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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서

예레미야(60) 31:15-22 여자가 남자를 안는 것 - 공동 소유의 완성

<미양교회 팟캐스트 양따양>

미양교회에서 했던 설교를 바탕으로 진솔하게 신앙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팟캐스트도 많이 들어주세요.

https://www.podbbang.com/channels/1790233/

 

어린양을 따르는 어린양

예배 대신 예수님, 설교 대신 성경, 건물 대신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미양교회가 만드는 방송입니다.토끼와 개구리가 진솔하게 신앙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어린양과 같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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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크게 두 단락으로 나뉜다.

① 15~17절: 라헬(이스라엘)은 자녀를 잃고 비통하게 울부짖는다.

- 그러나 하나님의 도움으로 라헬은 자녀를 되찾는다.

② 18~22절: 하나님은 떠난 이스라엘을 책망하시며 슬퍼하신다.

- 그러나 이스라엘의 회개로 하나님은 회복되신다.

따라서 전반부 단락은 이스라엘이 중심이고, 후반부 단락은 하나님이 중심이다.

-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 때문에 회복되고,

- 하나님은 이스라엘 때문에 회복된다.

즉, 이스라엘과 하나님은 서로 때문에 회복된다.

 

이것이 회복의 중요한 특징이다.

- 하나님은 멸망한 이스라엘에게 회복을 예고하신다.

- 그래서 비통하게 울부짖던 이스라엘은 눈물을 거두고 회복된다.

- 그런데 이스라엘 회복으로 가장 큰 유익을 얻는 분은 하나님이다.

이렇게 진정한 회복은 상호작용한다.

-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하시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위하는데,

- 결과적으로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하나님도 회복된다.

 

하지만 세상의 회복은 다르다.

어느 한편이 유익을 얻어 회복하는 대신 다른 한편은 희생하고 손해 본다.

- 거래 관계를 맺기 때문이다.

- 그래서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은 언제나 제로썸 게임이다.

- 내가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누군가에게 손해를 일으켜야 한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이유를 두 가지로 설명하면,

- 첫째로, ‘소유’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 둘째로, ‘상대적 비교 우위’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세상의 관점에서 유익은 소유이다.

- 정확하게 말해서, ‘눈에 보이는 대상’을 ‘독점적’으로 소유해야 한다.

- 부부가 부동산을 공동 명의로 소유하는 것조차 한 개를 공동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 한 개를 두 개로 쪼개서 반씩 각각 소유하는 것이다.

게다가 실제로 공동 소유하는 공공 기물에 대해서는 아무도 소유하지 않는다고 느낀다.

- 그래서 자기 것이 아니기에 함부로 사용한다.

- 독점 소유할 수 있는 것만을 소유라고 하기 때문이다.

 

왜 그러냐면 그래야 상대적 비교 우위를 점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눈에 보여야 가치의 우열을 가르는 상대 평가가 가능하고,

- 상대 평가된 가치를 독점 소유할 때 그 가치와 자신이 연결되어,

- 소유를 통해 상대적 비교 우위를 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상대주의 관점을 갖는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이다.

- 중심에는 독점 소유를 통한 상대적 비교 우위 점유가 있다.

 

그런데 이는 반작용을 일으킨다.

- 세상에서 가치의 근거가 되는 재화는 제한되어 있다.

- 물론 발견되지 않은 재화가 발견되어 재화의 양이 늘어나기도 하고,

- 이미 발견된 재화의 잠재력을 끌어내어 재화의 가치를 늘릴 수도 있지만,

- 태초부터 종말까지 우주 안에 있는 재화는 일정하고, 

- 재화에서 끌어낼 수 있는 최대의 가치 역시 한정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가 더 많이 소유하면, 반드시 누군가는 가진 소유를 빼앗긴다.

- 나의 소유 때문에 현시대의 다른 사람이 소유를 빼앗길 수도 있고,

- 현시대가 아니라 미래의 다른 사람이 빼앗길 수도 있다.

따라서 내가 배부르다는 것은 다른 누군가를 배고프게 했다는 것이고,

- 내가 편하다는 것은 다른 누군가를 불편하게 했다는 것이며,

- 내가 행복하다는 것은 다른 누군가를 불행하게 했다는 것이다.

상대주의 관점에서 이러한 일은 필연적이다.

 

물론 우리는 나 때문에 배고프고, 불편하고, 불행한 누군가를 실제로 볼 수 없다.

- 나 때문에 고통당하는 대상이 없기 때문이 아니다.

- 분명히 있다. 

그러나 사회 시스템이 나와 다른 누군가의 연결고리를 감추어 주기 때문이다.

- 내가 한 일은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번 것뿐이다.

- 그런데 사회 시스템은 그 돈이 어디서 왔는지 감춰준다.

- 하지만 그 돈은 나보다 약한 누군가의 주머니에서 나온 것이다.

- 그래서 그 약한 사람은 나 때문에 돈이 없어서 치료받지 못하고 죽을 수도 있다.

이것이 숨겨진 세상의 잔인함이다.

- 잔인함 자체보다 숨겨졌다는 것이 잔인함을 더욱 극대화한다.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 이유는 특별히 악한 개인 때문이 아니다.

- 사회 시스템의 일부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 아니다.

상대주의 사고방식에 기반하는 거래가 보편적인 사회라면 무조건 일어나는 일이다.

- 아무리 선한 개인이 모여도, 기존 사회 시스템을 아무리 개선한다고 해도 해결할 수 없다.

이것이 세상의 현실이다.

 

반면에 하나님의 회복은 누구도 손해 보지 않는다.

모두가 유익을 얻는다.

- 논-제로썸 게임이다.

- 이스라엘과 하나님이 동시에 유익을 얻는다.

 

물론 회복되는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손해 보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은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독생자 예수님을 희생하셨다.

- 동시에 이스라엘 역시 국가 멸망이라는 엄청난 손해를 감수했다.

하지만 결국 모든 것을 다시 돌려받고 더 많은 것을 얻었다.

- 이스라엘은 멸망한 국가가 회복되고, 여기에 더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얻었다.

- 하나님 역시 독생자 예수님을 다시 얻으셨고, 여기에 더해 인류와의 관계를 얻으셨다.

아무도 손해 보지 않고, 모두 유익만 얻었다.

 

여기서 헷갈리는 것이 ‘유익’이라는 표현이다.

- 유익을 얻었다는 표현이 거래에 기반한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 그래서 사랑에 기반한 선택은 반드시 자신에게 손해를 줘야 한다는 편견이 생긴다.

- 반대로 손해를 주지 않은 선택은 사랑이 아닐 것이라는 의심을 하게 된다.

이러한 편견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예가 ‘욥’이다.

- 의인이었던 욥은 믿음을 시험해 보겠다는 사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다.

- 재산, 가족, 건강을 전부 잃고, 실낱같은 생명만 남았다.

- 그런데 결과적으로 욥은 하나님과 더욱 깊은 관계를 맺게 되었다.

[욥 42:5]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

- 게다가 잃었던 것을 모두 되찾고, 더 많이 얻었다.

[욥 42:12] 주님께서 욥의 말년에 이전보다 더 많은 복을 주셔서, 욥이, 양을 만 사천 마리, 낙타를 육천 마리, 소를 천 겨리, 나귀를 천 마리나 거느리게 하셨다.

이렇게만 보면, 욥기는 해피 엔딩 같다.

- 욥기는 욥이 손해는 하나도 없고 유익만 얻었다고 결론짓는다.

- 이것이 성경의 관점이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이 욥과 같이 우리에게 사랑하는 가족을 빼앗으신다면?

- 그들을 모두 죽인 다음, 회복 후에 이전보다 더 많은 가족을 주셔서 보상하신다면?

- 우리는 잃은 가족에 대한 슬픔을 보상받을 수 있을까? 

- 이것을 과연 유익을 얻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라는 비판이 있다.

과연 욥은 유익을 얻은 것일까, 손해를 입은 것일까?

- 더 구체적으로 질문하면, 욥이 얻은 것은 무엇이고, 잃은 것은 무엇일까?

 

욥은 하나님을 통해 참된 사랑의 관계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 이것이 욥이 얻은 유일한 유익이다.

- 멸망 이전에 욥은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했다.

- 하지만 실상은 상당 부분 거래 관계였다.

- 결국 욥은 하나님의 쏟아지는 질문 공세를 통해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한다.

[욥 42:2~3] 주님께서는 못하시는 일이 없으시다는 것을,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주님의 계획은 어김없이 이루어진다는 것도, 저는 깨달았습니다. (3)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감히 주님의 뜻을 흐려 놓으려 한 자가 바로 저입니다. 깨닫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을 하였습니다. 제가 알기에는, 너무나 신기한 일들이었습니다.

이렇게 회개한 이후에야 비로소 하나님을 ‘귀로만이 아니라 눈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욥 42:5]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

- 하나님과 참된 사랑의 관계를 맺게 되었다.

- 다른 말로, 하나님만이 절대 가치이고, 자신은 절대 오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것이 욥이 얻은 유일하면서 동시에 절대적인 유익이다.

 

물론 욥은 잃었던 모든 것을 풍성하게 돌려받았다.

- 이것도 누군가는 유익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욥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 욥에게 유익은 참된 사랑의 관계뿐이다.

- 하나님만이 절대 가치이고 자신은 절대 오물이라는 깨달음뿐이다.

그랬기 때문에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슬픔도, 회복된 이후 풍성하게 얻은 기쁨도 전부 절대 오물이라고 여겼다.

- 잃어서 손해를 입었다고도 생각하지 않았고,

- 얻어서 유익을 얻었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사랑의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증명하는 도구로 사용된 것뿐이다.

 

따라서 욥은 아무런 손해 없이 유익만 얻은 것이다.

- 사랑하는 가족을 잃었지만, 아무것도 잃지 않은 것이다.

- 사랑하는 가족과 재산을 풍성하게 얻었지만, 아무것도 얻지 않은 것이다.

- 오직 사랑의 관계를 깨달아서, 하나님만이 절대 가치, 자신은 절대 오물이라는 깨달음만을 유익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의 변화가 얼마나 중요한지 말하고자 하는 것이 욥기이다.

 

따라서 진정한 회복은 관점의 변화이다.

유익과 손해를 평가하는 가치 기준의 변화이다.

- 이전에는 가치를 독점 소유할 때 유익이고, 독점권을 잃을 때 손해라고 봤는데,

- 이제는 사랑의 관계를 깨닫는 것만이 유익이라고 보는 것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전에는 유익을 얻기 위해 다른 사람의 소유를 빼앗아야만 했다.

- 자신의 기쁨을 위해 다른 사람의 고통을 유발해야만 했다.

- 그래서 상대적 비교 우위를 얻어야만 행복했다.

-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의 고통을 들어야만 만족했다.

- 물론 이것이 의도하지 않은 결과지만, 그렇다고 잘못이 없다고 말할 수도 없다.

이것이 세상의 방식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식은 다르다.

- 독점 소유를 잃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줘야만 자신에게도 유익이 생기는 사고방식 혹은 시스템이다.

- 이전처럼 다른 사람의 소유를 빼앗으면, 유익이 아니라 오히려 손해가 된다.

- 아무리 큰 것을 소유해도, 그 소유로 인해 사랑의 관계가 저해되면, 

- 그 소유는 유익이 아니라 손해가 된다.

오직 사랑의 관계가 깊어질 때만 유익을 얻는다.

 

본문 해석

이런 사고방식과 시스템에서 보지 않으면 하나님의 선택이 납득되지 않는다.

- 도대체 왜 하나님은 죄 때문에 멸망한 이스라엘을 보시며 슬퍼하실까?

[렘 31:20] 에브라임은 나의 귀한 아들이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자식이다. 그를 책망할 때마다 더욱 생각나서, 측은한 마음이 들어 불쌍히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 나 주의 말이다.

- 여기서 ‘측은한 마음’을 직역하면, ‘창자가 꼬이는 고통’이다.

- 왜 하나님은 불의한 이스라엘이 합당하게 심판받는 것을 괴로워하실까?

- 하나님이 의롭다면, 불의한 이스라엘의 멸망을 기뻐하셔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나님의 선택을 이와 정반대로도 비판할 수 있다.

- 아무리 불의하다고 해도, 왜 하나님은 사랑하는 이스라엘을 멸망하실까?

- 정말 사랑하신다면, 이스라엘을 용서하고 살려두셔야 하는 것이 아닐까?

- 창자가 꼬일 만큼 고통스러우신데도 굳이 이스라엘을 멸망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

- 혹시 악어의 눈물처럼 고통스럽다는 표현이 거짓은 아닐까?

- 하나님이 정말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는 것일까?

정리하면, 의문은 두 가지이다.

- 첫째로, 이스라엘을 사랑하신다면,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멸망하실까?

- 둘째로, 이스라엘 멸망이 합당하다면, 왜 하나님은 멸망한 이스라엘 때문에 슬퍼하실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멸망해도, 멸망하지 않아도 비판받는다.

-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면,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의심받고,

- 멸망시키지 않으면, 불의를 심판하지 않음으로 하나님의 의로움이 의심받는다.

- 또한 멸망한 이스라엘을 두고 슬퍼하시면, 불의하다고 의심받고,

- 멸망한 이스라엘을 두고 기뻐하시면, 이스라엘에 대한 사랑을 의심받는다.

 

따라서 세상의 관점에서 하나님은 사면초가이다.

- 실제로 하나님이 사면초가라는 뜻이 아니라,

- 세상은 하나님이 사면초가에 빠졌다는 말도 안 되는 결론을 내릴 만큼 어리석다는 뜻이다.

그만큼 하나님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사랑의 관계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다.

첫째로, 이스라엘을 사랑하신다면,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멸망하실까?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멸망시키신 목적은 죄에 대한 징벌이 아니다.

- 의와 죄를 구분하여 의로움을 바로 세우는 것이 목적은 아니다.

- 만약 그랬다면 멸망한 이스라엘을 보시며 하나님은 기뻐하셨을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은 관계 회복이다.

- 그런데 관계 회복을 위해 멸망이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이다.

- 이는 출애굽 한 이스라엘이 광야 생활을 했던 이유와 같다.

- 의지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청정 지역에서 하나님과만 관계 맺는 훈련을 하기 위함이다.

- 지금까지 범한 죄를 돌아보고, 하나님의 절대 가치를 다시 기억하기 위함이다.

- 그래서 의지했던 모든 것을 파괴하는 멸망이 필요했다.

 

둘째로, 이스라엘 멸망이 합당하다면, 왜 하나님은 멸망한 이스라엘 때문에 슬퍼하실까?

- 멸망한 이스라엘을 두고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으로 판단하는 이유는,

- 하나님이 의와 죄가 구분되는 것을 기뻐하실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죄를 셀 수 없이 용서하신다.

- 이것이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 의와 죄의 구분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다는 뜻이다.

- 하나님의 의로움을 바로 세우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다.

그것이 바로 사랑의 관계이다.

- 사랑의 관계를 위해서 하나님은 의와 죄의 구분조차 부정하신다.

- 대표적인 예가 끊임없이 죄를 범하는 이스라엘을 용서하시고 사랑하신 것이다.

그렇게 사랑하시는데, 멸망당해 고통받는 이스라엘을 두고 어떻게 기뻐하시겠는가.

- 슬퍼하시는 것이 마땅하다.

- 물론 최고의 행복을 위해 불가피한 과정이지만, 

- 그 과정에서조차 고통받는 이스라엘을 보시며 가슴 아파하신다.

이것이 사랑으로밖에 해석될 수 없는 하나님의 성품이다.

 

게다가 세상의 관점에서 이스라엘도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 다시 욥의 예를 들어, 

- 만약 사랑하는 가족을 몰살시킨 범인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면,

- 아무리 그것이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벌인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더라도,

- 과연 하나님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을까?

- 이전보다 두 배 더 많은 가족이 생겼으니, 

- 이전에 잃은 가족은 잊고, 새롭게 생긴 가족을 두고 유익을 얻었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현재 이스라엘의 처지가 이와 같다.

- 이스라엘은 자신을 멸망시킨 범인이 바벨론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았다.

- 하나님 때문에 가족도 잃고, 재산도 잃고, 낯선 곳에 끌려와 노예처럼 살고 있다.

- 위로받기조차 거절할 만큼 슬픔에 사무쳐 있다.

[렘 31:15] 나 주가 말한다. 라마에서 슬픈 소리가 들린다. 비통하게 울부짖는 소리가 들린다. 라헬이 자식을 잃고 울고 있다. 자식들이 없어졌으니, 위로를 받기조차 거절하는구나.

그런데 만약 같은 하나님이 가족, 재산, 영토, 주권 모두 다시 돌려준다고 약속하시며,

- 다 너희를 위한 것이었다고 하신다면,

[렘 31:16~17] 나 주가 말한다. 이제는 울음소리도 그치고, 네 눈에서 눈물도 거두어라. 네가 수고한 보람이 있어서, 네 아들딸들이 적국에서 돌아온다. 나 주의 말이다. (17) 너의 앞날에는 희망이 있다. 네 아들딸들이 고향 땅으로 돌아온다. 나 주의 말이다.

- 자동으로 용서가 되고, 더 나아가 이러한 회복을 유익이라고 볼 수 있을까?

-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까지 생길 수 있을까?

세상의 관점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스라엘을 이해하기 어렵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이스라엘은 이러한 하나님을 용서할 뿐만 아니라,

- 사랑을 느끼고 감사까지 표현한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이 역시 관점이 변화할 때만 이해할 수 있다.

- 소유의 관점에서 보면, 엄청난 손해를 유발한 하나님을 용서하는 이스라엘을 이해할 수 없다.

- 비록 손해가 풍성하게 회복되었다고 해도, 하나님이 입힌 마음의 상처는 여전하기 때문이다.

- 그렇기 때문에 소유의 관점에서 우리가 이스라엘과 동일시하면, 하나님을 원망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사랑의 관점에서 보면, 새롭게 보인다.

- 이스라엘이 가족, 재산, 영토, 주권을 잃은 것은 사랑의 관점에서 손해가 아니다.

- 극단적으로 말해서, 아무것도 잃은 것이 없다.

- 마치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기 위해 나머지 모든 사람과의 연애를 포기하는 것을 손해라고 보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 결혼하기로 결심한 사람에게 배우자 외의 모든 사람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 그런 관점에서 이스라엘은 가족, 재산, 영토 주권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반면에 이스라엘은 엄청난 유익을 얻었다.

-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었기 때문이다.

- 그것만이 이스라엘이 원했던 전부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국가를 멸망한 범인이 아니라, 사랑을 회복시킨 은인이다.

- 그러니 용서할 필요조차 없다.

- 오직 감사와 사랑만 있다.

- 하나님을 통해 유익만 얻었다.

 

이스라엘이 이런 관점의 변화가 있었기 때문에 회개할 수 있었다.

- 이전에는 국가를 멸망시키셨다는 이유로 하나님을 원망했지만,

- 이제는 같은 이유로 하나님께 감사와 사랑을 표현한다.

표현을 구체적으로 보면,

- 국가 멸망이 소유를 잃는 손해가 아니라, 사랑을 배우는 유익이라고 봤다.

[렘 31:18] 에브라임이 탄식하는 소리를 내가 분명히 들었다. ‘주님, 우리는 길들지 않은 짐승 같았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를 가르쳐 주셨고, 순종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돌아갈 수 있게 이끌어 주십시오. 이제 우리가 주 우리의 하나님께 돌아갈 준비가 되었습니다.

- 국가 멸망은 이스라엘이 ‘길들지 않은 짐승’ 같았기 때문이고,

- 국가 멸망을 통해 사랑과 순종이 무엇인지 배웠다는 것이다.

- 그래서 결국 국가 멸망을 통해 자신의 죄를 깨닫고 뉘우쳤기에,

[렘 31:19] 주님을 떠난 다음에 곧 뉘우쳤습니다. 잘못을 깨달은 다음에 가슴을 치며 뉘우쳤습니다. 그리고 저의 젊은 시절의 허물 때문에 저는 수치와 수모를 겪어야 했습니다.

-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하나님께 돌아갈 준비가 되었다며, 하나님께 감사한다.

[렘 31:18] … 우리가 돌아갈 수 있게 이끌어 주십시오. 이제 우리가 주 우리의 하나님께 돌아갈 준비가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회복의 핵심은 관점의 변화이다.

- 유익을 판단하는 기준의 변화이다.

- 소유를 기준으로 판단하는 유익에서 사랑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유익으로 변화이다.

- 그래서 이전에는 손해로 판단했던 하나님의 멸망 행위가 유익으로 판단되는 변화이다.

 

그렇다면 사랑의 관점은 왜 누구도 손해 보지 않는가?

왜 사랑하면 하나님과 이스라엘 모두 유익을 얻는가?

- 소유의 관점에서는 둘 중 하나가 반드시 손해를 봐야 하는데 말이다.

 

핵심은 ‘공동 소유’ 때문이다.

- 소유에 기반한 거래 관계는 반드시 독점을 전제한다.

- 다르게 말해서, 다른 사람과 구분된 배타성을 전제한다.

- 왜냐하면 상대적 비교 우위를 위해서는 독점적, 배타적 소유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 그렇기 때문에 거래 관계 시스템에서는 내가 유익을 얻기 위해 타인에게 손해를 입혀야 하고,

- 그로 인해 관계 단절이 생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사랑의 관계 시스템에서는 상대적 비교 우위가 필요 없다.

- 절대 가치가 그것을 대체한다.

- 하나님의 절대 가치에 부합하는지 아닌지만 중요하다.

- 타인의 손해가 나의 유익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그러니 소유를 독점해서 얻을 수 있는 유익이 사라진다.

- 그래서 다른 사람이 경쟁자가 아니라, 함께 절대 가치를 향해 가는 동료가 된다.

- 그런데 소유를 독점하면, 소유를 빼앗긴 동료를 잃을 수 있고,

- 동료를 잃으면 도움받을 동료가 없어지기에,

- 절대 가치에 이르는 여정에 어려움이 생긴다.

그래서 소유를 공유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 공동 소유하는 것이 절대 가치에 이르는데 유익을 주기 때문이다.

 

그렇게 공동 소유하니, 누구도 손해 보지 않는 논-제로섬 게임이 된다.

- 가장 극단적으로, 자기조차 독점 소유하지 않게 된다.

- 이는 사람뿐만 아니라 하나님께도 해당한다.

- 하나님도 자신을 독점 소유할 필요 없이 공동 소유하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조차 절대 가치에 이르는 게임에서,

- 게임 외부에 있는 방관자 혹은 심판자가 아니라, 

- 게임 내부에서 사람과 함께 참여하는 플레이어기 때문이다.

- 하나님도 게임 미션을 완수하려면, 사람을 이용해야 하고,

- 사람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사람이 자신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다.

- 이런 과정에서 하나님과 사람이 자기 몸을 서로 공동 소유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인류 역사는 하나님과 사람이 동료가 되어 절대 가치에 이르는 게임 같은 것이다.

- 이를 통해 하나님을 포함하여 모든 인류가 하나가 된다.

- 이것이 창조 목적이다.

 

하나님의 새 창조 - 여자가 남자를 안는 것

이렇게 하나님과 사람이 서로를 공동 소유하는 것이 바로 ‘새 창조’이다.

- 이를 31~34절에서는 ‘새 언약’으로 표현했다.

 

새 창조와 새 언약의 핵심은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이다.

[렘 31:31~34] 그 때가 오면, 내가 이스라엘 가문과 유다 가문에 새 언약을 세우겠다. 나 주의 말이다. … (33) 그러나 그 시절이 지난 뒤에, 내가 이스라엘 가문과 언약을 세울 것이니, 나는 나의 율법을 그들의 가슴 속에 넣어 주며, 그들의 마음 판에 새겨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34) 그 때에는 이웃이나 동포끼리 서로 ‘너는 주님을 알아라’ 하지 않을 것이니, 이것은 작은 사람으로부터 큰 사람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모두 나를 알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들의 허물을 용서하고, 그들의 죄를 다시는 기억하지 않겠다. 나 주의 말이다.

- 요약하면,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이어주는 율법이 돌판이 아닌 마음판에 새겨져서,

-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절대 가치가 된다는 뜻이다.

왜 하나님과 사람이 관계를 맺어야 하냐면,

- 그것이 모두에게 유익이 되기 때문이다.

왜 유익이 되냐면,

- 게임 미션을 완수하기 위해 서로가 필요하고,

- 서로가 서로를 더욱 온전히 이용할 수 있을 때, 미션을 완수할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 정확하게 말해서, 그렇게 서로를 공동 소유하는 것 자체가 미션 완수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공동 소유는 미션 완수의 수단이면서 동시에 미션 완수의 목적이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왜 공동 소유 상태를 ‘여자가 남자를 안는 것’이라고 표현했냐?

- 여기서 여자는 이스라엘이고, 남자는 하나님이다.

- 왜 여자가 남자를 안는다고 했을까?

- 왜 남자가 여자를 안는다는 표현은 없냐?

이미 남자(하나님)는 여자(이스라엘)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 이미 남자가 자신의 전부를 내주어, 여자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 하나님은 자기 전부를 이스라엘이 완전히 이용할 수 있도록 공동 소유하셨다.

-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모든 능력을 오직 이스라엘이 절대 가치에 이르도록 하는 것에만 이용하셨다.

- 게다가 특히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 땅에 내려보내시고 죽이심으로, 자신의 전부가 사람을 위한 것임을 천명하셨다.

 

따라서 하나님과 사람의 완벽한 공동 소유는 사람에 의해서만 도달할 수 있다.

- 이번에는 여자도 자기 전부를 내주어 남자를 안아야 한다.

- 여자도 자기 전부를 하나님이 완전히 이용할 수 있도록 공동 소유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을 새롭게 창조하신 것이다.

- 사람이 사랑으로 자기 전부를 내어줄 수 있도록 말이다.

- 그래서 거래 관계 시스템을 가진 사람을 없애고, 사랑의 관계 시스템을 가진 사람을 새롭게 창조하셨다.

- ‘사랑의 관계 시스템을 가진 사람’이 다른 말로 ‘마음판에 율법이 새겨진 사람’이다.

그렇게 사람이 하나님을 안기만 하면, 

- 그래서 자신을 전부 내어주어 하나님을 안아서 보호하는 데 이용하기만 하면,

- 하나님과 사람의 완벽한 공동 소유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 그래야만 역사라는 게임 미션을 완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창조의 완성이며, 구원이며, 천국이다.

- 이것이 진정한 회복이다.

 

결론 - 과연 신앙이 이렇게 쉽기만 한 것인가?

이렇게만 들으면, 신앙이 쉽게 느껴진다.

- 하나님은 이미 자기 전부를 우리가 마음껏 이용할 수 있게 주셨다.

- 그러니 이제 우리가 자기 전부를 하나님이 마음껏 이용하실 수 있게 드리면 된다.

그것이 참 신앙에 이르는 수단이자 동시에 목적이다.

 

그런데 이렇게 쉬운 것이라면, 

- 왜 이스라엘은 멸망하기까지 신앙을 거부했으며,

- 왜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죽이기까지 신앙을 거부했고,

- 왜 우리 주변 사람도 끝까지 신앙을 거부하는 것일까?

- 왜 나조차도 신앙을 부담스럽게 느낄까?

뒤집어 말하면, 신앙은 멸망을 감수하면서까지 거부할 만큼 어려운 것이라는 뜻이다.

 

 도대체 그 어려움의 본질은 무엇일까?

- 우선 자기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 그래야 하나님이 우리를 이용하게 해드릴 수 있다.

또 그것을 위해서는 자기가 절대 오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 자신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면, 자기를 포기하기가 어렵다.

- 그러나 자신의 가치가 절대 오물(-∞)이라는 것을 알면, 자기를 포기하기 쉽다.

- 그래서 이전에는 자기를 포기하는 것이 노력이 필요한 힘든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 이제는 오히려 자기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 더 힘들 만큼 포기가 쉬워진다.

- 마치 손에 똥을 들고 있는 것보다 던져 버리기가 더 쉬운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여기까지 오는 것도 쉽지 않은 길이다.

- 자신을 절대 오물로 여기고,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을 포기하는 것도 쉽지 않다.

- 많은 난관을 거쳐야 한다.

하지만 정말 어려운 것은 지금부터이다.

- 자신을 절대 오물로 여기고,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을 모두 포기한 상태,

- 그래서 자신이 포기하지 않은 가치를 아무리 생각해도 없는 상태,

- 이 상태에서 또 다시 자신을 절대 오물로 여기기가 정말 어려운 것이다.

왜냐하면 이 상태의 실상은 모든 가치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이 숨겨진 상태이며,

- 다르게 말해서, 추구하는 가치가 너무 중요하고 필수적이라서 의식조차 할 수 없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 마치 공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의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 의식하지 못하는 것일 뿐, 실상 우리가 목숨이 공기에 달려 있다고 가치 부여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대표적인 예가 바리새인이다.

- 바리새인 하면 탐욕의 표상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 실제로 당시에 바리새인은 신앙을 위한 포기, 희생, 헌신의 표상이었다.

- 자기 욕망을 억누르기 위해 발버둥 친 사람들이었다.

- 그래서 ‘자신이 포기하지 않은 가치를 아무리 생각해도 없는 상태’에 이른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진짜 문제가 시작되었다.

- 율법과 성전도 포기해야 할 가치라는 생각을 못 했기 때문이다.

- 이 생각은 바리새인만 못한 것이 아니라, 당시에 이 생각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극단적인 예를 들어, 마치 지금 시대에 나이 많은 사람에게 존댓말을 하는 것조차 포기해야 할 가치라는 생각을 아무도 못 하는 것처럼 말이다.

- 율법과 성전이 가치 있다는 것은 존댓말과 같이 너무 당연해서 의식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이것이 어려움의 본질이다.

- 의식의 영역을 넘어서 무의식의 영역까지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 의식하는 문제를 해결하기도 어렵다.

- 그러나 무의식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비교할 수 없이 더 어렵다.

 

그렇다면 이렇게 어렵기 때문에 이 문제를 하나님이 용납하시냐?

- 우리도 적당히 넘길 수 있냐?

- 너무 어려운 일이니 관심 갖지 않아도 되는 것이냐?

절대 아니다.

- 바리새인은 바로 무의식 문제 때문에 예수님을 죽였다.

- 그들 중 누구도 의식적으로 하나님을 거부한 사람은 없었다.

- 그들의 의식은 하나님을 보호하기 위한 열정적인 행동이었다.

- 예수님을 죽인 일은 전부 무의식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그렇다면 해법은 무엇인가?

- 무의식의 영역을 어떻게 의식화할 수 있을까?

- 그래서 무의식의 영역에서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을 절대 오물이라고 의식할 수 있을까?

답만 먼저 말하면, ‘일상의 공동 소유’를 통해서이다.

- 인격과 인격이 완전히 하나 됨을 시도할 때 생기는 갈등을 통해서이다.

- 이렇게만 말하고 넘어가겠다.

 

왜냐하면 이 논의는 미양 교회에서 한 번도 자세히 다루지 않은 주제이다.

- 공동체의 관계가 중요하다는 이야기만 했지,

- 그것이 왜 중요한지, 관계를 통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이 주제가 그동안 다뤘던 어떤 것보다 중요한 동시에 가장 어려운 것으로 생각한다.

- 신앙 생활에 본질적이면서,

- 동시에 너무 구체적이고 실제적이어서, 

- 우리 삶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주제이기 때문이다.

 

미양 교회가 일상의 공동 소유를 통해서 무의식의 영역이 의식화되는 기적이 일어나길,

- 그래서 우리가 절대 오물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 하나님이 절대 가치라는 것을 소리 높여 외치게 되기를,

- 그 외침이 공허한 울림이 아니라,

- 우리의 일상을 뿌리부터 뒤흔드는 파괴력이 있기를,

- 그래서 하나님의 관계와 사랑이 뼛속까지 전해지는 전율이 있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