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예레미야서

예레미야(39) 19:14-20:6 바스훌(사방의 풍요)에서 마골밋사빕(사방의 파괴)으로

<미양교회 팟캐스트 양따양>

미양교회에서 했던 설교를 바탕으로 진솔하게 신앙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팟캐스트도 많이 들어주세요.

https://www.podbbang.com/channels/1790233/

 

어린양을 따르는 어린양

예배 대신 예수님, 설교 대신 성경, 건물 대신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미양교회가 만드는 방송입니다.토끼와 개구리가 진솔하게 신앙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어린양과 같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

www.podbbang.com

 

 

본문의 내용은 단순하다.

- 예레미야가 성전 뜰에서 회복 불가능한 죄를 범한 이스라엘의 멸망을 선포한다.

- 그러자 성전 총감독인 바스훌이 예레미야를 때리고 감옥에 가둔다.

- 다음 날 아침에 풀려난 예레미야는 바스훌에게 마골밋사빕이라는 별명을 붙이며 예언한다.

- 바스훌과 이스라엘 전체에게 사방의 풍요(바스훌)가 아닌 사방의 파괴(마골밋사빕)가 임하여,

- 이스라엘은 멸망하고, 모든 사람, 특히 바스훌과 그 주변 사람이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갈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본문의 시선은 회복 불가능한 멸망을 당하게 될 바스훌에게 맞춰져 있다.

- 바스훌이 겪게 될 심판과 고통을 부각한다.

- 왜냐하면 하나님은 성전에서 우상 숭배를 행하는 바스훌을 불의하다고 평가하시기 때문이다.

불의한 바스훌에 대한 하나님의 멸망 심판이 본문이 전하는 메시지이다.

 

하지만 본문에서 실제로 고통당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 본문의 시선이 바스훌을 향하기 때문에 숨겨져 있지만,

- 정작 실제로 고통받은 사람은 바스훌의 고통을 예언하고 있는 예레미야이다.

[렘 20:2] 예언자 예레미야를 때리고(nakah), 그에게 차꼬를 채워서 주님의 성전 위쪽 ‘베냐민 대문’ 근처에다가 가두었다.

- 여기서 '때린다'는 것은 죽음에 가까운 수준의 체벌을 의미한다.

- 왜냐하면 같은 단어를 4절에서는 '죽인다'로 번역했기 때문이다.

[렘 20:4] ・・・・ 또 내가 유다 백성을 모두 바빌로니아 왕의 손에 넘겨 주면, 그 왕은 백성을 더러는 바빌로니아로 사로잡아 가고, 더러는 칼로 죽일 것이다(nakah).”

- 그러니까 예레미야는 맞아 죽을 지경이다.

그렇다면 예레미야는 왜 이 지경이 되었냐?

- 속된 말로, 남의 구역에서 까불었기 때문이다.

- 성전 앞에서 성전 제사가 인신 제사까지 하는 우상 숭배라고 비판하며,

- 불순종한 이스라엘에게 재앙이 내릴 것이라고 예언했기 때문이다.

[렘 19:14~15] 예레미야는, 주님께서 예언하라고 보내신 도벳에서 돌아와, 주님의 성전 뜰에 서서, 모든 백성에게 말하였다. (15) “나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한다. 이 백성이 고집을 부려, 나의 말에 순종하지 않았으므로, 이제 내가 이미 선포한 그 모든 재앙을, 이 도성과 거기에 딸린 모든 성읍 위에 내리겠다.

어떤 관점에서 예레미야는 맞아도 싸다.

 

아마도 예레미야의 죄명은 '신성모독'이었을 것이다.

- 거룩한 하나님의 집인 성전을 부정하며 모독했기 때문이다.

- 성전 제사를 우상 숭배라고 비난하고,

-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재앙이 내릴 것이라고 예언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거룩하고 의롭다고 생각하는 성전과 이스라엘을 예레미야는 불의하다고 모독했다.

 

따라서 본문은 두 사람을 대비한다.

- 바스훌은 성전의 총감독으로, 하나님에 대한 제사를 관리 감독하며, 

-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의로운 사람이라고 인정받는다.

- 게다가 바스훌 자신이 자신을 하나님의 복을 받은 의로운 존재로 생각한다.

-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거짓 예언자이며,

- '자신과 주변의 모든 사람들까지 포로로 끌려가 죽을 것(마골밋사빕)'이라고 말씀하신다.

[렘 20:6] 그리고 바스훌아, 너와 네 집에 사는 모든 사람은 포로가 되어서, 바빌로니아로 끌려갈 것이니, 너는 네 거짓 예언을 들은 네 모든 친구와 함께 거기에서 죽어, 그 곳에 묻힐 것이다.

- 즉, 하나님은 그를 불의하다고 평가하신다.

반면에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유일한 참 예언자이다.

[렘 1:5] 내가 너를 모태에서 짓기도 전에 너를 선택하고, 네가 태어나기도 전에 너를 거룩하게 구별해서, 뭇 민족에게 보낼 예언자로 세웠다.

- 그리고 언제나 함께하시며 보호하실 것을 약속받았다.

[렘 1:8] 너는 그런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늘 너와 함께 있으면서 보호해 주겠다. 나 주의 말이다.

- 즉,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의롭다고 평가하신다.

- 그러나 현실에서는 신성모독이라는 죄명으로 죽도록 맞고 감옥에 갇혀서,

-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부정하고 모독하는 불의한 사람이라고 인식된다.

- 특히 예레미야가 자신을 하나님의 저주받은 부정한 존재로 생각한다.

[렘 20:14] 내가 태어난 날이 저주를 받았어야 했는데. 어머니가 나를 낳은 날이 복된 날이 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러니까 본문은 세상과 자신이 '의로운 사람'이라고 평가하지만, 하나님께 '불의한 사람'과,

- 반대로 세상과 자신은 '불의한 사람'이라고 평가하지만, 하나님께 '의로운 사람'을 대비한다.

 

이러한 구도는 성경에서 전형적이다.

- 이스라엘과 대부분의 예언자의 관계가 그렇다.

- 자신을 과신한 이스라엘은 자신이 의롭다는 착각에 빠져, 이스라엘의 문제를 지적하는 예언자를 박해한다.

- 그래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의로운 예언자를 불의하다고 정죄한다.

또 사울과 다윗의 관계도 그렇다.

- 사울은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이스라엘 백성의 지지를 받았다.

- 반면에 다윗은 도망자 신세로 아둘람 골에서 노숙하며, 단 400여 명만이 따를 뿐이었다.

-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의 지지를 받는 사울을 내치시고, 도망자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셨다.

- 즉, 의로워 보이는 사울을 불의하다 하시고, 불의해 보이는 다윗을 의롭다 하셨다.

복음서에도 하나하나 설명하기 힘들 만큼 같은 구도가 많이 나온다.

- 사람에게 부정당하지만, 하나님께 사랑받은 사람은 사마리아 여인, 수로보니게 여인,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마리아, 혈루증 여인, 중풍병 환자, 예수님과 식사하는 세리와 죄인, 거지 바디매오, 구원받은 십자가 죄인, 마지막으로 예수님이다.

- 이들 모두 사람에게 불의하다고 조롱당하지만,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받는다.

반면 사람에게 인정받지만, 하나님께 거부당한 사람은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 제사장이다.

- 이들은 세상에서 돈, 권력, 명예, 영적인 평판까지 모두 얻지만, 결국 지옥에 간다.

그래서 바리새인은 세리와 죄인을 부정하다고 무시하며 거부하지만,

- 예수님은 그들에게 다가가서 사랑으로 교제하신다.

- 이렇게 바리새인과 예수님은 끊임없이 대립한다.

- 결국 언제까지 대립하냐면, 대립이 극에 치달아,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죽일 때까지 계속된다.

 

이러한 구도를 자세히 설명하겠다.

다음과 같이 사람을 네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① 하나님과 세상에게 모두 인정받는 사람

② 하나님께 거부당하지만, 세상에서 인정받는 사람

③ 하나님께 인정받지만, 세상에서 거부당하는 사람

④ 하나님과 세상에게 모두 거부당하는 사람 

- 즉, 사람은 네 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성경은 ②와 ③을 대비하는 구도를 자주 사용한다.

- 특히 바스훌이 ②에, 예레미야가 ③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 그림을 이해하기 위한 기본 전제가 있다.

-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 사람이 세상을 평가하는 기준이 다르다는 것이다.

- 하나님이 의롭다고 인정하는 사람을 세상은 부정하다고 거부할 수 있고,

- 세상이 의롭다고 인정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불의하다고 거부할 수 있다.

이렇게 하나님과 세상의 평가에 차이가 있다는 것이 이 그림을 이해하기 위한 기본 전제이다.

 

일단, 하나님과 세상이 다른 평가를 할 수 있다는 생각조차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 사람 사이에도 다르게 평가할 수 있는데,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 차이가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하나님과 세상 사이가 사람 사이와 명확하게 다른 점이 있다.

- 사람 사이에는 누구는 절대로 옳고 누구는 절대로 그름이 없다. 

- 둘 다 조금씩 옳고 조금씩 틀리다.

그러나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는 명확하게 옳고 그름이 있다.

-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옳고, 세상은 절대 틀리다.

 

그런데 이 점이 저 그림의 메시지를 무섭게 만든다.

- 하나님이 절대로 옳다는 것은 누구나 쉽게 받아들인다.

- 그러나 세상이 절대로 틀렸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렵고 무서운 메시지이다.

쉽게 말해서, 세상은 바리새인, 제사장, 바스훌을 의롭다고 인정한다.

- 여러 번 말했지만, 이들은 우리가 쉽게 생각하는 속물 정치인, 타락한 종교인이 아니다.

- 이들은 정치적, 종교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었던 것뿐만 아니라,

- 당시 많은 사람에게 그들의 삶이 선하고, 바르고, 거룩하고, 정결하다는 이유로 존경받았던 사람이다.

- 마치 간디나 테레사 수녀 같이 말이다.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앞에서만 멋있는 척하고, 뒤돌아서면 멋대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 내면까지 진정성 있게 살려고 노력했던 사람이었다.

- 권력이 두려워 앞에서만 존경하는 척하고, 뒤돌아서면 무시하고 흉보는 대상이 아니라,

- 실제로 존경받는 사람이었다.

사람의 기준, 즉 부, 명예, 인격, 윤리, 종교 등으로 볼 때, 이들에게 하나님의 복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아무도 의심할 수 없었다.

- 엄친아와 교회 오빠를 합친 모습이랄까.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모두 불의하다고 거부하신 것이다.

- 그러면서 하나님 자신의 판단만 옳고, 세상의 모든 판단은 완전히 틀렸다고 결론 내신 것이다.

- 이러한 하나님의 결론을 강조하기 위해 성경은 ②와 ③의 대결 구도를 셀 수 없이 반복한다.

즉, 하나님과 세상의 판단은 항상 다른데, 하나님의 판단만 옳고 세상의 판단은 언제나 틀렸다는 것을 부각하기 위해서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예수님과 바리새인의 대결이다.

- 바리새인은 정말로 존경받는 사람이었다.

- 단순히 좋은 사람으로 칭찬받는 것은 당연하고, 누구나 바리새인을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 삶, 혈통, 지위 등 모든 방면에서 그들이 의롭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있는 단서는 없었다.

- 그들은 의심할 바 없이 의로운 사람이었다.

반면에 예수님은 어떠한가?

- 결혼도 하기 전에 생긴 사생아로 태어나,

- 무식한 제자들 모아다가, 노숙하다시피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 기껏 한다는 것이 안식일에 하면 안 될 치유나 하다.

- 이렇게 반 거지인 사람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떠들다가,

- 결국 종교적, 영적 권위자에게 붙잡혀, 

- 얼마 없던 제자들에게마저 배신당하고,

- 가장 불의한 방법으로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사람이다.

- 삶, 혈통, 지위 등 모든 방면에서 예수님이 의롭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는 단서는 없었다.

- 혈통으로는 사생아, 율법으로는 범법자, 정치적으로는 반역자, 인간적으로 실패자였다.

- 그는 의심할 바 없이 불의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예수님을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르셨다.

-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은 예수님을 의도적으로 가장 불의한 모습으로 세상에 보내셨다.

- 그 불의한 모습을 가지고, 가장 의로운 모습을 가진 바리새인과 대결하게 하셨다.

- 질 수밖에 없는 대결을 말이다.

왜 그러셨을까?

- 세상이 옳다고 인정하는 사람은 정죄하고, 세상이 틀렸다고 거부하는 사람은 의롭다고 하여,

- 하나님과 세상의 판단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드러내서,

- 하나님의 판단은 절대 옳고, 세상의 판단은 절대 틀렸다는 것을 알리시기 위해서이다.

 

하나님께 이 사실이 왜 이렇게 중요할까?

예수님의 생명만큼 이 사실을 알리는 게 중요한 것일까?

- 굳이 예수님을 죽이면서까지 이 사실을 알려야 했을까?

- 결론적으로, 그렇다.

- 이 사실은 예수님의 생명만큼 중요하다.

 

만약 세상의 판단이 절대 틀린 것이 아니라면,

- 그래서 세상의 판단 중에도 옳은 것이 단 하나라도 있다면, 

- 그래서 세상이 옳다고 판단하는 것을 위해 살았던 1050억 명(지구에 살았던 인구) 중에 단 한 사람이라도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받은 사람이 있다면,

-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 없이, 세상의 방식으로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받은 사람이 하나라도 있다면,

- 그 한 사람 때문에 하나님의 존재는 완전히 부정되기 때문이다.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 하나님의 의롭다는 인정을 받아 구원받기 위해서,

- 지금 우리처럼 성경 읽고, 기도하고, 예배드리고, 전도하는 신앙 생활이 필요 없다.

- 우리와 같은 방식은 어렵고, 불명확하다.

- 이렇게 한다고 구원받는다는 보장도 없다.

오히려 하나님 없이 하나님께 인정받아 구원받은 그 한 사람을 찾아, 

- 그 사람의 삶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이 훨씬 쉽고 확실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 그러면 그 삶의 방식은 세상과 하나님께 동시에 옳다고 인정받을 수 있다.

- 굳이 예수님처럼 세상에서 박해를 당하며 고생스러운 인생을 살 필요가 없다.

 

그러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도 필요 없어지고,

- 하나님의 도움 자체가 필요 없어진다.

- 왜냐하면 하나님 없이, 세상의 방식으로도 구원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존재의 정당성이 부여되기 위해

- 하나님 없이 세상의 방식으로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받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어야 하고,

- 이는 곧 세상의 판단 중에 옳은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세상의 판단은 절대로 틀리다.

- 우리가 보기에 아무리 옳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모든 인류에게 반드시 필요한 존재가 되려면,

- 하나님 없이, 세상이 옳다고 판단하는 것을 위해 살았는데, 

- 결국 하나님께도 의롭다는 판단을 받은 사람이 1050억 명 중에 한 사람도 있어서는 안 된다.

이것을 다르게 말하면,

- 세상이 옳다고 판단하는 것 중에 하나님도 의롭다고 인정하는 것이 하나도 없어야 한다.

- 즉, 하나님은 세상의 판단을 전부 틀렸다고 판단하셔야 한다.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 하나님은 ②와 ③의 대결 구도를 반복해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또 새로운 사실을 추론할 수 있다.

저 그림에서 ①과 ④에 물음표를 했는데,

- 과연 ①(하나님과 세상에게 모두 인정받는 사람)과 ④(하나님과 세상에게 모두 거부당하는 사람)가 존재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이 우리에게 왜 중요하냐면,

- ①이 존재할 수 있어서, 하나님과 세상에게 동시에 인정받는 사람이 있어야, 

- 하나님과 세상 모두에게 인정받고 싶은 우리의 욕망을 실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래야 예수님, 베드로, 바울과 달리, 세상에서도 칭찬받고, 하나님께도 인정받아 구원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①이 없다면, 

- 그래서 하나님과 세상에게 모두 인정받을 수 없다면, 

- 그래서 반드시 하나님과 세상 중에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 그래서 하나님께 인정받기 위해서는 세상에서 거부당할 수밖에 없고,

- 반대로 세상에서 인정받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거부당할 수밖에 없다면,

- 너무 심각한 고민이 생기기 때문이다.

- 하나님과 세상 중에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데, 둘 다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이 질문이 우리에게 왜 중요하냐면,

- ④가 존재할 수 있어서, 하나님과 세상에게 동시에 거부당하는 사람이 있어야, 

- 싫은 사람을 일말의 미련 없이 저주하고 정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④이 없다면,

- 그래서 하나님과 세상에서 모두 거부당할 수 없다면,

- 그래서 세상에서 거부당한 사람이 실제로는 하나님께 인정받은 사람이고,

- 반대로 세상에서 인정받은 사람이 실제로는 하나님께 거부당한 사람이라면,

- 누구도 마음 놓고 미워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 세상에서 거부당한 사람은 하나님께 인정받기 때문에 미워할 수 없고,

- 세상에서 인정받은 사람은 하나님이 거부해도 세상이 인정하기 때문에 미워할 수 없다.

 

하지만 ①과 ④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 왜냐하면 하나님과 세상의 판단은 완전히 배타적이라서, 접점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 하나님은 세상이 옳다는 판단을 전부 틀렸다고 판단하고,

- 세상은 하나님이 옳다는 판단을 전부 틀렸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하나에 대해서 하나님과 세상은 결코 같은 판단을 내릴 수 없다.

- 그렇기 때문에 ①과 ④는 존재할 수 없다.

 

아마도 반론하고 싶을 것이다.

- ①의 예로 간디, 테레사 수녀가 있고,

- ④의 예로 히틀러나 포악한 살인자가 생각날 것이다.

- 어떻게 간디나 테레사 수녀가 지옥에 갔다고 할 수 있으며,

- 히틀러나 살인자가 천국에 갔다고 할 수 있냐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간디나 테레사 수녀의 선행 뒤에 많은 비판이 있다.

- 또 히틀러는 살인마지만 상당히 오랫동안 독일 시민의 열렬한 지지를 받은 대통령이었다.

- 즉, 세상에서 인정받았다고도 거부당했다고도 분명하게 말할 수 없다.

따라서 간디나 테레사 수녀가 무조건 천국, 히틀러가 무조건 지옥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또 바울과 베드로의 경우 ①이 아니냐는 반론을 할 수 있다.

- 그들은 세상에서도 성인으로 인정받고, 하나님께도 인정받았다는 것이다.

물론 그들이 하나님께 인정받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 근거는 성경에서 그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 의심할 여지는 없다.

그러나 과연 그들이 세상에서도 인정받았을까?

- 안타깝게도 그들은 세상의 인정을 받아보기 전에 죽었다.

- 그것도 아주 비극적으로 말이다.

- 바울은 로마에서 네로 황제에게 처형당했다는 전승이 있다.

- 게다가 바울은 사역 내내 교회에게 자신이 사도이며, 자신의 복음이 올바르다는 논증을 해야 했다.

- 그러한 내용이 대부분의 바울 서신서에 나온다.

- 즉, 바울은 교회에서조차 사도라는 것을 부정당했고, 바울의 복음이 틀렸다는 정죄를 받았다.

베드로의 죽음도 비극적이다.

-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다는 전승이 있다.

- 사역에서도 초기 이후에는 부각되지 않는다.

- 유대인 그리스도인 교회에서는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주도권을 잡았고,

- 이방인 그리스도인 교회에서는 바울이 주도권을 잡았다.

- 즉, 베드로의 영향력은 이름값에 비해 실제로는 적었다.

따라서 바울과 베드로가 하나님께 인정받은 것은 분명하지만, 세상에서 인정받았다고 말할 수 없다. 

- 오히려 세상에서 거부당했다.

- 교회에서조차 인정받지 못했다.

- 그들은 ①이 아니고 ③이었다.

 

참고로, 내가 이 그림을 처음 생각한 것은 약 6년 전이다.

- 그때는 ①과 ④를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 없다고 단정하지 않았다.

- 주변에 보면,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선해서 세상도 하나님도 모두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은 사람이 있고,

- 또 신문을 보면,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악해서 세상도 하나님도 모두 거부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은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직관 때문에 ①과 ④가 없다고 단정할 용기가 없었다.

- 하나님과 세상의 판단 기준이 심각하게 차이 나는 것은 맞지만,

- 일말의 공통점이 있을 것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만약 하나님과 세상이 모두 인정하는 사람이 단 하나라도 존재한다면,

- 그래서 세상에서도 사람들의 칭찬을 받고 살다가, 죽어서도 천국에 간 사람이 있다면,

- 그래서 세상이 옳다고 인정하는 수많은 평가 기준, 가치 기준 중에 단 하나라도 하나님도 옳다고 인정하는 것이 있다면,

- 그래서 전적인 하나님의 도움 없이, 사람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가치 기준의 길이 있다면,

- 단 하나의 가치 기준 때문에 하나님의 존재는 완전히 부정된다.

- 우리의 신앙 생활의 절대 가치는 완전히 부정된다.

하나님은 사람 스스로의 힘으로 갈 수 있는 구원의 길을 조금 더 넓혀 주시는 분으로 전락하고,

- 신앙 생활은 사람 스스로의 힘으로 얻을 수 있는 삶의 참 기쁨에 뿌리는 양념으로 전락한다.

- 즉, 하나님과 신앙 생활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며,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 아니라,

- 길이 더 넓으면 교통 체증도 없고 편하듯이, 양념이 있으면 음식이 더 감칠맛 나듯이,

-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상관없는 것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①과 ④는 반드시 없어야 한다.

 

물론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충분히 공감한다.

- 나 역시 개별적인 사건, 개별적인 사람을 생각하면,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싶다.

-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숭고한 선인이 분명히 있고,

- 아무리 생각해도 용서할 수 없는 심각한 악인이 분명히 있다.

- 만약 하나님이 그 선인을 지옥에 보내시고, 그 악인을 천국에 보내신다면,

- 나는 감정적으로 그런 하나님을 받아들일 용기가 없다.

그런데 바로 이 감정이 예수님을 향해 바리새인이 느꼈던 것이다.

- 예수님의 능력이 너무 신통하고, 가르침이 너무 특별해서, 그냥 무시할 수는 없는데,

- 사생아에다가, 율법을 마구 어기며,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미치광이를 결코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 어떻게 그런 놈을 하나님이라고 숭배할 수 있겠는가.

- 사람의 성정을 가졌다면, 성령의 도우심 없이, 절대로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성령 때문에 미치지 않고서는, 예수님을 신성모독으로 죽이는 것은 당연하다.

 

그와 똑같은 경험을 이 그림이 우리에게 전해준다.

- 이 그림은 결코 사람이 받아들일 수 없는 사실을 전해준다.

- 세상의 판단에 옳은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 말이다.

- 특히 세상이 저주하고 조롱하는 대상을 하나님이 의롭다고 인정하시며,

- 세상이 칭찬하고 인정하는 대상을 하나님이 거부하신다는 사실 말이다.

- 그래서 하나님과 세상의 판단이 완전히 배타적이라는 것을 말이다.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 아무리 생각해도, 아무리 받아들이려고 노력해도, 생각하면 할수록 거부감이 든다.

 

하지만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 우리의 경험과 직관이 옳다고 믿어서, 세상의 판단 중에도 옳은 것이 하나라도 있다는 것과

- 우리의 경험과 직관을 부정하고, 하나님만 절대 옳고, 세상은 절대 틀렸다는 것 중에서 말이다.

- 만약 세상의 판단 중에 옳은 것이 있다는 것을 선택하면, 하나님만 옳다는 사실은 부정된다.

- 그러면 세상과 나는 지켜지지만, 하나님의 존재는 완전히 파괴된다.

- 그러나 만약 하나님만 옳다는 것을 선택하면, 세상과 우리가 내린 판단은 완전히 부정된다.

- 그러면 세상과 나의 존재는 완전히 파괴되지만, 하나님은 지켜진다.

중간은 없다.

- 세상과 나를 인정하고 하나님을 죽이던,

- 하나님을 인정하고 세상과 나를 죽이는 선택 외에는 말이다.

 

이 중요한 사실을 알리기 위해 성경은 예레미야와 바스훌의 대립 구도를 만든 것이다.

- 그래서 바스훌로 대표되는 세상의 판단 기준, 가치 기준을 완전히 파괴하기 위해서 말이다.

- 그래서 바스훌이 마골밋사빕, 즉 사방의 파괴, 주위의 모든 것이 전멸, 회복 불가능한 멸망이 될 것이라고 예언한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다.

- 본문은 여기서 끝나지만, 하나님의 메시지는 계속 이어진다.

- 결국 파괴하시는 이유는 회복을 위한 것이다.

- 세상의 판단 기준을 파괴하셔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판단 기준을 알려주시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우리가 거래 관계에서 벗어나, 사랑의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말이다.

- 그렇게 살 때만, 사람이 자유롭게, 평화롭게, 기쁘게, 평안하게, 사람답게, 하나님답게, 거룩하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결론 - 세상의 판단이 전부 틀렸다는 것의 좋은 점과 나쁜 점

세상의 판단이 전부 틀렸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유는, 

- 결국 내가 옳다고 판단하는 모든 것을 전부 부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 특히 나에 대해서 옳다고 판단한 것을 전부 부정해야 한다.

예를 들어, 

- 내가 선하다고 판단하는 과거의 행동도 부정해야 하고,

- 내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나의 특징도 부정해야 하며,

- 내가 감사하게 생각하는 부모님의 가르침도 부정해야 하고,

- 내가 열심히 일해서 성취한 결과도 부정해야 한다.

- 그래서 자기 인생에서 긍정적으로 판단하는 우리의 판단이 완전히 틀렸다고 인정해야 한다.

이것이 세상의 판단이 전부 틀렸다는 것의 나쁜 점이다.

 

하지만 좋은 점도 있다.

- 세상의 판단이 전부 틀렸다는 사실이 좋은 이유는, 내가 틀렸다고 판단한 모든 것도 전부 부정되기 때문이다.

- 그래서 나에 대해서 틀렸다고 판단한 것도 함께 부정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 내가 틀렸다고 판단했던 과거의 행동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 내가 부끄러워하는 나의 특징이 부끄럽지 않다는 것을 깨달으며,

- 내가 괴로워했던 부모님의 양육 태도에서 사랑을 깨닫고, 

- 내가 아무 성과도 얻지 못한 실패에서 진정한 성과를 발견한다.

- 그래서 자기 인생에서 부정적으로 판단하는 우리의 판단조차 틀렸음을 깨닫는다.

이를 통해 내가 너무 싫어서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나의 부정적인 모습 속에 하나님의 참된 사랑이 숨겨져 있음을 발견한다.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하고 싶어 하고, 그 판단이 옳다고 믿고 싶어 한다.

- 그래야 마음이 안정되기 때문이다.

- 그래야 모든 것을 자신이 통제하고 있다는 안정감 속에서, 자신이 세상의 주인인 것 같은 우월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 마치 아담이 눈이 밝아지고 하나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되기 위해 선악과를 먹었던 것처럼 말이다.

[창 3:4~5] 뱀이 여자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 (5) 하나님은, 너희가 그 나무 열매를 먹으면, 너희의 눈이 밝아지고, 하나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된다는 것을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판단이 옳다는 생각이 과연 우리에게 안정감과 우월감을 주나?

- 아니다.

- 왜냐하면 자신에 대한 부정적 판단마저 강화하기 때문이다.

- 그래서 자기가 자신을 더욱 부끄러워하게 되기 때문이다.

- 마치 선악과를 먹은 아담이 부끄러워 나무 뒤에 숨은 것처럼 말이다.

[창 3:9~10] 주 하나님이 그 남자를 부르시며 물으셨다. “네가 어디에 있느냐?” (10) 그가 대답하였다. “하나님께서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제가 들었습니다. 저는 벗은 몸인 것이 두려워서 숨었습니다.”

판단하는 것 자체가 우리를 부끄럽고 불안하게 만든다.

 

따라서 모든 판단에서 벗어나야만, 자기를 사랑할 수 있고, 

- 자기를 사랑해야만, 다른 사람도 사랑할 수 있으며,

-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어야만, 하나님도 사랑할 수 있다.

이것을 위해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판단을 부정하신 것이다.

- 그리고 하나님만 옳다고 하시는 것이다.

- 모든 사람을 판단에서 자유케 하셔서, 자기를 사랑하고 서로 사랑하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