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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서

예레미야(33) 17:1-12 '사람이 힘이 되어 주려니 하고 믿는' 예레미야에게 필요한 것

<미양교회 팟캐스트 양따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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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4~16장에서 하나님은 예레미야의 어리석음을 드러내셨다.

-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구원을 간절하게 원했다.

- 이스라엘 민족은 예레미야에게 육체적, 정신적, 영적 지지 기반이었다.

- 그래서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보다 이스라엘과 함께하는 것에서 더 큰 인정과 안정을 얻었다.

- 그래서 이스라엘을 멸망시키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기까지 했다.

언뜻 보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예언자가 하나님의 뜻을 거부한다는 것이 이상하게 들린다.

-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지극히 평범한 우리의 일상이다.

- 우리도 평소에는 하나님을 가장 원한다고 말하지만,

- 실제로 우리의 인정과 안정을 담보하는 것은 돈, 직장, 사랑하는 사람, 건강, 명예 등이고,

- 이런 것이 훼손되면, 하나님을 사정없이 원망한다.

- 하나님이면 충분하다는 생각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 훼손된 돈, 직장, 사람, 건강, 명예 다시 되돌려달라고 하나님께 울며불며 매달린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내가 너와 함께하니까, 아무 걱정하지 말고 나만 믿어.'라며 위로하셔도,

- 여전히 돈, 직장, 사람, 건강, 명예 달라고 아우성친다.

-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마음 속으로 '하나님 따위 필요 없어! 빨리 돈, 직장, 사람, 건강, 명예나 되돌려 놔! 그것 없이 쪽팔려서 어떻게 살라고!'라며 하나님을 꾸짖는다.

- 마치 베드로가 예수님이 죽음 예고를 하시자, 그러지 말라고 꾸짖었던 것처럼 말이다.

- 이런 우리와 똑같은 마음으로 예레미야도 하나님께 반응했다.

이렇게 14~16장은 예레미야를 필두로 '사람이 힘이 되어 주려니 믿는' 사람을 향해 경고하고 정죄하는 것에 초점을 두었다.

 

그러나 17~20장에서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구원을 더 이상 구하지 않는다.

-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인지 충분히 알았다.

- 자신의 구원이 이스라엘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임을 알았다.

[렘 17:13] 주님, 이스라엘의 희망은 주님이십니다. 주님을 버리는 사람마다 수치를 당하고, 주님에게서 떠나간 사람마다 생수의 근원이신 주님을 버리고 떠나간 것이므로, 그들은 땅바닥에 쓴 이름처럼 지워지고 맙니다.

그래서 이제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스라엘의 멸망을 구한다.

[렘 18:23] ・・・・ 주님께서 진노하시는 날에, 그들이 주님 앞에서 거꾸러져 죽게 하여 주십시오.

이를 통해 17~20장에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의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예레미야서를 읽을 때 주의점 하나만 짚고 가겠다.

- 예레미야서의 대부분은 이스라엘의 죄를 지적하고, 그에 대한 심판으로 멸망을 선포한다.

- 그래서 글을 읽으면, 메시지의 대상이 멸망 직전에 있는 이스라엘을 향하고 있다고 느낀다.

- 이는 단순한 느낌이 아니라, 본문의 배경이 그렇다.

그러나 실제로 예레미야서는 그렇지 않다.

- 예레미야서의 메시지는 멸망 직전에 있는 이스라엘에게 하는 말이 아니다.

- 예레미야서는 이스라엘이 멸망한 후에 기록되었다.

- 멸망 직전의 이스라엘은 예레미야서를 읽을 수 없었다.

 

그러면 언제 기록되었냐?

- 추정하기로, 멸망 이후 바벨론 포로 시기에 기록되기 시작하여, 포로에서 풀려나 다시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후에 최종적으로 완성되었다.

풀어 말하면, 

- 예레미야가 요시야 왕 시기부터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 시기까지 했던 말이 구전되었다.

- 그런데 이후에 포로 시기부터 포로 귀한 시기 동안 여러 가지 이유로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 그 말을 자기 이름으로 하면 신뢰성이 없고 전달력이 떨어지니까,

- 예레미야의 말을 빌려서 기록한 것이다.

- 그러면 더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갖고 읽을 테니 말이다.

 

기록 이유는 이스라엘의 정체성 회복이다.

- 왜냐하면 이스라엘 멸망으로 인해 자신의 민족에 대해 그리고 민족의 근간이신 하나님에 대해 회의감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 그들에게 민족에 대한 자부심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회복하기 위해 예레미야서가 기록된 것이다.

그렇다면 실의에 빠진 이스라엘이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해 무슨 말을 들어야 하냐?

- 이스라엘의 멸망에 대해 납득해야 한다.

- 이스라엘의 멸망이 우발적으로 일어난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 아니라, 

- 하나님의 뜻에 따라 계획적으로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을 들어야 한다.

 

그것을 위해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 '이스라엘의 죄 지적'이다.

- 이스라엘에게 엄청난 죄가 있었고, 

- 그 죄는 모세의 시기부터 멸망이 예고된 심각한 죄였다는 것이다.

-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멸망은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진 합당한 사건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왜 중요하냐면,

- 멸망의 원인을 알아야, 멸망을 이해할 수 있고,

- 멸망을 이해할 때, 앞으로는 멸망하지 않을 수 있다는 소망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런데 포로 상태의 이스라엘은 왜 멸망했는지 알지 못했고,

- 이를 다르게 말하면, 어떻게 해야 현재의 멸망에서 회복될 수 있는지 알지 못했으며,

- 그랬기 때문에 아무 소망 없이 낙담하고 있었다.

- 현재의 포로 상태에서 벗어날 방법을 전혀 몰라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런 '현재' 이스라엘에게 소망을 주기 위해 '과거' 이스라엘을 정죄한 것이다.

- 그래서 현재 이스라엘이 과거 이스라엘의 죄를 답습하지 않으면, 현재의 멸망에서 회복할 수 있다는 소망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다.

- 그 결과 이스라엘은 과거 이스라엘을 답습하지 않기 위해서 이스라엘이 변질되기 이전의 이스라엘 정통을 연구했고, 

- 그 연구 결과가 아브라함부터 요셉, 모세부터 여호수아 이야기가 기록된 모세 오경이다.

- 이것이 모세 오경의 탄생 과정이다.

물론 '소망을 주기 위해 정죄한다'는 말이 이상하게 들린다.

- 정죄하면 낙담할 것 같은데 말이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정죄는 오답노트 같은 것이다.

- '죄 지적'이 아니라 '지적된 죄로부터의 회복'에 방점이 있다.

- 틀린 것을 모으고, 왜 틀렸는지를 정리하여, 다음에는 틀리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 뭐가 틀렸는지, 왜 틀렸는지 모를 때는 성적 올리기가 막막했는데,

- 틀린 것을 정리하면, 그것만 고치면 된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해진다.

- 할 일이 없어져서 편해지는 것이 아니라, 뭘 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에서 아는 상태로 변화되어서 생기는 편안함이다.

이것이 '소망을 주기 위해 정죄하는' 예레미야서의 기록 목적이다.

 

그런데 이런 예레미야서의 목적 때문에 생기는 문제가 있다.

정죄가 소망을 주기 위해서는 '낙담'이라는 전제가 필요하다.

- 이스라엘이 포로로 끌려가 왜 멸망했는지도 모른 채 소망을 잃고 낙담하고 있었기 때문에,

- 누군가가 이스라엘의 죄를 지적할 때, 정죄를 듣고 죄에서 벗어나 회복될 수 있겠다는 소망을 갖게 되었다.

- 낙담으로 인해 '소망을 주기 위한 정죄'가 작동했다.

만약 그렇지 않은 상황이라면,

- 그래서 여전히 낙담하지 않고, 앞으로 잘 될 것이라는 소망을 갖고 있다면,

- 그런 사람에게 정죄는 단순한 비난, 비하일 뿐이다.

- 기분 나쁜 잔소리일 뿐이다.

- 자신의 창창한 인생에 재를 뿌리는 장해물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포로기에 낙담하고 있는 이스라엘에게, 그리고 포로에서 귀환했지만 황폐해진 예루살렘을 보며 낙담하고 있는 이스라엘에게 예레미야서의 정죄는 소망을 줬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어떤가?

- 정죄가 소망을 주는가?

- 만약 누군가가 '네 인생이 불행한 이유는 이것 때문이야. 너 계속 이렇게 살면, 정말 큰 일 날 거야.' 라고 한다면, 우리는 뭐라고 할까?

먼저 포로 시기의 이스라엘이라면,

- '그래? 그것 때문에 불행했던 거야? 그럼 그것만 고치면 행복해지겠네! 와 신난다!'라고 했을 것이다.

- 소망이 없어 낙담하여, 어찌할 줄 몰라 괴로워하던 이스라엘에게 정죄는 앞으로 나아갈 길을 밝혀주는 빛과 같다.

그러나 우리라면,

- '아니, 나 행복한데? 나 앞으로 잘 될 거야. 돈 많이 벌어서 안정되고, 인정도 받을 거야. 왜 그렇게 쓸데없이 기분 나쁜 소리를 하니?'라고 할 것이다.

- 소망을 갖고, 나름의 계획을 세워서, 그것을 이뤄나가는 데 최선을 다하고 있는 우리에게 정죄는 자신의 앞 날을 방해하는 장애물이며 덫일 뿐이다.

 

이것이 예레미야서의 문제이다.

- 우리 마음의 상태에 따라 같은 메시지가 다르게 들린다는 점이다.

- 낙담한 사람에게는 '소망의 빛'이지만, 

- 소망을 가진 사람에게는 '소망의 덫'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는 단지 예레미야서의 문제가 아니다.

- 성경 전체의 문제이다.

-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 5:3]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 풀어 말하면, 낙심하여 마음이 가난한 사람에게만 성경 말씀이 소망의 빛 되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 그렇게 성경에서 소망을 얻는 사람에게만 하늘 나라, 즉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대로, 마음이 풍요로운 사람은 저주가 있다.

- 자신의 능력을 믿고, 주변 사람을 의지하여, 계획대로만 하면 앞으로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마음이 풍요로워지는데,

- 그런 사람은 성경 말씀이 소망의 덫 되는 저주를 받는다.

- 그러니 성경 말씀을 피하게 되고,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도 파괴된다.

 

그런 점에서 성경의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복음이 아니다.

- '마음이 가난한 사람', 소망 없이 낙담한 사람, 어찌할 바를 몰라 계획조차 세우지 못하는 사람에게만 복된 소식이다.

- 들으면 소망이 되고 기쁨이 생긴다.

- 반면에 '마음이 풍요로운 사람', 소망을 가진 사람, 계획을 갖고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에게 복음은 저주의 소식이다.

- 들으면 찝찝하고 기분이 나쁘다.

그래서 성경은 복음을 '걸림돌'이라고 말한다.

[롬 9:33] 그것은 성경에 기록한 바와 같습니다. “보아라, 내가 시온에,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를 둔다. 그러나 그를 믿는 사람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복음은 복인가, 저주인가?

- 예레미야서의 정죄가 소망을 주는가, 아니면 소망을 빼앗는가?

- 복음이 '소망의 빛'인가, '소망의 덫'인가?

답은 우리에게 달려있다.

- 우리가 세상의 소망을 의지하고, 세상에서 안정과 인정을 얻어, 행복을 얻으려고 한다면,

- 복음은 인생의 덫이 될 것이다.

- 우리가 원하는 것을 방해하고, 빼앗는 폭군 혹은 도둑이 될 것이다.

- 그 두려움 때문에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죽인 것이다.

반면에 세상에 소망을 두지 못하고, 안정과 인정을 얻을 방법을 몰라 괴로워한다면,

- 복음은 인생의 빛이 될 것이다.

- 우리가 원하는 것을 넘치게 주는 자비로운 친구가 될 것이다.

- 마치 소망 없는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예수님으로 인해 구원받은 것처럼 말이다.

 

예레미야서에 나오는 예레미야도 우리와 똑같은 처지에 있었다.

처음에는 세상에 소망을 두고 있었다.

-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어서, 민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안정을 얻고, 민족을 회복시켰다는 인정을 받길 원했다.

- 그럴 때만 전쟁에서 죽지 않는 육체적 만족, 민족 정체성을 지키는 정신적 만족,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는 영적 만족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 그래서 육체적, 정신적, 영적인 생명을 걸고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투신했다.

- 하지만 그로 인해 하나님을 거부하게 되고, 동시에 하나님께 거절당하게 된다.

그렇게 세상을 의지하고, '사람이 힘이 되어 주려니 하고 믿는' 예레미야에게 무엇이 필요했냐?

- 정죄이다.

- 예레미야가 그토록 의지하고 있는 이스라엘이 얼마나 심각한 죄를 범했는지 확실하게 지적해야 했다.

- 그렇게 이스라엘이라는 예레미야의 육체적, 정신적, 영적 지지 기반을 산산조각 내버려야,

- 예레미야가 미련을 갖지 않고 이스라엘로부터 완전히 돌아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17장을 이렇게 시작하는 것이다.

[렘 17:1] 유다의 죄는 그들의 마음 판에 철필로 기록되어 있고, 금강석 촉으로 새겨져 있다. 그들의 제단 뿔 위에도 그 죄가 새겨져 있다.

- 유다의 죄가 철필과 금강석(다이아몬드) 촉으로 새겨진 것과 같이 확실하다는 뜻이다.

언뜻 보기에, 1~4절의 정죄는 유다에 대한 것이기에 유다를 향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 이미 유다는 아무리 말해도 듣지 않는 지경이다. 

- 말해도 소용없는 상태이다.

그럼에도 유다를 향해 정죄하는 이유는 예레미야를 위해서이다.

- 예레미야가 이스라엘의 죄를 확실하게 알아서, 

- 이스라엘의 구원 가능성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멸망 계획에 동참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 그래서 철필과 금강석 촉으로 이스라엘 죄의 확실성을 강조한 것이다.

 

5~8절도 마찬가지이다.

- 5~6절은 하나님을 떠난 사람에 대한 저주이고,

[렘 17:5] 나 주가 말한다. 나 주에게서 마음을 멀리하고, 오히려 사람을 의지하며, 사람이 힘이 되어 주려니 하고 믿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

- 7~8절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 대한 축복이다.

[렘 17:7] 그러나 주님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다.

단순하게 읽으면, 이스라엘에게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메시지 같다.

- 하지만 실제는 예레미야를 향한다.

- 만약 예레미야가 계속해서 이스라엘을 의지하여, '사람이 힘이 되어 주려니 믿는'다면,

- 메마른 사막과 같이 아무런 만족도 얻지 못할 것이라는 경고이다.

[렘 17:6] ・・・・ 그는, 소금기가 많아서 사람이 살 수도 없는 땅, 메마른 사막에서 살게 될 것이다.

반면에, 예레미야가 이스라엘 민족에 매달리지 않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면, 

- 그래서 하나님과 함께 이스라엘의 멸망 선포에 동참하면,

- 물론 무더위와 가뭄을 당하긴 할 테지만,

- 그래서 동족 이스라엘에게 비난, 협박, 살해 위협, 감금에 시달릴 테지만,

-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보호하심 안에서 행복하게 사는 열매를 맺을 것이라는 축복이다.

[렘 17:8] ・・・・ 무더위가 닥쳐와도 걱정이 없고, 가뭄이 심해도, 걱정이 없다. 그 나무는 언제나 열매를 맺는다.

그러니 더 이상 고집부리지 말고, 이스라엘 민족에 미련 두지 말고, 하나님의 뜻에 동참하라는 하나님의 마지막 권면이다.

 

그런 관점에서 9~10절을 보면,

- 본문이 경고하는 '거짓되고 썩은 사람의 마음'은 누구의 마음을 가리키겠는가?

[렘 17:9] 만물보다 더 거짓되고 아주 썩은 것은 사람의 마음이니, 누가 그 속을 알 수 있습니까?

- 우상 숭배에 빠져 죄를 범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마음인 것 같지만, 아니다.

- 갈팡질팡하는 예레미야의 마음이다.

예레미야도 이스라엘의 구원을 바라는 자신의 마음을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 아마도 유일하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선택 받은 백성인 이스라엘의 구원을 바라는 것은 예언자로서 당연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보지 못했을 것이다.

- 그랬기에 당당하게 하나님께 이스라엘의 구원을 요구했다.

- 만약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구원을 거부하신다고 해도, 끝까지 하나님께 요구하는 것이 예언자로서 자신의 사명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 물론 예레미야의 '의식' 안에서 말이다.

그러나 '무의식'에서는 달랐다.

- 예레미야가 이스라엘의 구원을 바랐던 것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 이스라엘에 예레미야의 육체적, 정신적, 영적 생명이 달려있었기 때문이다.

- 이스라엘이 회복될 때만 예레미야 자신의 인정과 안정도 담보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 그래서 하나님을 비난하기까지 하면서 이스라엘을 멸망시키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고,

- 이스라엘의 구원을 요구했던 것이다.

- 그러니까 예레미야는 '하나님에게서 마음을 멀리하고, 사람이 힘이 되어 주려니 믿는 자'였던 것이다.

[렘 17:5] 나 주가 말한다. 나 주에게서 마음을 멀리하고, 오히려 사람을 의지하며, 사람이 힘이 되어 주려니 하고 믿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

- 물론 예레미야는 이런 자신의 무의식을 몰랐으나, 이후에 하나님을 통해서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예레미야 자신의 마음을 두고 '거짓되고 썩었다'고 말하는 것이고,

- 자신조차 알 수 없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렘 17:9] 만물보다 더 거짓되고 아주 썩은 것은 사람의 마음이니, 누가 그 속을 알 수 있습니까?

그리고 그런 예레미야의 마음을 아시고, 지적하신 후, 회복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부각한다.

[렘 17:10] 각 사람의 마음을 살피고, 심장을 감찰하며, 각 사람의 행실과 행동에 따라 보상하는 이는 바로 나 주다.

- 그러니 사람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 의지하라는 것이다.

- 하나님은 무의식, 즉 숨겨진 의도까지 전부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끝으로, 11~12절은 사람을 의지하는 사람과 하나님을 대비하며 끝마친다.

- 사람을 의지하면, 재산을 모으기는 하나 모든 것을 잃고 소멸한다.

- 반면에 하나님은 처음부터 변함없이 같은 자리에 계신다.

 

결론 - 사람을 의지하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도 역시 예레미야처럼 사람을 의지한다.

- 돈, 직장, 사람, 성과, 능력, 인맥 등에서 안정과 인정을 얻는다.

- 그래서 이것에 인생을 건다.

- 이것을 얻을 수 있다면 뭐든 한다.

반대로, 이것을 잃을 때 절망한다.

- 인생의 전부를 잃은 것처럼 괴로워한다.

- 이것 없는 인생을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 때문에 절망한 적이 있나?

-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을 빼앗겼다고 괴로워한 적이 있나?

-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 없는 인생이 상상이 안 되나?

- 전혀 아니다.

- 하나님 없이도 우리는 아무 문제가 없다.

반대로, 하나님께 인생을 걸고 있나?

- 하나님을 얻기 위해 뭐든지 하고 있나?

- 하나님을 통해 안정과 인정을 얻나?

- 전혀 아니다.

 

이것이 우리가 예레미야처럼 하나님이 아닌 사람을 의지한다는 증거이다.

- 물론 의식에서는 하나님을 위한 일을 하고 있을 수도 있다.

- 그러나 무의식에서는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산다.

- 말씀, 기도, 예배, 교제 등 신앙의 이름으로 하는 행위까지 전부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위한 행위를 하면서도, 실제로는 하나님을 부정하고 거부한다.

- 예레미야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죄이다.

그런 예레미야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냐?

- 예레미야가 의지하는 이스라엘에 대한 확실한 정죄였다.

- 그래서 이스라엘이 의지할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었다.

- 이를 통해 예레미야는 사람을 의지했던 마음을 돌이켜서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냐?

- 우리가 의지하는 돈, 직장, 사람, 성과, 능력, 인맥 등에 대한 확실한 정죄이다.

- 이를 확대하여, 돈, 직장, 사람, 성과, 능력, 인맥 등을 얻을 수 있는 세상에 대한 정죄이다.

자세하게 말해서,

-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 세상은 안정과 인정을 결코 주지 않으며,

- 세상은 우리를 만족시켜주시는커녕, 우리를 더욱 괴롭게 만들기만 한다는 것이다.

- 그래서 세상에서 안정과 인정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다.

- 그래야 세상을 향한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을 향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그렇다면, 세상에 대한 정죄를 우리는 어떻게 얻을 수 있나?

예레미야가 이스라엘을 의지하지 않게 되는 과정은 '배신'이었다.

-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이유로 비난, 조롱, 협박, 생명의 위협, 감금까지 당했다.

- 자신은 이스라엘을 의지하며, 그들의 구원을 위해 애쓰는데,

- 이스라엘은 예레미야를 배신했다.

- 예레미야가 이스라엘을 의지하고 싶어도 더 이상 할 수 없도록 이스라엘에게 버려졌다.

- 그렇게 의지할 대상을 잃었기에, 비로소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할 수 있었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 역시 '세상의 배신'이다.

- 우리는 세상을 의지하며, 세상이 잘 돌아가도록 생명을 걸고 애쓴다.

- 세상이 잘 돌아가야 우리도 행복해질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우리의 노력이 세상을 잘 돌아가게 하고, 그로 인해 우리가 실제로 행복해진다면,

- 우리는 절대로 세상으로부터 돌이켜 하나님을 의지할 수 없다.

- 우리가 의지하는 대상이 나를 돕는데, 그 대상을 왜 버리겠는가.

- 세상에 더 헌신해서, 세상에서 더 큰 행복을 얻는 것이 합리적이다.

 

하지만 예레미야와 같이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가만히 두지 않으신다.

- 세상으로부터 참혹한 배신을 당하게 하신다.

- 세상을 의지해서 세상에 헌신했지만, 세상에서의 행복은커녕 실망과 조롱만 당하게 하신다.

- 그래서 세상을 의지할 수 없도록 만드신다.

- 아무리 세상이 매력적으로 보여도, 세상에서 당한 실망이 너무 커서 다시 다가갈 수 없게 하신다.

- 마치 철필과 금강석 촉으로 새기듯, 마음에 세상에 대한 실망을 강하게 남기신다.

그래야만 더 이상 세상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만 의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세상에 미련 두지 않고 하나님만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미양 교회 식구들이 세상에서 망하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 그래야만 세상에 더 이상 눈 돌리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리고 오로지 하나님을 통해서만 행복과 만족, 안정과 인정을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오해하지 않겠지만, 나는 정말로 미양 교회 식구들이 행복하길 바란다.

- 교회 공동체 모두의 인생이 봄날의 꽃처럼 활짝 폈으면 좋겠다.

- 그것을 위해 진심으로 응원한다.

그러나 세상에서 돈을 벌고 성공하길 바라지는 않는다.

- 성공할 수 있는 아무리 좋은 기회가 왔다고 해도 전혀 기쁘지 않다.

-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 왜냐하면 세상에서의 성공은 세상을 더욱 의지하게 만들고,

- 동시에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세상에서의 성공은 '자기가 낳지 않은 알을 품는 자고새와 같아서, 

- 인생의 한창때에 그 재산을 잃을 것이며, 

- 말년에는 어리석은 사람의 신세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되돌아보자.

- 우리는 돈과 성공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겠지만,

- 정말 필요한 것은 실패와 좌절을 통해 세상에 대해 실망하는 것이다.

그것을 통해서만 참 행복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