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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서

예레미야(64) 33:1-13 멸망과 회복 사이에서 정체성과 기능의 회복

<미양교회 팟캐스트 양따양>

미양교회에서 했던 설교를 바탕으로 진솔하게 신앙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팟캐스트도 많이 들어주세요.

https://www.podbbang.com/channels/1790233/

 

어린양을 따르는 어린양

예배 대신 예수님, 설교 대신 성경, 건물 대신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미양교회가 만드는 방송입니다.토끼와 개구리가 진솔하게 신앙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어린양과 같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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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 예언과 회복 예언 중에 무엇이 더 말하기 어려울까?

- 당연히 멸망 예언이라고 생각했다.

- ‘너 죽을 거야.’라는 멸망 예언이 ‘너 살 거야.’라는 회복 예언보다 훨씬 듣기 거북하기 때문이다.

- 그래서 실제로 멸망 예언을 듣고 기분 나쁘다며 교회를 떠난 사람이 있다.

- 죽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요즘에는 회복 예언이 더 말하기 어렵다.

- 멸망 예언보다 회복 예언을 믿도록 하기가 더 어렵다.

일단 모든 사람은 죽는다.

- 이는 인류 전체가 갖는 보편적 경험이다.

- 그렇기 때문에 ‘너 죽을 거야.’라는 멸망 예언은 원하든 원치 않든 거부할 수 없다.

- 멸망 예언은 모든 사람에게 100% 확실하게 성취된다.

그런 점에서 자세히 설명하기만 하면, 누구나 멸망 예언을 믿을 수밖에 없다.

- 왜냐하면 멸망 예언은 인간의 경험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 죽음이라는 전 인류 공통 경험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회복 예언은 그렇지 않다.

- 회복 예언은 모든 사람이 경험하지 않는다.

- 회복하는 사람도 있지만, 회복하지 못하고 죽는 사람이 더 많다.

- 모든 사람에게 100% 확실하게 성취되지 않는다.

말장난처럼 들릴 수 있겠지만, 회복 예언은 믿는 사람만 경험한다.

- 경험했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믿기 때문에 경험하는 것이다.

- 경험에 근거를 두지 않는다.

- 믿음이라는 논리적 도약이 필요하다.

 

멸망 예언은 경험에 근거하기 때문에 믿기 쉬운데,

- 회복 예언은 믿음 이후에만 경험할 수 있기에,

- 그래서 경험 없이 믿어야 하기에 더욱 믿기 힘들다.

간단한 예로,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것과 부활하셨다는 것 중에 더 믿기 어려운 것이 무엇이냐?

- 당연히 부활하셨다는 것이다.

- 죽음은 누구나 겪는 일이지만, 부활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회복 예언을 들으면 두 가지 반대 극단으로 치우친다.

- 두 가지 모두 회복 예언을 부정하기 위한 몸부림이다.

첫째로, 회복의 ‘필요성’을 거부한다.

- 자신에게 회복이 필요 없다는 것이다.

- 자신의 삶이 완전무결한 것은 아니지만,

- 그래도 어느 정도 괜찮게 살고 있고, 나름 만족한다는 것이다.

- 필요한 것도 있고, 해결해야 할 문제도 있지만,

- 굳이 지금 누리는 안락함을 포기하면서까지 원하는 것은 없다는 태도이다.

이런 사람은 정말 많다.

- 대부분의 불신자 혹은 무신론자가 가진 태도이다.

- 자신을 충분히 의롭다고 생각하며, 자기 삶을 긍정한다.

- 자신에게 결함이 있음을 인정하지만, 그것조차 자기 통제 안에 있다고 느낀다.

그래서 외부 도움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만약 이런 사람이 신앙을 가지면, 기복 신앙으로 빠진다.

- 신앙을 삶의 본질로 삼지 않고, 소소한 삶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활력소로 여긴다.

하나님이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고, 없으면 아쉽고 속상하지만,

- 하나님이 없다고 해서 크게 흔들리지 않는다.

- 나름의 의미를 가지며 어떻게든 삶을 살아간다.

대형 교회를 다니는 대부분 사람들이 여기에 속한다.

 

둘째로, 회복의 ‘가능성’을 거부한다.

- 자신은 회복될 수 없다는 것이다.

- 다르게 말해서, 하나님조차 자신을 회복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 따라서 하나님이 무능하다는 판단에 근거한다.

- 다르게 말해서, 하나님을 무능하다고 판단할 만큼 자신의 판단을 확신하는 교만에 근거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괴로운 이유는 전부 하나님 때문이라고 말한다.

- 이는 당연한 반응이다.

- 갑자기 시한부 선고를 받은 환자가 신을 원망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말이다.

- 극심한 괴로움에 처했고, 괴로움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없다고 느낄 때,

- 자기 삶 전체를 부정하며, 삶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원망하게 된다.

- 예레미야의 탄식이 전형적인 예이다.

[렘 15:10] 아! 어머니 원통합니다. 왜 나를 낳으셨습니까? 온 세상이 다 나에게 시비를 걸어오고, 싸움을 걸어옵니다. 나는 아무에게도 빚을 진 일도 없고, 빚을 준 일도 없는데, 모든 사람이 다 나를 저주합니다.

 

만약 이런 사람이 신앙을 가지면, 겉으로는 진지해 보인다.

- 비교적 쉽게 자기 죄를 인정하며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 단순히 돈이나 명예를 구하기보다, 진정한 평화와 영생을 구하기 때문이다.

-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마음을 가진 것처럼 보이다.

- 그런 점에서 기복 신앙과는 확연히 다르게 보인다.

그러나 이들 역시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

- 자신이 죄인이라는 판단을 믿지만, 죄인조차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않는다.

- 하나님의 능력보다 자신의 판단을 더욱 확신한다.

 

그렇다면 두 경우 중 누가 바른 신앙을 갖기 더 쉬울까?

언뜻 보기에는 후자가 쉬울 것처럼 보인다.

- 전자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지만,

- 후자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 적어도 전자보다 후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 후자의 죄 고백에는 진정성이 없다.

- 진정성 있게 죄를 고백하고 자신의 전부를 부정했다면,

- 자신의 판단 역시 확신하지 말아야 한다.

- 그래서 자신이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판단을 부정하고,

- 죄인을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확신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후자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판단에 있어서는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는다.

- 자신의 판단을 하나님의 능력보다 우위에 둔다.

- 그래서 하나님보다 자신이 더 옳다고 여긴다.

그래서 바른 신앙을 갖기 어렵다.

 

오히려 전자는 하나님의 능력을 쉽게 인정한다.

-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절대 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만 하면,

-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하나님께 나아간다.

- 그래서 결국 회복을 경험한다.

 

그렇다면 전자와 후자 중에 누가 정말 신앙을 갖기 쉬울까?

- 결론적으로 똑같다.

- 누구도 쉽지 않다.

과연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에게 죄인이라는 것을 설득하는 것과

- 자신을 죄인이라고 확신하는 사람에게 의롭게 될 것이라고 설득하는 것 중에

- 어느 것이 더 쉬울까?

- 그게 그것이다.

어차피 둘 다 하나님이 절대 가치라는 것과 자신이 절대 오물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 전자는 자신이 절대 오물이라는 것을 부정하고,

- 후자는 하나님이 절대 가치라는 것을 부정하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

 

현실에서 우리는 전자와 후자 중의 하나에 고정된 것이 아니다.

- 물론 경향성은 있다.

- 전자에 쉽게 빠지는 사람이 있고, 후자에 쉽게 빠지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실상은 전자와 후자를 오간다.

- 하나님이 절대 가치라는 것이 인정될 때는 자신이 절대 오물이라는 것을 부정하기 쉽고,

- 자신이 절대 오물이라는 것이 인정될 때는 하나님이 절대 가치라는 것을 부정하기 쉽다.

 

그래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도 의심해야 한다.

- 겉으로는 하나님의 절대 가치를 인정하는 것 같지만,

- 그 안에 자신이 절대 오물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태도가 깔려 있을 수 있다.

- 예레미야도 하나님을 멋들어지게 찬양하는데,

- 그 의도가 이스라엘 전체를 절대 오물이라며 멸망을 예언하는 하나님을 거부하기 위해서이다.

[렘 14:8] 주님은 이스라엘의 희망이십니다. 이스라엘이 환난을 당할 때에 구하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 땅에서 나그네처럼 행하시고, 하룻밤을 묵으러 들른 행인처럼 행하십니까?

반대로 자신이 죄인이라는 고백도 의심해야 한다.

- 겉으로는 자신이 절대 오물임을 인정하는 것 같지만,

- 그 안에 하나님이 절대 가치라는 것을 부정하는 태도가 있을 수 있다.

-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이 얼마나 큰 죄를 범했는지 고백하는데,

- 그 의도가 이스라엘을 회복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기 위해서였다.

[렘 32:23~25] … 그러나 그들은 주님께 순종하지도 않고, 주님의 율법에 따라서 살지도 않고, 주님께서 그들에게 실천하라고 분부하신 모든 것을 실천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이 모든 재앙을 당하게 하셨습니다. … (25) 주 하나님, 어찌하여 주님께서는 이 도성이 이미 바빌로니아 군대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저더러 돈을 주고 밭을 사며, 증인들을 세우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이러한 태도는 예수님을 바라볼 때도 반영된다.

하나님의 절대 가치는 인정하지만, 자신의 절대 오물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은

- 예수님의 부활만 강조하고 죽음은 축소한다.

- 그들은 말하길, ‘예수님이 부활하셨고, 우리 죄를 모두 용서하셨다.

- 그러니 죄책감에서 벗어나 기쁨과 자유를 만끽하며 살자.’고 말한다.

- 그러면서 ‘자신이 죄인이었던 것은 맞지만, 이제는 의인이 되었다.

- 그런데 여전히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오히려 예수님의 부활을 부정하는 불신이다.

- 부활을 믿고 자신이 의인이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라고 말한다.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표면적인 말은 전부 맞다.

-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사람의 실제 삶은 그렇지 않다.

- 죄책감을 느끼지 않기에, 자신의 죄를 더 이상 반성하지 않고,

- 반성조차 하지 않는 사람은 죄 짓는 것에 망설임이 없다.

- 죄를 지으면서도 자신이 의임임을 확신한다.

- 그러니 더욱 더 죄에 빠진다.

이것이 죽음보다 부활을 강조하는 사람의 현실이다.

 

반면에 자신이 절대 오물이라는 것은 인정하지만, 하나님의 절대 가치를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은

- 예수님의 죽음만 강조하고 부활은 축소한다.

- 그들은 말하길,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육신을 입고 내려오신 하나님이신데,

- 우리는 그 하나님을 거부하여 결국 죽였다.

- 게다가 하나님을 거부하는 죄를 지금도 여전히 짖고 있다.’고 말한다.

- 그러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의인이라 칭하셨지만, 우리는 여전히 죄인이고,

- 자신이 예수님을 죽인 죄인이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당연히 말 자체는 전부 옳다. 틀린 말은 전혀 없다.

- 문제는 반쪽짜리라는 것이다.

-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에 집중하여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간과했다.

게다가 간과하는 것보다 더 큰 문제는 하나님의 능력을 부정하는 것이다.

- 여전히 죄를 짓는 자신의 삶을 근거로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부정한다.

- 물론 드러내놓고 부정하지 않는다.

- 의롭게 됨은 죽은 이후에만 가능하지,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다고 단정한다.

- 이렇게 하나님의 능력을 죽은 이후에만 유효한 것으로 제한한다.

- 특히 나쁜 것은, 죄로 인한 괴로움이 하나님 때문이라며, 하나님을 원망한다.

결국 부활보다 죽음을 강조하는 사람은 이렇게 된다.

- 처음에는 자기 죄를 인정하는 것으로 시작하지만,

- 마지막에는 자기 죄를 해결하지 못하시는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을 끝난다.

 

그런 점에서 ‘부활파’와 ‘죽음파’는 똑같다.

- 둘 다 하나님의 절대 가치를 부정하고, 자신이 절대 오물임을 부정한다.

이것이 죽음과 부활, 죄인 됨과 의인 됨, 멸망과 회복 중의 하나로 치우치는 것이 치명적인 이유이다.

- 둘 중의 하나라도 믿으니, 반쪽짜리라도 믿음을 가진 것이 아니라,

- 둘을 동시에 믿지 못하는 것은 아무것도 믿지 못하는 것이다.

죽음과 부활은 따로 떼어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 둘 중의 하나만 취하는 것은 없다.

- 둘 다 취하거나, 둘 다 버리는 것뿐이다.

- 마치 죽기만 하거나, 부활하기만 한 예수님을 절대 그리스도라고 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과 부활, 죄인 됨과 의인 됨, 멸망과 회복 중의 하나로 치우치는 것은

- 둘 중의 하나만 취하는 것이 아니라,

- 둘 다 버리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현대 교회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핵심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같은 문제를 예레미야도 가지고 있다.

예레미야는 이전 14~15장에서 멸망 예언을 명령하시는 하나님을 거부했다.

- 이스라엘이 멸망한다는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 이스라엘이 죄를 범했지만, 망할 만큼은 아니기에,

- 반드시 회복해야 한다고 확신했다.

이러한 예레미야의 태도는 부활, 의인 됨, 회복에 치우친 것이다.

- 그 치우침은 결국 하나님을 부정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 물론 예레미야가 정말 하나님을 부정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은 아니었다.

- 그러나 선한 의도로 이스라엘 회복을 위해 시작된 태도가 ‘자기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하나님을 부정하고 거역하는 데까지 이른다.

이것이 치우친 태도로 인한 치명적인 문제이다.

 

이는 내가 가장 경계하는 부분이다.

- 선한 의도 뒤에 숨겨진 악한 의도 말이다.

- 선한 의도가 치우친 태도로 변질되고,

- 그로 인해 자기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하나님을 부정한다.

이것이 무서운 것은, 하나님을 부정하면서도 자신이 의롭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 마치 예레미야가 멸망을 예언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면서도,

- 자신을 이스라엘을 보호하기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는 의인이라고 확신했던 것처럼 말이다.

이런 착각에 빠지면, 돌이키기 정말 어렵다.

-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하나님보다 더 의로운 존재로 상정하기 때문이다.

- 그래서 하나님이 직접 정죄해도 효과가 없다.

- 정죄하는 하나님보다 자신이 더 의롭다고 믿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가 바리새인이다.

- 그들도 처음에는 선한 의도로 율법과 성전을 지켰다.

- 그로 인해 부활, 의인 됨, 회복에 치우쳤다.

- 그러나 치우친 태도는 결국 하나님을 부정하게 되고,

- 그 결과 자신을 정죄하는 하나님, 즉 예수님을 거부하고 죽였다.

이것이 전부 치우친 태도 때문이다.

- 처음부터 하나님을 부정했기 때문이 아니다.

- 선한 의도가 치우친 태도로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이것에 대해 그토록 예민하게 반응한다.

- 죽음과 부활, 죄인 됨과 의인 됨, 멸망과 회복 중의 하나로 치우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한다.

그동안 대부분은 이런 예민한 반응을 이해하지 못했다.

- 신앙 자체를 부정하는 것도 아니고,

- 신앙에서 지엽적인 것에만 집중하는 것도 아닌데,

- 신앙의 본질 두 가지 중의 하나를 조금 더 강조하는 것이 왜 그렇게 문제냐는 것이다.

- 아예 엉뚱한 소리를 해서 지적받으면 받아들이겠지만,

- 예수님의 죽음을 강조한다고 지적하는 것은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물론 사람의 입은 하나이기 때문에, 죽음과 부활을 동시에 말할 수 없다.

- 한 시점에는 둘 중의 하나만 말할 수 있다.

- 그리고 죽음에 집중하다 보면 순간적으로 부활을 간과할 수 있다.

그럴 때 나는 대화를 잠시 멈추고 상황을 정리한다.

- ‘당신은 지금 죽음에 집중해서 말하고 있는데,

- 그 이면에 부활도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고 말한다.

- 이는 상대방이 틀렸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 상대방이 한 말은 전부 다 옳은데, 그 반대에 이면이 있다는 것을 상기하는 것뿐이다.

 

그런데 만약 치우치지 않고 죽음과 부활을 동시에 취한 사람은,

- 내 말을 지적하고 정죄하는 것으로 듣지 않는다.

- 상기하는 것으로 듣는다.

- 그래서 순간 간과했던 반대 측면을 통합하여, 풍성하고 온전한 신앙을 고백한다.

그러나 만약 죽음과 부활 중의 하나로 치우친 사람은,

- 내 말을 지적하고 정죄하는 것으로 듣는다.

- 자신을 부정하는 말로 오해한다.

- 단지 다른 측면을 상기하는 것으로 듣지 못한다.

- 그래서 기분 나빠하고 화를 낸다.

- 이러한 반응이 결국 그 사람이 치우쳐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러한 갈등을 셀 수 없이 겪었다.

 

게다가 내 말을 오해하고, 갈등을 해소하지 못한 사람은,

- 하나님의 절대 가치나 자신의 절대 오물 됨을 끝내 부정하고 만다.

- 죽음에 집중하여 자신의 절대 오물 됨을 강조하는 사람은 부활을 부정한다.

-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이 절대 오물임을 해결할 수 없다고 믿어,

- 끝내 하나님의 절대 가치를 부정한다.

반대로 부활에 집중하여 하나님의 절대 가치를 강조하는 사람은 죽음을 부정한다.

- 그래서 자신은 하나님에 의해 절대 오물에서 벗어났다고 여기며,

- 끝내 자신의 절대 오물 됨을 부정한다.

그래서 치우침을 극도로 경계하는 것이다.

 

본문 해석

32장에 나온 예레미야는 죽음에 치우쳐 있다.

- 14~15장에서 부활에 치우친 것과는 반대이다.

- 이스라엘은 죄인이기에 멸망해야 마땅하다고 확신했다.

- 이스라엘은 의롭게 될 가능성은 전무하니 회복될 수 없다고 믿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땅 구입 명령을 거부했다.

- 어차피 빼앗길 땅이니 구입할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이렇게 죄악된 이스라엘이 회복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 그것은 공정하지 않다고 믿었다.

- 그래서 땅 구입 명령으로 회복을 예언하시려는 하나님을 용납할 수 없었다.

 

이런 전제에서 본문을 봐야 본문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 전제 없이 보면, 본문은 흔한 회복 예언일 뿐이다.

- 동화에서 ‘happily ever after’ 식의 비현실적인 해피 엔딩과 차이가 없다.

 

본문의 핵심은 회복 예언 자체가 아니다.

- 죽음과 멸망에 치우친 예레미야를 정죄하고,

- 그를 부활과 회복의 방향으로 끌어당겨서,

- 죽음과 부활, 멸망과 회복, 죄인 됨과 의인 됨을 동시에 믿도록 하는 것이다. 

- 죽음을 인정하면서도 부활을 소망하고,

- 부활의 영광을 누리면서도 죽음의 비극을 기억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죽음과 부활을 동시에 믿는 것은 선택의 영역이 아니다.

- 필수이다.

- 동시에 믿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믿지 않는 것이다.

- 죽고 동시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것만이 바른 믿음인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본문은 시작부터 부활과 회복에 중점을 두고 하나님을 설명한다.

[렘 33:2] 땅을 지으신 주님, 그것을 빚어서 제자리에 세우신 분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그 이름이 ‘주’이신 분께서 말씀하셨다.

- ‘지으신(make)’, ‘빚어서(form)’, ‘세우신(establish)’은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이는 하나님의 성품을 단순히 단순히 표현하는 것을 넘어서,

- 이스라엘 죄에 지나치게 몰두한 예레미야가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간과한 것을 정죄하여,

- 이스라엘이 죄인이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 그 죄를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능력도 믿도록 하기 위한 표현이다.

 

단락 구분

단락 구분은 다음과 같다.

① 1~3절: 서론 - 회복의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

② 4~9절: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

- 4~5절: 멸망 예언 - 바벨론에 의한 예루살렘 도성 파괴

- 6~9절: 회복 예언 - 하나님에 의한 예루살렘 도성 회복

③ 10~13절: 회복 예언의 구체화

- 10~11절: 소리의 회복 - 정체성 회복

- 12~13절: 초장의 회복 - 기능 회복

핵심만 추려서 정리하면, 

- 6~9절에서는 회복의 큰 그림을 보여준 후,

- 10~14절에서는 그 회복이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드러나는지 보여준다.

- 그것이 바로 정체성과 기능이다.

 

회복의 큰 그림은 다음과 같다.

① 먼저 내적 회복이 일어난다.

[렘 33:6] 그러나 보아라, 내가 이 도성을 치료하여 낫게 하겠고, 그 주민을 고쳐 주고, 그들이 평화와 참된 안전을 마음껏 누리게 하여 주겠다.

- 하나님은 예루살렘 도성과 주민이 내면에 가진 고질적이고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하실 것이다.

그 문제는 평화와 안전을 빼앗는 것으로써,

-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지 못하고, 남과 비교하게 만들어,

- 비교 우위를 점하기 위해 뺏고 빼앗기는 경쟁 관계를 의미한다.

- 그것 때문에 강대국의 우상을 들여와 숭배했고,

- 그것 때문에 백성을 착취하여 호화 생활을 누렸다.

- 결국 우상 숭배와 백성 착취 때문에 이스라엘은 멸망했다.

따라서 하나님이 일으키실 내적 회복은,

-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찾아가고,

- 그렇게 찾은 자신이 멋지던 추하던 상관 없이 사랑하는 것이다.

- 그래야 우상 숭배와 백성 착취에서 벗어나 건강한 국가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회복의 시작이다.

 

② 다음은 외적 회복이다.

[렘 33:7] 내가 유다의 포로와 이스라엘의 포로를 돌아오게 하여, 그들을 옛날과 같이 다시 회복시켜 놓겠다.

- 내적으로 회복된 이스라엘 민족은 다시 예전처럼 하나님에 의해 강력한 국가로 회복된다.

여기서 강력한 국가란,

- 다른 나라를 폭력과 억압으로 굴복시킬 힘을 가진 국가가 아니다.

-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명확한 정체성을 가지고, 

- 외부 상황 변화에도 흔들림 없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는 것이다.

이처럼 비교 우위의 힘이 아니라 독자적인 힘을 가질 때 강력한 국가가 되고,

- 강력한 국가가 될 때 다시 백성도 모여서 외적으로 회복되고,

- 외적으로 회복된 국가가 더욱 더 강력한 국가가 된다.

 

③ 이러한 회복의 본질은 죄 용서이다.

[렘 33:8] 나는 그들이 나에게 지은 모든 죄악에서 그들을 깨끗이 씻어 주고, 그들이 나를 거역하여 저지른 그 모든 죄를 용서하여 주겠다.

-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유는 표면적으로 정치적, 외교적 문제 때문이다.

- 비교 우위를 점하기 위해 했던 선택이 부메랑으로 돌아와 정치적, 외교적 갈등을 심화시켰다.

- 그러나 본질적인 이유는 비교 우위를 점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킨 근원적인 동기,

- 즉, 자신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사랑하지 못하는 마음 때문이고,

- 그 마음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 줄 유일한 존재인 하나님을 떠난 죄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죄 용서가 핵심이다.

- 죄가 용서되어야,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고,

- 하나님께 돌아가야 하나님께 있는 그대로의 자신이 사랑받을 수 있으며,

- 그렇게 사랑을 받아야 자신도 자기를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고,

- 그래야 굳이 비교 우위를 점하지 않아도 자신을 존중할 수 있으며,

- 그럴 때 정치적, 외교적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단지 지나간 이스라엘의 역사 이야기가 아니라,

- 현재도 계속되는 우리의 이야기이다.

 

④ 회복의 결과는 전도이다.

여러 번 말하지만, 전도는 단순히 누군가가 하나님에 대해 관심을 갖도록 하는 것이 아니다.

- 전도의 본질은 하나님의 절대 가치와 사람의 절대 오물 됨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래서 전도는 반드시 두 가지 반응 중 하나를 이끌어내야 한다.

- 그것은 두려워 떨거나, 혐오하여 반발하는 것이다.

- 그것이 아니라 쿨하게 인정하는 반응을 보였다면, 

- 전도자가 전도를 잘했거나 피-전도자가 잘 받아들였기 때문이 아니라,

- 전도가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회복되면, 그것을 본 세상은 두려워 떨 것이다.

[렘 33:9] 그러면 세상 만민이 내가 예루살렘에서 베푼 모든 복된 일들을 듣게 될 것이며, 예루살렘은 나에게 기쁨과 찬양과 영광을 돌리는 이름이 될 것이다. 그리고 내가 이 도성에 베풀어 준 모든 복된 일과 평화를 듣고, 온 세계가 놀라며 떨 것이다.

- 온 세상이 놀라서 떠는 이유는,

- 이스라엘의 죄를 통해 사람의 절대 오물 됨이 알려지고,

- 이스라엘의 회복을 통해 하나님의 절대 가치가 선포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회복이 구체적으로 현실에서 어떻게 나타나냐?

① 소리가 회복된다.

[렘 33:10~11] … 유다의 성읍들과 예루살렘의 거리에 또다시, (11) 환호하며 기뻐하는 소리와 신랑 신부가 즐거워하는 소리감사의 찬양 소리가 들릴 것이다. 주의 성전에서 감사의 제물을 바치는 사람들이 이렇게 찬양할 것이다. ‘너희는 만군의 주님께 감사하여라! 진실로 주님은 선하시며, 진실로 그의 인자하심 영원히 변함이 없다.’ 내가 이 땅의 포로들을 돌아오게 하여 다시 옛날과 같이 회복시켜 놓겠다. 나 주의 말이다.

소리의 핵심은 두 가지이다.

- 첫째로,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기쁨의 소리’이다.

- 둘째로,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의 소리’이다.

이러한 소리의 회복이 일어나는 이유는 단순하다.

- 사람들 사이에 관계가 회복되었기 때문에 기쁨의 소리가 들리는 것이고,

-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기 때문에 찬양의 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따라서 소리의 회복은 관계의 회복이다.

 

그렇다면 관계의 회복은 어떻게 일어나냐?

- 결론부터 말해서, 정체성 회복을 통해서만 일어난다.

정체성을 회복하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사랑할 때,

- 비교 우위를 점하려는 노력을 포기하고 자기답게 살 수 있고,

- 그럴 때만 주변 사람을 경쟁자가 아닌 동반자로 인식하여,

- 무찔러 이겨야 할 대상이 아니라, 서로에게 부족한 부분을 채워줄 대상으로 여겨서,

-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정체성을 회복하여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할 때,

- 사랑스러운 자신을 만드신 하나님까지 사랑할 수 있다.

비교 우위를 점하려 노력할 때는 언제나 상대적 박탈감 속에서, 

- 열 개 중의 아홉 개 가진 것은 생각하지 못하고, 하나 없는 것에 자격지심을 느낀다.

- 그래서 그 하나 없다고 하나님을 원망한다.

그러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면, 

- 비록 열 개 중의 아홉 개가 없더라도, 하나 있는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

- 그래서 그 하나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한다.

그렇기 때문에 정체성 회복은 사람들 사이에서 기쁨의 소리와 하나님께 찬양의 소리를 회복시킨다.

 

② 초장이 회복된다.

[렘 33:12~13]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 다시 양 떼를 뉘어 쉬게 할 목자들의 초장이 생겨날 것이다. (13) 산간지역의 성읍들과 평지의 성읍들과 남쪽의 성읍들과 베냐민 땅과 예루살렘의 사방과, 유다의 성읍들에서, 목자들이 그들이 치는 양을 셀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초장의 회복이 상징하는 것은 기능의 회복이다.

- 초장은 목자가 양을 치는 곳인데,

- 목자가 양을 친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정체성이자 동시에 정체성을 발휘하는 기능을 상징한다.

 

이를 정치적으로 해석하면,

- 이스라엘 왕은 목자로서 양인 백성이 풍족하게 살도록 잘 다스려야 했다.

- 이것이 왕의 정체성이자 동시에 기능이다.

- 왕이라면 마땅히 해야 할 일이고, 그것을 잘하라고 하나님이 부여하신 직위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왕은 백성을 돌보지 않고 착취했다.

- 정체성을 잃고 기능도 잃었다.

- 이것이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유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왕의 정체성과 함께 기능까지 회복시키신다.

- 왕이 백성을 착취하지 않고 사랑하며 돌볼 수 있도록 말이다.

- 그것이 왕의 정체성이고,

- 정체성대로 기능을 발휘하며 살 때만 왕도 행복할 수 있고,

- 백성을 비롯하여 이스라엘 전체가 행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정체성과 함께 기능까지 회복되는 것이 진정한 회복이다.

 

결론 - 참된 정체성과 기능의 회복은 무엇인가?

본문이 전하는 메시지는 두 가지이다.

- 첫째로, 죽음과 부활, 죄인 됨과 의임 됨, 멸망과 회복 중의 하나에 치우치지 말고 동시에 인식해야 한다.

- 둘째로, 회복의 본질은 정체성과 기능의 회복이다.

따라서 이 두 가지 메시지가 하나로 연결할 때 본문의 핵심을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무엇인가?

죽기도 하고 부활하기도 하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 모든 것의 근원이다.

- 예수님 안에서 죽음과 부활이라는 반대 극단의 두 개념이 하나로 뭉쳤다.

- 이성과 경험으로 사람은 죽음과 부활을 하나로 이해할 수 없는데,

- 죽음과 부활이 하나의 존재 안에서 모두 일어났고,

- 사람은 그 존재를 사람의 이성과 경험을 초월하여 깨닫고 경험했다.

그런데 신비롭게도 혹은 당연하게도 사람은 그 안에서만 진정한 자신을 발견한다.

-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완전한 죄인이라서 멸망당해 죽어야 할 자신과

-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완전한 의인으로 변화되어 영생해야 할 자신을 동시에 발견한다.

- 죄인 반 의인 반이 아니라,

- 완전한 죄인이자 동시에 완전한 의인인 자신을 말이다.

 

이것이 정체성 회복의 본질이다.

- 우리는 정체성을 기호, 성향, 진로 등으로 생각하는데, 이는 지엽적이다.

- 자기 인식은 죄인이자 동시에 의인인 자신을 발견할 때 시작된다.

- 이렇게 자기 존재의 근원을 정확하게 인식할 때만 지엽적인 기호, 성향, 진로도 알 수 있다.

- 반대로 말해서, 존재의 근원을 알지 못한 채 인식한 기호, 성향, 진로는 거짓일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현실에서 정체성을 드러내며 기능을 발휘하는 것 역시 죄인이자 동시에 의인이라는 인식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 즉, 기능을 발휘한다는 것은 자신이 죄인이자 동시에 의인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 그래서 자신뿐만 아니라 세상 전부가 영원히 멸망해야 할 죄인이자 동시에,

- 영원히 회복되어야 할 의인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 이를 통해 사람은 절대 오물이며, 하나님은 절대 오물조차 의롭게 하시는 절대 가치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것만이 기능 회복의 본질이다.

- 이러한 관점에서 시작할 때만 정체성과 기능, 즉 자기다움과 자기답게 사는 법을 알 수 있다.

- 이것만이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 사는 것이다.

 

물론 정체성과 기능 회복의 본질을 안다고 모든 것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 자신이 죄인이자 동시에 의인이라고 인식하고(정체성 회복), 그것을 세상에 알리는 것(기능 회복)은 본질이고, 근원이며, 시작이다.

- 그러나 우리가 어떤 죄인이며 어떤 의인인지 아는 것,

- 그리고 그러한 자기 자신을 어떻게 세상에 알릴 수 있을지는,

- 오직 구체적인 현실에서 셀 수 없는 시행착오를 통해서만 알 수 있다.

- 반드시 개인적으로 기도하고, 교회 공동체 안에서 교제해야만 알 수 있지만,

- 기도하고 교제만 해서는 절대로 알 수 없다.

그래서 세상에 나가서 부딪혀야 한다.

- 도전하고 도전하고 또 도전해서, 실패하고 실패하고 또 실패해야 한다.

- 극단적으로 말해서, 오히려 성공하면 안 된다.

- 성공하면 정체성과 기능을 다 찾을 줄 착각한다.

- 더 이상 도전하지 않고, 정체성과 기능을 더 알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그래서 실패의 연속이어야만 한다.

- 그래야만 자기다움이 무엇인지 더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 죽을 때까지 실패해야 죽을 때까지 자신을 더 이해할 수 있고,

- 더 이해한 만큼 더욱 자신을 사랑할 수 있다.

 

그런데 어느 누가 연속된 실패에도 포기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신앙은 연속된 실패의 길인데, 어느 누가 죽을 때까지 그 길을 가려 하겠는가.

이것이 신앙의 심각한 걸림돌이자 동시에 찬란한 영광이다.

- 신앙은 실패의 연속이기에, 누구에게도 매력이 없다.

- 누구도 가치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

- 누구도 가려고 하지 않는 길이다.

- 사람이라면 갈 수 없는 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도 안 되게 사람이 이 길을 가게 하신다.

- 겉으로 보기에 아무런 매력도 가치도 없는 이 길을 가게 하신다.

- 실패의 연속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게 하신다.

- 실패하다가 죽어도 그 길에서 죽게 하신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 오직 하나님의 능력 밖에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하나님은 이 어려운 신앙의 길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가 가도록 하신다.

- 실패와 실패와 실패를 거듭해서, 결국 진정한 자신을 찾게 하신다.

- 자신이 지옥 불에 떨어져 죽을 죄인임과 동시에,

- 천국 잔치에서 영광 받을 의인이라는 것을 알게 하신다.

그래서 영원토록 하나님의 절대 가치를 찬양하게 하신다.

 

이것이 기독교의 본질이다.

- 다른 어떤 종교와 사상도 갖지 못한 기독교만의 특징이다.

- 죽음과 부활이 한 존재 안에서 일어나고,

- 한 사람이 죄인이자 동시에 의인이며,

- 세상이 반드시 멸망해야 함과 회복해야 함을 동시에 전하는 것은 

- 기독교만이 전하는 진리이다.

 

하나님께서 미양 교회 모든 식구가 함께 이 길을 죽을 때까지 가다가,

- 이 길에서 죽게 해주시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