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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레미야(20) 10:1-16 우상은 공예품이다. - 돈의 거짓 위력
    예레미야서 2022. 2. 19. 10:05

    돈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준다.

    - '생존'과 '생활'이다.

    - 생존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고,

    - 생활은 더 풍요롭고 더 안정된 삶이다.

    - 돈을 통해 몸을 보호할 옷, 힘을 얻을 음식, 쉴 집을 얻을 수 있는 동시에,

    - 몸의 보호를 넘어 과시할 옷, 힘 얻음을 넘어 즐길 음식, 쉼을 넘어 투자할 집을 얻는다.

    다시 말해서, 생존은 반드시 필요해서, 없으면 죽는 것이고,

    - 생활은 꼭 필요하진 않지만, 있으면 좋고 없으면 불편한 것이다.

    - 그렇기 때문에 생존이 보장되면, 더 나은 생활 욕구가 생기고,

    - 반대로 생존이 위협받으면, 생존을 위해 생활을 포기한다.

     

    이렇게 구분하는 이유는 우리가 이를 혼동하기 때문이다.

    - 특히 생활을 위해 돈을 벌면서 생존을 위해 돈을 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 그래서 흔히 '먹고 살아야지.'라는 말로 자신의 돈 버는 행위를 합리화한다.

    이런 합리화를 언제 하냐면, 돈 버는 행위에서 거리낌을 느낄 때이다.

    - 언제까지 이런 '짓'을 하며 돈을 벌어야 하는지 의구심이 들 때이다.

    - 그때 '먹고는 살아야지.'라고 말하는데,

    - 그 말의 의미는, 자신의 돈 버는 행위가 불편하게 느껴지지만, 그렇다고 그만둘 자신이 없을 때,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행위를 생존을 위한 것이라고 암시하여, 생존을 위해 그 정도 불편함은 어쩔 수 없다고 합리화하는 것이다.

    - 나 하나 희생해서 우리 가족의 '생존'을 지키겠다는 착각을 스스로 만든다.

    - 그것으로 불편한 행위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자신을 위로한다.

    - 실상은 생존이 아닌 생활을 위해 돈을 버는데도 말이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당장 돈 벌기를 그만둬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 말하고자 하는 포인트는 적어도 이런 착각에서만큼은 벗어나자는 것이다.

    - 생존과 생활을 명확히 구분하고,

    - 지금 나는 생존이 아닌 생활을 위해 선택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며,

    - 합리화되지 않는 자신의 삶에 대한 불편함을 회피하지 말고 직시하자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 돈을 버는 데 너무 많은 힘을 쓰고 있고,

    - 그로 인해 꼭 필요한 것인 신앙과 사랑하는 사람에 힘을 쓰지 못하고 있으며,

    - 또 그로 인해 언제나 마음에 찝찝함을 갖고 사는데,

    - 우리는 그것을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며 더 나은 대안은 없다고 합리화한다.

    그러나 실상은 생존이 아닌 생활을 위한 선택일 뿐이고,

    - 지금의 선택은 불가피하지 않고, 더 나은 대안이 있으며,

    - 마음에 찝찝함은 나의 잘못된 선택 때문에 생기는 것이고,

    - 지금의 상황을 바꿔서, 꼭 필요한 것인 신앙과 사랑하는 사람에게 더 많은 힘을 쓸 수 있도록 만들 수 있으며,

    - 단지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는 어쩔 수 없는 현실 때문이 아니라, 나의 연약함과 어리석음 때문이라는 것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물론 그것을 인정한다고 당장 모든 것을 바꿀 수는 없다.

    - 그러한 선택 역시 비현실적이다.

    - 아무런 대책 없이 직장을 그만두는 것도 어리석다.

    - 하지만 자신의 실상을 바르게 알아야지만, 지금보다 더 나은 대안을 고민할 수 있고,

    - 그런 고민을 통해서만 현실을 회피하는 '합리화한 선택'이 아니라, 현실을 직시하는 '합리적인 선택'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책 없이 이상만 좇는 무모한 신앙 생활을 하자는 것이 아니다.

    - 합리화와 기만에 휩싸인 비-합리적인 인생에서 벗어나, 

    - 현실을 직시하고 그 안에서 최선의 답을 찾는 합리적인 인생을 살자는 것이다.

    - 단지 세상의 많은 사람이 비-합리적으로 살고 있기에, 합리적인 삶이 무모해 보일 뿐이다.

    - 우리의 현실은 합리적인 선택보다 비-합리적인 선택이 더 편안해진 이상한 상태이다.

     

    그런 고민과 바른 선택이 쌓여서 인생 전체 방향이 새롭게 정립되는 것이다.

    -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기적이 일어나 인생이 한방에 바뀌길 바라지만, 그런 일은 없다.

    - 기적으로 인생이 한방에 바뀌었다는 간증을 들은 적이 있지만, 

    - 확신하건대, 그것은 거짓말이다.

    - 정확하게 표현하면, 그런 간증 메시지는 성경에서 벗어난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간증에서는 한 번의 큰 회개가 인생을 바꾼 것처럼 말한다.

    - 하지만 사람이 울고불고 회개한다고 인생 전체가 바뀌지 않는다.

    - 물론 그런 경험이 다음 선택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

    - 그러나 긍정적인 영향을 줬다고 반드시 긍정적인 선택을 하는 것은 아니다.

    - 새로운 선택에는 또 다시 새로운 각오가 필요하다.

    - 그렇게 수백 수천 번의 선택이 쌓여서 인생의 방향이 한 걸음 바뀌는 것이다.

    - 사도행전에서 극적으로 보이는 바울의 사역이 실상은 지지부진한 선택의 연속이었음을 강조했다.

    길게 보고, 지금 당장의 선택을 신중하게 하는 것이 바른 신앙 생활이며 바른 인생이다.

    - 그런 과정 중에 죄를 깨닫는 것이고, 또 그런 중에 인생의 방향 전환도 일어나는 것이다.

    - 인간은 절대 한방에 쉽게 바뀌지 않는다.

    - 하지만 오랜 시간 반복되면, 어느새 방향이 전환된다.

     

    그런데 바른 인생을 방해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돈의 거짓 위력'이다.

    정확하게 말해서, 돈이 생존을 담보하고 있다는 착각이다.

    - 그렇기 때문에 돈 버는 것은 생존을 위한 것이고,

    - 생존을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희생할 수 있으며,

    - 그렇기 때문에 돈 버느라 신앙과 사랑하는 사람에게 힘을 쓰지 못하는 것은 불가피하다고 합리화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돈의 거짓 위력'이다.

     

    위력(威力)의 뜻을 명확히 하기 위해 법률을 참고하면,

    - 형법 제314조 제1항의 업무방해죄는 위계 또는 위력으로서 사람의 업무를 방해한 경우에 성립하는 것이고, ・・・・ '위력'이라 함은 사람의 자유의사를 제압·혼란케 할 만한 일체의 세력으로, 유형적이든 무형적이든 묻지 아니하므로 폭행·협박은 물론,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지위와 권세에 의한 압박 등도 이에 포함된다.(대법원 2005. 3. 25. 선고 2003도5004 판결)

    - 즉, 돈의 위력은 우리의 자유의사를 제압, 혼란케 한다.

    - 그래서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게 한다.

    만약 돈의 위력이 없다면, 우리는 당연히 신앙과 사랑하는 사람에게 더 힘을 쓰는 선택을 할 텐데, 

    - 돈의 위력 앞에 혼란스러워져서 우리가 마땅히 살아야 할 인생을 방해받는다.

    - 마치 식당 앞에서 깡패가 문을 막고 서서 장사를 방해하는 것처럼 말이다.

    - 위력이 업무방해죄의 원인이듯, 돈은 '인생방해죄'의 원인이다.

     

    그렇다고 돈 없이 살 수 있으니, 돈 다 포기하자는 것이 아니다.

    - 위력이 업무방해죄를 범할 가능성이 있다고, 모든 위력을 다 없애야 하는 것은 아니다.

    - 위력이 업무방해죄를 범하는 상황은 실제로 업무를 방해했을 때만이다.

    - 깡패도 식당에서 밥을 먹을 수는 있다. 

    - 장사를 방해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 다시 말해서, 업무가 중심이 되어 위력의 가치가 재평가된다.

    마찬가지로 돈도 인생을 중심으로 재평가되어야 한다.

    - 돈은 가치 중립적이다.

    - 돈이 없으면 생존할 수 없다.

    - 그러면 신앙도 사랑도 힘들다.

    하지만 우리는 돈을 생존 이상으로 원한다.

    - 어쩌면 원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 진짜 문제는 원하는 만큼 돈을 버는 데 힘을 쓰느라, 신앙과 사랑을 위해 써야 할 힘을 줄이는 것이다.

    - 그러면서 '먹고 살려면 어쩔 수 없어.'라며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굉장히 애매한 문제가 있다.

    - 어느 정도의 돈까지 생존이고, 어디서부터가 생활이냐고 물을 수 있다.

    - 4인 가족 기준 300만 원까지 생존이고, 그 이상부터는 생활이냐?

    - 이 기준을 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리만큼 복잡한 문제이다.

    그러나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중 누구도 생존의 위협이 없다는 점이다.

    - 단지 생존을 위해 돈을 번다고 착각하고 있을 뿐이다.

    - 돈의 위력에 눌려서, 돈 벌기를 멈추면 생존에 위협이 생긴다고 착각하고 있을 뿐이다.

    - 그래서 돈을 버는 데 너무 많은 힘을 쓰고 있다.

    - 그러느라 정말 꼭 해야 할 일을 너무 많이 포기하고 있다.

     

    또 그렇다고 판잣집에 살며, 꽁보리밥 먹고, 옷은 주워 입자는 것이 아니다.

    - 편안하고 깨끗한 집, 적절히 즐거운 식사, 계절과 유행에 맞는 깨끗한 옷도 당연히 필요하다.

    하지만 냉정하게 자신을 보자.

    - 내가 원하는 것이 정말 그 정도 수준인지.

    - 아니면 많은 사람의 '인정'과 어떤 위험도 대처할 수 있는 '안정'을 원하는지.

    - 내가 목표로 삼은 수준이 어느 정도이고, 왜 그것을 원하는지.

     

    인정과 안정을 원하는 것 역시 인지상정이다.

    - 그것도 비판할 수 없다.

    하지만 인정과 안정을 위해 내가 무엇을 얼마큼 희생하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 그것을 얻기 위해 신앙과 사랑하는 사람을 포기하고 있으며,

    -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정과 안정을 위해 '나 자신'을 포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모든 것을 포기해서라도 인정과 안정을 얻을 수 있으면 그 역시 합리적인 선택일 수 있다.

    - 신앙, 사랑, 나보다 인정과 안정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 기준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래도 틀렸다.

    - 왜냐하면 인정과 안정은 노력해서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 그렇기 때문에 인정과 안정을 위한 수고는 모두 헛되다.

    - 애초부터 얻을 수 없는 것을 얻기 위해 신앙, 사랑, 나를 포기한 것이다.

    - 결국 그런 사람은 인정, 안정도 못 얻고, 신앙, 사랑, 나도 잃는다.

     

    그러면 왜 인정과 안정을 얻을 수 없냐?

    - 먼저 안정부터 말하면, 아무리 노력해도 질병과 사고는 막을 수 없다.

    - 경차보다 SUV가, 연립주택보다 주상복합에서 사고 위험이 적지만, 그래도 사고는 난다.

    더욱이 죽음은 아무도 막을 수 없다.

    - 이건희 회장도 사고로, 병에 걸려서, 죽었다.

    - 불안정은 인간의 근원적인 속성이다. 아무도 벗어날 수 없다.

    - 불안정을 피하려는 선택은 안정을 주지도 못하면서 오히려 인생을 낭비하게 한다.

    인정은 얻기 더 어렵다.

    - 인정을 얻기 위해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하면, 남들이 다 하는 거라 치열한 경쟁에서 묻힌다.

    - 반대로 인정을 얻기 위해 자신만의 고유한 것을 하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 두 가지를 섞으려고 하면, 이도 저도 안 된다.

    역사에서도 그렇다.

    - 세종대왕은 한글을 창제할 당시에는 인정받지 못했다.

    - 이순신 장군의 업적도 당시에는 인정받지 못했다.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고유성과 보편성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져야 하는데,

    - 이는 철저히 우연에 의해 결정된다.

    - 예를 들어, 만약 우리가 조선 시대처럼 여전히 중국 문화 아래서 한문을 썼다면, 한글 창제는 지금까지 인정받지 못했다.

    - 또 만약 우리가 임진왜란 이후 지금까지 일본에게 지배당했다면, 이순신은 잊혀졌다.

    - 그들이 지금 인정받는 이유는 그들의 노력과 상관없다.

    - 시대와 상황이 멋대로 뒤틀리다가 우연히 세종대왕과 이순신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춘 것이다.

    - 이것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아무도 모른다.

    이렇게 인정과 안정은 노력한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닌데도, 우리는 희생하며 얻으려 한다.

    - 본전 못 찾을 것이 뻔한 어리석은 투자이다.

     

    그런데도 많은 사이 인정과 안정을 얻기 위해 그토록 애쓰는 이유는?

    인간의 근원적 속성인 불안과 불만족 때문이다.

    - 불안과 불만족 때문에 너무 괴로운데,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는 것보다, 뭐라도 하면 불안과 불만족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 불안과 불만족이 해결됐기 때문이 아니라, 잠시 잊혀지기 때문이다.

    - 그러면서 내가 뭔가를 했더니 불안과 불만족이 낮아졌다는 성취감을 느끼고,

    - 지금보다 더 열심히 하면 불안과 불만족에서 더 벗어날 수 있다는 소망을 갖게 되어,

    - 결국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뭔가에 열중하게 된다.

    그런데 그 열중하는 대상의 중심에 돈이 있다.

    - 돈을 벌면, 돈 그 자체뿐만 아니라 돈 버는데 열중하는 행위에서 불안과 불만족이 낮아지는 느낌을 받는다.

    - 그래서 사람이 그토록 돈에 열중하는 것이다.

    - 이것이 바로 돈의 위력이다.

     

    이렇게만 보면, 돈 버는 것이 왜 문제냐고 물을 수 있다.

    - 열심히 일해서 돈도 벌고, 세상에 긍정적인 기여도 하며, 불안과 불만족도 낮추는 일석삼조라는 것이다.

    하지만 긍정적인 이면에 더 큰 부정적인 면이 있다.

    - 돈 버느라 정말 중요한 신앙과 사랑을 포기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무리 돈을 벌어도 여전히 불안하고 불만족하다는 것이다.

    - 불안과 불만족은 어떤 것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인간의 숙명이기 때문이다.

    - 그래서 이건희 회장이 그렇게 열심히 일했지만, 결국 매춘이나 하며 비극적으로 죽은 것이다.

    - 죽기 직전까지 여전히 불안했고 불만족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결국 노력만 하고 포기만 했지,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게 된다.

    - 이것이 헛되고 헛된 인생의 실체이다.

     

    여기까지가 신앙을 배제하고 인간 상식에 기초해서 인생을 해석한 것이다.

    - 왜 이런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했냐면, 우상숭배를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 사람이 쓸모없이 돈에 열중하는 태도와 우상숭배에 열중하는 태도가 같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신앙 이야기를 하겠다.

     

    그렇다면 사람이 왜 종교를 만들고 우상을 섬기냐?

    돈을 버는 이유와 똑같다.

    - 궁극적으로 인간이 가진 근원적 불안과 불만족 때문이다.

    -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불안과 불만족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좌절감을 그냥 마음에 두고 살기 너무 힘들어서, 사람은 거짓 합리화로 자신을 속인다.

    - 돈이 불안과 불만족에서 벗어나게 해줄 것이라고 말이다.

    - 그런 거짓 믿음을 갖게 된 구체적인 근거는 없다.

    - 단지 그 믿음을 갖고 돈에 열중하면, 실제로 그 순간만큼은 불안과 불만족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다.

    - 그때 얻은 만족과 안정이 실제이냐 허상이냐는 중요하지 않다.

    - 당장 불안과 불만족으로 죽겠는데, 그게 무슨 상관이냐.

    - 당장 마음만 편해지면 그만이지.

    그것 때문에 사람은 돈이라는 거짓 믿음에 빠지는 것이다.

     

    우상에 빠지는 이유도 정확하게 같다.

    - 굿을 한번 신명나게 하면, 적어도 굿을 준비하고 의식을 치르는 동안 만큼은 불안과 불만족에서 벗어난다.

    - 그리고 또한 내가 뭔가를 했다는 믿음 때문에 굿을 치르고 난 다음에도 어느 정도 불안과 불만족에서 벗어난다.

    굿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가 있고, 그것을 근거로 믿는 것이 아니다.

    - 내가 나 스스로 믿음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 내가 나에게 굿은 효과가 있다는 거짓 믿음을 주입하는 것이다.

    - 왜냐하면 그렇게 거짓 믿음에 장악될 때, 불안과 불만족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다.

    - 그것이 비록 자기 기만이라도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 숭배의 대상이 누구냐는 중요하지 않다.

    - 금덩이건, 돌덩이건, 나무에 금을 입힌 것이건 상관없다.

    - 그냥 그럴듯하게 아무 공예품이나 가져다 놓으면 된다.

    [렘 10:3~4] 이방 사람이 우상을 숭배하는 풍속은 허황된 것이다. 그들의 우상은 숲 속에서 베어 온 나무요, 조각가가 연장으로 다듬어서 만든 공예품이다. (4) 그들은 은과 금으로 그것을 아름답게 꾸미고, 망치로 못을 박아 고정시켜서, 쓰러지지 않게 하였다.

    - 어차피 숭배 대상에는 관심도 없다.

    그래서 사람은 마음에 뭔가를 하나씩 섬긴다.

    - 우상이나 미신, 징크스를 섬기는 사람(종교인),

    - 돈, 주식, 부동산을 섬기는 사람(경제인),

    - 업적, 인정, 명예를 섬기는 사람(정치인),

    - 안정, 평온, 평화를 섬기는 사람(수도승) 등이 있을 뿐이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모두 똑같다.

    - 인간의 근원적인 불안과 불만족 때문이다.

    -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잊기 위해서이다.

    이것이 결국 본문에서 비판하는 우상숭배의 실체이다.

    - 허수아비 공예품을 두려워하며 사는 어리석음이다.

    - 그렇게 어리석어질 때만 실제의 불안과 불만족을 잠시나마 회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상숭배는 해악을 준다.

    사람을 멍청이로 만든다.

    -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한다.

    - 마치 타조가 맹수 앞에서 머리를 땅에 처박는 것처럼 말이다.

    - 합리적인 선택이 아니라 합리화된 선택만 하게 한다.

    게다가 잘못된 선택을 하느라 정말 중요한 것을 포기한다.

    - 인간의 불안과 불만족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신앙과 사랑인데,

    - 헛된 것에 힘쓰느라 하나님도 사랑하는 사람도 포기한다.

    - 마치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 우상숭배 하느라 정작 공부를 안 하는 꼴이다.

    대표적인 예가 인신 제사이다.

    - 헛된 욕망, 채울 수도 없는 욕망을 채우려고 사랑하는 자녀를 불태워 죽인다.

    - 이는 하나님에 대해서도 배신이고, 사랑하는 자녀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다.

    - 결국 불안과 불만족을 해소하려다가 더 큰 불안과 불만족에 빠지게 된다.

     

    그러면 인간의 근원적 불안과 불만족을 해결할 방법은 무엇이냐?

    나의 능력, 재산, 건강, 외모 아무 상관 없이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사랑'하는 '안정'된 토대이다.

    - 그 토대 위에서만 사람은 불안과 불만족에서 벗어나, 인정, 안정 욕구를 채울 수 있다.

    - 그래야 자기를 위로하려는 합리화와 자기 기만, 거짓 위력에서 벗어나,

    - 자신과 세계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해석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

    - 그래야 사람은 현명해지고, 바른 선택을 하며,

    - 무엇보다 인간다워질 수 있고, 자기다워질 수 있다.

     

    첫째 토대는 하나님이다.

    - 하나님만큼 우리를 극도로 인정하는 존재는 없다.

    - 하나님은 우리를 신과 같다고 인정하신다.

    - 우리에게 신의 형상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사랑하신다.

    - 사랑의 대가로 자신의 신적 권세를 부정하고 포기할 만큼 사랑하신다.

    대표적인 사건이 창조다.

    - 하나님은 자신 안에 결점이 있고 주권을 가진 인간 세계를 창조하셨다.

    - 그로 인해 하나님의 완전무결함, 전지전능함을 포기하셨다.

    - 오직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서이다.

    또 다른 사건으로, 예수님의 성육신이다.

    -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구원하시려고 독생자를 죽이셨다.

    -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게다가 우리를 인정하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영원무궁하시다.

    - 모든 것은 썩고 사라지지만, 하나님은 영원하다.

    - 따라서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인정과 사랑도 영원하다.

    [렘 10:10] 오직 주님만이 참되신 하나님이시요, 주님만이 살아 계시는 하나님이시며, 영원한 임금이십니다. 주님이 진노하시면, 땅이 지진을 일으키고, 그 진노는 세계 만민이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영원하고 유일하게 안전한 토대이다.

     

    둘째 토대는 사랑하는 사람이다.

    - 인정과 안정은 돈이 아니라 사랑을 통해서만 얻는다.

    - 어쩌면 돈을 버는 이유도 사랑을 얻기 위함이다.

    - 돈 많은 사람이 사랑받는 것처럼 보이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말할 수 없이 인정, 안정 욕구가 충족된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의 사랑은 불안정하다.

    - 그래서 언제 인정을 거부당할지 몰라 불안하다.

    - 이런 점 때문에 사람의 사랑은 한계를 갖는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성령이다.

    - 사람은 성령을 통해 지속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고,

    - 동시에 하나님께 받은 사랑으로 사람을 사랑하게 해주신다.

    이를 통해 불안정한 사람의 사랑이 안정된다.

     

    정리하면, 인정과 안정의 토대는 하나님과 사람이다.

    - 하나님은 사랑의 근원으로서, 근원적, 본질적 토대가 되시고,

    -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구현하는 실제 창구 역할을 한다.

    그래서 사람이 없으면 사랑은 추상적, 이론적 사랑으로 전락하고,

    - 하나님이 없으면 말초적 사랑으로 전락한다.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 되어 삶의 토대가 될 때,

    - 근원적이며 동시에 실제적인 사랑으로 가득 찬 인생이 되고,

    - 그렇게 불안과 불만족에서 벗어나 인정, 안정 욕구가 채워질 때,

    - 사람은 나다워질 수 있는 용기를 얻으며,

    - 그럴 때만 실제 세계를 가장 정확하게 인식하고 판단하여,

    - 온전히 사랑하는 것으로 인생 전체를 채울 수 있게 된다.

    그런 인생만이 말 그대로 '사람의 삶'이다.

    - 그것이 아니면, 짐승과 다르지 않다.

     

    결론 - 가장 나다워질 방법은?

    지금까지 돈의 거짓 위력을 이야기했다.

    - 돈은 생활을 위한 것인데, 생존을 위한 것으로 착각하게 만든다.

    - 그래서 돈을 버느라 나머지 모든 것을 포기하게 만든다.

    - 신앙, 사랑, 자신까지도.

     

    그런데 사람이 갖는 심각한 착각이 하나 더 있다.

    - 그것은 정체성, 나다움, 사람다움이다.

    - 정체성은 실제로 생존인데, 생활을 위한 것으로 착각하게 만든다.

    다시 말해서, 사람에게 정체성은 목숨과 같다.

    - 정체성을 잃은 사람은 산 송장이다.

    - 하지만 많은 사람은 정체성 찾는 것을 배부른 소리라며,

    - 있으면 좋겠지만, 없어도 괜찮은 것으로 치부한다.

    - 정체성을 찾는 것보다 돈 버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 돈 많이 벌어서 여유가 생긴 후에 정체성을 찾아도 늦지 않다고 말한다.

    왜 그렇게 생각하냐?

    - 역시 돈의 거짓 위력 때문이다.

    - 인정과 안정을 얻기 위해서이다.

    - 불안과 불만족을 해결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근원적인 해결책이 아닌 신속하고 간단한 미봉책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 그래서 불안과 불만족에 대한 해결책으로, 불안과 불만족에 있는 자기 자신에게 아예 눈을 감아버린다.

    - 모든 부정적인 감각을 마비시켜 버린다.

    - 그렇게 모든 것을 잊기 위해 돈을 버는 행위 자체와 돈을 소유한 만족감에 몰입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정체성을 찾을 수 있을까?

    어떻게 가장 나다워질 수 있을까?

    - 결국 신앙과 사랑을 통해서이다.

    - 하니님을 통해 근원적인 불안과 불만족이 해결되고,

    - 사랑하는 사람을 통해 인정과 안정 욕구가 채워져야 한다.

    - 그래야 합리화로 왜곡된 현실 인식이 바로잡히고,

    - 돈의 거짓 위력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래야 불안과 불만족을 가진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

    - 그래야 불안과 불만족에 막혀 제대로 볼 수 없었던 자신의 참 매력을 볼 수 있다.

    결국 그 매력을 있는 그대로 발산하는 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이 되고,

    - 그렇게 나답게 살 때,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깨닫고 이룰 수 있다.

     

    이 과정은 한 번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 반복되는 선순환을 통해 조금씩 강화된다.

    - 신앙과 사랑을 통해 인정 안정 욕구 충족,

    - 정확한 현실 인식,

    - 정확한 자기 인식,

    - 하나님이 주신 사명 성취,

    - 이를 통해 신앙과 사랑 강화,

    - 인정 안정 욕구 더 충족,

    - 더 정확한 현실과 자기 인식,

    - 더 철저한 사명 성취,

      - 또 다시 신앙과 사랑 강화가 죽을 때까지 반복된다.

    이렇게 나이를 먹을수록 계속해서 나다워질 때, 의미 있게 죽게 될 것이다.

    - 이것이 가장 나답고, 인간다우며, 정체성을 회복한 사람의 삶이다.

    - 이는 이건희 회장도 이루지 못한 인간의 최고 경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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