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양교회 팟캐스트 양따양>
미양교회에서 했던 설교를 바탕으로 진솔하게 신앙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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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양을 따르는 어린양
예배 대신 예수님, 설교 대신 성경, 건물 대신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미양교회가 만드는 방송입니다.토끼와 개구리가 진솔하게 신앙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어린양과 같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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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분명하게 ‘이스라엘의 회복’을 선포한다.
[렘 30:3] 나 주의 말이다. 보아라, 반드시 그 때가 올 터이니, 그 때가 되면, 내가 포로로 잡혀 간 나의 백성을 다시 이스라엘과 유다로 데려오겠다. 나 주가 말한다.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준 땅으로 그들을 돌아오게 하여, 그들이 그 땅을 차지하게 하겠다.
- 포로에서 본토로 돌아올 것이다.
- 주권을 회복하고, 영토를 다시 지배하게 된다.
이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명백한 회복이다.
- 이스라엘 민족이라면, 누구나 가장 바라던 것이다.
- 그들에게 ‘땅’은 단순한 영토가 아니다.
- 하나님 약속의 성취이고, 구원의 증거이다.
- 애굽에서 벗어나 많은 기적을 통해 들어간 약속의 땅 가나안은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소이다.
그러니 ‘포로 귀환’과 ‘영토 수복’ 예언을 들은 이스라엘은 얼마나 기뻤겠는가.
하지만 상황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 예레미야는 이 예언 때문에 감옥에 갇힌다.
- 이스라엘은 회복 예언조차 거부한다.
이스라엘이 그토록 바랐던 회복을 예언했던 예레미야는 왜 미움을 받았을까?
- 듣기만 해도 기쁜 회복 예언을 왜 이스라엘은 거부했을까?
문제의 핵심은 ‘예언 시점’이다.
- 예언 선포 시점이 포로가 되기 전, 영토를 잃기 전 시점이기 때문이다.
- 아직 시드기야라는 어엿한 왕이 집권하고 있다.
- 물론 이전 왕인 여호야긴과 일부 무리가 포로로 잡혀갔지만, 국가는 건재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아직 이스라엘이 멸망하기 전에 멸망한 이스라엘이 회복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 따라서 본문의 예언은 회복 예언의 탈을 쓴 ‘멸망 예언’이다.
- ‘멸망 없는 회복’이 아니라 ‘멸망 이후 회복’을 예언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에게 박해받은 것이다.
- 멸망할 것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은 이스라엘에게 회복 예언은,
- 기쁜 소식, 즉 ‘복음’이 아니라 ‘저주’였기 때문이다.
- 앞으로 잘될 것이라는 ‘축복’이 아니라, 앞으로 멸망할 것이라는 ‘저주’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멸망 이후 회복’ 예언에서 회복이 아닌 멸망에만 집중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의 죽음 부활도 같은 역할을 한다.
-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 부활을 ‘복음’이라고 배웠다.
- 죽음 부활이 복음인 이유는 우리에게 부활의 회복을 약속하기 때문이다.
- 죽음 부활을 통해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능력,
- 즉, 가장 회복하기 어려운 상태를 가장 완벽한 상태로 회복할 수 있는 전능하심을 보여주셨다.
- 그렇기 때문에 복음은 우리가 가진 문제를 하나님은 능히 해결하실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 그래서 복음이 기쁜 소식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에게 복음이 선포된 ‘시점’이다.
- 만약 우리에게 당장 해결하지 않으면 살기 어려울 정도로 긴박하고 절박한 문제가 있는데,
- 자기 능력과 주변의 도움으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상태라면,
- 모든 것을 해결해준다는 복음은 그야말로 기쁜 소식이 된다.
- 그런 상황에서 복음은 단순한 문제 해결 도구를 넘어 생명이 된다.
- 죽음의 위기에서 건져내었기 때문이다.
- 그러니 누가 시키지 않아도, 생존 욕구에 따라,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복음을 믿으려 한다.
-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전부를 예수님께 내건다.
- 그렇게 복음은 막막하고 암담한 마음에 한 줄기 빛이 된다.
그러나 만약 우리에게 많은 문제가 있지만,
- 최선을 다해 노력하면 자기 힘으로 혹은 주변의 도움으로 해결할 수 있고,
- 문제를 당장 해결하지 않는다고 해도 힙겹지만 어느 정도 살아갈 수 있는 상태라면,
- 복음이 아무리 모든 것을 해결해주는 만능 아이템이라도 해도,
- 그다지 필요 없다.
- 복음이 문제 해결 도구 혹은 생명으로 역할을 할 기회 자체가 없다.
- 복음에 능력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복음이 능력을 보여줄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 단지 보험처럼 미래에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길 것을 대비해서,
- 부담되지 않는 일정 정도의 가치를 지불하며 적당한 관계를 유지할 뿐이다.
그런데 그 복음이 우리에게 전부를 포기하라고 말한다면?
‘멸망 없는 회복’이 아니라 ‘멸망 이후 회복’을 말한다면?
- 전자와 후자가 명확하게 갈린다.
전자는 어차피 가진 것 없고, 잃을 것 없고, 이미 다 잃었기에,
- 자기 전부를 포기하는 것에 어려움이 없다.
- 자기를 포기하지 않고 현 상태 그대로 산다고 해도, 이미 죽은 목숨이기 때문이다.
-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어차피 똑같기 때문에,
- 쉽게 자기 전부를 포기하고 회복을 소망한다.
그래서 복음서에서 우물가 여인, 수로보니게 여인, 혈루병 여인, 거지 바디매오 등이 쉽게 예수님을 믿을 수 있었다.
- 이들이 특별하게 다른 사람은 보지 못한 엄청난 은혜와 기적을 경험했기 때문이 아니다.
- 예수님은 제자를 제외하고,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것을 말씀하셨고, 똑같은 기적을 보여주셨다.
차이는 이들에게 포기할 것은 적고, 회복될 것은 많았기 때문이다.
- 투자 대비 수익이 컸고, 리스크가 적은 투자였기 때문이다.
- 다른 말로, 가진 것이 적고, 마음이 가난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복음을 기쁜 소식으로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이유이다.
반면 후자는 자기 전부를 포기하기가 어렵다.
-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로, 애초부터 굳이 예수님께 부탁해서 해결해야 할 문제 자체가 없다.
- 물론 문제가 많지만, 스스로 혹은 주변의 도움으로 해결할 수 있거나,
- 해결하지 않아도 감당할 수 있는 문제뿐이다.
- 반드시 예수님을 통해서만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없다.
- 문제가 없으니, 예수님께 의지할 필요가 없고,
- 예수님께 의지할 필요가 없는데, 왜 자기 전부를 포기하겠는가.
둘째로, 보험처럼 예상치 못한 사고를 대비하는 것에 자기 전부를 희생하는 것은 손해이다.
- 지금 당장은 문제가 없다고 해도, 앞으로 있을 문제를 대비하는 것이 필요할 수 있다.
- 그래서 보험료 내듯 일정 정도의 희생은 감수할 수 있다.
- 하지만 있지도 않은 문제에 자기 전부를 포기하는 것은 어리석은 선택이다.
그래서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믿을 수 없었다.
- 이들이 다른 사람보다 특별히 어리석고 특별히 죄인이기 때문이 아니다.
- 모든 사람은 전부 다 똑같은 죄인이다.
- 살인자, 강간범, 사기꾼, 마약 중독자, 나, 너, 우리 전부 아무런 차이 없이 똑같은 죄인이다.
- 지옥의 땔감으로 영원토록 불타는 고통에 절규해야만 하는 죄인이다.
차이는 이들에게 포기할 것은 많고, 필요한 것은 적었기 때문이다.
- 투자 대비 수익이 적었고, 리스크가 큰 투자였기 때문이다.
- 다른 말로, 가진 것은 많고, 마음이 풍요로웠기 때문이다.
이것이 복음을 기쁜 소식으로 들을 수 없는 유일한 이유이다.
이스라엘도 같은 상태였다.
이스라엘은 왕도 있고, 영토도 있고, 백성도 있었다.
- 물론 박쥐같이 이집트와 바벨론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며 조공하느라 백성은 아사 직전이고,
- 바벨론의 공격을 눈 앞에 두고 백척간두에 선 위기의 시점이다.
- 그래서 실제로 이스라엘이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집권자는 백성의 혈세로 호의호식하고 있었다.
- 권력으로 백성을 갈아 마시고 있었다.
- 권력이 주는 단물에 빠져 있었다.
그래서 가진 것이 많고, 마음이 풍요로웠다.
그런 이스라엘 집권자에게 예레미야는 ‘재수 없게’ 회복을 예언한 것이다.
- 정확하게 말해서, ‘멸망 이후 회복’이다.
- 4~7절에서는 곧 있을 환난의 때를 예고한다.
[렘 30:7] 슬프다, 그 날이여!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무서운 날이다. 야곱이 당하는 환난의 때이다. 그러나 야곱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 그러나 8~11절에서는 환난 이후에 있을 그날, 즉 회복의 날을 예고한다.
그런데 예레미야가 예고한 회복이 아주 찝찝하다.
이스라엘이 기대한 회복은 이런 것이다.
- 당장 백성이 아사 직전이니, 맛나처럼 하늘에서 곡식을 내려주시기를.
- 당장 바벨론이 공격하기 일보 직전이니, 바벨론 군대를 막을 군대를 보내주시기를.
- 게다가 지금 먹고 있는 음식, 지금 입고 있는 옷, 지금 머무는 왕궁보다 더 좋은 음식, 더 좋은 옷, 더 좋은 왕궁 주시기를.
즉, 이스라엘이 기대한 것은 ‘멸망 없는 회복’이다.
- 근원적인 문제 해결 없이 겉으로 드러난 문제만 일시적으로 해결되는 것이다.
- 백성에게 식량이 없는 것, 바벨론 공격에 방어할 군대가 없는 것 모두 집권층이 국가 유지가 아닌 권력 유지라는 하찮은 욕망 때문에 생긴 것인데 말이다.
- 풍요로운 삶 포기하여 남은 식량을 백성과 군대에 나눠주면, 충분히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인데 말이다.
- 그렇게 권력을 포기하면 국가를 지킬 수 있는데 말이다.
그러나 그들은 풍요로운 삶을 전혀 포기하지 않으면서,
- 하나님이 삶의 문제를 해결해주시기만 바랐다.
- 모든 문제의 근원적인 원인인 하찮은 욕망을 포기하지 않고,
- 욕망을 전부 채울 수 있기만을 기대했다.
이는 날강도 심보이다.
- 아무런 희생 없이 자기 욕망만 채우려 한다는 면에서 말이다.
- 이런 기도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 이런 기도에 하나님은 ‘멸망 이후 회복’으로 응답하신다.
이것이 ‘멸망 없는 회복’을 바라는 이스라엘의 내면이다.
예레미야의 회복 예언을 구체적으로 보면 잔인하다.
8~9절은 이방 사람조차 다윗의 자손을 자기 왕으로 섬길 것이라고 말한다.
[렘 30:9] 그러면 그들이 나 주를 자기들의 하나님으로 섬기며, 내가 그들에게 일으켜 줄 다윗의 자손을 자기들의 왕으로 섬길 것이다.
- 이는 단지 이스라엘이 포로에서 벗어나 주권을 회복하는 것을 넘어,
- 회복된 주권이 온 세상까지 확대된다는 뜻이다.
- 현재 영토조차 잃은 최약체 국가가 모든 국가를 지배하는 최강 국가로 회복될 것을 예언한다.
그런데 회복 이전에 이방 사람에게 멍에와 사슬에 묶여 종으로 전락하는 상태를 전제한다.
[렘 30:8] 나 만군의 주가 하는 말이다. 그 날이 오면, 내가 그의 목에서 멍에를 꺾고, 그의 사슬을 끊어서, 이방 사람들이 그를 더 이상 종으로 부리지 못하게 하겠다.
- 물론 표현은 반대이다.
- 멍에, 사슬, 종에서 해방된다고 말한다.
- 하지만 이는 해방 이전에 멍에, 사슬, 종에 종속됨을 전제한다.
즉, 회복 예언은 이스라엘의 완전한 멸망을 전제한다.
10~11절은 야곱, 곧 이스라엘에게 평안, 안정, 위협 없음이 임할 것이라며, 구원을 선포한다.
[렘 30:10] … 야곱이 고향으로 돌아와서 평안하고 안정되게 살 것이며, 아무런 위협도 받지 않고 살 것이다.
[렘 30:11] 내가 너에게로 가서 너를 구원하겠다. 나 주의 말이다. …
- 나는 개인적으로 11절의 약속이 좋다.
- 11절을 조금 더 원래 의미를 살려 번역한 NRSV를 보면, 다음과 같다.
[렘 30:11, NRSV] For I am with you, says the LORD, to save you. …
- 한글 번역은 ‘구원’에 초점을 두지만, 원어는 ‘함께하심’에 초점을 둔다.
이렇게 하나님은 함께하심을 약속하시며, 그것의 부산물로 평안, 안정, 위협 없음을 말씀하신다.
그런데 함께하심 이전에 무엇이 있냐?
- 두려움, 무서움, 먼 곳으로 포로행, 여러 나라로 흩어짐이 있다.
- 그 상태를 전제로, 두려움 없음, 무서움 없음, 먼 곳의 포로에서 돌아옴, 흩어진 나라에서 돌아옴을 예언하신다.
[렘 30:10] 나의 종 야곱아, 너는 두려워하지 말아라. 이스라엘아, 너는 무서워하지 말아라. 나 주의 말이다. 보아라, 내가 너를 먼 곳에서 구원하여 데려오고, 포로로 잡혀 있는 땅에서 너의 자손을 구원할 것이니, 야곱이 고향으로 돌아와서 평안하고 안정되게 살 것이며, 아무런 위협도 받지 않고 살 것이다.
[렘 30:11] … 내가 너를 쫓아 여러 나라로 흩어 버렸지만, 이제는 내가 그 모든 나라를 멸망시키겠다. …
따라서 함께하심은 완전히 버려져서 무섭고 두려운 공포를 전제한다.
이러한 회복 예언을 들은 이스라엘이 과연 기뻐했겠는가?
예언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를 느꼈겠는가?
- 아니면 하나님의 심판과 버려짐을 느꼈겠는가?
안타깝게도 이스라엘은 심판과 버려짐을 느꼈다.
- 이를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증거는 예언 후 예레미야가 머문 곳이다.
- 예레미야는 근위대 뜰에 갇힌다.
[렘 32:2] … 예언자 예레미야는 유다 왕궁의 근위대 뜰 안에 갇혀 있었다.
이스라엘은 예레미야의 예언에서 사랑이 아닌 심판을, 보호가 아닌 버려짐을 느꼈다.
그렇게 느낀 이유를 여러 가지 관점에서 말할 수 있는데, 이번에는 경제 논리로 말해보겠다.
- 이스라엘은 예레미야의 예언이 자신에게 ‘손해’라고 판단했다.
- 즉, 투입보다 이익이 적다고 판단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입장에서 투입과 이익이 무엇이었냐?
- 이스라엘이 원했던 이익은 ‘권력 유지’였다.
- 풀어 말해서, 현재 집권자가 이스라엘에서 권력을 가지고 있는데,
- 이 권력이 두 가지 원인 때문에 위협받고 있다.
- 첫째로, 당장 백성에게 식량이 없어서, 집권자에 대한 민심이 급락했다.
- 둘째로, 바벨론이 쳐들어왔는데, 대응할 여력이 없다.
-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원하는 것은 백성이 먹을 ‘식량’과 바벨론에 대항할 ‘군대’를 얻어서,
- 결국 권력을 지키는 것이다.
그런데 예레미야의 예언이 투입하라고 요구한 것은 무엇이었냐?
- 바로 ‘권력 그 자체’이다.
- 권력을 완전히 포기하라는 것이다.
- 그래서 권력을 잃고 바벨론의 포로가 되라는 것이다.
정리하면,
- 이스라엘이 원했던 이익은 국가를 유지할 수 있는 식량과 군대인데,
- 식량과 군대를 얻기 위해 투입해야 할 것은 국가 전체를 다스릴 권력이다.
- 그러니까 하나님은 고작 식량과 군대를 주는 대가로 국가 권력 전체를 요구하신 것이다.
그러니 누가 이 거래에 응하겠는가.
- 명백하게 손해 보는 장사이다.
그런 점에서 예언을 거부한 이스라엘의 판단은 정당하고,
- 이러한 요구를 하신 하나님은 부당하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이런 부당한 거래를 제안하셨을까?
- 하나님이 부당한 분이시기 때문인가?
- 아니면 하나님은 합당한 거래를 제안하셨는데, 이스라엘이 왜곡해서 부당하게 느낀 것인가?
하나님 입장에서 이 거래를 재해석해보자.
-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고자 한 이익은 ‘세상 전부를 다스리는 권력’이다.
- 그래서 하나님은 이방 사람이 다윗의 자손을 자기들의 왕으로 섬길 것이라고 예언하셨다.
[렘 30:9] 그러면 그들이 나 주를 자기들의 하나님으로 섬기며, 내가 그들에게 일으켜 줄 다윗의 자손을 자기들의 왕으로 섬길 것이다.
- 이는 이스라엘이 기대했던 이스라엘 내부에 제한된 권력과 비교할 수 없이 크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투입하라고 요구한 것은 무엇이었냐?
- 없다.
- 정확하게 말하면, 물질적인 측면에서는 아무것도 없고,
- 정신적인 측면에서 하나님을 향한 진정성 있는 마음, 즉 믿음이 전부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반문할 수 있다.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멸망하여 바벨론의 포로가 되는 것을 요구하셨으니,
- 하나님은 이스라엘 국가의 권력 전부를 요구하신 것 아니냐고 물을 수 있다.
그런데 현재 시점에서 정말 이스라엘이 자기 국가를 다스릴 권력을 가지고 있었는가?
- 백성이 생존할 수 있는 식량도 없고,
- 국가를 지킬 수 있는 군대도 없는 국가 권력을 과연 권력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 현재 이스라엘의 상태는 속 빈 강정이었다.
- 집권층의 하찮은 욕망 때문에 국가 유지조차 불가능한 상태였다.
이스라엘은 국가를 다스릴 권력을 이미 이전에 잃었다.
- 이미 권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 이스라엘은 자신의 권력을 이집트, 앗수르, 바벨론에 한참 전에 이양했다.
- 이스라엘 집권자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일은 백성을 착취해서 실컷 배불러 터지도록 먹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 관점에서 바벨론 포로는 이스라엘이 투입해서 희생해야 할 것이 아니라,
- 이전에 자신이 싸놓은 똥을 이제서야 뒷수습하는 것뿐이다.
- 이전에 대출받아 흥청망청 다 써놓고, 대출을 갚지 못해서 부도난 것뿐이다.
- 부도나서 회사 소유가 넘어간 것을 어떻게 투입이고 희생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런 점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투입하라고 요구하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어차피 이스라엘은 가진 것이 없다.
- 그러니 투입할 수 있는 것도 없다.
오로지 받을 것만 있다.
- 그것은 이스라엘이 그토록 원했던 권력보다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큰 온 세상 통치 권력이다.
이것이 과연 부당한 거래인가?
- 하나님이 과연 부당하신 분인가?
- 하나님은 믿음만 받으면, 세상 권력 전부를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반면에 이스라엘은 자신이 착취해서 이미 거덜 난 ‘부도 수표’를 내밀며,
- 하나님께 식량과 군대를 요구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중에 누가 더 부당한가.
그런데 만약 하나님이 식량과 군대를 주셨다면, 이스라엘 집권자는 어떻게 했겠는가?
- 이전에도 항상 그랬던 것처럼 식량과 군대를 국가 유지에 쓰지 않고,
- 자신들의 하찮은 욕망 채우는 데 허비했을 것이다.
- 식량과 군대 꾸릴 자원으로 풍요로운 삶을 사는 것에 오용했을 것이다.
- 지금 식량과 군대가 부족한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인 것처럼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에게는 ‘멸망 이후 회복’ 외에는 다른 길이 없는 것이다.
우리도 하나님을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없으면서 많은 것을 요구하신다고 생각한다.
- 하나님을 통해 얻을 이익은 죽은 후 얻게 될 영생이다.
- 불확실하고, 불명확하고, 비현실적이고, 추상적이다.
- 그러나 하나님께 투입해야 할 것은 돈, 명예, 직장, 가족, 안정, 인정 등 인생 전부이다.
- 전부 손에 잡히는 확실한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 손에 쥐고 있는 인생을 보지도, 만지지도, 느끼지도 못하는 영생과 어떻게 바꿀 수 있냐고 말이다.
- 그런 부당한 거래를 요구하시는 하나님은 부당하고,
- 부당한 거래에 응하지 않았다고 지옥에 보내시는 하나님은 결코 하나님일 수 없다고 말이다.
나도 이렇게 고백하는 사람의 심정에 공감한다.
- 왜 이런 마음을 갖는지 너무 잘 안다.
- 나에게 독심술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나도 똑같이 느끼기 때문이다.
- 때로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 없이 받기만 하시며 부당한 거래를 하시는 분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부당하다고 느껴지는 이유는 딱 하나이다.
- 내가 내 인생을 가치 있다고 착각하고,
- 가치 있는 내 인생을 내가 소유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 실상은 내 인생에 몇 푼 되지도 않는 돈 말고는 아무것도 없으며,
- 나는 평생 한 번도 내 인생을 주체적, 독립적, 능동적으로, 자기답게 살아본 적도 없는데 말이다.
- 내 인생에 가치도 없으며, 가치 없는 인생조차 소유해보지도 못했는데 말이다.
이 착각이 하나님을 부당하게 여기도록 하며,
- 이 착각에서 벗어나 실상을 깨달을 때, 하나님의 부당한 거래가 은혜로운 선물로 느껴지는 것이다.
이스라엘과 예레미야의 차이도 마찬가지이다.
-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예언을 듣고 반발했다.
- 하나님의 예언을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 왜냐하면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권력을 빼앗겠다고 하시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예언에서 사랑을 느꼈다.
-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이미 멸망한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 전혀 가치 없는 이스라엘을 결국 회복시켜서, 온 세상을 다스리는 국가로 재창조하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이 회복 예언이 전하는 중심 메시지이다.
결론 - 우리가 하나님께 헌신하지 못하는 진짜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를 이렇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 하나님이 주시는 이익보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투입이 많은 것 같다고 말한다.
- 그래서 만약 하나님이 주시는 이익, 즉 구원의 은혜, 부활의 영광, 천국이 얼마나 가치 있고 귀한지 알면,
-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투입이 아무리 많아 보여도 기꺼이 하나님께 헌신할 수 있다고 말한다.
- 자신이 인생 전체를 하나님께 헌신하지 못하는 이유는 아직 천국의 가치를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기에,
- 천국의 가치를 알기만 하면, 기꺼이 인생 전체를 포기하고 하나님을 따를 수 있다고 말한다.
확신하건대, 이러한 물음에 대한 성경의 대답은 단호하다.
- 천국의 가치를 알고자 하는 태도로는 결코 천국에 갈 수 없다.
- 천국은 오로지 마음이 가난한 자의 것이다.
- 천국은 천국의 가치를 측량하는 자의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치 없음을 인정하는 자의 것이다.
- 천국은 천국의 가치를 알아서 천국에 가고 싶어 하는 사람이 가는 곳이 아니라,
- 자신의 실체가 너무 더러워서, 천국 외에는 갈 수 있는 것이 아무 데도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만 가는 곳이다.
‘부자 청년 이야기’도 이를 증명한다.
- 부자 청년은 천국의 가치를 알았다.
-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 무릎을 꿇고 영생을 구했다.
[막 10:17] 예수께서 길을 떠나시는데, 한 사람이 달려와서,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그에게 물었다. “선하신 선생님, 내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 이는 예수님조차 사랑스럽게 여기실 만큼 진정성 있는 태도였다.
[막 10:21] 예수께서 그를 눈여겨보시고, 사랑스럽게 여기셨다. 그리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에게는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러나 부자 청년은 결국 예수님을 떠난다.
- 전 재산을 포기하라는 예수님의 부당한 요구 때문이다.
예수님이 부당한 요구를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 돈이 필요해서?
- 이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아니다.
- 부자 청년이 천국을 얼마나 가치 있게 보는지 진정성 있는 마음을 확인하기 위해서?
- 이것도 아니다.
- 왜냐하면 이미 예수님은 부자 청년의 마음에 감동하셨다.
결국 이유는 하나이다.
- 부자 청년이 자신과 자신의 소유가 오물이라는 것을 아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이다.
- 즉, 마음이 가난한 자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이다.
- 자신의 전 재산이 가치 없다는 것을 넘어서, 너무 더럽고 추해서 자신을 파괴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이다.
왜냐하면 천국은 천국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오물이라는 것을 아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가는 곳이기 때문이다.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거부한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 예수님이 주시는 이익이 얼마나 큰지는 명확하게 알았다.
- 그러나 자신이 투입해야 할 가치가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 몰랐다.
- 자신의 인생을 여전히 가치 있다고 여겼다.
- 마음이 풍요로웠다.
부자 청년은 겉으로는 예수님이 전 재산을 요구하셨지만, 실상은 예수님이 요구하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 예수님은 공짜로 천국을 주시려고 했지만,
- 부자 청년은 예수님이 요구하시는 투입이 너무 크다고 착각했다.
-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에 많은 희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 그 희생을 감당할 수 없어서 예수님을 포기했다.
그러니까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거부한 이유도 천국의 가치를 몰라서가 아니라, 자신을 가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우리는 천국의 가치를 이미 안다.
- 교회에서 배우기도 했지만, 사람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 천국은 고통이 없는 곳이고, 한없이 충만한 곳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러니 천국의 가치를 알고 싶다는 마음은 이제 그만 버리자.
- 그 마음은 천국을 가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우리의 실상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인생 전부를 투입하라고 요구하신다.
- 그러지 않으면 천국이라는 이익을 얻을 수 없다고 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천국 가기를 주저한다.
- 과연 천국이 인생 전체를 포기하고 갈만한 곳인지 의심한다.
- 과연 천국에 그만한 가치가 있는지 의심한다.
그런데 그 의심은 천국의 가치를 아는 것으로 해소되지 않는다.
- 아무리 천국의 가치가 크다는 것을 알아도, 사람은 자기 인생의 가치를 그보다 더 크게 여긴다.
- 따라서 오직 우리가 투입해야 할 인생이 얼마나 가치 없는지 깨달을 때 의심은 해소된다.
- 그래서 천국을 얻기 위해 내가 투입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 천국에 갈 수 있다.
이전에는 천국이 인생이라는 엄청난 가치를 투입해서 내가 구입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 막상 알고 보니 내가 투입한 것은 오물뿐이었고, 천국은 공짜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 천국이 거래로 구입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선물이라는 것을 알 때만,
- 천국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다.
반면에 아무리 인생을 투입하여 천국 티켓을 얻었다고 하더라고,
- 만약 자기 인생을 가치 있다고 여기는 사람은 천국에 가서조차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는다.
- 자신은 합당한 가치를 지불하여 천국에 왔고,
- 마땅히 와야 할 곳에 왔다고 여기며, 하나님을 업신여긴다.
- 천국에 가서도 왕 노릇하려 든다.
그렇기 때문에 천국의 가치를 아는 것이 소용없는 것이다.
- 자기 인생이 오물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만 천국을 은혜로 받아들이고,
-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다.
- 그런 사람만 있는 곳이 천국이다.
- 그렇지 않은 사람은 천국에 없다.
성경이 전하는 메시지는 명료하다.
- 첫째는, 하나님만이 전부이고 유일한 가치이다.
- 첫째는, 하나님 외의 모든 것, 특히 자기 자신은 역겹고 더러운 오물이다.
- 이 둘은 완벽하게 하나이다.
그런데 우리 중 누구도 하나님이 유일한 가치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 우리가 모르는 것은 자기 자신이 얼마나 역겨운지이다.
- 그런데 자기 인생이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은 결국 하나님이 유일한 가치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 즉, 자신이 역겨운지 아는 사람만 하나님이 유일한 가치라는 것을 안다.
따라서 자신의 역겨움을 알아야만,
- 인생 전체를 투입하라는 하나님의 요구를 폭력적이고 부당한 거래가 아니라,
- 사랑의 노래로 들을 것이다.
- 인생 전체를 투입하라는 하나님의 요구가 공짜로 천국 보내주시겠다는 하나님 사랑의 선물로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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