낀다.

 

그런데 만약 그동안 평생 경험한 거래의 세계가 괜찮았다면, 

- 불만이 전혀 없지 않지만, 그래도 살 만했다면,

- 살던 대로 살면 된다.

- 이미 살만한데, 왜 굳이 위험을 감수하며 새로운 세계로 옮기겠는가.

- 거래의 세계에서 더 잘 사는 법을 고민하는 편이 낫다.

- 부동산, 주식 투자 연구하며, 덜 이용당하고 더 이용하는 기능을 개발하는 것이 낫다.

하지만 만약 그동안 평생 경험한 거래의 세계가 괜찮지 않았다면,

- 불만이 조금 있는 것을 넘어, 한순간도 머물 수 없을 만큼 괴로웠다면,

- 그래서 남에게 이용당하는 것도 싫지만, 남을 이용하는 것은 더 싫어서,

- 도저히 살 수 없을 것 같다면,

- 굳이 새로운 세계로 옮기라고 누군가 말해주지 않아도,

- 자기가 먼저 가겠다고 발버둥 칠 것이다.

- 거래의 세계에서 도망쳐 나와 사랑의 세계로 갈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정답은 없다.

- 사람마다 다른 판단을 내릴 수 있다.

- 거래의 세계를 견디지 못하는 사람도 있지만, 잘 적응하는 사람도 있다.

- 그래서 모든 사람에게 사랑의 세계를 강요할 수 없다.

하지만 만약 자신이 거래의 세계에 진절머리가 났다면,

- 도대체 왜 거래의 세계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가.

- 왜 당장 도망쳐 나오지 않는가.

- 왜 살던 대로 계속 살려고 하는가.

- 왜 두려워하는가.

당장 사랑의 세계로 달려가길 바란다.

- 당장 거래의 세계를 포기하길 바란다.

 

그러나 만약 거래의 세계가 싫지만, 사랑의 세계로 옮길 용기가 없다면,

- 그것은 거래의 세계에서 살만하기 때문이다.

- 거래의 세계가 싫지만 그렇게 싫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 남에게 이용당하고 남을 이용하는 것이 싫지만, 나름 할 만하기 때문이다.

- 마치 이스라엘이 거래의 세계에 살며 멸망 위기를 겪으면서도, 

- 사랑의 세계로 옮길 생각은 하지 않고, 여전히 우상숭배와 착취를 반복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 사랑은 거래를 방해하여 생존을 위협하는 적으로 인식될 뿐이다.

- 그래서 사랑을 전하는 예언자와 하나님을 적으로 인식하여 죽이려 할 것이다.

- 그들에게 복음은 복된 소식이 아니라 저주가 된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현실 인식’이다.

- 자신에게 현실은 살만한 곳인가, 아닌가?

살 만하면, 살아라.

- 괜히 사랑의 세계에 관심 갖는 것은 시간 낭비이다.

- 거래에 집중하여, 세상에서 승승장구하라.

살만한 곳이 아니라면, 나와라.

- 괜히 거래의 세계에서 머뭇거리는 것은 시간 낭비이다.

- 사랑에 집중하여,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랑받아라.

이도 저도 아니라면, 현실이 살만한 것이다.

- 세상에서 살아라.

- 사랑 타령하며 시간 낭비하지 말아라.

 

하지만 나는 믿는다.

- 모든 사람은 거래의 세계에서 절대로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 사랑의 세계에서만 살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그래서 나는 기도한다.

- 만약 아직 세상이 살만한지 아닌지 모르겠다면,

-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세상이 얼마나 가혹한 곳인지,

- 그래서 거래의 세계에 사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 알게 해주셔서,

- 세상에서 더 이상 한순간도 살기 싫다는 좌절감, 절망감, 상실감을 느끼게 해주시기를.

- 그래서 하루속히 거래에서 벗어나길 발버둥 치게 되기를.

- 이것이 미양 교회 식구 전부가 하루 빨리 망하게 되기를 기도하는 이유이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사랑의 세계에서 살게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