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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서

예레미야(41) 21:1-10 바벨론 군대에 항복하는 사람은 죽지 않을 것이다.

<미양교회 팟캐스트 양따양>

미양교회에서 했던 설교를 바탕으로 진솔하게 신앙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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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양을 따르는 어린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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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항복하여 포로로 끌려가라고 명령하신다.

[렘 21:8~9] “너는 이 백성에게 이렇게 전하여라. ‘나 주가 말한다. 내가 너희 앞에 생명의 길과 죽음의 길을 둔다. (9) 이 도성 안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전쟁이나 기근이나 염병으로 죽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를 에워싸고 있는 바빌로니아 군대에게 나아가서 항복하는 사람은, 죽지 않을 것이다. 그 사람은 적어도 자신의 목숨만은 건질 것이다.

- 항복하는 사람만 죽지 않고 목숨을 건질 것이라고 경고하신다.

이런 하나님을 잔인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 바벨론에 포위당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간절히 구원을 요청한다.

[렘 21:2] 그 때에 그들이 와서 이렇게 말하였다. “제발 우리가 멸망하지 않도록 주님께 간절히 기도하여 주십시오. 바빌로니아 왕 느부갓네살이 우리를 포위하여 공격하고 있습니다. 행여 주님께서, 예전에 많은 기적을 베푸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기적을 베풀어 주시면, 느부갓네살이 우리에게서 물러갈 것입니다.”

- 그런데 그런 절박한 사람에게 어떻게 완전한 멸망을 명령하냐는 것이다.

- 저렇게 간절하고 절박한 사람에게 어쩜 이렇게 냉혹하고 잔인하냐는 것이다.

- 이는 마치 절벽에서 실족하여 벼랑 끝에 간신히 매달려 있는 사람의 손을 잡아주긴커녕, 손을 짓밟는 꼴이다.

- 또는 혹 떼러 온 사람을 그냥 돌려보내지는 못할망정, 혹을 더 붙여서 보내는 꼴이다.

이런 하나님을 어떻게 믿고 의지할 수 있냐고 반문한다.

 

결론부터 말해서, 이러한 반문은 무지 때문이다.

-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빨리 풀기 위해 먼저 간단한 예를 들면,

- 만약 누군가 날카로운 칼을 들고 내 다리를 자르려고 한다고 해보자.

- 주변 사람에게 도와달라고 소리쳤지만, 도와주기는커녕 발버둥 치는 내 몸을 꽉 잡아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 결국 나는 서걱서걱 다리 잘리는 소리를 들으며, 고통 속에서 기절해버렸고,

- 깨어나 보니 두 다리는 이미 사라져버리고 없었다고 해보자.

이를 아무 생각 없이 보면, 잔인하고 냉혹한 학살의 현장이다.

- 강압적으로 멀쩡한 다리를 이유 없이 잘랐다고 가정하면 말이다.

그러나 알고 보니 이곳이 서울에 있는 최고의 종합 병원이었다면, 똑같이 학살의 현장일까?

- 오히려 자비롭고 따뜻한 치유의 현장이다.

- 물론 환자에게 현재 상황과 치료 과정을 친절하고 상세하게 설명해줬다면 더 좋았겠지만,

- 1분만 늦어도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라면, 잔인해 보이는 선택이 최선의 선택이 된다.

수술에서 깨어난 환자가 없어진 다리를 보고 절규하며 괴로워할 수도 있다.

- 정말 극단적으로 말해서, 자신의 장애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괴로워만 하다가 자살할 수도 있다.

- 그래서 다리 절단 수술이 고통만 가중할 뿐, 아무런 유익이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만약 환자를 사랑한다면, 수술을 포기할 수 있을까?

-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어떻게든 목숨을 살리는 것이 우선 아닐까?

- 잔인하지만 다리를 자르는 것과 자비롭게 다리를 자르지 않아 목숨을 잃는 것 중에 무엇이 더 잔인한 것인가?

 

우리가 본문의 하나님을 잔인하다고 섣불리 판단하는 것은 전부 무지 때문이다.

-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이스라엘에게 항복을 명령하셨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 항복을 명령하신 이스라엘의 상황을 모르기 때문이다.

- 마치 수술실에서 다리를 자르는 의사를 잔인하고 냉혹하다고 섣불리 판단하는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드기야 왕 집권 시기의 이스라엘 상황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 그것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탓하는 것은, 한시가 급한 환자의 수술에 들어가는 의사 멱살을 잡고 수술을 방해하는 무식한 행동일 뿐이다.

 

이스라엘 말기의 상황

시드기야 왕은 남 유다의 마지막 왕이자, 동시에 이스라엘 전체의 마지막 왕이다.

- 시드기야를 끝으로 이스라엘은 완전히 멸망한다.

그런데 모든 역사가 그렇듯, 이스라엘도 단번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 이전의 수많은 잘못된 선택이 누적된 결과이다.

- 이를 반대로 말하면, 이스라엘도 멸망하지 않을 수많은 기회가 있었다.

- 하지만 역사 속에서 사라지는 대부분의 나라가 그렇듯, 이스라엘 역시 기회를 모두 날려버렸다.

 

이스라엘의 멸망은 하나님의 폭력적인 개입 때문이 아니다.

- 멸망하는 나라가 대부분 그렇듯, 이스라엘 내부의 분열, 부정부패, 의미 없는 정치 갈등, 권력을 잡기 위한 외세 의지 때문이다.

- 마치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과정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 이미 조선 내부에서 분열, 부패, 외세 의지가 심각했던 것처럼 말이다.

- 집권자가 나라를 지킬 생각보다, 나라는 망해도 자신의 권력 유지, 재산 유지, 목숨 유지에만 초점을 두었던 것처럼 말이다.

- 그 때문에 엉뚱하게 힘 없는 사람들만 박해와 수탈을 당했던 것처럼 말이다.

이것이 이스라엘 말기의 처참한 상황이었다.

 

이스라엘 말기의 연표는 다음과 같다. 

요시야 시기는 이스라엘의 마지막 전성기이다.

- 요시야는 우상을 타파한 종교개혁으로 유명하다.(628)

[왕하 23:3~4] 왕은 기둥 곁에 서서, 주님을 따를 것과, 온 마음과 목숨을 다 바쳐 그의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킬 것과, 이 책에 적힌 언약의 말씀을 지킬 것을 맹세하는 언약을, 주님 앞에서 세웠다. 온 백성도 그 언약에 동참하였다. (4) 왕은 힐기야 대제사장과 부제사장들과 문지기들에게, 바알과 아세라와 하늘의 별을 섬기려고 하여 만든 기구들을, 주님의 성전으로부터 밖으로 내놓도록 명령하였다. 그리고 그는, 예루살렘 바깥 기드론 들판에서 그것들을 모두 불태우고, 그 태운 재를 베델로 옮겼다.

하지만 종교개혁 자체보다는 종교개혁을 할 수 있었던 정황을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 이 시기의 가장 큰 특징은 당시 최 강대국이었던 앗수르가 멸망했다는 점이다.

- 그래서 이스라엘은 앗수르의 간섭 없이 자유롭게 국내 정치를 할 수 있었다.

- 그랬기 때문에 앗수르의 지배 아래에서 강요받은 우상 숭배도 버릴 수 있었다.

- 그로 인해 이스라엘이 강력한 왕권 확립, 내부 결속, 국력 강화, 경제력 상승을 순차적으로 일으킬 수 있었다.

- 이것이 요시야 왕 시기에 이스라엘이 전성기를 이룰 수 있었던 이유이다.

 

게다가 요시야 뒤에는 이집트의 도움이 있었다.

- 남쪽의 이집트와 북쪽의 앗수르는 사이에 있는 이스라엘 지역을 두고 경쟁하였다.

- 왜냐하면 이스라엘 지역에 지중해로 연결된 좋은 항구가 있었고,

- 그 항구를 소유해야 무역과 전쟁에서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앗수르의 혼란을 틈타 이집트는 이스라엘을 지원하였다.

- 그래야 이스라엘이 앗수르로부터 독립할 수 있고,

- 그래야 이스라엘 지역의 항구를 앗수르의 방해 없이 마음껏 사용할 수 있으며,

- 그래야 만약 북쪽에서 새로운 군대가 내려올 때, 이집트를 보호해 줄 방패막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요시야 시기에 전성기를 누릴 수 있었던 이유이다.

- 물론 요시야 개인의 능력과 하나님의 개입도 무시할 수 없다.

- 하지만 국제 정세가 이스라엘에 유리한 상황으로 돌아간 것이 결정적인 이유이다.

 

하지만 이러한 밝음 속에 어두움이 있다.

- 이전까지 앗수르의 힘을 빌려 권력을 누렸던 권력층이 소외되었다.

- 이스라엘의 국력이 강해질수록 앗수르의 영향력은 작아지고 이집트의 영향력은 커졌다.

- 그에 따라 친앗수르/반이집트였던 그들은 더욱 더 힘을 잃었고, 

- 그들의 억울함과 울분은 쌓여갔다.

- 그들은 이전까지 최고 권력에 있었기 때문에, 권력을 잃은 현 시점을 더욱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런데 전쟁 중에 갑자기 요시야 왕이 죽는다.(609)

- 그것을 그들은 자신들의 기회로 삼는다.

- 그래서 그들은 이집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반이집트 성향의 여호아하스를 왕으로 세운다.(609)

- 오직 권력을 갖기 위해서 말이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국력에는 관심이 없다.

- 외교적으로 앗수르와 이집트 중에 어디와 화친을 맺는 것이 이스라엘에 유리한지 관심이 없다.

- 그들의 유일한 관심은 권력이다.

- 이스라엘의 국력이 약해져도 자신들이 집권하면 그만이다.

 

그랬기 때문에 결과는 뻔했다.

- 앗수르가 멸망한 상태에서 이집트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 이전에는 이집트에 저항하면, 앗수르 군대가 와서 이집트로부터 지켜주었다.

- 그러나 이제는 이스라엘이 이집트에 저항하는 것은 쓸모없이 국력만 낭비하는 짓이었다.

그래서 단 3개월 만에 이집트는 여호아하스 왕을 잡아간다.

- 그리고 친이집트 성향의 여호야김을 왕으로 세운다.(609)

[왕하 23:33~34] 여호아하스는 왕이 되었을 때에 스물세 살이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석 달 동안 다스렸다. ・・・・ (33) 이집트의 바로 느고 왕이 그를 하맛 땅에 있는 리블라에서 사로잡아, 예루살렘에서 다스리지 못하게 하고, 유다가 이집트에 은 백 달란트와 금 한 달란트를 조공으로 바치게 하였다. (34) 또 바로 느고 왕은 요시야를 대신하여 요시야의 아들 엘리야김을 왕으로 삼고, 그의 이름을 여호야김으로 바꾸게 하였다. 여호아하스는 이집트로 끌려가, 그 곳에서 죽었다.

 

그러는 사이에 앗수르를 정복한 바벨론이 국력을 정비하고 이스라엘에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 갈그미스 전투에서 바벨론은 이집트를 격퇴하고 이스라엘을 지배한다.(605)

- 그 이후부터 막강한 바벨론의 군사력 앞에 이집트는 쇠퇴의 일로를 걷게 된다.

-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스라엘은 친바벨론/반이집트 성향이 된다.

이러한 국제 정세는 이스라엘 국내 정치를 재편한다.

- 집권하고 있던 친이집트 권력층이 실권하고, 실권했던 친바벨론 권력층이 집권한다.

- 국제 정세로 인해 친이집트 세력과 친바벨론 세력의 갈등이 심화된다.

- 새롭게 권력을 얻는 자는 권력을 지키기 위해, 권력을 잃은 자는 권력을 얻기 위해 싸운다.

- 이스라엘 국가가 어떻게 되는지는 상관없이 말이다.

 

이때부터 이스라엘의 정치는 엉망진창이 된다.

- 국가 유지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권력 유지에만 혈안이 된다.

- 국력이 낭비되는 것을 감수하고 말이다.

그래서 친이집트 권력층은 집권하기 위해 이미 썪은 동아줄이 된 이집트를 다시 의지한다.(601)

- 이집트의 힘으로 바벨론에 저항한다.

- 그것이 이스라엘의 국력을 낭비한다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 어떻게든 바벨론을 몰아내어 자신들이 권력을 갖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 아무리 이집트가 힘을 잃어 바벨론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그러자 너무도 당연하게 바벨론은 예루살렘을 함락해버린다.(598)

- 함락 이유는 이스라엘의 군사력이 약했기 때문이 아니다.

- 이스라엘의 군사력은 항상 약했다.

진짜 이유는 이집트의 군사력이 약했기 때문이다.

- 그래서 이집트가 바벨론에게 졌기 때문이다.

- 이스라엘은 이집트가 바벨론을 물리쳐 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리석게 바벨론에 저항했다.

- 국력 낭비를 감수하고서라도 집권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 집권 욕망이 결국 나라 전체를 무너뜨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이집트 권력층은 집권 욕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 여호야김 왕이 죽자 그의 아들 여호야긴을 새로운 왕으로 세운다.(598)

- 계속해서 친이집트 성향을 유지한다.

이때는 이미 이집트의 세력이 완전히 기운 뒤였다.

[왕하 24:7] 바빌로니아 왕이 이집트의 강에서부터 유프라테스 강까지, 이집트 왕에게 속한 땅을 모두 점령하였으므로, 이집트 왕은 다시는 더 국경 밖으로 나오지 못하였다.

- 이스라엘은 이집트의 힘으로 바벨론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 그래서 바벨론에 저항하는 것이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이집트를 의지하는 것으로 국력을 유지할 수는 없어도, 권력은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 그래서 계속해서 이집트를 의지하며 바벨론에 저항한다.

- 권력 유지를 위해 국력 유지를 포기한다.

- 국력을 유지할 수 없으면 권력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은 간과한 채 말이다.

이렇게 이스라엘은 집권 욕망 때문에 자멸해간다.

 

여호야긴 왕 역시 3개월 만에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다.(597)

- 그리고 이번에는 바벨론이 직접 새로운 왕으로 시드기야를 임명한다.(597)

- 그래서 약 6년 동안 평화의 시기를 보낸다.

겉으로는 평화로워 보이지만, 이스라엘 내부에는 극심한 갈등이 있었다.

- 현재 집권층은 친바벨론 세력이지만, 실질적인 영향력은 이전 집권층인 친이집트 세력에 있었기 때문이다.

- 마치 '여소야대'처럼 말이다.

- 따라서 의미 없는 정치 갈등만 심했다.

- 그것도 국력이 너무 약해, 멸망을 눈 앞에 두고 있는 상황에서 말이다.

 

결국 6년 만에 이전 집권층인 친이집트 세력이 다시 권력을 잡고 바벨론에 반란을 일으킨다.(591)

- 그러나 스스로의 힘도 없고, 도움받을 이집트도 없었던 이스라엘은 바벨론에 무참히 짓밟힌다.(586)

- 이렇게 이스라엘은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서 완전한 멸망에 이른다.

여기까지가 이스라엘 역사의 끝이다.

 

이렇게 이스라엘 역사를 자세히 다룬 이유는 무엇이냐?

이스라엘의 어리석음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 권력 유지를 위해 국가 유지를 포기한 어리석음 말이다.

- 이스라엘 일대를 전부 바벨론이 장악하고 있었고, 이집트는 국경 밖에 대한 아무런 영향력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 그래서 친이집트/반바벨론이라는 선택이 필연적으로 멸망의 길이라는 것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 이집트에 의지하여 바벨론에 저항했다.

- 그래서 이집트에게는 아무 도움도 받지 못하고, 바벨론에게 점령당했다.

바벨론에 저항하는 것은 국익을 위해서가 아니다.

- 오로지 집권을 위해서이다.

- 이스라엘 집권층은 권력 유지를 위해 국가 유지를 포기했다.

 

게다가 이보다 더 끔찍한 문제가 있다.

- 계속해서 의지하는 강대국이 바뀌고, 바뀔 때마다 전쟁이 일어나고, 그로 인해 새로운 왕이 세워질 때마다, 실질적인 피해는 누구에게 돌아갔느냐?

- 집권층은 권력을 잡았을 때나 잃었을 때나 언제나 호화로운 생활을 유지했다.

- 전쟁에 나가지도 않았고, 전쟁을 위한 식량과 무기를 만들지도 않았으며, 강대국에게 조공으로 바칠 특산품을 생산하지도 않았다.

- 궁궐에 누워 호의호식했다.

전쟁에 나가서 싸우다 죽는 사람도,

- 전쟁을 위한 식량과 무기를 만드느라, 농사를 못 지어서 쫄쫄 굶는 사람도,

- 강대국에게 조공을 바칠 특산품을 만드느라 노동력을 착취당한 사람도

- 전부 힘 없는 백성들이었다.

- 친이집트가 되었건, 친바벨론이 되었건, 누가 왕이 되었건 아무 상관 없는 사람들이 쓸모없는 정치 노름의 연료가 되어 타들어 갔다.

집권층은 전쟁의 유익만 뽑아 먹고, 전쟁의 비용은 전부 백성에게 떠넘겼다.

- 그래서 이스라엘의 백성은 완전히 소진되었다.

- 국가가 유지되나 유지되지 않으나 전혀 상관없은 상태가 되었다.

- 이미 국가는 백성을 보호해주기는커녕, 백성을 착취하는 주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 전쟁에서 죽지 않아도 어차피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태이다.

이것이 부패한 지배층으로 인한 이스라엘의 비극적인 실상이다.

 

이러한 참혹함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가 바로 본문의 시드기야 왕이 집권한 시기이다.

[렘 21:1] 시드기야 왕이 말기야의 아들 바스훌과 마아세야의 아들 스바냐 제사장을 예레미야에게 보냈을 때에, 주님께서 그들에게 전할 말씀을 예레미야에게 주셨다.

그때 시드기야는 전쟁에서 이기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렘 21:2] 그 때에 그들이 와서 이렇게 말하였다. “제발 우리가 멸망하지 않도록 주님께 간절히 기도하여 주십시오. 바빌로니아 왕 느부갓네살이 우리를 포위하여 공격하고 있습니다. 행여 주님께서, 예전에 많은 기적을 베푸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기적을 베풀어 주시면, 느부갓네살이 우리에게서 물러갈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쟁의 승리가 아닌 패배를 예고하신다.

[렘 21:4]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한다. 너희는, 지금 성벽을 에워싸고 공격하는 바빌로니아 왕과 갈대아 군대에게 맞서서 싸우려고 무장을 하고 있으나, 내가, 너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전쟁무기를 회수하여, 이 도성 한가운데 모아 놓겠다.

 

왜 하나님은 패배를 예고하셨을까?

이스라엘이 승리하면, 누가 이득을 보고 누가 손해를 볼까?

- 반대로 이스라엘이 패배하면, 누가 이득을 보고 누가 손해를 볼까?

 

나는, 좀 과하지만, 이 상황을 2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의 패망 직전 상황과 같다고 본다.

- 완전히 전세가 기울어 독일이 포위당했을 때, 히틀러가 전쟁에서 이기게 해달라고 기도했다면,

- 하나님은 어떻게 응답하셨을까?

만약 히틀러가 전쟁에서 이긴다면, 세계 대전에 끝나지 않고 계속될 것이다.

- 그러면 무고하게 희생된 유대인의 숫자만 늘어날 것이다.

반면에 전쟁에서 진다면, 히틀러를 비롯하여 독일 군인은 많이 죽겠지만,

- 세계 대전은 끝나고, 유대인 학살도 멈춰질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히틀러에게 어떻게 응답하셔야 할까?

- 전쟁에서 이기도록 하셔서, 세계 대전을 이어가도록 하셔야 할까?

- 그로 인해 유대인 학살이 계속될 것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전쟁에서 지도록 하셔서, 하루 빨리 세계 대전을 끝내셔야 한다.

- 그래야 무고한 사람들의 희생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승리를 구하는 시드기야에게 패배를 예고하셔야만 한다.

- 그것이 하루 빨리 전쟁을 끝내서, 전쟁의 고통에서 많은 사람을 구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 더 이상 전쟁에 나가서 싸우다가 죽지 않아도 되고,

- 전쟁을 위한 식량과 무기를 만드느라, 농사에 소홀하게 되어 굶어 죽지 않아도 되며,

- 강대국에 조공을 바치느라 노동력을 착취당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물론 집권자는 절망에 빠질 것이다.

- 호의호식하며 누리던 생활을 박탈당할 것이다.

- 포로로 끌려가는 동안, 씻지도 못하고, 길에서 먹고 자야 하며, 매일 즐기던 술과 고기 대신에 굶어 죽지 않을 정도의 빈약한 음식으로 연명해야 한다.

- 그들에게 전쟁 패배는 호의호식의 박탈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포로로 끌려가는 것은 구원이다.

- 전쟁터에서 목숨 걸고 싸우는 전투로부터의 구원이고,

- 포로가 되어 바벨론에게 음식을 받아먹으니, 굶어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이며,

- 노동력 착취로부터의 구원이다.

- 전쟁 중에는 굶으면서도 싸워야 했는데,

- 전쟁이 끝나고 포로가 되니까, 싸우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음식을 먹게 되었다.

- 이제 드디어 집권층과 백성이 같은 것을 먹고 같은 곳에서 자게 되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시드기야에게 패배를 예고하신 이유이다.

 

그렇다면 처음 했던 질문을 다시 하겠다.

- 이러한 의미 없고 참혹한 전쟁을 계속하게 해달라고 요청하는 시드기야가 잔인한가?

- 아니면 항복하여 참혹한 전쟁을 빨리 끝내고 포로로 잡혀가라고 명령하는 하나님이 잔인한가?

- 히틀러에게 전쟁의 승리를 기원하는 것과 전쟁을 포기하고 항복하라는 것 중에 무엇이 더 잔인한가?

- 어떻게든 전쟁을 끝내서 무고한 생명의 죽음을 멈추시려는 하나님과 무고한 생명의 죽음은 외면한 채 전쟁의 승리를 주시지 않은 하나님을 무작정 원망하는 우리 중에 누가 더 잔인한가?

- 전쟁을 계속하면, 남아있는 사람조차 전부 다 죽게 될 것이지만,

- 지금이라도 항복하면, 남아있는 사람이라도 살릴 수 있는데 말이다.

지금도 독일에서는 조금이라도 히틀러를 옹호하면 매장당한다.

- 그런데 왜 우리는 잔인했던 이스라엘을 옹호하는가?

- 왜 우리는 잔인했던 이스라엘을 심판하셔서, 무고한 생명을 구하신 하나님을 원망하는가?

 

바로 이러한 무지가 어리석은 인간의 실존이다.

- 제한적인 정보만을 가지고 섣불리 판단하는 어리석음 말이다.

- 열 길 물속도 모르면서 사람 마음을 안다고 착각하는 어리석음 말이다.

과연 섣불리 하나님을 판단하는 어리석은 인간이 구원받아 살아남는 것이 옳다고 할 수 있을까?

- 무지하고 잔인한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선하다고 할 수 있을까?

- 오히려 하나님이 인간을 심판하실 때만 옳고 선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결론 - 우리도 잔인하다.

엄밀하게 말해서, 이스라엘 역사는 우리의 반면교사가 아니다.

- 타산지석 삼아야 할 대상이 아니다.

- '이스라엘은 저렇게 잘못해서 멸망했으니까, 나는 저렇게 하지 말아야지.'

- 혹은 '나는 이스라엘처럼 잘못하지 않았으니까 괜찮겠지.' 

- '나에게 있는 문제 빨리 고쳐서, 이스라엘처럼 멸망하지 말아야지.' 라는 생각하라고 읽는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 역사는 우리의 실존을 비춰주는 거울이다.

- 추악하고 잔인한 이스라엘의 모습을 통해, 이미 우리가 추악하고 잔인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 그래서 이스라엘이 멸망하였듯, 우리의 인생 역시 참혹하게 멸망할 것을 알려주기 위한 것이다.

우리의 인생은 권력 유지를 위해 국가 유지를 포기했던 이스라엘과 완전히 똑같다는 것을 고발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얻기 위해 무엇을 포기하는가?

먼저 이스라엘의 선택을 간단히 살펴보면,

- 권력은 국가를 유지하기 위한 도구이다.

- 권력이 있어야, 방해받지 않고 국가를 주도적으로 이끌어갈 수 있고,

- 그렇게 국가를 바른 길로 이끌 때, 국가는 유지될 수 있다.

- 따라서 권력은 국가 유지를 위한 수단이고, 국가 유지가 국가의 본질적인 목적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권력 유지를 위해 국가 유지를 포기했다.

- 즉, 수단은 본질을 위해 필요한 것인데, 수단을 위해 본질을 훼손했다.

- 그랬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소수 권력층의 집권을 유지하기 위해 다수의 백성이 착취당했고,

- 다수의 백성이 훼손되자, 국가 자체가 훼손되었다.

- 그렇게 국가가 훼손되어, 결국 소수 권력층의 권력도 유지될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이 수단을 위해 본질이 훼손될 때 일어나는 전형적인 패턴이다.

- 수단을 위해 본질이 훼손되면, 결국 수단을 포함하여 모든 것이 파괴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본질과 수단은 무엇인가?

- 세상에서 얻는 부, 명예, 안정, 인정은 삶을 위한 수단이다.

- 이것은 삶에서 상당히 필요하지만, 삶 자체는 아니다.

삶의 본질은 무엇인가?

- 사랑의 관계이다.

- 돈을 버는 이유가 돈 자체가 좋아서인 사람은 아무도 없다.

- 돈이 많을 때,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유가 늘어나기 때문도 있지만,

-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세상에서 돈을 많이 가진 사람을 돈이 많은 것 자체로 선망의 대상, 존경의 대상, 사랑의 대상, 인정하고 존경하는 대상으로 삼는다.

그래서 돈을 벌려고 하는 것이다.

- 많은 돈으로 많은 것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이기보다는,

- 사랑받고, 인정받고, 존중받고, 존경받기 위해서이다.

- 돈, 옷, 집, 차, 머리 스타일, 화장, 몸매, 학벌, 직업 등을 원하는 가장 밑바닥에 있는 이유는 사랑받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본질은 사랑이고, 수단은 옷, 집, 차, 머리 스타일, 화장, 몸매, 학벌, 직업 등이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수단을 위해 본질을 훼손한다.

- 돈을 벌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를 훼손한다.

- 직업에서 더 좋은 성과를 내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시간을 줄이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시간에도 일을 생각한다.

- 좋은 집에서 살기 위해 돈이 필요하고, 필요한 돈을 벌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을 떠난다.

- 그러면서 많은 돈, 좋은 직업, 큰 집이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기 위한 것이라며 자신을 합리화한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기도한다.

- 많은 돈, 좋은 직업, 큰 집 달라고 말이다.

- 저것을 주셔야 사랑하는 사람도 사랑할 수 있고 하나님도 사랑할 수 있다고 말이다.

- 지금 내가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저것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 저것이 생기면, 하나님께 집중할 수 있을 것이라며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돈, 직업, 집을 주시지 않으면, 이렇게 원망한다.

- 내가 사랑하지 못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은 전부 하나님 때문이라고 원망한다.

-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하셔서, 돈, 직업, 집 주셨으면, 사랑하며 알콩달콩 재밌게 살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만약 하나님이 돈, 직업, 집을 주셨으면 어떻게 될까?

- 정말 사랑하며 살 수 있을까?

- 돈이라는 수단을 통해 사랑이라는 본질을 회복하며 살 수 있을까?

만약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승리했다면, 국가가 유지될 수 있었을까?

- 집권층이 더 이상 백성을 수탈하지 않고, 

- 백성을 보호하여, 힘을 키울 수 있도록 하며,

- 그래서 결국 국가 전체의 힘이 강해져, 

- 강대국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국가를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들 수 있었을까?

결코 아니다.

- 이스라엘은 전쟁에서 이긴 후에도, 이전의 권력욕을 여전히 가질 것이다.

- 또 다시 권력 유지를 위해 백성을 착취하여, 국가 유지를 훼손시킬 것이다.

- 즉, 전쟁의 승리는 오히려 무고한 백성의 고통만 더 지속시킬 뿐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패배하여 포로로 끌려가게 하신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돈, 직업, 집을 주신다면, 우리는 그것을 결코 사랑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 많은 돈, 좋은 직업, 큰 집을 지키기 위해 더욱 더 사랑을 외면할 것이다.

- 그래서 우리의 사랑이 절박하게 필요한 사랑하는 사람들이 더욱 고통당할 것이다.

게다가 그 고통은 사랑하는 사람에서 끝나지 않는다.

- 사랑하는 사람들은 고통에 못 이겨 우리를 떠나갈 것이다.

- 여기서 떠나감이란, 실제로 육체적 떠나감일 수도 있고, 몸은 함께 있지만 정서적 떠나감일 수도 있다.

- 따라서 아무리 함께 있어도,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서로에게 아무런 사랑도 느끼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 사랑 없는 고통과 외로움은 고스란히 자신에게 돌아온다.

- 원하는 돈, 직업, 집을 가졌지만, 존재 이유를 잃어버리고,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다.

- 왜냐하면 주변에 사랑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도, 아무런 사랑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 따라서 사랑을 얻기 위해 돈, 직업, 집을 가졌지만, 정작 돈, 직업, 집 때문에 사랑을 전부 잃어버린 것이다.

여러 번 말했지만, 우리 부모 세대가 느끼는 고통이 바로 이것이다.

- 옆에 배우자도 있고 자식도 있지만, 누구에게도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

- 언제나 고립감과 외로움에 사로잡혀 있다.

이것이 수단을 위해 본질을 훼손한 사람의 숙명이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패배, 항복, 포로됨이다.

- 그래서 필요한 것이 실패, 망함, 절망이다.

- 원하는 것을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것이다.

- 망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다.

그래야만 수단을 위해 본질을 훼손하는 행위를 멈출 수 있기 때문이다.

- 망함 말고는 우리의 행위를 멈출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래야 돈을 위해 사랑을 훼손했던 인생에서 돌이켜,

- 사랑을 위해 돈을 사용하는 인생으로 전환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 돈 때문에 소외시켰던 사랑하는 사람에게 다가갈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럴 때만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랑을 통해서 인생의 본질과 참된 가치를 다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멸망하여 돈 있고 힘 있었던 사람들은 모두 포로로 끌려갔다.

- 바벨론은 유용한 사람들을 모두 끌고 갔다.

- 이스라엘 땅에 남은 사람은 쓸모없는 사람뿐이었다.

- 그래서 그들은 전쟁으로 쑥대밭이 된 황량한 땅에서 소소하게 농사지으며 평화롭게 살게 된다.

- 즉, 이스라엘 땅에 진정한 평화가 찾아왔고,

- 이스라엘 땅이 소수 집권층의 손에서 다수의 쓸모없는 사람들의 손으로 돌아갔다.

- 이스라엘 땅이 드디어 진정한 주인에게 되돌아간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명령하신 전쟁 패배가 초래한 결과이다.

 

우리의 인생도 이렇게 되어야 한다.

- 우리가 원하던 것을 모두 잃어야 한다.

- 그렇게 아무런 소망 없는 절망 속에 들어가야 한다.

- 남은 것은 쓸모없는 시간뿐이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쓸모없는 인생은 어떻게 되겠는가?

- 가장 가까운 곳에서 우리를 사랑했던 사람들에게 돌아갈 것이다.

- 우리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행복해서, 우리의 시간을 간절히 기다렸던 사람들이 뛸 듯 기뻐할 것이다.

- 세상에서는 쓸모없다고 버려진 인생이지만,

-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가장 소중한 인생이 될 것이다.

이렇게 우리의 인생이 드디어 진정한 주인에게 되돌아갈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회복이고, 진정한 만족이며, 진정한 행복이고, 진정한 인생이다.

- 이것이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유일한 인생이다.

- 이것이 하나님께서 전쟁 패배를 명령하신 궁극적인 목적이다.

- 그리고 이것이 우리의 의무이자 숙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