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양교회 팟캐스트 양따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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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양을 따르는 어린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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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다양한 주제를 담고 있다.
① 3-6절: 이스라엘의 두 가지 죄 고발
- 첫째는 이스라엘 공동체 내부의 거짓, 사기, 기만, 폭력, 비방, 불신,
- 둘째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 않음을 고발한다.
② 7-9절: 그러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 단련, 시험을 목적으로 심판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신다.
③ 10-11절: 심판받은 이스라엘에 대한 탄식
- 이스라엘은 황무지가 되어 아무도 살지 않는 곳, 그래서 짐승조차 사라진 곳이 되었다.
- 그것을 보며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마음을 담아 슬픈 노래를 읊는다.
그렇다면 본문의 핵심 메시지는 고발, 심판, 탄식 중에 무엇일까?
- 예레미야서를 계속 봐서 알겠지만, 고발, 심판, 탄식은 이미 셀 수 없이 반복되었다.
- 따라서 단지 하나님이 예레미야를 통해 고발, 심판, 탄식하셨다고 결론짓는 것은 동어 반복이다.
- 아무 결론도 내지 않는 것이다.
- 예레미야서뿐만 아니라 구약의 예언서 전체가 고발, 심판, 탄식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문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알기 위해서는, 왜 고발, 심판, 탄식을 했냐를 물어야 한다.
- 이를 위해 본문과 이전 본문의 공통점을 살펴야 한다.
- 그래야 어떤 맥락에 있는지 큰 틀에서 볼 수 있다.
- 동시에 이전 본문과의 차이점을 살펴야 한다.
- 그래야 맥락 안에서 이전 본문과의 차별점을 알 수 있다.
그래야만 맥락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본문의 고유한 외침을 들을 수 있다.
- 그것만이 본문 해석이다.
- 그러나 우리가 들어온 대부분의 설교는 너무 큰 틀에서 본문을 해석하여 본문이 갖는 차별적 메시지를 무시하고 식상한 메시지만 전하거나, 본문의 한 구절에 너무 매여 맥락에서 벗어난 메시지만 전했다.
- 우리는 그런 유치한 해석에서 벗어나자.
그런 점에서 본문의 맥락은 '하나님의 슬픈 감정'이다.
그래서 지난 본문에서 하나님을 울고 계셨다.
[렘 8:18~19] 나의 기쁨이 사라졌다. 나의 슬픔은 나을 길이 없고, 이 가슴은 멍들었다. (19) 저 소리, 가련한 나의 백성, 나의 딸이 울부짖는 저 소리가, 먼 이국 땅에서 들려 온다. ・・・・
[렘 8:21] 나의 백성, 나의 딸이, 채찍을 맞아 상하였기 때문에, 내 마음도 상처를 입는구나. 슬픔과 공포가 나를 사로잡는구나.
- 이번 본문에서도 하나님을 슬픈 노래를 부르신다.
[렘 9:10] 나는 산들을 보고 울며 탄식합니다. 광야의 초원을 바라보고, 슬픈 노래를 읊겠습니다. ・・・・
왜 계속해서 슬픈 감정을 전달하냐?
- 하나님의 감정을 전달해서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같이 느끼도록 하려는 것이다.
- 즉, 공감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 그래서 공감을 통해 이성을 움직이게 하여, 자신의 판단과 판단의 근원인 거래 사고 방식이 하나님과 자기 자신을 얼마나 황폐하게 만드는지 이성적으로 생각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 즉, 죄로 인한 자업자득의 자명한 결과를 깨닫도록 하려는 것이다.
그렇게 이스라엘이 황폐화되었다는 것을 부각하기 위해 '황무지 이스라엘'을 일관되게 부각한다.
- 지난 본문에서는 농업에 비유하여 황무지 이스라엘을 보여줬다.
[렘 8:13] 나 주의 말이다. 그들이 거둘 것을 내가 말끔히 거두어 치우리니, 포도덩굴에 포도송이도 없고, 무화과나무에 무화과도 없고, 잎까지 모두 시들어 버릴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준 것들이 모두 사라져 버릴 것이다.
- 이번 본문에서도 짐승조차 살지 않는 황무지 이스라엘을 보여준다.
[렘 9:10] ・・・・ 그처럼 무성하던 곳들이 모두 황무지가 되었고, 지나다니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가축 떼의 울음 소리도 들려 오지 않습니다. 공중의 새에서부터 들의 짐승에 이르기까지, 다 다른 곳으로 도망하여 사라졌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황무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한 바벨론의 침략 때문이다.
- 하지만 실상은 거래 사고 방식이 갖는 자기 파괴 속성 때문이다.
- 왜냐하면 거래 사고 방식은 본질적으로 속임을 전제하고,
- 이는 모든 주변 사람을 잠재적 사기꾼으로 가정하여,
- 거래 방식을 사용하는 모든 사람을 두려움과 분노 속에 밀어 넣기 때문이다.
그런 사회가 풍요와 안락보다 치열한 경쟁과 전쟁을 통한 삭막함과 황폐함으로 채워지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 그러한 거래 사고 방식의 숙명을 고발하기 위해 황무지 이스라엘을 반복해서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전 본문과 차이점은 무엇인가?
지난 본문에서 하나님의 슬픈 감정의 원인은 우상숭배였다.
[렘 8:19]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어쩌자고 조각한 신상과 헛된 우상을 남의 나라에서 들여다가, 나를 노하게 하였느냐?”
- 여기서 우상숭배는 단순한 종교 행위가 아니다.
- 부도덕한 종교 행위를 넘어, 거래 사고 방식 자체이다.
- 이스라엘은 종교조차 거래로 접근했고, 그것의 결과로 더 큰 유익을 얻기 위해 우상을 섬겼다.
- 이는 결국 하나님 역시 유일무이의 사랑 대상이 아니라,
- 감탄고토의 거래 대상으로 여겼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러한 배신감 때문에 하나님은 슬퍼하셨다.
[렘 9:2] 참으로 이 백성은 모두 간음하는 자들이요, 배신자의 무리이다.
그러나 이번 본문에서 하나님의 슬픈 감정의 원인은 '사람 사이의 속임'이다.
[렘 9:3] 내 백성이라는 것들은 활을 당기듯 혀를 놀려 거짓을 일삼는다. ・・・・
[렘 9:4] “친척끼리 서로 거침없이 사기를 치고, 이웃끼리 서로 비방하며 돌아다니니, ・・・・
[렘 9:5] 누구나 이렇게 자기 이웃을 속이며, 서로 진실을 말하지 않고 있다. ・・・・
[렘 9:6] 서로 속고 속이는 일을 되풀이하면서 기만 가운데 살기 때문에, ・・・・
[렘 9:8] 내 백성의 혀는 독이 묻은 화살이다. 입에서 나오는 말은 거짓말뿐이다. ・・・・
여러 번 말했듯이, '속임'은 거래의 본질이다.
- 거래의 실력은 속임의 기술로 결정된다.
속임 방식은 크게 두 가지이다.
- 첫째로, 자신이 제공하는 가치는 과장해서 늘리고, 상대가 제공하는 가치는 과장해서 줄인다.
- 그래야 더 적은 가치를 제공하고 더 많은 가치를 얻는다.
- 예를 들어, 이거 진짜 귀한 건데, 특별히 너한테만 싸게 파는 거야. 다른 데 가면 이 값에 못 사.
- 둘째로, 자신이 제공할 수 있는 가치를 과장해서 줄이고, 상대가 제공할 수 있는 가치를 과장해서 늘린다.
- 그래야 적은 가치밖에 줄 수 없는 자신을 합리화하며, 상대는 많은 가치를 줘야 한다는 명문을 만들 수 있다.
- 예를 들어, 나 지금 만 원밖에 없어. 만원에 물건 줘. 안 그러면 그냥 갈게.
따라서 본문이 속임을 비판하는 이유 역시 거래 사고 방식을 비판하는 것이다.
- 단순히 착하게 살자는 공익 광고가 아니다.
- 이러한 거래 사고 방식은 사회의 신뢰 관계를 깨고,
- 신뢰가 깨진 사회는 결국 폭력으로 치닫는다.
[렘 9:3] ・・・・ 진실은 없고, 그들의 폭력만이 이 땅에서 판을 친다. ・・・・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을 잠재적 사기꾼으로 보는 세상은 개인의 마음도 사회 시스템도 순식간에 황폐화된다.
[렘 9:10] ・・・・ 그처럼 무성하던 곳들이 모두 황무지가 되었고, 지나다니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가축 떼의 울음 소리도 들려 오지 않습니다. 공중의 새에서부터 들의 짐승에 이르기까지, 다 다른 곳으로 도망하여 사라졌습니다.
- 이는 단지 이스라엘 민족이 멸망을 넘어서, 민족 각 개인의 마음과 정서가 완전히 메말라버린 상태를 보여준다.
- 아무도 믿을 수 없고, 누구에게도 마음을 나누며 위로하고 위로받을 수 없으며,
- 수많은 사람을 만나지만, 그 속에서 완전히 고립되어,
- 육체적 만족, 안정 외에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는 정서적 고갈 상태를 상징한다.
그런데 특이한 구절이 있다.
[렘 9:6] 서로 속고 속이는 일을 되풀이하면서 기만 가운데 살기 때문에, 아무도 나를 알려고 하지를 않는다. 나 주의 말이다.
- 속임을 비판하는 것은 알겠는데,
- 문제는 사람 사이의 속임을 '하나님 알기 거부'과 연결시킨다는 점이다.
어떻게 '사람 사이의 속임'이 '하나님 알기 거부'와 연결될까?
- 이것이 이전 본문과는 다른 이번 본문 메시지의 핵심이다.
- 이러한 차별점을 맥락 안에서 해석할 때 본문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이 둘을 연결하는 것은 '공감'이다.
사람 사이에 속임이 만연한 것도 거래 사고 방식으로 인한 공감 없음 때문이고,
- 하나님 알기 거부 역시 하나님 공감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많은 설교에서 하나님을 앎(히브리어로 '야다')에 대해 많이 말하는데,
- 하나님을 앎이란,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아는 것도 아니고,
- 하나님을 창조주, 통치자, 구원자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 이상이며,
- 하나님을 지식과 경험으로 아는 것도 모자라고,
-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것마저 부족하다.
- 대부분의 이스라엘 민족은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 따라,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며, 하나님을 경험하며, 하나님 뜻대로 산다고 확신했다.
-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상은 하나님을 거부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 마음에 공감하는 것이다.
- 특히 하나님의 슬픔과 고통을 느끼는 것이다.
- 현실에 대해 하나님과 함께 아파하고 함께 우는 것이다.
- 하지만 이스라엘을 비롯하여 지금까지 하나님을 안다는 많은 사람들은 현실을 긍정하며,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착각한다.
[렘 8:11] 백성이 상처를 입어 앓고 있을 때에, 그들은 ‘괜찮다! 괜찮다!’ 하고 말하지만, 괜찮기는 어디가 괜찮으냐?
- 실상은 슬픔과 고통뿐인데 말이다.
-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람 사이에 공감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과 공감하지 않는 것일까?
이 질문은 신약의 새로운 계명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관계에 대한 질문과 같다.
[마 22:36~40] “선생님, 율법 가운데 어느 계명이 중요합니까?” (37)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 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였으니, (38)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으뜸 가는 계명이다. (39) 둘째 계명도 이것과 같은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한 것이다. (40) 이 두 계명에 온 율법과 예언서의 본 뜻이 달려 있다.”
- 마태복음은 첫째 계명 하나님 사랑과 둘째 계명 이웃 사랑을 같다고 말한다.
- 어떻게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같은 것일까?
사람의 사고 방식이 그렇기 때문이다.
- 사람이 거래 사고 방식을 가지면, 공감을 할 수 없고,
- 반대로 사람이 공감 사고 방식을 가지면, 거래를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거래는 사람을 보지 않는다.
- 사람을 봐도, 사람을 사람 취급하지 않는다.
-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나에게 유익을 주는지만 본다.
- 사람뿐만이 아니라 모든 대상을 그렇게 본다.
- 자연 만물과 하나님까지도.
- 그래서 거래에는 공감이 전혀 없다.
반대로 공감은 사람만 본다.
- 극단적으로 예를 들면, 옷도 벗겨서 사회적 지위나 재정 상태도 안보고,
- 사지도 없애서 외모도 안보고,
- 얼굴도 지워서 표정과 말 소리도 안 듣고,
- 정확하게 뇌 그 자체에만 집중한다.
- 무엇을 보는지, 어떻게 느끼는지, 왜 그렇게 느끼는지 생각하며, 순수한 인격에 관심을 둔다.
- 자연 만물과 하나님까지도 그렇게 본다.
- 그러니 유익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
이렇게 거래와 공감은 배타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본문은 사람과 거래하는 사람을 보고 하나님과도 거래하는 사람이라고 단정 짓는다.
- 거래를 통해 유익을 얻기 위해 사람을 속이는 사람은 반드시 동시에 하나님께도 같은 방식으로 다가가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사람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 그래서 복음 전도에 목숨 거는 바울이 구제에 그렇게 열중하는 것이다.
[갈 2:10] 다만, 그들이 우리에게 바란 것은 가난한 사람을 기억해 달라고 한 것인데, 그것은 바로 내가 마음을 다하여 해 오던 일이었습니다.
- 하나님을 사랑했기에 사람도 사랑했다.
반대로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절대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
[마 25:44~46] 그 때에 그들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우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도 돌보아 드리지 않았다는 것입니까?’ (45) 그 때에 임금이 그들에게 대답하기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 이 사람들 가운데서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다’ 하고 말할 것이다. (46)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한 형벌로 들어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갈 것이다.
- 그래서 예수님은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고, 결국 영원한 형벌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가난한 사람 도와주지 않은 것이 과연 영원한 형벌을 받을 만큼 심각한 잘못인가?
- 그러면 우리는 다 지옥에 가야 하는가?
그런 차원의 뜻이 아니다.
-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하나이고, 거래와 공감은 배타적이라는 전제 아래에서,
- 가난한 사람을 돕지 않은 사람은 거래 사고 방식을 가진 사람이고,
- 그런 사람은 이미 하나님과도 거래했으며, 이미 하나님을 부정하고 거부했다는 뜻이다.
- 그러니 그런 사람에게 영원한 형벌이 내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런 면에서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지 않은 것은 영원한 형벌을 받기 마땅하다.
그것 때문에 서로 공감하지 않는 이스라엘을 보시며 하나님이 그토록 슬퍼하시는 것이다.
-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이 이미 하나님 자신을 공감하지 않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렘 9:6] 서로 속고 속이는 일을 되풀이하면서 기만 가운데 살기 때문에, 아무도 나를 알려고 하지를 않는다. 나 주의 말이다.
그런 이스라엘이 처하게 될 운명은 멸망, 본문의 표현으로 '황폐화'이다.
[렘 9:10] 그처럼 무성하던 곳들이 모두 황무지가 되었고, 지나다니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가축 떼의 울음 소리도 들려 오지 않습니다. 공중의 새에서부터 들의 짐승에 이르기까지, 다 다른 곳으로 도망하여 사라졌습니다.
- 모든 것을 잃은 상태인데,
- 더 정확한 표현으로 하면, 모든 것 중에 특히 자기 자신, 자신의 정체성을 잃는다.
- 그래서 이스라엘은 정체성의 상징인 약속의 땅과 성전을 잃었다.
이렇게 된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는, 자업자득이다.
- 이스라엘의 정체성은 하나님과의 사랑과 공감이다.
- 그것이 약속의 기반이고, 율법의 핵심이며, 성전 제사가 의미하는 바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스스로 거래를 선택했다.
- 물론 그것이 사랑과 공감을 포기한다는 뜻인지는 처음에 자각하지 못했다.
- 그래서 하나님은 셀 수 없이 다시 알려주셨고, 이스라엘은 깨달아 회복되었다.
하지만 결국 이스라엘은 더 이상 깨닫기를 거부했다.
- 거래에 올인했다.
- 동시에 하나님과의 사랑과 공감은 거부했다.
그러니 정체성을 잃는 것은 자명하다.
- 이렇게 이스라엘은 존재 기반을 잃고 멸망당했다.
둘째는, 단련하기 위해서이다.
- 이스라엘의 황폐화는 완전한 멸망이다.
- 아무런 재기 가능성 없음이다.
- 하나님이 너무 잔인해서 이런 극단적인 선택을 하신 것이 아니다.
- 하나님은 셀 수 없이 재기 기회를 주셨고, 이스라엘은 셀 수 없이 재기했다.
- 그러나 이제는 그것이 더 이상 의미 없어진 지경에 이르렀다.
- 그래서 내려진 불가피한 결정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스라엘이 정말 끝난 것은 아니다.
- 하나님이 누구시냐? 창조주시다.
- 재기 가능성 없는 멸망 속에서도 재기하도록 하신다.
- 마치 죽은 예수님이 부활하시듯 말이다.
강조해서 말하지만, 이스라엘이 재기하는 것을 보고 이스라엘에게 재기 가능성이 여전히 남아있었다고 은연중에 착각한다.
- 이는 마치 예수님의 부활을 보고 예수님의 죽음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 그러면 안 된다.
- 예수님은 완전히 죽으셨고, 이스라엘도 완전히 멸망했다.
- 마찬가지로 우리도 완전한 멸망, 재기 가능성 없음이 온 이후에 회복이 올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하나님은 새로운 계획을 세우신다.
[렘 9:7]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보아라, 내가 내 백성을 금속 단련하듯 단련하며, 시험하여 보겠다. 내 백성이 악을 저질렀으니, 죄 많은, 이 가련한 백성을, 내가 달리 어떤 방법으로 다룰 수 있겠느냐?
- 완전한 멸망은 완전한 회복을 위한 준비였다.
- 아직 멸망 전, 멸망 예고 단계에서부터 회복을 준비하신다.
방법은?
- 하나님이 회복시키시고자 하는 최종 목적은 공감이다.
-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공감하도록 하는 것이다.
- 특히 이스라엘의 거부로 인해 하나님께서 느끼시는 상실감에 공감하도록 하는 것이다.
- 왜냐하면 그 상실감에 공감할 때,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그리고 그 사랑과 공감이 하나님의 본질이라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자신과 같은 상실감을 느끼게 하신다.
- 모든 것을 잃은 상실감, 특히 자신의 정체성을 잃은 상실감 말이다.
이렇게 같은 상실감을 공유함으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공감하게 된다.
-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공감을 단련하여 회복시키는 방법이다.
결론 - 우리는 공감하고 있는가?
착각하지 말자. 절대로 아니다.
- 우리는 거래의 세상에서 아무런 불쾌함 없이 편안하게 살고 있다.
- 거래에 적응했다는 것은 아무에게도 공감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 계속 말하지만, 거래와 공감은 배타적이다.
물론 우리도 때로 다른 사람의 감정을 느끼고 반응할 때가 있다.
- 하지만 이 역시 공감이 아니다.
- 표현이 적절한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동정이다.
- 공감은 같은 감정을 함께 느낌으로 상대방과 나를 연결하여 하나 되게 한다.
- 반면 동정은 상대방과 나를 구분하고,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하기보다 자신의 감정에 집중한다.
단순한 예를 들어, 예레미야는 하나님과 공감하지만, 바리새인은 하나님을 동정했다.
- 바리새인도 불순종하는 이스라엘 때문에 슬퍼하시는 하나님을 봤다.
- 그러나 그것에 대한 반응으로 예레미야처럼 하나님과 함께 슬퍼하는 대신,
- 단지 자신의 불편한 감정을 해소하는 것에 집중했다.
- 그것을 위해 율법에 열중했다.
- 그러나 그 열중으로 인해 하나님을 죽인다.
이것이 공감 없는 동정이 위험한 이유이다.
- 같은 이유로 공감 없는 구제, 공감 없는 사랑, 공감 없는 희생이 다 위험하다.
- 상대방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행위를 시작하지만,
- 결국 행위 자체만 남고, 행위에서 상대방은 배제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의 안락한 상태로는 절대로 하나님을 공감할 수 없다.
- 황폐해져야만 가능하다.
- 그럴 때에만 하나님과 함께 느끼며 공감을 배울 수 있다.
- 그래야만 사람도 공감할 수 있다.
예수님조차 이 과정에서 벗어날 수 없으시다.
- 예수님도 완전한 죽음을 통해서 완전한 공감을 배우셨고,
- 그제야 그리스도라는 신의 지위에 오르셨다.
- 그리고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따를 것을 청하셨다.
따라서 우리에게도 그런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 완전한 죽음, 재기 가능성 없음을 당하는 날 말이다.
- 그것도 혼자가 아니라, 공동체가 함께 겪는 날 말이다.
그 죽음의 절망 안에서 비로소 함께 절망하는 하나님을 볼 것이다.
- 그리고 또 그 옆에는 함께 절망하는 우리가 있을 것이다.
그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과 서로를 공감하며 사랑하게 될 것이다.
- 그날이 속히 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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