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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서

예레미야(51) 25:15-38 온 세상 멸망의 참뜻 - 경고와 협박이 아닌 위로와 격려

<미양교회 팟캐스트 양따양>

미양교회에서 했던 설교를 바탕으로 진솔하게 신앙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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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양을 따르는 어린양

예배 대신 예수님, 설교 대신 성경, 건물 대신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미양교회가 만드는 방송입니다.토끼와 개구리가 진솔하게 신앙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어린양과 같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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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길지만, 메시지는 짧다.

- 온 세상이 멸망한다는 것과,

- 멸망의 주체가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 그래서 15~29절에서는,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이집트에서 바벨론 사이에 있는 모든 나라를 언급하며, 온 세상이 멸망할 것을 예언하고,

[렘 25:26] … 이렇게 내가 세상에 있는 모든 나라에 마시게 하였다. …

[렘 25:29] … 이는 내가 온 세계에 전쟁을 일으켜서, 모든 주민을 칠 것이기 때문이다. 나 만군의 주가 하는 말이다.

- 30~38절에서는, 하나님을 고함치는 사자에 비유하며, 멸망의 주체가 하나님이심을 강조한다.

[렘 25:30] … 주님께서 저 높은 곳에서 고함 치신다. 그의 거룩한 처소 하늘 꼭대기에서 벽력 같은 목소리를 내신다. 그의 목장에다 대고 무섭게 고함 치신다. 포도를 밟는 자들처럼 이 땅의 모든 주민을 규탄하여 큰소리를 내신다.

[렘 25:38] 사자가 굴을 버리고 떠나가듯이, 주님께서 떠나가셨다. 압박하는 자의 칼과 주님의 분노 때문에 그 땅이 폐허가 되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메시지를 하나로 합치면,

- ‘하나님의 전능하심’이다.

- 하나님이 온 세상을 멸망시킬 만큼 강력한 능력을 가지고 계신다는 뜻이다.

따라서 본문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온 세상의 멸망 예언을 통해 증명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굳이 멸망을 통해 전능하심을 드러내실까?

단지 사실이니까?

- 아니면 힘을 과시하여 사람들을 두려움으로 굴복시키려고?

이러한 해석은 맥락과 상관없는 직관적인 해석이다.

- 잘못 해석할 가능성이 높다.

- 따라서 맥락 안에서 해석해야 한다.

 

해석의 열쇠는 메시지의 대상에 있다.

- 본문은 예레미야를 통해 온 세상의 멸망을 예언한다.

-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명령하시길, 온 세상이 진노의 포도주 잔을 마시게 하라고 하신다.

[렘 25:15]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는 내 손에서 이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아라. 내가 너를 뭇 민족에게 보낼 터이니, 그들 모두에게 그 잔을 마시게 하여라.

- 그래서 그 잔을 마신 민족은 전부 취하여 쓰러져 죽을 것이라고 예언하신다.

[렘 25:16] 그들은 모두 이 잔을 마신 다음에, 내가 일으킨 전쟁 때문에 비틀거리며 미칠 것이다.

[렘 25:27] 너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만군의 주가 하는 말이라고 하면서 이들 민족들에게 전하여라. ‘내가 너희 사이에 전쟁을 일으킬 것이니, 너희는 마시고, 취하고, 토하고, 쓰러져서 죽어라.

이 행위 예언을 겉으로만 보면, 예언의 대상이 ‘온 세상’ 같다.

-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온 세상에 보내겠다고 하시며,

- 예레미야가 직접 온 세상을 다니며 포도주 잔을 마시도록 한 것처럼 표현하기 때문이다.

- 그래서 온 세상에게 직접 분노를 표출하신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 우선, 예레미야가 이집트에서부터 바벨론까지 모든 나라를 전부 찾아가 포도주를 나눠주고 다녔을 리는 만무하다.

- 짧은 시간 안에 그 먼 곳을 직접 걸어갔을 가능성은 없다.

게다가 본문의 글은 말 그대로 성경이다. 

- 온 세상 사람들 읽으라고 기록한 책도 아니고,

- 아무리 온 세상이 읽으라고 기록했다고 해도, 변방인 이스라엘이 쓴 책을 온 세상이 읽을 리도 없다.

 

따라서 본문은 ‘이스라엘’을 위해 기록된 책이다.

- 온 세상에게 ‘너희 다 멸망할 거야. 조심해!’라는 경고, 위협, 협박하는 것이 아니라,

- 이스라엘에게 ‘저 강대국 다 멸망시킬 거야. 안심해!’라는 위로, 돌봄, 격려하는 것이다.

풀어 말하면, 기록 당시 이스라엘은 바벨론 포로 상태였다.

- 즉, 강대국의 위력에 짓눌려 회복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 바벨론의 위력이 너무 세기에, 바벨론의 지배는 영원히 계속될 것이며,

- 이스라엘 역시 바벨론을 이길 수 없기에, 포로 상태가 영원히 지속될 것으로 생각했다.

- 이스라엘의 유일한 소망은 바벨론 치하에서 수동적으로 연명하는 것뿐이었다.

- 마치 일제 강점 시대에 일본이 수백 년간 굳건할 것이라는 생각에 많은 사람이 친일만을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소망을 잃고 실의에 빠진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 소망 없이, 바벨론 치하에 적응하여, 수동적으로 살고 싶은 마음 다 알아.

- 바벨론의 위력에 주눅 들어 있는 마음 다 알아.

- 그래서 소망을 갖고, 능동적, 주체적으로 살 용기가 없는 것 다 알아.

- 이스라엘 정체성 포기하고, 바벨론 시민으로 적당히 살고 싶은 것 다 알아.

- 이미 이렇게 된 것, 하나님 원망하며 죄책감 털어버리고, 변화 없이 현실에 안주하고 싶은 마음 다 알아.

하지만 이런 상태가 너무 싫고 괴로워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도 알아.

- 당당하게 이스라엘로 살고 싶고, 능동적, 주체적으로 삶을 개척하고 싶은 마음도 알아.

- 그래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는 것도 알아.

이스라엘아, 너희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잘 알아.

- 몸보다 마음이 더 힘들다는 것 잘 알아.

 

그런데 안심해! 내가 해결해 줄 거야.

- 내가 저 강대국 다 멸망시킬 거야!

- 바벨론의 위력이 너무 세서, 많이 두려웠지?

- 여기서 벗어날 것이라는 소망조차 갖기 어려웠지?

- 어쩔 수 없이 바벨론 치하에 적응하여, 수동적으로 살 수밖에 없었지?

- 이스라엘 정체성 포기하기 정말 싫었지만, 먹고 살려면 바벨론 시민으로 살 수밖에 없었지?

- 그래서 내면에 갈등이 심했지?

- 존재의 근원이 부정당하는 기분이었지?

- 살아있는 것이 죽음보다 못한 것 같은 마음이었지?

그래서 나 하나님이 있는 거야.

- 너희를 이스라엘답게 살게 해주려고.

- 너희를 사람답게 살게 해주려고.

- 존재의 근원부터 회복시켜주려고.

- 구차하게 바벨론 시민으로 살 필요 없이, 당당하게 이스라엘 민족으로 살아가게 해주려고.

그것을 위해 바벨론을 멸망시킬 거야.

- 그리고 너희 이스라엘을 위협했던 모든 주변 나라들을 전부 멸망시킬 거야.

- 나 하나님이야.

- 나 뭐든지 할 수 있어.

- 너희가 회복될 수 있다면, 온 세상 멸망은 아무것도 아니야.

 

그러니 이제 너희 아무 걱정하지 마.

- 강대국의 위력에 주눅 들지 마.

- 애써 원치 않는 바벨론 시민으로 살려고 노력하지 마.

- 상황에 수동적으로 끌려다니지 마.

이제 능동적, 적극적, 주체적으로 살아!

- 너희의 정체성을 마음껏 펼치며 살아!

- 당당하게 너의 자신으로 살아!

- 용감하게 너희 자신을 드러내!

 

나 하나님이 반드시 그렇게 만들어 줄 거야.

- 그것을 위해서라면, 난 뭐든지 할 거야.

- 내가 그토록 사랑하는 이 세상도 멸망시킬 거야.

- 난 아무것도 필요 없어.

너희가 능동적, 적극적, 주체적으로 살면서, 자유롭게 너희의 정체성을 마음껏 펼치고 산다면 말이야.

- 이것이 내가 원하는 전부이고,

- 이것을 위해 창조한 것이고,

- 이것을 위해 세상을 다스리는 것이고,

- 이것을 위해 세상을 멸망시키는 것이야.

- 그리고 이것을 위해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를 세상에 내려보낸 것이고,

- 이것을 위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밖아 죽인 것이고,

- 이것을 위해 다시 살린 거야.

-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답게, 너희를 너희답게 살도록 하려고.

 

이것을 위해 하나님은 전능하심을 드러내신 것이다.

- 이스라엘이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이기고,

- 당당하게 자기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말이다.

-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잘 먹고 잘사는 하찮은 것을 위한 것이 아니라,

- 세상 어떤 것에도 주눅 들지 않고, 능동적, 주체적 존재가 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이유이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똑같이 말씀하신다.

- 너희는 아무 걱정 하지 마. 내가 다 해결해줄게.

- 너희는 너만 신경 써.

- 내가 너희를 두렵게 하는 세상의 위력을 전부 멸망시킬 거야.

- 그러니 안심해.

- 너희는 너희 자신을 찾고, 저희 자신을 사랑하며, 저희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것에만 집중해.

그것이 나 하나님이 원하는 전부야.

- 제발 그렇게 해줘. 정말 부탁이야.

 

하나님은 왜 이렇게 절박하고, 간절하며, 애절하실까?

어떤 면에서 하나님은 부모 잃은 아이가 부모를 찾듯 하신다.

- 혹은 자녀 잃은 부모가 자녀를 찾듯 하신다.

- 정신 나간 사람처럼 사방팔방으로 돌아다니며, 우리의 이름을 부르짖는다.

 

이유는 사랑하기 때문이다.

- 부모 잃은 아이는 더 이상 아이가 아니듯,

- 자녀 잃은 부모는 더 이상 부모가 아니듯,

- 우리 잃은 하나님은 더 이상 하나님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부모의 정체성이 아이에게 있듯,

- 자녀의 정체성이 부모에게 있듯,

- 하나님의 정체성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이다.

즉, 부모와 자녀가 서로의 정체성을 구분할 수 없을 만큼 깊이 사랑으로 연결된 것처럼,

- 하나님과 우리의 정체성이 깊이 사랑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과 우리를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 우리가 하나님을 떠났다.

- 그래서 하나님은 이토록 절박하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면, 

- ‘나는 떠난 적 없다. 내가 언제 하나님을 떠났냐?’

- 혹은 ‘아무리 내가 떠났어도, 하나님이 나를 잡으셨어야지. 그러니 떠난다고 그냥 두신 하나님 잘못이다.’라고 반박하는 사람이 있다.

- 나는 이러한 반박이 정당하다고 본다. 공감이 간다.

그렇기에 문제의 본질은 ‘우리’가 ‘하나님’을 떠난 것이 아니다.

- 마치 집착광 스토커처럼, 우리가 중요한 일 때문에 잠시 하나님 떠났다고 하나님이 이토록 난리 치시는 것이 아니다.

- 말 그대로, 우리는 하나님을 떠난 적도, 떠날 수도 없다. 

- 온 세상이 하나님 품 안인데, 어떻게 떠날 수 있겠는가.

- 게다가 정말 우리가 하나님을 떠났다면, 그것 역시 우리 잘못이 아니라 하나님 잘못이다.

- 마치 아이가 부모를 잃어버렸다면, 그것은 아이 잘못이 아니라, 아이를 잘 돌보지 못한 부모의 잘못인 것처럼 말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떠난 것은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문제의 본질은 ‘우리’가 ‘우리’를 떠난 것이다.

- 세상의 위력에 눌려 자기 되기를 포기한 것이다.

- 자기답게 살지 않고, 남들처럼 살기로 한 것이다.

- 자기 고유의 정체성을 찾기보다, 자신을 세상에서 유용한 존재로 변질시켰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토록 괴로우신 이유이다.

- 우리를 절박하고, 간절하며, 애절하게 찾으신 이유이다.

-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 곁에 있지만,

- 더 이상 예전의 우리, 우리다운 우리, 있는 모습 그대로의 우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세상의 위력에 짓눌려 변질한 우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우리’를 떠났는가?

이유는 두 가지이다.

- ‘세상에 대한 두려움’과 ‘세상을 향한 욕망’ 때문이다.

- 구분하자면, 전자는 수동적인 이유이고, 후자는 적극적인 이유이다.

- 즉, 전자는 우리가 어쩔 수 없이 주어진 것이고, 후자는 우리가 동기를 가지고 선택한 것이다.

- 그래서 전자는 하나님이 해결하실 일이고, 후자는 우리가 해결해야 할 일이다.

 

첫째로, 세상은 정말 두렵다.

-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 간혹 신앙을 빌미로 세상을 얕잡아보는 경우가 있다.

- 설교에서, 믿음만 있으면 세상에서 원하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이 있다.

세상은 그렇게 쉬운 대상이 아니다.

- 마치 이스라엘에게 바벨론의 영향력이 막강하듯,

- 바벨론의 영향력을 생각하지 않고서는 이스라엘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듯,

- 세상의 영향력은 막강하다.

 

특히 세상은 우리에게 어떤 방향으로 영향을 주냐?

-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세상이 제시하는 획일적인 존재가 될 것을 강압한다.

- 이 강압은 태어나자마자부터 죽을 때까지 계속된다.

- 태어나 누워있는 아기한테 일어나 걸으라고 강압하고,

- 이제 걷는 아이에게 뛰라고 강압하고,

- 이제 겨우 뛰는 아이에게 다시 앉아 공부하라고 강압하고,

- 간신히 앉아있는 아이에게 1등 해야 한다고 강압하고,

- 1등 하는 아이에게 좋은 대학 가라고 강압하고,

- 좋은 대학 간 사람에게 좋은 곳에 취직하라고 강압하고,

- 취직했으면 결혼하라고 강압하고,

- 결혼했으면 출산하라고 강압하고,

- 출산했으면 자녀의 성공을 위해 더 성공하라고 강압하고,

- 성공하면 은퇴하라고 강압하고,

- 은퇴하면 늙어서도 건강하라고 강압하고,

- 늙어서도 건강하면 빨리 죽으라고 강압한다.

만약 이러한 과정에서 한 뼘이라도 벗어나면,

- 사회의 낙오자라며, 엄청나게 비난한다.

- 이런 과정에서 벗어난 사람은 마치 더 이상 사회 구성원 자격이 없는 것처럼 몰아세운다.

- 그렇기 때문에 원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이렇게 살 수밖에 없다.

 

이러한 강압은 노골적으로도 일어나지만, 더 많은 경우 은밀하게 일어난다.

- 초등학교조차 그렇다.

- 만약 운이 좋아서, 학생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선생님을 만났고,

- 그래서 한 번도 선생님께 성적으로 혼나지 않고 존중받으며 생활했다고 해도,

- 학교라는 시스템이 있는 것만으로 아이는 사회적 강압을 느낀다.

- 학교는 모두 가야 하는 곳이고, 학교에 가지 않으면 사회에서 낙오하는 것이며,

- 학교에 갔으면 끝날 때까지 있어야 하고, 중간에 마음대로 나가면 낙오하는 것이며,

- 학교 수업에 참여해야 하고, 참여하지 않으면 낙오하는 것이며,

- 수업에 참여한다고 해도, 너무 적극적이거나 반대로 너무 소극적이면 낙오한다는 것을 몸으로 익힌다.

- 이런 것을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고 해도, 

- 이런 분위기가 있다는 것을 의식에서 느끼지 못했다고 해도,

- 자기도 모르게 습득되고, 몸 안에 장착된다.

학교를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다.

- 사회 전체의 구조를 비판하려는 것이다.

- 사회 구조가 은밀하고 교묘하게 우리를 강압한다.

- 사회가 제시하는 획일화된 기준에서 벗어나는 것을 끔찍하게 두려워하도록 만든다.

- 드러내놓고 하지 않더라도, 은밀하게 조종한다.

일부 몰지각한 사람 때문이 아니라, 사회 구조 자체가 그렇다.

- 그래서 우리가 획일적인 과정 안에 들어가려고 그토록 발버둥 치는 것이며,

- 거기에서 벗어날 것을 죽음만큼 두려워하는 것이다.

이것이 세상이 우리에게 주는 두려움이다.

- 이 두려움이 ‘우리’가 ‘우리’를 떠나게 한다.

 

그렇다면 왜 사회는 획일적인 존재가 될 것을 강압하는가?

- 그래야 사람을 통제하기 쉽고,

- 그래야 사회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렇게 사회가 안정되어야, 발전하고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사회 성장의 대가로 우리의 인격과 정체성이 파괴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사회의 강압에 순응하지 않고 저항하면,

- 그래서 정체성을 회복하고 주체성을 강화하면,

- 사회는 통제하기 어렵고, 불안정해지며, 발전과 성장이 위협받는다.

그래서 사회는 발전과 성장을 위해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는 것이다.

- 획일적인 존재에서 벗어나면 죽을 수도 있다고 위협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반은 틀렸지만, 반은 맞다.

- 우리가 획일적인 존재에서 벗어나고 정체성을 회복하면,

- 그래서 정체성을 회복한 사람이 사회에 많아지면,

- 사회가 불안정해지고,

- 발전과 성장이 멈춰서 사회가 무너지면,

- 사회 안에 있는 우리도 위협을 받고, 죽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정체성을 회복하고 사회에 저항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하지만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나를 죽이는 것’과 ‘나를 살리기 위해 사회를 죽이는 것’ 중에 무엇이 더 바른 선택인가?

- 사회는 개인의 존재를 위한 수단이라는 관점에서 결론은 자명하다.

 

둘째로, 누구나 세상에서 인정받고 안정되고 싶은 욕망이 있다.

- 누가 세상에서 버림받고 불안정하게 살고 싶겠는가.

- 설교에서 인정과 안정을 포기하는 것 자체가 신앙인 것처럼 말하는 경우가 있다.

- 욕망도 우리 정체성의 일부이고, 욕망 포기를 강압하는 것 역시 정체성을 훼손한다.

- 신앙은 금욕주의가 아니며, 하나님도 우리의 욕망을 존중하신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조차 모든 욕망을 전부 충족시키지 않는다.

- 어떤 욕망은 채우고, 어떤 욕망은 억제한다.

- 물론 욕망 억제가 쉬운 일은 아니지만, 경우에 따라서 불만 없이 받아들인다.

- 예를 들어, 눈 앞에 오랫동안 가지고 싶었던 명품이나 수입차가 있다고 해서, 훔치지 않는다.

- 소유 욕망을 억누른다.

- 게다가 욕망을 억누르면서도, 불만조차 느끼지 않는다.

- 우리는 롤스로이스, 주상복합 펜트하우스를 갖고 싶은 욕망이 있지만,

- 욕망을 잘 억누르면서도, 아쉬움조차 갖지 않는다.

왜냐?

- 욕망 충족을 위해 지불해야 할 대가가 얼마나 큰지 알기 때문이다.

- 도둑질하면, 감옥에 가는 육체적 고통, 죄를 범한 자신을 자책하는 정신적 고통, 사람들에게 조롱당하는 사회적 고통 등 대가가 말할 수 없이 크다.

- 그 대가를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욕망이 억제된다.

또 예를 들어, 영화 배우는 작품에 따라 몸무게를 자유자재로 바꾼다.

- 그토록 바꾸기 어려운 몸무게를 왜 배우는 쉽게 바꾸냐?

- 눈 앞에 있는 맛있는 음식을 먹어서 몸무게를 바꾸지 못하면, 수천만 원, 수억 원의 출연료를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 지불할 대가가 너무 크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욕망이 억제된다.

- 그러나 우리는 몸무게 때문에 지불할 대가가 그렇게 크지 않다.

- 그래서 몸무게를 바꾸기 어려운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인정, 안정 욕망도 그 자체로 나쁜 것은 아니다.

- 정체성의 일부이다.

그런데 문제는 인정, 안정 욕망을 채우는 대가로 무엇을 지불하는지 고민하지 않는 것이다.

- 욕망을 채우는 것에만 몰입하여, 무엇을 포기하고 있는지 생각하지도 않는 것이다.

- 그래서 더 가치있고 소중한 것을 대가로 지불하면서, 하찮은 욕망 충족에 만족하고 있는 것이 문제의 본질이다.

- 마치 영화 배우가 1억 원의 출연료를 대가 지불하며 눈 앞에 3000원짜리 떡볶이를 배불리 먹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처럼 말이다.

- 그런데 만약 배우가 1억 원보다 떡볶이를 먹는 것이 더 가치 있다고 판단했다면 아무 문제 없다.

- 그러나 이러한 가치 판단조차 하지 않고 욕망을 채우는 것이 문제이다.

 

구체적인 예로, 직장에서 인정받고 그 대가로 돈을 받아 안정되고자 하는 욕망이 얼마나 소중한지 우리 모두 안다.

- 그런데 우리가 그 욕망을 채우는 대가로 무엇을 포기하고 있는가?

- 가정을 포기하고 있다.

- 누군가는 직장이 가정보다 훨씬 소중하고 가치 있기에, 직장을 위해 가정을 포기하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 이런 사람은 욕망을 채우는 것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

문제가 되는 경우는, 가정이 직장보다 더 소중하고 가치 있다고 여기는 사람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장을 위해 가정을 포기하는 사람이다.

- 그러면서도 직장 때문에 가정을 포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 직장이 주는 하찮은 인정, 안정 욕구 채우는데 몰입하여, 가정이 파괴되고 있다는 것을 보지도 못하는 것이다.

이것이 세상을 향한 욕망의 결정적인 문제이다.

- 이 욕망이 ‘우리’가 ‘우리’를 떠나게 한다.

 

‘두려움’과 ‘욕망’에 대해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는?

‘두려움’은 우리가 다뤄야 할 영역이 아니다.

- 사회 구조 전체가 변하지 않는 한 해결될 수 없다.

- 마치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대한 두려움을 바벨론이 멸망하지 않는 한 해결할 수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 사회 구조는 개인이 아무리 노력해도 바꿀 수 없다.

두려움을 일으키는 사회 구조는 2023년 대한민국에 살고 있다는 이유로 일방적으로 주어진 것이다.

 

그렇다고 자포자기하여 두려움에 순응하라는 것은 아니다.

- 세상의 강압에 타협하여, 우리를 잃어버린 채 적당히 살라는 것이 아니다.

- 우리가 바꿀 수 없다고, 바뀔 가능성조차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다.

이것 때문에 이번 본문이 필요한 것이다.

- 하나님은 내가 직접 온 세상을 멸망시키겠다고 하신다.

- 그래서 세상에 대한 두려움에서 건져 내시겠다고 하신다.

- 그러니 끝까지 두려움에 굴복하지 말고, 자기 자신을 지키라는 것이다.

- 세상의 강압에 휩쓸리지 말라는 것이다.

- 다른 것 신경 쓰지 말고, 자기만 신경 쓰라는 것이다.

 

따라서 두려움에 대해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는,

- 두려움의 원인인 사회 구조를 바꾸는 것에 너무 몰입하지 말되,

- 그렇다고 두려움에 순응하고 굴복하여, 세상에 휩쓸리지도 말며,

- 세상을 멸망시킬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당당하게 자기 자신을 되찾아 지키는 것이다.

- 그렇게 자기를 지킨 사람이 늘어날 때, 세상도 변화될 수 있다.

이것만이 ‘우리’가 ‘우리’에게 돌아갈 방법이다.

- 여기까지가 이번 본문이 다루는 주제이다.

- 다음부터는 이번 본문이 다루는 주제를 넘어간다.

 

하지만 두려움과 달리 ‘욕망’은 온전히 우리가 다뤄야 할 영역이다.

- 자신이 신경 써야 할 부분이다.

- 자신이 능동적, 주체적으로 노력해야 할 부분이다.

어떤 방향으로 노력해야 하냐?

- 단순히 욕망을 억누르는 금욕주의를 하자는 것이 아니다.

- 금욕주의 역시 ‘우리’가 ‘우리’를 떠나는 것이다.

 

노력의 방향은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것을 향해야 한다.

- 지금 내가 채우려는 욕망이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인지,

- 그래서 욕망을 채우는 대가로 포기하는 것보다 이 욕망이 더 소중한 것인지 성찰해야 한다.

- 직장이 주는 인정과 안정이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인지,

- 그래서 직장에서 성공하는 대가로 포기하는 가정보다 직장이 정말 나에게 더 소중한 것인지 성찰해야 한다.

그렇게 성찰해서 결론이 나왔다면, 과감하게 선택해야 한다.

- 직장을 선택했다면, 미련 없이 가정을 버려야 하고,

- 가정을 선택했다면, 미련 없이 직장을 버려야 한다.

물론 사람 마음이 무 자르듯 단번에 정리되지 않는다.

- 그러나 마음을 정리하지 못하고 여전히 미련을 가지면, 미련해진다.

-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게 된다.

- 자기만 손해이다.

- 모든 노력을 집중하여 마음을 정리하는데 쏟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 시간을 끌면, 직장과 가정 모두 집중하지 못한다.

- 직장에서도 버려지고, 가정에서도 버려진다.

- 왜냐하면 직장에 미련 갖느라 가정을 포기했고, 또 가정에 미련을 갖느라 직장을 포기했기 때문에 생기는 당연한 결과이다.

 

이렇게 자신의 진짜 욕망을 알기 위해 노력하고, 그 욕망 성취에 집중하려고 노력할 때만,

- ‘우리’는 ‘우리’에게 돌아와, 

- ‘우리’를 회복하여, 

- 우리답게 살 수 있다.

 

결론 - 왜 우리는 우리에게 돌아가 우리를 회복해야 하는가?

이런 과정으로 우리가 우리에게 돌아갈 때,

- 그래서 우리가 우리를 되찾고, 우리다워질 때, 

- 하나님도 우리를 되찾으실 수 있고,

- 그제야 하나님도 하나님을 되찾으실 수 있다.

- 마치 부모가 잃어버린 자녀를 되찾을 때 부모의 자격을 되찾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야 하나님은 부모 잃은 자녀, 자녀 잃은 부모처럼 사방팔방 해메지 않고,

- 비로소 ‘안식’하실 수 있다.

- 참 안식이란, 하나님 혼자 무릉도원에서 무위도식하는 것이 아니라,

- 우리다운 우리와 하나님다운 하나님이 격렬한 사랑의 관계를 맺는 다이나믹한 것이다.

 

그날이 오기를 하나님은 부모 잃은 부모가 자녀 찾듯, 자녀 잃은 부모가 자녀 찾듯 간절하고, 절박하고, 애절하게 기다리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