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양교회 팟캐스트 양따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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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양을 따르는 어린양
예배 대신 예수님, 설교 대신 성경, 건물 대신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미양교회가 만드는 방송입니다.토끼와 개구리가 진솔하게 신앙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어린양과 같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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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메시지는 단순하다.
- 안식일을 지키면, 이스라엘은 영원토록 흥하고,
[렘 17:24~25] ・・・・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면서, 그 날에는 어떠한 일도 하지 않으면, (25) 다윗의 보좌에 앉은 왕들이, 병거와 군마를 타고, 대신들을 거느리고, 유다 사람과 예루살렘 주민까지 거느리고, 이 도성의 성문 안으로 들어올 것이다. 이 도성에서는 영원히 사람이 살 것이다.
- 반면에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면, 이스라엘은 멸망할 것이다.
[렘 17:27] ・・・・ 안식일에 짐을 옮기며, 예루살렘의 성문 안으로 짐을 가지고 들어오면, 내가 이 성문에 불을 질러, 예루살렘의 궁궐을 태워 버릴 것이다. 아무도 그 불을 끄지 못할 것이다.
이 메시지의 의도는 무엇인가?
- 겉보기에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면 멸망하니까, 꼭 안식일을 지켜서 영원토록 흥하라는 권면으로 들릴 수 있다.
- 하지만 실상은 반대이다.
- 이스라엘이 안식일을 지켰다면 영원토록 흥할 수 있었을 텐데,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멸망할 것이라는 심판이다.
- 즉, 잘하라는 권면이 아니라, 멸망할 것이라는 심판이다.
왜 메시지의 의도가 멸망 심판이냐?
-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이스라엘의 죄가 선포되었기 때문이다.
[렘 17:1] 유다의 죄는 그들의 마음 판에 철필로 기록되어 있고, 금강석 촉으로 새겨져 있다. 그들의 제단 뿔 위에도 그 죄가 새겨져 있다.
- 철필과 금강석 촉으로 새겨져 있듯, 이스라엘의 죄는 지울 수 없다.
- 게다가 예레미야도 이스라엘의 구원을 바라던 잘못된 믿음에서 돌이켜 이스라엘의 멸망을 바라는 믿음으로 변화되었다.
- 17장을 기점으로 예레미야는 일관되게 이스라엘의 멸망을 선포한다.
하지만 멸망 심판을 선포하는 것도 메시지의 핵심은 아니다.
- 왜냐하면 그것도 예레미야서에서 여러 차례 강조된 것이다.
- 더 강조할 필요가 없을 만큼 말이다.
그렇다면 본문의 핵심 의도는 무엇이냐?
- 멸망의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다.
-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유를 '안식일'이라는 율법으로 설명하려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렇게 오해하면 안 된다.
- 단순히 안식일만 잘 지켰다면 이스라엘이 멸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은 바리새인의 어리석은 논리이다.
- 안식일을 맹목적으로 지키는 바리새인의 어리석음은 복음서의 핵심 주제 중 하나이다.
- 바리새인에게 안식일은 바른 신앙을 갖도록 하는 수단이 아니라,
- 신앙을 이용하여 자신의 부와 명예를 쌓는 도구였다.
따라서 본문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한 열쇠는 안식일이 갖는 상징적인 의미를 아는 것이다.
- 단순히 안식일 규칙을 잘 지켜야겠다는 다짐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 이는 우리가 지양해야 할 바리새인의 태도이다.
- 중요한 것은 안식일을 통해 드러나는 이스라엘의 죄를 아는 것이다.
- 그래서 그것을 통해 인류의 죄, 그리고 나의 죄를 아는 것이다.
이것이 본문을 해석하는 바른 방법이다.
그런데 문제는 본문에서 안식일의 상징적인 의미를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 본문만 보면, 안식일 규칙 하나 어긴 것 때문에 이스라엘이 멸망한 것 같다.
- 게다가 예레미야서에서는 본문 외에 안식일에 대한 언급이 일절 없다.
그래서 예레미야서의 맥락과 성경 전체의 맥락을 통해 간접적으로 유추해야 한다.
그렇다면 안식일의 상징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 왜 십계명 중에 네 번째 계명인 안식일을 사용해서 이스라엘의 죄를 드러냈을까?
- 도대체 안식일에 어떤 특징이 있길래, 이스라엘 죄의 본질을 드러낼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해서, 안식일은 하나님과의 관계와 사람과의 관계를 동시에 담고 있는 율법이다.
- 이를 반대로 말하면, 안식일을 하찮게 여겼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와 사람과의 관계를 모두 하찮게 여겼다는 것을 상징한다.
- 이것이 본문이 지적하는 이스라엘의 죄이다.
그렇다면 안식일이 뭐냐?
- 우선 '쉬는 날'이다.
- 특히 '노동'에서 쉬는 날이다.
[신 5:12~15] 너희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라. 이것은 주 너희의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한 것이다. (13) 너희는 엿새 동안 모든 일을 힘써 하여라. (14) 그러나 이렛날은 주 너희 하나님의 안식일이니, 너희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너나, 너의 아들이나 딸이나, 너희의 남종이나 여종뿐만 아니라, 너희의 소나 나귀나, 그 밖에 모든 집짐승이나, 너희의 집안에 머무르는 식객이라도, 일을 해서는 안 된다. 너희의 남종이나 여종도 너와 똑같이 쉬게 하여야 한다. (15) 너희는 기억하여라. 너희가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을 때에, 주 너희의 하나님이 강한 손과 편 팔로 너희를 거기에서 이끌어 내었으므로, 주 너희의 하나님이 너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한다.
그런데 왜 노동에서 쉬어야 하냐?
- 좀 더 쉽고 빠르게 설명하기 위해 현대의 '고용주'와 '고용인'에 빗대어 설명하겠다.
- 여기서 고용주는 이스라엘의 지주나 정치, 종교 지도자이고,
- 고용인은 그 외의 나머지 백성이다.
우선 고용인 입장에서 보면,
- 신명기 말씀은 고용인인 '남종과 여종'의 쉼을 강조해서 말한다.
- 오히려 고용주인 '너나 너의 아들이나 딸'의 쉼은 가볍게 지나간다.
- 그러니까 엄밀하게 말해서, 안식일은 고용인을 위한 날이다.
- 고용인이 노동에서 쉴 수 있도록 하나님이 정하신 날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고용인이 쉬는 날을 왜 특별히 정하셨냐?
- 고용인이 쉬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 그래서 하나님이 특별히 쉬는 날을 정하지 않으면, 고용인이 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무슨 뜻인지 잘 알 것이다.
- 고용주와 고용인의 갑을 관계는 고용주의 억압과 폭력이 깔려있고,
- 고용주는 그 힘을 언제나 이익이 극대화되는 것에 사용하며,
- 이익 극대화를 위해 고용인은 쉴 수 있는 권리를 박탈당하기 마련이다.
- 이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렇게 억압, 착취, 폭력에 노출된 고용인을 보호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안식일을 정하신 것이다.
[신 5:14] 그러나 이렛날은 주 너희 하나님의 안식일이니, 너희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 너희의 남종이나 여종도 너와 똑같이 쉬게 하여야 한다.
- 그러니까 안식일은 고용주가 고용인을 억압과 착취가 아닌 사랑으로 대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장치이다.
모든 율법이 그렇듯, 일주일에 엿새 동안은 고용주가 고용인을 마음껏 착취해도 되고,
- 딱 하루 동안만 착취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 아니다.
- 이는 율법주의자의 태도이다.
- 그들은 율법의 참 뜻을 외면한 채 행위만 지킴으로 오히려 율법의 참 뜻을 거역한다.
- 그러나 예수님은 때때로 율법의 행위를 어김으로 율법의 참 뜻을 드러내신다.
- 이것이 율법을 대하는 태도여야 한다.
따라서 안식일의 참 뜻은, 고용주가 고용인을 착취하면 안 되는 하루의 시간을 통해,
- 고용인도 고용주와 똑같은 사람이고,
- 고용인도 똑같이 존중받고 사랑받아야 할 대상임을 기억하도록 해서,
- 일주일 전체 동안 고용주와 고용인이 사랑의 관계를 맺도록 하는 것에 참 가치가 있다.
고용인은 안식일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느꼈을 것이다.
- 정신없이 돌아가는 일과에서 놓여,
- 온전히 안식일 하루 동안 노동에서 구원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시간을 가졌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고용인은 자신을 쉬게 해준 고용주에 대한 감사도 가졌을 것이다.
- 하루를 쉼으로 인해 손해가 생김에도 불구하고,
- 자신을 사랑하고 배려해주는 고용주에게 감사하며,
- 앞으로 고용주가 시킨 일에 더 충성스럽게 임할 것을 다짐했을 것이다.
이렇게 사람 사이에 사랑의 관계를 맺도록 한 것이 안식일의 참 뜻이다.
혹시나 오해할까 봐 말씀드리면,
- 안식일에 대한 이러한 해석이 소수의 진보적 학자의 해석이지 않냐는 반론을 한다면,
- 전혀 그렇지 않다.
- 대수의 신학자가 합의한 해석이다.
- 낯설어서 거부감이 들 수 있겠지만, 안식일에 대한 일반적인 해석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안식일을 노동자 입장에서 보는 성경 구절은 이외에도 많다.
[암 8:4~8] 빈궁한 사람들을 짓밟고, 이 땅의 가난한 사람을 망하게 하는 자들아, 이 말을 들어라! (5) 기껏 한다는 말이, “초하루 축제가 언제 지나서, 우리가 곡식을 팔 수 있을까? 안식일이 언제 지나서, 우리가 밀을 낼 수 있을까? 되는 줄이고, 추는 늘이면서, 가짜 저울로 속이자. (6) 헐값에 가난한 사람들을 사고 신 한 켤레 값으로 빈궁한 사람들을 사자. 찌꺼기 밀까지도 팔아먹자” 하는구나. (7) 주님께서 야곱의 자랑을 걸고 맹세하신다. “그들이 한 일 그 어느 것도 내가 두고두고 잊지 않겠다. (8) 그들이 이렇게 죄를 지었는데, 어찌 땅이 지진을 일으키지 않겠으며, 어찌 땅 위에 사는 자들이 모두 통곡을 하지 않겠느냐? 온 땅이 강물처럼 솟아오르다가, 이집트의 강물처럼 불어나다가, 가라앉지 않겠느냐?”
- 아모스서에서도 안식일은 가난한 사람을 착취로부터 보호하는 장치인데,
- 부자는 안식일의 참 의미를 무시하고, 안식일에조차 가난한 사람을 착취할 고민만 하고 있다.
- 방법은 가짜 저울로 속이거나,
- 신 한 켤레 값을 빌려주고 고리대금을 받아, 결국 사람을 노예로까지 삼는 것이다.
- 그렇게 안식일 행위만 하면서 안식일의 참 뜻을 외면한 사람들에게 아모스는 멸망을 선포한다.
이렇게 하나님은 착취당하기 쉬운 고용인을 고용주로부터 보호하여, 사랑의 관계를 맺도록 하는 장치를 만드셨지만,
- 사람은 하나님의 그런 의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여,
- 사람 사이에 사랑이 아닌 억압, 착취, 폭력이 빈번히 일어났고,
- 그 결과 심판받는다.
다음으로 안식일을 고용주 입장에서 보면,
- 청천벽력 같은 소리이다.
- 하루를 쉰다는 것은 전체 매출의 1/7, 약 14%를 포기하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 이러한 포기를 오로지 고용인을 위해 고용주가 감수하라는 것은 형평성에 맞지 않는다.
하지만 하나님은 고용인뿐만 아니라 고용주를 위해서도 안식일을 정하셨다.
- 고용주에게도 안식일이 소중한 이유는 하나님의 능력을 되새기는 날이기 때문이다.
[신 5:15] 너희는 기억하여라. 너희가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을 때에, 주 너희의 하나님이 강한 손과 편 팔로 너희를 거기에서 이끌어 내었으므로, 주 너희의 하나님이 너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한다.
- 즉, 하나님은 이집트 종살이와 같이 혹독한 어려움이 있을 때도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구원하신 것처럼, 고용주가 위기에 빠졌을 때도 구원하실 능력이 있다는 것을 되새기는 날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고용주에게 왜 이런 날이 필요하냐?
- 특히 고용주가 이런 하나님의 능력을 기억하기 어려운 환경에 있기 때문이다.
- 왜냐하면 고용주는 모든 것을 혼자 결정해야 하고 혼자 책임져야 하기 때문이다.
- 고용주라는 자리가 누구에게도 도움을 받을 수 없는 환경이기 때문이다.
물론 도와주는 비서가 있다.
- 하지만 엄밀하게 말해서, 비서는 고용주가 결정하는 데 도움을 주는 사람이 아니다.
- 오히려 고용주가 결정하는 데 집중할 수 있도록 나머지 자질구레한 일을 대신 처리해주는 사람이다.
- 따라서 아무리 비서가 있어도 결국 고용주는 혼자 결정하고 혼자 책임진다.
- 누구도 대신해주지 않는다.
그러한 환경 때문에 고용주는 언제나 혼자라는 고독함을 느끼고,
-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한다는 과중한 부담감에 짓눌린다.
그때 고용주에게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능력을 되새기는 것이다.
- 모든 것을 혼자 결정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것이다.
- 모든 것을 혼자 책임지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이 함께 책임지신다는 것이다.
- 그래서 혼자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생기면,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출애굽하여 구원하신 것처럼, 자신도 도와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되새기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고용주를 위해 안식일을 만드신 이유이다.
- 이렇게 고용주도 안식일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한다.
게다가 안식일의 또 다른 기능은 '믿음의 고백'이다.
- 고용주 입장에서 안식일은 매출의 1/7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뜻이다.
- 이는 마치 십일조와 같은 의미이다.
십일조가 소득의 1/10을 하나님께 드림으로 소득 전체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것처럼,
- 그래서 소득의 1/10이 없어도 하나님이 자신의 인생을 책임지실 것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처럼,
- 안식일을 통해 매출의 1/7을 하나님께 드림으로, 매출 전체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고백하고,
- 매출 1/7이 없어도 하나님이 자신의 인생을 책임지실 것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이는 할례 의식도 마찬가지이다.
- 할례의 핵심은 남성 성기에 있는 것이 아니다.
- 핵심은 할례를 받으면 일주일 동안 걸을 수 없는 '무방비 상태'가 되는 것에 있다.
- 일주일 동안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최소한의 능력조차 없는 상태가 되는 것에 있다.
따라서 할례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믿음으로 그 무방비의 상태를 감수하겠다는 믿음의 고백이다.
- 일주일 동안 무방비 상태가 되어도 하나님이 지켜주실 것이라는 믿음의 고백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은 광야 40년을 지낸 후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기 직전에 할례를 받았다.
- 때는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한 첫 전투를 앞둔 시점이다.
- 장소는 첫 전투지인 여리고 성으로 가기 직전인 길갈이다.
- 그렇게 가장 위험할 때, 가장 두려울 때, 하나님은 할례, 즉 무방비 상태를 명령하셨다.
[수 5:2] 그 때에 주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돌칼을 만들어, 이스라엘 자손에게 다시 할례를 베풀어라.”
- 그것을 통해 하나님은 전쟁을 하나님이 주관하시며,
- 어떤 상황에서도, 무방비 상태에서도, 이스라엘을 지키시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이신 것이다.
- 동시에 이스라엘은 하나님 명령에 순종함으로 무방비 상태에서도 구원하실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을 고백한 것이다.
이는 고용인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이다.
- 하루를 쉬어서 일당을 받지 못해도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는 믿음의 고백이 안식일의 의미이다.
- 언뜻 생각하기에, 하루 일당 받지 못하는 것이 그렇게 큰 문제일까 싶지만,
- 가장의 하루 일당으로 대식구가 먹을 하루치 식량밖에 살 수 없는 당시 상황에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가족 전체의 죽음을 감수하는 선택이다.
- 죽음을 감수하며 하나님의 구원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정확하게 '만나'가 그런 역할을 했다.
- 안식일에 만나를 거둘 수 없는 것을 대비하여, 특별히 안식일 전날에만 보통의 두 배의 만나를 거둘 수 있게 하셨다.
- 그래서 안식일을 지킬 때 오히려 하나님의 책임지시는 사랑을 더욱 느낄 수 있었고,
- 동시에 배고픔을 감수하고 안식일을 지킴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믿는다고 고백하였다.
따라서 정리하면, 안식일은 고용주와 고용인 모두가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사람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장치였다.
- 고용인은 손해를 감수하고 하루를 쉬게 해준 고용주에 대한 감사와 사랑을 느꼈고,
- 또한 노동에서 구원해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사랑을 느꼈다.
- 동시에 고용주는 고용인도 자신과 똑같은 사람으로 감사와 사랑의 대상이라는 것을 되새겼고,
- 또한 하루를 쉬어 손해를 보아도 하나님이 지켜주신다는 믿음을 되새겼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관계도 사람과의 관계도 소중히 여기지 않았다.
그래서 안식일도 소중히 여기지 않았다.
- 아마도 안식일 규범 자체는 어기지 않았을 것이다.
- 특히 경제적인 힘을 가진 고용주는 철저하게 안식일에 쉬었다.
- 바리새인이 안식일을 엄격하게 지켰던 것처럼 말이다.
- 그것이 자신에게 명예를 가져다주고, 그 명예는 장기적으로 경제적 유익으로 돌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용인은 고용주의 몫까지 더 많은 일을 해야 했다.
- 고용주의 사업은 쉴 수 없기 때문이다.
- 고용주는 안식일을 지킨다는 명예는 얻되, 안식일을 지킴으로 생기는 손해는 감수하기 싫었기 때문이다.
- 그래서 고용인은 고용주의 압박으로 인해 안식일에도 일해야 했다.
결과는 뻔하다.
- 고용인은 혼자 쉬면서 자신에게 일을 억지로 시키는 고용주를 원망했다.
- 그렇게 사람 사이의 관계가 파괴된다.
- 그리고 노동에서 구원받지 못하는 고용인의 처지를 해결하지 못하시는 하나님을 원망했다.
- 또 그렇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된다.
고용주도 마찬가지이다.
- 구시렁거리면서 마지못해 일하는 고용인을 보며, 고용주는 일도 제대로 안 하면서 돈만 축낸다며 그들을 원망했다.
- 그리고 모든 결정과 책임의 부담을 혼자 떠안아 고독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는다며 하나님을 원망했다.
- 이렇게 하나님과의 관계도 사람과의 관계도 파괴된다.
이것이 이스라엘 죄의 핵심이다.
- 이 죄를 드러내기 위해 안식일을 사용한 것이다.
예레미야서는 이런 상황을 지적한 부분이 많다.
- 고용주도 고용인도 서로를 사랑의 관계가 아닌 거래 관계로 보고, 어떻게든 자신의 이익을 늘리기 위해 서로를 속이는 일이 벌어졌다.
- 게다가 이러한 죄를 바로잡아야 할 예언자와 제사장 역시 자신의 유익을 위해 제물만 제대로 갖자 바치면 죄를 적당히 넘어가 주었다.
[렘 6:13~14] 힘 있는 자든 힘 없는 자든, 모두가 자기 잇속만을 채우며, 사기를 쳐서 재산을 모았다. 예언자와 제사장까지도 모두 한결같이 백성을 속였다. (14) 백성이 상처를 입어 앓고 있을 때에, ‘괜찮다! 괜찮다!’ 하고 말하지만, 괜찮기는 어디가 괜찮으냐?
- 또 서로 사랑의 관계를 맺으며, 특히 자기 보호 능력이 없어서 거래 관계에서 착취당하는 '나그네, 고아, 과부'에게조차 사랑의 관계를 맺을 것을 권면한다.
- 하지만 실상은 그런 사람에게 접근하여 손쉬운 거짓말로 더 가혹한 착취를 행했다.
[렘 7:5~8] 너희가, 모든 생활과 행실을 참으로 바르게 고치고, 참으로 이웃끼리 서로 정직하게 살면서, (6)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억압하지 않고, 이 곳에서 죄 없는 사람을 살해하지 않고, 다른 신들을 섬겨 스스로 재앙을 불러들이지 않으면, (7) 내가 너희 조상에게 영원무궁 하도록 준 이 땅, 바로 이 곳에서 너희가 머물러 살도록 하겠다. (8) 그런데도 너희는 지금 전혀 무익한 거짓말을 의지하고 있다.
- 게다가 그렇게 죄가 만연하는 상황에서 제사장은 말 그대로 '면죄부'를 팔아 이익을 챙겼다.
- 제사장에게 제물만 내면 무슨 죄든 용서받을 수 있었다.
- 진정한 회개 없이도 제사장은 제물만 받고 죄 용서를 남발했다.
- 그러니 돈 많은 사람들은 제사를 회개의 기회가 아닌, 돈을 주고 죄를 지을 자격을 사는 수단으로 이용했다.
- 그래서 본문은 성전을 '도둑들이 숨는 곳'이라고 지적한다.
- 실제로 성전은 죄를 범한 사람들의 죄를 숨겨주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렘 7:10~11] 너희는 이처럼 내가 미워하는 일만 저지르고서도, 내 이름으로 불리는 이 성전으로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우리는 안전하다’ 하고 말한다. 너희는 그런 역겨운 모든 일들을 또 되풀이하고 싶어서 그렇게 말한다. (11) 그래, 내 이름으로 불리는 이 성전이, 너희의 눈에는 도둑들이 숨는 곳으로 보이느냐? 여기에서 벌어진 온갖 악을 나도 똑똑히 다 보았다. 나 주의 말이다.
- 결국 이스라엘 사회는 사랑의 관계가 아닌 거래의 관계가 만연하게 된다.
- 자신의 유익을 위해 상대방의 고통을 외면하는 상태가 된다.
- 친척끼리, 이웃끼리조차 서로 사랑하고 의지하기는커녕, 서로를 경계한다.
- 그로 인해 사람과의 관계가 파괴되고, 이는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 파괴로 이어진다.
[렘 9:3~6] 내 백성이라는 것들은 활을 당기듯 혀를 놀려 거짓을 일삼는다. 진실은 없고, 그들의 폭력만이 이 땅에서 판을 친다. 참으로 그들은 악에 악을 더하려고 돌아다닐 뿐, 내가 그들의 하나님인 줄은 알지 못한다. 나 주의 말이다.” (4) “친척끼리 서로 거침없이 사기를 치고, 이웃끼리 서로 비방하며 돌아다니니, 너희는 서로 이웃을 조심하고, 어떤 친척도 믿지 말아라! (5) 누구나 이렇게 자기 이웃을 속이며, 서로 진실을 말하지 않고 있다. 그들의 혀는 거짓말을 하는 데 길들여져 있다. 죄 짓는 일을 그치려 하지 않는다. (6) 서로 속고 속이는 일을 되풀이하면서 기만 가운데 살기 때문에, 아무도 나를 알려고 하지를 않는다. 나 주의 말이다.
이스라엘이 이 지경에 빠졌는데, 사회가 어떻게 유지될 수 있겠는가.
-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멸망을 예고하시는 것이다.
[렘 17:27] 그러나 너희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나의 말을 듣지 않고, 안식일에 짐을 옮기며, 예루살렘의 성문 안으로 짐을 가지고 들어오면, 내가 이 성문에 불을 질러, 예루살렘의 궁궐을 태워 버릴 것이다. 아무도 그 불을 끄지 못할 것이다.
- 이 멸망은 하나님이 계획하신 것이고, 바벨론에 의해 집행된다.
- 하지만 궁극적 원인은 이스라엘 자신이다.
- 사랑의 관계를 버리고 거래 관계를 맺으면, 그 사회는 반드시 자멸한다.
- 결국 자기가 자신을 파괴하게 된다.
- 사회뿐만 아니라 개인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죄를 고발하기 위해 안식일을 사용한 것이다.
- 이스라엘이 안식일 율법을 버린 것을 통해 사랑의 관계를 버린 죄를 드러냈다.
- 그렇게 하나님과의 관계와 사람과의 관계를 버린 이스라엘은 결국 자기 자신도 버린다.
- 그렇게 자기 자신에게조차 버려진 존재가 어떻게 유지될 수 있겠는가.
이것이 이스라엘 멸망의 궁극적 원인이다.
결론 -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자.
그동안 우리는 일요일 예배에 참석하면 안식일을 지킨 것이라고 생각했다.
- 소위 '주일성수'이다.
- 또 반대로 주일성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의 예배가 중요하다는 생각도 했다.
-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 중요하지, 예배 의식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이다.
나는 이런 생각을 깎아내릴 의도는 없다.
- 주일성수도 주일 예배 의식도 중요하다.
- 동시에 예배 의식은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과의 개인적이고 친밀한 관계가 중요하다.
이런 가르침이 필요했던 정황이 있다.
- 일요일에 교회에 간다는 개념 자체가 생소했던 시절에는 주일성수 가르침이 필요했다.
- 주중에 바쁜 사람들에게는 일요일만이 성경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 일요일에라도 교회 와서 한 시간이라도 성경 말씀 듣는 것이 절박한 시절이기 때문이다.
- 그래서 주일성수를 가르친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일요일 예배가 매너리즘에 빠졌다.
- 일요일 예배가 주중의 삶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
- 그래서 주중 삶에서 하나님과의 개인적이고 친밀한 관계를 가르친 것이다.
- 삶 전체의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현재 시점에서 두 가지 가르침은 모두 실패했다.
- 주일성수는 매너리즘에 빠졌다.
- 마치 면죄부처럼 일요일 예배만 드리면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는 것처럼 변질되었다.
- 동시에 일상에서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교제 역시 변질되었다.
- 누구와 관계 맺지 않고도 혼자 마음대로 말씀 읽고 기도하면, 굳이 교회에 매이지 않아도 충분하다는 교만과 착각을 일으켰다.
- 아마도 코로나가 이런 착각을 더욱 강화했을 것이다.
이러한 두 시도 모두 바른 신앙을 갖고자 하는 의도에서 시작되었지만,
- 결국 변질된 신앙을 합리화하는 도구로 전락했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안식일의 의미를 바르게 아는 것이다.
- 의미만 바르게 안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 의미를 최대한 살리는 방향으로 안식일 규칙을 지키는 것이 필요하다.
안식일은 하나님과의 관계와 사람과의 관계를 맺으라고 하나님께서 특별히 정하신 날이다.
- 왜냐하면 특별한 날을 정하지 않으면, 사랑의 관계 맺는 것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살기 때문이다.
- 그러니 딱 하루라도 사랑의 관계를 맺으면 충분하다는 뜻이 아니라,
- 안식일을 기점으로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여, 새로운 일주일 전체 동안 사랑의 관계로 살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안식일을 일요일로 삼고 있는 것이다.
- 일요일이 성경에서 지목한 특별한 날이라서가 아니다.
- 단지 일요일이 쉬는 날이라고 법에서 정하고 있고,
- 그래서 일주일 중에 가장 많은 사람이 일하지 않는 날이며,
-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 사랑의 관계를 맺을 기회가 가장 많은 날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가?
일요일을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는 날로 삼고 있는가?
- 아니면 지난 일주일 동안 거래 관계 맺느라 지친 몸과 마음을 회복하고,
- 새로운 일주일 동안 더 전투적으로 거래 관계를 맺기 위해 몸과 마음을 재장전하는 날로 삼고 있는가?
우리의 마음은 언제나 세상의 거래 관계에서 살아남는 것에 몰두해있다.
- 그래서 일요일조차 세상의 거래 관계에서의 승리를 위해 재장전하는 날로 삼고 있다.
- 그것을 위해 일요일에 잠을 자거나, 밀린 일을 하거나, 새로운 한 주를 대비하는 날로 삼고 있다.
이렇게 물을 수 있다.
- 너무 졸린데 어떡하냐, 지난 주중에 일을 다 못 끝냈는데 어떡하냐, 다음 주에 할 일이 너무 많은데 어떡하냐?
- 유일하게 하루 쉬는데, 그날 만큼은 편하게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스트레스 좀 풀면 안 되냐? 고 말이다.
난 이렇게 말할 것이다.
- 일요일에 졸리지 않게 주중에 일찍 자고 늦게 일어나라.
- 주중에 다 끝내지 못하는 일이라면, 주중에 끝낼 수 있는 일로 직업을 바꿔라.
- 쉬는 날이 그렇게 절박하게 필요하면, 주중에 쉬어라.
- 풀지 않으면 안 될 스트레스가 있다면 주중에 풀고, 그게 안 된다면 스트레스 받는 일을 하지 말라.
그러니까 관점을 바꾸라는 것이다.
- 지금은 주중의 거래 관계가 우선이고, 일요일의 사랑의 관계는 후순위인데,
- 그래서 주중의 일과를 잘 처리하기 위해 일요일을 소모하는데,
- 그것은 안식일의 참 뜻을 거역하는 것이다.
- 그러면 이스라엘처럼 우리도 멸망한다.
일요일에 사랑의 관계를 맺는 것에 집중할 수 있도록 주중의 삶을 재조정하라는 뜻이다.
- 물론 그러면 경제적으로 손해를 볼 것이다.
- 수입이 적어질 것이다.
- 하지만 그 기회비용을 지불하고 신앙을 구입하라는 것이다.
- 수입차 타고, 아파트 사는 데는 수천만 원 수억씩 쓰면서, 왜 신앙에는 어떤 돈도 지불하려 하지 않냐는 것이다.
이는 수입차와 아파트의 가치보다 신앙의 가치를 낮게 보기 때문이다.
- 그렇게 살면 반드시 멸망한다는 것이 본문이 말하는 메시지이다.
- 신앙의 가치를 수입차와 아파트 위에 둬야 생명을 잃지 않는다는 것이다.
[렘 17:21] 나 주가 말한다. 너희가 생명을 잃지 않으려거든, 안식일에는 어떠한 짐도 옮기지 말고, 짐을 가지고 예루살렘의 성문 안으로 들어오지도 말아라.
우리는 삶의 무게를 혼자 지고 있다.
- 내 인생의 고용주가 되어, 고독하게 모든 결정과 책임을 혼자 감당하고 있다.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은 안식일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신다.
- 결정과 책임에서 쉬어라.
- 내가 결정과 책임의 굴레에서 구원하겠다.
- 나를 믿고 쉬면, 노동에서 구원받아 생명을 얻을 것이지만,
- 나를 믿지 않고 일하면, 영원토록 노동만 하다가 자기를 잃고 노동에게 생명을 빼앗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마 11:28~30]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한테 배워라. 그리하면 너희는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다. (30)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 예수님의 멍에는 편하고 가볍다.
- 진정한 쉼이 있다.
- 그 쉼 속에서만 나와 세상을 바르게 볼 수 있다.
- 나와 세상을 바르게 볼 때만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고,
- 특히 나 자신과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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