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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서

예레미야(61) 31:23-40 땅과 백성 회복의 의미 - 정체성과 노동 회복

<미양교회 팟캐스트 양따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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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교차 대구 구조’이다. 

a: 23~26절 - 땅의 회복: ‘거룩한 산’인 예루살렘 땅의 회복 선포

   b: 27~30절 - 백성의 회복: ‘씨’인 백성의 회복 선포

      c: 31~34절 - 새 언약 선포: 나는 그들의 하나님, 그들은 나의 백성

   b’: 35~37절 - 백성 회복의 확고함: 자연 질서와 같은 백성 회복의 확고함

a’: 38~40절 - 땅 회복의 확고함: 예루살렘 성전 회복의 확고함

- 교차 대구 구조는 a - b - c - b‘ - a’ 형태로, 

- c의 메시지 전달을 목적으로 하는데,

- c의 메시지를 a와 b의 메시지가 구체화한다.

 

따라서 본문의 핵심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 회복’이다.

[렘 31:33] 그러나 그 시절이 지난 뒤에, 내가 이스라엘 가문과 언약을 세울 것이니, 나는 나의 율법을 그들의 가슴 속에 넣어 주며, 그들의 마음 판에 새겨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 돌판에 기록된 옛 언약은 이스라엘이 깨뜨려 버렸다.

- 그러나 새 언약은 마음 판에 새겨져서 영원히 기억된다.

여기서 돌 판(옛 언약)과 마음 판(새 언약)의 차이는 무엇이냐?

- 누군가는 ‘비가역성’이라고 말한다.

- 옛 언약은 잠재적으로 파기 가능성이 있고, 새 언약은 파기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다.

- 그래서 옛 언약은 불완전한 언약이고, 새 언약은 완전한 언약이라는 것이다.

- 이는 구약 성경은 열등하고, 신약 성경은 우월하다는 인식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는 성경이 부정한다.

- 새 언약을 받고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 예루살렘에 정착한 새로운 이스라엘은 또 멸망한다.

- 예수님 시대에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였다.

- 특히 바리새인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버렸다.

- 즉, 새 언약을 받은 이후에도 언약은 파기된다.

그런 점에서 옛 언약과 새 언약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의 지위는 동일하다.

 

결정적인 차이는 ‘확장성’이다.

- 돌 판에 기록된 옛 언약은 영향을 미치는 영역이 제한적이다.

- 돌 판이 갖는 물리적인 한계 때문이다.

- 그래서 하나님의 영향력이 이스라엘 민족에 한정되었다.

그러나 마음 판의 영향력은 제한이 없다.

- 하드웨어가 아니라 소프트웨어이기 때문이다.

- 물리적인 컴퓨터는 한자리에 있어도, 컴퓨터 안의 파일은 무한히 전달되는 것처럼 말이다.

- 따라서 하나님의 실체가 사람을 통해 무한히 전달된다.

-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에 한정되지 않고 온 인류에게 확장된다.

이것이 옛 언약과 대비되는 새 언약, 즉 신약 시대의 결정적인 차이이다.

 

그런 점에서 새 언약은 옛 언약의 한계를 극복했다.

- 이스라엘에 제한된 언약에서 온 인류에게 확장된 언약이 되었다.

하지만 그것 외에는 옛 언약의 특징을 모두 똑같이 가지고 있다.

- 그중에 본문이 다루는 것은 ‘비가시성’이다.

- 풀어 말하면,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것을 눈으로 보고 확인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관계를 깨뜨렸다는 것도 즉시 드러나지 않았다.

-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갔을 때야 비로소 드러났다.

- 그 지경이 될 때까지 이스라엘은 자신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버렸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이 회개하여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된 것도 즉시 드러나지 않았다.

- 이스라엘이 포로에서 귀환하여 땅과 백성을 되찾을 때 비로소 드러난다.

 

진리의 비가시성

왜 보이지 않냐?

- 관계의 본질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 말과 행동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물론 마음이 변하면 말과 행동도 변한다.

- 장기적 관점에서,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면 사랑을 고백하고 헌신하게 된다.

- 오랜 시간을 통해서조차 말과 행동의 변화가 없다는 것은 마음이 없다고 단정할 수 있다.

그러나 단기적으로는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도 사랑 고백과 헌신을 할 수 있다.

- 마음이 없어도 일시적으로 말과 행동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반면에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도, 일시적으로 말과 행동이 나오지 않을 수 있다.

- 마음은 있지만 표현 방법을 몰라서 못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관계 회복을 드러내 보일 수단이 필요했다.

- 하나님께서 새 언약을 주셨고, 이스라엘은 회개하고 마음을 바꾸어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했다.

- 이렇게 관계 회복의 본질이 마음에서 일어났다.

- 하지만 이 엄청난 변화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a와 b에서 땅과 백성이 회복될 것을 선포한 것이다.

- a와 b에서는 땅과 백성 회복을 선포하고,

- a’와 b‘에서는 땅과 백성 회복이 확고함, 굳건함, 영원함을 선포한다.

- 그래서 36, 37절에서는 새 언약이 자연 질서보다 더 확고하며,

- 40절에서는 영원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두 가지 역할을 한다.

- 첫째로, 이스라엘 자신에게 중요하다.

- 자신을 하나님이 용서하셨고 사랑하신다는 확신을 갖게 한다.

- 그래서 하나님을 거부했던 자신을 사랑하신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게 한다.

- 둘째로, 온 인류에게 중요하다.

- 하나님을 거부했던 이스라엘조차 사랑받는 모습을 보고,

- 온 인류가 참 사랑을 받기 위해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한다.

이것이 땅과 백성 회복을 선포한 이유이다.

- 보이지 않는 관계 회복을 드러내 보이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땅과 백성 회복의 한계도 정확히 알아야 한다.

- 땅과 백성의 회복은 관계 회복을 드러내는 결정적인 수단이지만,

- 동시에 관계 회복을 왜곡하는 결정적인 수단이다.

- 관계 회복은 땅과 백성 회복에 의해서만 드러날 수 있지만,

- 동시에 땅과 백성 회복에 의해서 가장 심하게 왜곡되기도 한다.

- 땅과 백성의 회복을 통해 관계 회복을 바라볼 수 있으면 최선이지만,

- 관계 회복을 땅과 백성의 회복으로 제한하면 최악이 된다.

따라서 땅과 백성의 회복을 버리면 관계 회복을 드러낼 방법이 없어지고,

- 반대로 땅과 백성의 회복을 이용하면 관계 회복이 왜곡된다.

 

이 때문에 ‘가난한 마음’이 중요하다.

가난한 마음을 갖고 관계에 갈급함을 가진 사람은 땅과 백성의 회복을 통해 관계 회복의 본질을 본다.

- 갈급한 사람은 땅과 백성의 회복으로 만족하지 못한다.

- 그래서 진정한 관계 회복의 본질까지 나아가지 않을 수 없다.

- 땅과 백성의 회복을 철저히 수단으로만 이용하여, 관계 회복에 집중한다.

그러나 풍요한 마음으로 관계에 갈급함이 없는 사람은 땅과 백성의 회복에 충분히 만족한다.

- 그러니 진정한 관계 회복의 본질까지 나아갈 필요가 없다.

- 그래서 땅과 백성의 회복을 수단이 아니라 본질로 착각한다.

 

이것이 진리가 갖는 속성이다.

- 진리는 너무 완전해서, 그 자체로는 이해할 수 없다.

- 진리는 드러낼 수단이 필요하다.

- 하지만 수단은 진리를 왜곡하는 결정적인 도구가 된다.

- 이는 필연적이다.

그래서 진리를 진정으로 원하는 사람만 수단을 통해 진리를 본다.

- 그러나 진리를 원하는 척하는 사람은 수단을 진리로 착각한다.

- 그래서 결코 진리를 볼 수 없다.

 

그런 관점에서 전도 방식도 새롭게 볼 필요가 있다.

- 바른 전도를 위해 수단이 진리로 오해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 그러나 아무리 완벽하게 전도했다고 해도, 오해의 여지가 완전히 제거되지 않는다.

- 하물며 예수님의 완벽한 전도를 듣고도 오해한 사람이 있었다.

- 가장 상징적인 인물이 베드로이다.

- 베드로 역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민족 독립이 본질이라고 착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전도에서 중요한 것은 전도 자체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 전도할 대상을 잘 찾는 것도 중요하다.

- 상대방이 진리를 원하는지 아닌지, 마음이 가난한지 아닌지를 구분하는 것도 중요하다.

- 그래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을 찾아서 그에게 집중하는 것이 필요하다.

- 마음이 풍요한 사람에게는 발에서 먼지 털고 떠나는 것도 필요하다.

 

그렇다면 마음이 가난한 사람을 어떻게 찾느냐?

오답부터 말하면, 딱 보고 한눈에 알 방법은 없다.

- 또 오답을 말하면, 열 번, 백 번, 천 번 본다고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정답은, 우리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을 알아볼 수 없다.

- 아무리 내 눈에 가난해 보인다고 해도, 단언컨대, 틀렸다.

그래서 일단 누구에게라도 전도해야 한다.

- 절대로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 일단 모든 상대가 가난한 마음을 가졌다고 가정하고 전도해야 한다.

그런데 전하고 전하고 전해도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 그때는 포기하고 다른 사람에게 가야 한다.

- 진리를 거부하는 사람에게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도 옳지 않다.

 

그렇다면 언제까지 참고 전도해야 하나?

- 역시 답은 없다.

- 유일하게 할 수 있는 말은 ‘할 수 있을 때까지’이다.

- 최선을 다하되, 지나치게 집착하면 안 된다.

그래서 예수님조차 제자들에게 전도 여행을 시키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다.

[막 6:10~11] 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디서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그 곳을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 있어라. (11) 어느 곳에서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않거나, 너희의 말을 듣지 않거든, 그 곳을 떠날 때에 너희의 발에 묻은 먼지를 떨어서, 그들을 고발할 증거물로 삼아라.

-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에게 끝까지 집착하지 말고,

- 발에 묻은 먼지를 떨고, 다른 사람에게 떠나라고 말이다.

 

따라서 땅과 백성의 회복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 그런 점에서 본문의 핵심은 31~34절의 관계 회복이지만,

- 관계 회복의 참된 의미를 규정하는 것은 나머지 구절에 나오는 땅과 백성의 회복이다.

- 그래서 관계 회복 자체보다 땅과 백성의 회복을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 왜냐하면 땅과 백성의 회복을 통해서만 관계 회복의 참뜻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땅과 백성의 회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했고, 

- 그 본질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땅과 백성의 회복이 일어났다.

- 그래서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이는 예수님도 사용하신 방법이다.

- 마가복음은 2장에서 예수님은 지붕을 뚫고 내려온 중풍병 환자를 보시고, 

- 대뜸 ‘죄 사함’을 선포하신다.

[막 2:5]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 환자에게 이 사람아! 네 죄가 용서받았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를 본 율법학자는 신성모독이라며 정죄한다.

- 왜냐하면 죄 사함은 하나님만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 함부로 죄 사함을 선포하는 것은 자신을 하나님과 동일시하는 죄이다.

[막 2:6~7] 율법학자 몇이 거기에 앉아 있다가, 마음 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기를 (7) ‘이 사람이 어찌하여 이런 말을 한단 말이냐? 하나님을 모독하는구나. 하나님 한 분 밖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는가?’ 하였다.

그렇게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예수님은 곧 바로 다시 치유 기적을 일으키신다.

- 중풍병 환자는 그 즉시 건강이 회복되어, 일어나 걸어서 나간다.

 

그렇다면 여기서 ‘건강 회복’이 뜻하는 것은 무엇인가?

- 언뜻 보면, 이를 예수님의 치유 능력을 보여주는 수단으로 착각할 수 있다.

- 마치 이스라엘 땅과 백성의 회복을 보고, 그것을 하나님 능력의 본질이라고 착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 그래서 하나님 믿으면 자신에게도 재산, 건강, 명예 등이 회복될 것이라 기대하고,

- 회복되지 않으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부정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건강 회복은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본질을 증명하는 수단일 뿐이다.

- 그래서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치유 기적 이전에 죄 사함을 선포하신 것이다.

- 죄 사함 능력은 너무 본질적이어서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데,

- 겉으로 드러나는 치유 기적을 통해 예수님께 죄 사함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신 것이다.

- 이를 통해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간접적으로 증명하셨다.

이렇게 치유 기적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증명하는 결정적인 수단임과 동시에,

- 예수님을 병을 치유하는 의사 나부랭이로 전락시키는 결정적인 수단이 된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는 우리에게도 고스란히 남아있다.

- 이스라엘이 땅과 백성을 회복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을 소원을 성취해주는 요술램프 지니로 착각할 가능성이 있다.

- 반면에 그렇다고 땅과 백성의 회복을 부정하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가능성 자체가 사라진다.

따라서 땅과 백성의 회복을 우리의 개인적인 일상에 적용하는 것은 엄청나게 섬세해야 한다.

- 만약 조금이라도 적용을 잘못하면, 하나님을 왜곡할 수 있고,

- 그렇다고 적용하지 않으면, 일상에서 하나님을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해서, 땅과 백성의 회복을 일상에 적용하면 ‘정체성과 노동의 회복’이다.

- 땅과 백성을 정체성과 노동과 연결하기 전에 먼저 해야 할 것은 땅과 백성을 정의하는 것이다.

- 본문에서 땅과 백성은 무엇을 의미할까?

 

우선 땅은 두 가지 속성이 있다.

첫째로, 명확한 경계선이 있다.

- 그래서 하나님은 예루살렘 성의 경계선을 구획하시며 땅의 회복을 선포하신다.

[렘 31:38~40] 그 때가 오면, 이 도성이 나 주의 것으로 재건될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하나넬 망대에서부터 모퉁이 성문에 이르기까지 이어지고, (39) 거기서 측량줄이 가렙 언덕에 이르기까지 곧게 앞으로 나갔다가 고아 쪽으로 돌아가고, (40) 그 다음에 시체와 잿더미로 가득 찬 골짜기 전역과, 기드론 시냇가에서 동쪽의 밭들의 모퉁이에 이르는 모든 평지가 나 주의 거룩한 땅이 되고, 절대로 다시는 뽑히거나 허물어지는 일이 없을 것이다.

- 이렇게 선포한 이유는 현재 경계선이 무너져 없다는 뜻이다.

 

둘째로, 땅 경계선의 주체가 하나님이다.

- 그래서 하나님은 땅을 ‘정의의 보금자리’, ‘거룩한 산’, ‘나 주의 것’, ‘나 주의 거룩한 땅’이라고 하신다.

[렘 31:23] 나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한다. 내가 포로로 잡혀 간 사람들을 돌아오게 할 때에, 사람들은 유다 땅과 유다의 성읍에서 이런 말을 다시 하게 될 것이다. ‘너 정의의 보금자리, 거룩한 산이여, 주님의 복을 받아라.’

[렘 31:38~40] 그 때가 오면, 이 도성이 나 주의 것으로 재건될 것이다. … 모든 평지가 나 주의 거룩한 땅이 되고, 절대로 다시는 뽑히거나 허물어지는 일이 없을 것이다.

- 이는 현재 이스라엘이 땅 경계선의 주체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잊었다는 뜻이다.

 

이러한 땅의 의미를 개인 일상에 적용하면,

- 우리는 우리 인생의 명확한 경계선, 즉 정체성을 모른다.

- 자기 영역임에도 포기하거나, 자기 영역이 아님에도 집착한다.

- 그래서 자기 존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그리고 무엇을 할 수 없는지 모른다.

- 할 수 있는 것을 할 수 없다고 착각하여 포기하고,

-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다고 착각하여 집착한다.

예를 들어, 돈이 없으면 행복해질 수 없다고 착각하여, 좋아하는 일을 포기하거나,

- 돈을 벌어 풍요롭게 생활해야 행복해질 수 있다고 착각하여, 돈에 집착한다.

 

게다가 자기 정체성을 잃는 이유가 자신의 주체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 경계선을 찾고 경계선 안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뿐인데,

- 자신이 행복할 수 있는 주체가 자신이고, 

- 자신이 돈, 명예, 인정, 안정을 스스로 이뤄내면 행복할 수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이는 이스라엘이 땅을 빼앗긴 이유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 이스라엘이 땅을 지키기 위해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을 믿고 백성을 돌보는 것이었다.

- 그렇게 하나님의 돌보심 안에서 백성을 돌보아 국가 자생력을 키울 때,

- 주변 강대국의 침략에서 땅을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 일을 할 수 없다고 착각해서 포기했다.

- 대신 주변 강대국을 의존했다.

- 그래서 강대국의 우상을 숭배하고 조공을 바치기 위해 백성을 착취했다.

- 이렇게 해야 땅을 지킬 수 있다고 착각했다.

 

이스라엘은 자기 힘으로 땅을 지킬 수 없었다.

- 이는 이스라엘이 할 수 없는 것이다.

- 하나님을 의지할 때만 땅을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자기 힘으로, 강대국을 의존하면 땅을 지킬 수 있다고 착각했다.

- 그래서 강대국에 집착했다.

- 그래서 우상을 숭배하고 백성을 착취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땅을 빼앗기고 멸망한 결정적인 이유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땅을 회복하신다.

- 이스라엘 땅의 명확한 경계선을 구획하고,

- 땅 경계선의 주체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선포하셨다.

- 그래야만 이스라엘이 행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땅을 회복시키실 것이다.

- 우리의 정체성을 명확하게 구획하고,

- 정체성의 주체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확증하실 것이다.

- 그래야 우리가 행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도 이것을 위해 삶에서 실제로 노력해야 한다.

- 경계선을 명확하게 찾기 위해 내가 누구인지, 

-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고, 할 수 없는지, 

- 할 수 있는데 포기하거나, 할 수 없는 데 집착하는 것이 무엇인지,

- 그래서 할 수 있는 것은 더욱 최선을 다하고, 할 수 없는 것은 더욱 과감하게 포기해야 한다.

- 그래서 자기 영역은 더욱 굳건히 지키고, 자기 영역이 아닌 것은 더욱 냉정하게 버려야 한다.

- 소홀히 하는 자기 영역과 집착하는 자기 외 영역을 계속해서 구분해야 한다.

그런데 이 구분은 우리 혼자 힘으로 불가능하다.

- 정체성 구분의 주체가 자신이 될 수 없다.

- 하나님과 관계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과 관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 그래서 자기 인생의 주체가 자신이 아닌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더욱 깨달아야 한다.

 

다음으로 백성의 속성은 세 가지이다.

첫째로, 땅을 이루는 것 중에 가장 핵심은 백성이다.

[렘 31:24] 그 때에는 유다와 그 모든 성읍에 사람들이 이주하여 살고, 농부들도 농촌에 모여 살고, 유랑하는 목자들도 가축 떼를 몰고 다닐 것이다.

- 하나님은 땅을 회복하신 후 가장 먼저 사람을 채우신다.

- 땅은 땅 자체로는 아무 의미 없고, 사람으로 채워질 때만 의미를 갖는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땅을 지키기 위해 백성을 희생시켰다.

- 그래서 결국 땅을 지키기 위한 행동으로 오히려 땅을 잃는다.

 

둘째로, 백성의 회복은 씨를 뿌리고 가꾸는 노동으로 표현된다.

[렘 31:27] 그 때가 오면,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를 뿌리겠다. 나 주의 말이다.

[렘 31:28] 내가 전에 그들을 뽑아내고 부수고 무너뜨리고 멸망시키고 재앙에 빠뜨리려고, 감시를 늦추지 않았으나, 이제는 내가 그들을 세우고 심으려고, 감시를 늦추지 않겠다. 나 주의 말이다.

- 하나님이 회복된 백성으로 하시는 일은 ‘노동’이다.

- 그런 점에서 백성과 노동은 동일시된다.

 

셋째로, 하나님은 자연 만물을 다스리셔서, 노동의 성과를 결정하는 주체이시다.

[렘 31:35] 낮에는 해를 주셔서 빛을 밝혀 주시고, 밤에는 달과 별들이 빛을 밝히도록 정하여 놓으시고, 바다를 뒤흔들어 파도가 소리 치게 하시는 분, 그 이름은 만군의 주님이시다. …

- 그러나 이스라엘은 성과를 자신이 통제할 수 있다고 착각했다.

- 그래서 우상 숭배와 백성 착취를 범했다.

 

이러한 백성의 의미를 개인 일상에 적용하면,

- 우리가 경계선을 잃어서 빼앗긴 것 중에 가장 핵심적인 것은 노동의 기쁨이다.

- 노동은 자기 경계선을 최대로 표현할 기회의 장이고,

- 사람은 자신을 표현할 때 행복할 수 있다.

- 그래서 노동은 행복한 것이다.

그러나 경계선을 잃고 자기 정체성을 잃었기에,

- 노동을 해도 자신을 표현할 수 없고,

- 그래서 노동에서 기쁨을 얻을 수 없다.

- 오히려 노동이 저주가 되었다.

[창 3:17] 남자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아내의 말을 듣고서, 내가 너에게 먹지 말라고 한 그 나무의 열매를 먹었으니, 이제, 땅이 너 때문에 저주를 받을 것이다. 너는, 죽는 날까지 수고를 하여야만, 땅에서 나는 것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경계선이 회복되면 노동의 기쁨이 회복된다.

- 부, 명예, 인정, 안정을 얻지 못할지라도, 풍요롭게 살 수 없을지라도,

- 노동으로 자신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기에 누구보다 행복할 수 있다.

- 그래서 하나님도 가장 자기다울 때 천지 창조라는 노동을 하신 것이다.

- 자기다운 노동만이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기다운 노동은 하나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 자기다운 노동을 지속하려면, 최소한의 성과가 보장되어야 한다.

- 오늘 하루의 노동을 통해 얻은 성과가 적어도 내일 노동을 할 수 있는 식량만큼은 되어야 한다.

- 그래야 노동을 지속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이 노동의 성과를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 똑같이 씨를 뿌려도, 해와 비가 적당하면 풍년이 들지만,

- 태풍이 오면, 흉년이 된다.

- 오직 자연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만이 노동의 성과를 결정하신다.

- 반대로 하나님이 아닌 자신의 노력을 의지하면, 성과를 내지 못해 이스라엘처럼 멸망한다.

- 따라서 자기다운 노동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지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지 못하면 자기다운 노동을 할 수 없다.

- 하나님을 믿지 못하면 돈을 위한 노동, 생계를 위한 노동을 할 수밖에 없다.

- 그래서 노동의 노예가 되고, 노예의 노동을 하게 된다. 

 

이 역시 이스라엘이 백성을 빼앗긴 이유와 일치한다.

- 처음에 이스라엘에게 부과된 노동은 쉽고 기쁜 것이었다.

-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백성을 사랑으로 돌보는 것이었다.

- 사랑하는 하나님과 백성을 사랑하는 쉽고 즐거운 노동이었다.

- 그것이 이스라엘의 정체성이었다.

-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두 가지 노동만 하면, 이스라엘을 영원히 지켜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 약속에 만족하지 않았다.

-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보장하시는 생활보다 더 높은 풍요와 사치를 원했다.

- 풍요와 사치를 위해 쉬운 노동을 버리고 가혹한 노동을 선택했다.

- 이스라엘은 강대국을 통해 풍요와 사치를 누리기 위해 우상을 숭배하고 백성을 착취했다.

-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은 형편에 맞게 양, 비둘기, 곡물이면 충분했지만,

- 우상에게 바치는 제물은 형편과 상관 없이 귀하고 화려한 것이었고,

- 그 극단에는 인신 제사까지 있었다.

[렘 32:35] 또 그들은 자기들의 아들딸들을 불태워 몰렉에게 제물로 바치려고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 바알의 산당을 쌓아 놓았는데, 나는 절대로 유다 백성을 죄악에 빠뜨리는 이 역겨운 일은 명하지도 않았고, 상상조차도 해본 적이 없다.

- 처절하고 가혹한 노동이었다.

- 게다가 강대국에 조공을 바치기 위해 백성의 노동력을 가혹하게 착취했다.

이러한 우상 숭배와 백성 착취는 결국 이스라엘의 백성을 희생시켰고,

- 백성이 소진되자, 국가도 멸망한다.

- 왜냐하면 국가의 본질은 백성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백성을 회복하신다.

- 정확하게 말하면, 노동을 회복하신다.

- 가혹한 노동을 쉬운 노동으로 바꾸신다.

- 풍요와 사치를 위해 노동의 노예에서 건지셔서,

- 사랑하는 하나님과 백성을 사랑하는 노동의 주인으로 옮기신다.

무조건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제물 대신 형편에 맞는 제물만 바치도록 하신다.

- 그리고 강대국에 조공을 바치지 않기에, 자신이 먹을 만큼만 노동하게 하신다.

- 게다가 자연 만물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노동의 성과까지 보장해 주신다.

- 그러니 이전보다 노동 시간이 줄고 여유 시간이 늘어난다.

- 그 시간에 사랑하는 사람을 더욱 사랑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의 노동을 회복하실 것이다.

- 풍요와 사치를 위해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는 노동에서 벗어나,

-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는 노동을 하게 하실 것이다.

- 최소한의 노동으로도 최소한의 삶을 보장해 주실 것이다.

- 그렇게 해서 남은 시간은 사랑하는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도록 하실 것이다.

노동도 쉼도 사랑뿐이니, 어찌 행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그러니 우리는 더욱 더 풍요와 사치의 노예에서 벗어나야 한다.

- 하나님이 보장해 주시는 소박한 삶에 만족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 왜냐하면 노력하는 만큼 우리의 노동과 쉼이 더욱 더 사랑으로 채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관계 회복의 참 뜻이다.

- 정체성을 되찾고, 노동의 기쁨을 깨닫는 것이다.

아담은 자기 정체성을 포기하고 하나님이 되려고 하다가, 가혹한 노동이라는 저주를 받았다.

- 그러나 하나님은 다시 언약을 맺으셨다.

-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통해 정체성을 되찾고, 노동의 기쁨을 얻도록 하셨다.

바로 이것이 아담에게 내려졌던 저주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결론 - 참된 자유는 기쁘게 노동할 자유이다.

세상이 전하는 자유는 마음대로 하는 것이다.

- 극단적으로 말해서, 원하는 것은 마음대로 빼앗고, 원하지 않은 것은 마음대로 버리며,

-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도 풍요롭게 사는 것이다.

- 특히 세상은 노동하지 않을 자유를 원한다.

 

만약 그것이 참된 자유라면, 성경의 하나님은 해석되지 않는다.

- 완전한 자유를 가지신 하나님이 태초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종말까지 쉼 없이 노동하시기 때문이다.

- 애써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힘겹게 세상을 관리하시며, 그러한 노동 때문에 괴로워하신다.

- 언뜻 보기에, 하나님은 노동의 노예처럼 보인다.

- 자유로운 하나님이 노동하시는 것을 이해하기 어렵다.

그런데 왜 이해하기 어렵냐면, 노동은 힘들고 하기 싫은 것이라는 인식 때문이다.

- 노동하는 것을 자유가 없는 상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노동은 나쁜 것인데, 노동의 성과를 얻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이라는 전제 때문이다.

- 그래서 자유로운 하나님은 노동에서 자유로워야 한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이는 아담의 저주 아래 놓인 사람이 갖는 사고방식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노동하실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노동을 좋아하신다는 점이다.

- 하나님은 노동을 좋은 것으로 생각하신다.

- 그래서 기꺼이 노동의 노예를 자처하신다.

과연 하나님은 노동의 성과를 얻기 위해 노동하실까?

- 하나님은 노동하지 않아도 성과를 만들어 내실 수 있는 분이다.

- 하나님께 성과는 중요하지 않다.

- 성과로 자신을 증명하실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노동 그 자체를 좋아하신다.

- 도대체 노동이 뭐길래 그 자체를 좋아하실까?

 

한마디로, 노동은 자기 자신을 외부로 표현하는 행위이다.

- 그런 관점에서 노동을 볼 때 하나님이 이해된다.

- 하나님은 자기를 표현하기 위해 천지를 창조하신 것이다.

- 하나님의 정체성은 사랑의 관계이다.

- 그래서 하나님은 삼위일체로 존재한다.

- 존재의 근원부터 하나님은 사랑의 관계에 근거한다.

그런데 그 사랑을 하나님 내부에만 담고 있을 수 없었다.

- 어떻게든 외부로 표출하고 싶었다.

- 안에 있는 정체성을 외부까지 확장하고 싶었다.

- 하나님 자신 외에 다른 누군가를 반드시 사랑하길 원하셨다.

- 그렇게 자기 정체성을 표현하셔야만 했다.

여기서 바로 노동이 시작된다.

-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 하나님은 사랑할 사람을 만드는 노동을 시작한다.

- 그것을 위해 자신과 동일하게 사랑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사람을 만든다.

- 그래서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신 것이다.

- 그리고 그 사람도 정체성을 표현하며 살 수 있도록 세상을 만드는 노동을 하신다.

이것이 천지 창조의 이유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노동을 봐야 한다.

- 노동은 오직 하나님에서 비롯된 사랑을 표출하는 것으로만 정의할 수 있다.

- 이 안에서만 노동의 기쁨을 누릴 수 있고,

- 노동의 기쁨 안에서만 삶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

반대로 노동을 사랑이 아닌 다른 것으로 정의하면,

- 노동을 거래의 수단으로써,

- 더 높은 지위로 올라가서 다른 사람을 지배하기 위한 수단으로 인식하면,

- 아무리 원하는 것을 얻어도, 노동의 저주 속에서 괴로운 노동만 하다가 괴롭게 죽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아담이 받은 저주이다.

 

그렇다면 노동의 저주에서 벗어나 노동의 기쁨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그 답을 본문이 말해준다.

- 노동을 상징하는 백성의 회복은 땅의 회복을 전제하고,

- 백성과 땅의 회복은 새 언약을 통한 하나님과 관계 회복을 전제한다.

따라서 노동의 회복은 정체성 회복을 전제하고,

- 노동과 정체성 회복은 하나님과 관계 회복을 전제한다.

 

결국 유일한 해법은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다.

- 하나님을 유일한 절대 가치로 여기고, 자신을 비롯하여 세상 만물을 전부 절대 오물로 인정하는 것이다.

- 그래서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며, 자신을 하나님의 백성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것의 본질이기 때문에, 평생 기억하며, 영원토록 반복해야 할 고백이다.

- 여기까지가 미양 교회가 지금까지 수년 동안 반복한 메시지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멈추면 안 된다.

- 이 토대 위에서 새롭게 인생을 쌓아 가야 한다.

- 여기서부터가 진짜 신앙생활이다.

- 여기서부터 신앙과 생활이 연결되고 하나 된다.

이 고백을 근거로 자기 정체성을 되찾아야 한다.

-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수록 개인의 인격이 소거되는 것이 아니라,

- 더 선명해지고 명확해진다.

- 왜냐하면 하나님이 관계 맺는 목적이 인격 소멸이 아니라 회복이며,

-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우리를 더욱 우리답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이렇게 오해하면 안 된다.

- 현재 나는 돈, 명예, 인정, 안정, 풍요를 욕망하는데,

- 이전에는 욕망을 억누르느라 절제하며 살았지만,

- 이제는 욕망을 당당하게 드러내며 살겠다고 한다.

- 그것이 정체성 회복이고 자유라고 오해한다.

이는 욕망과 정체성을 혼동한 것이다.

- 욕망은 자기 경계선의 일부를 포기하거나, 자기 경계선 외의 영역을 집착해서 생긴 부산물이다.

- 돈을 욕망하는 것은 결핍을 채우고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 생긴 것이다.

따라서 정체성은 욕망의 실현이 아니라 욕망의 절제와 포기를 통해 드러난다.

- 그리고 욕망의 절제와 포기는 결핍이 채워질 때 가능하며,

- 결핍은 오직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로만 채워진다.

그래서 하나님과 관계만이 정체성을 되찾게 해준다.

 

하지만 정체성을 찾았다고 끝이 아니다.

- 정체성 회복 역시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 겉으로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이제부터 진짜 고민이 시작된다.

- 그것은 회복된 정체성을 어떻게 표출할 것인가이다.

- 어떻게 표현할 때 세상에 오해 없이 왜곡 없이 있는 그대로 자신을 전달할 수 있느냐이다.

 

이 고민의 전제는 세상이 왜곡되어 있다는 것이다.

- 우리가 자신을 있는 그대로 표현해서는, 절대로 세상에 있는 그대로 표현할 수 없다는 뜻이다.

- 세상 모든 사람이 굴절된 안경을 쓰고 있기 때문에,

- 있는 그대로 표현하면, 세상은 굴절된 상태로 인식한다.

- 그래서 오히려 자신을 반대로 굴절된 상태로 표현해야 세상은 바르게 인식한다.

그래서 예수님도 처음부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시지 않았다.

- 공생애 시작부터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밝히지 않았다.

- 특히 십자가에서 무능하게 죽는 존재로 자신을 드러내셨다.

정말 하나님이 무능하기 때문이 아니라, 

- 무능한 모습으로 왜곡해서 자신을 표현할 때만 세상이 하나님을 바르게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체성을 표출하는 노동을 고민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 자신을 어떻게 왜곡해서 표현할 때 세상에 가장 바르게 전달할 수 있을지 말이다.

 

이는 종합 예술의 영역이다.

가장 근원적인 토대에 하나님과 바른 관계가 있어야 한다.

- 이것부터가 어렵다.

게다가 그 토대 위에서 자기 정체성을 바르게 인식해야 한다.

- 왜곡되고 변질된 수많은 욕망과 싸워야 한다.

- 인정과 안정 욕망을 포기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 세상의 굴절된 안경, 즉 세상의 왜곡된 인식까지 이해해야 한다.

- 그래야 세상이 바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자신을 반대로 왜곡해서 표현할 수 있다.

여기까지 와야 비로소 바른 노동이 가능하다.

- 노동의 노예가 되어 가혹한 노동에 짓눌리는 것이 아니라,

- 자유로운 노동으로 자신을 표출하며, 하나님과 세상을 사랑할 수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가 완성되는 순간이다.

 

과연 우리가 이 경지에 이를 수 있을지 모르겠다.

- 하나님, 자신, 세상을 이해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싶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길이 옳다는 것이다.

- 하나님을 위해서도, 자신을 위해서도, 인류를 위해서도 말이다.

 

물론 우리가 반드시 성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이 있다면, 

- 너무 괴롭고 고통스러워서 포기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성과 압박은 없다.

-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이 갔는지가 아니라,

- 조금밖에 가지 못했어도, 바른 방향을 향하느냐이다.

- 속도가 아니라, 가속도와 방향이다.

게다가 이 길은 혼자 가는 것이 아니다.

-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이며,

- 함께 갈 교회가 있다.

- 가장 사랑하는 두 존재와 동행한다.

 

당연히 고난이 있을 것이다.

- 세상이 우리를 부정하고, 거부할 것이다.

- 스데반이 죽임당하듯, 죽임당할 것이다.

하지만 세상 누구보다 기쁠 것이다.

-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하나님, 자신, 세상을 사랑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노동이기 때문이다.

-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데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함께 이 길로 가자.

- 죽더라도 함께 죽자.

- 비겁하게, 추하게, 어리석게, 부끄럽게 살지 말고,

- 당당하게, 멋있게, 자기답게, 그리스도인답게 죽자.

그 죽음의 길에만 생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