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양교회 팟캐스트 양따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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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양을 따르는 어린양
예배 대신 예수님, 설교 대신 성경, 건물 대신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미양교회가 만드는 방송입니다.토끼와 개구리가 진솔하게 신앙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어린양과 같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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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전체에서 흐르는 기류는 ‘하나님의 진노’이다.
[렘 30:23~24] 주님의 진노가 폭풍처럼 터져 나온다. 휘몰아치는 바람처럼 악인들의 머리를 후려친다. (24) 주님께서는 마음 속에서 뜻하신 바를 시행하고 이루실 때까지, 그 맹렬한 진노를 그치지 않으신다. 마지막 날에야 너희가 이것을 깨달을 것이다.
그리고 진노의 원인은 ‘이스라엘의 죄악과 허물’이다.
[렘 30:14] 그래서 너를 사랑하던 사람들은 모두 너를 잊고, 더 이상 너를 찾아오지 않는다. 네 죄악이 크고 허물이 많기 때문에, 내가 원수를 치듯이 너를 치고, 잔악한 자를 징계하듯이 너를 징계하였다.
[렘 30:15] 그런데 어찌하여 너는 상처를 입었다고 부르짖고, 고통이 가시지 않는다고 호소하느냐? 네 죄악이 크고 허물이 많아서, 내가 이런 벌을 너에게 내린 것이다.
게다가 하나님을 더욱 진노하게 한 것은 벌을 받는 이스라엘의 태도이다.
[렘 30:15] 그런데 어찌하여 너는 상처를 입었다고 부르짖고, 고통이 가시지 않는다고 호소하느냐? 네 죄악이 크고 허물이 많아서, 내가 이런 벌을 너에게 내린 것이다.
- 죄악 때문에 징벌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 죄악에 대해서는 회개하지 않으면서, 징벌받아 아프다는 투정만 부리고 있다.
- 그런데 투정은 자신에게 내려진 징벌을 부정하는 것이며,
- 징벌을 내리신 하나님까지 비난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죄악을 범한 것뿐만 아니라,
- 자신이 죄악을 범했다는 것조차 부정한 채 징벌을 내리신 하나님까지 비난함으로 더 큰 죄악을 범하고 있다.
이것이 하나님이 진노하신 결정적인 원인이다.
- 그러한 이스라엘의 태도 때문에 하나님은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바람처럼’, ‘맹렬한 진노’를 마구 내뿜으신다.
[렘 30:23~24] 주님의 진노가 폭풍처럼 터져 나온다. 휘몰아치는 바람처럼 악인들의 머리를 후려친다. (24) 주님께서는 마음 속에서 뜻하신 바를 시행하고 이루실 때까지, 그 맹렬한 진노를 그치지 않으신다. 마지막 날에야 너희가 이것을 깨달을 것이다.
그런데 곳곳에 있는 회복 예언을 두고 왜 ‘하나님의 진노’를 중심으로 두냐?
- 분명히 글자 내용만 읽으면, 회복 예언 비중이 더 크다.
- 그래서 회복을 중심에 두고, 회복을 설명하기 위한 보조 수단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글자 내용 이면에 있는 ‘구조’는 그렇지 않다.
- 구조는 ‘하나님의 진노’를 중심에 둔다.
- 그 구절이 바로 30:23-24이다.
30~31장은 하나의 단락으로 교차대구 구조를 갖는다.
- a - b - c - b’ - a’ 구조는 c를 중심으로 하고,
- c 역시 교차대구 구조로, 하나님의 진노를 표출한 심판 예언이 중심에 있다.
- 그것이 바로 30:23-24이다.
이러한 구조 때문에 회복과 심판 중에 심판에 무게 중심이 있다.
- 하나님의 진노로 인한 심판이라는 토대 위에 회복이 얹어져 있다.
- 즉, 이 역시 ‘재앙 이후 번영’, ‘죽음 이후 부활’, ‘심판 이후 회복’을 전한다.
- 그것이 구조와 내용이 결합하여 전하는 메시지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중심에 두느냐가 왜 중요한가?
하나님의 진노를 중심에 두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무엇이 다른가?
- 회복 예언의 의미가 완전히 달라진다.
- 회복 예언의 의미를 바르게 알기 위해 하나님의 진노를 반드시 알아야 한다.
예를 들어, 배우자에게 ‘사랑해. 난 당신과 평생 함께할거야.’라는 사랑 고백을 했다고 해보자.
- 그런데 이 말은 어떤 상황에서 했느냐에 따라 의미가 확연히 달라진다.
- 만약 이 말을 결혼기념일에 함께 레스토랑에 앉아 선물을 주고받으며 한 말이라면,
- 분위기는 로맨틱하고 아름답지만, 사실상 평범하기 그지없는 식상한 말이다.
- 이 분위기라면 누구를 데려다가 앉혀놔도 나올법한 말이다.
- 그래서 진정성 없이도, 분위기에 취해서 할 수 있는 말이다.
- 따라서 그 말의 진정성을 전혀 확인할 수 없다.
그런데 만약 같은 말을 배우자가 외도한 후에 했다면, 완전히 다른 의미가 된다.
- 물론 분위기는 차갑고 삭막하지만, 실상은 애절하고 처절한 사랑 고백이다.
- 누구도 쉽게 할 수 없으며, 진정성이 담겨있을 가능성이 높은 말이다.
- 가장 사랑할 수 없는 상황에 나온 사랑 고백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전자의 사랑 고백은 취약하다.
- 마치 온실 속 화초 같다.
- 조금이라도 강한 빛이나 바람이 분다면, 사랑이 유지된다고 보장할 수 없다.
- 작은 위협에도 사랑이 끊어진다고 단정 짓는 것이 아니라,
- 한 번도 위협을 받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사랑의 견고함이 확인되기 이전 상태라는 것이다.
- 그래서 이런 사랑은 진정성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
반면에 후자의 사랑 고백은 단단하다.
- 사막에서도 굳건한 들풀 같다.
- 외도라는 극단적인 위협에도 사랑은 지속되었다.
- 물론 이들에게 우리가 꿈꾸는 달달한 시간이 없을 수는 있다.
- 하지만 많은 위협을 겪어낸 후에도 사랑으로 결합한 관계는 흔들리지 않는다.
- 이런 사랑 고백을 진정성 있다고 판단할 수 있다.
참고로, 외도를 미화하려는 것이 아니다.
- 나는 외도를 용서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까지 본다.
- 외도는 단순히 나쁜 행동을 넘어서, 배우자의 존재를 무시하고 부정한 나쁜 마음까지 짙게 깔려 있기 때문이다.
- 배우자를 무시하고 부정하는 마음은 쉽게 생기기도 어렵고, 쉽게 없어지지도 않는다.
- 그렇게 사람을 무시하고 부정하는 사람은 관계를 끊는 것이 더 낫다.
- 그래서 부정한 배우자가 사과하더라도, 진정성을 확인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이 선행되어야 한다.
만약 용서를 반드시 하고 싶다면,
- 먼저 이혼을 한 후, 수년 동안 일관되게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자신을 존중하는 것을 오랫동안 확인한 후에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고 너무 쉽게 용서해버리면,
- 용서한 사람도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기 전에 상처 준 사람을 계속 마주하여 상처가 덧날 수 있고,
- 용서받은 사람도 자기 잘못을 가볍게 생각하여 제대로 뉘우치기 어렵다.
그러면 성급한 용서 때문에 관계를 회복할 기회를 오히려 더욱 잃는다.
- 용서한 사람은 계속해서 용서하지 못한 마음을 드러낼 것이다.
- 그래서 용서받은 사람을 괴롭힐 것이다.
- 또한 용서받은 사람은 자신의 문제를 가볍게 여길 것이다.
- 그래서 용서한 사람을 괴롭힐 것이다.
그렇게 결국 두 사람의 관계는 회복될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된다.
- 따라서 성급한 용서는 관계를 악화시킨다.
- 함께 살아도, 남남보다 못하게 살 것이다.
그런 점에서 관계 회복의 과정은 느리게, 신중하게, 세심하게 가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진노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시는 이유이다.
결국 이스라엘을 진심으로 용서하고, 온전히 사랑하시려는 것이다.
- 그리고 이스라엘이 죄를 깊이 깨닫고, 진정성 있게 변할 기회를 주시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진노를 쏟아부으시며, 이스라엘을 집요하게 정죄하시는 것이다.
- 이스라엘 죄의 원인을 뿌리까지 파내시는 것이다.
- 그래서 죄의 깊이가 너무 깊어서, 이스라엘이라는 나무 자체를 완전히 뽑지 않고는 절대로 회복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것이다.
그래야만 더 이상 이스라엘이 죄의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고,
- 그래야만 더 이상 외도를 하지 않을 것이며,
- 그래야만 소중한 가정을 파괴하지 않을 것이고,
- 그래야만 자신이 사랑하는 하나님께 상처를 드리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할 때만 이스라엘이 만족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렇게 죄에서 벗어나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며 사는 것이 이스라엘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하나님 자신만을 위해 마음 내키시는 대로 마구 진노하시는 것이 아니라,
- 계획적이고 철저히 계산된 결과에 따라 진노하시는 것이다.
- 진노만이 이스라엘의 자발적인 변화를 끌어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위해 하나님은 진노를 드러내시는 것이다.
- 이스라엘을 근원부터 회복시키기 위해서 말이다.
- 결국 하나님의 진노에도 이스라엘을 회복시키려는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있다.
- 그런 점에서 회복 예언보다 오히려 심판 예언에 하나님의 사랑이 더욱 애절하게 담겨있다.
그 관점에서 회복 예언을 봐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심판 없는 회복은 천박하게 변질된다.
- 심판이 전제되지 않은 상태, 즉 자신이 ‘절대 오물’임을 인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회복은,
- 자신의 가치를 강화하는 수단으로 전락한다.
- 자신이 ‘절대 오물’이며, 동시에 하나님이 ‘절대 가치’라는 것을 부정하는 수단으로 변질된다.
- 심판, 멸망, 죽음, 재앙을 통해 자신이 ‘절대 오물’이라는 것을 깨달은 사람만이 회복을,
- ‘자기 가치 강화 수단’이 아닌 ‘하나님 절대 가치 인정 수단’으로 삼을 수 있다.
예를 들어,
- 풍요를 위해 착취와 우상 숭배를 하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풍요를 주시면?
- 이미 풍요를 가졌으니, 착취와 우상 숭배를 멈추고 하나님께 집중할까?
- 오히려 반대로 이스라엘은 더 큰 풍요를 위해 착취와 우상 숭배에 더 집착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정과 안정을 위해 세상 가치를 추구하고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인정과 안정을 주시면?
- 얻은 인정과 안정에 만족하고, 하나님께 집중할까?
- 오히려 얻은 인정과 안정을 지키려고, 세상 가치에 더 집착할 것이다.
마약 중독으로 마약을 간절히 원하는 사람에게 마약을 주면?
- 받은 마약에 만족하여, 마약 중독에서 벗어날까?
- 절대 아니다.
이렇게 반문할 수 있다.
- 만약 마약에 중독된 사람을 치료하기 위해 마약을 주지 않았는데,
- 마약 없는 고통이 너무 커서 감당하지 못하고 죽었다고 한다면,
- 마약을 주지 않은 것이 잘못 아니냐고 물을 수 있다.
그러나 죽음의 원인은 치료한 사람에게 있는가, 마약에 있는가?
- 그 정도 심각한 중독에 빠진 사람이라면, 마약을 먹어서 고통이 완화되었다고 해도,
- 결국 마약 때문에 죽을 것이다.
- 오히려 죽음을 감수하고 마약을 주지 않는 것이 희박하나마 회복 가능성이 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에게 풍요가 사라지면, 우리에게 인정과 안정이 사라지면, 고통스럽다.
- 감당하지 못할 만큼 클 수도 있다.
- 그러나 고통의 원인은 하나님이 아니다.
- 오히려 풍요, 인정과 안정을 집착하게 만든 세상이다.
게다가 하나님은 약속하시길,
- 우리에게 인정과 안정을 제거해도 우리가 감당할 수 있게 하겠다고 하셨다.
- 마약 중독자가 마약 없는 고통 때문에 절규하며 죽도록 그냥 두시지 않는다.
- 하나님은 생명의 주관자이시다.
- 우리가 인정과 안정이 제거된 상태에서도 살아갈 수 있게 하신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정과 안정, 즉 세상 가치 추구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다.
- 그것만이 회복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렇기 때문에 회복의 참뜻을 알기 위한 필수 조건이 심판, 멸망, 죽음, 재앙이다.
- 그것을 통해 자신을 ‘절대 오물’로 인정하는 것이다.
- 그래서 자신이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 중에 정말 가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본능을 거슬러서’ 가치 있는 것을 하나도 구하지 않는 것이며,
- 더 적극적으로,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을 ‘억지로’ 버리는 선택을 하는 것이다.
- 가치 없다고 느끼기 때문이 아니라, 가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 마치 마약이 재미없다고 느끼기 때문이 아니라, 좋지 않다고 믿기 때문인 것처럼 말이다.
- 게다가 버리는 선택을 한 것조차 역시 ‘절대 오물’이라고 자신에게 세뇌하는 것이다.
이렇게 멸망의 구렁텅이 속으로 자신을 내던져 버리는 것이다.
- 예수님이 십자가 죽음으로 자신을 내던지신 것처럼 말이다.
- 자기 목숨조차 ‘절대 오물’로 여겨 오물통에 던져 넣듯이 말이다.
한마디로, 자기 인생과 목숨을 포함하여 세상 가치 전부를 ‘절대 오물’로 인정하는 것이다.
- 그래야 회복의 참뜻을 이해할 수 있는 준비가 된다.
본문 설명
16~17절은 회복을 두 가지로 나눠서 말한다.
- 16절에서 먼저 멸망 원인을 제거하신다.
- 즉, 이스라엘을 멸망시켰던 원수를 제거하신다.
- 그렇게 회복될 수 있는 조건으로 만드신다.
- 그런 다음 17절에서 멸망한 상태를 고치고 치료하여 회복하신다.
- 그래서 실질적인 회복을 이루신다.
18~21절은 실질적으로 회복된 상태를 묘사한다.
- 18절에서는 ‘장막, 거처, 성읍, 궁궐 회복’으로 외형이 회복된다.
- 19절에서는 ‘감사의 노래, 기쁨의 목소리, 수가 번창, 영화 회복’으로 내부가 회복된다.
- 20절에서는 ‘자손 회복, 회중 굳건, 억압 제거’로 회복이 영원토록 보장된다.
- 21절에서는 결정적으로 ‘지도자, 통치자‘가 회복된다.
- 지도자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목숨 걸고 응답하는 자로 회복된다.
- 이는 특히 이스라엘의 멸망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거부하는 지도자 때문이었기에 더욱 의미 깊다.
그런데 이러한 회복은 단지 이스라엘 국가 독립과 번영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 국가 독립과 번영은 수단이다.
- 목적은 ‘관계 회복’이다.
그래서 30:22와 31:1에서 하나님은 ‘관계 회복’을 약속하신다.
[렘 30:22]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렘 31:1] 나 주의 말이다. 때가 오면, 나는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정죄하시며 착취와 우상 숭배를 지목하신 것도 행위 자체가 나쁘기 때문이 아니다.
- 그 행위 때문에 일어나는 ‘관계 파괴’ 때문이다.
- 하나님은 다른 어떤 이유도 아닌, 단지 ’관계 파괴‘ 때문에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고 멸망하신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회복하고자 하는 유일한 것 역시 ’관계‘이다.
- 하나님은 국가 독립과 번영에 아무런 관심이 없으시다.
- 얼마나 관심이 없으시냐면, 예수님이 오셔서 이스라엘과 인류의 구원을 선포하실 때조차 이스라엘은 로마 식민 지배 상태였다.
-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독립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으셨다.
- 오히려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을 원했다는 것 때문에 베드로는 정죄당한다.
따라서 꼭 기억해야 할 것은,
- 국가 독립과 번영을 통한 정체성 회복은 그 자체로 아무 의미 없다는 것이다.
- 오히려 정체성 회복에 가치가 부여할 경우, 베드로처럼 하나님께 정죄 받을 것이다.
- 정체성 회복에 가치를 둔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부인하고 떠날 것이다.
- 따라서 정체성 회복은 관계 회복의 수단이 될 때만 의미가 있다.
그런 점에서 정체성은 오로지 관계 속에서만 발견될 수 있는 것이다.
- 자기가 자기를 위해서 원하는 것을 한다고 정체성이 회복되는 것은 아니다.
이런 말을 강조해서 하는 이유는,
- 내가 신앙과 정체성을 연결하고 있는데,
- 정체성을 찾는 것이 역시 자기 가치 강화 수단으로 오해할까 봐 말하는 것이다.
오히려 정체성은 자기 욕망을 억누르고,
- 사랑하는 사람과 하나님의 필요에 순응할 때,
- 관계 회복을 통해 발견되는 것이다.
- 왜 자기 욕망 억눌러야 하냐면,
- 사람이 자기 욕망에 집중하면 자기 안에 갇히고,
- 자기 안에 갇힌 사람은 결국 자기의 참모습을 발견하기 더욱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베드로 역시 국가 독립과 번영 욕망을 억누르고,
- 양을 치라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순응하여,
- 하나님과 관계 회복을 했을 때, 자기 정체성을 인식했다.
- 예수님이 지어주신 베드로라는 이름처럼, 반석이 되어 교회의 토대를 이루는 정체성을 발현했다.
그런데 관계 회복 중심에는 23~24절인 하나님의 진노가 있다.
- 관계 회복 중심에 하나님의 진노가 있다는 메시지는 의미심장하다.
우리는 관계 회복의 중심에 ‘사랑’이 있다고 생각한다.
-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하고, 그 감동에 반응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때, 관계가 회복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본문은 그 생각을 거부한다.
- 관계 회복의 동기가 사랑이 아니라는 것이다.
- 오히려 진노라는 것이다.
왜 이렇게 말하냐?
- 이에 답하기 위해 관계 회복이 뭐냐는 질문부터 다시 해야 한다.
- 관계 회복은 단순히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하게 잘 지내는 것’이라는 말로 다 담을 수 없는 깊고 풍성한 의미가 있다.
그중에 내가 초점을 두려는 것은 관계 회복의 전제 조건이다.
- 관계 회복이란 충돌되는 두 인격이 갈등을 해결하는 과정이다.
- 그것을 위해 절대로 타협할 수 없는 자기의 가치관을 부정하고 파괴하여 제거하는 것이다.
- 단순히 가치관 충돌을 인내하거나, 외면하거나, 회피하는 것이 아니다.
- 그런 미봉책은 결코 관계 회복이 아니다.
따라서 관계 회복의 핵심은 ‘타협할 수 없는 자기 가치관을 타협’하는 것에 있다.
- 양보하고 타협하고 조정할 수 있는 가치관을 타협하는 것은 관계 회복이 아니다.
- 자신에게 너무 중요해서 어떤 상황과 조건에서도 조정할 수 없는 가치관,
- 그래서 그 가치관이 침해당할 때 실제로 죽을 것 같은 고통을 유발하는 가치관을
- 죽음을 감수하고 타협하는 것이 관계 회복이다.
- 이런 갈등이 가족과 부부 사이에 얼마나 많이 일어나는지 궁금하면 물어봐 달라.
- 가족이 의절하고 부부가 이혼하는 이유는 결국 이것 하나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타협할 수 없는 가치관을 타협’하기 위해서,
- 다르게 말해서, 죽음을 감수하고 자기 가치관을 부정하기 위해서 어떤 과정을 거치느냐?
- 단순하다.
- 죽음을 감수하고 자기 가치관을 부정하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이 올 때만 가능하다.
그게 어떤 상황이냐면?
- 두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다.
- 첫째는, 죽음을 감수하고 자기 가치관을 부정하여, 상대방을 포용하는 선택이다.
- 둘째는, 생명을 보전하기 위해 자기 가치관을 유지하는 대신 상대방을 배척하는 선택이다.
- 첫째 선택을 하는 사람은 ‘자기 죽음의 고통’과 ‘상대방 잃음의 고통’ 중에 후자가 큰 사람이다.
- 반면 둘째 선택을 하는 사람은 전자가 큰 사람이다.
따라서 갈등 상황에서 전자, 즉 자기 죽음을 선택한 사람은 ‘상대방 잃음의 고통’에 직면한 사람이다.
- 마음 안에서 이 갈등 때문에 실제로 상대방을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을 느끼고,
- 두려움으로 인한 고통이 너무 커서,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울 때만 자기 죽음을 선택한다.
- 자기 가치관을 포기하고 상대방을 선택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상대방 잃음의 고통’에 직면할 수 있냐?
- 방법은 딱 하나이다.
- 상대방이 자신과의 갈등 때문에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러워해서,
- 그 고통 때문에 상대방이 죽을 수도 있다는 인식, 그래서 상대방을 잃을 수도 있다는 인식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죽도록 괴로워하는 상대방의 고통을 보면서도,
- ‘상관없어. 내 고통이 더 중요해.’라고 생각하면 그 즉시 그 부부는 이혼한다.
- 서로가 상대방의 죽음보다 자기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을 확인한 순간, 서로의 신뢰는 깨져서 관계를 유지할 수 없게 된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상대방의 죽을듯한 고통은 어떻게 인식되는가?
- 상대방의 ‘죽을듯한 절규’를 통해서이다.
- 그것이 23~24절에서 내뱉으시는 하나님의 진노가 갖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진노를 풀어 말하면,
- 하나님은 애굽에 노예로 고통당하는 이스라엘을 해방시켜 주셨다.
- 그 당시 이스라엘에게는 소유도, 주권도, 영토도, 자유도 아무것도 없었다.
- 하나님은 그런 이스라엘에게 소유, 주권, 영토, 자유를 주셨다.
- 그래서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서 풍요롭게 살 수 있었다.
그런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소유할 수 있었다.
- 이스라엘의 주인이 되어 군림할 수 있었다.
-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자유를 주셨다.
- 그만큼 하나님은 자신의 주권과 자유를 포기하셨다.
- 즉, 하나님은 죽음을 감수하고 가치관을 부정하며 이스라엘을 사랑하셨다.
하나님의 바람은 단순했다.
- 이스라엘이 자유를 가지고 자기답게 사는 것이었다.
- 그렇게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 소박한 하나님의 바람조차 거역했다.
- 이스라엘은 주어진 자유를 포기하고, 자기다움을 내버렸다.
- 대신에 자유를 강대국에 헌납하고, 또 다시 노예로 전락했다.
- 그 결과 강대국에 잘 보이기 위해 백성을 착취하여 조공을 바치고, 강대국의 우상을 숭배했다.
속상한 마음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다시 회복하셨지만,
- 이스라엘은 언제든 다시 강대국으로 되돌아갔다.
- 예레미야는 이를 창녀에 비유했다.
[렘 3:2] … 사막에 숨어서 사람을 기다리다가 물건을 터는 유목민처럼, 너는 길거리마다 앉아서 남자들을 기다렸다. 너는 이렇게 네 음행과 악행으로 이 땅을 더럽혀 놓았다.
그 과정을 약 800년을 반복한 후 지금에 이른 것이다.
-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모든 것을 주셨지만,
- 이스라엘은 그것을 포기하고 계속 창녀로 살려고 했다.
-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를 강대국에 헌납하여 노예로 살고자 했다.
- 출애굽 이후 자유로운 광야에서 다시 애굽 노예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여전히 갖고 있었다.
그러한 이스라엘에게 울분을 토하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진노에 담긴 의미이다.
만약 하나님이 800년의 기다림 없이 진노하셨다면, 진노에서 사랑을 발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 반면에 800년이 지난 후에도 진노 없이 차분하게 말씀하셨다고 해도,
- 그 말씀에서 사랑을 발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800년의 기다림과 진노가 결합하니,
- 그 진노에서 사랑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 800년 동안 사랑을 구걸하며 절규하신 애절한 사랑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애절한 절규를 듣고, 하나님의 고통에 공감한 사람만,
- 그래서 자기 죽음의 고통보다 하나님의 고통이 더 크게 느껴지는 사람만,
- 그래서 자기 죽음보다 하나님이 떠날 것에 대한 두려움이 더 크게 느껴지는 사람만
- 자기 죽음의 고통을 감수하고 자기 가치관을 부정하며 하나님을 선택할 수 있다.
이렇게 처절한 갈등과 고통을 통해서만 사람은 자기 가치관을 부정할 수 있다.
- 반대로 말해서, 이만큼 부정되기 힘든 가치관이기 때문에 우리가 가치관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 조정하고 부정하기 쉬운 것은 가치관이라고 부르지도 않는다.
사람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 자기 가치관을 생명처럼 지킨다.
- 그래서 가치관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포기하는 사람이 많은 것이다.
그런 가치관이 부정되는데, 어떻게 처절하지 않겠는가.
- 어떻게 가치관이 부정되고 하나님을 선택하는 과정이 순탄할 것이라고 기대하는가.
이렇게 관계 회복은 피비린내 나는 잔혹한 과정이다.
- 삶과 죽음을 넘나들기에 전쟁과 같다.
그러면 이런 반문을 할 수 있다.
- 이런 진노로 인한 부정적인 감정이 없더라도,
- 사랑으로 인한 긍정적인 감정으로도 똑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것 아닌가?
- 하나님 사랑에 감동해서 하나님께 헌신할 수는 없는가?
절대 없다.
- 아무리 하나님의 좋은 모습에 감동하여도, 그래서 아무리 하나님께 홀딱 사랑에 빠져도,
- 그것 때문에 사람은 죽음을 감수하고 자기 가치관을 파괴하지 않는다.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왜 그 많은 부부가 이혼하겠는가.
- 서로의 장점에 끌려 사랑에 빠졌고, 그 사랑 때문에 자기 가치관을 파괴하여 가치관 충돌을 해소할 수 있었다면 말이다.
그런 점에서 장점에 끌려서 생긴 사랑은 가짜이다.
- 단지 거래에 유용하기 때문에 생긴 마음이다.
- 이용하기 쉬운 대상을 소유하기 위해 사랑으로 포장한 것이다.
오히려 진짜 사랑은 서로의 가장 추하고, 가장 가치 없는 모습을 볼 때 발견된다.
- 사업이 망하고, 외모는 박살 나고, 건강을 잃어 장애를 얻었는데, 외도까지 했을 때,
- 그래서 모든 기능을 잃고, 아무런 거래 가치가 없는데,
- 상대방이 죽일 듯 화내며, 자기 분을 못이겨 실신할 지경이지만,
-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랑한다며, 용서할 테니 돌아오라고 애절하게 구걸할 때,
- 여기서 변하지 않는 사랑을 발견한다.
진노를 통해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사랑이 바로 이것이다.
하지만 그런데도 진노하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불편하다면?
심판 예언에서 사랑을 느끼기 어렵다면?
- 여전히 재앙 이후 번영, 죽음 이후 부활, 심판 이후 회복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면?
- 여전히 번영, 부활, 회복은 바라지만, 재앙, 죽음, 심판이 자신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면?
이유는 단순하다.
- 자신이 외도했다는 것을 모르거나,
- 외도했다는 것은 알지만, 외도가 얼마나 심각한 잘못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 그렇기 때문에 자신에게 이혼, 즉 멸망 심판이 필요하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다.
만약 외도가 얼마나 큰 잘못인지 알고, 그것이 배우자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줬는지 알면,
- 배우자가 이혼 이후 재결합을 요구했을 때,
- 이혼당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 오히려 재결합 약속에서 당혹감을 느낄 것이다.
- 자기에게는 재결합할 자격이 전혀 없는데도 불구하고,
- 용서해 주고 관계 회복을 약속한 배우자에게 무한한 사랑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만약 배우자의 이혼 요구를 받아들이기 어렵다면?
- 그래서 ‘사업하다 보면 룸살롱 갈 수도 있지, 남들 다 하는데 그게 무슨 외도야. 그냥 일이야.’
- 혹은 ‘외도했어. 미안해. 됐지? 사과했는데 왜 자꾸 들쑤셔. 너 그거 병이야.’라고 했다면,
- 그래서 이혼 요구를 하는 배우자가 이해되지 않는다면,
- 서로를 위해서 이혼하는 것이 좋다.
- 어차피 갈라진 관계가 회복될 가능성은 없다.
- 이혼하지 않고 함께 산다고 해도, 서로에게 고통만 줄 뿐이다.
서로에 대한 존중과 공감이 없는 것을 어떻게 하겠는가.
- 사랑하지 않는 것을 어떻게 하겠는가.
- 사랑하고 싶은 바람조차 없는 것을 어떻게 하겠는가.
- 억지로 사랑하려는 마음조차 없는 것을 어떻게 하겠는가.
이는 해결 불가능한 문제이다.
- 더 정확하게 말해서, 아예 문제가 아니다.
-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왜 문제인가.
- 내가 옆집에 사는 아저씨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문제가 아닌 것처럼 말이다.
- 그냥 받아들여야 할 현실이다.
- 내가 옆집 아저씨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비난하지 않듯,
- 사랑하지 않는 배우자를 사랑하지 않고 이혼하는 것을 누구도 비난할 수 없다.
하나님과도 마찬가지이다.
결론 - 사랑하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
하나님은 본문에서 진정한 사랑을 보여주신다.
- 아무런 기능도 없고, 아무런 가치도 없고, 오히려 외도만 일삼는 이스라엘,
- 즉, 사랑할 여지가 전혀 없는 이스라엘을 하나님은 사랑하신다.
특히 그 사랑이 진노로 표현된다.
- 진노는 두 가지를 함께 전한다.
-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얼마나 괴로움을 주는 존재인지 고발하는 동시에,
- 죽을 듯 괴로워하며 울부짖으면서도 그 고통을 감수할 만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한다.
이를 통해 하나님은 우리도 하나님을 그렇게 사랑하라고 말씀하신다.
- 우리도 하나님이 기능을 발휘할 것을 기대하지 말고,
-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신다.
- 그렇게 사랑할 때만 충만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래야 우리도 기능 쌓기에 집착하여 자기 정체성을 부정하지 않고,
- 기능에서 해방되어 자기답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본문에서 하나님이 진노하신 이유이며,
- 예수님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 이유이다.
- 무능하게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은 기능 없는 존재 그 자체의 하나님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시작된다.
- 우리에게는 기능 없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
- 더 나아가 기능 없는 누구도 사랑할 마음이 없다.
- 특히 기능 없는 자신조차 사랑할 마음이 없다.
이것이 인류 전체의 문제이며,
- 인류 전체가 가진 고통의 근원이다.
- 자기조차 자신을 있는 그대로, 존재 그 자체로 사랑하지 못하는 것 말이다.
- 자기가 자신을 부정하고 거부하는데, 얼마나 괴롭겠는가.
그렇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냐?
- 문제를 정확하게 정의하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게 만들 수 있냐?
안타깝게도, 방법이 없다.
- 세상에 사랑하지 않는 존재를 사랑하게 만드는 방법은 없다.
- 이는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다.
- 하나님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미양 교회에 처음 들어올 때 성경 공부를 했다.
-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사랑하게 만들 수 없으니,
-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만 들어오게 한 것이다.
- 적어도 간절하게 사랑하고 싶은 사람만 들어오게 한 것이다.
- 그래서 하나님을 위해, 교회를 위해 소유, 생명, 관계를 포기하겠다는 다짐을 받은 것이다.
다시 말해서, 교회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게 만드는 곳이 아니라,
-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마음껏 하나님을 사랑하는 곳이다.
- 다른 교회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도 마구 교회에 들이지만,
- 미양 교회는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이렇게 반문할 수 있다.
- 사랑하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려고 신앙 생활 하는 건데,
- 그걸 못한다고 하면, 교회가 왜 있냐?
- 그것이 교회 역할 아니냐? 라고 말이다.
예를 들어 보겠다.
- 정략 결혼한 부부가 있다.
- 의무감으로 결혼했지만, 서로에 대한 애정은 없다.
- 서로를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다.
- 단지 부모가 시켜서 억지로 한 결혼이다.
그때 당사자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두 가지이다.
- 첫째로, 몸은 정략결혼 배우자에게 있지만, 마음은 자유롭게 다른 사람에게 두는 것이다.
- 사극을 보면, 남편이 이런 식으로 결혼 생활을 이어가는 경우가 많다.
- 그래서 첩이 생긴다.
- 둘째로, 이왕 결혼한 것이니, 어떻게든 마음도 배우자에게 둘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 사랑하지 않는 배우자를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랑하지 않는 배우자를 어떻게 사랑하게 만들 수 있나?
- 오답부터 말하면, 주변에서 배우자에게 마음 붙여 보라고 아무리 잔소리해도 소용 없다.
- 이 세상 누구도 없는 마음을 만들 수 없고,
- 특히 당사자 외에 제 삼자는 더욱 불가능하다.
-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교회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지 않는 배우자를 사랑할 가능성이 있는 유일한 방법은,
- 당사자가 스스로 마음을 고쳐먹고,
- 배우자를 사랑해 봐야겠다고 결심하는 것이다.
- 그래서 마음이 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의지적으로, 억지로, 의무적으로 시간을 정해서
- 함께 하는 시간을 늘리고, 많은 대화를 하고, 함께 나가서 데이트도 하고, 같이 밥도 먹으며
- 어떻게든 상대방을 알아가려고 노력하고, 상대방의 매력을 발견하려고 애쓰는 것이다.
물론 노력한다고 다 되는 것은 아니다.
- 그러나 자발적인 노력을 지속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은 딱 여기까지이다.
- 하나님과 접촉 기회를 제공하는 것뿐이다.
- 그 기회를 능동적, 주체적, 적극적으로 사용하여 자기 마음의 변화를 끌어내는 것은 오직 자신의 몫이다.
그런데 만약 사랑하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의 동기마저 없다면,
- 그래서 하나님 사랑이 절대 가치이고,
- 자신의 인생과 생명이 절대 오물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싶은 마음마저 없다면,
- 교회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
하지만 만약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다면,
- 그래서 자기 인생과 생명까지 포기하고 싶다면,
- 정말 간절히 원하는데, 잘 안돼서 고민이라면,
- 교회가 목숨 걸고, 전 재산 팔아서, 가족 등지고, 세상 조롱 감수하며 돕고 싶다.
물론 교회가 도와준다고 전부 하나님 믿을 수 있냐?
- 보장할 수 없다.
- 교회는 하나님이 아니며, 믿음을 줄 능력이 없다.
- 게다가 목숨, 전 재산, 가족, 세상을 당장 포기할 수 있는 믿음도 없다.
하지만 목숨, 전 재산, 가족, 세상 포기해서라도 도와주고 싶다.
- 바람 만큼은 진심이다.
-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게 해주고 싶다.
- 그것을 위해서라면 사탄에게 영혼까지 팔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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