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양교회 팟캐스트 양따양>
미양교회에서 했던 설교를 바탕으로 진솔하게 신앙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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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양을 따르는 어린양
예배 대신 예수님, 설교 대신 성경, 건물 대신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미양교회가 만드는 방송입니다.토끼와 개구리가 진솔하게 신앙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어린양과 같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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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본문에서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땅 매매 명령을 거부했다.
- ‘어차피 파괴되어 쓸모없게 될 땅인데,
- 왜 하나님은 저더러 비싼 돈 주고 땅을 사라는 것입니까?
- 게다가 조용히 하는 것도 아니고 증인까지 세워서,
- 제가 어리석게 돈 낭비했다는 것을 온 동네 사람에게 알리려 하십니까?
- 안 그래도 40년 동안 멸망 예언하느라 온 동네 사람에게 박해받았는데,
- 이제 좀 인정받으려 하니까, 또 바보짓을 하라는 말입니까?
- 도저히 창피해서 못 살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예레미야의 마음이 25절에 짧은 질문으로 담겨있다.
[렘 32:25] 주 하나님, 어찌하여 주님께서는 이 도성이 이미 바빌로니아 군대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저더러 돈을 주고 밭을 사며, 증인들을 세우라고 말씀하셨습니까?
- 예레미야는 멸망을 예고하여 박해받았던 지난 세월에 대한 괴로움과
- 그 괴로움을 주신 하나님에 대한 원망을 꾹꾹 눌러 짧은 질문에 담았다.
괴로움은 신앙의 숙명
반복해서 말하지만, 신앙에는 부정적인 측면이 있다.
- 억울함, 짜증남, 화남, 괴로움, 아픔, 슬픔, 속상함, 답답함 등 말이다.
그런 점에서 예레미야가 느낀 괴로움과 원망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 바른 신앙을 가지려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느낄 수밖에 없다.
- 더 나아가, 신앙에서 부정적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은 바른 신앙을 갖지 못했다는 것을 반증한다.
- 인생의 주도권을 하나님께 맡기지 않고 여전히 자기가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 그래서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 자기 뜻을 거스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신앙을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예수님의 죽음 때문이다.
- 예수님은 죽기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 제자들과 올라가셔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 26:38~39] 그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너희는 여기에 머무르며 나와 함께 깨어 있어라.” (39) 예수께서는 조금 더 나아가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서 기도하셨다. “나의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주십시오.
- 예수님도 신앙이 너무 괴로워 죽을 지경이었다.
- 그래서 하나님께 신앙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기도까지 하신다.
- 아무런 죄 없으며 신이신 예수님께서 죄 많은 사람에게 죽임당해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억울하셨겠는가.
- 명예롭게 죽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 저주받은 죄인으로 취급받아 죽는다는 것이 예수님을 더욱 억울하고 답답하게 했을 것이다.
이러한 괴로움은 신앙의 숙명이다.
따라서 만약 누군가가 신앙을 긍정적인 감정만 주는 것이기에,
- 신앙 생활에 부정적인 감정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면,
- 이는 예수님의 죽음은 부정하고 부활만 강조하는 것이며,
- 결국 예수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을 부정하는 것이 많은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더욱 강조할 필요가 있다.
- 예전에 우리 교회에서도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다.
신앙은 괴롭고, 억울하고, 짜증 나고 힘든 것이다.
- 신앙이 기쁘고, 행복하며, 평화로운 것이라고만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 성경을 읽어봤다면 절대 그렇게 말할 수 없다.
- 어떻게 베드로와 바울의 인생을 평화롭다고만 말할 수 있겠는가.
- 아무런 죄 없이 십자가에 매달려 살해당한 사람들의 인생을 말이다.
그런 점에서 만약 모든 괴로움, 억울함, 짜증남, 힘듦을 피하고 벗어나려고만 하는 사람은
- 절대 신앙에 머무를 수 없다.
- 물론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는 있지만,
- 괴로움과 함께 신앙에서도 벗어날 것이다.
- 그리고 그렇게 신앙에서 벗어나면, 더 큰 괴로움에 빠질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에 머물기 위해서는 괴로움을 다르게 생각해야 한다.
- ‘적’이 아니라 ‘친구’로 생각해야 한다.
- ‘배척’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공존’해야 할 대상으로 여겨야 한다.
- 괴로움은 해결해서 없애버려야 할 대상이 아니라,
- 때로는 불편하더라도 어떻게든 끌어안고 가야 할 대상으로 여겨야 한다.
왜냐하면 괴로움 속에서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이미 그 의미가 담겨있다.
- 부활의 영광에 이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죽음의 괴로움을 겪어야 한다.
- 죽음의 괴로움 없이는 부활의 영광에 이를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부활의 영광만 뽑아 먹고, 죽음의 괴로움은 피하고 싶은 것이 문제이다.
- 그래서 부활의 영광을 누리지 못한다.
그렇다면 한번 죽어서 부활에 이르면, 더 이상 죽음은 필요 없어지는 것인가?
- 죽음은 부활에 이르는 수단일 뿐인가?
- 죽음은 독립적으로 아무런 가치가 없는가?
만약 죽음이 수단이고, 부활 이후에는 필요 없는 것이라면,
- 우리는 성경을 읽을 필요가 없다.
- 성경에는 예수님이 죽음에 이르기까지 이야기가 대부분이고,
- 부활 이후 영광에 이르신 이야기는 몇 줄밖에 없기 때문이다.
- 부활에 이른 사람에게 죽음이 필요 없다면, 죽음 이야기로 가득 찬 성경은 필요 없어진다.
따라서 부활만이 본질이고, 죽음은 부활의 수단이 아니라,
- 죽음과 부활 모두 동등하게 신앙의 본질이다.
- 즉, 죽음의 괴로움도 부활의 영광만큼 신앙의 본질이다.
- 신앙에 있어서 영광이 필수인 것처럼 괴로움은 필수이며,
- 괴로움이 있어야만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다.
- 괴로움을 배제하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없다.
부활하지 않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일 수 없는 것과 똑같이,
- 죽지 않은 예수님은 절대 그리스도일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하물며 완전하신 하나님조차 괴로움을 느끼신다.
- 더 정확하게 말해서, 성경 전체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감정 대부분은 괴로움이다.
- 기쁨은 잠시뿐이다.
- 대표적으로, 사사기와 열왕기이다.
- 사건 대부분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 하나님은 그 때문에 괴로워하신다.
하나님께서 괴로우신 이유는 단순하고 명쾌하다.
- 사랑 때문이다.
-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너무 사랑하는데,
- 이스라엘은 잘못된 선택으로 스스로를 망가뜨리기 때문이다.
- 이렇게 자해하는 이스라엘을 보시며 하나님은 이스라엘보다 더 괴로워하신다.
- 하나님은 이스라엘보다 이스라엘을 더 사랑하기 때문이다.
- 마치 마약에 중독된 자녀를 보면서 자녀보다 부모가 더 괴로워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상황에 두 가지 마음을 동시에 가지신다.
- 하나는, 스스로를 망가뜨리는 이스라엘을 막아서, 이스라엘을 보호하고 싶은 마음과,
-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을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이스라엘답게, 자유롭게 살도록 하고 싶은 마음이 공존한다.
- 전자를 선택하면, 이스라엘의 존재는 지켜지지만, 이스라엘의 자유가 훼손되고,
- 후자를 선택하면, 이스라엘의 자유는 지켜지지만, 이스라엘의 존재가 훼손되기 때문이다.
자유가 없는 존재도 쓸모없고, 존재가 없는 자유도 가치 없기 때문이다.
이러니 괴로운 것이다.
- 이스라엘의 존재와 자유를 동시에 지키는 것만이 사랑인데,
- 간섭해도 괴롭고, 간섭하지 않아도 괴롭기 때문이다.
- 간섭하면, 존재는 지켜지지만 자유가 훼손되고,
- 간섭하지 않으면, 자유는 지켜지지만 존재가 훼손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면 괴로울 수밖에 없다.
- 사랑하면 괴로움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괴로움이 신앙의 숙명이다.
- 사랑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그래서 우리도 괴롭다.
- 하나님을 사랑해서, 하나님 앞에 자신을 짓눌러 ‘종속’되어야 하는 동시에,
- 자기다움을 찾고 자유로워져 독립적, 주체적으로 ‘자립’해야 하기 때문이다.
- 또한 세상을 사랑해서, 세상이 바르게 행동하도록 뜯어고쳐 하나님께 ‘굴복’시켜야 하는 동시에,
- 세상 역시 자기답게, 자유롭게, 독립적, 주체적으로 ‘자립’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 살아가는 우리는 괴로울 수밖에 없다.
- 사랑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 사랑할 때 동반하는 괴로움을 견딜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 사랑하지 않고 거래하면, 어느 정도 양심을 챙기면서 괴롭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 자신을 합리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괴로움은 거부할 수 없는 우리의 숙명이다.
그러니, 진짜 하고 싶은 말은, 괴로움을 받아들이자.
- 괴롭다고 하나님 원망하며, 신앙을 부정하지 말자.
- 괴롭다고 현실을 외면하며, 신앙 안에 숨지 말자.
- 괴로움을 신앙의 일부로 인정하자.
- 괴로움을 피하려고만 하지 말고,
- 괴로움 속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신앙의 진수를 알아가자.
괴로움은 신앙의 숙명이다.
도전 역시 신앙의 특징
신앙은 인생을 전자오락처럼 만든다.
- 실수해서 죽어도, 동전 하나면, 재부팅 한 번이면, 다시 시작할 수 있다.
- 아무리 큰 잘못을 하더라도, 회개하면 하나님은 다시 기회를 주신다.
- 전자오락에서 너무 큰 실수를 했다고, 다시 시작하지 못하는 게임은 없다.
-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용서하지 못하는 잘못은 없다.
- 언제나 하나님은 다시 기회를 주신다.
그래서 신앙은 인생을 살아볼 만하게 느끼도록 한다.
- 어떤 괴로움도 감수하도록 한다.
- 마치 게임 속에 나오는 문제가 게임을 하기 싫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 게임을 재밌게 만드는 핵심 요소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더 나아가, 게임은 그 자체로 문제이다.
- 문제가 아닌 게임은 게임이 아니다.
- 문제가 있기 때문에 게임을 하는 것이다.
- 게임을 하는 이유가 문제로 인한 괴로움을 당하기 위한 것이다.
- 괴로움 속에만 재미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우리가 인생의 괴로움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 인생을 게임과 다르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 핵심은 하나님께서 용서의 능력으로 인생을 리셋하실 수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왜 믿지 못하는가?
-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리셋되어 순결하고 깨끗한 새로운 인생이 아니라,
- 성공과 성취가 쌓여 생긴 권력으로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는 인생이기 때문이다.
- 하나님이 주시는 인생은 새로운 인생일 뿐, 군림하는 인생이 아니기 때문이다.
- 그런데 괴로움이 군림하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는 것이다.
- 정확하게 말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인생을 게임처럼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고,
- 그래서 괴로움을 인생의 재미를 만드는 요소가 아니라,
- 인생을 망가뜨리는 요소로 생각하는 것이다.
인생의 목적이 인생 그 자체가 아니라, 군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전자오락을 하다가 너무 큰 실수를 했으니,
- 그래서 주인공이 너무 괴롭게 죽었으니,
- 다시는 게임을 하지 못하겠다고 말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은가.
- 어리석음 때문에 쓸데없이 게임기 가격 수십만 원을 버리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생에서 너무 큰 문제가 생겼으니,
- 그래서 그 문제 때문에 너무 괴로웠으니,
- 다시는 같은 도전을 하지 못하겠다고 말하는 것 역시 어리석은 것이다.
- 특히 하나님의 용서하심과 책임지고 인도하심을 믿지 못한다는 점에서 특별히 악질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으면 도전적일 수밖에 없다.
- 마치 우리가 현실에서는 전쟁터에서 도망치려 애쓰지만,
- 게임에서는 도전적으로 전쟁터에 나가려고 애쓰는 것처럼 말이다.
- 하나님을 믿으면, 실패해도, 잘못해도, 실수해도, 그러다 죽어도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 마치 게임 안에서 죽어도 잃을 것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 그것이 게임을 즐길 수 있는 핵심 이유이다.
- 그래서 신앙 안에서만 게임처럼 인생을 즐길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으면서 소극적으로 사는 것은,
- 마치 게임을 플레이하면서도, 전혀 전진하지 않고 같은 자리에서 맴돌기만 하는 것과 같다.
- 그렇게 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그런데도 그렇게 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 그래서 도전하다가 실패하고 죽으면, 모든 것을 잃을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다.
- 하나님께 부활의 능력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 그래서 현실에 안주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소극적으로 사는 것은 하나님을 부정하는 심각한 죄이다.
- 예수님의 죽음 부활을 부정하는 것이고,
- 이는 예수님을 죽인 바리새인의 죄와 똑같은 죄이며,
- 지옥의 땔감으로 버려지기에 충분한 죄이다.
예레미야의 죄
그런데 이와 똑같은 죄를 바로 예레미야가 짓고 있다.
- 신앙 때문에 괴로움 당할까 봐, 신앙 때문에 손해 볼까 봐, 하나님을 부정하고 있다.
- 하나님 뜻에 따라 땅을 사면, 돈도 잃고 명예도 잃을까 봐 하나님을 거부하고 있다.
거부 이유는 단순하다.
- 잃은 돈과 잃은 명예를 회복할 능력이 하나님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 혹은 하나님보다 돈과 명예를 더 가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이 창조주이며 전능자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레미야의 거부에 대해 이렇게 응답하시는 것이다.
[렘 32:27] 나는 주다. 모든 사람을 지은 하나님이다. 내가 할 수 없는 일이 어디 있겠느냐?
-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주이며 전능자라는 것을 먼저 밝히신다.
- 이는 예레미야가 질문 안에서 하나님이 창조주이며 전능자라는 것을 부정했기 때문이다.
- 그 죄를 완곡하게 정죄하고 바로잡기 위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32장 전체를 이해하기 위한 핵심 전제이다.
- 즉, 32장은 예레미야의 죄가 중심이고,
- 26~44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 역시 이스라엘이 아니라 예레미야를 향하고 있다.
- 따라서 본문은 예레미야가 첫 번째 청자이고, 이스라엘은 두 번째 청자이다.
그런 관점으로 본문을 다시 보자.
본문 해석
단락 구분은 다음과 같다.
① 26~27절: 질문에 대한 반박 - 나는 주다.
② 28~29절: 멸망 선포 - 예루살렘 도성 파괴
③ 30~35절: 멸망 원인 - 우상 숭배
④ 36~41절: 회복 선포(내면) - 경외하는 마음 회복
⑤ 42~44절: 회복 선포(외면) - 밭 매매 회복
요약하면,
- 예레미야는 회복을 선포해야 하는 괴로움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했다.
- 이러한 원망에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여기지 않는 마음이 깔려있다.
-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이 하나님이며 전능자라는 것을 상기시키신다(①).
그러면서 현재 예레미야의 죄를 이스라엘의 죄에 빗대어 정죄하신다.
- 즉,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이유도 결국 예레미야의 죄, 즉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여기지 않는 죄 때문이라고 말씀하신다(②).
- 그 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우상 숭배에 빠져, 인신 제사까지 행한 것이다(③).
따라서 예레미야의 태도 역시 우상 숭배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 특히 예레미야의 행위가 자신의 유익을 위해 이스라엘이 회복되기를 거부하여 희생시킨다는 점에서 인신 제사와 같다.
- 인신 제사 역시 유익을 얻기 위해 자녀를 불태워 죽여 희생시키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 그러니 예레미야도 죄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이스라엘처럼 멸망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회복하실 것을 예고하신다.
- 내면적으로, 이스라엘에게 ‘경외하는 마음’, 즉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여기는 마음을 주실 것이고(④),
- 외면적으로, 이스라엘이 밭을 매매하는 풍요로운 일상으로 회복할 것을 예고하신다(⑤).
이는 단지 이스라엘에 대한 회복 예언이 아니다.
- 예레미야가 밭 매매 행위 예언에 거역하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라는 ‘경고’이며,
- 그러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고 밭 매매 행위 예언에 순종하라는 ‘명령’이자 동시에,
- 예레미야가 아무리 거부한다고 해도,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반드시 굴복시켜서 하나님을 경외하게 할 것이며, 밭 매매 행위 예언에 순종하도록 할 것이라는 ‘의지 표명’이다.
회복 예언의 목적은 회복 명령
그런 점에서 회복 예언은 어린이 동화에서 ‘happily ever after’처럼 해피 엔딩이 아니다.
- 무서운 경고와 엄격한 명령 그리고 명령에 따르지 않을 때 임할 가혹한 심판이 담겨있다.
이는 너무 쉽게 증명된다.
- 만약 회복 예언이 정말 해피 엔딩이라면,
- 회복 예언을 받은 이스라엘은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전부 다 구원받아야 한다.
-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갖고 밭은 매매하는 풍요로운 일상을 누려야 한다.
- 정말 회복되었어야 한다.
그러나 회복된 사람은 일부였다.
- 대부분은 회복되지 않고 멸망해 죽었다.
- 특히 예언을 직접 들은 사람은 아무도 회복되지 않았다.
- 예언을 들은 사람은 전부 죽은 이후 70년이 지나서 회복되었기 때문이다.
- 게다가 바벨론 포로로 70년이 지난 후 회복되어 이스라엘로 돌아온 사람도 일부에 불과했다.
- 나머지 사람은 끝까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아 멸망했다.
따라서 회복 예언을 이렇게 오해하면 안 된다.
- ‘하나님이 다 해결해 줄 테니까, 너희는 앉아서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어.’라는 뜻이 아니다.
- 정말 가만히 앉아있으면, 심판받아 멸망한다.
- 예레미야의 예언을 듣고도 멸망한 수많은 사람이 이를 증명한다.
회복 예언은, ① 하나님이 옳은 길을 제시하는 것이고,
- ② 옳은 길에 이르는 방법을 알려주시는 것이며,
- ③ 옳은 길로 갔을 때 얼마나 큰 유익을 얻는지 보여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① 하나님을 경외하여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옳은 길이고,
- ② 그 길에 이르기 위해 우상 숭배를 포기해야 하며,
- ③ 우상 숭배를 포기하면 일상을 회복하고 정체성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예언은 일방적인 ‘선포’이자 동시에 양방향의 ‘설명 혹은 설득’이다.
- 두 가지 기능을 동시에 갖는다.
- 이스라엘의 의사와 상관 없이, 이스라엘의 상태와 상관 없이,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의지를 갖고 이루실 것을 ‘선포’한다.
- 동시에 회복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이 가져야 할 마음과 행위를 ‘설명’하고,
- 그것이 이스라엘에게 얼마나 유익이 되는지 ‘설득’한다.
- 그래서 회복 예언에 동참하도록 권유한다.
따라서 우리도 예언을 듣고 두 가지 태도를 가져야 한다.
- 그 예언이 무슨 뜻인지, 왜 그렇게 예언하셨는지, 그래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머리 쥐어뜯으며 고민해야 한다.
- 하나님의 설명을 충분히 이해하고, 설득되어,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 그러는 동시에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는 전제 아래,
- 이해되고 설득되지 않더라도 무작정 순종해야 한다.
- 순종한 이후에만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회복 예언에 동참할지 말지는 각자의 선택이다.
- 동참하여 우상 숭배를 포기하면 회복되지만,
- 동참하지 않고 계속 우상을 숭배하면 멸망할 것이다.
그래서 회복 예언을 들은 이스라엘 중에 많은 사람이 멸망했고,
- 일부 적은 사람만 회복한 것이다.
이는 남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에게 일어날 이야기이다.
믿음의 본질은 삶의 방향 제시
이를 확장하면, 무서운 이야기가 된다.
- 회복이 선포된 이스라엘 중에 다수가 멸망했다.
- 이는 구원이 선포된 우리 중에 다수가 지옥에 갈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믿음’은 ‘확정된 삶의 결과’가 아니라, ‘추구해야 할 삶의 방향’이다.
- 즉, 믿음 있으면 무조건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 믿음이 있다는 것은 추구해야 할 삶의 방향을 알았다는 것이다.
- 믿음이 없을 때는 추구해야 할 삶의 방향조차 알지 못했는데,
- 이제는 알았고, 그 방향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믿음이다.
그런데 그 능력을 사용할 것이냐 아니냐는 또 다른 문제이다.
- 삶의 방향을 알아도, 그 방향을 향해 살지 않으면, 절대 행복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 물론 바른 삶의 방향, 행복해질 수 있는 방향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천지 차이다.
- 그러나 또 알기는 하되, 그 방향으로 가지 않는 것과 가는 것 역시 천지 차이다.
그렇지만 방향을 아는데 왜 그 방향으로 가지 않냐?
-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 믿음이 있는데 왜 믿음대로 살지 못하냐?
- 믿음이 바르지 않기 때문이다.
- 바르지 않은 믿음으로는 믿음대로 살 수 없고,
- 그렇기 때문에 천국에 갈 수 없다.
그래서 바른 믿음을 갖기 위해, 믿음대로 살아갈 수 있는 바른 믿음 갖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 그래야만 천국에 갈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렇지 않으면 지옥 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회복 예언을 강요하실까?
같은 질문으로,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신앙을 강요하실까?
- 왜 우리가 반드시 믿음을 가져야 하고, 왜 바른 방향의 삶을 살아야 하며,
- 왜 하나님과 관계를 맺어야 하고, 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야 할까?
우선 예레미야에 대해 말해보자.
-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순종을 강요하신 것은 처음이 아니다.
- 14장에서도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이스라엘 멸망 예언을 강요하셨다.
- 그러나 예레미야는 멸망 예언을 거부한다.
- 대신에 하나님께 이스라엘을 회복해달라고 기도한다.
- 하지만 하나님은 기도조차 하지 말라고 경고하신다.
[렘 14:11] 주님께서 또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 백성에게 은총을 베풀어 달라고 나에게 기도하지 말아라.”
하나님은 왜 그러셨을까?
- 언뜻 생각하기에,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관철하기 위해,
- 혹은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예레미야의 순종이 필요했고,
-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지 않자, 강요와 협박으로 예레미야를 굴복시켰다고 생각할 수 있다.
- 그래야만 하나님의 뜻을 성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예레미야는 하나님 뜻 성취를 위한 도구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성경 맥락과 어긋난다.
- 성경에서 하나님은 사랑인데,
- 저런 것은 사랑이 아니라 착취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착취에 지나치게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 하나님조차 착취하신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강요하시고 굴복시킨 이유는 오직 예레미야를 위해서이다.
- 가스라이팅의 단골 멘트가 ‘다 너를 위해서야.’라는데, 이는 그것과 다르다.
- 예레미야가 이스라엘의 회복을 기대하며 멸망 예언을 거부하는 이유는 딱 하나이다.
- 이스라엘의 죄를 알지만, 정확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이고,
- 그래서 그 정도의 죄는 용서받아야지, 멸망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그러니까 예레미야는 죄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했고,
- 그 죄 때문에 이스라엘이 얼마나 괴로운지 알지 못했다.
이는 고스란히 예레미야 자신에게 돌아온다.
- 예레미야 역시 자기 죄를 알지 못했고,
- 죄를 범하여 스스로를 괴롭히면서도, 왜 괴로운지 알지 못한 채 괴로워하기만 했다.
결국 이런 상태로 살면, 예레미야는 자신이 만든 괴로움 속에서 죽을 수밖에 없다.
-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기가 자기를 괴롭히며 죽는 삶이 얼마나 비극적인가.
이것이 예레미야의 실체였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레미야가 괴로움에서 벗어나길 원하셨다.
- 그것을 위해 예레미야가 스스로를 괴롭힌다는 것을 알아야 했고,
- 그것이 죄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야 했으며,
- 그것을 위해 죄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아야 했다.
그런데 죄를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남의 죄를 보는 것이다.
- 사람의 속성상 자기 죄보다 남의 죄를 훨씬 더 정확하게 인식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이스라엘을 정죄하시며 멸망을 예언하라고 명하신 것이다.
- 이스라엘의 죄를 명확하게 인식하도록 말이다.
- 그래서 자기 죄도 인식하여, 스스로를 괴롭히는 죄에서 벗어나,
- 진정한 기쁨과 평안 속에서 살라고 말이다.
- 하나님께 우선은 예레미야였고, 이스라엘은 그 다음이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강요하신 이유이다.
- 예레미야의 참된 구원과 회복을 위해서 말이다.
- 예레미야를 가장 우선으로 사랑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회복 예언을 강요하신 이유도 정확하게 같다.
-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죄를 정확하게 인식했다.
- 동시에 자신의 죄도 깨달았다.
- 자신은 멸망해야 하고, 용서받고 회복될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 그래서 이스라엘을 향해 과감하고 담대하게 멸망을 예언할 수 있었다.
- 모든 박해를 감수하고서도 말이다.
- 이스라엘의 죄는 멸망하기 합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절대 예레미야를 행복하게 하지 못했다.
- 자포자기 상태에서 나오는 부정적인 자유로움 뿐이었다.
- 체념이었다.
- 세상은 멸망할 것이고, 자신도 멸망할 것이기에, 자신이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으니,
- 절망 속에서 자신의 절망감을 표출한 것뿐이다.
- 표출 대상이 이스라엘이었다.
그래서 예레미야 마음에는 소망이 없었다.
그런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은 대뜸 회복 예언을 명령하신다.
- 이유는 하나이다.
- 절망에 빠진 예레미야에게 소망을 갖게 하여,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하나님께 이스라엘 회복보다 예레미야 회복이 더 중요하다.
- 죄로 얼룩진 이스라엘보다 예레미야가 더 소중하기 때문이며,
- 예레미야 한 사람이 회복되어야만 이스라엘 전체가 회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마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회복보다 자신의 회복을 더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이다.
- 자신의 죄를 너무 잘 알았기 때문이다.
- 상식적으로, 자신과 같은 죄인이 구원받을 가능성은 전무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그래서 회복 예언을 더욱 거부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회복의 주체를 철저히 자신에게 두신다.
- ‘너는 죄인이야. 너는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
- 네가 하는 것은 전부 죄뿐이야.
- 네가 지옥에 가는 것은 해가 뜨고 지는 것처럼 당연한 일이야.’
‘그런데 내가 널 회복시킬 거야.
- 내가 너를 의인으로 만들 거야. 네가 의롭게 살 수 있게 할 거야.
- 나와 네가 사랑의 관계를 맺도록 할 거야.
- 영원토록 네가 나를 경외하게 할 거야.
- 내가 너와 함께하길 원하는 만큼 너도 나와 함께 하길 원하게 만들거야.
- 걱정하지 마. 나만 믿어.’라고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렘 32:38~41] 그러면 그들이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39)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한결같은 마음과 삶을 주어, 그들이 언제나 나를 경외하여 그들 자신뿐만 아니라, 그들의 자손들까지도 길이 복을 받게 하겠다. (40) 그 때에는 내가 그들과 영원한 언약을 맺고, 내가 그들에게서 영영 떠나지 않고, 그들을 잘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마음 속에 나를 경외하는 마음을 넣어 주어서, 그들이 나에게서 떠나가지 않게 하겠다. (41) 나는 그들을 잘되게 함으로 기뻐할 것이며, 나의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그들이 이 땅에 뿌리를 굳게 내리고 살게 하겠다.
물론 누군가는 하나님의 약속을 끝까지 믿지 않을 것이다.
- 마음에서, ‘내가 이렇게 죄인인데, 하나님이라고 나를 바꾸실 수 있겠어?’라며,
- 계속해서 절망에 머무르려 할 것이다.
- 이는 겸손이 아니라, 하나님을 부정하는 교만이다.
- 하나님의 능력보다 자신의 죄가 더 강하다고 자부하는 착각이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믿었다.
- 절대 불변한 것으로 생각했던 자신의 죄를 하나님은 능히 회복하실 수 있다고 믿었다.
- 절대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던 절망이 부서지고, 회복으로 채워질 수 있다고 믿었다.
물론 즉각적으로 현실이 변하진 않았다.
- 이스라엘은 70년 동안 회복되지 않았고,
- 예레미야는 회복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 특히 예레미야는 죽을 때까지 죄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 자신이 죄인이라는 절망감을 여전히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이전과 완전히 다르게 살았다.
- 이스라엘과 자신이 결국 반드시 회복될 것을 믿고 살았다.
- 자신과 이스라엘은 연약하지만, 하나님은 강하다는 사실을 믿고 살았다.
- 때로는 절망스럽지만, 절망을 박살 내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고 살았다.
- 그래서 언제든 절망에서 빠져나와 소망을 누리며 살았다.
소망을 회복한 예레미야
소망이 없었을 때 예레미야는 두 가지 생각에 빠졌다.
첫째는, 자신은 밭을 사서, 밭을 경작하고, 밭에서 나온 소출을 먹으며, 풍요로운 일상을 누릴 자격이 없는 죄인이라고 생각했다.
- 마찬가지로 죄악에 빠진 이스라엘도 회복될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다.
- 자신과 이스라엘이 멸망하여 사라지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 그래서 회복을 예언하라는 하나님을 거부했다.
둘째로, 그러니 쓸모 없이 사람들의 박해를 받으며 굳이 밭을 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 밭을 사봤자 어차피 남 좋은 일만 시키고, 자기에게는 유익이 하나도 없을뿐더러, 손해만 되기 때문이다.
-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절대 회복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 밭을 영원히 소유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 그래서 자신은 밭의 소출을 절대 먹지 못할 것이고,
- 반대로 밭을 산다는 이유로 조롱당하기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태도는 하나님께 죄 용서의 능력이 없다는 불신에 기반한다.
- 하나님도 자신의 죄를 해결하실 수 없다고 착각했다.
- 그래서 절대 자기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고 절망했다.
- 그렇기 때문에 굳이 박해의 괴로움을 감수하는 도전을 하지 않았다.
- 신앙과 삶을 소극적으로 안주했다.
그러니 밭을 사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완강하게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회복 예언을 듣고 소망을 갖게 되었다.
- 하나님은 하나님이다.
- 모든 사람을 지은 창조주이시며,
-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전능자이시다.
[렘 32:27] 나는 주다. 모든 사람을 지은 하나님이다. 내가 할 수 없는 일이 어디 있겠느냐?
그로 인해 현실을 새롭게 보게 되었다.
첫째로, 자신은 여전히 절망적인 죄인이지만, 하나님은 자신을 의롭게 하실 수 있다고 믿었다.
- 여기서 주의할 것이, 믿음이 있다고 해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인식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 예레미야는 자신이 죄인이고, 누구도 사랑할 줄 모르며, 주변 사람에게 상처와 불쾌감만 주는 혐오스러운 존재라는 사실을 절대 잊지 않았다.
- 그러나 동시에 죽은 자조차 부활시키듯 하나님이 자신을 의롭게 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함께 갖게 되었다.
- 그래서 언제나 죄인인 자신 안에서 의로움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자신이 풍요로운 일상을 누릴 자격 없는 죄인임과 동시에,
- 밭은 사서 풍요로운 일상을 누릴 자격이 있는 의인임을 깨달았다.
- 그래서 무모하지만, 밭은 사서 그 밭으로 누릴 풍요로운 일상을 소망했다.
- 죄인임을 잊지 않으면서 동시에, 의인이라는 믿음으로 안락한 평안을 누릴 수 있었다.
둘째로, 그렇게 밭을 사야 할 명확한 이유가 생기니, 박해를 감수하고 밭을 살 용기가 생겼다.
- 여전히 자신에게 사랑이 없고 주변 사람에게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 그 때문에 오히려 더욱 밭을 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 밭이 있어야 양식을 얻을 수 있고,
- 양식이 있어야 주변에 배고픈 사람을 도울 수 있기 때문이다.
- 사랑하는 마음은 없지만, 사랑할 수 있는 환경과 상황을 만들어서라도 사랑하기 위해서 말이다.
- 사랑할 수밖에 없도록 자신을 내몰기 위해서 말이다.
- 그렇게 사랑할 때만 자신이 행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람들의 조롱과 박해를 이겨낼 수 있게 된다.
- 밭을 사야 사랑할 수 있고, 사랑해야 행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밭이 행복을 줄 것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에,
- 그에 따른 박해는 감수할 수 있었다.
그러니 밭을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이 신앙이다.
- 죽음의 괴로움과 부활의 영광이 공존하는 것.
- 죄인의 절망과 의인의 소망이 공존하는 것.
- 심판의 멸망과 구원의 회복이 공존하는 것.
- 구제 불능의 죄인임을 여실히 느끼지만,
-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살기 위해 목숨 걸고 발버둥 치는 것.
- 그 안에서 괴로움 때문에 죽을 것 같지만,
- 죽음을 이기는 부활의 자유함을 만끽하는 것.
이것이 다른 모든 것과 구별되는 기독교 신앙의 탁월함이다.
결론 -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밭을 사라고 명하신다.
우리는 반드시 밭을 사야 한다.
-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우리는 죄인이지만, 밭을 통해 풍요롭고 안락한 일상을 누릴 자격이 있는 의인이기 때문이다.
- 우리는 여전히 죄인이지만,
- 우리는 이미 의인이다.
- 이 두 가지 상충하는 사실을 동시에 받아들이는 것이 참된 믿음이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 우리의 죄를 능히 이기신다.
- 죄의 우두머리인 사망 권세를 십자가에서 이기셨다.
- 여전히 우리 안에는 근거가 없지만,
- 하나님을 믿음으로 우리가 의인이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밭을 가질 자격이 있다.
- 밭을 경작하고, 밭을 통해 하나님이 주신 소출을 먹고 누릴 자격이 있다.
- 누구에게도 빌어먹지 않고, 내 손으로 당당하게 내 일상을 책임질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이 믿음으로만 급변하는 상황에서조차 흔들리지 않고 자신을 지키며 일상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 밭을 사야 밭에서 나온 소출로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물론 소출이 없어도, 마음만으로 하는 사랑도 충분히 가치 있다.
- 실질적 도움 없는 순수한 사랑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 사랑하는 마음이 우선이며 본질이다.
- 양식이 없어서 굶어 죽기 일보 직전인 사람에게조차,
- 생명을 살리기 위해 양식을 구하러 사방팔방 뛰어다니는 것보다
- 옆에서 그 사람의 죽음을 함께하는 것이 더 가치 있다.
그런데 당장은 양식을 구할 수가 없어 굶어 죽어가는 사람을 지켜볼 수밖에 없지만,
- 그리고 그렇게 지켜보는 것이 최고의 사랑이지만,
- 그렇다고 자포자기하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도 역시 사랑은 아니다.
- 최고의 사랑을 하고 남는 시간에는 양식을 구하러 다녀야 한다.
- 그 양식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한 명이라도 더 살려야 한다.
게다가 단순히 양식을 구하는 것만이 아니라, 양식을 계속해서 얻을 수 있도록 경작해야 한다.
- 그래야 양식을 얻으러 다니는 시간을 줄일 수 있다.
- 그래야 더 많은 시간을 사랑하는 데 사용할 수 있다.
- 그래야 굶어 죽는 사람을 한 사람이라도 줄일 수 있다.
- 장기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더욱 사랑할 수 있는 전체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밭을 사야 하는 이유이다.
-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 말이다.
목적과 수단의 전도
물론 현실에서 많은 사람이 사랑을 핑계 삼아 돈을 추구하다가 타락한다.
- 가족을 사랑하기 위해 돈이 필요하다는 명분으로, 돈에 올인한다.
- 그리고 가족을 포기한다.
단순히 돈을 버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 돈을 벌기 위해 가족을 포기하는 것이 문제이다.
- 목적과 수단이 전도된 것이 문제이다.
- 가족이 목적이고 돈은 수단인데,
- 어느 순간 돈이 목적이 되고 가족이 수단이 되는 것이 문제이다.
가족을 충분히 사랑하면서 남은 시간에 돈을 벌고,
- 그 돈을 가족을 사랑하는 데 사용한다면, 아무 문제 없다.
-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단이 적절히 사용되면서도,
- 수단으로 인해 목적이 전혀 훼손되지 않는다면, 아무 문제 없다.
이러한 목적과 수단의 전도는 성경의 단골 소제이다.
- 대표적으로, 율법과 성전이다.
- 모두 하나님 알리는 것을 목적으로 사용된 수단이지만,
- 어느 순간 율법과 성전 자체가 목적이 되고 하나님은 수단으로 전락하여,
- 율법과 성전이 하나님을 부정하는 데까지 이른다.
그래서 하나님은 율법과 성전을 파괴하신다.
- 율법과 성전이 나쁘기 때문이 아니다.
- 이는 하나님이 직접 만드신 것이다.
문제는 율법과 성전을 대하는 사람의 태도이다.
- 수단을 목적으로 착각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람의 죄를 바로잡고, 참된 목적이신 하나님을 알리기 위해,
- 하나님은 어쩔 수 없이 율법과 성전을 파괴하신다.
따라서 이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방향이다.
- 신앙의 본질인 ‘사랑’을 목적으로 삼 되,
- 사랑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기능’을 적절하게 이용하는 것이다.
- 기능을 적절히 이용하면서도, 절대 사랑을 훼손하지 않고,
- 기능을 통해 사랑을 더욱 깊이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목적과 수단의 전도가 일어나면,
- 그래서 기능이 사랑을 훼손하면,
- 과감하게 기능을 포기하고 다시 사랑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또 다시 사랑을 위해 기능을 쌓고,
- 또 다시 기능을 포기하고를 계속 반복하는 것이 신앙 생활이다.
그렇게 계속해서 사랑에 집중하면서,
- 동시에 사랑을 조금도 훼손하지 않는 기능을 쌓아가는 것이다.
- 그래야 그 기능으로 사랑을 더욱 확실하게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밭을 사라고 명령하신 이유이다.
- 더욱 잘 사랑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도 우리가 밭을 사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는 이유는?
두 가지 때문이다.
첫째로,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 자신의 죄가 너무 크게 보이기 때문이다.
- 자신에게 있는 결핍이 너무 크게 보이기 때문이다.
- 자신이 당한 피해가 너무 크게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조차 그 피해를 해결해 주실 수 없고,
- 결핍을 채워주실 수 없으며,
- 죄를 용서하실 수 없다는 불신 때문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명령에 따를 필요가 없다.
둘째로, 자신이 다른 사람을 사랑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죄와 결핍 때문에 자신은 누군가를 사랑할 수도 없고,
- 피해 때문에 누군가를 사랑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은 사랑을 받기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그러니 굳이 박해와 손해를 감수하며,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 밭을 살 이유가 없는 것이다.
나 역시 이러한 태도가 합리적으로 들린다.
- 이러한 마음이 공감되는 부분이 있다.
- 나에게도 분명하게 이와 같은 마음이 있다.
극단적인 예를 들어, 만약 부모에게 버려져서 입양되었는데,
- 양부모에게까지 학대당한 아이가 있다고 해보자.
- 그래서 그 아이는 친부모와 양부모에 대한 분노와 더불어 세상 전체에 대한 적개심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 그래서 사람 많은 광장에서 총기 난사를 계획했다.
물론 총기 난사는 정말 나쁜 것이지만,
- 누구도 모든 잘못이 아이에게만 있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 모든 사람이 아이보다 더 나쁜 사람은 부모라고 말할 것이다.
- 아이에게 절망감과 적개심을 심어준 결정적인 원인이 부모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아이의 극단적인 행동에 공감이 된다.
- 나 같아도 비슷한 행동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총기 난사를 하는 것이 아이를 행복하게 하는가?
- 절대 그렇지 않다.
- 총기 난사로 인해 아이는 더욱 더 불행해질 것이다.
아이가 행복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부모를 용서하는 것이다.
- 부모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말이다.
- 절망감과 적개심을 해소하고, 부모의 악영향에서 벗어나 독립하기 위해서 말이다.
- 부모를 향한 복수심 때문에 자신을 더욱 파괴하는 것을 멈추고,
- 과거를 용서하고, 과거를 잊고, 과거에서 벗어나, 미래를 소망하며 현재를 사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말할 수 없이 어려운 일이다.
- 어쩌면 불가능하리만큼 어렵다.
- 그래서 세상에서 많은 사람은 그것을 포기하고 산다.
하지만 이것만이 그 아이가 행복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 그 아이의 고통을 모르기 때문에 함부로 부모를 용서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럽다는 것을 알지만, 용서만이 행복의 길이기 때문에 말하는 것이다.
- 용서하지 않더라도, 그래서 부모를 사랑하지 않더라도,
- 부모의 그늘에서 벗어나는 길만이 그 아이가 살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용서를 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 오히려 불가능해 보인다.
- 그러나 살려면 무조건 해야 한다.
- 선택의 여지가 없다.
- 용서를 포기하는 순간 총기 난사를 할 수밖에 없고,
- 그러면 결국 자신도 파괴되고 죽는다.
- 자신이 죽으면 아무 소용 없다.
그래서 하나님이 죽은 자도 살라는 전능함을 가지신 것이다.
- 아이가 부모를 용서하도록 만드려고 말이다.
- 그래서 부모의 죄책감을 덜어주려는 것이 아니라,
- 아이를 살리기 위해서 말이다.
하나님께서 밭을 사라고 명령하시는 이유도 정확하게 이것 때문이다.
-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 자신의 죄, 결핍, 피해를 하나님이 능히 해결하실 수 있다고 믿을 때,
-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경험할 수 있고,
- 그 사랑으로 하나님과 자신 그리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으며,
- 그렇게 사랑할 때만 우리가 행복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무엇을 해도, 원하는 것을 모두 얻어도, 절대 행복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부터는 선택의 영역이다.
- 하나님을 믿을지 말지는 자신이 결정해야 한다.
- 결정을 한 후, 그 결정에 기반하여 자신의 모든 경험을 재해석해야 한다.
- 재해석된 경험을 통해 감정도 재설계해야 한다.
- 그래서 믿음 없음으로 인한 감정을 제거하고,
- 믿음으로 인한 감정으로 대체해야 한다.
- 그렇게 새로운 감정으로 새로운 인생을 마주해야 한다.
물론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안다.
- 절대로 한 번에 일어나지 않는다.
- 나는 대략 30년 잡는다.
- 그만큼 어렵다는 뜻이고,
- 그만큼 반복해서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얼마나 도전하기 싫은지 안다.
- 죽기보다 더 싫은 일이다.
- 오죽하면 이게 싫어서 가룟 유다는 자살을 선택했다.
그러나 이 길 밖에는 없다.
- 유일한 길이다.
- 차선조차 없다.
- 이 길 외에는 전부 똑같이 죽음이다.
그러나 이 길에는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이 계시고,
- 우리보다 앞서가신 예수님이 계시며,
- 우리와 함께 가시는 성령님이 계신다.
- 그리고 함께 가는 교회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어떤 길보다 안전하고 쉬운 길이다.
- 주변에 더 안전하고 더 쉬운 길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 전부 거짓말이다.
세상에 쉬운 길은 없다.
- 돈 벌고 권력 얻어 세상에서 남부럽지 않게 사는 것이 훨씬 더 어려운 길이다.
- 반대로 절망 속에서 자포자기하며 사는 것 역시 훨씬 더 어려운 길이다.
그러니 이제 뒤 돌아보지 말자. 주변 살피지 말자.
- 이 길밖에 없다는 믿음 가지고,
- 이 길만 보며 가자.
그렇게 믿고 갈 때,
- 조롱과 박해로만 채워져 있다고 보이는 좁은 길이,
- 환호와 찬양으로 채워져 있는 넓은 길로 보이는 은혜가 임할 것이다.
그럴 때,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진정한 안식과 평안을 누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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