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양교회 팟캐스트 양따양>
미양교회에서 했던 설교를 바탕으로 진솔하게 신앙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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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양을 따르는 어린양
예배 대신 예수님, 설교 대신 성경, 건물 대신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미양교회가 만드는 방송입니다.토끼와 개구리가 진솔하게 신앙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어린양과 같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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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목적을 재앙과 절망이라고 생각했다.
- 국가가 망했다.
- 포로로 끌려가는 내내 마음 속으로 기도했지만,
- 하나님은 아무것도 하시지 않았다.
- 이스라엘은 재앙을 당해 절망했다.
그러니 하나님의 목적을 재앙과 절망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포로 귀환’과 ‘국가 재건’을 꿈꿨다.
- 포로로 살아가길 누가 원하겠는가.
- 게다가 포로로 잡혀 온 이들은 전부 본토에서 호의호식했던 집권층이었다.
- 그러니 화려했던 삶으로 돌아가길 얼마나 더 원했겠는가.
이 간절한 마음을 부추기는 사람이 있었다.
- 바로 (거짓) 예언자이다.
- 그들은 이스라엘이 더 이상 바벨론을 섬기지 않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렘 27:9] 그러므로 너희에게 있는 예언자들이나 점쟁이들이나 해몽가들이나 박수들이나 마술사들이 너희에게 바빌로니아 왕을 섬기지 않게 될 것이라고 말해도, 너희는 듣지 말아라.
[렘 27:14]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바빌로니아 왕을 섬기지 않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는 자들의 말을 듣지 마십시오. 그들이 여러분에게 하는 예언은 거짓입니다.
그 예언이 하나님께 왔다는 것을 누구도 증명할 수 없었지만,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 사람은 ‘옳은 말’보다 ‘듣고 싶은 말’을 더 신뢰한다.
- 그래서 듣고 싶은 말을 하는 예언자를 참 예언자라고 믿는다.
- 전형적인 ‘순환 논증의 오류’이다.
- 귀환하고 싶은 욕망 때문에 귀환을 예언하는 예언자를 신뢰했고,
- 예언자를 신뢰했기 때문에 예언에 따라 귀환할 것이라는 욕망이 강화되었다.
결국 자기 긍정 강화 왜곡에 빠진 것이다.
- 이것이 지금까지 복 빌어주는 (거짓) 목사가 활개 치는 이유이다.
- 듣고 싶은 말을 해주기 때문이다.
- 사람은 옳은 말보다 듣고 싶은 말을 해주는 목사를 신뢰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껏 부푼 기대에 찬 물을 끼얹는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예레미야이다.
- 꿈 깨라고 말한다.
- 포로 귀환과 국가 재건은 ‘당분간’ 없다고 선언한다.
- 그냥 지금처럼 포로 나부랭이로 그럭저럭 연명이나 하라고 말한다.
[렘 29:4~7] 나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한다. 내가 예루살렘에서 바빌로니아로 잡혀 가게 한 모든 포로에게 말한다. (5) 너희는 그 곳에 집을 짓고 정착하여라. 과수원도 만들고 그 열매도 따 먹어라. (6) 너희는 장가를 들어서 아들딸을 낳고, 너희 아들들도 장가를 보내고 너희 딸들도 시집을 보내어, 그들도 아들딸을 낳도록 하여라. 너희가 그 곳에서 번성하여, 줄어들지 않게 하여라. (7) 또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이 평안을 누리도록 노력하고, 그 성읍이 번영하도록 나 주에게 기도하여라. 그 성읍이 평안해야, 너희도 평안할 것이기 때문이다.
언듯 보면, ‘그곳에서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축복처럼 들린다.
- 예를 들어, ‘전쟁과 기근과 염병 때문에 썩은 무화과처럼 만들겠다’는 말씀보다는 훨씬 좋게 들리기 때문이다.
[렘 29:17]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내가 그들에게 전쟁과 기근과 염병을 보내어, 그들을 아무도 먹을 수 없는 썩은 무화과처럼 만들겠다.
- 정착해서 번성하는 것이 파괴되어 죽는 것보다 당연히 좋다.
- 그래서 바벨론에서 번성하는 것이 축복으로 들린다.
하지만 당시 예언을 듣는 사람은 누구도 축복으로 듣지 않았다.
- 모두 저주로 들었다.
- 아무리 호의호식한다고 해도 남의 나라에 포로로 사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 만약 이스라엘 땅에서 간신히 입에 풀칠이나 하던 가난한 사람이었다면, 호의호식할 수 있는 바벨론 생활을 좋아했을 것이다.
- 굶주림의 고통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포로로 잡혀 온 이들은 집권층, 지식인, 기술자이다.
[렘 29:2] 이 때는 여고냐 왕과 그의 어머니와 내시들과 유다와 예루살렘의 고관들과 기술자들과 대장장이들이 예루살렘에서 떠난 뒤이다.
- 이들은 결코 호의호식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 이스라엘로 돌아가 이전의 권력을 회복하는 것이 그들의 유일한 소망이었다.
그랬던 이들에게 ‘바벨론 정착 예언’은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 바벨론 정착 예언은 ‘바벨론에서 평안한 삶을 보장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라,
- ‘이스라엘에서 누렸던 권력을 회복할 수 없도록 박탈하시는 하나님의 저주’였다.
그런 점에서 ‘바벨론 포로’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이중으로 재앙과 절망을 준다.
-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사건 자체도 재앙이지만,
- 그보다 더 끔찍한 것은, 70년 후에 돌아갈 수 있다는 예언이다.
- 70년 후에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은 70년 이전에는 돌아갈 수 없다는 뜻이고,
- 이는 당시에 예언을 들은 사람은 아무도 돌아갈 수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 왜냐하면 당시 성인이었던 사람이 70년 후까지 살아있을 가능성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벨론 정착 예언은 ‘지금까지 이스라엘의 완전한 박멸’을 뜻한다.
- 마치 이스라엘이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께 불순종했던 출애굽 1세대를 모두 죽게 하신 것처럼 말이다.
[민 14:29] 너희 가운데 스무 살이 넘은 사람으로, 인구조사를 받은 모든 사람들, 곧 나를 원망한 사람들은, 이 광야에서 시체가 되어 뒹굴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박멸된 것이 재앙과 절망이기만 할까?
다시 말하지만, 광야 40년은 분명히 재앙과 절망이다.
- 이것은 부정할 수 없다.
-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광야 40년을 설명할 수 없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재앙과 절망과 함께 번영과 희망을 얻었다.
- 그곳에서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할 수 있게 되었다.
- 그리고 그 믿음으로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다는 희망을 얻었다.
- 그 희망 속에서 가나안 땅에 번성하여 민족을 이룰 이스라엘을 기대했다.
- 얼마 전까지 애굽의 한낱 노예였던 무리가 어엿한 국가를 이룩할 수 있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
이렇게 번영과 희망은 광야가 없었다면 결코 얻을 수 없는 것이었다.
- 400년 동안 이집트 노예로 살면서, 정체성 회복은커녕 생존만을 위해 살았던 이스라엘에게 광야는 반드시 필요했다.
- 하나님을 통해 노예 근성을 버리고 정체성을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다.
- 광야는 수동적인 노예에서 능동적, 자발적, 독립적 존재로 변화되는 학교였다.
그런 점에서 광야는 번영과 희망의 장소이다.
누군가는 설교에서 광야를 이렇게 설명한다.
- 가나안을 정탐하고 돌아온 사람들은 믿음이 없었다.
- 그래서 가나안 입성이 두려웠다.
- 그래서 가나안을 정복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다.
- 그 불순종 때문에 받은 재앙과 형벌이 40년 광야 생활이다.
- (여기까지는 사실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스라엘처럼 40년 광야 재앙을 받지 않기 위해서는 믿음을 갖고 순종해야 한다. 고 말한다.
이것의 문제는, 광야를 재앙으로‘만’ 생각하여 피해야 하고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 이러한 생각 때문에, 만약 우리도 믿음을 가지면, 인생에서 광야를 겪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하게 한다.
- 광야 40년이라는 재앙과 형벌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한다.
이것이 광야를 재앙으로‘만’ 생각해서 생기는 오해이다.
그러나 광야는 우리가 피할 수도 없지만, 피할 필요도 없다.
- 왜냐하면 광야에서만 우리는 번영과 희망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광야가 필요한 이유는 모든 사람이 죄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 그래서 관계와 사랑의 참뜻을 알지 못해,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뿐만 아니라,
- 자신조차 사랑하지 못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 이것이 원죄이며, 모든 인류의 숙명이다.
-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누구나 가나안 땅에 들어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할 수밖에 없고,
- 불순종 때문에 광야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
따라서 광야를 피할 수 있다는 것은 죄가 없을 수 있다는 반-성경적인 주장이다.
그러나 그 광야에서 사람은 처음으로 하나님을 경험한다.
-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곳, 그래서 해야 할 일이 아무것도 없는 곳,
-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생존할 수 있는 곳,
- 그래서 기능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곳이 광야이다.
그렇기 때문에 광야에서만 아무런 대가 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다.
- 왜냐하면 광야에서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 하나님께 아무것도 제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 그럼에도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를 끊임없이 경험하기 때문이다.
- 즉, 광야는 하나님의 순수한 사랑, 대가 없는 사랑을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다.
그 사랑을 경험한 사람만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다.
- 하나님은 내게 아무런 기능이 없어도 여전히 나를 사랑하실 유일한 분이시며,
- 게다가 내가 하나님을 거부하고 부정해도 하나님은 언제나 나를 붙잡아 주실 유일한 분이라는 것을 믿게 된다.
[롬 5:8]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실증하셨습니다.
이 믿음이 중요한 이유는,
- 이 믿음이 자기 인식을 방해하는 결정적인 두 가지 장벽을 부수기 때문이다.
- 첫째 장벽은, 내게 기능이 없어서 사랑받지 못할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 그래서 사람은 기능을 개발하느라 참된 자신을 발견하지 못한다.
- 둘째 장벽은, 내게 죄가 많아서 사랑받지 못할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 그래서 사람은 죄를 숨기기 위해 돈, 명예, 직업 등 사랑 받을 만한 기능을 쌓고,
- 그 기능을 쌓느라 참된 자신을 잃는다.
그런데 믿음이 있으면,
- 그래서 하나님의 한량없는 사랑을 믿으면,
- 그래서 기능 없고 죄 많은 자신이 사랑받을 수 있다고 믿으면,
- 그제야 사랑받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 두려움에서 벗어날 때만 기능 뒤에 숨은 참된 자신의 존재를 발견하고,
- 그제야 존재 그 자체를 인식하고 사랑할 수 있다.
이것이 믿음의 결정적인 역할이며,
- 이 믿음을 위해 광야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바벨론 정착 예언’의 참뜻
그런 점에서 ‘바벨론 정착 예언’도 광야와 같이 재앙과 절망과 함께 번영과 희망을 준다.
- 반복해서 말하지만, 재앙과 절망‘만’ 준다는 것도, 번영과 희망‘만’ 준다는 것도 아니다.
- 둘을 함께 준다.
우선 바벨론 정착 예언은 기능 개발에 빠져 자기 존재와 하나님을 잃은 이스라엘에 대한 형벌이다.
- 하나님은 바벨론에서 자신과 하나님을 잃은 이스라엘 사람을 전부 죽게 하신다.
- 죄를 범한 이스라엘을 전부 박멸하신다.
그러나 동시에 바벨론 정착 예언은 하나님이 자기 존재를 잃은 이스라엘을 회복시키겠다는 선포이다.
- 하나님은 바벨론에서 이스라엘을 새롭게 창조하신다.
- 자기 존재를 되찾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여, 이스라엘다운 이스라엘을 세우신다.
그렇기 때문에 바벨론 정착은 번영과 희망이다.
[렘 29:11] 너희를 두고 계획하고 있는 일들은 오직 나만이 알고 있다. 내가 너희를 두고 계획하고 있는 일들은 재앙이 아니라 번영이다. 너희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을 주려는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참된 번영과 희망은?
많은 사람이 이스라엘의 번영과 희망을 포로 귀환 사건 자체로 본다.
- 포로가 되어 나라를 잃은 민족에게 포로에서 해방되어 나라를 되찾는 것만큼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 그래서 하나님도 포로 귀환을 약속하신다.
[렘 29:10] 나 주가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바빌로니아에서 칠십 년을 다 채우고 나면, 내가 너희를 돌아보아, 너희를 이 곳으로 다시 데리고 오기로 한 나의 은혜로운 약속을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 주겠다.
[렘 29:14] … 내가 너희를 포로생활에서 돌아오게 하겠다. 내가 너희를 쫓아 보냈던 세상의 모든 나라, 모든 지역에서 너희를 모아 오겠다. 내가 너희를 포로로 보냈으나, 나는 너희를 그 곳에서 너희의 고향으로 다시 데려오겠다. 나 주의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태도는 본문이 비판하는 거짓 예언자와 다르지 않다.
- 한마디로, 기능만 회복하려는 욕망이다.
-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니라, 국가의 기능으로 본다.
- 그래서 포로에서 귀환하여 국가의 기능만 회복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이는 회복된 기능으로 거래 관계의 우위를 점하여, 덜 굴복하고 더 군림하려는 욕망이다.
- 이러한 욕망은 결국 자기 존재를 파괴하도록 만들고,
- 하나님과의 관계도 단절시킨다.
이 욕망 때문에 이스라엘은 멸망했었다.
- 따라서 포로 귀환 자체는 번영과 희망이 아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번영과 희망을 약속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렘 29:12~14] 너희가 나를 부르고, 나에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의 호소를 들어주겠다. (13) 너희가 나를 찾으면, 나를 만날 것이다. 너희가 온전한 마음으로 나를 찾기만 하면, (14) 내가 너희를 만나 주겠다. 나 주의 말이다. …
나는 이 본문 12절 번역에 오해의 여지가 있다고 본다.
- 번역문은 조건문이다.
-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존재 그 자체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 하나님을 부르고 기도하는 조건을 충족할 때만 사랑할 것처럼 이해된다.
- 무조건적 사랑이 아니라 조건적 사랑으로 들린다.
-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이 거래 관계라는 오해를 준다.
하지만 원어는 그렇지 않다.
- 다른 영어 번역본을 보면, 다음과 같다.
[렘 29:12, ESV] Then you will call upon me and come and pray to me, and I will hear you.
- 즉, 각 세 문장이 대등하게 연결된다.
그 점을 강조해서 다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 [렘 29:12, 사역] 나는 너희가 나를 부르고, 나에게 와서 기도하도록 할 것이고, 내가 너희의 호소를 들어주겠다.
- 이는 관계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의지를 드러낸다.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도록 하고, 하나님도 이스라엘을 지키고 보호하실 것이라는 뜻이다.
그렇게 회복된 관계를 통해 이스라엘은 온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게 된다.
[렘 29:13~14] 너희가 나를 찾으면, 나를 만날 것이다. 너희가 온전한 마음으로 나를 찾기만 하면, (14) 내가 너희를 만나 주겠다. 나 주의 말이다. …
- 멸망 이전에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찾지 않고 이용하기만 했지만,
- 바벨론 포로 70년을 통해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이용하지 않고 온전한 마음으로 찾게 된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참된 번영이며 미래에 대한 희망이다.
이는 단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에 국한되지 않는다.
-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은 사람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관계도 회복시킨다.
- 하나님께 무조건적 사랑을 받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면,
- 하나님을 통해 무조건적 사랑을 배우게 되고,
- 그 사랑으로 이웃과 자기 자신을 사랑하게 된다.
특히 무조건적 자기 사랑, 즉 기능 없고 죄 많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게 되면,
- 사랑받기 위해 자기를 숨기고 기능으로 치장할 필요가 없게 되고,
- 존재 자체로 자신을 인식하고 드러낼 수 있다.
- 그럴 때만 자기 존재가 개발되고 확장될 수 있으며,
- 그럴 때만 자기답게 살아갈 수 있고,
- 자기다운 기능이 발현될 수 있다.
이것이 올바른 정체성 회복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 전체를 상징하는 것이 ‘포로 귀환 사건’이다.
- 포로 귀환은 단순히 이스라엘이 국가 기능을 회복하는 것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 존재 그 자체가 인식되고 개발되는 것이 핵심이다.
- 정체성 회복이 중심이다.
- 그렇게 회복된 정체성을 기반하여, 기능까지 회복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 이스라엘이 자신을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인식하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어,
- 내면의 정체성, 존재 그 자체를 회복하는 것이 먼저이고,
- 다음에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도록 포로에서 귀환하여 국가의 기능을 회복하는 것이다.
- 그것이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것이다.
[렘 31:33] 그러나 그 시절이 지난 뒤에, 내가 이스라엘 가문과 언약을 세울 것이니, 나는 나의 율법을 그들의 가슴 속에 넣어 주며, 그들의 마음 판에 새겨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이것이 포로 귀환 예언의 참 뜻이다.
-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멸망, 바벨론 포로, 바벨론 정착 예언, 70년 전 귀환 거부, 70년 후 귀환의 일련의 과정을 통해 계획하신 것이다.
이러한 긴 과정을 지난 후에야 비로소 참된 회복이 가능하다.
- 다시 말해서, 재앙, 멸망, 좌절을 거친 후에야 참된 번영과 희망이 있다.
- 반대로 말해서, 재앙, 멸망, 좌절을 거치지 않으면 번영과 희망은 없다.
- 다시 말해서, 재앙, 멸망, 좌절을 거부하는 사람은 결코 번영과 희망도 얻을 수 없다.
- 또 다시 말해서, 과거부터 지금까지의 인생의 재앙, 멸망, 좌절을 거부하는 것은 지금부터 미래까지 정체성을 회복하여 존재로서 자기답게 사는 번영과 희망도 함께 포기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또 다시 말한다.
- 우리 모두에게 재앙이 임하여, 지금까지 우리가 이룬 인생의 모든 성과가 전부 멸망하기를.
- 게다가 재기할 가능성조차 잃고 좌절하고 절망하기를.
- 그래서 하나님께서 새롭게 창조하신 새로운 인생을,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인생을,
- 정체성을 회복하여 존재로서 자기답게 사는 인생을,
- 참된 번영과 희망의 인생을 살기를 기도하겠다.
결론 -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참뜻
예수님의 죽음 부활에 담긴 뜻도 정확하게 이것과 같다.
- 재앙과 좌절 이후에 오는 번영과 희망이다.
여러 번 말했듯, 부활이 담보된 죽음이기 때문에 죽음이 쉬워지지 않는다.
- 아무리 부활이 담보된 죽음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경험하신 죽음은 부활이 전제되지 않은 영원한 죽음이었다.
- 제자가 한 명도 남아있지 않은 상태로 재앙과 완전한 좌절 속에서 처량하게 고독하게 죽으셨다.
그런 후에 부활하셨다.
- 부활을 통해 단지 겉껍데기 기능만 회복된 것이 아니다.
- 예수님의 존재 그 자체, 정체성이 회복되었다.
- 즉, 예수님이 참 그리스도 되셨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정체성 회복을 증명하기 위해 눈에 보이는 육신 회복을 이용한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부활을 육신 회복에 초점을 둔다.
-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으니, 병든 몸도, 망한 사업도, 아픈 자녀도, 실패한 프로젝트도 회복시키실 것이라고 믿는다.
- 이러한 믿음이 부활에 대한 믿음이라고 착각한다.
- 부활을 기능 회복이라고 착각한다.
이렇게 착각한 사람이 보이는 전형적인 반응이 있다.
- 그것은 예수님의 죽음 부활 중에서 부활만 강조하고 죽음은 슬쩍 넘어가는 태도이다.
- 자기 인생에서 누구나 겪을 수 있는 고통을 아무거나 끌어와,
- 자신은 이미 죽음을 겪었으니 부활의 회복만 남아있다고 착각한다.
- 이제 내가 원하는 기능의 회복만이 일어날 차례라고 믿는다.
- 그런 믿음이 예수님의 죽음 부활을 믿는 믿음이라고 오해한다.
왜 이런 착각을 하냐면,
- 기능만을 기대하고 신앙을 가진 사람이 기능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 그래서 기능의 죽음을 최소화하고, 기능의 회복을 최대화하기 위해,
- 한마디로, 비용은 최소화하고, 이윤은 최대화하기 위해,
- 죽음은 축소하고 부활은 강조하는 것이다.
이는 개인에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목사의 설교를 통해 집단에 전해진다.
이러한 착각이 바로 거짓 예언자가 했던 것이다.
- 번영, 희망, 회복을 기능의 측면에서만 봤다.
- 그래서 포로 귀환하여 국가 기능만 회복하면 충분하다고 믿었다.
- 그래서 곧 귀환할 것이라고 예언했고, 많은 사람이 그 예언에 열광했다.
왜 이런 착각을 하냐면,
- 덜 굴복하고 더 군림하려는 욕망,
- 덜 이용당하고 더 많이 이용하려는 거래 사고 방식,
- 존재를 잃어서 기능으로라도 자신을 채워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이런 착각은 언제나 자신을 파괴하는 방향으로 이어진다.
- 이스라엘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죽음 없는 부활을 믿는 사람은 결국 자기를 파괴하고 멸망한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보다 죽음이 더 중요하다.
- 부활보다 죽음이 더 가치 있기 때문이 아니다.
- 둘 다 똑같은 가치를 갖는다.
- 죽음과 부활은 완전히 하나이기 때문에, 둘을 떼어놓고 각각의 가치를 매길 수도 없다.
그럼에도 죽음이 더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죽음을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치부하기 때문이다.
- 그래서 죽음을 왜곡해서 강조하지 않으면, 죽음이 부활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말한다.
-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것을 믿자.
- 우리도 죽어야 한다는 것을 믿자.
- 우리가 죽는다는 것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얻은 성과, 경험, 지식, 판단, 인정, 안정이 전부 부정되고 파괴된다는 뜻이다.
- 그래서 인생에 남은 것이 하나도 없어진다는 뜻이다.
마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옷 한 벌도 걸치지 못하고 하체를 그대로 내보이시며, 개처럼 비참하고 하찮게 죽으신 것처럼,
- 우리 인생이 세상 모든 사람이 보기에 비참하고 하찮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 게다가 누구도 예수님의 죽음을 보며 안쓰럽다거나 혹은 영광스럽다고 생각하지 않은 것처럼,
- 우리의 비참함을 보며 칭찬은커녕 동정도 하지 않고, 합당한 결과라며 조롱할 것이다.
- 예수님이 당하신 것처럼 말이다.
다시 말해서, 왜 이런 재앙과 절망이 임하냐?
- 번영과 회복을 위해서이다.
- 부활을 위해서이다.
- 기능의 박멸을 통해 존재를 회복하기 위해서이다.
- 그래서 정체성을 회복하여, 자기답게 살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예수님이 죽음을 통해 온전한 그리스도의 정체성으로 부활하신 것처럼 말이다.
단지 기능 회복을 위해서라면, 이런 추잡한 과정은 필요 없다.
- 그냥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노력하면 된다.
- 운칠기삼이라고, 최선을 다하고 운이 조금 더해진다면, 남부럽지 않게 성공할 수 있다.
이것을 다 아는데도, 우리가 교회로 모여 불쾌한 이야기를 듣고 있는 이유는,
- 남부럽지 않은 성공이 우리를 만족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 원하는 것을 전부 가져도 여전히 부족할 것 같은 찝찝함 때문이다.
- 그 찝찝함 때문에 힘겹게 교회로 모여 불쾌한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나가지 않고 참는 것이다.
그렇다면 선택해야 한다.
- 인생 포기하고 영생을 선택해야 한다.
- 기능 포기하고 존재를 선택해야 한다.
- 거래 포기하고 사랑을 선택해야 한다.
- 완전한 죽음 속에서 완전한 부활을 발견해야 한다.
- 재앙과 좌절 감수하여 번영과 희망 얻어야 한다.
언제까지 복음을 듣고 불쾌하기만 할 것인가.
- 언제까지 하나님을 인생에 재앙과 좌절을 주시는 분으로만 여길 것인가.
- 언제까지 하나님을 인생 망하여 죽게 하시는 분으로만 여길 것인가.
- 그래서 언제까지 예수님을 죽도록 미운 분으로만 여길 것인가.
- 그러다가 정말로 예수님을 죽인 바리새인처럼 말이다.
하나님의 계획은 재앙이 아니라 번영이다.
- 우리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을 주시려는 것이다.
- 이스라엘을 70년 후에 귀환하여 회복시켜 주시려는 것이다.
- 우리를 존재 그 자체로 회복시켜 주시려는 것이다.
복음이 저주가 아니라 복된 소식이라는 것을 믿자.
- 그래서 억지로 혼자 끌고 온 인생 버리고,
- 복음에 인생을 던지자.
그럴 때만 복음 듣고 불쾌하지 않고, 기뻐하게 될 것이다.
- 복음이 복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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