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예레미야서

예레미야(49) 24:1-10 청개구리 하나님

<미양교회 팟캐스트 양따양>

미양교회에서 했던 설교를 바탕으로 진솔하게 신앙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팟캐스트도 많이 들어주세요.

https://www.podbbang.com/channels/1790233/

 

어린양을 따르는 어린양

예배 대신 예수님, 설교 대신 성경, 건물 대신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미양교회가 만드는 방송입니다.토끼와 개구리가 진솔하게 신앙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어린양과 같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

www.podbbang.com

 

 

본문에는 중요한 전제가 숨겨져 있다.

- 하나님은 포로로 끌려간 사람을 좋은 무화과처럼 잘 돌보겠다고 하시고,

[렘 24:5] 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한다. 내가 이 곳에서 바빌로니아 사람의 땅으로 내쫓은 유다의 포로들을 이 좋은 무화과처럼 잘 돌보아 주겠다.

- 끌려가지 않고 남아있는 사람을 나쁜 무화과처럼 버리겠다고 하시는데,

[렘 24:8] 그러나, 유다 왕 시드기야와 그의 대신들을 비롯하여, 예루살렘에 남은 사람들과 이 땅에 남은 사람들과 이집트 땅으로 간 사람들은, 아주 나빠서 먹을 수가 없는, 나쁜 무화과처럼 만들어 버리겠다. 나 주가 분명히 말한다.

- 여기에는 포로로 끌려가지 않고 살아남은 사람이 끌려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자신을 의롭다고 여긴 전제가 있다.

이것이 당시 사람들의 일반적인 ‘상식’이었다.

- 자신이 끌려가지 않은 것은 의롭게 살았기 때문이고,

- 그래서 하나님이 ‘좋은 무화과처럼’ 자신을 돌보아 주셨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 반대로 끌려간 것은 불의하게 살았기 때문이고,

- 그래서 하나님이 ‘나쁜 무화과처럼’ 그들을 버렸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왜 이렇게 생각했냐?

- 경험에 기반하여, 상식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 고통이 고통스러워서 피하려고 했던 자연스러운 경험 때문이다.

- 그래서 고통은 나쁜 것, 고통을 피하는 것은 좋은 것이라는 판단했다.

- 그렇기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이 버리셨기 때문이고,

- 고통을 피하는 것은 하나님이 돌보셨기 때문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 그래서 포로로 끌려가 고통당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버림받은 사람이고,

- 반대로 남겨져서 고통을 피한 사람은 하나님께 돌봄 받은 사람이라는 논리이다.

이런 생각에 반기를 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 그래서 우리는 이를 ‘상식’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본문에서 하나님은 반대로 말씀하신다.

- 포로가 되어 고통당한 사람은 하나님께 돌봄을 받고,

- 포로로 끌려가지 않고 고통을 피한 사람은 하나님께 버려질 것이라고 한다.

왜 하나님은 바벨론 포로 되는 것을 좋게 여기셨을까?

- 혹시 포로로 잡혀가면 바벨론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선물이 있기 때문일까?

- 알고 봤더니 이스라엘보다 바벨론이 더 살기 좋았던 것일까?

- 혹은 반대로 바벨론이 너무 고통스러운 곳이어서, 그곳에 가는 것만으로도 죗값을 충분히 치르고 죄를 용서받을 수 있기 때문일까?

전부 아니다.

- 바벨론이 특별히 좋거나, 특별히 나쁘기 때문이 아니다.

- 사실상 바벨론에서 삶은 포로라는 이유로 가혹하지도, 선진국이라는 이유로 화려하지도 않았다.

- 특별한 기술을 가진 사람을 제외하고 대부분은 농업에 종사했다.

- 새로운 곳에 정착해서 농사를 지어야 한다는 부담이 있었지만, 

- 세금을 내고도 부족함 없이 먹을 수 있었다.

하나님이 포로 되는 것을 좋게 여기신 이유는 딱 하나이다.

- 당시 사람들이 싫어했기 때문이다.

- 포로가 되어 바벨론에 끌려가는 것을 나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나님은 사람들의 상식을 거꾸로 비트는 것을 좋아하신다.

 

도대체 하나님은 왜 이러실까?

왜 하나님은 청개구리처럼 사람들이 원하는 것과 반대로 행동하실까?

- 이런 점 때문에 소수지만 적지 않은 학자들이 하나님을 ‘가학성 성격장애’라고 비판한다.

- 상식을 비틀어 사람들을 괴롭히는 것을 좋아하시는 것 같기 때문이다.

- 반대로, 하나님을 ‘피학성 성격장애’라고 말하는 학자도 있다.

- 십자가에 못박아 자신을 괴롭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은 이유 없이 다른 사람이나 자기 자신을 학대하는 이상한 존재로 보인다.

 

그런데 하나님이 청개구리처럼 상식을 비틀어 사람을 괴롭히는 일은 이것만이 아니다.

- 대표적인 예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다.

- 세상에 어떻게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증명하는 방법으로 십자가 죽음을 이용하려고 생각하겠는가.

- 예수님은 세상에서 가장 강한 자가 되기 위해 모든 사람을 제압하는 방법이 아니라,

- 모든 사람에게 제압당하여 세상에서 가장 약한 자가 되는 방법을 사용하셨다.

- 또 다른 예로, 예수님이 율법을 범하신 일이다.

- 예수님은 자신이 얼마나 의로운지를 드러내기 위해 의로움의 척도가 되는 율법을 의도적으로 범하셨다.

이런 예수님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 사람들이 옳다는 상식마다 찾아다니며 전부 반대로 행동하고 다니시니 말이다.

- 사람들이 하지 말라는 행동만 골라서 하고 다니시니 말이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의 죽음은 합당하다.

- 미운 짓만 골라 하는 예수님을 누구도 좋아할 리 없다.

- 오죽하면 3년간 동고동락했던 제자들에게마저 버려지겠는가.

- 이 정도면 제자들의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의 문제이다.

 

그렇지만 만약 하나님께 성격장애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 예수님이 죽으신 것이 예수님께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 왜 하나님은 청개구리처럼 상식과 반대로 행동하는 것일까?

- 왜 멀쩡한 상식을 파괴하시는 것일까?

- 그래서 왜 사람들을 괴롭히시는 것일까?

- 이러한 상식 파괴가 어떻게 사랑을 전할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해서, 사람을 위해서이다.

- 사람에게 진정한 구원과 평안을 주기 위해서이다.

- 마치 예수님의 죽음이 당시 제자들에게 엄청난 충격과 공포를 주었지만,

-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께 버려진 것 같은 당혹감을 받았지만,

- 사실상 예수님의 죽음은 제자들을 구원하기 위한 유일한 길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 예수님의 죽음 때문에 제자들은 예수님을 떠나게 되지만,

- 결국 그 죽음 때문에 제자들이 구원받게 된 것처럼 말이다.

왜 이렇게 말하냐면,

- 상식과 상식을 만들어낸 경험에 근거하는 판단이 결국 사람을 위험에 빠뜨리기 때문이다.

- 왜냐하면 상식과 경험은 불안정하여 언제나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런 불안정한 것에 삶의 기반을 두면, 삶 역시 불안정해질 수밖에 없다.

- 게다가 더 큰 문제는 사람이 상식과 경험을 절대적이라고 믿는 것에 있다.

따라서 상식에 근거한 삶은 언제나 ‘믿는 도끼에 발 등 찍히는’ 일을 당할 수밖에 없다.

- 만약 상식에 배신당하지 않는다고 해도, 평생 배신당할 두려움에 떨며 살아야 한다.

- 사람은 상식의 불안정성을 본능적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상식에 기반한 삶은 언제나 지옥이다.

- 성공을 했던 실패를 했던 말이다.

- 평안과 안식은 없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상식을 파괴하시는 이유이다.

- 상식에 기반한 삶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려주시기 위해서이다.

- 상식과 경험은 절대적이라는 착각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려주시기 위해서이다.

- 그래서 불안정한 기반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은 상식과 반대로 말씀하신 것이다.

- 포로로 끌려가 고통당한 것이 오히려 좋은 것이고,

- 끌려가지 않고 고통에서 피한 것이 오히려 나쁜 것이라고 말이다.

- 포로로 끌려가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 불안정한 상식의 위험성에서 우리를 건져내시기 위해서 말이다.

 

예수님이 나약하게 죽으신 이유도 이와 같다.

사람은 구원자가 강해야 한다는 상식을 가지고 있다.

- 너무 약해서 자기조차 구원하지 못하는 존재는 다른 누구도 구원할 수 없을뿐더러,

- 인류의 구원자인 그리스도가 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 왜냐하면 약한 자가 누군가를 구원하는 경험은 한 번도 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 게다가 약한 자는 언제나 강한 자에게 억눌려서 고통당하는 경험만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사람들이 십자가에 걸린 예수님에게 내려와 보라고 말한다.

- 내려와서 능력을 보여주면 믿겠다고 조롱한다.

[마 27:39~43] 지나가는 사람들이 머리를 흔들면서, 예수를 모욕하여 (40) 말하였다. “성전을 허물고, 사흘만에 짓겠다던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너나 구원하여라.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라.” (41)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율법학자들과 장로들과 함께 조롱하면서 말하였다. (42)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나, 자기는 구원하지 못하는가 보다! 그가 이스라엘 왕이시니,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오시라지! 그러면 우리가 그를 믿을 터인데! (43) 그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으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시라지. 그가 말하기를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런 상식을 절대적이라고 믿는 사람은 언제나 불안하다.

- 약해지면 안 된다는 강박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약점이 있으면 결국 강자에게 먹잇감이 될 것이라며,

- 자신의 약점을 조금도 용납하지 않는다.

결국 그런 사람은 평생 힘을 모으는 것에만 집중할 수밖에 없고,

- 아무리 강자가 되어도, 자기보다 더 강한 자의 위세에 불안할 수밖에 없다.

- 그러면 평생 단 한 번도 자신을 있는 그대로 용납하고 사랑해보지 못하고,

- 약점을 가진 자신을 끊임없이 부정하고 저주하며, 자신을 극복하기 위해서만 살아간다.

이렇게 영원히 불안과 불만족 속에서 자신을 부정하며 사는 삶이 바로 지옥이다.

 

게다가 같은 논리로 약자를 무시하고 비난한다.

- 강자가 좋은 것인 반면, 약자는 나쁜 것이니,

- 가난한 자, 장애인 등 세상에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차별받는 사람은 하나님께 벌을 받은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 하나님조차 그들을 싫어하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강자가 좋은 것이라는 당연한 상식이 약자 차별을 정당화하는 핵심 논리가 된다.

 

반면에 예수님은 자기조차 구원하지 못하고 처절하게 괴롭힙당하다가 죽었다.

- 예수님이 인류의 구원을 위해 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

- 약자로 처량하게 죽었다.

- 약함 속에서 강해지려고 하지 않은 것뿐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약함 때문에 예수님을 그리스도, 즉 구원자라고 칭하셨다.

- 세상에서 가장 약한 자를 세상에서 가장 강한 자로 치켜세우셨다.

왜냐하면 누구도 강해질 필요 없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이다.

- 세상은 강함만이 좋고 약함은 나쁘다는 상식이 있는데,

- 그래서 모두가 약함에서 벗어나 강함을 가져야 한다는 상식이 있는데,

- 그래서 자신의 약함을 혐오하고 부정하여 극복해야 한다는 상식이 있는데,

- 동시에 다른 사람의 약함도 혐오하고 차별해도 된다는 상식이 있는데,

- 그 상식을 파괴하여, 

- 약함이 혐오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이라는 것을 깨닫도록 하시기 위해서이다.

- 약함은 부정하고 극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존중하고 사랑해야 할 대상이라는 것을 깨닫도록 하시기 위해서이다.

- 그래서 인류가 예수님처럼 약함 속에서 강해지려 하지 않고,

- 약함 속에 있는 그대로 머물며, 자신을 온전히 용납하고 사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다.

 

왜 약함을 있는 그대로 용납하고 사랑해야 하냐?

- 자신 전부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것에 의문을 제기할 사람은 없다.

- 거지와 장애인도 있는 그대로 사랑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 이것이야말로 진리이다.

게다가 이것이 갖는 긍정적인 효과가 또 있다.

- 자신의 약함을 약함으로 인식하는 사고 방식에서 벗어날 때,

- 그래서 약함과 강함을 구분하는 힘의 원리에서 벗어날 때,

- 그래서 약함과 강함을 구분하는 기준 자체가 사라질 때,

- 그때만 비로소 자기 외에 다른 약자를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약자를 약자로 동정하고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 약자를 ‘사람’으로 존중하고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힘의 원리가 아닌 사랑의 원리가 작동하는 곳이 바로 천국이다.

 

하나님이 상식 파괴와 더불어 하시는 일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주권 획득’이다.

- 엄밀하게 말해서, ‘상식 파괴’와 ‘주권 획득’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 ‘상식 파괴’는 상식과 경험에 짓눌려 불안정한 상태에 있는 우리를 건져내는 것이고,

- ‘주권 획득’은 건져진 우리를 하나님 품 안에 안기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는 상식과 경험에 기반해서 살고 있다.

- 그리고 상식과 경험은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니, 삶의 주권이 나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 그래서 누구도 나를 구속하고 강압하지 않으니, 주권을 가지고 자유롭게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 사실상 우리는 상식과 경험에 통제되고 있고,

- 상식과 경험은 세상이 통제하고 있다.

- 따라서 우리의 주권은 실질적으로 우리를 통제하고 있는 세상이 가지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돈이 있다.

- 우리는 우리가 원해서, 주권을 가지고 돈을 번다고 생각한다.

- 돈에 대해 주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 그러나 돈에 대해 주권이 있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돈을 벌지 말지 우리가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 그래서 돈이 필요한 만큼만 벌고, 필요 이상의 돈은 벌지 않는 선택을 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에서 우리는 돈에 대한 주권이 없다.

- 왜냐하면 우리는 돈을 벌지 말지 선택할 수 없기 때문이다.

- 돈을 버는 ‘방법’을 선택할 수는 있지만, 돈을 벌지 않을 선택은 하지 못한다.

- 돈은 무조건 벌어야 하며, 그것을 상식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돈에 대해서 주권이 없다.

- 돈이 우리의 주권을 가지고 있다.

이를 다르게 말하면, 우리는 돈의 ‘노예’이다.

 

세상은 우리를 어떻게 돈의 노예로 만들었는가?

다양하고 복잡한 이유가 있지만, 하나만 말하면,

- 상식을 통해서이다.

- ‘돈이 있어야 하고, 돈이 없으면 큰일 난다.’는 상식을 진리처럼 주입해서,

- 돈을 선택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 돈은 무조건 벌어야 하는 것이고,

- 돈을 왜 벌어야 하냐는 의문을 갖는 것조차 차단해버렸다.

- 그런 의문을 갖는 것은 배부른 소리이고, 애들이나 하는 어리석은 고민이고 말한다.

 

물론 이 말을 듣고 반박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 난 돈에 큰 욕심 없어.

- 일이 좋아서 하는 것뿐이야.

- 일 안 하고 놀면 뭐 해? 

- 일 안 해서 심심한 것보다 일하면서 돈도 벌고 재미도 있고 좋지.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이는 거짓말이다.

- 일이 좋다고 말한 것은, 돈을 충분히 벌 수 있는 일 중에 지금 하는 일이 그나마 좋다는 것이지,

- 정말 돈과 상관없이 일 자체가 좋은가?

- 같은 일을 돈 안 줘도 할 것인가?

- 평생 쓰고도 남을 돈이 있다면, 지금 하는 일을 계속할 것인가?

- 만약 아니라면, 좋아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돈 때문에 일하는 것이고,

- 이것이 돈의 노예라는 증거이다.

 

그렇다고 돈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다.

- 돈이 있어야 집세 내고, 시장 가서 음식을 산다.

- 내가 지적하는 것은 필요 이상의 돈을 버느라 인생을 낭비하는 것이다.

- 좋아하지도 않는 일을 돈 때문에 하는데,

- 그 일 하느라, 자기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서서히 죽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전부 상식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상식이 파괴되면, 

- 그래서 세상이 주입한 생각에서 벗어나면,

- 비로소 스스로 생각이란 것을 하게 된다.

- 원점에서 밑바닥부터 새롭게 고민하게 된다.

- 돈은 왜 벌어야 하지? 돈은 얼마가 필요하지?

- 일은 왜 해야 하지? 지금 일이 정말 나에게 맞나?

- 정말 내가 좋아하는 것은 뭐지?

질문에 정답은 없다.

- 게다가 반드시 정답을 알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 질문하고 고민하는 과정 자체가 이미 세상의 노예에서 나의 주인으로 바뀐 것이다.

- 세상의 상식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나’를 기준으로 내가 나의 주인이 되어 새롭게 판단하기 때문이다.

- 그러다 보면 상식에 짓눌려 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와 자기 자신을 보게 된다.

이것이 바로 ‘주권 획득’이다.

 

게다가 ‘주권 획득’만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오직 사랑이고,

- 사랑은 모든 행동 중에 가장 능동적, 주체적, 적극적이어야만 하는 행동이다.

- 반대로 말해서, 사랑 행위를 99.9%의 자발적인 동기 외에 0.1%라도 돈 때문에 행한다면,

- 우리는 그 사랑을 100% 순수하게 ‘매춘’이라고 말한다.

혹자는 매춘에는 사랑이 없다고 말하는데, 그렇지 않다.

- 돈을 주는 이도 사랑스러워 보이는 사람을 고르고,

- 돈을 받는 이도 사랑스러워 보이는 사람을 선호한다.

-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매춘에도 사랑은 있다.

- 그 사랑과 함께 돈이 끼어있다는 것이 문제지.

 

따라서 사랑은 주권을 획득한 사람만 할 수 있는 행위이다.

- 순수하게 자율적인 동기로 능동적, 주체적인 행동만을 사랑이라 할 수 있다.

- 그렇기 때문에 돈의 노예인 사람은,

- 그래서 행동 동기에 0.1%라도 돈을 포함한 사람은 매춘밖에는 할 수가 없다.

- 다른 사람과의 사랑은 말할 것도 없고, 하나님과의 사랑도 그렇다.

돈에서 완전히 벗어나, 돈을 벌지 않을 수 있는 자유를 가진 사람만,

- 그래서 행동 동기에 돈을 완전히 배제할 수 있는 사람만 사랑을 할 수 있다.

 

만약 누군가 우리에게 화대를 주고 관계를 맺자고 하면, 어떤 기분이 들겠는가?

- 아니면 우리를 순수하게 사랑한다고 느꼈던 사람이 알고 보니 뒤로 화대를 지불하고 있었다면?

- 좀 더 쉬운 예로, 신앙에 열심이었던 안 목사가 알고 보니 뒤에서 헌금을 빼돌리고 있었다면?

- 모욕감을 넘어, 인생이 부정당하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 그 사람을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것을 넘어, 그런 취급을 당한 자신이 혐오스러울 지경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절대로 하나님과 순수한 사랑의 관계를 맺어야 한다.

- 왜냐하면 만약 우리가 순수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그만큼 모욕감을 느끼실 테니 말이다.

- 화대를 줘서도 안 되고, 화대를 요구해서도 안 된다.

- 하나님과 관계 맺기 위해 화대를 명목으로 봉사, 섬김, 헌신을 해서도 안 되고,

- 반대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은 후 하나님께 화대를 요구하듯 부, 건강, 명예 등을 구해서도 안 된다.

그것은 결국 전부 매춘이고, 

- 원하지도 않은 매춘을 당하는 하나님은 견딜 수 없는 모욕감을 느끼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 그래서 예수님이 화대를 내듯 율법을 지킨 바리새인을 그토록 경멸하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오해하면 안 된다.

- 봉사, 섬김, 헌신은 필요 없고, 어떤 것도 하나님께 구하면 안 된다는 것이 아니다.

- 봉사, 섬김, 헌신 해야 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구해야 한다.

예를 들어, 부부 관계라면,

- 반드시 서로 봉사해야 하고, 자신의 필요를 상대에게 구해야 한다.

- 하지만 사랑의 대가로 봉사하면 안 되고,

- 사랑을 빌미로 뭔가를 요구하면 안 된다.

- 사랑해야지, 거래하면 안 된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아무리 많이 사랑해도 0.1%의 다른 의도가 있다면,

- 우리가 창녀 취급 받을 때 느꼈던 모독감을 하나님도 똑같이 느끼실 것이다.

또 반대로 오해하면 안 될 것이,

- 0.1%의 다른 의도가 없어질 때까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안 되냐?

- 그렇게 될 때까지 하나님은 우리의 사랑을 싫어하실까?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신다.

- 우리가 하나님을 창녀 취급한다는 것을 이미 아신다.

-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부터 우리를 사랑하셨다.

우리가 가져야 할 마음은,

- 당장 0.1%를 없애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 100%가 아닌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죄 용서를 구하며,

-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 99%로라도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이다.

 

그 몸부림의 일환으로 ‘주권 획득’이 필요한 것이다.

- 돈의 노예, 사람의 노예, 명예의 노예, 인정, 안정의 노예에서 벗어나,

- 주체적, 능동적, 자발적, 적극적인 태도를 갖는 것이다.

- 그렇게 얻은 주권으로만 다른 동기가 전혀 없는 순수한 사랑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가 그런 태도를 갖도록 ‘상식 파괴’로 우리를 도우시는 것이다.

- 그래서 우리가 상식으로 인해 얼마나 심각한 노예 상태에 있는지 깨닫게 하신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이다.

- 노예에서 벗어나,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 말이다.

 

결론 - 그러나 말처럼 쉽지 않다.

잃었던 주권을 되찾는다는데, 마다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 돈의 노예에서 나의 주인이 된다는데 누가 싫어하겠는가.

 

하지만 말처럼 쉽지 않다. 이유는 두 가지 때문이다.

첫째로, 세상이 가만두지 않는다.

- 우리가 자유민주주의 국가에 살기 때문에, 자유 역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을 것 같고,

- 주권을 되찾아오는 것이 자유로울 것 같지만,

- 실상은 그렇지 않다.

- 세상은 우리가 세상의 노예에서 벗어나려고 하면, 엄청난 힘으로 우리를 억누른다.

간단하게만 설명하면, 만약 자신에게 하고 싶은 일이 생겨서 직장을 그만두려고 하는데,

- 새로운 일이 돈과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면,

- 주변 사람들이 가만히 있겠는가?

- 분명히 도시락 싸 들고 다니면서 말릴 사람이 있을 것이다.

- 특히 자신에게 중요하고 소중한 사람, 그중에 부모가 그럴 것이다.

- 우리는 그 사람의 경고와 회유를 거부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것만 봐도 우리는 세상의 노예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둘째로, 자신조차 감당하기 힘들다.

- 우리는 우리가 노예로 사는 것이 싫고 주권을 원한다고 생각하지만,

- 실상은 그렇지 않다.

- 우리는 노예로 사는 것에 어느 정도 만족해한다.

- 마치 출애굽한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의 노예 생활을 그리워했던 것처럼 말이다.

왜 노예로 사는 것을 좋아하냐?

- 책임지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 노예에서 벗어나 주권을 얻으면, 모든 것을 내가 선택해야 하고, 내가 책임져야 한다.

- 작은 실수에도 정면으로 비난받아야 한다.

그러나 노예로 살면, 

- 그래서 다른 사람이 하라는 대로 하고,

- 다른 사람이 하는 대로 따라 살면,

- 내가 선택한 것이 없으니,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

- 누구에게도 비난받지 않는다.

- 그러면서도 어느 정도의 보상은 주어진다.

- 다른 사람과 같이 일정 수준의 풍요를 누릴 수 있다.

- 마치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노예로 살며 고기를 마음껏 먹을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주권을 얻기 위해서는 세상과 자기 자신을 거부해야 한다.

 

결국 선택의 문제이다.

- 노예로 세상에 휩쓸려,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하는 대로 따라 살 것인가,

- 아니면 주권을 가지고 세상을 거슬러, 모든 것을 선택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지며 살 것인가.

- 전자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살았던 것처럼 고기 실컷 먹으며 풍족하게 살 것이다.

- 그러나 자기 자신을 잃은 채 노예로 살아야 한다.

- 후자는 광야에서 고생했던 이스라엘처럼 예상할 수 없는 위험한 삶을 살 것이다.

- 그러나 온전히 자신의 주인으로 살 수 있다.

물론 우리의 바람은 풍요로운 주인으로 사는 것이다.

- 주권을 가지면서도 위험하지 않고 풍요로운 삶 말이다.

- 그러나 그런 선택지는 없다.

- 배부른 돼지와 배고픈 소크라테스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지금까지 난 어떤 선택을 하며 살았는가?

-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하며 살고 싶은가?

- 이 선택이 앞으로의 우리 인생을 결정할 것이다.

지금 선택 잘해서 후회 없이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