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양교회 팟캐스트 양따양>
미양교회에서 했던 설교를 바탕으로 진솔하게 신앙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팟캐스트도 많이 들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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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양을 따르는 어린양
예배 대신 예수님, 설교 대신 성경, 건물 대신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미양교회가 만드는 방송입니다.토끼와 개구리가 진솔하게 신앙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어린양과 같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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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결론부터 짓고 시작하겠다.
- 신앙의 본질은 세상에서 거부당하고, 세상에서의 소유를 전부 상실한 후,
- 결국 마지막으로 목숨까지도 거부당하고 상실하여 죽음에 이르는 것이다.
반대로 말해서, 세상에서 거부당하지 않고 어느 정도 인정받으며,
- 세상에서의 소유가 조금이라도 남아있어서,
- 목숨이 유지되는 한, 신앙의 본질에서 벗어난 것이다.
아주 단명한 근거로, 신앙의 본질을 담고 있다고 성경이 말하는 사람의 인생이 그랬다.
- 예수님, 바울, 베드로가 그렇게 살았다.
- 소유가 없는 것은 당연하고, 명예와 인정도 받지 못했고, 성과와 결실도 보지 못했으며,
- 마지막 남은 목숨도 무참히 짓밟혀 죽었다.
- 그 죽음조차 치욕스러웠다.
우리의 신앙은 그들의 인생에 근거를 두고 있다.
- 따라서 우리의 인생도 그렇게 되어야만 하고(의무),
-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숙명).
- 비록 그것을 원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 마치 원하지 않아도 사람이 죽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거부당하는 것은 당연하다.
- 죽음을 받아들인 사람이 오히려 지혜롭게 바른 삶을 살 수 있듯, 죽음을 받아들인 그리스도인만이 바른 신앙 생활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말을 이렇게 오해한다.
- 신앙을 가지면, 세상의 거부로 인해서 수치스러움, 괴로움, 억울함, 두려움, 화남, 슬픔만 느끼다가 비참하게 죽는 것으로 말이다.
- 내 의도를 그런 것으로 오해하는 것 같다.
왜 그렇게 생각하냐면,
- 그렇게 신앙이 고통스러운 것이라면, 왜 신앙 생활을 하냐는 반문 때문이다.
- 행복해지려고 신앙 생활 하는 것인데, 왜 신앙의 본질이 고통이냐고 반문한다.
- 그렇다면 신앙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 이런 말을 정말 많이 들었다.
이런 반문을 들으면 나야말로 억울하다.
- 나는 신앙이 고통이라고 말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 내가 하지도 않은 말 때문에 틀렸다고 공격받기 때문이다.
이 오해의 원인이 무엇이냐?
- 나는 신앙의 본질을 '세상의 거부'라고 말했지, '고통'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 그런데 상대방은 신앙의 본질을 '고통'이라고 이해했기 때문이다.
- 즉, 듣는 사람의 뇌 속에 '세상의 거부'를 자동으로 '고통'으로 연결하는 회로가 있기 때문이다.
- 세상에서 거부당하면, 무조건 고통스러울 것이라고 단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반문한다.
- 세상의 거부가 정말 고통이냐고 말이다.
단순한 예를 들어보면,
- 만약 혈기 왕성한 청년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성적인 매력을 주지 못해서 배우자로 거부당했다고 해보자.
- 이 청년이 겪은 '세상의 거부'는 말 그대로 외로움이고 '고통'이다.
- 이때는 세상의 거부와 고통이 연결된다.
그러나 만약 혈기 왕성한 청년이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했다고 해보자.
- 그 이후에 배우자를 제외한 세상 모두에게 성적인 대상으로 거부당했다고 한다면?
- 이 청년이 겪은 '세상의 거부' 역시 '고통'일까?
만약 결혼한 청년이 '세상의 거부'를 '고통'으로 느꼈다면,
- 그래서 결혼한 청년이 배우자 외의 다른 사람에게 여전히 성적 대상으로 인정되길 바랐다면,
- 이는 청년이 배우자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된다.
- 즉, '세상의 거부'가 '고통'으로 느껴지는 것 자체가 배우자에 대한 배신이다.
반대로 말해서, 결혼한 청년이 정말로 배우자를 사랑한다면,
- 세상 모두에게 성적인 대상으로 거부당한 것에 대해 아무런 고통을 느끼지 않을 것이고,
- 한 걸음 더 나아가, '세상의 거부'가 있었는지조차 알지 못할 것이다.
- 왜냐하면 청년의 시선은 온통 배우자를 향해 있기 때문이다.
- 그래서 세상의 거부를 느끼지도 못할 것이다.
오히려 세상에서 많이 거부당할수록 배우자는 사랑을 느낀다.
- 그만큼 다른 사람에게 성적인 매력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뜻이고,
- 또한 그만큼 다른 사람에게 성적 매력을 느끼지 않았다는 뜻이며,
- 이는 그만큼 배우자를 사랑한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배우자는 안정감 속에서 더 굳건한 신뢰가 쌓인다.
- 결혼 관계가 더 깊어진다.
이렇게 배우자를 사랑한다는 것은 자발적으로 세상 모두에게 성적 대상으로 거부당한다는 뜻이다.
- 세상 모두에게 성적 대상이기를 포기한다는 뜻이다.
- 그러나 만약 세상이 포기되지 않는다면, 결혼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
- 사랑하지 않는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 사랑하지 않는 결혼은 하는 것보다 하지 않는 것이 더 유익이다.
- 사랑하지 않는 결혼은 자신과 배우자 모두에게 상처를 주기 때문이다.
세상도 이 사실을 안다.
- 배우자를 선택한다는 것은 배우자 외의 모든 사람을 포기한다는 뜻이라는 것을 말이다.
- 법도 이것을 지지한다.
- 그래서 외도를 하면 책임을 묻는다.
그렇다면 배우자를 위해 세상 모든 사람에게 거부당하는 것이 손해인가?
- 이것이 1(배우자)을 얻기 위해 70억(세상)을 잃는 선택인가?
- 아니면 무한대(배우자)를 얻고 아무것도(세상) 잃지 않는 선택인가?
- 후자이기 때문에 결혼하는 것이다.
물론 때때로 사랑해서 결혼했어도 전자와 같이 손해라고 생각할 때가 있다.
- 부부 싸움할 때 그렇다.
- 그런데 그때 손해라는 생각이 일시적인 착각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백년해로하고,
- 그 손해가 지속적으로 느껴지는 사람은 결국 헤어진다.
이런 관점에서 세상의 거부는 '고통'이기는 커녕, 아무것도 잃은 것 없이 무한대를 얻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 베드로, 바울의 삶이었다.
- 우리가 보기에 그들의 삶은 손해, 상실, 거부의 연속이었다.
-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고, 머리 둘 곳 없어서 불안정하고 고통스러운 삶이었다.
하지만 과연 그들도 그렇게 생각했을까?
- 만약 그랬다면, 일시적으로 그렇게 살 수 있었겠지만, 지속할 수 없었을 것이다.
- 중도에 포기했을 것이다.
그들은 자기의 삶이 손해, 상실, 거부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 물론 그들은 세상에서 손해, 상실, 거부를 당했지만, 그것을 잃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 마치 결혼을 잃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 실제로는 결혼해서 잃는 것이 많다.
- 하지만 결혼을 손해, 상실, 거부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헤어지는 것은 시간 문제이다.
오히려 그들은 유익, 획득, 인정이라고 생각했다.
- 하나님께 인정을 받아, 하나님의 사랑을 얻어서, 하나님처럼 되는 영광에 이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 세상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는 기쁨과 만족을 자신은 누리고 있다고 느꼈다.
- 무한대를 얻고 아무것도 잃지 않았다고 느꼈다.
그 기쁨 때문에 평생 신앙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 그 기쁨 때문에 비극적인 죽음 앞에서도 만족할 수 있었다.
- 물론 때때로 신앙 생활을 손해라고 생각하며 고통스러울 때도 있었다.
- 마치 결혼 생활이 그런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일시적인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 다시 돌이켜서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했고, 다시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했다.
- 보통의 결혼 생활이 그런 것처럼 말이다.
이 말을 하는 이유는 세 가지 때문이다.
첫째로, 신앙 생활에서 세상의 거부는 필연이다.
- 특별히 헌신 된 베드로나 바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 신앙 자체에 세상의 거부가 포함되어 있다.
- 마치 결혼 자체에 세상의 거부가 포함되어 있는 것처럼 말이다.
- 반대로 세상에서 여전히 성적 대상으로 인정받길 원한다면, 결혼 생활이 불가능한 것처럼,
- 세상에서 인정받기를 원한다면, 신앙 생활은 불가능하다.
둘째로, 세상의 거부는 결코 고통이 아니라는 점이다.
- 고통이라 느끼는 것은 일시적 착각이다.
- 오히려 세상의 거부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 표현이다.
- 하나님은 세상에서 거부당하는 우리를 보시며 기뻐하신다.
- 우리를 더 깊게 신뢰하며, 우리를 통해 안정감을 느끼신다.
셋째로, 거부가 사랑이라는 역설적인 작동 방식이 사실상 일상적이라는 점이다.
- 결혼 생활에서 반복해서 경험하는 것이다.
- 꼬리치는 사람에게 철벽을 쳐서 오히려 거부당하며 손해 보는 배우자의 모습을 보면, 속상한 마음과 더불어 사랑을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 세상에서 성적 대상으로 거부당하는 것이 결혼 생활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처럼 말이다.
그런 관점에서 세상의 거부는 고통이 아니다.
- 오히려 사랑이다.
- 그리고 사랑을 통한 기쁨의 충족이다.
예레미야도 마찬가지이다.
세상의 거부를 당한다.
- 그 이야기는 14장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예레미야도 처음부터 세상을 포기하여 세상의 거부를 당한 것은 아니다.
- 그도 세상, 즉 이스라엘에 속하여, 이스라엘을 사랑했다.
14~16장에서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구원을 하나님께 구한다.
-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죄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 위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 그래서 예언자였던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회개하며, 용서를 구한다.
[렘 14:7~9] “주님, 비록 우리의 죄악이 우리를 고발하더라도, 주님의 이름을 생각하셔서 선처해 주십시오. 우리는 수없이 반역해서, 주님께 죄를 지었습니다. ・・・・ (9) ・・・・ 주님, 그래도 주님은 우리들 한가운데에 계시고, 우리는 주님의 이름으로 불리는 백성이 아닙니까? 우리를 그냥 버려 두지 마십시오.”
[렘 14:20~21] 주님, 우리는 우리의 사악함과 우리 조상의 죄악을 인정합니다. 우리는 주님께 죄를 지었습니다. (21) 그러나 주님의 이름을 생각하셔서라도 우리를 박대하지 마시고, 주님의 영광스러운 보좌가 욕되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주님께서 우리와 맺은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 언약을 깨뜨리지 말아 주십시오.
그러나 하나님은 단호하게 거절하신다.
- 예레미야의 부탁을 거절하시는 것을 넘어서,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기도조차 하지 말라고 명령하신다.
[렘 14:11~12] 주님께서 또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 백성에게 은총을 베풀어 달라고 나에게 기도하지 말아라. (12) 그들이 금식을 하여도, 나는 그들의 호소를 들어주지 않겠다. 또 그들이 번제물과 곡식제물을 바쳐도, 나는 그것을 받지 않겠다. 나는 오히려 칼과 기근과 염병으로 그들을 전멸시켜 버리겠다.”
[렘 15:1] 그 때에 주님께서는 나에게 말씀하셨다. “비록 모세와 사무엘이 내 앞에 나와 빈다고 해도, 내가 이 백성에게 마음을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이 백성을 내 앞에서 쫓아내라!
왜 그러셨느냐?
- 이스라엘이 회복 가능한 상태를 넘어, 회복 불가능한 상태까지 이르렀기 때문이다.
- 그래서 완전히 멸망시킨 후 회복시키는 것만이 이스라엘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렘 16:10~13] 그러나 네가 이 백성에게 이 모든 말을 전달하면, 그들이 너에게 묻기를 ‘무엇 때문에 주님께서 이토록 무서운 재앙을 모두 우리에게 선포하시는가? 우리가 주 우리의 하나님께 무슨 죄를 짓고, 무슨 잘못을 저질렀단 말인가?’ 하고 물을 것이다. (11) 그러면 너는 이렇게 대답하여라. ‘나 주의 말이다. 너희 조상이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쫓아가서, 그들을 섬기며 경배하였다. 너희 조상이 나를 버리고 내 율법을 지키지 않았다. (12) 그런데 너희는 너희 조상들보다도 더 악한 일을 하였다. 너희는 각자 자신의 악한 마음에서 나오는 고집대로 살아가며, 내 명령을 따라 순종하지 않았다. (13) 그러므로 내가 너희를 이 땅에서 쫓아내어, 너희가 알지 못하는 땅, 너희 조상도 알지 못하던 땅에 이르게 하겠다. 그러면 너희가 거기에서, 낮이나 밤이나 다른 신들을 섬길 것이며, 나는 너희에게 다시는 긍휼을 베풀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죄와 그에 따른 멸망을 확정 짓는 것이 14~16장의 메시지이다.
예레미야는 이러한 하나님의 태도에 괴로워한다.
-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겠다는 하나님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 급기야는 하나님께 분노를 표출하기까지 한다.
[렘 14:19] 주님은 유다를 완전히 내버리셨습니까? 아니면 주님께서 진정으로 시온을 미워하십니까? 어찌하여 주님께서는, 우리가 낫지도 못하게 이렇게 심하게 치셨습니까? 우리가 기다린 것은 평화였습니다. 그런데 좋은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 상처가 낫기만을 기다렸는데, 오히려 무서운 일만 당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레미야는 이렇게까지 이스라엘의 구원을 요청하냐?
- 도대체 이스라엘이 예레미야에게 어떤 의미길래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기까지 하냐?
- 예레미야가 이스라엘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했기 때문이다.
- 물론 입으로는 하나님을 더 사랑한다고 말했지만 말이다.
풀어 말하면, 이스라엘은 예레미야에게 육체적, 정신적, 영적 지지 기반이었다.
- 이스라엘은 예레미야의 존재를 떠받치고 있었다.
- 그런 예레미야에게 이스라엘의 멸망은 사망 선고와 마찬가지였다.
-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화까지 내면서 하나님을 거역한 것이다.
- 즉, 예레미야는 하나님보다 이스라엘을 더 의지했고,
- 하나님보다 이스라엘을 그리고 하나님보다 자기 자신을 더 사랑했다.
하나님은 사망 선고를 듣고 괴로워하는 예레미야를 불쌍히 여기신다.
- 그래서 어떤 상황에서도 예레미야를 구원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 즉, 예레미야의 존재 기반인 이스라엘이 멸망해도 예레미야는 살아남을 것이라는 약속이다.
[렘 15:20~21] 내가 너를 튼튼한 놋쇠 성벽으로 만들어서 이 백성과 맞서게 하겠다. 그들이 너에게 맞서서 덤벼들겠지만, 너를 이기지는 못할 것이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어서, 너를 도와주고, 너를 구원하여 주겠다. 나 주의 말이다. (21) 내가 너를 악인들의 손에서도 건져내고, 잔악한 사람들의 손에서도 구하여 내겠다.”
그런데 이 약속이 듣기에는 좋지만, 실상은 굉장히 무서운 약속이다.
- 비유로 말하면, 아직 미성년자여서 부모의 도움이 필요한 아이의 부모가 죽을 위기에 처했다.
- 그래서 아이가 하나님께 부모를 살려달라고 기도하니,
- 하나님이 응답하시길, '아니야. 너희 부모는 죽을 거야. 너는 혼자 남겨질 거야. 세상에서 버려질 거야.
- 하지만 걱정하지 마. 내가 너와 함께할게. 내가 널 지켜줄게.'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과연 이것이 기쁜 소식일까, 슬픈 소식일까?
- 세상의 관점에서는 슬픈 소식이고,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기쁜 소식이다.
- 과연 누가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을 듣고 기뻐할 수 있겠는가.
- 하지만 신앙은 이 약속을 듣고 기뻐하는 것이다.
- 세상의 관점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관점을 갖는 것이다.
어쨌든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설득된다.
- 하나님의 약속을 듣고 기뻐하였고,
- 또한 멸망할 수밖에 없는 이스라엘의 죄를 깨닫게 된다.
즉, 예레미야가 사랑하고 의지해야 할 대상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 후에 비로소 예레미야는 17~20장에서 하나님과 한 마음으로 이스라엘 멸망을 선포한다.
- 그것이 바로 두 번의 토기 예언이다.
- 첫 번째 예언은 이스라엘의 회복 가능성에 대한 것이다.
- 이스라엘이 불순종하여 멸망이 예고되었지만, 돌이키면 멸망 예고를 거둘 수 있다는 예언이다.
- 두 번째 예언은 이스라엘의 회복 불가능성에 대한 것이다.
- 이제는 더 이상 이스라엘에게 회복 가능성이 없으니, 돌이킬 수 없는 멸망만이 남아있다는 예언이다.
이렇게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완전한 멸망 예언을 선포한다.
그런데 그 결과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에게 거부당하고 투옥된다.
- 이는 당연한 결과이다.
- 마치 일제 강점기에 조선은 일본에 의해 멸망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을 친일파, 매국놈이라고 비난하는 것이 마땅한 것처럼 말이다.
- 예레미야는 이스라엘 입장에서 민족 반역자였다.
이렇게 예레미야가 이스라엘에게 거부당하는 것이 14장에서 지난 본문까지의 이야기였다.
이를 정리하면, 예레미야는 총 두 번의 거부를 당한다.
- 첫째로, 먼저 자기 자신에게 거부당하고,
- 둘째로, 자신의 지지 기반인 이스라엘에게 거부당한다.
첫째로, 자기 자신에게 거부당했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면,
- 예레미야에게는 처음에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과 '이스라엘을 의지하는 마음'이 함께 있었다.
- 문제없이 공존했던 두 마음이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고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충돌한다.
- 이스라엘을 의지하는 마음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을 거부하여, 이스라엘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을 거부한다.
만약 두 마음 중에 하나만 있었다면 이런 갈등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만 있었다면, 갈등 없이 하나님을 따랐을 것이고,
- 이스라엘을 의지하는 마음만 있었다면, 갈등 없이 하나님을 거부했을 것이다.
하지만 예레미야에게는 하나님께 인정받고 싶은 마음과 이스라엘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함께 있었다.
- 그래서 이스라엘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에 하나님을 거부하고,
- 동시에 하나님께 인정받고 싶은 마음에 하나님의 뜻을 바꿔 달라고 간청한다.
- 이 두 마음이 충돌하여, 하나님의 뜻을 바꿔 달라며 하나님께 분노하는 기도가 나온 것이다.
이렇게 예레미야는 자기 자신에게 거부당하는 경험을 한다.
- 정확하게 말하면, 세상의 속한 자신에 의해 하나님께 속한 자신을 거부하려 하지만,
- 결국 하나님께 속한 자신에 의해 세상에 속한 자신이 거부당한다.
- 이 갈등과 거부로 예레미야는 고통스러워한다.
그런데 이 고통스러운 경험을 통해서 예레미야는 자신을 이해하게 된다.
- 자신이 하나님이 아닌 이스라엘을 지지 기반 삼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 이스라엘의 구원 요청이 예언자로서의 순수한 사명 때문이 아니라,
- 하나님이 아닌 사람을 의지하는 불순한 마음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께 회개한다.
이를 통해 예레미야는 이전보다 더욱 하나님만 의지할 수 있게 되었다.
- 이전에 이스라엘을 의지할 때는 이스라엘이 죄를 범해 흔들릴 때마다 예레미야도 흔들렸다.
- 이스라엘과 함께 자신도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다.
- 마치 우리가 돈을 의지할 때 물가에 따라, 집값에 따라, 주가에 따라, 환율에 따라 기쁨과 슬픔을 오가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흔들리지 않고 신실하신 하나님만 의지하니,
- 어떤 상황에서도,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세상이 흔들려도, 하나님이 함께하셔서 지켜주신다는 약속 믿고 안정되고 평안할 수 있게 되었다.
- 흔들리지 않고 확고한 자기 자신을 얻게 되었다.
이것이 거부당하는 경험만이 줄 수 있는 유익이다.
-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이다.
- 또한 그것은 진정한 정체성 확립이다.
둘째로,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에게 거부당한다.
- 본문은 거부당하는 예레미야의 심정을 자세히 묘사한다.
예레미야는 '수많은 사람'에게 그리고 '나와 친하던 사람들'에게 거부당한다.
[렘 20:10] 수많은 사람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나는 들었습니다. ‘예레미야가 겁에 질려 있다. 너희는 그를 고발하여라. 우리도 그를 고발하겠다’ 합니다. 나와 친하던 사람들도 모두 내가 넘어지기만을 기다립니다. ‘혹시 그가 실수를 하기라도 하면, 우리가 그를 덮치고 그에게 보복을 하자’ 합니다.
이렇게 예레미야는 불특정 다수와 특별히 가까운 소수에게 거부당한다.
왜 거부당하냐?
- 그들에게 폭력을 고발하고 파멸을 외쳤기 때문이다.
[렘 20:8] 내가 입을 열어 말을 할 때마다 ‘폭력’을 고발하고 ‘파멸’을 외치니, 주님의 말씀 때문에, 나는 날마다 치욕과 모욕거리가 됩니다.
망하라고 저주하는 사람이 거부당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왜 파멸을 외쳤냐?
- 과연 이스라엘에게 그렇게 볼 만한 문제가 있었냐?
- 세상의 관점에서는 없었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있었다.
이것이 예레미야가 세상의 거부를 당한 이유의 핵심이다.
- 만약 세상과 하나님의 평가가 일치했다면, 예레미야는 거부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 세상의 관점에서도 이스라엘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예레미야의 멸망 선포를 이스라엘은 인정했을 것이다.
- 그러나 세상과 하나님의 평가가 달랐고, 세상은 하나님의 평가를 거부했다.
- 그 문제의 불똥이 예레미야에게 튄 것이다.
아마도 이스라엘은 억울했을 것이다.
- 자신이 한 일에는 악한 것이 없었다고 생각했다.
- 있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것이기에, 충분히 용납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 예를 들어, 인신 제사를 한 것도, 자기 혼자 잘 먹고 잘살자는 것이 아니라,
-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두루두루 풍요롭게 살자고 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 마치 돈 벌기 위해 늦게 퇴근하여 자녀와 함께 보낼 시간이 없는 부모가 이는 어쩔 수 없는 것이라며 문제 삼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엄격하게 정죄했다.
- 엄밀하게 말해서, 단순히 인신 제사를 했기 때문이 아니다.
- 또한 사람의 목숨을 희생한 만큼 풍요를 중시했기 때문도 아니다.
- 바로 존재의 지지 기반을 하나님이 아닌 자기 자신에 두었기 때문이다.
- 그래서 자기 스스로 풍요를 만들어 내려고 했기 때문이다.
- 그래서 사람의 목숨을 포기할 만큼 풍요에 강한 열정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 열정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열정'을 느꼈다.
- 하나님 자신에게서 벗어나고자 하는 인간의 한 없는 열정을 느꼈다.
- 마치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을 때와 같은 열정을 말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려 한 이유이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거부 때문에 굉장히 괴로워했다.
- 그래서 7~10절에서 하나님께 구구절절 하소연한다.
- 마치 이 괴로움이 전부 하나님 때문이라고 원망하는 것처럼 들리기까지 한다.
- 고통의 원인이 하나님께 속았고, 하나님께 졌고, 하나님께 어쩔 수 없이 항복했기 때문이라는 뜻으로 들린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거부해보려고까지 했지만, 그조차 할 수 없었다.
[렘 20:9] ‘이제는 주님을 말하지 않겠다. 다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외치지 않겠다’ 하고 결심하여 보지만, 그 때마다, 주님의 말씀이 나의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뼛속에까지 타들어 가니, 나는 견디다 못해 그만 항복하고 맙니다.
- 왜냐하면 예레미야가 이미 하나님의 의로움과 세상의 불의함에 깊이 설득되었기 때문이다.
- 본인조차 거부할 수 없을 만큼 말이다.
그랬기 때문에 원망 끝에 하나님의 의로움을 고백한다.
- 의지할 대상이 하나님밖에 없음을 스스로 인정한다.
[렘 20:11~12] 그러나 주님, 주님은 내 옆에 계시는 힘센 용사이십니다. ・・・・ (12) 만군의 주님, 주님은 의로운 사람을 시험하시고, 생각과 마음을 감찰하시는 분이십니다. ・・・・
이것이 예레미야가 처한 현실이다.
- 하나님께 인정을 받고자 하니, 세상의 거부가 두렵고,
- 세상의 인정을 받고자 하니, 하나님을 거부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자 세상의 멸망을 선포하니,
- 세상의 거부로 괴로움에 휩싸이고,
- 그 괴로움에 하나님을 원망하며 기도하면,
- 하나님은 보호하심의 약속을 되새겨주셔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평안하게 하시고,
- 그 사랑과 평안함 속에서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자 또 다시 세상의 멸망을 선포하고,
- 또 다시 괴로워하고, 또 다시 하나님께 나아가고, 또 다시 회복되어, 또 다시 세상의 멸망을 선포하는 것.
이것이 예레미야의 숙명이며,
- 예레미야가 받은 하나님의 인정이고,
- 예레미야가 당한 세상의 거부이며,
- 예레미야가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어가는 과정이고,
- 예레미야가 세상과 거래 관계를 끊어가는 과정이며,
- 예레미야가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이고,
- 예레미야가 지옥에서 벗어나 천국으로 옮겨가는 과정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의 숙명이다.
- 신앙 생활의 본질이다.
그래서 마지막 14~18절에서 예레미야가 애가를 지어 부르는 것이다.
-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갈등하는 괴로움을 담은 노래이다.
[렘 20:17~18] 내가 모태에서 죽어, 어머니가 나의 무덤이 되었어야 했는데, 내가 영원히 모태 속에 있었어야 했는데. (18) 어찌하여 이 몸이 모태에서 나와서, 이처럼 고난과 고통을 겪고, 나의 생애를 마치는 날까지 이러한 수모를 받는가!
- 세상에서 거부당하면서도 세상을 떠날 수 없기 때문이고,
- 세상에 머무르면서도 세상에서 인정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 자신을 거부하는 세상에서 해야 할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명이 있기 때문이다.
- 그 사명에 충성하면, 세상의 거부가 더욱 극명하게 드러날 테지만,
- 그 사명에 충성할 때만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 그 사명을 통해서만 하나님과 사랑이 깊어지고, 그를 통해 자신을 사랑할 수 있게 되며,
- 그래야만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여,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과정 전체가 이미 젖어있는 거래 사고 방식에서 사랑의 사고 방식으로 변환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결론 - 고통을 감수하여 사랑하자.
누군가 신앙의 본질이 기쁨이냐고 묻는다면?
- 아니다. 고통이다. 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신앙의 본질이 고통이냐고 묻는다면?
- 역시, 아니다. 기쁨이다. 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래서 왜 한 입으로 두말 하냐고 묻는다면?
- 인생이 그렇지 않냐. 라고 대답할 것이다.
누구도 고통 없는 인생을 생각할 수 없듯이, 기쁨 없는 인생도 생각할 수 없다.
- 인생의 가치는 기쁨이나 고통으로 측정되지 않는다.
- 인생은 그 자체로 가치 있다.
- 단, 인생의 가치를 알고 사는 사람과 모르고 사는 사람의 차이만 있다.
인생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은 언제나 만족하지 못한다.
- 기쁠 때는 기쁨이 사라질까 봐 불안해하고,
- 고통스러울 때는 고통이 사라지지 않을까 봐 불안해한다.
- 풍요로울 때는 풍요가 사라질까 봐 불안해하고,
- 소박할 때는 소박함이 사라지지 않을까 봐 불안해한다.
- 이들은 언제나 불안에 떨며, 인생의 가치를 누리지 못한다.
반대로 인생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언제나 만족한다.
- 기쁠 때도 고통스러울 때도 만족한다.
- 풍요로울 때도 소박할 때도 만족한다.
- 언제나 만족하며, 인생의 가치를 누린다.
- 희로애락이 함께 있는 영화만을 재밌다고 느끼듯이,
- 인생에 있는 모든 상황과 감정을 그 자체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누리고 즐긴다.
인생은 매 순간의 삶 전체에 가치를 둘 때만 본래 가치를 되찾는다.
- 만약 인생의 일부가 더 나은 인생의 수단으로 전락할 때, 인생 전체는 가치를 잃는다.
신앙도 마찬가지이다.
- 신앙의 가치도 기쁨이나 고통으로 측정되지 않고, 그 자체로 가치 있다.
- 신앙 생활에는 희로애락이 있다.
- 세상의 거부로 인한 고통이 있고 하나님의 인정으로 인한 기쁨이 있다.
그러나 고통은 나쁜 것이고, 기쁨은 좋은 것이 아니다.
- 다 그 자체로 가치와 의미가 있다.
만약 고통은 나쁜 것이니 부정하고 벗어나야 한다면,
- 고통스러운 신앙 생활만 부정되는 것이 아니라, 신앙 생활 전체가 부정된다.
- 신앙의 일부가 더 나은 신앙의 수단으로 전락할 때, 신앙 전체는 가치를 잃기 때문이다.
- 고통스러운 신앙 생활도 그 자체로 만족스러운 것이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냐면,
- 고통이 나쁜 것이라는 판단이 신앙 생활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 인생이 고통을 감수하는 과정을 통해 인생의 가치를 되찾듯,
- 신앙도 고통을 감수하는 과정이 필요한데 말이다.
- 고통을 회피하는 인생은 결국 인생 자체를 잃어버리듯,
- 고통을 회피하는 신앙 역시 신앙에서 벗어나게 하는데 말이다.
- 왜 유독 신앙에서는 고통 회피가 용납되는가.
신앙은 한 마디로 '사랑'이다.
- 거래 가치관에서 사랑 가치관으로의 변환이다.
- 그래서 하나님과 사람을 이용하고 거래하던 삶에서 사랑하고 희생하는 삶으로의 변환이다.
그런데 거래가 나쁘고 사랑이 좋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 이것을 거부하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
문제는 거래에서 사랑으로 변환되는 과정에 있는 고통을 감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 예를 들어, 부자 청년이 전 재산을 팔고 예수님을 따라서,
- 거래에서 사랑으로 변환되었을 때 느낄 자유와 기쁨이 얼마나 클지 모르는 사람은 없다.
- 문제는 전 재산을 파는 과정에서 느끼는 고통을 감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사람은 신앙의 고통을 감수하지 못하냐?
- 단지 고통스럽기 때문은 아니다.
- 일상에서는 빈번히 고통을 감수한다.
- 돈을 벌기 위해 노동의 고통을 감수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기 위해 요리하는 고통을 감수하며, 여행을 하기 위해 이동하는 고통을 감수한다.
- 고통을 감수하는 이유는 고통의 대가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 그보다 고통스러운 노동 행위, 요리 행위, 이동 행위 자체에 가치를 두기 때문이다.
- 고통스러운 행위 자체도 나름 기쁨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독 신앙에서는 고통을 감수하지 못하는 이유는 신앙의 고통을 가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왜냐하면 신앙의 목적이 고통의 회피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그래서 신앙 생활에서 고통이 오면, 신앙에서 벗어났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 고통을 감수하지 못하고 회피하려는 것이다.
예를 들어,
-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해서는 인생 전체를 포기하는 고통을 감수하고 매진했으면서,
- 바른 신앙을 얻기 위해서는 직장을 포기하는 고통을 감수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 오히려 직장에서 해고되면, 하나님이 벌주셨다고 생각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계속해서 세상의 거부와 그로 인한 고통을 말하는 것이다.
- 신앙에서의 고통은 그 자체로 가치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이다.
- 신앙에서의 고통은 극복하거나 회피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 고통과 세상의 거부가 신앙 생활 그 자체라는 것이다.
- 신앙으로 인한 고통 그 자체로 가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인식의 변환에서만 바른 신앙 생활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 그래야만 고통을 감수할 수 있고,
- 고통을 감수할 때만 온전히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럴 때만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사람과의 관계 회복이 가능하고,
- 특히 자신과 관계를 회복하여, 나다운 나, 인간다운 인간, 인생다운 인생으로 살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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