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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서

예레미야(65) 33:14-26 경험에 제한된 예레미야와 경험을 넘어 회복하시는 하나님

 

<미양교회 팟캐스트 양따양>

미양교회에서 했던 설교를 바탕으로 진솔하게 신앙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팟캐스트도 많이 들어주세요.

https://www.podbbang.com/channels/1790233/

 

어린양을 따르는 어린양

예배 대신 예수님, 설교 대신 성경, 건물 대신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미양교회가 만드는 방송입니다.토끼와 개구리가 진솔하게 신앙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어린양과 같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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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해서 말하지만, 예수님은 죽고 부활하셨다.

-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신앙은 죽음과 부활이 공존해야 한다.

- 절대로 어느 것 한쪽에 무게가 실려서는 안 된다.

- 반드시 죽음과 부활 모두에 무게가 실려야 한다.

죽음과 부활 중 하나에 치우친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아니듯,

- 하나에 치우친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

이러한 모순의 공존, 죽음과 삶의 역동적인 결합이 신앙의 본질이다.

- 그것을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 하나님이며 동시에 사람이신 예수님 존재의 본질에 담고 있다.

-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다.

 

물론 사람은 한 번에 한 가지밖에 생각하지 못한다.

- 죽음을 생각할 때는 부활을 생각하기 어렵고,

- 부활을 생각할 때는 죽음을 생각하기 어렵다.

- 죽음이 상징하는 죄 고백으로 괴로워하는 순간에 죄 사함과 회복의 기쁨을 떠올리기 힘들고,

- 부활이 상징하는 죄 사함으로 기뻐하는 순간에 죄의 괴로움을 떠올리기 힘들다.

이는 인지상정이다.

- 사람은 다 거기서 거기다.

- 뇌가 가진 생물학적 한계 때문이다.

- 누구나 힘들고, 믿음이 깊어지고 성숙해진다고 해도 쉽지 않다.

그러나 해야 한다.

-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다.

- 죽음 가운데 부활을, 부활 가운데 죽음을 생각해야 한다.

 

계속해서 말하는데, 이것은 정말 중요하다.

- 죽음 가운데 처했을 때, 만약 부활을 떠올리지 못한다면?

- 부활의 소망을 떠올리지 못하면, 사람은 죽음에 직면할 수 없다.

- 각자의 방식으로 죽음을 회피하게 된다.

우리가 죽음의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담대하게 죽음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이유는,

- 그 안에서만 부활의 소망을 발견할 수ㄹ 있기 때문이다.

- 부활의 소망을 믿기 때문에 죽음의 두려움에 직면할 수 있는 것이다.

반대로 부활의 소망을 믿지 않으면, 절대 죽음을 직면할 수 없고,

- 언제나 죽음을 회피하며, 죽음을 감수하는 순종을 거부하게 된다.

- 그러면 결국 예수님 신앙에서 멀어진다.

아무리 말로 믿음을 고백한다고 해도, 이는 순도 100% 불신이다.

 

만약 부활의 소망이 없다면, 신앙은 반드시 두 가지 반대 극단으로 변질한다.

첫째로, 죽음을 경험하는 상황을 극도로 피한다.

- 이유는 자명하다.

- 모든 가능성을 박탈당하는 죽음을 어느 누가 맨정신으로 감수할 수 있겠는가.

- 죽음을 감수하는 이유는 모든 가능성이 박탈당한 상황에서만 완전히 회복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단순한 예를 들어, 우리가 회개할 수 있는 이유는 역설적으로 용서의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 용서받을 수 있다는 실낱같은 기대가 있기 때문에 힘들지만 죄를 고백하는 것이다.

- 반대로 말해서, 용서받을 기대가 없으면 죄를 고백하지 않는다.

- 단순히 고백하지 않는 것을 넘어서, 용서받지 못할 죄는 인식조차 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용서될 것이라는 믿음의 한계까지만 죄를 인식하고 회개할 수 있다.

- 용서의 한계를 넘어서는 죄는 회개는커녕 인식조차 할 수 없다.

- 그런 죄는 무의식적으로 합리화하여 무의식 깊숙이 묻어둔다.

 

그러나 용서의 믿음이 생겼을 때 죄가 비로소 무의식 속에서 의식의 수면 위로 떠오른다.

- 용서의 한계에 걸려있는 죄, 그래서 무의식 깊은 속에서 이제 막 떠오른 죄를 처음 마주할 때,

- 그때의 그 죄책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럽다.

- 자신이 살인범, 패륜아, 흉악범보다 더 극악무도한 범죄자라는 것을 피부로 느꼈을 때,

- 숨쉬기조차 버거울 만큼, 죽기보다 살기가 더 어려울 만큼 괴롭다.

- 상상조차 해보지 않은 심각한 죄를 처음 마주했을 때의 괴로움이 그렇다.

하지만 이 죄를 마주했다는 것은, 

- 그래서 죄가 무의식 속에서 의식으로 올라왔다는 것은,

- 자신에게 그 죄도 용서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먼저’ 생겼다는 것을 증명한다.

- 용서될 수 있다는 믿음의 한계가 이전보다 깊어졌다는 뜻이며,

- 하나님이 회복하시는 능력을 한 단계 더 깊이 깨달았다는 증거이다.

즉, 죽음 속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갈 수 있는 이유는, 이전에 이미 부활 속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갔기 때문이다.

 

둘째로, 자포자기하는 마음으로 자살하듯 죽음으로 뛰어든다.

- 부활의 믿음 없는 죽음은 정확히 자살과 같다.

- 동기는 자기혐오에서 시작하며,

- 자기를 혐오하게 만든 세상과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포기하는 마음 때문이다.

세상을 사랑해서 하나님께 순종하신 예수님의 죽음과 달리,

- 세상을 원망해서 하나님께 복수하는 마음으로 죽음을 선택한다.

 

간혹 죽음이 두렵지 않다는 이를 만난다.

- 사는 것에 미련이 없다고 말한다.

- 자신은 명백한 죄인이기에, 성경이 말하는 심판이 합당하다는 것이다.

- 그렇기에 자신은 바른 신앙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어떤 면에서 이들은 바른 신앙과 구분하기 어렵다.

- 자기 죄를 고백하며, 욕심 없는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 세상의 가치에 매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명백한 차이가 있다.

- 이들은 자신을 사랑하지 못한다.

- 그리고 세상과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한다.

- 이들이 자유로워 보이는 이유는 자신과 세상과 하나님을 모두 포기했기 때문이다.

- 자신, 세상, 하나님께 아무런 기대도 없기 때문이다.

- 진정한 자신을 찾기 위해 세상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 혐오스러운 자신을 버리기 위해 세상을 포기한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계속해서 자기 죄를 고백하고, 세상의 가치를 포기하지만,

- 계속해서 우울하고, 회복의 기쁨을 갖지 못한다.

- 그래서 회개도, 세상 포기도, 신앙도 아무 소용 없다고 좌절한다.

- 그러면서 왜 자신은 회개하고 이렇게 많이 포기했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냐고 한탄한다.

 

이유는 하나이다.

- 이들이 진정한 회복을 기대하지 않기 때문이다.

- 이미 포기했기 때문이다.

- 애초부터 회복을 목적 삼지 않았기 때문이다.

- 자신과 세상을 사랑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을 용서하신다는 믿음에 근거한 죽음이 아니라,

- 하나님조차 자신을 용서할 수 없다는 믿음에 근거한 죽음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부활 없는 죽음’의 실체이다.

 

우리는 ‘죽음 없는 부활’ 신앙을 자주 비판한다.

- 죄 인식과 고백 없이, 죄 용서를 바라는 신앙,

- 아무런 희생과 헌신 없이, 회복과 풍요를 바라는 신앙,

- 멸망과 파괴 없이, 현재 안락한 상태를 그대로 유지한 채, 예수님이라는 액세사리 하나만 덧붙여 치장하는 신앙,

- 하나님을 요술램프 지니 취급하는 이러한 신앙이 얼마나 추하고 냄새나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

- 말 그대로 기복 신앙에 대해서는 많이 비판했다.

그러나 반대로 ‘부활 없는 죽음’ 신앙 역시 얼마나 추한지는 간과한다.

- 오히려 부활조차도 바라지 않고 죽음을 선택한다고 칭찬한다.

- 대가를 바라지 않는 희생이기에 더 순수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대가만 바라고 아무것도 희생하려 하지 않는 ‘죽음 없는 부활’ 신앙,

- 그래서 시장에서 장사하듯, 예수님께 최소 비용으로 최대 효과를 기대하는 기복 신앙에 비해서 

- ‘부활 없는 죽음’ 신앙이 나아 보일 수 있다.

- 적어도 ‘부활 없는 죽음’ 신앙은 대가를 기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라기만 하는 사람’과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사람’ 중에 누가 더 나쁠까?

- ‘바라기만 하는 사람’은 적어도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기대한다.

- 적어도 하나님께 전능한 능력이 있다는 것은 믿는다.

- 물론 그 하나님을 하인 부리듯 마음대로 좌지우지하려는 것이 문제지만 말이다.

그러나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사람’은 그조차 믿지 않는다.

- 하나님께 능력이 있다는 것조차 부정한다.

-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전무하다.

- 오히려 하나님조차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원망한다.

그래서 ‘바라기만 하는 사람’을 칭찬하려는 것이 아니다.

- 둘 다 똑같이 나쁘다는 것이다.

- 기복 신앙이 나쁜 만큼 자기혐오 신앙도 나쁘다.

 

‘죽음 없는 부활’을 믿고, ‘바라기만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은 믿지만,

- 그 능력을 자신의 욕망 성취 수단으로 이용한다.

- 그래서 능력 있는 하나님을 자신의 하인으로 두고, 마음대로 부리려고 한다.

- 그런 점에서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라는 것을 부정한다.

반대로 ‘부활 없는 죽음’을 믿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이용하지는 않는다.

- 하나님을 욕망 성취 도구 삼아, 자기 욕망을 마구 드러내지는 않는다.

- 그러나 하나님을 이용하지 않는 이유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존중하기 때문이 아니라,

- 하나님께 이용 가치가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 아무런 능력이 없고, 그래서 욕망 성취 도구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 그런 점에서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라는 것을 부정한다.

 

그렇다면 참 하나님은 어떤 분이냐?

‘바라기만 하는 신앙’, ‘죽음 없는 부활’도 아니고, 

-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신앙’, ‘부활 없는 죽음’도 아닌, 

- 바른 신앙은 무엇인가?

 

두 가지를 동시에 믿는 것이다.

첫째로, 하나님은 우리가 바라는 모든 것을 행하고 주시는 분이다.

- 이는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는 분이라면 당연히 갖고 있는 능력이다.

- 세상 안에서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능력은 세상이 없을 때 세상을 창조하는 능력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 그렇기 때문에 세상을 창조한 분이 세상 안에서 모든 것을 행할 수 있는 것은 당연하다.

이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신앙을 부정한다.

- 부활 없는 죽음을 부정한다.

- 하나님은 죽은 예수님을 부활시키셨다.

- 그리고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죽으면 예수님과 함께 부활시키겠다고 약속하셨다.

- 그래서 우리가 죽음 가운데서도 부활을 바라고 기대하도록 하셨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 것은 부활을 기대하는 것이다.

 

둘째로, 하나님은 우리가 바라는 대로 행하지 않는 분이다.

- 이 역시 세상을 창조하고 다스리는 분이라면 당연히 갖고 있는 성품이다.

- 창조주는 피조물에 종속되지 않는다.

- 그래서 창조주는 피조물에 복종하지 않는다.

- 그렇기 때문에 창조주의 선택권은 언제나 피조물의 선택권보다 우선한다.

- 따라서 하나님은 피조물인 우리가 바라는 대로 행하지 않는다.

이는 바라기만 하는 신앙을 부정한다.

- 죽음 없는 부활을 부정한다.

 

사람은 구원자이며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이 세상을 정복하길 바랐다.

- 세상에서 악을 전부 몰아내길 바랐다.

- 그래서 세상 악으로 고통당하는 우리를 구원하시길 바랐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바람을 완전히 박살 내셨다.

- 우리의 바람과 완전히 반대로 행하셨다.

- 세상 악을 몰아내기는커녕, 세상 악에 의해 죽임당하셨다.

-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세상 악에 무력하게 희생당하셨다.

우리는 예수님이 세상을 정복하길 바랐지만, 예수님은 세상에 정복당한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상에 정복당하기‘만’ 하셨나?

- 예수님은 세상에서 죽기‘만’ 하셨나?

아니다!

- 예수님은 죽고 부활하셨다.

- 세상에 정복당하고 정복하셨다.

- 예수님은 세상과 분리되지 않고 세상 안에 들어가셔서 세상에 정복당하셨다.

-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 안에서 세상에 휩쓸리지 않고 세상과 구분되어 세상을 정복하셨다.

 

그 결과 우리의 바람은 박살 났지만, 진정한 바람은 성취되었다.

- 우리의 바람이 바라는 대로 성취되지 않았지만,

- 우리의 바람대로 성취되지 않았기 때문에, 진정한 바람이 완벽하게 성취되었다.

 

만약 우리의 바람이 있는 그대로 성취되었다면?

- 그래서 예수님이 바리새인과 서기관, 제사장을 전부 굴복시키고,

- 로마 황제와 정면으로 대결하여, 정치적, 군사적, 외교적으로 승리하셨다면?

- 그래서 식민지 처지에 있는 이스라엘을 독립시키고,

- 이스라엘을 모든 국가 위에 군림하는 강력한 국가로 세워서,

- 예수님이 인류 전체를 통제하는 황제가 되셨다면?

- 그래서 세상 악을 전부 몰아내고, 세상 악에 고통당하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셨다면?

- 과연 그 세상은 행복하고 평안할까?

같은 질문을 인류 전체에서 개인으로 한정하여,

- 만약 우리에게 괴로움을 주는 모든 사람과 문제가 제거된다면?

- 그리고 앞으로 영원토록 누구도 우리에게 괴로움을 주는 즉시 제거된다면?

- 과연 우리는 행복하고 평안할까?

 

이러한 질문의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그 끝에 나오는 질문은 이것이다.

- 사람은 어떨 때 행복과 평안을 느낄까?

- 행복과 평안의 기준은 무엇일까?

답은 자명하다.

- 온전한 관계, 즉 사랑이다.

- 사람의 모든 욕구를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사랑의 욕구에 이른다.

- 물욕, 식욕, 성욕, 명예욕, 생존욕 등 모든 욕구는 사랑의 욕구에서 파생된 것이다.

이를 단적으로 증명하는 것은,

- 사랑을 위해 모든 욕구를 포기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과,

- 반대로 모든 욕구를 전부 성취한 사람 중에 사랑의 욕구를 채우지 못해 자살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 그만큼 사랑의 욕구가 강력하다는 것이고,

- 그만큼 사랑의 욕구에 모든 욕구가 종속된다는 뜻이다.

 

이것을 위해 예수님은 세상을 정복하지 않으신 것이다.

- 오히려 세상에 정복당해 죽으신 것이다.

세상에 사랑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말이다.

- 세상을 정복하지 않고 세상에 정복당함으로, 예수님이 세상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여주시기 위해서 말이다.

- 예수님이 세상을 너무 사랑해서, 

- 자신이 창조한 세상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 폭력으로 정복할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불가피하게 정복당할 수밖에 없었고,

- 정복당하는 순간조차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저항할 수 없었다.

- 세상에 저항하면 세상이 다치기 때문이다.

- 예수님은 자신이 죽으면 죽었지, 절대로 세상을 다치게 할 수 없었다.

- 그 사랑 때문에 예수님은 무능하게 죽임당하신 것이다.

- 실제로 무능하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 때문에 능력을 억누르셨다.

- 모든 능력을 오직 사랑하는 것에만 쏟아부으셨다.

 

그랬기 때문에 우리의 바람이 바람대로 성취되면 안 되었다.

- 예수님이 세상을 정복하면 안 되었다.

- 그러면 결국 우리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다치기 때문이다.

- 우리가 다치는 것은 우리의 바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정한 바람은 완벽하게 성취되었다.

- 우리에게 있는 사랑의 욕구는 성취되었다.

-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은 사랑을 완벽하게 증명하셨다.

하나님이 우리를 무한한 사랑으로 한 없이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그래서 우리의 진정한 바람이 성취되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방식이다.

- 우리의 바람을 바람대로 성취하시지 않지만,

- 진정한 바람을 완벽하게 성취하신다.

이것을 믿을 때만, 하나님을 믿을 수 있고,

- 하나님이 이런 방식으로 일하실 때만, 우리의 바람이 성취되기 때문이다.

- 이런 방식으로만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할 수 있고,

- 세상 안에서 사랑을 성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으로만 우리의 바람이 성취되어 만족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이 방식 말고는 우리를 만족시킬 다른 방식이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나님은 모든 것을 전부 하실 수 있지만, 

- 우리의 바람을 전부 성취하시진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으로,

- 우리에게 필요한 바람은 전부 성취하신다.

이 두 가지 조건을 가진 하나님만을 참 하나님이라 부를 수 있으며,

- 이 두 가지를 믿을 때만 바른 신앙을 가질 수 있다.

 

본문 설명

예레미야 역시 같은 오류에 빠져있다.

- 이전에는 ‘죽음 없는 부활’을 기대했다.

- 그래서 14장에서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이스라엘이 멸망 없는 회복을 구했다.

- 그래서 멸망 후 회복을 계획하신 하나님을 거부하고 반역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반대로 ‘부활 없는 죽음’이 빠졌다.

- 이스라엘이 죄로 인해 멸망할 것이고, 회복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 이스라엘의 죄가 너무 커서 하나님조차 회복시킬 수 없다고 생각했다.

 

본문은 이러한 배경에서 선포된 회복 예언이다.

- 그런 점에서 표면적인 내용은 이스라엘의 회복이지만,

- 내면적인 내용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부정하는 예레미야를 필두로,

- ‘부활 없는 죽음’ 신앙을 정죄하는 것이다.

하나님께는 회복의 능력이 있고, 우리는 그것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 그것을 믿지 못하는 예레미야를 정죄한다.

 

물론 현실은 암담하다.

- 현실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죽음 뿐이다.

- 죽음 이외에 상상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 모든 가능성이 박탈된 상황이다.

- 모든 바람이 전부 박살 났다.

- 연속된 실패로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전무하다.

- 하나님의 능력을 기대할 수 있는 증거는 아무것도 없다.

- 이스라엘은 초강대국 바벨론 군대에 포위되었고,

- 예루살렘 성을 지킬 최소한의 군대도 없는 실정이다.

그런데 이렇게 회복 가능성이 전무한 상황에서 하나님은 명령하신다.

- 하나님이 회복하실 것을 믿으라고 말이다.

- 마치 죽은 지 삼 일이 지나 회복 가능성이 없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회복 가능성을 믿지 않은 예레미야를 정죄하신다.

- 멸망한 이스라엘이 회복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부정한 것이라고.

- 하나님의 능력을 부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예레미야는 이렇게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 그렇게 절망적인 상황에서 어느 누가 소망을 가질 수 있겠는가!

- 국가를 유지할 힘이 전무한 이스라엘이 회복될 것이라고 어느 누가 상상할 수 있겠는가!

- 이스라엘의 회복을 믿지 못한 것은 너무 당연하니, 자신을 정죄하는 것은 부당하다! 라고 말이다.

그런데 ‘상황을 절망적이라고 인식한 예레미야의 판단’과 ‘하나님이 전능하다는 사실’ 중에 무엇이 더 참인가?

-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전능하다는 사실보다 자신의 판단을 믿었다.

-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하지만 의도적으로 하나님이 전능하다는 사실을 부정했다.

- 더 근원적으로, 예레미야는 애초부터 하나님이 전능하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예레미야는 ‘조건적으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었다.

이것이 예레미야가 정죄 받기 마땅한 죄이다.

 

이 죄는 범한 사람은 성경에 정말 많은데, 대표적으로 베드로가 있다.

- 베드로는 예수님의 죽음을 보고 절망에 빠졌다.

- 소망을 잃고 자포자기했다.

- 결국 신앙을 포기해 버렸다.

이러한 베드로의 마음에 공감하지 못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 그러나 하나님은 전혀 공감하지 못하신다.

- 왜냐하면 베드로는 하나님이 전능하다는 사실보다 자신의 판단을 더욱 믿었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었다.

- 단, 조건적으로만 믿었다.

- 자신이 가능하다고 판단한 상황에만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었다.

- 그러나 자신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상황에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지 않았다.

- 그래서 예수님이 죽으실 때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은 박살 났다고 판단했고,

- 자기 판단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부정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절대 용납하실 수 없는 부분이다.

- 하나님이 전능하다는 사실보다 자기 판단을 우위에 두는 태도 말이다.

- 이는 하나님을 자기 판단과 경험, 이성 아래 두는 태도이다.

- 순도 100%의 불신이다.

하나님을 사람 아래 두는 것이 어떻게 하나님께 용납되겠는가.

 

따라서 본문은 이러한 예레미야의 태도를 정죄하여,

- 하나님보다 자기 판단을 우위에 두었던 예레미야가

- 자기 판단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온전히 믿도록 하기 위해

- 이스라엘의 회복을 예언한 것이다.

다르게 표현해서, 회복 예언의 핵심은 회복 그 자체가 아니라,

- 예레미야가 자신이 절대 오물임을 인정하여 자기 판단을 부정하고,

- 하나님의 절대 가치를 인정하여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도록 하는 것에 있다.

 

회복 예언의 핵심 - 다윗 언약

그렇다면 예레미야가 믿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

- ‘다윗 언약’이다.

- 다윗 언약의 핵심은 다윗 혈통의 국가가 영원하다는 것이다.

[삼하 7:16]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이어 갈 것이며, 네 왕위가 영원히 튼튼하게 서 있을 것이다.

 

예레미야는 다윗 혈통의 국가 이스라엘이 절망적으로 파괴되는 상황에서 회복을 포기했다.

- 이스라엘 모든 백성이 이스라엘은 다시 나라를 이루지 못할 것으로 여겼다.

[렘 33:24] 너는 이 백성이 ‘주님께서는 자신이 택하신 두 족속을 버리셨다’고 말하는 것을 듣지 못하였느냐? 그래서 사람들이 내 백성을 멸시하고, 다시는 나라를 이루지 못할 것으로 여기고 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하나님은 다윗 언약을 다시 꺼내신다.

- 다윗 혈통의 국가가 영원할 것이라고 재확인하신다.

[렘 33:14~15] 나 주의 말이다. 보아라, 내가 이스라엘 가문과 유다 가문에 약속한 그 복된 약속을 이루어 줄 그 날이 오고 있다. (15) 그 때 그 시각이 되면, 한 의로운 가지를 다윗에게서 돋아나게 할 것이니, 그가 세상에 공평과 정의를 실현할 것이다.

[렘 33:26] 야곱의 자손과 나의 종 다윗의 자손도, 내가 절대로 버리지 않을 것이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을 다스릴 통치자들을 다윗의 자손들 가운데서 세우는 나의 일도, 그치지 않을 것이다. 이제는 참으로 내가 이 백성을 불쌍히 여겨서, 그들 가운데서 포로가 된 사람들을 돌아오게 하겠다.

이렇게 본문은 시작과 끝을 다윗 언약으로 감싸고 있다.

 

나머지 17~22절은 다윗 언약을 구체적으로 규정한다.

- 하나님께서 영원히 지키실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 그것은 ‘다윗 혈통의 왕’과 ‘레위 지파의 제사장’이다.

[렘 33:17~18] 나 주가 말한다. 이스라엘 민족의 왕좌에 앉을 사람이 다윗에게서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 (18) 레위 지파의 제사장 가운데서도, 나에게 번제물을 바치며 곡식제물을 살라 바치고 희생제물을 바칠 사람이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

[렘 33:22] 셀 수 없이 많은 하늘의 별처럼, 측량할 수 없이 많은 바다의 모래처럼, 내가 나의 종 다윗의 자손나를 섬기는 레위 사람들을 불어나게 하겠다.

 

그렇다면 ‘다윗 혈통의 왕’과 ‘레위 지파의 제사장’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인가?

정체성과 기능이다.

- 정체성은 내적 방향으로의 자기 표출이고,

- 기능은 외적 방향으로의 자기 표출이다.

그런 점에서 다윗 혈통의 왕은 내적 정체성을 상징하고,

- 레위 지파의 제사장은 외적으로 정체성을 표출하는 기능을 상징한다.

 

다윗은 민족 상태에 있던 이스라엘을 ‘국가’로 세운 왕이다.

- 아브라함은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시작했고,

- 요셉(이스라엘)은 이스라엘 민족을 굳건하게 정립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따라서 다윗 혈통의 왕이 영원히 지속된다는 것은 

- 이스라엘의 정체성이 변질되지 않고 영원히 지속된다는 뜻이다.

- 다윗이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을 아버지 삼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살아가는 정체성을 유지할 것이라는 뜻이다.

[삼하 7:14]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 그가 죄를 지으면, 사람들이 저의 자식을 매로 때리거나 채찍으로 치듯이, 나도 그를 징계하겠다.

 

제사장은 성전 제사의 리더이다.

- 성전 제사는 이 세상에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이라는 것 고백하는 기능을 한다.

- 따라서 레위 지파의 제사장이 영원히 지속된다는 것은 세상에 하나님을 고백하는 이스라엘의 기능이 지속된다는 뜻이다.

 

특히 본문은 다윗 혈통의 왕과 레위 지파의 제사장이 영원할 것이라고 강조한다.

- 약속의 굳건함을 낮과 밤의 자연 법칙을 이용하여 확증한다.

[렘 33:20] 나 주가 말한다. 낮에 대한 나의 약정과 밤에 대한 나의 약정을 너희가 깨뜨려서, 낮과 밤이 제시간에 오지 못하게 할 수 있겠느냐?

[렘 33:25] 나 주가 말한다. 나의 주야의 약정이 흔들릴 수 없고, 하늘과 땅의 법칙들이 무너질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왜 이렇게 호들갑스럽게 약속의 굳건함을 강조할까?

- 아무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과연 누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수 있었겠는가.

- 과연 누가 다윗 혈통의 왕과 레위 지파 제사장이 영원할 것이라고 소망할 수 있었겠는가.

- 눈앞에서 처량하게 왕이 끌려가는 모습을 보며,

- 성전이 하염없이 무너져 내리는 모습을 보며,

- 왕과 성전이 영원할 것이라고 누가 기대할 수 있었겠는가.

사람의 상식, 경험, 이성에 근거할 때, 오히려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는 것이 더 합당하다.

- 오직 상식, 경험, 이성을 초월할 때만,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수 있다.

 

예수님도 베드로에게 죽음과 부활을 여러 차례 반복해서 알려주셨지만,

- 베드로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 그래서 예수님이 죽으셨을 때, 배운 대로 약속을 믿고, 부활을 소망하며, 기다렸어야 했지만,

- 약속을 믿지 않고, 절망하여, 신앙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유는 단순하다.

- 상식, 경험, 이성에 근거했기 때문이다.

- 예수님의 약속보다 상식, 경험, 이성을 신뢰했기 때문이다.

- 그래서 예수님의 약속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무엇이 옳았는가?

- 상식, 경험, 이성이 옳았는가,

- 아니면 예수님의 약속이 옳았는가.

- 사람의 상식, 경험, 이성은 틀렸고,

- 예수님의 약속은 성취되었다.

예수님의 약속대로 예수님은 부활하셨다.

- 그래서 온 인류를 위한 참 그리스도가 되셨다.

그런 점에서 부활은 인류의 구원을 위한 것이지만,

- 동시에 예수님보다 상식, 경험, 이성을 의지하는 온 인류를 향해 정죄이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예레미야의 현실에서 무엇이 옳았는가?

- 하나님의 약속이 옳았다.

- 이스라엘은 바발론 포로에서 귀환한다.

- 약속대로 다윗 혈통의 왕인 느헤미야가 이스라엘을 관리하고,

- 레위 지파 제사장이 다시 성전에서 제사를 드린다. 

게다가 약속대로 다윗 혈통의 왕이신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신다.

- 그리고 참된 제사장이신 예수님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하신다.

역시 경험보다 하나님이 옳았다.

 

그렇다면 하나님보다 경험을 믿었던 사람은 어떻게 되었을까?

- 두 가지 반대 극단으로 나타난다.

첫째로, 이스라엘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바벨론에 저항한다.

- 이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했다.

- 그래서 바벨론의 침략에 저항하지 못하면 이스라엘이 영원히 사라질 것이라는 자신의 경험을 믿었다.

- 그래서 죽더라도 자신이 직접 이스라엘을 지켜야만 했다.

- 그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 그래서 그들은 대부분 전쟁에서 죽는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예언했다.

- 바벨론에 저항하면 죽을 것이라고.

- 바벨론에 저항하지 말고 바벨론을 섬기라고.

무조건 바벨론에 굴종하고 동화되라는 것이 아니라,

- 바벨론의 강력한 힘을 인정하고, 무모하게 저항하지 말라고.

- 하나님이 회복하실 날을 믿고 기다리라고 말이다.

[렘 27:6~8] (6) 지금 나는 이 모든 나라를 나의 종 바빌로니아 왕 느부갓네살의 손에 맡겼으며, 들짐승도 그에게 맡겨서, 그가 부리게 하였다. (7) 그러므로 모든 민족이 느부갓네살과 그의 아들과 그의 손자를 섬길 것이다. 물론 바빌로니아도 망하고 느부갓네살도 망할 때가 올 것이다. 그 때가 되면, 그의 나라도 강한 족속들과 위대한 왕들을 섬길 것이다. (8) 그러나 바빌로니아 왕 느부갓네살을 섬기지 않으며, 바빌로니아 왕의 멍에를 목에 메지 않는 민족이나 나라가 있으면, 나는 그 민족을 전쟁과 기근과 염병으로 처벌해서라도, 그들을 바빌로니아 왕의 손에 멸망당하게 하겠다. 나 주의 말이다.

 

둘째로, 이스라엘을 완전히 포기하고 완전히 바벨론에 동화한다.

- 이들 역시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했다.

- 그래서 이스라엘은 절대 회복되지 못할 것이기에, 

-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이스라엘을 포기하고 바벨론에 동화하는 것뿐이라고 믿었다.

-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눈앞에 보이는 바벨론이 더 강력한 자신의 경험을 믿었다.

- 그래서 자기 정체성을 버리고 바벨론인이 되기 위해 헌신한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예언했다.

- 결국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올 것이라고.

- 그래서 이스라엘이 회복될 것이라고.

그러니 무조건 바벨론에 저항하여 고집스럽게 정체성을 유지하라는 것이 아니라,

- 바벨론 사회에 적응하라고 말한다.

[렘 29:5~7] 너희는 그 곳에 집을 짓고 정착하여라. 과수원도 만들고 그 열매도 따 먹어라. (6) 너희는 장가를 들어서 아들딸을 낳고, 너희 아들들도 장가를 보내고 너희 딸들도 시집을 보내어, 그들도 아들딸을 낳도록 하여라. 너희가 그 곳에서 번성하여, 줄어들지 않게 하여라. (7) 또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이 평안을 누리도록 노력하고, 그 성읍이 번영하도록 나 주에게 기도하여라. 그 성읍이 평안해야, 너희도 평안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적응하되 동화하지는 말고,

- 이스라엘로 돌아와 이스라엘답게 살 그날을 기다리라는 것이다.

- 회복하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날이 오면, 

- 지체하지 말고, 주저하지 말고, 

- 바벨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이스라엘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물론 사람의 뇌는 하나로 치우치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 그래서 극단적으로 바벨론에 저항하여 싸우다 몸이 죽거나,

- 반대로 극단적으로 바벨론에 동화하여 마음이 죽는 선택을 한다.

그런데 이렇게 치우치는 선택은 결국 자신을 죽인다.

- 몸이 죽느냐, 마음이 죽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 극단적으로 저항하지 말아서 몸을 지키고,

- 극단적으로 동화하지 말아서 마음을 지켜서,

-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회복하실 그날까지 기다리라고 말이다.

이 방법만이 이스라엘이 몸과 마음을 모두 지켜서,

- 이스라엘답게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언뜻 보기에, 하나님이 이랬다저랬다 하며 사람을 괴롭히시는 것 같지만,

- 실제는 사람을 몸만이 아니라 마음마저 살려서,

- 사람답게 살도록 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결론 - 경험을 부정하고 하나님을 믿는 삶은 무엇인가?

도대체 경험을 부정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 과거의 경험을 전부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하여,

- 지금 막 태어난 아기처럼 살라는 것은 아니다.

그것 역시 치우치는 것이다.

- 자신의 경험을 극단적으로 부정하는 것 역시 자기혐오의 또 다른 표현이다.

- 자기 경험을 극단적으로 신뢰하여 뭐든지 자기 판단대로 사는 삶도 문제이지만,

- 자기 경험을 극단적으로 부정하여 아무것도 판단하지 않는 삶도 문제이다.

 

경험을 부정한다는 것은 극단적 신뢰와 극단적 부정 사이에 있다.

- 다르게 말하면, 극단적 신뢰와 극단적 부정을 동시에 갖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말하면, 

- 평상시에는 자신을 사랑하고 긍정하여, 자기 경험도 신뢰하는 것이다.

- 그래서 과거 경험에 비추어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 자기 기준을 근거로 옳은 방향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 그래서 세상의 가치 기준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기답게 사는 것이다.

- 하지만 마음 한편에는 자신의 경험이 절대적이지 않고, 언제든 틀릴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그때가 온다.

- 경험에 근거할 때, 명백한 실패가 연속되는 상황이 온다.

- 과거 경험으로는 해석할 수 없는 상황이 온다.

- 하나님이 작정하고 자신을 괴롭게 하시는 것으로 판단되는 상황이 온다.

-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신앙을 부정할 수밖에 없는 순간이 온다.

바로 이때가 중요한 시점이다.

- 자기 경험을 신뢰하면, 하나님의 존재가 부정되고,

-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면, 자기 경험이 부정되는 상황 말이다.

 

이 상황에서 많은 사람은 자기 경험을 선택한다.

- 자신에게는 자기 경험만큼 절대적인 것이 없기 때문이다.

- 그래서 의도하지 않게 하나님을 부정한다.

이것으로 신앙을 곧바로 버리는 사람이 있지만,

- 대부분은 신앙을 곧바로 버리지 않고,

- 신앙의 겉모습만 유지한 채, 마음은 떠나보낸다.

- 그래서 우리가 머리속에 떠올리는 바로 그 교인의 모습으로 변질한다.

 

하지만 일상에서 자신의 경험이 틀릴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사람,

- 그래서 자신은 절대 오물이고 하나님만이 절대 가치라는 것을 믿는 사람은,

- 하나님을 부정하지 않고, 자기 경험을 의심한다.

과거 경험에 비추어 볼 때, 현실은 실패이고, 절망적인 상황이지만, 

- 그래서 회복될 가능성이 없지만,

- 바로 그 순간에 내가 잘못 판단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의 판단과는 다른 하나님의 뜻이 있고,

- 현실에서 일어나는 실패와 절망은 하나님의 더 큰 뜻 안에 있는 사랑일 것이라고 믿는다.

- 부정적인 현실을 이해하고 납득할 수 없지만,

- 부정적인 현실조차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믿는다.

이것이 경험을 부정하고 하나님을 믿는 삶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살 때 우리 삶은 어떻게 변화되는가?

결론적으로, 큰 차이는 없다.

- 일상에 최선을 다하며, 최선을 다해 신앙 생활하며 사는 것이 전부이다.

- 부정적인 현실에 절망하고 좌절하지 않는 것이다.

- 현실의 문제를 극복하고 해결하고,

- 그래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는 받아들이고 적응하여 사는 것이다.

- 그러나 적응한다고 해서, 현실에 동화되어 자기다움을 포기하고 체념하는 것도 아니다.

- 현실에 적응하되, 최선을 다해 자기답게 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겉으로 보면, 이러한 삶에는 특별한 것이 없는 것 같다.

- 모든 사람의 인생이 다 그런 것 같다.

- 너무 시시해서 맥이 빠진다.

- 이런 삶 살려고 이렇게 고생하며 신앙생활 하는 건가? 싶다.

하지만 깊이 생각해 보면, 정말로 저렇게 사는 사람은 없다.

- 세상에는 현실에 적응하여, 자기다움을 포기한 사람과

- 자기다움을 지키느라 현실에서 도피한 사람밖에 없다.

- 극단적으로 치우친 사람밖에 없다.

 

그러나 신앙만이 현실에서 자기답게 살게 해준다.

- 현실과 자기다움 중 양자택일이 아니라,

- 둘 다 갖게 해준다.

- 마치 예수님께서 하나님이라는 자기다움을 가진 채, 사람이 되어 현실에 적응하신 것처럼 말이다.

- 100% 하나님이심과 동시에 100% 사람이셨던 것처럼 말이다.

극단적으로 치우치기는 쉽다.

- 그러나 그런 사람은 절대 만족할 수 없다.

- 사람은 자기다움과 현실 중의 하나만 잃어도 만족할 수 없다.

- 예수님이 사람과 하나님 중의 하나만 잃어도 만족하실 수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신앙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모두 이뤄주는 것이다.

 

물론 우리의 바람이 바라는 대로 이뤄지지는 않을 것이다.

- 내가 원하는 대로 현실에서 성공하며,

- 동시에 내가 원하는 대로 나답게 살 수는 없을 것이다.

- 그래서 내가 원하는 성공을 포기해야 하고,

- 내가 원하는 자기다움을 포기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포기를 통해서 진정한 성공과 자기다움을 성취하실 것이다.

- 그래서 우리가 바란 대로는 아니지만,

- 우리의 진정한 바람이 완벽하게 성취되어, 

- 충만하고 행복하며 만족스러운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것이 본문에서 예언하고 있는 회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