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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서

예레미야(59) 31:2-14 절대 가치 사고방식 - 회복의 참뜻

<미양교회 팟캐스트 양따양>

미양교회에서 했던 설교를 바탕으로 진솔하게 신앙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팟캐스트도 많이 들어주세요.

https://www.podbbang.com/channels/1790233/

 

어린양을 따르는 어린양

예배 대신 예수님, 설교 대신 성경, 건물 대신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미양교회가 만드는 방송입니다.토끼와 개구리가 진솔하게 신앙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어린양과 같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

www.podbbang.com

 

 

모두가 회복을 바라지만, 바라는 회복은 각기 다르다.

- 누구나 회복을 ‘욕망 성취’와 연결하고,

- 사람마다 욕망이 다르기 때문이다.

- 그래서 성경의 회복 메시지를 듣고 각자 자신의 욕망이 성취되기를 기대한다.

- 전형적인 동상이몽이다.

이 문제 때문에 회복 메시지를 전하기가 어렵다.

 

욕망의 종류는 셀 수 없이 많지만, 성경은 둘로 나눈다.

- 대표적으로, 예수님과 바리새인이다.

- 예수님은 하나님의 절대 가치를 인정하신다.

- 그것을 위해 자신을 절대 오물로 규정하는 욕망을 갖는다.

- 반면에 바리새인은 자신의 가치를 증명한다.

- 그것을 위해 하나님의 가치를 상대화하여 절대 가치를 부정하는 욕망을 갖는다.

이 차이가 이 둘의 삶을 완전히 가른다.

- 한 사람은 천국, 다른 한 사람은 지옥으로 말이다.

게다가 이 구분은 지금도 유효하다.

- 지금도 예수님을 따라 하나님의 절대 가치를 인정하는 ‘예수님파’가 있고,

- 바리새인을 따라 하나님의 절대 가치를 부정하여 자기 가치를 증명하는 ‘바리새인파’가 있다.

 

과연 현실을 이렇게 단순하게 양분할 수 있냐고 반문할 수 있다.

- 구분하기 모호한 중간 지대도 있을 수 있다고 말이다.

당연히 세상에는 100% 순수한 물과 100% 순수한 똥 사이에 셀 수 없이 다양한 물이 있다.

- 물 10%와 똥 90% 섞인 물, 물 90%와 똥 10% 섞인 물도 있고,

- 물 99%와 똥 1% 섞인 물, 물 99.99%와 똥 0.01% 섞인 물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1%건 0.01%건 0.001%건 똥이 섞인 물을 우리는 똥물이라 부른다.

- 그리고 똥물은 절대로 마시지 않고 변기에 버린다.

- 우리가 마시는 것은 오직 100% 물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세상의 물을 단순하게 양분한다.

- 100% 순수한 물과 그렇지 않은 전부로 말이다.

 

이것이 현실이다.

- 세상 역시 중간 지대를 용납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세상은 ‘예수님파’와 ‘바리새인파’로 양분된다.

- 중간 지대는 없다.

- 순수한 물만 천국, 나머지는 모두 지옥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오직 100% 순수한 물이라는 것을 기억하자.

 

‘예수님파’의 삶

예수님파에게 하나님의 절대 가치가 인정되면,

- 예수님파는 절대 가치이신 하나님에 의해 가치를 부여받는다.

- 그 가치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이다.

- 이는 절대 가치이신 하나님에 의해 부여되기 때문에 역시 절대 가치가 된다.

- 즉, 예수님파에게는 ‘의도하지 않게’ 절대 가치를 부여된다.

이렇게 절대 가치가 부여된 예수님파는 더 이상 자신의 가치를 증명할 필요가 없다.

- 이전에는 자신이 가치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기능’을 축적했는데,

- 이제는 기능 축적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진다.

- 세상에서 누구에게 인정받지 않아도, 존재 자체에 ‘절대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 세상에서 누구에게 사랑받지 않아도,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이기 때문이다.

- 이미 ‘절대 인정’과 ‘절대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오직 자기 ‘존재’에 집중한다.

-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한다.

- 그래서 세상에서 인정받았던 자신뿐만 아니라 인정받지 못했단 자신조차 사랑한다.

이전에는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을 숨기고 부정했다.

- 인정받지 못한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노력해도 안 되면 치장해서 숨겼다.

- 인정받지 못하면 가치가 없어지고, 가치가 없어지면 존재할 필요가 없어져서,

- 결국 죽음만 남기 때문이다.

- 그래서 목숨 걸고 인정받으려 하고, 인정받지 못하면 자살했다.

그러나 이제는 절대 인정, 절대 사랑을 받았기에, 과감하게 드러낼 수 있다.

- 드러낸 만큼 이해할 수 있고, 이해한 만큼 개발할 수 있고, 개발한 만큼 더욱 사랑할 수 있다.

 

그렇게 존재가 존중되고 이해되고 개발되고 사랑받으니, 더욱 더 존재가 선명해진다.

- 즉, 정체성이 확립되고, 나다워진다.

- 선순환이 일어난다.

이렇게 자기답게 되어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의 존재도 존중, 이해, 사랑할 수 있다.

- 다른 사람의 기능을 이용하려 거래하지 않고, 존재 자체를 사랑할 수 있다.

- 그렇게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 존중, 이해, 사랑하는 사람이 어찌 사랑받지 않을 수 있겠는가.

- ‘의도하지 않게’ 사랑스러운 사람이 된다.

 

물론 세상은 자기다운 사람을 좋게만 보지 않는다.

- 자기 색깔이 강할수록 거부하는 사람도 많이 생긴다.

- 그래서 세상의 일부에게 사랑받지 못할 수 있다.

- 하지만 나머지 일부에게는 열렬히 사랑받는다.

예수님께도 예수님을 열렬히 사랑했던 사람과 죽일 듯 미워했던 사람이 있었다.

-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는 예수님파도 세상에서 열렬히 사랑받고 죽일 듯 미움받는다.

 

이것이 하나님의 절대 가치를 인정하는 욕망이 성취된 경우이다.

- 처음 의도는 자기 가치를 부정하고 하나님의 절대 가치를 인정하려 했다.

- 그러나 결국 ‘의도하지 않게’ 자신에게 절대 가치가 부여되어, 

- 세상에서 배척도 받지만, 사랑하고 사랑받는 사람으로 살게 된다.

 

‘바리새인파’의 삶

반면에 ‘바리새인파’가 자신이 가치 있다는 것을 증명하면,

- 세상에서 인정받고 사랑받아 성공한다.

- 부, 명예, 인정, 안정을 얻는다.

그런데 문제는 세상의 인정과 사랑이 ‘조건적’이라는 것이다.

-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더’ 가치 있다는 것을 증명할 때만 인정이 유지된다.

- 만약 자신에게 아무리 큰 가지가 있더라도, 상대적 우위를 갖지 않으면 인정을 잃고 부정된다.

이 부분이 하나님이 주시는 ‘절대 인정’과 구별되는 ‘상대 인정’이다.

 

그런데 자기 가치를 증명하여 세상의 인정을 얻은 바리새인파는

- 더 이상 자기 가치를 증명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 오히려 ‘의도하지 않게’ 자기 가치를 더욱 더 증명해야 하는 덪에 빠진다.

현재 받고 있는 인정을 지속하려면, 자신의 가치를 유지하는 것만으로 불가능하다.

- 이전보다 더 많은 가치가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증명해야 한다.

- 왜냐하면 자신보다 더 가치 있는 사람이 계속 새로 생기기 때문이다.

- 그렇기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인정을 받을수록, 자신이 증명해야 할 가치가 더 커진다.

- 즉, 자기 가치를 증명하기가 더 어려워지고,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그 결과 바리새인파는 자신보다 세상에 집중하게 된다.

-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보다, 세상이 원하는 모습으로 자신을 왜곡한다.

- 세상에서 인정받는 모습은 부각하기 위해 과장하고,

- 세상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모습은 숨기기 위해 억누른다.

- 마치 주름살을 감추느라 보톡스를 맞아 표정조차 사라진 성괴와 같다.

자신은 사라지고 정체불명의 괴물만 남는다.

- 결국 이러한 노력은 장점은 퇴색되고 단점만 부각된다.

 

이렇게 자기다움을 잃고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 모든 사람에게 가혹한 기준으로 어떻게든 단점을 찾아내어 부정하고 비난하고 혐오한다.

- 항상 자신이 자기에게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결코 누구도 사랑할 수 없다.

- 사랑하지 못한 이유를 셀 수 없이 댄다.

그러니 그런 사람은 세상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한다.

- 원래 의도는 세상에서 인정받고 사랑받기 위한 선택이었지만,

- 그 선택 때문에 ‘의도하지 않게’ 인정받고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이 된다.

 

물론 가지고 있는 기능 때문에 세상에서 완전히 배척되지 않는다.

- 필요할 때는 가져다 쓰고 보이는 데서는 칭찬하고 아부한다.

- 그 사람이 가진 기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존재 자체에서 풍기는 매력이 없기 때문에 어디서도 사랑받지 못한다.

- 자신도 그것을 알기에 언제나 두려움 속에서 산다.

- 지금 당장에라도 기능을 잃으면 세상에서 버려질 것이라는 위협 속에서 산다.

- 그래서 더욱 더 자기 기능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 자기 기능을 목숨보다 소중히 여긴다.

 

그래서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그렇게 싫어한 것이다.

- 목숨만큼 소중한 자기 기능을 제거하려 하셨기 때문이다.

- 그것이 바로 율법과 성전이었다.

- 바리새인은 자신에게 율법과 성전이 없으면, 세상에서 결코 사랑받을 수 없다는 두려움이 있었는데,

- 예수님이 바로 그 두려움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그랬기 때문에 이들에게 예수님은 목숨을 위협하는 살인마로 보였다.

- 그래서 정정당당하게 예수님을 죽인 것이다.

- 예수님을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죽음의 위협 속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자신이 가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욕망이 성취된 경우이다.

- 처음 의도는 세상에서 인정받기 위해 자기 가치를 증명하려 했다.

- 그러다 보니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의 절대 가치를 부정했다.

- 그러나 결국 ‘의도하지 않게’ 자신에게 상대 가치가 부여되어 자기 증명의 덫에 빠진다.

- 그래서 자기를 증명하지 않으면 세상에서 버려질 것이라는 두려움 속에서

- 죽을 때까지 인정에 목매어 살게 된다.

- 정작 원했던 인정을 얻지 못한 채 말이다.

 

회복에 대한 재정의

그러니 이 시점에서 다시 질문할 수밖에 없다.

- 도대체 회복이 무엇이냐?

- 예수님파와 바리새인파가 똑같이 회복을 소망하며 욕망 성취를 구했는데,

- 그래서 둘 다 욕망을 성취했는데,

- 왜 예수님파는 ‘절대 인정’을 받아,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살고,

- 바리새인파는 ‘상대 인정’을 받아, 버려질 두려움 속에서 사는 것일까?

 

여기서 말하고자 핵심은 원하는 것을 얻는다고 회복을 얻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 바리새인파는 아무리 원하는 것을 얻어도 언제나 두려움 속에 파묻혀 살 수밖에 없다.

- 마치 이건희 회장이 매춘 아니면 해소할 수 없을 만큼 극심한 두려움을 느꼈던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회복의 열쇠는 ‘생각의 변화’이다.

‘욕망 성취’가 아니다.

- 하나님의 절대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며,

- 자신이 절대 오물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자기 가치를 증명하려는 시도는 결국 자신이 오물임을 세상에 떠벌리는 꼴이다.

- 마치 자기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유튜브로 배변 모습을 보여주는 것처럼 어리석은 짓이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가 평생토록 쌓아온 지식과 경험이 배변 영상이라고 고백했다.

[빌 3:7~8] 그러나 나는 내게 이로웠던 것은 무엇이든지 그리스도 때문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8) 그뿐만 아니라,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하므로, 나는 그 밖의 모든 것을 해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고, 그 모든 것을 오물로 여깁니다.

- 그런 자각을 통해 결국 하나님 외에 가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 오직 하나님만이 유일한 가치, 절대 가치임을 깨달은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회복이다.

 

회복을 통한 생각의 변화를 새로운 관점에서 보겠다.

회복은 하나님의 ‘절대’ 가치 인정과 자신의 ‘절대’ 오물 인정이다.

-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절대’이다.

- 이는 ‘상대’ 개념과 반대이다.

풀어 말하면, 하나님은 세상 만물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가치가 커서,

-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가치라는 뜻이다.

- 이는 필연적으로 사람을 포함하여 세상 만물의 가치를 부정한다.

 

반면에 많은 교회에서 하나님을 ‘상대적’으로 최고의 가치라고 말한다.

- 이는 절대 가치와 마찬가지로 세상에서 가장 큰 가치를 의미하지만,

- 세상 만물의 가치를 부정하지 않는다.

- 하나님이 최고의 가치라는 것은 당연하지만,

- 하나님 다음으로 교회의 권위, 목사의 권위, 전통의 권위 등도 여전히 가치를 갖는다.

그래서 상대적 관점에서 신앙을 이해하면,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권위는 추락한다.

- 물론 드러내놓고 하나님의 권위를 부정하지 않는다.

- 하나님을 최고라고 고백한다.

그러나 실질적 지배자는 하나님이 최고 권위라는 말을 하는 ‘사람’에게 있다.

- 그가 ‘악의적‘으로 하나님 말씀을 왜곡해서 자신에게 권위를 부여한다.

- 혹은 ‘순수하게’ 하나님 말씀을 전했다는 이유로 주변 사람이 권위를 부여한다.

- 그래서 그 권위로 공동체를 자신의 욕망 성취 수단으로 전락시킨다.

- 대표적인 예가 시아비 집단이고, 많은 교회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하나님 외에 어떤 권위도 용납하지 않는다.

- 그래서 하나님의 권위를 상징했던 성전과 율법조차도 권위를 부여하지 않는다.

- 하나님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삼다가, 그 기능을 잃자 바로 폐기된다.

그런 점에서 성경은 하나님의 절대 권력, 절대 가치를 지지한다.

 

이러한 ‘절대’ 개념을 설명하기 적절한 도구로 ∞(무한대)가 있다.

- 숫자의 세계에 무한대가 등장하면, 모든 숫자는 ∞와 -∞로 소거된다.

- ∞ 앞에서 억, 조, 경, 해와 같이 아무리 큰 수도 0과 아무런 차이가 없고,

- 게다가 아무리 큰 수도 -∞와 차이가 없다.

- 왜냐하면 ∞에서 억을 빼도 ∞이고(∞ - 100,000,000 = ∞),

- ∞에서 0을 배도 ∞이며(∞ - 0 = ∞),

- ∞에서 -∞를 빼도 똑같이 ∞이기 때문이다(∞ - (-∞) = ∞ X 2 = ∞).

- 억과 0과 -∞는 ∞ 앞에서 똑같다.

그런 점에서 절대 개념의 등장은 만물을 오물로 부정해 버린다.

 

그런데 만약 누군가가 왜 절대 가치의 반대가 절대 ’무가치‘가 아니라 절대 ’오물‘이냐고 묻는다면?

- 세상이 가치 있다는 것이 착각이라는 것은 알겠는데, 왜 무가치도 아니고 오물이냐는 것이다.

- 이를 풀어 말하면, 왜 ∞ 앞에서 억이 0(절대 무가치)이 아니라 -∞(절개 오물)이 되냐는 것이다.

- 하지만 이를 뒤집어서 말하면, 0과 -∞가 구분된다는 것은 하나님이 절대 가치(∞)가 아니라 상대 가치(억, 조, 경, 해 등)로 보기 때문이다.

- 왜냐하면 억에서 0을 빼면 억이지만,

- 억에서 -∞를 빼면 ∞가 되기 때문이다.

- 따라서 무가치(0)와 오물(-∞)이 다르게 보인다는 것은 하나님을 상대 가치(억)로 본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세상을 절대 무가치보다 절대 오물로 표현할 때 하나님의 절대 가치가 더욱 부각된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절대 가치라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깨달을 수 있나?

이 질문은 우리에게 중요하지만, 사실상 적절하지 않은 질문이다.

- ‘절대 가치’라는 말 자체에 사람이 이성으로 이해하고 감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을 넘어선다는 뜻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 그런 점에서 하나님이 절대 가치라는 것을 우리는 깨달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선택’이다.

- 성경에 따라 하나님이 절대 가치라는 것을 믿기로 선택하던지,

- 아니면 경험에 따라 세상도 여전히 가치 있다고 믿기로 선택하는 것뿐이다.

많은 사람은 이것을 ‘믿음’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선택’이라고 말하고 싶다.

- 왜냐하면 ‘믿음’이라는 말에는 믿음에 대한 근거가 탄탄할 것이라는 인상을 준다.

- 반대로 ‘불신’이라는 말에는 불신의 대상에 문제가 있을 것이라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성경을 따를 것이냐, 경험을 따를 것이냐의 문제는 그렇지 않다.

- 성경과 경험 중에 어떤 것도 더 믿음직하거나 더 문제가 많거나 한 것은 없다.

- 둘 다 나름의 탄탄한 근거가 있고, 빈약한 허점이 있다.

- 둘 중에 무엇을 믿는다고 해도 어리석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이는 ‘선택’이다.

- 어차피 누구도 성경과 경험 중에 무엇이 옳은지 ‘완벽하게’ 증명할 수 없다.

- 아주 빈약한 근거를 가지고, 마음에 드는 것을 하나 고르는 것뿐이다.

- 성경에 따라 하나님이 절대 가치라고 치고 사는 것과

- 경험에 따라 세상에 가치가 있다고 치고 사는 것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다.

- 어떻게 산다고 해도 누구도 비난할 수 없다.

 

그러나 유일하게 비난할 수 있는 대상은 이도 저도 아닌 사람이다.

- 하나님께 절대 가치가 있다고 말하면서 세상 가치에 기웃거리는 사람이다.

- 그런 사람은 세상에서도 하나님께도 버림받는다.

-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다.

오히려 하나님을 부정하고 세상에 몰입한 사람은,

- 문제가 생겼을 때, 세상에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고,

- 오직 자신이 해결해야만 한다는 심정으로 목숨 걸고 나선다.

- 그렇기 때문에 문제를 해결해서 성공할 확률이 높다.

하지만 하나님을 인정하면서 세상에 기웃거리는 사람은,

- 문제가 생겼을 때, 하나님이 혹시 해결해 주시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에,

- 혹은 문제 해결이 안 돼도 하나님이 도와주실 거라는 마음 때문에,

- 문제 해결에 대한 열정이 상대적으로 약하다.

- 그렇기 때문에 문제를 해결할 확률이 낮고, 세상에서 인정받을 확률도 낮다.

게다가 하나님께 위로받기도 힘들다.

- 성경은 세상에서 배척된 자를 위로하지, 세상에 걸쳐있는 자를 위로하지 않는다.

 

따라서 귀납적으로 많은 정보를 모아서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하나님의 상대 가치뿐이다.

- 하나님이 최고의 가치이지만,

- 하나님 외에도 가치 있는 것은 많다는 결론뿐이다.

하나님의 절대 가치를 인정하기 위해서는 연역적으로 선택해야 한다.

- 확실한 근거는 없다.

- 누구도 증명할 수 없다.

- 스스로 충분히 고민한 후, 선택하고, 그 다음에는 뒤돌아보지 않고 몰입하는 것이다.

그것이 현명한 태도이다.

 

성경을 선택하는 것도, 경험을 선택하는 것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 옳다 그르다를 누구도 판단할 수 없다.

- 칭찬할 수도 없지만, 비난할 수도 없다.

그러나 이도 저도 아닌 선택은 최악이다.

- 누구라도 정죄할 수 있다.

- 특히 자신이 자기를 정죄한다.

그러니 이도 저도 아닌 선택만은 피하자.

 

포스트모던 시대의 절대 가치

누군가는 또 이렇게 비판할 수 있다.

- 절대 가치를 부정하고 모든 것을 상대화하는 포스트모던 시대에 절대 가치를 주장하는 것은 구시대적이지 않냐고 말이다.

그러나 나는 포스트모던 시대야말로 하나님의 절대 가치가 더 빛나는 시대라고 본다.

 

이전 시기인 근대 시대에는 ‘인간에 대한 신뢰’가 있었다.

- 인간은 합리적으로 사고하며, 합리적인 사고가 모이면 반드시 발전할 것이라고 믿었다.

- 그래서 계몽주의를 비롯하여 이성 중심주의가 있었다.

그러나 포스트모던 시대에는, 한마디로, 인간에 대한 신뢰가 깨졌다.

- 그와 함께 인간이 만든 사상, 문화, 기술 등에 대한 신뢰도 깨졌다.

- 그 때문에 이전에 있었던 절대 불변의 가치 기준이 전부 부정되고,

- 관점에 따라 다르게 볼 수 있다는 상대주의가 부상하게 된다.

 

그랬기 때문에 근대 시대에는 절대 가치의 종류가 많았다.

- 인간의 이성도 절대 가치였고, 

- 뉴턴의 물리 법칙도 절대 가치였으며,

- 경제가 성장한다는 것도 절대 가치였다.

이렇게 절대 가치가 많은 시대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절대 가치도 인정되기 쉬웠다.

- 그러나 하나님은 많은 절대 가치 중 하나였기 때문에, 그 의미가 온전히 드러나지 못했다.

 

그러나 포스트모던 시대에는 절대 가치가 전부 부정되었다.

- 인간 이성의 끝에는 세계 전쟁이 있었고,

- 뉴턴의 물리 법칙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으로 부정되었고,

- 경제 성장도 한계에 부딪혔다.

- 이렇게 하나님의 경쟁자가 전부 몰락했다.

그래서 절대 가치를 주장하는 것 자체가 어렵게 되었다.

- 절대 가치가 있다는 것 자체까지 부정되었기 때문이다.

- 그러나 하나님의 절대 가치가 유일한 시대이기에,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해졌다.

 

그런 점에서 지금은 하나님의 절대 가치를 선택하기 더 쉬운 시대이다.

- 세상 모든 가치가 부정되고 상대화되었기 때문이다.

- 세상의 가치가 세계 전쟁으로 얼마나 추하고 더러운지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 절대 불변할 것이라고 믿었던 뉴턴의 물리 법칙마저 부정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하나님의 절대 가치가 완전히 증명된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절대주의 사고방식의 중요성

우리는 이미 포스트모던 시대에 살고 있다.

- 의식하지 못할 뿐, 상대주의적 사고방식에 젖어있다.

- 그래서 절대 선, 절대 진리, 절대 규범 따위를 주장하는 사람은 고리타분한 꼰대라고 생각한다.

- 오직 나에게 옳고, 편하고, 유용한 것이 좋은 가치이며,

- 그 기준은 사람마다, 상황마다 언제든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 이런 사고방식은 30년 전 부모 세대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망측한’ 것이었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상대주의 사고방식은 인류에게 상당한 진보를 일으켰다.

- 근대 시대에는 전통을 절대 가치로 두었고,

- 전통의 범위 안에서만 생각하고 상상했다.

- 전통의 한계 속에 갇혀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천동설이다.

- 하나님이 거하시는 지구가 움직일 수 없다는 신념이 전통이 되었다.

- 그래서 사고가 제한되고 경험마저 왜곡되었다.

- 그래서 지구가 움직인다는 간접적인 관측이 있었지만, 관측 오류로 치부했다.

하지만 전통을 부정하고 지구 중심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자,

- 오류로 치부했던 천체 관측 결과가 새롭게 보였다.

- 그제야 비로소 관측 결과를 왜곡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렇게 천동설이 지동설로 전환되었다.

 

이것이 상대주의 사고방식의 결실이다.

- 전통과 같은 절대 가치에서 벗어나,

- 원점에서 선입견 없이 모든 것을 의심하고 새롭게 보았기 때문에,

- 세상을 조금 더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었다.

- 지구가 움직인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상대주의 사고방식이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다.

- 선입견 없이 모든 것을 의심하고 새롭게 보는 것은 사람에게 불안과 스트레스를 유발한다.

- 극단적인 예로, 발을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새로 밟을 땅이 무너지지 않을까를 의심하며 걷는 것과 같다.

- 지극히 당연한 것조차 의심하기 때문이다.

- 그러한 의심은 땅의 미세한 특징을 관찰하도록 하기에 땅에 대한 지식을 폭발적으로 늘려준다.

- 하지만 실제로 이런 의심을 하며 살면, 불안 장애로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할 것이다.

이런 의심과 불안이 포스트모던 시대의 부작용이다.

 

이런 변화 때문에 인류의 삶도 크게 변했다.

100년 전만 해도 인류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훨씬 잘 받아들였다.

- 농부, 어부로 태어난 것을, 노예로 태어난 것을, 고아가 된 것을 비교적 쉽게 받아들였다.

- 나무가 한자리에 심기면 평생 그 자리에 살듯, 자기 삶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 주어진 삶을 받아들이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이런 사고방식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복잡하게 얽혀있지만,

- 시대 자체가 절대주의 사고방식이 보편적이었기 때문이다.

- 이유를 굳이 알지 못해도 절대 가치 기준을 받아들였다.

- 물론 그 시대에도 자기 삶을 극적으로 변화시키는 이단아가 있었지만 말이다.

 

이러한 삶에는 장점과 단점이 있다.

- 단점은 사회가 가진 잠재적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는 점이다.

- 대부분 자기에게 주어진 불합리한 현실을 의심하고 비판하기보다 수용하기 때문이다.

- 그래서 계급 질서가 강화된다.

하지만 장점도 있다.

- 사회가 제시한 절대 가치를 의심하지 않기 때문에 비교적 평안하다.

- 마치 땅은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속에서 마음껏 뛰노는 아이 같은 마음이다.

- 웬만해서는 의심하지 않는다.

-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굶주리고 병들고 억압받았지만, 그것을 의심의 여지 없이 하늘의 뜻이라고 믿고 체념하고 수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상대주의가 보편적인 지금 시대는 비교적 몸이 편해졌다.

- 모든 것을 의심하고 절대 가치를 거부했기에, 불합리한 현실을 정확하게 관찰할 수 있었고, 그중 일부는 개선할 수 있었다.

- 그래서 굶지 않을 수 있고, 병을 치료받을 수 있으며, 신분 차별도 덜 해졌다.

- 이것이 상대주의 사고방식이 가져온 이점이다.

그러나 바로 그 상대주의 때문에 언제나 자신을 다른 사람과 ‘상대적’으로 비교하게 되었다.

- 이는 절대 가치가 무너져서 생긴 부작용이다.

 

절대 가치가 있을 때는 누구와 비교하지 않았다.

- 자신이 보편적 절대 가치에 합당한지 아닌지만 생각했다.

- 그런 점에서 모든 사람이 보편적 절대 가치 앞에서 평등했다.

- 물론 절대 가치를 암묵적으로 조장한 집권층은 그렇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래서 절대 가치의 최소 기준에 미치기만 하면, 그 다음부터는 자유롭고 평안했다.

- 그래서 평안한 마음으로 주변을 살피고 이웃과 연합했다.

- 그런 점에서 이웃은 절대 가치에 이르기 위해 함께 걷는 동반자였다.

 

그러나 상대주의는 이웃을 동반자가 아니라 경쟁자로 전락시킨다.

- 절대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 언제나 상대 가치로, 이웃과 비교 우위를 통해서만 자기를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래서 이전에는 자신이 절대 가치의 최소 기준에 이르렀으면, 남은 재화를 이웃에게 나눌 수 있었다.

- 그러나 이제는 자신에게 손해 보는 선택이라고 하더라도 이웃에게 더 큰 손해를 가져다주면, 비교 우위를 가질 수 있기에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평가한다.

예를 들어, 

- 집값 상승은 사회 전체의 물가를 올린다는 점에서 집주인에게도 손해이다.

- 집값이 오른다고 집이 자동으로 커지는 것도 아니고,

- 집을 팔아서 필요한 곳에 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 오히려 물가가 올라서 생활비만 늘어난다.

- 그러나 집 없는 사람에게는 더 큰 손해를 주기에, 

- 비교 우위를 가질 수 있다는 점에서 집주인은 집값이 오르기를 원한다.

- 이를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착각한다.

 

이 때문에 상대주의 사고방식은 언제나 불안하게 만든다.

- 주변 모든 사람을 경쟁자이며 잠재적인 적으로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신의 가치가 상대적 비교로만 측정하기 때문에 유동적이다.

- 즉, 유동적이기 때문에 언제나 새롭게 자기 가치를 증명해야 한다.

- 그렇지 않으면 가치 없는 사람으로 평가되어 사회에서 도태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랑 따위가 무슨 소용 있겠는가.

- 자신을 사랑하는 것도,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 항상 기능 축적에 매몰되어 자기 존재를 부정할 수밖에 없다.

- 바리새인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 율법이 매몰되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벗어버린 것처럼 말이다.

이것이 포스트모던 시대의 암울한 현실이다.

 

암울한 현실에 대한 대처 방안

그렇다고 포스트모던 시대에는 불안이 있으니, 근대 시대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다.

- 지동설에서 다시 천동설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다.

- 신분 사회를 재건하자는 것이 아니다.

- 상대주의 사고방식이 사람을 불안하게 하니, 무조건 절대주의 사고방식을 갖자는 것이 아니다.

- 이미 틀렸다고 확증된 가치를 다시 절대 가치로 삼자는 것이 아니다.

분명한 것은, 상대주의와 절대주의에 모두 장단점이 있고,

- 우리는 상대주의와 절대주의의 장점이 모두 필요하다는 것이다.

- 상대주의 관점에서 절대주의가 주입한 선입견에서 벗어나, 세상을 왜곡 없이 관찰해야 한다.

- 그래서 세상 모든 가치를 의심하고 해체해서 거짓된 실체를 파악해야 한다.

- 동시에 절대주의 관점에서 자기 가치를 상대적 비교 우위가 아닌, 절대 가치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

- 그래서 이웃을 경쟁자가 아닌 동반자로 인식하고 사랑해야 하며,

- 그렇게 사랑할 때 정체성도 회복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영원히 부정될 수 없는 절대 가치를 상정하는 것이다.

- 천동설, 뉴턴의 물리 법칙, 인간 이성의 신뢰와 같이 흔들릴 수밖에 없는 가치가 아니라,

- 확고부동한 가치 말이다.

다시 말하지만, 사람에게 확고부동한 절대 가치가 없으면, 

- 그래서 절대 가치 기준으로 자신을 판단하지 않고,

- 상대적 비교 우위를 통해서만 자기를 판단하면,

- 결코 자기 정체성을 지킬 수 없다.

- 주변 사람들이 가치 있다고 선동하는 기준에 휩쓸려서 자기 존재를 잃는다.

 

따라서 회복이란 확고부동한 절대 가치를 확립하는 것이다.

- 그리고 나는 그 절대 가치가 하나님이라는 것이며,

- 하나님 외에 가치 있다고 여겨지는 모든 것이, 나를 포함하여 전부 오물이라는 것이다.

- 그것만이 진정한 회복이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문을 보자.

 

본문 해석

본문은 세 단락으로 나뉜다.

① 2~6절: 포로에게 회복 예고 - 이스라엘이 다시, 다시, 다시 일어날 것이다.

② 7~9절: 포로에서 귀환 과정 - 평탄한 길로 인도하여, 물이 많은 시냇가로 가게 하겠다.

③ 10~14절: 귀환 후 회복 -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마음을 흡족하게 하겠다.

- 본문은 포로 상태에서 회복을 예고하는 것에서, 포로에서 귀환하는 과정을 지나, 귀환하여 정착 후 회복되는 것까지 세 단계의 시간 순서로 구분해서 말한다.

- 이를 통해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회복을 철저하게 준비하셨고, 준비하신 대로 완벽하게 이루실 것임을 보여준다.

- 이렇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셨다.

 

본문은 이스라엘의 내면과 외면의 회복을 중심으로 말한다.

- 4절에 흥겹게 춤추는 모습을 통해,

- 9절에 눈물 흘리며 간구하는 모습을 통해,

- 12~14절에 기쁘게 찬송하는 모습을 통해 내면의 정서 회복을 예고한다.

반면에 5절에 포도 열매를 따 먹는 모습을 통해

- 8절에 장애인, 임산부와 같이 가장 취약한 대상조차 걸어 돌아오는 모습을 통해,

- 12~14절에 영토에서 얻을 곡식, 포도주, 기름, 양, 송아지를 통해 외면의 영토 회복을 예고한다.

 

그런데 이러한 회복은 상대적 가치이다.

- 이전 포로 시기가 워낙 암울했기 때문이다.

- 그래서 단지 자기 땅에서 자신이 경작한 작물을 먹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을 느꼈다.

- 상대적으로 상황이 나아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포로에서 귀환하여 10년만 지나도, 

- 자신이 경작한 작물을 먹는 것이 이렇게 기쁘지 않을 것이다.

- 기쁨의 가치가 퇴색될 것이다.

- 오히려 풍작이 아닌 것에 불만을 품을 것이다.

- 더 많은 재산을 모아 주변 나라를 공격하여 지배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할 것이다.

- 포로에서 귀환하여 영토를 회복한 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금세 잊어버릴 것이다.

정서 회복과 영토 회복은 상대적 가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문은 희미하지만 절대 가치의 회복도 말한다.

- 3절에 영원한 사랑, 한결같은 사랑으로,

- 7, 9절에 하나님은 아버지, 에브라임은 맏아들, 곧 세계 만민의 머리로 맺는 영원불변한 관계로, 

- 절대 가치의 회복을 말한다.

영원하고 한결같은 절대 가치이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맏아들이라는 절대 가치를 부여하신다.

- 그래서 이스라엘을 자신의 가치를 비교 우위로 증명해야 하는 덫에서 건져내신다.

 

이러한 절대 가치 회복은 31~34절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나온다.

- 하나님과의 관계가 모든 사람의 가슴에 새겨져 있어서, 

- 누구도 더 이상 알 필요가 없을 만큼 확고부동한 절대 가치가 된다.

[렘 31:31~34] 그 때가 오면, 내가 이스라엘 가문과 유다 가문에 새 언약을 세우겠다. 나 주의 말이다. (32) 이것은 내가 그들의 조상의 손을 붙잡고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나오던 때에 세운 언약과는 다른 것이다.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은 나의 언약을 깨뜨려 버렸다. 나 주의 말이다. (33) 그러나 그 시절이 지난 뒤에, 내가 이스라엘 가문과 언약을 세울 것이니, 나는 나의 율법을 그들의 가슴 속에 넣어 주며, 그들의 마음 판에 새겨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34) 그 때에는 이웃이나 동포끼리 서로 ‘너는 주님을 알아라’ 하지 않을 것이니, 이것은 작은 사람으로부터 큰 사람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모두 나를 알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들의 허물을 용서하고, 그들의 죄를 다시는 기억하지 않겠다. 나 주의 말이다.

이것이 진정한 회복이다.

- 하나님만이 절대 가치이며 하나님 외에는 절대 오물이라는 것을 깨달은 후,

- 하나님께 부여받은 자신의 절대 가치를 믿음으로,

- 하나님의 자녀로, 자기답게 살아가는 것만이 진정한 회복이다.

 

결론 - 헛된 꿈 깨자.

우리는 상대적 비교 우위로 기쁨과 평안을 누릴 수 있다고 착각한다.

- 상황이 나아지고 부족한 것이 채워지면, 회복될 것이라고 착각한다.

 

그러나 상대 가치 사고방식으로는 결코 회복될 수 없다.

- 예수님 당시 정치적, 경제적, 영적 권력을 전부 가졌던 바리새인이 예수님 앞에서 죽을 듯 두려워했던 것처럼 말이다.

- 그래서 예수님일 기필코 죽이지 않으면, 불안함을 주체할 수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 또한 대한민국 최고 부자 이건희 회장이 불안함을 억누르기 위해 매춘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이스라엘이 우상 숭배를 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같은 불안 때문이었다.

-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강대국의 우상을 끌고 왔다.

- 그래서 자신이 강대국과 같은 가치를 가졌다는 것을 증명하려 했다.

- 이렇게라도 자기 가치를 증명하지 못하면 도태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다.

우리가 돈을 벌고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여 세상에서 인정받고자 하는 것도 같은 불안 때문이다.

- 사고방식이 상대주의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 비교 우위로 가치를 평가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상대 가치 사고방식은 불안을 증폭시킨다.

 

이 불안에서 벗어날 유일한 길은 절대 가치를 인정하는 것뿐이다.

- 오직 절대 가치를 깨달을 때만 불안에서 벗어나 회복될 수 있다.

- 하나님이 유일한 절대 가치이며, 자신을 절대 오물임을 인정할 때만 평안해진다.

 

따라서 우리가 바라는 회복은 우리를 회복시키지 못한다는 것을 기억하자.

-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는 것만이, 

- 그리고 자신을 오물로 여기고 부정하는 것만이 우리를 회복시킬 것이다.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로서, 누구에게도 증명할 필요 없는 존재라는 것을 자각하여,

- 진정한 평안을 회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