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양교회 팟캐스트 양따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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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양을 따르는 어린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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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서 예레미야는 묻는다.
- 이 땅이 왜 망하였는지 알아낼 만큼 지혜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 라고.
[렘 9:12] 이 땅이 왜 망하였는지, 왜 사막처럼 황폐해졌는지, 왜 행인마저 끊어졌는지, 이것을 알아낼 만큼 지혜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 이 까닭을 말할 수 있도록, 주님의 입에서 직접 말씀을 받은 사람이 누구인가?
이렇게 묻는 이유는 단 하나이다.
-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유를 알라는 것이다.
- 그래야 이제라도 돌이켜 회개하고 회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래야 더 심각한 멸망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만약 그러지 않는다면, 정말로 돌이킬 수 없는 멸망에 빠질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예레미야의 물음은 당시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향한다.
- 이스라엘 멸망 후 2500년이 지난 우리라도 이스라엘의 멸망 이유를 제대로 알라는 것이다.
- 그것을 모르면 우리도 이스라엘과 똑같은 죄를 지을 것이고,
- 이스라엘과 똑같이 멸망할 것이기 때문이다.
- 그것을 알아야 멸망하는 세상 속에서 멸망하지 않고 구원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 이스라엘의 멸망 속에서도 예레미야가 구원받았던 것처럼 말이다.
이것을 선포하고 알기를 독려하는 것이 본문의 핵심이다.
- 그런데 과연 우리는 이스라엘 멸망 이유를 제대로 알고 있나?
-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중요한 과제이다.
하지만 예레미야가 본문의 말씀을 선포할 당시,
-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멸망하기 전에는 그것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 멸망이 임박한 순간에도, 멸망당하는 과정에도 멸망당하는 이유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레미야의 물음에 이렇게 답하신다.
[렘 9:13-14] 주님께서 대답하셨다. “나는 이 백성에게 나의 율법을 주면서 지키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그것을 버리고, 나의 말을 순종하지 않고, 실천하지 않았다. (14) 그들은 오히려 자기들의 고집대로 살고, 조상이 섬기라고 가르쳐 준 바알 신들을 따라다녔다."
- 한마디로, 이스라엘은 멸망의 원인이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몰랐다.
-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관계의 증표인 율법을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 대신에 '자기들 고집대로' 살았다.
여기서 '고집'은 우리가 설교에서 많이 들어 잘 아는 '완악함'이다.
-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대화하며 설득하고, 타협하며 조정하고, 양보하며 합의하려는 마음이 없었다.
- 순종은 무조건, 상황과 조건에 상관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부 다 지킨다는 뜻이 아니다.
- 그러한 무조건적, 맹목적 순종이 얼마나 틀렸는지 바리새인을 통해 충분히 배웠다.
- 그들은 맹목적으로 율법에 순종한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죽였다.
- 즉, 맹목적 순종은 결국 하나님에 대한 맹목적 거부로 이어진다.
따라서 참 순종은 관계이다.
- 하나님 말씀을 잘 듣고 내 생각을 잘 전하고,
- 그래서 하나님을 설득하고, 또 그러는 과정에 하나님께 설득당하고,
- 하나님과 사람이 한 걸음씩 양보하고 조정하여, 서로가 만족하는 합의점을 찾는 과정 전체이다.
그렇기에 과정 중에 당연히 논'쟁', 즉 싸움이 있을 수밖에 없고,
- 그 갈등을 풀어가는 과정에서 서로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며,
- 상대방이 이해되는 만큼 상대방에게 배려하고 양보하게 되고,
- 그런 양보가 쌓여 마음이 하나 되는 것이 서로 순종하는 관계이다.
바울은 그것을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사랑으로 서로 섬김'으로 표현했다.
[갈 5:13]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부르셔서, 자유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 자유를 육체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구실로 삼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
- 무조건 서로를 떠받들라는 것이 아니다.
- 맹목적으로 상대 말이라면 주인의 명령으로 받아들이고 따르라는 것이 아니다.
- 수많은 갈등과 화해의 과정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이해를 통해 공감하며,
- 그만큼 양보하여 하나 되라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순종의 본질은 '공감'이다.
그런데 그 공감을 방해하는 것이 바로 '완악함'이다.
나의 주장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 고집스럽게 나의 뜻을 고수하겠다는 마음이다.
- 상대방의 마음에 공감하지 않는 상태이다.
이를 또 이렇게 오해하면 안 된다.
- 고집을 버리겠다고 하며, 생각과 주장을 전부 버리면 안 된다.
- 고집스럽게 주장하지 않겠다며, 흐리멍덩한 주장을 하면 안 된다.
- 무조건 '네 마음대로 해'와 같은 태도가 아니다.
- 이는 맹목적이었던 바리새인의 태도이다.
- 그것 역시 '고집을 버리겠다는 고집'을 부리는 것이다.
- '전부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 것과 '아무것도 내 마음대로 하지 않겠다.'는 것은 모두 똑같이 완악한 것이다.
- 그런 마음은 공감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문제를 회피하기 위해서이다.
- 즉, 공감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완악함을 버린다는 것은,
- 합당하고 정당한 주장을 확고하게 가지고 있는데,
- 그리고 그 주장은 너무 타당해서 조금도 조정할 여지가 없다고 판단한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 중요하지 않은 결정을 상대방과 조정하기는 너무 쉽다.
- 상대방과 공감하지 않아도 할 수 있다.
그런데 매우 중요하고 그래서 확고한 주장이 상대방과 충돌하는 상황에서
- 상대방과의 대화와 설득의 과정을 통해 상대방을 이해하고 공감하여,
- 주장의 본질은 지키되, 그 본질이 상대방에게 가장 잘 전달될 수 있도록,
- 본질 전달 방식을 양보하고 조정하는 것이다.
이것이 억압도 아닌, 종속도 아닌, 바른 공감이다.
이것을 위해 무엇이 필요하냐?
바로 '자유'이다.
[갈 5:13]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부르셔서, 자유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 자유를 육체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구실로 삼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
- 그래서 바울은 사랑의 전제 조건으로 자유를 말한다.
- 자유가 없으면 절대로 공감하는 사랑의 관계를 맺을 수 없다.
사랑의 관계에서 자유가 얼마나 중요한지 간단한 예를 들면,
- 부동산을 많이 가진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 그런 사람은 정부의 종합부동산세 증세를 완강하게 거부하며 정부를 비난할 것이다.
- 반면에 부동산이 없는 사람은 종합부동산세에 관심도 없을 것이다.
- 오히려 정부의 세수가 늘어나는 것을 반길 것이다.
- 그렇기에 두 사람은 종합부동산세를 두고 싸울 수 밖에 없다.
- 이권을 가운데 둔 갈등이기 때문에 서로 양보할 수 없다.
- 즉, 부동산에 '속박'되어 자유가 없으면, 상대방의 입장을 듣고 이해하여 공감할 여지가 없다.
- 그러면 그만큼 관계 맺을 대상이 사라진다.
- 그러나 부동산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비교적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고, 상대방의 입장을 공감하고 수용하여 양보할 여지가 많다.
- 그만큼 관계 맺을 대상이 늘어난다.
그렇다면 공감의 바탕인 자유는 어디서 오냐?
- 욕망 충족에서 온다.
- 예를 들어, 부동산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부동산 소유 욕망이 완전히 충족되면 된다.
- 그러면 부동산 소유 욕망은 어떻게 충족될 수 있냐?
- 부동산을 소유한다고 충족될 수 없다. 돈의 욕망이 충족돼야 한다.
- 그럼 돈의 욕망은 어떻게 충족되냐?
- 돈을 많이 갖는다고 충족되지 않는다. 미래에 대한 불안과 현재의 불만족이 해결되어야 한다.
불안과 불만족은 어떻게 해결되냐?
- 안타깝게도 절대 해결할 수 없다.
- 제한적이고 유한한 인간의 숙명이다.
- 즉, 인간이라면 불안과 불만족에서 절대로 해방될 수 없다.
- 부동산 소유 욕망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는 것이고,
- 인간의 힘으로는 절대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다.
따라서 인간은 인간의 힘으로 절대 자유로워질 수 없다.
부동산 소유 욕망은 오로지 하나님을 통해서만 해결할 수 있다.
- 하나님께서 천국을 약속하심으로 미래에 대한 불안을 해소하셨고,
- 현재 함께 하신다는 약속으로 현재의 불만족을 해결하셨다.
따라서 하나님을 통해서만 모든 욕망에서 자유로울 수 있고,
- 그래야만 자신의 욕망을 조절할 힘이 생기고,
- 그럴 때만 상대방으로 인해 자신의 욕망을 양보할 수 있다.
- 그런 마음 상태에서만 상대방과 진솔한 대화, 조정, 설득, 타협, 합의가 가능하고,
- 그래야만 공감할 수 있다.
- 그런 사람만 관계를 맺고 사랑할 수 있다.
반대로 하나님을 통해 욕망이 충족되지 않은 사람은 결코 사랑할 수 없다.
- 세상에서 관계 맺고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전부 같은 욕망을 가진 사람끼리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협력하는 것뿐이다.
- 한마디로, 거래 관계이다.
- 극단적으로, 부부 관계도, 부모 자식 관계도 이와 같다.
- 욕망 충족 공동체일 뿐이다.
결론적으로, 완악함은 주장을 고집하는 것 자체가 아니라, 주장을 고집하기 위해 누구와도 관계 맺지 않고 공감하지 않는 태도이다.
- 확고한 주장을 가졌다고 완고한 것이 아니라,
- 자신의 주장을 상대방과 공유하고 설득하고 조정하는 과정을 거부하는 것이 완고함이다.
- 공감하지 않는 것이 완고함이다.
- 관계 맺고 대화를 하더라도 서로의 욕망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피상적으로 하는 것이다.
그렇게 완악했던 이스라엘은 어떻게 되냐?
심판받는다.
[렘 9:15~16] 그러므로 나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한다. 내가 이 백성에게 쓴 쑥을 먹이며, 독을 탄 물을 마시게 하겠다. (16) 또 내가, 그들도 모르고 그들의 조상도 알지 못하던 이방 민족 가운데 그들을 흩어 놓고, 내가 그들을 전멸시킬 때까지 칼이 그들을 뒤쫓게 하겠다.
- 정확하게 표현하면, 욕망에 속박되어 완악한 상태가 지속된다.
- 그런데 문제는 그 상태가 필연적으로 자멸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 그래서 이스라엘은 멸망당한 것이다.
이는 이건희 회장의 예를 들어도 마찬가지이다.
- 그는 오래도록 승승장구했다.
- 적어도 우리나라 안에서는 가장 많은 욕망 충족에 성공한 사람이다.
-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그 역시 욕망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 얼마나 속박되었으면 인생의 말년까지 매춘을 했겠냐.
- 이는 욕망에 속박된 사람이 어디까지 추해질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다.
- 바울의 말대로 어렵게 얻은 자유를 가지고 육체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구실로 삼은 전형이다.
[갈 5:13]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부르셔서, 자유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 자유를 육체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구실로 삼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
그랬기 때문에 그는 욕망에 속박되어 자멸했다.
- 욕망으로 인해 충실한 남편의 역할을 하지 못했고,
- 심장 마비가 오고 전신 마비가 되자, 아내에게 처절하게 인격을 짓밟혔다.
- 사람 취급받지 못하고, 철저한 고독 속에서 고통스럽게 죽었다.
- 모든 사람을 호령하던 사람이 모든 사람에게 버려졌다.
- 이것이 인간이라는 존재의 참 멸망이다.
또한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멸망 과정과 같다.
- 이는 남 일이 아니다.
- 우리도 욕망에 속박되어 인생을 소모하면, 똑같은 인생의 멸망을 당할 것이다.
- 우리 주변에도 그런 인생의 말년을 보내는 사람이 수두룩하지 않냐.
그럼에도 하나님은 완악함으로 멸망하는 이스라엘을 그냥 두시지 않았다.
-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왜 망하는지 어떻게든 알려주고 싶어 하신다.
- 알면 독이니, 이스라엘이 멸망 원인을 알아서 더 고통스럽게 벌주시려는 것이 아니다.
- 왜 망하는지 알아서, 돌이켜 회개하고 망하지 않도록 하려 하신다.
- 완악함에서 벗어나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맺고자 하신다.
- 이스라엘을 끝까지 회복시키려고 하신다.
그 방법은 '애곡'이다.
[렘 9:17~18]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너희는 잘 생각하여 보고, 곡하는 여인들을 불러들이고, 장송곡을 부를 여인들을 데리고 오너라.” (18) “서둘러 와서, 우리를 도와서 조가를 불러 다오. 우리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 내리고, 우리의 눈시울에서 눈물이 쏟아지게 하여 다오!”
[렘 9:20] 여인들아, 너희는 주님의 말씀을 들어라. 너희는 귀를 기울여서,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받아들여라. 딸들에게 애도하는 법을 가르치고, 너희도 장송곡 부르는 법을 서로 익혀라.
왜 하필 애곡인가?
먼저 애곡이란, 슬픈 노래, 즉 사람이 죽었을 때 부르는 노래이다.
- 그래서 본문은 장송곡과 조가를 부르며 애도를 준비하라고 말한다.
- 애도의 이유는 이스라엘의 멸망과 그로 인해 왕궁, 거리의 아이들, 장터의 젊은이들까지 전부 죽을 예정이기 때문이다.
[렘 9:21] 죽음이 우리의 창문을 넘어서 들어왔고, 우리의 왕궁에까지 들어왔으며, 거리에서는 어린 아이들이 사정없이 죽어 가고, 장터에서는 젊은이들이 죽어 간다.
- 너무 많은 사람이 죽기 때문에 애곡을 부를 사람이 많이 필요하다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애곡을 준비하라 하셨냐?
-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로, 애곡을 해야 할 상황, 즉 이스라엘의 멸망과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 즉, 멸망 경고이다.
- 그만큼 이스라엘의 죄가 심각하다는 것을 깨닫고, 돌이켜 회개하라는 것이다.
- 그런 과정을 통해 이스라엘의 멸망 이유를 알고, 멸망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것이다.
- 여러 번 말했지만, 하나님의 멸망 경고는 멸망해서 죽으라는 뜻이 아니라 멸망에서 벗어나 살라는 것이다.
둘째로, 공감을 회복하라는 것이다.
- 사람을 그리고 하나님을 말이다.
- 죽음의 고통으로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공감하여 함께 슬퍼하라는 것이며.
- 사랑하는 이스라엘의 죽음에 슬퍼하시는 하나님께 공감하여 함께 슬퍼하라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하나님은 애곡을 준비시키셨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이유는 결국 하나이다.
- 이스라엘 멸망 이유가 곧 공감 없음이기 때문이다.
- 이스라엘 사람이 서로 공감하지 않아서 자신만의 유익을 위해 속고 속이는 기만과 폭력이 판을 쳤다.
[렘 9:3] 내 백성이라는 것들은 활을 당기듯 혀를 놀려 거짓을 일삼는다. 진실은 없고, 그들의 폭력만이 이 땅에서 판을 친다. 참으로 그들은 악에 악을 더하려고 돌아다닐 뿐, 내가 그들의 하나님인 줄은 알지 못한다. 나 주의 말이다.
- 그리고 동시에 이스라엘은 유익을 위해 하나님을 공감하지 않고 우상을 섬겼다.
[렘 8:19] ・・・・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어쩌자고 조각한 신상과 헛된 우상을 남의 나라에서 들여다가, 나를 노하게 하였느냐?”
- 이스라엘은 폭력에 울부짖는 사람에 공감하지 않았고, 우상숭배에 노하신 하나님께 공감하지 않았다.
그래서 '애곡하라!'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은 두 가지 목적을 동시에 이루려 하셨다.
- 멸망이 임박했다는 위기 의식을 통해 멸망 이유인 공감 없음을 빨리 깨닫는 것이 첫째 목적이고,
- 동시에 애곡을 준비함으로 사람과 하나님에 대한 공감을 회복하는 것이 둘째 목적이다.
마지막으로 본문은 첫머리의 질문을 다시 소환한다.
- 이 땅이 왜 망하였는지 알아낼 만큼 지혜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 라고.
먼저 오답부터 말한다.
[렘 9:23] 나 주가 말한다. 지혜 있는 사람은 자기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아라. 용사는 자기의 힘을 자랑하지 말아라. 부자는 자기의 재산을 자랑하지 말아라.
- 머리의 힘을 가진 지혜 있는 사람도 아니고,
- 몸의 힘을 가진 용사도 아니며,
- 돈의 힘을 가진 부자도 아니다.
- 이를 한마디로 하면, 사람의 힘으로는 아무도 알 수 없다는 뜻이다.
사람의 힘으로는 이스라엘의 멸망 이유가 공감 없음임을 알 수 없으며, 사람의 힘으로는 공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정답은 다음과 같다.
[렘 9:24] 오직 자랑하고 싶은 사람은, 이것을 자랑하여라. 나를 아는 것과, 나 주가 긍휼과 공평과 공의를 세상에 실현하는 하나님인 것과, 내가 이런 일 하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아 알 만한 지혜를 가지게 되었음을, 자랑하여라. 나 주의 말이다.
- 번역이 난해하니, 좀 더 간명한 영어 번역을 참고하자.
[렘 9:24, ESV] but let him who boasts boast in this, that he understands and knows me, that I am the LORD who practices steadfast love, justice, and righteousness in the earth. For in these things I delight, declares the LORD.
- 본문이 말하는 것은 두 가지이다.
- 첫째로, 하나님을 알고 이해하는 것(that he understands and knows me), 즉 공감하는 것이 이스라엘 멸망 이유를 알고 멸망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 둘째로, 그런데 하나님을 공감하는 것이 뭐냐면, 세상에서 바르게(righteousness) 모든 대상을 똑같이(justice) 사랑하는(love) 것이다.
이를 줄이면, '하나님 사랑' 그리고 '이웃 사랑'이다.
-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고,
- 그래서 세상에 있는 모든 이웃을 전부 사랑하는 것이다.
-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얼마나 관계 깊은지는 여러 번 말했으니 넘어가겠다.
이스라엘은 이것이 없었다.
-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고 공감하는 것이 이스라엘 존재의 본질인데,
- 이스라엘은 스스로 존재의 본질을 내던졌다.
- 그러니 스스로 와해되어 멸망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멸망하는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은 끝까지 공감을 회복하라고 말씀하신다.
- 그럴 때만 이스라엘이 정체성을 회복하고 바로 설 수 있고,
- 멸망 가운데서 재건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랬기 때문에 똑같은 말씀을 예수님도 반복하신 것이다.
[마 22:36~40] “선생님, 율법 가운데 어느 계명이 중요합니까?” (37)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 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였으니, (38)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으뜸 가는 계명이다. (39) 둘째 계명도 이것과 같은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한 것이다. (40) 이 두 계명에 온 율법과 예언서의 본 뜻이 달려 있다.”
- 율법의 본질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인데,
- 이 둘이 하나라고 말이다.
이것을 깨달을 때, 이스라엘이 왜 망하였는지 알아낼 지혜를 얻는다.
그 지혜가 바로 '공감'이다.
결론 - 어떻게 하면 우리는 공감할 수 있을까?
가장 먼저 강조해야 할 것은, 공감을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다는 것이다.
- 모습을 겉으로만 따라 하는 것일 뿐이다.
참 공감은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 성령만이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실 수 있다.
- 성령을 통해서만 사람을 바르게 이해하고 느낄 수 있다.
그래서 본문에서도 지혜, 힘, 돈으로는 불가능하고, 하나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말했다.
- 그러니 먼저 하나님께 구하자.
- 그래야 공감할 수 있다.
다음으로, 실천의 영역에서 생각해보자.
공감 능력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 첫째는 공감하고자 하는 의지와 마음이고,
- 둘째는 공감의 기술이다.
- 이 두 가지가 있어야 공감할 수 있다.
- 마음은 있는데 기술이 없어도 안 되고, 기술은 있는데 마음이 없어도 안 된다.
하지만 사실상 공감 의지가 더 중요하다.
- 의지만 있으면, 기술을 익히는 것은 시간 문제이기 때문이다.
- 목마른 사람은 어떻게든 우물을 판다.
- 시행착오를 거치지만, 의지가 꺾이지 않으면 결국 나름의 방법을 찾아 공감에 성공한다.
그러나 공감 기술만 있는 사람은 진정한 공감에서 멀어질 가능성이 더 크다.
- 왜냐하면 가진 기술을 이용해서 공감하는 '척' 할 수 있고,
- 그러면 사회 생활에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고, 자신이 공감을 잘한다고 착각하기 쉬우며,
- 진정한 공감에 필요를 더욱 느끼지 못하게 되고,
- 그래서 공감 의지를 갖고자 하는 노력을 더 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감 의지를 갖고자 노력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 그런 측면에서 기술을 쓸모없다.
- 오히려 참 공감을 방해한다.
이스라엘이 왜 망했는지 생각해보면 간단하다.
- 공감 의지가 없어서였는지, 공감 기술이 없어서였는지.
- 당연히 공감 의지가 없어서였다.
우리의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 공감 의지가 없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그런데 공감 의지는 많이 강조했으니까, 공감의 기술 이야기를 해보겠다.
- 반복해서 강조하지만, 공감 기술을 익히는 것은 공감 의지를 키우기 위한 수단만이 돼야 한다.
- 공감 기술을 가졌다고 공감 능력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 그런데 공감 기술을 가지면 공감 능력이 생긴 것 같은 착각을 하기 쉬우니, 특히 조심하자.
- 우리에게 공감 능력은 없다.
공감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서로 진솔해져야 한다.
- 그런데 진솔함이란 아무 말이나 막 하는 것이 아니다.
- 그러면 결국 서로 비난하게 되고, 오해만 쌓여 공감에서 멀어진다.
- 진솔함은 서로의 감정을 '정확하게' 말하는 것이다.
- 그래야 헛수고하지 않고, 대화할수록 이해가 높아진다.
그런데 자신에 대해 정확히 말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 단지 내가 이러한 감정을 느꼈다는 것을 전하는 것은 도움이 안 된다.
- 그 감정의 원인이 되는 사건을 말해야 하고,
- 그 사건이 그런 감정을 유발하게 된 그 이전의 수많은 경험을 말해야 한다.
- 감정의 원인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감정을 제대로 전할 수 없다.
따라서 그것을 위해서는 결국 '나'를 알아야 한다.
-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 왜 그것을 좋아하고 싫어하게 되었는지,
- 어떠한 경험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고, 그 이전에 어떤 선천적 기질을 가졌는지,
- 그러한 성향이 어떤 상황에서 긍정적 혹은 부정적으로 드러나는지 등을 말이다.
이것을 알아야 자신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고,
- 그래야 감정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고,
- 그래야 진솔한 대화를 할 수 있고,
- 그런 대화를 통해 서로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고,
- 그런 이해 속에서 마음이 울리고, 양보의 마음이 생겨서, 조정과 합의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 합의를 통해 일정 부분 손해를 봐야 하지만,
- 그 손해를 감수할 만큼의 공감과 감동이 생기는 것이다.
이런 것 없는 합의는 단지 갈등 회피일 뿐이다.
- 언제든 합의는 깨질 수 있다.
- 그 시점을 늦춘 것뿐이다.
따라서 공감은 '나'에 대한 이해에서 시작된다.
- 자신을 이해한 만큼 남도 이해할 수 있다.
간혹 신앙이 자아를 부정하고 나를 잃어버리는 것으로 말한다.
- 왜 그렇게 말하는지 이해한다.
- 하나님을 주인 삼으라는 뜻이다.
- 완고함을 버리라는 뜻이다.
그러나 완고함을 버리고 하나님을 주인 삼으면, 오히려 참된 나를 찾는다.
- 주장이 더 강해지고, 명료한 사람이 된다.
- 그래서 우리가 보기에 바울이 때로는 고집스럽게 보이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실천 과제는 맹목적 순종이 아니다.
- 오히려 철저한 비판과 검증이다.
- 그런 과정을 통해 자신만의 일관된 논리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나를 알 수 있고, 남을 공감하여, 남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다.
이것이 신앙 생활이다.
- 그렇게 나이를 먹어야 나잇값을 한다.
- 그래야 늙어서 생산 능력이 없어져도, 사람 대우를 받을 수 있다.
- 그렇지 않으면, 이건희 회장처럼 비극적으로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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