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양교회 팟캐스트 양따양>
미양교회에서 했던 설교를 바탕으로 진솔하게 신앙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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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양을 따르는 어린양
예배 대신 예수님, 설교 대신 성경, 건물 대신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미양교회가 만드는 방송입니다.토끼와 개구리가 진솔하게 신앙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어린양과 같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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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장부터 이어지는 일관된 맥락은 이스라엘에 대한 멸망 심판의 타당성을 입증하는 것이다.
- 14~16장에서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을 멸망하시려는 하나님을 거부하며, 이스라엘의 구원을 주장했다.
- 이는 겉으로 보기에, 이스라엘에 대한 사랑과 헌신으로 보이지만,
- 실상은 하나님이 아닌 사람을 의지하려는 예레미야의 어리석음이었다.
- 예레미야가 자신의 기반과 터전을 하나님이 아닌 이스라엘에 두었기 때문에 생긴 착각이었다.
그러나 17장에서 비로소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구원을 주장했던 자신의 죄를 회개한다.
[렘 17:14] 주님, 저를 고쳐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나을 것입니다. 저를 살려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살아날 것입니다. 주님은 제가 찬양할 분이십니다.
- 그러면서 이스라엘을 멸망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에 동참한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멸망을 선포하는 첫 사역으로,
- 17:19-27에서 이스라엘이 안식일을 범하여 멸망할 것이라고 선포한다.
- 여기서 안식일은 하나님과의 관계와 사람과의 관계를 모두 포괄하는 유일한 율법으로,
-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관계와 사람과의 관계를 모두 하찮게 여기고 있다는 것을 안식일을 통해 입증한다.
- 이를 통해 이스라엘에 대한 멸망 심판의 타당성을 첫 번째로 입증했다.
예레미야의 두 번째 사역은 18:1-17에서 토기장이의 진흙을 통한 예언이다.
- 이 역시 핵심은 이스라엘에 대한 멸망 심판의 타당성을 입증하는 것이다.
-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죄악에서 돌이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도록 예정하셨지만,
- 이스라엘은 자유의지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거부하고 자신의 고집대로 살았다.
- 따라서 하나님을 거부한 이스라엘의 멸망은 필연적이라는 것이다.
- 그러니 토기장이가 진흙으로 마음껏 새로운 그릇을 빚을 수 있듯이,
-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멸망한 후 변화시키는 것은 합당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이번 본문은 세 번째로 이스라엘에 대한 멸망 심판의 타당성을 입증한다.
- 핵심 근거는, 이스라엘이 선을 악으로 갚았기 때문이다.
[렘 18:20] 선을 악으로 갚아도 되는 겁니까? ・・・・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어떻게 선을 악으로 갚았는가?
- 이것을 이해하는 것이 본문을 해석하는 열쇠이다.
- 이스라엘이 어떤 방식으로 선을 악으로 갚았는지,
-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 선을 악으로 갚은 이스라엘에게 왜 멸망 심판이 내려져야 하는지를 이해할 때,
- 이스라엘에 대한 멸망 심판의 타당성이 입증되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우선 이스라엘 죄의 본질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 동시에 그 죄가 단지 타락한 이스라엘에게만 국한된 죄가 아니라,
- 인류 보편적인 죄이며,
- 특히 우리가 매일 일상적으로 범하고 있는 죄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비웃고 조롱하며 남 일이라고 치부했던 이스라엘의 죄가 실상은 나의 죄라는 것을 알게 될 때,
- 그래서 이스라엘이 죄로 인해 멸망 심판이 내려졌듯, 나에게도 이미 멸망 심판이 내려졌다는 것을 알게 될 때,
- 그래서 멸망 심판이 내려진 이스라엘이 결국 실제로 멸망했듯이, 나에게도 실제 멸망이 일어나게 될 것을 알게 될 때,
- 죄에서 벗어나게 해달라는 절박한 간청이 그때에야 비로소 우리에게 나올 것이다.
반대로 말해서,
- 죄에 대한 인식과 죄로 인한 멸망 심판의 공포가 없는 사람은 절대로 하나님을 의지할 수 없다.
- 물론 공포로만 채워진 신앙이 신앙일 수 없지만, 공포가 배제된 신앙 역시 신앙일 수 없다.
- 하나님이 두렵지 않다는 것은 자신에게 내려진 하나님 멸망 심판을 모른다는 것이고,
- 심판의 공포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심각한 죄를 범했는지 모르는 것이며,
-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은 혼자서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대신 해결해주는 흥신소밖에 안 된다.
즉, 본문은 자신의 죄를 모르는 우리에게 죄를 깨닫게 하는 데 목적이 있다.
- 그것을 위해 이스라엘의 죄가 이용된 것이다.
따라서 이번 본문을 통해 멸망 심판의 공포로 몸과 마음이 완전히 얼어붙어서,
- 하나님을 통한 구원 외에는 어떤 생각도, 어떤 행동도 할 수 없게 되는 두려움이 찾아오기를 기대한다.
그래서 하나님을 통한 회복과 자유가 임하기를,
- 그래서 죽음의 공포와 두려움으로부터 자유케 되기를,
- 그래서 아무런 두려움 없이 마음껏, 죽음을 감수하며 목숨을 걸고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게 되기를 바란다.
그것만이 인생다운 인생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어떻게 선을 악으로 갚았는가?
먼저 선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었는가?
- 예레미야가 하나님께 이스라엘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했던 것이다.
[렘 18:20] 선을 악으로 갚아도 되는 겁니까? 그런데도 그들은 제 목숨을 노려서 함정을 팠습니다. 제가 주님 앞에 나서서 그들을 변호한 것, 주님께서 그들을 보시고 진노하셨지만, 주님의 진노를 풀어드리려고 그들을 생각하면서, 주님의 은혜를 간구한 것을, 기억하여 주십시오.
실제로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반복되는 거절에도 이스라엘의 구원을 구했었다.
[렘 14:20~21] 주님, 우리는 우리의 사악함과 우리 조상의 죄악을 인정합니다. 우리는 주님께 죄를 지었습니다. (21) 그러나 주님의 이름을 생각하셔서라도 우리를 박대하지 마시고, 주님의 영광스러운 보좌가 욕되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주님께서 우리와 맺은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 언약을 깨뜨리지 말아 주십시오.
[렘 15:1] 그 때에 주님께서는 나에게 말씀하셨다. “비록 모세와 사무엘이 내 앞에 나와 빈다고 해도, 내가 이 백성에게 마음을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이 백성을 내 앞에서 쫓아내라!
하지만 그렇게 선을 행했던 예레미야에게 이스라엘은 선을 악으로 갚는다.
[렘 18:18] 백성이 나를 두고 이르기를 “이제 예레미야를 죽일 계획을 세우자. 이 사람이 없어도 우리에게는 율법을 가르쳐 줄 제사장이 있고, 지혜를 가르쳐 줄 현자가 있으며, 말씀을 전하여 줄 예언자가 있다. 그러니 어서 우리의 혀로 그를 헐뜯자. 그가 하는 모든 말을 무시하여 버리자” 합니다.
- 이스라엘을 살리기 위해 애썼던 예레미야를 이스라엘은 죽이려고 한다.
왜냐?
- 예레미야가 전한 율법, 지혜, 말씀이 싫었기 때문이다.
- 그래서 불편한 율법, 지혜, 말씀을 전하는 예레미야 말고, 위로와 평안을 주는 율법, 지혜, 말씀을 전하는 새로운 사람을 원했기 때문이다.
- 그러나 하나님은 위로와 평안을 주는 예언을 '거짓 예언'이라고 하셨다.
[렘 14:15] 주님께서 그 예언자들을 두고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들은 내가 보내지도 않았는데, 내 이름으로 거짓 예언을 하였다. ‘이 땅에는 전쟁과 기근이 없을 것이다’ 하고 말한 예언자들은 전쟁과 기근으로 죽을 것이다.
그렇다면 예레미야는 무슨 말을 했길래 이스라엘이 그렇게 싫어했냐?
- 한 마디로,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고했다.
- 대표적으로 '허리띠 예언'이다.
[렘 13:8~10] 그 때에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9) “나 주가 말한다. 내가 유다의 교만과 예루살렘의 큰 교만을 이렇게 썩게 하겠다. (10) 이 악한 백성은 나의 말 듣는 것을 거부하고, 자기들의 마음에서 나오는 고집대로 살아가고, 다른 신들을 쫓아가서 그것들을 섬기며 경배하므로, 이제 이 백성은 전혀 쓸모가 없는 이 띠와 같이 되고 말 것이다.
- 예레미야는 썩어서 쓸모없게 된 허리띠와 같이 하나님을 거부한 이스라엘이 멸망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왜 이런 말을 했냐?
- 이런 말 하면 상대방 기분이 나빠지고 상처가 될 것을 몰라서 그랬나?
- 이스라엘을 너무 미워해서 일부러 상처 주려고 그랬나?
아니다. 정말 사랑해서 그랬다.
-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을 사랑했다.
- 얼마나 사랑했냐면, 자기 몸처럼 사랑했다.
- 이스라엘을 자신의 기반과 터전이라고 믿었고, 생명의 공급처라고 믿었다.
- 그래서 누구보다 이스라엘이 회복되길 바랐다.
- 하나님보다 이스라엘을 더 사랑해서, 하나님을 거역하는 문제를 일으킬 정도로 말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회복되기 위해서는 위로와 평안보다 정죄가 필요했다.
- '괜찮다.'는 위로보다는 '안 괜찮다. 그러면 안 된다.'는 경고가 필요했다.
- 그래서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이 상처받을 것을 감수하고 단호하게 경고했다.
예레미야의 유일한 목적은 이스라엘의 회복이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예레미야의 정죄가 싫었다.
- 얼마나 싫었냐면, 예레미야를 죽이고 싶을 만큼 싫었다.
- 그래서 이스라엘은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했다.
[렘 18:20] ・・・・ 그런데도 그들은 제 목숨을 노려서 함정을 팠습니다. ・・・・
이스라엘은 예레미야가 왜 그렇게 죽일 만큼 싫었을까?
- 예레미야의 정죄는 구체적으로 두 가지이다.
- 첫째는, 우상 숭배이고,
[렘 16:18] 그들이 시체 같은 우상으로 내 땅을 더럽히고, 내가 그들에게 물려준 땅을 역겨운 우상들로 가득 채워 놓았으니, 나는 이렇게 우선 그들의 죄악과 허물을 갑절로 보복하겠다.
- 둘째는, 경제적 수탈이다.
[렘 5:27] 조롱에 새를 가득히 잡아넣듯이, 그들은 남을 속여서 빼앗은 재물로 자기들의 집을 가득 채워 놓았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세도를 부리고, 벼락부자가 되었다.
- 이 두 가지 하지 말라는 말을 왜 그렇게 거부했을까?
- 너무 당연해서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다.
이스라엘이 살의를 갖게 된 이유는 딱 하나다.
- 예레미야의 정죄에서 살해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다.
- 예레미야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말이다.
왜 살해 위협을 느꼈냐?
- 이스라엘에게 우상 숭배와 경제적 수탈은 그들의 생명줄이었기 때문이다.
- 그래서 예레미야가 우상 숭배와 경제적 수탈을 멈추라고 했던 말이 생명줄을 끊고 자신을 죽이려는 말로 들린 것이다.
- 살해 위협을 당하는 사람에게 생기는 살의는 당연하다.
- 현재 법에서도 이를 '정당방위'로 인정한다.
-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예레미야를 향해 살의를 갖는 것은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그렇다면 이제부터가 정말 중요한 것이다.
- 왜 이스라엘은 우상 숭배와 경제적 수탈이 그들에게 생명줄이라고 믿었냐는 것이다.
- 그것이 도대체 뭐길래, 이스라엘은 그것을 왜 그렇게 중요하게 여겼냐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지배층에게 우상 숭배와 경제적 수탈은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종교적 지위와 특권을 유지시켜주는 유일한 통로였다.
- 그것을 통해 그들은 자신이 가치 있다고 생각했다.
- 자신이 누리고 있는 풍요를 보며, 사람들이 보내는 부러움의 눈길을 느끼며, 사람들이 자신의 권위에 복종하는 모습을 보며, 사람들이 전하는 감사의 말을 들으며 자신의 정체성과 가치를 확인했다.
- 현대의 사람들이 그러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예레미야가 우상 숭배와 경제적 수탈을 정죄했을 때, 살해 위협을 느꼈던 것이다.
- 그것이 자신의 존재 기반을 떠받치는 것이고, 자신의 가치를 담보하는 것이며,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유일한 통로였기 때문이다.
- 이것이 없으면 자신의 가치와 정체성이 박탈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 그래서 예레미야의 정죄가 존재 기반, 가치, 정체성을 박살 내려는 시도로 느껴졌다.
- 그래서 이스라엘은 예레미야에게 살의를 갖게 된 것이다.
여기서 또 중요한 질문이 있다.
- 이스라엘은 왜 우상 숭배와 경제적 수탈을 통해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종교적 지위와 특권을 얻는 것에 존재 기반을 두었을까?
- 그리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가치와 정체성을 드러내야만 했을까?
- 사실상 사회적 지위와 특권은 정체성과 아무 상관 없는데 말이다.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가치를 스스로가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 즉, 자신을 가치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 다른 말로,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인정하고, 수용하며, 사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 또 다른 말로,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거부하고, 부정하며, 혐오했기 때문이다.
자신 안에서 가치를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에,
- 자기 외부에서 가치를 끌고 와서, 가치 없는 자신을 치장해야 했기 때문이다.
- 그래서 사람들에게 가치 없는 자신을 숨기고, 가치 있는 사람처럼 보여야 했기 때문이다.
- 그러기 위해 많은 사람이 가치 있다고 여기는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종교적 지위와 특권이라는 옷으로 추하다고 여기는 몸뚱아리를 가려야 했기 때문이다.
- 그래야 자신이 사람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다고 착각했기 때문이다.
-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사람들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버려질 것이라고 착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옷이 벗겨지는 것은 추한 몸뚱아리가 드러나는 것이고,
- 그것은 자신이 가치 없다는 것이 드러나, 사람들에게 버려질 위기에 처하는 것이며,
- 이는 곧 사회적 죽음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에,
- 예레미야가 옷을 벗기려 하자, 살해 위협을 느끼고 살의를 품게 된 것이다.
이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사회적 성취 욕구를 지나치게 갖는 경우와 같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사회적 지위에서 정체성을 가지려는 원인은 무엇인가?
- 왜 이스라엘은 우상 숭배와 경제적 수탈을 통해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종교적 지위와 특권을 반드시 필요로 했냐?
자신을 가치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 사회적 지위와 특권 없이는 누구도 자신을 가치 있다고 여기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 사회적 지위라는 옷이 벗겨진, 있는 그대로의 몸뚱아리는 추하고,
-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주변의 사람이 자신의 본 모습을 알면, 아무도 관심 갖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특히 자기 자신이 사회적 지위가 없는 자기 자신을 용납할 수 없을 만큼 혐오했기 때문이다.
- 그래서 남들도 자기처럼 자신을 혐오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 왜 사람은 이토록 자기 자신을 혐오하는가?
- 왜 사람은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을 죽음만큼 두려워하는가?
사랑의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사랑받은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 언제나 세상의 가치로 자신이 평가받았기 때문이다.
-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종교적 지위를 기준으로 모든 사람을 평가하는 세상 속에 살고 있으며,
- 그것을 기준으로 상위에 있는 사람은 사랑과 존중을 받지만,
- 하위에 있는 사람은 혐오와 무시를 당하는 상황을 셀 수 없이 경험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직접 그런 경험을 하기도 하지만,
- 주변 사람이 그런 취급 당하는 모습을 보며 셀 수 없이 간접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 특히 자신 안에서도 상위에 있는 사람을 존중하는 마음과 하위에 있는 사람을 무시하는 마음을 반복해서 느끼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의 가치도 똑같은 잣대로 평가한다.
-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종교적 지위를 갖기에 적합한 성향은 좋은 것,
- 그렇지 않은 성향은 나쁜 것으로 구분하고,
- 좋은 것만 드러내고, 나쁜 것은 억누른다.
- 그러다가 만약 나쁜 것이 드러나면, 부끄러워하며 자신을 책망한다.
- 그러면서 다음에는 부끄러운 모습을 결코 드러내지 않고 숨기겠다고 다짐한다.
- 이렇게 자기가 자신을 혐오한다.
자신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지 못하고 말이다.
이것이 왜 문제냐면,
-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지 못하면,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 못하고,
- 그러면 절대로 자신의 진짜 모습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 오히려 자기가 자신으로부터 멀어져서, 정체성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 정체성을 갖기 위해 얻은 사회적 지위가 도리어 정체성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 게다가 자신과의 간극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멀어지기 때문이다.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것이 또 왜 문제냐면,
- 정체성을 잃은 사람은 결코 누구와도 진정한 관계를 맺을 수 없기 때문이다.
- 특히 자신이 사랑하고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 그렇기 때문에 정체성을 잃은 사람은 평생 자신이라는 감옥에 갇혀 누구와도 관계 맺지 못하고, 홀로 외롭게 죽어갈 수밖에 없다.
- 마치 전신마비에 걸린 이건희 회장이 누구와도 사랑을 나누지 못하고 비극적으로 죽은 것처럼 말이다.
이처럼 정체성을 잃은 사람은 살아있지만, 실상은 죽은 것이다.
이렇게 극도의 고독과 외로움을 느낄 수밖에 없기 때문에,
- 정체성을 잃은 사람은 더욱 더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필요로 하고,
- 사람들의 사랑을 받기 위해, 더욱 더 열심히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종교적 지위를 얻기 위해 발버둥 친다.
- 그것만이 자신의 외로움을 해결해 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 실상은 자신을 자신 안에 더욱 고립시키는 것임에도 말이다.
이들에게 사회적 지위조차 없으면,
- 그래서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보며 갖는 사람들의 관심조차 없으면,
- 극도의 외로움과 고독을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 그 외로움과 고독이 마치 죽음과 같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사회적 지위를 얻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이다.
- 실제로 그것이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기 때문이다.
- 사회적 지위를 잃는 것은 목숨을 포함해서 모든 것을 잃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사회적 지위를 얻기 위해 배우자, 자녀, 가족, 건강 등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이다.
- 반대로 말하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사회적 성취 욕구를 지나치게 갖는 것이다.
- 사회적 성취를 위해 배우자, 자녀, 가족, 건강조차 포기하는 이유는 결국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이스라엘에게 예레미야는 사회적 지위를 포기하라고 말했다.
- 우상 숭배와 경제적 수탈을 버리라는 것은 사회적 지위를 버리라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스라엘이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 목숨을 포함하여 자신의 전부를 포기하라는 예레미야에게 살해 위협을 느꼈고,
- 그 때문에 이스라엘은 본능적으로 예레미야에게 살의를 품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선을 악으로밖에 갚을 수 없는 이스라엘의 비극적인 실상'이다.
그렇다면 해법은 무엇인가?
해법 이전에 문제의 핵심 원인을 되짚어보면,
-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혐오하는 것이다.
이는 세상에서의 경험 때문이다.
- 세상이 누구도 있는 그대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 세상이 정한 가치, 즉 유용성 혹은 거래 가치에 따라 사람을 상위와 하위로 평가하고,
- 그 평가에 따라 사람을 사랑하거나 혐오하기 때문이다.
- 그래서 세상의 방식대로 자기도 자신을 평가하고 혐오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 단순하게 말해서, 새로운 경험을 하면 된다.
그동안 우리는 세상에서 거래 관계만 경험했다.
- 우리에게 있는 많은 모습 중에 거래 가치가 있는 모습만 빼고 전부 혐오 당하는 경험만 했다.
- 그래서 자기조차 자신을 혐오하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경험이 필요하다.
- 자신의 가치를 평가당하지 않고, 상위와 하위로 구분 당하지 않고, 순위 매겨지지 않고,
- 자신의 전부를 있는 그대로 수용 받고, 인정받고, 존중받고, 사랑받는 경험이 필요하다.
- 그래서 지난 평생의 경험을 전부 부정할 만큼 사랑의 관계를 반복해서 경험해야 한다.
특히 세상의 기준에서 가장 혐오 당했던 부분을 사랑 받는 경험이 필요하다.
- 세상은 거래 가치가 없는 부분을 혐오하여, 스스로 억누르고 제거하도록 강요한다.
- 왜냐하면 사람에게 더 많은 가치를 뽑아먹기 위해서이다.
- 그 경험이 반복되어, 사람에게 거래를 기준으로 하는 평가 기준이 생기고,
- 자기도 자신을 거래 기준으로 평가하여, 결국 자기도 자신을 혐오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혐오 당했던 부분조차 사랑받는 경험이 쌓이면,
- 거래를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했던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깨닫게 되고,
- 그러면 거래 가치가 없는 자신의 부분조차 혐오할 필요 없이 사랑하게 된다.
게다가 그렇게 자신을 사랑할 때, 거래 가치가 없어 보이는 다른 사람도 있는 그대로 사랑하게 된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장 혐오 당했던 사람을 회복시키신 것이다.
- 물론 그들이 단순히 불쌍해서, 세상에서 사랑받으며 살도록 하기 위한 것도 있지만,
- 그것은 후순위 목적이다.
- 최우선의 목적은 혐오 당한 사람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을 통해 우리가 스스로 혐오했던 부분조차 사랑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 그래서 자기가 자신의 모든 부분을 온전히 사랑할 수 있도록 말이다.
그렇게 거래 기준의 평가로부터 벗어나, 자신부터 온전히 사랑할 수 있을 때,
- 하나님을 거래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게 되고,
- 다른 사람도 똑같이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전부를 걸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다.
- 독생자 예수님까지 보내셔서 우리에게 사랑하신다는 하나님의 마음을 전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이렇게 사랑하시는데, 왜 이스라엘은 여전히 자신을 사랑하지 못할까?
이스라엘은 자신을 사랑하지 못했다.
- 그래서 우상 숭배와 경제적 착취를 통해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종교적 지위와 특권을 얻으려 했다.
- 그러다 보니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을 거부했다.
- 그래서 예레미야로부터 우상 숭배와 경제적 착취를 하지 말라는 예언을 들었고,
- 그것에 살해 위협을 느끼고, 예레미야에게 살의를 품게 되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멸망 심판을 듣게 된다.
[렘 18:23] 주님, 저를 죽이려는 그들의 모든 흉계를 주님께서는 다 아시니, 그들의 죄악을 용서하지 마시고, 그들의 허물을 가볍게 다루지도 마십시오. 주님께서 진노하시는 날에, 그들이 주님 앞에서 거꾸러져 죽게 하여 주십시오.
- 예언자를 통해 전해진 하나님의 말씀조차 끝까지 거부하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신 것은 멸망이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될 것일까?
- 하나님의 사랑이 부족해서일까?
-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사랑을 제대로 전하지 못하셔서일까?
-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사랑을 몰랐을까?
이스라엘은 누구보다 하나님의 사랑을 잘 알았다.
- 대표적으로 두 가지만 들면,
- 첫째로, 이스라엘 민족의 시작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
- 바로 출애굽이다.
- 이스라엘은 언제나 초강대국 이집트를 초토화시켜서 자신들을 구해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했다.
- 둘째로, 자신들이 밟고 있는 땅 자체가 하나님의 사랑이다.
- 이스라엘은 철저히 하나님의 사랑으로 약속의 땅 가나안에 정착할 수 있었다.
- 특히 여리고 성을 점령할 때는 무기 하나 들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지했다.
- 이스라엘은 언제나 자신의 땅을 보며 모든 정복 전쟁을 주관하셔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을 사랑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 결론부터 말해서, '자신에 대한 왜곡된 사랑' 때문이다.
- 즉, 이스라엘이 자신을 사랑하지 못했던 이유는 자신에 대한 왜곡된 사랑 때문이다.
풀어 설명하기 위해 선악과 이야기를 떠올려보겠다.
- 아담은 왜 선악과를 먹었는가?
- 하나님 대신 자신이 세상의 주인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 그런데 선악과가 그것을 막고 있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면,
- 에덴 동산에서 아담의 뜻을 거스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 아담에게 동물도 순종했고, 식물조차 아담의 뜻대로 풍성하게 열매를 맺었다.
- 그래서 왕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원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었다.
- 아담은 세상의 주인 노릇을 하며 살았다.
그런 아담에게 눈엣가시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선악과이다.
- 아담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유일한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 그것은 하나님이 먹지 말라는 말씀 때문이다.
그래서 선악과는 이중적인 역할을 했다.
- 너무 완벽해서 하나님의 도우심조차 필요 없도록 만들어진 아담이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존재를 기억하도록 하는 유일한 장치이자 동시에,
- 세상의 주인처럼 살아가는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함을 지적하여, 아담 스스로가 세상의 주인이 아니라 피조물임을 기억하도록 하는 유일한 장치였다.
그래서 만약 아담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랑하며 살길 원한다면,
- 선악과는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귀한 통로였다.
그러나 만약 아담이 하나님 없이 세상의 주인이 되어 살길 원한다면,
- 선악과는 아담이 세상의 주인이라는 것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통제 아래 있다는 것을 규정하는 불편한 통로였다.
그런데 알다시피, 아담은 선악과를 먹어서 하나님의 통제를 거부했다.
-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해서, 자신이 세상의 주인이라는 것을 증명하려 했다.
- 물론 실패했지만 말이다.
왜 이랬을까?
- 난 이렇게 표현하고 싶다.
- 아담이 어리석었기 때문이라고.
아담이 선악과를 먹음으로 표면적으로 거부하려 했던 것은 하나님의 통제였지만,
- 실질적으로 거부하려 했던 것은 하나님이 세상과 아담을 창조하셨다는 사실 그 자체이다.
- 아담 자신이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거부하려 했다.
그러니까 아담은 이미 일어나서 불변하는 사실을 부정하려 했던 것이다.
- 이는 마치 내가 부모님에게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 그래서 어리석다고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아담은 왜 이런 어리석은 선택을 했을까?
- 왜 아담은 이렇게 어리석은 선택까지 하면서, 세상의 주인이 되고 싶었을까?
결론은 자신에 대한 왜곡된 사랑 때문이다.
- 누구의 도움도 없이, 누구의 간섭도 없이, 자기가 자신의 주인이 되어,
- 오로지 자기 혼자 힘으로 자기를 사랑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 아담에게 자신이 너무 중요해서, 누구도 함부로 자신을 사랑할 수 없기를 바랐고,
- 오직 자기만 자신을 사랑해서 자신을 충족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아담에게 참 사랑을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신 하나님까지 거부한 것이다.
- 그로 인해 영원한 자기 혐오에 빠진다는 것을 모른 채 말이다.
즉, 아담은 자신에 대한 왜곡된 사랑 때문에 결국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도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 자신을 지나치게 사랑해서 왜곡된 사랑에 빠졌고, 자기 자신을 통해서만 충족되길 원했다.
- 다르게 표현하면, 자신의 가치와 정체성을 오직 자기 스스로 부여하고 발휘하고 싶었다.
- 다른 누군가에 의해 가치와 정체성이 규정되기를 싫어했다.
그래서 하나님에 의해 가치와 정체성이 규정되기를 거부한 것이다.
그 결과 이스라엘이 뭘 했냐면, 돈을 모았다.
- 여기서 돈은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종교적 지위와 특권을 통한 거래 가치를 상징한다.
- 그렇게 스스로 돈을 모아, 자신의 힘으로, 누구의 도움도 없이 자신의 가치와 정체성을 축적하려 했다.
이 선택이 결국 자신의 가치와 정체성을 잃고,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게 된 결정적인 원인이다.
- 그 과정에서 반드시 하나님을 거부해야 했고,
- 그로 인해 하나님의 사랑에서 벗어나야 했기 때문이다.
다시 아담 이야기로 잠시 돌아와,
- 선악과를 먹은 아담은 어떻게 되었는가?
- 우리는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에덴 동산에서 쫓겨났다고 기억하지만,
- 그것은 작은 일부에 불과하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이 당한 재앙의 핵심은 '부끄러움'이다.
[창 3:9~10] 주 하나님이 그 남자를 부르시며 물으셨다. “네가 어디에 있느냐?” (10) 그가 대답하였다. “하나님께서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제가 들었습니다. 저는 벗은 몸인 것이 두려워서 숨었습니다.”
- 아담은 자신에 대한 왜곡된 사랑 때문에 결국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게 되었고,
- 그로 인해 자신조차 사랑할 수 없게 되었다.
- 그 결과 자신을 부끄러워하고 혐오하게 되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떠난 사람에게 일어나는 자기 파괴 본능이다.
- 이러한 자기 파괴를 하나님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말로 표현하셔서 하나님이 내리신 심판처럼 보이지만,
- 실상은 아담이 스스로에게 내린 심판이다.
왜 자기 파괴가 일어나냐?
- 우리의 전부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에게서 떠났기 때문이다.
- 그래서 우리가 거래 가치의 기준으로 우리 자신을 평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래 가치가 없는 자신의 일부를 자신의 가치를 낮추는 부분으로 판단하고,
- 그래서 자신을 부끄러워하고 혐오하게 되어,
- 결국 자신을 부정하고 파괴하는 것이다.
다시 본문의 이스라엘로 돌아와,
- 이스라엘에게 멸망이 예고되는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다.
- 본문을 글자 그대로 읽으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 100% 하나님의 예정하심의 관점에서 이는 사실이다.
그러나 동시에 100% 인간의 자유의지 관점에서, 이스라엘의 멸망은 자기 파괴이다.
- 자기가 자신을 부끄러워하고 혐오했고,
- 그렇게 자기 파괴 본능이 표출되어, 이스라엘이 멸망한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필연적으로 겪는 비극적 숙명이다.
결론 -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자신을 혐오한다.
자기 혐오는 특정 소수가 느끼는 특별한 감정이 아니다.
- 인류 보편의 감정이고,
- 인류 전체가 처한 비극이다.
대표적으로, 바리새인이 있다.
- 그들은 누구보다 존경받았던 사람이다.
- 거래 가치가 상위인 사람이다.
- 그러나 그들이 율법에 그토록 열광적이었던 이유는 율법으로 자신을 치장하지 않으면,
- 있는 그대로의 자기 모습을 자신조차 사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 그러니까 바리새인은 율법에 대한 열광만큼 열광적으로 자신을 혐오했던 것이다.
사람이 사회적 성취에 왜 그렇게 열광하는가?
- 돈, 명예, 직업, 집, 자동차, 옷, 가방, 외모, 인정, 안정을 왜 그렇게 가지려 하는가?
- 그것 없는 자신을 초라하고 추하다며 거래 가치가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 외적인 것이 배제된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혐오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혐오하는 만큼 사회적 성취를 위해 애쓰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결국 자기 혐오 때문에 자기 파괴로 갈 수밖에 없다.
- 아무리 사회적 성취를 이뤄도, 그래서 세상 전부가 자기를 숭배한다고 해도,
- 끝까지 자기는 자신을 혐오할 것이다.
게다가 그렇게 자기를 혐오하는 사람은 세상 모든 사람을 혐오할 것이다.
- 그러다가 결국 자기를 비롯하여 모든 사람에 대한 혐오에 둘러싸여 죽게 될 것이다.
그것이 그것이 하나님의 구원을 받지 못 한 사람이 세상에서 받는 심판이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조건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 자기도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 부족한 부분, 연약한 부분이 있고, 그 때문에 거래 가치가 떨어지지만,
- 그조차 자신의 일부로 인정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 거래 가치 기준에서 자신을 평가하지 않는다.
- 오직 사랑의 관계 관점에서 자신을 바라본다.
예를 들어,
- 자신이 너무 게을러서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는 데 방해가 된다면, 게으름을 고친다.
- 반대로 자신이 너무 부지런해서 사랑하는 데 방해가 된다면, 부지런함도 고친다.
- 또 자신이 너무 가난해서 사랑하는 데 방해가 된다면, 열심히 돈을 번다.
- 반대로 자신이 너무 부자라서 사랑하는 데 방해가 된다면, 가진 돈을 버린다.
즉,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한다고 해서 마음대로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 오히려 사랑에 몰입할 수 있도록 자신을 전부 뜯어고친다.
그런데 거래 가치를 높이기 위해 자신을 뜯어고치는 사람은
- 거래 가치가 높이질 수는 있겠지만,
- 결국 자신의 정체성을 완전히 잃는다.
- 자기를 지불하여 돈을 얻은 셈이다.
하지만 사랑의 관계를 위해 자신을 뜯어고치는 사람은
- 사랑하는 관계가 많아지고 깊어져서,
- 결국 사랑하는 사람을 통해 참된 정체성을 회복한다.
- 자기를 지불하여 사랑하는 사람을 샀는데,
-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자기 자신도 돌려받은 셈이다.
이런 곳이 천국이다.
- 사랑의 관계를 위해 자신을 버리고 뜯어고치면,
- 사랑하는 사람을 얻게 되는 동시에,
- 사랑하는 사람을 통해 진정한 자신을 회복한다.
- 그런데 그렇게 자신을 회복한 만큼 더 자유롭게 사랑할 수 있게 되고,
- 그러면 사랑하는 사람을 통해 더욱 자신을 회복하는 곳이 바로 천국이다.
이렇게 내연과 외연이 동시에 동시에 확장되는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한 것이다.
- 하나님의 사랑만이 관계의 선순환을 시작할 수 있고,
- 관계의 선순환을 통해서만 진정한 자신을 회복할 수 있는 동시에,
- 더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여 그들의 진정한 모습을 회복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신과 주변 사람의 자기다움을 회복시키며 사는 삶이 인간의 창조 목적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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