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양교회 팟캐스트 양따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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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양을 따르는 어린양
예배 대신 예수님, 설교 대신 성경, 건물 대신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미양교회가 만드는 방송입니다.토끼와 개구리가 진솔하게 신앙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어린양과 같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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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토기장이 비유이다.
- 해석의 열쇠는 첫 번째 토기장이 비유와 차이점을 구분하고,
- 왜 그런 차이가 생겼는지 그 이유를 아는 것이다.
그 이유를 알 때만,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비유의 해석 방향을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고,
- 그래야 비유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바르게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본문을 있는 그대로 해석하면 단순하다.
- 이스라엘이 죄를 범해서 멸망 심판을 받아야 하는데,
- 토기 그릇이 한번 깨지면 다시 원상태로 쓸 수 없듯이, 이스라엘은 '회복 불가능'한 멸망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뜻이다.
[렘 19:11] 그들에게 이렇게 전하여라. ‘만군의 주가 말한다. 토기 그릇은 한번 깨지면 다시 원상태로 쓸 수 없다. 나도 이 백성과 이 도성을 토기 그릇처럼 깨뜨려 버리겠다. 그러면 더 이상 시체를 묻을 자리가 없어서, 사람들이 도벳에까지 시체를 묻을 것이다.
- 즉, 비유의 핵심은 '회복 불가능성'이다.
반면에 첫 번째 토기장이 비유의 핵심은 '회복 가능성'이었다.
[렘 18:7~10] 내가 어떤 민족이나 나라의 뿌리를 뽑아내거나, 그들을 부수거나 멸망시키겠다고 말을 하였더라도, (8) 그 민족이 내가 경고한 죄악에서 돌이키기만 하면 나는 그들에게 내리려고 생각한 재앙을 거둔다. (9) 그러나 내가 어떤 민족이나 나라를 세우고 심겠다고 말을 하였더라도, (10) 그 백성이 나의 말을 순종하지 않고, 내가 보기에 악한 일을 하기만 하면, 나는 그들에게 내리기로 약속한 복을 거둔다.’
- 아무리 죄를 범하고, 그로 인한 심판이 예정되어 있어도,
- 죄에서 돌이키면, 심판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는 뜻이다.
왜 이런 차이를 뒀을까?
- 무엇 때문에 이스라엘은 '회복 가능성'에서 '회복 불가능성'으로 넘어갔을까?
- 이스라엘이 어떤 죄를 지었길래 처음에는 '회복 가능성'에 있었는데, 나중에는 어떤 새로운 죄 때문에 '회복 불가능'이 되었을까?
- 왜 하나님은 어떤 죄는 용서 가능하다고 하시고, 또 어떤 죄는 용서 불가능하다고 하실까?
이 차이를 알아야, 이스라엘이 멸망한 진짜 이유를 알 수 있고,
- 그래야 하나님이 용서할 수 있는 죄와 없는 죄를 나누는 기준을 알 수 있으며,
- 그래야 하나님이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죄가 무엇인지 알 수 있고,
- 그래야 우리는 이스라엘과 달리 회복 불가능의 멸망 심판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죄를 짓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돌이킬 수 없는 죄까지 범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강조해서 말하는데, 하나님은 하나님이라고 해서 아무렇게나 행동하시는 분이 아니다.
- 하나님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분이지만, 아무거나 하는 분은 아니다.
- 기준도 없이, 마음에 안 들면 아무나 심판하고, 마음에 들면 아무나 회복시키는 분이 아니다.
- 심판의 기준을 정하는 것에 있어서도, 하나님이 아무렇게나 결정하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일관된 기준으로 일관성 있게 심판하시며,
- 심판의 기준 역시 공평하게, 모든 사람에게 유익이 되도록, 납득할 수 있게 정하신다.
그런 관점에서 하나님은 '민주주의적'이다.
물론 하나님은 혼자 심판의 기준을 결정하셨다.
- 하지만 사람이 하나님의 판단을 제대로 알기만 하면, 누구도 그 판단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도록 합리적으로 하셨다.
-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 기준을 제대로 알면, 하나님이 그런 기준으로 판단하신다는 것을 오히려 감사하게 될 것이다.
- 그만큼 하나님의 심판 기준은 바르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심판의 기준을 성실하고 친절하게 설명하신다.
- 그 기준이 얼마나 중요하고 유익한지 인류가 이해할 때까지 설득하신다.
- 그 기준이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주체할 수 없는 사랑 때문에 세워졌다는 것을 이해시키신다.
그러한 행위의 대표적인 사건이 예수님의 성육신이다.
-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을 비롯하여 대부분 사람들은 율법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 율법의 행위에만 집중하는 율법주의에 빠져 있었다.
- 그것이 율법의 본질이고, 그런 행위를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착각했다.
-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율법의 진정한 의미를 설명하시기 위해 직접 내려오셨다.
- 구약에서는 선지자를 통해 간접적으로 설명하셨지만, 신약에서는 하나님이 직접 설명하신다.
게다가 율법을 지킨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 예를 직접 보여주셨다.
- 그것이 바로 십자가 죽음이다.
- 예수님은 죽음을 감수하며 인류를 사랑하는 것을 통해 율법의 참 의미를 보여주셨다.
- 율법은 행위 안에 '죽음을 감수하는 사랑'이 담겨있을 때만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따라서 율법의 참 의미는 죽음을 감수하는 사랑이며,
- 우리도 율법을 따라 죽기까지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
본문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멸망하시는 기준 역시 여기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통해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는데,
-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지 않고 '사용'했다.
- 사람뿐만 아니라 하나님조차 자신의 유익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했다.
- 그리고 다 쓴 후에 더 이상 유익을 뽑아낼 수 없으면, 가차 없이 버리고 새로운 대상을 찾았다.
- 이것 때문에 이스라엘이 우상 숭배를 한 것이다.
물론 이스라엘은 율법을 지켰다.
- 성전 제사를 말씀대로 행했으며, 십계명을 비롯하여 많은 율법을 지켰다.
- 단, 행위로만 지켰다. 사랑은 없었다.
이들의 마음은 언제나 유익뿐이었다.
- 율법조차 유익을 얻기 위한 수단이었다.
- 마치 운동 선수가 좋은 성과를 내기 위해 루틴을 지키는 것처럼,
- 시합 전에 가슴에 성호를 긋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율법의 참 의미는 사라졌다.
- 율법의 참 의미는 죽음을 감수하는 사랑이지만,
- 이스라엘은 율법을 거래의 수단으로 삼았다.
- 다른 사람을 물질적, 정신적, 영적으로 수탈하여 자신의 유익을 채우는 도구로 율법을 사용했다.
- 그래서 바리새인은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복을 받은 사람으로 인정받아,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으며, 그 신뢰 자본을 통해 경제적 이익을 얻었다.
- 게다가 그렇게 얻은 권력을 오직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 데 사용했다.
겉보기에 율법은 완벽하게 지켜졌지만, 실상은 율법이 전혀 지켜지지 않았다.
- 그래서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율법을 공격하신 것이고,
- 바리새인은 그러한 예수님을 죽이지 못해 안달 났던 것이다.
- 예수님 때문에 자신들의 권력이 훼손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스라엘이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 첫째로, 하나님과 이스라엘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파괴되었다.
- 이것도 심각한 문제이지만, 둘째 문제가 더 심각하다.
- 둘째로, 이스라엘이 사람을 사랑하지 않고 사용하는 것 때문에 피해자가 생겼다.
- 하나님께서 자신의 목숨보다 더 소중히 여기시는 '죄 없는 사람'이 고통당하게 되었다.
[렘 19:4] 이것은, 그들이 나를 저버리고 이 곳을 남의 나라처럼 만들어 놓고, 그들 자신뿐만 아니라 그들의 조상이나 유다 왕들도 전혀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고, 이 곳을 죄 없는 사람들의 피로 가득 채워 놓았기 때문이다.
'사람 사용'의 대표적인 예가 매춘과 인신 제사이다.
- 성경은 이스라엘의 죄를 매춘에 비유한다.
- 이는 이스라엘이 실제로 매춘을 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 더 큰 상징적 의미가 있다.
- 매춘은 사람을 인격이 아닌 유익의 도구 혹은 쾌락의 도구로 사용하는 가장 직관적인 행태이다.
- 따라서 매춘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단순히 성적인 범죄가 아니라,
- 이스라엘이 사람을 유익의 도구로 사용하는 행태 전체를 정죄하는 것이다.
인신 제사도 똑같다.
- 우상에게 자신이 원하는 유익을 뽑아먹으려면, 원하는 유익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생각을 전제한다.
- 그것을 위해 사람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의 목숨을 지불해야 하는데,
- 자신의 목숨을 지불하는 것은 너무 아까우니, 대신 자녀의 목숨을 지불하는 것이 인신 제사이다.
[렘 19:5] 그리고 그들은 제 자식들을 바알에게 번제물로 불살라 바치려고, 바알의 산당들을 세움으로써, 내가 그들에게 명한 적도 없고, 말한 적도 없는, 내가 상상조차도 하여 본 적이 없는 죄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 따라서 인신 제사가 의미하는 바는, 이스라엘이 사람의 목숨조차 유익의 도구로 사용하는 가장 잔인하고 역겨운 행태이다.
그러니까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의 가장 치명적인 문제는 '사람의 도구화' 혹은 '사람 사용'이다.
- 그것을 본문은 인신 제사로 상징한 것이다.
그렇다면 유익을 위해 사람이 사용되는 상황을 하나님은 어떻게 보실까?
하나님은 죄 없는 사람이 희생되는 상황이 너무 괴로워 견딜 수 없어 하신다.
- 그래서 하나님은 그런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등장하셔서 개입하신다.
- 세 가지 예를 들어보겠다.
첫째로, 노아의 방주 사건이다.
- 우리는 노아의 방주 사건을 하나님이 세상을 전멸하신 심판으로 생각하는데,
- 관점을 달리 볼 필요가 있다.
엄밀하게 보면, '노아를 통한 인류 구원 사건'이다.
- 가만히 놔두면 세상이 사람을 도구화하여 서로가 서로를 죽이고, 결국 전멸하게 되니,
- 마지막 남은 노아 한 명이라도 살려서, 인류 전체를 구원하시려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사건을 다시 보면, 이런 의문이 생긴다.
- 왜 하나님은 노아를 구원하시기 위해 굳이 많은 사람을 죽이셔야만 했는가?
- 사람을 죽이지 않고 노아를 구원하실 수는 없었을까?
답은 없었다는 것인데, 왜냐?
- 만약 사람을 죽이지 않고 놔두셨다면, 그 사람들이 필연적으로 노아를 죽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 그만큼 당시 사람들의 죄악이 심각했기 때문이다.
[창 6:5~8] 주님께서는,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 차고, 마음에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언제나 악한 것뿐임을 보시고서, (6)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 하셨다. (7) 주님께서는 탄식하셨다. “내가 창조한 것이지만, 사람을 이 땅 위에서 쓸어 버리겠다. 사람뿐 아니라, 짐승과 땅 위를 기어다니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렇게 하겠다. 그것들을 만든 것이 후회되는구나.” (8) 그러나 노아만은 주님께 은혜를 입었다.
- 그냥 놔두셨었다면, 인류는 서로가 서로를 죽여서 전멸했을 것이다.
이 결정은 하나님께도 쉽지 않았다.
- 오죽했으면, '하나님도 마음 아파 하셨다'고 했겠는가.
- 인류를 심판하지 않고 놔두면 노아가 죽을 것이고, 노아조차 죽으면 인류가 전멸할 테니,
- 노아를 살리기 위해서는 인류를 죽여야 하는 결정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 그것이 인류 전체를 구원하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하나님은 똑같은 상황을 다시 한번 겪으신다.
-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다.
- 인류를 심판하지 않고 놔두면, 예수님이 죽을 것이고,
- 예수님을 살리려면, 예수님을 죽이려 드는 인류를 죽여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때 하나님은 노아 때와 다른 선택을 하신다.
- 노아 때는 노아를 살리기 위해 인류를 죽이지만,
- 예수님 때는 인류를 살리기 위해 예수님을 죽이신다.
왜 이런 차이가 생겼을까?
- 하나님께는 예수님보다 노아가 더 소중했기 때문이다.
- 풀어 말하면, 하나님은 자기 자신보다 사람을 더 소중히 여기셨다는 뜻이다.
- 왜냐하면 사랑 때문이다.
- 사랑은 언제나 자신보다 상대방을 먼저 생각하기 때문이다.
- 상대방을 위해 자신의 죽음을 감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율법의 온전한 성취이다.
그래서 겉으로 보기에, 하나님은 노아의 때와 예수님의 때에 다른 결정을 하신 것처럼 보인다.
- 노아의 때에는 노아를 위해 인류를 죽였지만,
- 예수님의 때에는 인류를 위해 예수님을 죽였다.
그러나 실상은 다른 두 결정이 한 가지 일관된 원칙을 따른다.
- 그것은 '죽음을 감수하는 사랑'이다.
-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 예수님을 죽여서 인류를 구원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노아의 사건은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 노아에게는 인류 전체의 미래가, 세상 사람에게는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노고가 담겨있었다.
- 왜냐하면 노아는 서로를 거래 도구로 삼아 서로를 죽여서 자멸하는 세상에서 인류를 지킬 유일한 사람이었고,
-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담아 정성스럽게 만든 하나님의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그중에 하나님은 자신의 노고를 포기하고 인류를 선택한다.
- 하나님 작품 전체를 포기하고, 노아 한 사람을 선택한다.
- 이것 역시 '죽음을 감수한 사랑'이다.
이렇게 하나님은 자신의 고통은 참으실 수 있지만, 사람의 고통은 견딜 수 없는 분이시다.
둘째로, 출애굽 사건이다.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에서 구원하신 이유는 생각보다 단순하다.
- 언뜻 보이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해 이루실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이 있고, 그 계획의 일환으로 출애굽이 있었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 출애굽의 이유는 '죄 없이 희생당하는 사람의 부르짖음'이었다.
[출 3:7] 주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나의 백성이 고통받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또 억압 때문에 괴로워서 부르짖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의 고난을 분명히 안다.”
다시 말하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원대한 계획을 이루기 위해 사용된 도구가 아니다.
- 하나님이 인류 전체에게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기 위해 선택된 도구가 아니다.
-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전체 인류 중에 대표 모델이다.
-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대하시는 사랑을 통해 하나님이 인류 전체, 사람 하나하나를, 그리고 나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시는지 보여주신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구원받은 것도 다른 이유가 전혀 없다.
- 오직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 그래서 그들의 고통을 견딜 수 없으셨다.
그 사랑에서 촉발된 열정만이 하나님의 모든 행위를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동기이다.
셋째로,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 사건이다.
- 이 역시 성경이 전하는 대표적인 심판이다.
- 하지만 이 사건도 다른 관점에서 봐야 한다.
- 죄악 된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한 사건이 아니라, 죄 없는 롯을 구원한 사건이다.
소돔과 고모라는 죄악에 빠져있었다.
- 그래서 그들은 천사도, 천사를 지키려는 롯도 자신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려 했다.
- 참고로, 동성애 모티브가 나오는데, 여기에서 비판하는 것은 동성애가 아니다.
- 비판하는 것의 핵심은 사람을 유익을 위한 도구로 삼는 것,
- 그래서 먼저 천사를 요구하고, 그래서 롯은 자신의 딸이라도 '공급'하려 하지만,
- 그렇게 자신의 유익을 방해하는 롯 역시 사람 취급하지 않는 점이다.
그래서 만약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를 가만두셨다면, 죄 없는 롯은 희생당했을 것이다.
- 이 점이 하나님을 가장 괴롭게 하는 것이다.
- 하나님은 사람이 유익을 위한 거래 도구로 사용되는 것에 견딜 수 없이 괴로워하신다.
이 사랑이 동기가 되어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하신 것이다.
- 소돔과 고모라가 너무 큰 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니라,
- 사랑하는 롯이 거래 도구로 사용되는 비극을 막기 위해서이다.
죄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사랑만이 하나님의 유일한 동기이다.
- 죄에 대해 분노하시는 것 역시 사랑하고자 하는 열정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사건의 공통점은 하나님이 견딜 수 없이 괴로워하신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유익을 위한 거래 도구로 사용되는 것을 참지 못하신다.
- 그런 상황에 적극 개입하신다.
오히려 하나님은 자신의 존재가 무시당하는 상황은 참으신다.
- 그래서 첫 번째 토기장이 비유에서는 '회복 가능성'을 말씀하신 것이다.
- 그때 이스라엘이 범한 죄는 하나님 사용에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 단지 우상 숭배이기 때문이다.
[렘 18:15] 그러나 내 백성은 나를 잊어버리고, 헛된 우상들에게 분향을 한다. 옛부터 걸어온 바른길을 벗어나서, 이정표도 없는 길로 들어섰다.
물론 우상 숭배도 하나님은 괴로워하신다.
- 하나님과의 관계 파괴를 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죄에서 돌이켜 우상을 버리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
- 하나님 자신에게 상처 준 사람과는 화해할 수 있다.
-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신의 죽음을 감수하는 사랑으로 사람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 죽음까지 감수하신 분이기 때문에 상처 정도는 충분히 넘어가실 수 있다.
- 사람이 하나님을 죽였어도, 하나님은 용서하고 화해하신다.
그것이 첫 번째 토기장이 비유에서 전하는 '회복 가능성'의 메시지이다.
그런데 '회복 불가능'한 죄가 있다.
- 하나님뿐만 아니라, 사람까지 희생시키는 죄이다.
- 사람을 인격이 아닌, 유익을 위한 거래 도구로 삼는 죄이다.
- 자신에게 유익이 된다면, 그로 인해 다른 사람에게 어떤 피해가 가도 상관없다는 태도이다.
- 유일을 위해 사람을 사용하는 태도이다.
- 그래서 자신의 유익을 위해 다른 사람을 가차 없이 뽑아먹은 후, 필요 없어지면 버리는 태도이다.
그래서 본문은 회복 불가능한 이스라엘의 죄를 인신 제사에 빗대어 설명한 것이다.
[렘 19:4~5] 이것은, 그들이 나를 저버리고 이 곳을 남의 나라처럼 만들어 놓고, 그들 자신뿐만 아니라 그들의 조상이나 유다 왕들도 전혀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고, 이 곳을 죄 없는 사람들의 피로 가득 채워 놓았기 때문이다. (5) 그리고 그들은 제 자식들을 바알에게 번제물로 불살라 바치려고, 바알의 산당들을 세움으로써, 내가 그들에게 명한 적도 없고, 말한 적도 없는, 내가 상상조차도 하여 본 적이 없는 죄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 물론 인신 제사는 우상 숭배를 전제한다.
- 그래서 많은 사람이 이 본문을 우상 숭배에만 초점을 두고 해석했다.
- 인신 제사는 우상 숭배의 심각성을 부각하는 하나의 예로 가정하여 해석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석하면 두 가지 토기장이 비유 사이에 차이가 없어진다.
- 같은 말을 반복한 것이 된다.
- 그래서 잘못된 해석이다.
따라서 이 본문은 단순한 우상 숭배를 넘어 인신 제사까지 하는 이스라엘의 죄를 정죄하는 것이다.
- 단순히 정형화된 인신 제사, 즉 사람을 장작더미 가운데 묶어두고 우상에게 기원하며 불을 피워 죽이는 행태를 정죄하는 것을 넘어서,
-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사람을 도구로 생각하는 사고 방식 전체를 정죄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하나님'을 유익의 도구 삼는 것도 싫어하신다.
- 그것을 우상 숭배를 통해 정죄하셨다.
- 그러나 하나님을 도구 삼는 죄는 용서하신다.
하지만 사람이 '사람'을 도구 삼는 죄는 더 싫어하신다.
- 그것을 우상 숭배 중에 인신 제사로 특정하여 정죄하셨다.
- 하나님은 이 죄를 너무 괴로워서 그냥 두고 보지 못하신다.
- 반드시 심판하신다.
이렇게 인신 제사, 즉 사람을 사용하는 죄는 회복 불가능한 죄라는 것을 강조해서 보여주는 것이 두 가지 토기장이 비유를 통해 전하는 메시지이다.
하나님은 왜 이 두 가지 사이에 차이를 두셨을까?
왜 하나님은 '하나님'을 도구 삼는 것보다 '사람'을 도구 삼는 죄를 더 괴로워하실까?
- 직관적으로 생각하면, '사람'보다 '하나님'을 도구 삼는 죄가 더 큰 것 같은데 말이다.
- 그래서 반대로, '사람'보다 '하나님'을 도구 삼을 때 하나님이 더 분노하실 것 같은데 말이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쉽게 이해되는 예 하나만 들겠다.
- 어떤 사람이 너무 미워서 죽이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과 실제로 어떤 사람을 죽이는 것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냐면,
- 실제로 누군가를 죽이려면, 죽이고 싶다는 생각을 만 번 정도 반복해서, 이 사람을 죽일 수밖에 없다는 마음의 확신이 먼저 들어야 하고,
- 그 확신을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 그 사람의 죽은 모습을 또 만 번 생각하며 계획을 세워야 하고,
- 사전 답사를 하고, 도구를 준비하여, 예행 연습을 하는데 또 죽이는 상황을 만 번 생각해야 하고,
- 사건 당일 계획한 대로 도구를 들고, 사건 장소에 가서, 숨죽이며 기다리는 동안 또 만 번 생각해야 하고,
- 도구를 들고 실제 계획을 실행하는 데까지 또 만 번을 생각해야 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한 번 생각한 것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셀 수 없이 많이 반복해서 생각해야 한다.
- 그래서 형법에서 우발적 범죄와 계획 범죄에 사이에 차이를 둔다.
왜 계획 범죄가 위험하냐면,
- 범죄를 계획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반복해서 생각해야 하고,
- 이는 반복해서 생각할 만큼 살인 동기가 강했다는 뜻이며,
- 또한 반복해서 생각한 만큼 살인 생각을 멈출 기회도 많았다는 뜻인데,
- 그 많은 기회 중에서 살인 생각을 멈출 단 한 번의 절제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아무리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어도, 돌아서서 감정이 가라앉으면,
- 시원하게 욕 한 번 내지르고, 마을을 털어버린다.
- 미운 사람을 죽인다고 변하는 것은 없고, 결국 자기 손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 그런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이 죽이고 싶은 감정을 억제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인까지 이어지는 사람은,
- 그만큼 살인 생각에 '과몰입'되었다는 것이고,
- 그 과몰입 때문에 절제력을 상실한 상태라는 것이다.
그런 상태에 있는 사람은 한 번의 살인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 일상적인 작은 자극에도 언제든 살인을 할 수 있는 뇌의 구조를 가졌다는 것이다.
- 그래서 스스로의 힘으로 살인 동기를 멈출 수 없기 때문에, 외부의 힘으로 살인 동기를 억제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뇌의 구조를 '가치관'이라고 부른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하나님을 유익의 도구로 생각하고, 유익을 달라고 기도하며 제사 드리는 것과,
- 그 제사의 현장에 사람을 데리고 와서 불태워 죽이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 우상 숭배는 마음 속에서만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고 생각한 것과 같다.
- 하나님께 돈, 성공, 인기, 쾌락을 구하며, 하나님을 유익의 도구로 삼아, 하나님을 우상처럼 숭배하는 것은 사람이 쉽게 빠지는 생각이다.
- 왜 쉽게 빠지냐면, 그 생각을 한다고 별다른 문제가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 그래서 마음 안에서 억제력이 발휘되지 않는다.
그러나 인신 제사는 다르다.
- 하나님을 우상처럼 숭배하여, 유익을 얻어내기 위해, 제물로 사람을 데려와서, 장작더미 위에 묶고, 불을 붙이는 데까지는 수만 번의 반복된 생각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 수만 번의 생각을 하는 동안 일관되게 유익을 얻는 것에 과몰입되어야 하고,
- 같은 기간 동안 과몰입을 끊고 절제할 수 있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하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 그런 강력한 의지가 있을 때, 우상 숭배가 인신 제사로 넘어가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강력한 의지도 '가치관'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니까 우상 숭배를 하는 것과 살인을 생각으로만 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 그것은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 현실적인 문제를 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억제력이 발휘되기 쉽지 않다.
하지만 우상 숭배를 넘어 인신 제사를 하는 것, 그리고 살인 생각을 넘어 살인 행위를 하는 것은
- 이전에 이미 살인 충동을 억제할 수 없는 뇌의 구조가 완성되어 있어야 하고,
- 강력한 의지가 동반되어야 한다.
- 이를 다르게 말하면, 사람을 유익의 도구로 사용하는 '가치관'을 이미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 사람은 우연히 한 번 살인을 하고 인신 제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 이미 형성된 가치관에 따라 같은 일을 반복한다는 것이다.
- 그래서 외부의 억제력이 없다면, 사람을 유익의 도구로 삼아 죽이는 일을 더 이상 사람이 남아있지 않을 때까지 반복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상 숭배는 회복 가능하지만, 인신 제사는 회복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본문은 이러한 해석을 더욱 뒷받침한다.
두 가지 토기장이 비유 사이에 어떤 사건이 끼어있는가?
- 이스라엘이 예레미야를 죽일 계획을 모의하는 사건이 나온다.
[렘 18:18] 백성이 나를 두고 이르기를 “이제 예레미야를 죽일 계획을 세우자. 이 사람이 없어도 우리에게는 율법을 가르쳐 줄 제사장이 있고, 지혜를 가르쳐 줄 현자가 있으며, 말씀을 전하여 줄 예언자가 있다. 그러니 어서 우리의 혀로 그를 헐뜯자. 그가 하는 모든 말을 무시하여 버리자” 합니다.
왜 이스라엘은 예레미야를 죽이려 하는가?
- 유익을 위한 도구가 되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는 데 힘을 실어줘야 할 예언자가 오히려 방해꾼이 되었기 때문이다.
- 이스라엘은 우상 숭배를 통해 유익을 얻고 풍요를 누리고 싶은데,
- 예레미야가 유익과 픙요를 포기하고, 우상 숭배로부터 돌이키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이스라엘은 유익을 얻기 위해 예레미야를 죽이려 한다.
- 이는 인신 제사가 갖는 상징적인 의미와 일치한다.
-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도구 삼는 것에서 '사람'을 도구 삼는 것으로 넘어가는 바로 그 시점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회복 가능성에서 회복 불가능성으로 전환하신 것이다.
- 첫 번째 토기장이 비유에서는 우상 숭배를 포기하기만 하면 언제든 용서할 수 있었다.
- 하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뿐만 아니라 사람까지 도구 삼아, 예레미야를 죽이려 했다.
이는 이스라엘이 유익에 '과몰입' 되어있다는 것을 드러내고,
- 그것은 이미 이스라엘에게 '가치관'이 형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 그런 존재는 스스로의 힘으로 살인 행위를 억제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방증하며,
- 그런 상태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여 멸망을 맛봐야만,
- 그래서 하나님에 의해 억제되어야만,
- 자신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돈, 명예, 쾌락, 인정, 안정이 아니라,
- 하나님과의 사랑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알리기 위해 두 번째 토기장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이다.
- 유익에 과몰입 되어, 유익을 위해 사람까지 도구 삼는 인신 제사에까지 빠진 사람은 스스로 회복할 수 없고,
- 하나님의 멸망 심판을 통해서만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말이다.
여기서 또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인신 제사에 대한 이해이다.
요즘 대한민국에서 누가 인신 제사를 하겠는가.
- 누가 유익을 위해 사람을 죽이는가.
- 그러니 우리와 상관없는 죄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결론부터 말해서, 우리는 인신 제사의 늪에서 살고 있다.
물론 우리가 사람을 실제로 죽이진 않는다.
- 하지만 유익을 위해 살아있는 사람을 죽은 사람처럼 대할 때는 셀 수 없이 많다.
- 일상적으로는 편의점에서 물건 살 때, 특별하게는 '용산 참사'와 같은 경우가 있다.
아무도 사람을 직접 죽이지는 않는다.
- 그러나 많은 사람이 서로를 '살아있는 인격'이 아니라 '죽은 도구'로 생각한다.
- 그럴 때 실제로 정말 죽는 사람이 생긴다.
직접적인 가해자가 없어서, 누구도 죄책감을 느끼지는 않는다.
- 누구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 없다.
- 그러나 실상은 우리 모두가 가해자이다.
- 사람을 유익의 도구로 생각하는 가치관을 공유하는 집단에 속한 모든 사람이 함께 그 사람을 죽인 것이다.
- 그런 집단이 대표적으로 사람조차 자본의 관점에서 판단하는 자본주의 사회이다.
당연히 우리도 그 집단에 속해있다.
또한 인정과 명예에 대한 과몰입, 안정과 안락에 대한 과몰입, 기쁨과 쾌락에 대한 과몰입 등도 결국 사람을 죽인다.
- 당연히 실제로 사람의 생명이 끊어지는 것은 아니다.
- 즉각적인 피해가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뭔가에 과몰입 되어 있으면, 그래서 그 목적을 이루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으면,
- 그것에 대한 반작용으로 초점 외의 다른 것을 보지 못하게 되고,
- 그러면 자연스럽게 사람을 살아있는 인격이 아니라, 목적을 이루는데 도움을 주는지 방해하는지로만 구분하게 되고,
- 도움을 주는 사람은 도구로 삼아서 죽이고, 방해하는 사람은 방해하니 죽이고, 또 도움도 방해도 안되는 사람은 무시해서 죽인다.
그래서 과몰입은 반드시 사람을 죽인다.
특별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 사람을 도구 삼는 가치관을 갖는 사람은 반드시 자신도 죽인다.
- 자신을 바라볼 때도, 있는 그대로 살아있는 인격이 아니라, 목적을 이루는데 도움되는 부분과 방해되는 부분으로 구분하고,
- 도움이 되는 부분은 도구로 삼아 죽이고, 방해되는 부분은 방해하니 죽인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인신 제사이다.
- 하나님이 가장 고통스러워하는 인간의 모습이다.
- 이렇게 인간은 주변 사람과 자기 자신까지 죽인다.
특정한 사람이 그런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그렇다.
이와 같은 메시지를 예수님도 말씀하셨다.
예수님도 자신을 도구 삼는 것은 용서받을 수 있지만, 사람을 도구 삼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다고 하셨다.
[마 12:31~32]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무슨 죄를 짓든지, 무슨 신성 모독적인 말을 하든지, 그들은 용서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용서를 받지 못할 것이다. (32) 또 누구든지 인자를 거슬러 말하는 사람은 용서를 받겠으나, 성령을 거슬러 말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도 오는 세상에서도, 용서를 받지 못할 것이다.”
- 본문은 하나님과 성령, 인자이신 예수님과 성령을 대비해서 말한다.
- 하나님과 예수님 모독은 용서받을 수 있지만, 성령 모독은 용서받을 수 없다고 말한다.
해석의 핵심은 '성령이 하신 일'이 뭐냐는 것이다.
- 본문 맥락에서 성령이 하신 일은 바로 전에 예수님께서 귀신 들린 사람을 치유한 행위이다.
[마 12:22] 그 때에 사람들이, 귀신이 들려서 눈이 멀고 말을 못하는 사람 하나를, 예수께 데리고 왔다. 예수께서 그를 고쳐 주시니, 그가 말을 하고, 보게 되었다.
- 예수님은 이 치유를 성령이 하신 일이라고 말씀하셨다.
[마 12:28]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영을 힘입어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에게 왔다.
- 따라서 성령이 하신 일은 치유이다.
그런데 바리새인은 예수님의 치유 행위를 귀신의 행위라고 모독했다.
[마 12:24] 그러나 바리새파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말하였다. “이 사람이 귀신의 두목 바알세불의 힘을 빌지 않고서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할 것이다.
바리새인은 왜 그랬냐?
-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부정하려고 덫을 만들었다.
- 안식일에 예수님께 귀신 들린 사람을 데리고 와서, 예수님이 그를 치유하게 해서, 안식일 율법을 범하도록 만들었다.
- 그래서 예수님을 불의하다고 정죄하려는 계획이었다.
이렇게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부정하는 것에 과몰입되어 있었다.
- 그래서 그 목적을 위해 귀신 들린 사람을 도구로 삼았다.
- 오직 자신의 목적에만 몰입하여, 귀신 들린 사람의 괴로움에는 무관심했다.
하지만 성령은 귀신 들린 사람의 괴로움에 초점을 둔다.
- 그 사람을 살아있지만 고통당하는 인격 그 자체로 본다.
- 그래서 그를 치유할 수밖에 없다.
- 왜냐하면 다른 그 무엇보다 사랑하기 때문이다.
- 이것이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이 하는 일이다.
그러나 과몰입된 바리새인은 성령과 완전히 반대로 한다.
- 자신의 목적을 위해 사람과 사랑을 배제한다.
- 사람조차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목적을 이루는 도구' 삼는다.
이것을 예수님은 성령 모독이라고 정죄한 것이다.
예수님이 정죄하신 부분이 바로 이것이다.
- 예수님이 누구인지 모를 수 있다.
- 아직 예수님이 죽고 부활하기도 전이니, 그럴 수 있다.
- 배워서 알면 된다.
- 따라서 예수님을 부정하는 것은 용서받을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을 인격이 아닌 도구 삼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다.
- 그것이 바리새인의 가치관이고 사고 방식이었다.
- 그런 사고 방식을 가지면, 주변 사람을 죽이고, 자기 자신을 죽이며,
- 또한 하나님도 죽인다.
- 그래서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인 것이다.
강조해서 말하지만,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죽였기 때문에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 된 것이 아니다.
- 그들이 사람을 인격이 아닌 도구로 삼는 사고 방식으로 살았고,
- 그 사고 방식의 일환으로 예수님을 죽인 것뿐이다.
-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 전에 수도 없는 사람을 이미 죽였다.
- 그 살인 행위가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 것이다.
예수님이 정죄하신 것은 사람을 도구 삼는 사고 방식이고,
- 그 사고 방식은 너무나 강력해서 스스로 벗어날 수 없고,
- 그렇기 때문에 결코 회복되어 용서받을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사고 방식을 가진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다시 말하지만, 이들은 스스로 돌이킬 수 없다.
- 하나님을 모독하고 부정하여 우상 숭배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바르게 배워서 이해하면 회복될 수 있다.
- 그러나 우상 숭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인신 제사를 하며, 사람을 도구 삼는 사람은 결코 혼자 힘으로 회복될 수 없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멸망뿐이다.
- 유익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 완전히 박탈될 때만,
- 그래서 어떤 방식으로도 유익을 얻을 수 없게 될 때만,
- 사람을 유익의 도구 삼는 사고 방식에 제동을 걸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이들은 유익의 가능성이 아무리 희박해도,
- 0.01%의 가능성이라도 있으면, 주변 사람을 도구로 삼아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데 갈아 넣는다.
- 그 무모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아무리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가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 자신의 목적 성취에 과몰입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인신 제사와 살인 행위를 멈추기 위해서는 방법이 하나밖에 없다.
- 0%의 가능성, 즉 가능성 전무함이다.
- 이스라엘이 완전히 멸망하여, 국토, 국민, 주권을 전부 박멸당한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예레미야도 이스라엘의 멸망을 가혹하게 선포하는 것이다.
[렘 19:7~9] 내가 이 곳에서 유다와 예루살렘의 계획을 좌절시키고, 그들이 전쟁할 때에 원수들의 칼에 찔려 죽게 하고, 그들의 목숨을 노리는 사람들의 손에 죽게 하고, 그들의 시체는 공중의 새와 들짐승의 먹이가 되게 하겠다. (8) 내가 이렇게 이 도성을 폐허로 만들 것이며, 비웃음거리가 되게 하겠다. 그러면 이 도성을 지나가는 사람마다, 이 곳에 내린 모든 재앙을 보고 놀라며, 비웃을 것이다. (9) 그리고 그들은 목숨을 노리는 원수에게 포위되어 곤경에 빠지면, 그들은 제 자식들을 잡아먹고, 이웃끼리도 서로 잡아먹을 것이다.’
[렘 19:10~13] 이렇게 말하고 나서 너는 데리고 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 항아리를 깨뜨리고, (11) 그들에게 이렇게 전하여라. ‘만군의 주가 말한다. 토기 그릇은 한번 깨지면 다시 원상태로 쓸 수 없다. 나도 이 백성과 이 도성을 토기 그릇처럼 깨뜨려 버리겠다. 그러면 더 이상 시체를 묻을 자리가 없어서, 사람들이 도벳에까지 시체를 묻을 것이다. (12) 내가 이 곳과 여기에 사는 주민을 이처럼 만들어 놓겠다. 반드시 이 도성을 도벳처럼 만들어 놓겠다. 나 주의 말이다. (13) 예루살렘의 집들과 유다 왕궁들이 모두 도벳의 터처럼 불결하게 될 것이다. 이는 집집마다 사람들이 지붕 위에서 온갖 천체에게 향을 피워 올리고, 이방 신들에게 술을 부어 제물로 바쳤기 때문이다.’
- 회복 불가능한 멸망만이 사람을 도구 삼는 가치관에 몰입된 이스라엘의 살인 행위를 멈출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래야 이스라엘의 주변 사람들도 살고, 이스라엘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래야 온 인류가 구원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을 도구 삼는 이에게 필요한 것은 멸망뿐이다.
- 이들에게는 회복 가능성이 전무하기 때문이다.
- 멸망만이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결론 - 신앙의 중심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이다.
신앙의 중심을 하나님이라고 생각한다.
- 하나님을 위한 예배, 하나님을 위한 사역, 하나님을 위한 헌금, 하나님을 위한 전도와 선교 등이 신앙 생활이라는 것이다.
물론 신앙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 맞다.
- 그러나 신앙을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으로는 결코 하나님을 위한 신앙에 이를 수 없다.
- 왜냐하면 사람의 죄 때문이다.
-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는 핑계로 자신의 욕망을 내세울 가능성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 굳이 예를 들지 않아도, 주변 교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이 이것을 증명한다.
그렇다고 신앙에 하나님을 배제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 사람에게만 잘하면 된다는 뜻은 아니고, 하나님 없이 사람에게 잘 할 수 있다는 뜻도 아니다.
- 신앙의 중심은 하나님이다.
- 문제는 어떻게 해야 신앙의 중심에 하나님을 둘 수 있냐는 것이다.
- 어떻게 해야 신앙을 욕망 성취 수단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을 수 있냐는 것이다.
- 다시 말하지만, 신앙의 중심이 하나님이라는 생각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신앙의 중심이 하나님이라는 생각이 왜 변질될 수밖에 없냐?
- 하나님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마음도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 그래서 숨기고 속이기 쉽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위한다고 말하면서, 속으로는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기가 쉽다.
- 그래서 하나님을 유익을 위한 도구로 삼는 우상 숭배에 빠져있으면서도,
- 바른 신앙을 가진 것처럼 남과 자신을 속이기 쉽다.
그런 점에서 신앙의 중심에 하나님을 두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모호하다.
- 변질되기 쉽고, 변질되도 알아차리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의 중심에 사람을 둬야 한다.
- 사람과 바른 관계를 맺고, 사람을 사랑하며,
- 사람을 유익의 도구가 아니라 인격 그 자체로 보고,
- 사랑의 대상으로 삼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러면 사람과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되냐?
- 아니다.
- 사람은 절대 사람을 인격으로 보지 못한다.
- 사람은 스스로의 힘으로 사람을 유익의 도구로 보는 사고 방식에서 벗어날 수 없다.
왜냐?
- 사람을 사랑의 대상으로 보려면, 사람에게 얻을 유익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 물론 사람에게 얻을 유익을 포기할 때가 있다.
- 투자의 개념으로 나중에 더 큰 보상을 기대할 때이다.
- 여기서 말하는 포기는 그런 것이 아니다.
- 상대방을 정말 사랑해서 베풀기만 할 뿐,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아야 하는데,
- 현실에서 우리는 사랑을 베푼 후에 기대한 만큼 되돌아오지 않으면 실망한다.
- 사랑을 베푼 자신의 인생을 아까워하며, 사랑을 거둔다.
이런 일이 왜 일어나냐면,
- 사랑은 언제나 인생의 포기, 생명의 포기, 즉 죽음을 감수해야 하는데,
- 죽음을 감수하는 일은 사람이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은 사람을 사랑의 대상으로 볼 수 없다.
그러면 왜 사람을 사랑하려고 노력해야 하는가?
- 그래야만 자신에게 사랑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 자신에게 죽음을 감수할 용기가 없다는 것을 깨달아,
- 부활을 통해 죽음을 극복하신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하기 때문이다.
즉, 신앙의 중심이 사람일 때만,
- 그래서 사람을 사랑하려고 할 때만, 죽음의 두려움을 직면할 수 있고,
- 그래야만 생명의 주, 사랑의 주이신 하나님께 의지하여,
- 신앙의 중심에 하나님을 둘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신앙의 중심이 하나님 될 때만,
- 생명의 주, 사랑의 주이신 하나님으로 인해,
- 죽음을 감수할 용기로 바른 사랑을 할 수 있게 되고,
- 그래야 사람을 유익의 도구로 보는 사고 방식에서 벗어나,
- 사랑의 대상으로 보는 사고 방식으로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 우리가 매일 자행하고 있는 인신 제사를 멈출 수 있게 되고,
- 그럴 때 인신 제사로 매일을 괴로워하시는 하나님을 위로해드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만이 하나님을 위한 참된 신앙이다.
그래서 신앙을 말할 때 부부 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 배우자는 너무 가까워서 자신의 사고 방식을 가감 없이 드러내기 때문이다.
- 친구나 동료에게는 사고 방식을 적당히 감추고 사랑하는 척 할 수 있지만,
- 배우자에게는 유익을 위해 사람을 도구 삼는 사고 방식을 감출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누구보다 배우자에게 더욱 사랑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 배우자가 더 중요해서도 있지만,
- 그보다 배우자를 통해서만 자신의 사고 방식이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 그래야만 하나님께 배우자를 도구 삼는 사고 방식에서 벗어나 사랑의 대상으로 보게 해달라고 절박하게 기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럴 때만 하나님과의 관계도 회복될 수 있고,
- 배우자와의 관계도 회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신앙의 중심에 사람을 두자.
- 사람에게 잘하자.
- 물론 우리의 목표인 인류 전체를 사랑하는 것이다.
- 하지만 우리는 아직 자신조차 사랑하지 못하고 있다.
- 그러니 자신 그리고 자신과 가장 가까운 가족을 사랑하는 것부터 시작하자.
그렇다고 사랑한다는 이유로 상대방의 헛된 욕망까지 다 이뤄줘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 하나님도 절대로 우리에게 그런 사랑을 주시지 않는다.
바른 사랑은 상대방이 자신의 본 모습을 찾도록 하는 것이다.
- 그래서 헛된 욕망에서 벗어나, 참 자유를 찾게 해주는 것이다.
- 과몰입과 방종 모두 사랑의 결핍으로 인한 속박의 결과이다.
- 상대방의 과몰입과 방종 욕구를 채워준다고, 자신의 본 모습을 회복할 수 없다.
- 오히려 자신으로부터 더욱 멀어진다.
오직 바른 사랑으로 채워질 때만, 과몰입과 방종에서 벗어나 온전한 자기로 살 수 있다.
- 그것이 우리의 역할이다.
또한 인류를 향한 교회의 역할이다.
- 하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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