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양교회 팟캐스트 양따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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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양을 따르는 어린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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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이해하지 못하신다.
- 하나님은 그들을 이해하고, 공감하여,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주고 싶어 하신다.
- 그것은 하나님의 속성, 본질, 본능이다. 사랑하기 때문이다.
- 그러나 이해의 영역에서부터 실패하신다.
[렘 8:5] 그런데도 예루살렘 백성은, 왜 늘 떠나가기만 하고, 거짓된 것에 사로잡혀서 돌아오기를 거절하느냐?
그러니 이스라엘은 같은 문제를 반복하고, 계속해서 괴로워 울부짖는다.
- 서로 거짓말하여 남모르게 도둑질하고,
-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가 억압당하고,
- 죄 없는 사람이 살해되고,
- 다른 신들을 섬겨 스스로에게 재앙을 불러들이고 있다.
[렘 7:6]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억압하지 않고, 이 곳에서 죄 없는 사람을 살해하지 않고, 다른 신들을 섬겨 스스로 재앙을 불러들이지 않으면,
[렘 7:9] 너희는 모두 도둑질을 하고, 사람을 죽이고, 음행을 하고, 거짓으로 맹세를 하고, 바알에게 분향을 하고, 너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섬긴다.
이런 일들이 반복되어, 이스라엘 전체가 괴로워서 부르짖는다.
[렘 8:19] 저 소리, 가련한 나의 백성, 나의 딸이 울부짖는 저 소리가, 먼 이국 땅에서 들려 온다.
- 이는 마치 애굽 땅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강제 노역으로 괴로워서 부르짖었던 것처럼 말이다.
[출 3:7] 주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나의 백성이 고통받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또 억압 때문에 괴로워서 부르짖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의 고난을 분명히 안다.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이해하고 공감하셨다.
- 그래서 하나님은 '나는 그들의 고난을 분명히 안다.'고 명확히 말씀하셨다.
- 그랬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셔서 문제를 해결하셨다.
- 동시에 이스라엘에 공감해서 생긴 하나님의 고통도 제거하셨다.
- 따라서 출애굽기에서 이스라엘의 구원은 말 그대로 이스라엘의 구원이자 동시에 하나님 자신의 구원이기도 하다.
이스라엘의 해방은 곧 하나님의 해방이다.
그러나 예레미야 당시에 하나님은 자신을 구원하지 못하신다.
- 이스라엘 백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공감하지 못하며,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하신다.
- 그러니 이스라엘은 계속해서 고통을 부르짖고,
- 하나님 역시 그 고통에 공감하셔서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고통스러움과 동시에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답답한 울분에 못 이겨 의문을 쏟아내신다.
[렘 8:5] 그런데도 예루살렘 백성은, 왜 늘 떠나가기만 하고, 거짓된 것에 사로잡혀서 돌아오기를 거절하느냐?
[렘 8:8] 너희가 어떻게 ‘우리는 지혜를 가진 사람들이요, 우리는 주님의 율법을 안다’ 하고 말할 수가 있느냐?
[렘 8:11]백성이 상처를 입어 앓고 있을 때에, 그들은 ‘괜찮다! 괜찮다!’ 하고 말하지만, 괜찮기는 어디가 괜찮으냐?
[렘 8:12] 그들이 그렇게 역겨운 일들을 하고도, 부끄러워하기라도 하였느냐?
이러한 하나님의 울분과 의문은 다음 단락에도 계속된다.
[렘 8:18~19] 나의 기쁨이 사라졌다. 나의 슬픔은 나을 길이 없고, 이 가슴은 멍들었다. (19) 저 소리, 가련한 나의 백성, 나의 딸이 울부짖는 저 소리가, 먼 이국 땅에서 들려 온다. ・・・・
[렘 18:19] ・・・・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어쩌자고 조각한 신상과 헛된 우상을 남의 나라에서 들여다가, 나를 노하게 하였느냐?”
[렘 8:21] “나의 백성, 나의 딸이, 채찍을 맞아 상하였기 때문에, 내 마음도 상처를 입는구나. 슬픔과 공포가 나를 사로잡는구나.”
[렘 8:22] “길르앗에는 유향이 떨어졌느냐? 그 곳에는 의사가 하나도 없느냐?” 어찌하여 나의 백성, 나의 딸의 병이 낫지 않는 것일까?”
참고로, 이러한 울분과 의문이 하나님의 고백이냐 예레미야의 고백이냐에 대한 논쟁이 있다.
- 어떤 측면에서는 그것을 명확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 하지만 비록 예레미야의 고백이라고 해도, 그것이 결국 하나님의 심정을 대변하기에, 전부 하나님의 고백으로 봐도 잘못 해석을 할 여지는 적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울분을 토하실까?
예레미야서 초반부터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굉장히 화를 내신다.
- 우리는 이미 그 이유를 충분히 들었다.
- 한마디로,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지 않았다.
- 풍요를 위해 하나님과 사람을 이용했다.
- 그래서 결국 사랑하는 사람을 죽여 우상에게 바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 즉, 인신 제사는 우상 숭배와 사람 관계 단절이 결합한 것으로서,
-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사람을 모두 풍요를 위한 수단으로 삼아, 존재의 본질을 부정한 가장 극단적인 행위이다.
이렇게 이스라엘은 계명 중에 가장 기본인 십계명조차 가차 없이 내던졌다.
이스라엘이 이 지경에 빠졌는데, 하나님이 어떻게 화내지 않으실 수 있겠는가.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화내시며, 그들을 심판하시는 것은 당연하다.
-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서로 사랑하자는 약속을 맺었고,
- 그 사랑 안에서 풍요와 번영을 선물로 주셨다.
- 그러나 이스라엘이 약속을 깼기에, 풍요와 번영이 거둬 들여지는 것은 당연하다.
- 그것이 이스라엘 입장에서 심판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 현실에서는 풍요와 번영이 거둬 들여져서, 쇠락과 멸망만이 남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정리되는 것처럼 보인다.
- 이제부터 각자가 제 갈 길로 가면 된다.
- 하나님은 창조부터 종말까지의 역사를 이스라엘 없이 꾸려가시면 된다.
- 이스라엘은 하나님 없이 주변 강대국의 종이 되어 그 나름대로 살아가면 된다.
- 그것이 좋아서라기보다, 그 외에 어찌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 이혼한 부부가 각자의 삶을 사는 것처럼 말이다.
- 물론 마음의 상처와 경제적 어려움을 감당해야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하나님은 마음을 정리하는 데 실패하신다.
- 처량하게 이스라엘에게 여전히 미련을 가지신다.
- 그래서 애처롭게 매달리신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나님을 부정하고 떠난 이스라엘을 수용할 수도 없다.
- 왜냐하면 이스라엘과 서로 사랑을 나누는 것만이 하나님의 유일한 존재 이유이며 본질이기 때문이다.
-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사랑을 거부했다.
이 상황에 처하신 하나님을 한마디로 하면,
-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을 수용해도, 사랑을 거부당한 하나님은 존재 이유가 사라지고,
-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을 거부해도, 사랑할 대상을 잃은 하나님은 역시 존재 이유가 사라진다.
-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납작 엎드려 매달리지도 못하고, 이스라엘을 거침없이 내치지도 못하시는 상황이다.
- 동시에 이스라엘에게 처량하게 매달리시면서도, 이스라엘을 절대로 용납하지 못하시는 상황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울분을 토하고 계신 것이다.
울분이란, 답답하면서도 분한 심정이다.
- 이스라엘에 매달리거나 내치거나 둘 중의 하나로 마음을 정하면, 마음을 추스를 수 있다.
- 그런데 그게 안 되니까, 답답하면서도 분한 심정을 갖는 것이다.
그래서 계속 의문만 품으신다.
- 왜 이스라엘이 돌아오기를 거절하냐고 따지신다.
정말 몰라서 물으시는 것이 아니다.
- 이스라엘이 돌아오지 않는 이유는 명확하다.
-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아서이다.
- 하나님께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자신이 자신의 주인 되어, 자유롭게 원하는 대로 살고 싶은데,
- 하나님이 간섭하며 자유를 제한하니까, 하나님을 싫어하는 것이다.
- 그러한 하나님의 간섭과 자유 제한이 사람이 참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데도 말이다.
- 사람됨을 포기하면서까지 인신 제사를 지내며 풍요에 매달리기에, 하나님을 거부할 수밖에 없다.
이를 하나님은 다 아셨다.
- 그래서 이스라엘은 율법을 거짓말로 바꾸고.
[렘 8:8] 사실은 서기관들의 거짓된 붓이 율법을 거짓말로 바꾸어 놓았다.
- 사기를 쳐서 재산을 모으며,
[렘 8:10] “힘 있는 자든 힘 없는 자든, 모두가 자기 잇속만을 채우며, 사기를 쳐서 재산을 모았다. 예언자와 제사장까지도 모두 한결같이 백성을 속였다.”
- 예언자의 경고를 무시하고 '괜찮다!'고 말하고,
[렘 8:11] “백성이 상처를 입어 앓고 있을 때에, 그들은 ‘괜찮다! 괜찮다!’ 하고 말하지만, 괜찮기는 어디가 괜찮으냐?”
- 역겨운 일들을 하고도 부끄러워하기조차 하지 않았다.
[렘 8:12] 그들이 그렇게 역겨운 일들을 하고도, 부끄러워하기라도 하였느냐? 천만에! 그들은 부끄러워하지도 않았고, 얼굴을 붉히지도 않았다.
이러한 진단은 이미 이전 본문에서 누누이 강조했던 바이다.
- 이스라엘은 율법을 무시했고,
[렘 6:19] ・・・・ 그들이 나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으며, 나의 율법도 무시하였기 때문이다.
- 사기를 쳐서 재산을 모았으며,
[렘 6:13] “힘 있는 자든 힘 없는 자든, 모두가 자기 잇속만을 채우며, 사기를 쳐서 재산을 모았다. 예언자와 제사장까지도 모두 한결같이 백성을 속였다.”
- 예언자의 경고를 무시했고,
[렘 6:14] “백성이 상처를 입어 앓고 있을 때에, ‘괜찮다! 괜찮다!’ 하고 말하지만, 괜찮기는 어디가 괜찮으냐?”
- 부끄러움도 몰랐다.
[렘 6:15] 그들이 그렇게 역겨운 일들을 하고도, 부끄러워하기라도 하였느냐? 천만에! 그들은 부끄러워하지도 않았고, 얼굴을 붉히지도 않았다.
이렇게 다 알면서 모르겠다고 말하는 이유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 자신을 거부하는 이스라엘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시기 때문이다.
- 용납할 수도, 내칠 수도 없어서 혼란스럽기 때문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혼란스러운 감정이 본문이 전하는 핵심 메시지이다.
예레미야서는 이와 같은 '혼란스러운 감정'을 담고 있다.
그런 점이 다른 예언서와 구분된다.
- 다른 예언서는 하나님의 뜻을 담담하게 전하는 반면, 예레미야서는 예레미야도 하나님도 격정적인 감정을 가감없이 드러내신다.
- 그래서 예전에 학자들은 그 감정 때문에 예레미야서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에게 감정의 동요가 일어난다는 것을 불경스러우며 불신앙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하나님이 혼란스러워한다는 것은 더욱 받아들일 수 없었다.
- 전지전능과 혼란은 완전히 상반된 개념이기 때문이다.
- 예전의 인식에서 하나님은 감정 동요 없이 언제나 침착하며 근엄하게 자기 일을 이뤄나가시는 분이셨다.
왜 그렇게 생각했냐?
- '이성'에 대한 지나친 신뢰 때문이다.
- 이성은 감정이 배제된, 논리적이고 객관적인 사실에 근거하는 것으로,
- 이성만이 바른 판단을 할 수 있으니,
- 따라서 인간의 본질을 이성이라고 생각했다.
- 그래서 감정은 이성을 방해하는 것으로써 억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성과 감정을 이원론적으로 구분하는 사고 방식은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부터 계속되었으며,
- 그랬기에 그리스 시대에 체계화된 기독교에도 상당히 유입되었고,
-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도 여전히 남아있다.
- 이런 부분이 포스트모던 시대에 사는 우리에게 남아 있는 근대 시대의 흔적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성과 감정을 나눌 수 없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밝혀졌다.
- 극단적으로 말해서, 감정이 사고 방식의 근원이고,
- 이성은 먼저 일어난 감정을 해석하고 표현하는 도구일 뿐이라고까지 말한다.
- 이제는 누구도 감정을 합리적 판단의 방해꾼이라고 치부하지 않는다.
- 오히려 이성에 대한 신뢰가 깨졌다.
그것을 이룬 사람 중의 하나가 '프로이트'이다.
- 인류가 그토록 신뢰했던 이성을 담고 있는 '의식'이 사실은 '무의식'에 의해 조종당한다는 것을 밝혀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감정이 핵심 주제인 예레미야서는 현 시대에 더 매력적인 성경이다.
- 거침없이 감정을 쏟아내는 예레미야와 하나님을 통해 감정과 이성이 결합된 인간의 본 모습을 더욱 잘 드러내기 때문이다.
- 아무런 감정 없이 냉정하게 심판하고 집행하기만 하는 죽어있는 하나님이 아닌,
- 잘못된 현실에 잘못됨을 느끼고,
- 그 느낌을 억누르지도 과장하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 표현하며,
- 그것을 단지 감정적으로만 해소해버리지 않고, 현실을 변화시키는 원동력으로 삼아,
- 잘못된 현실의 피해자뿐만 아니라 가해자의 마음까지도 공감하여,
- 문제를 바로잡고 세상을 새롭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마음이 절절하게 배어있기 때문이다.
피해자와 가해자를 구분하면, 갈등을 증폭되고 분열된다.
- 그러나 피해자와 가해자가 만들어지는 근원 문제를 해결하면, 갈등이 해결되어 연합된다.
- 그래서 피해자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뿐만 아니라 가해자가 가해자가 된 근원 문제까지 해결하시려는 것이다.
- 이렇게 하나님은 피해자와 가해자의 감정 모두에 공감하신다.
이성을 숭배하던 시기(근대)는 세계 전쟁으로 끝났다.
- 르네상스를 시작으로 산업혁명을 거쳐 이성, 지식, 기술이 극도로 확장되었다.
- 그 끝에 기술 낙관 주의, 과학 만능 주의가 있었고,
- 이는 변질되어 우생학, 즉 열성 인간은 도태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으며,
- 이를 토대로 유태인 대학살과 제국주의 식민지 전쟁을 합리화하기까지 한다.
- 이것이 세계 전쟁이 일어나게 된 중요한 이유 중 하나이다.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된 이유는 도태되는 인간의 감정에 눈감았기 때문이다.
- 감정은 하찮은 것이고, 이성이 인류를 구원할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그러나 실상은 이성 때문에 인류가 말살 직전까지 갔다는 것이 세계 전쟁 이후에 나온 반응이다.
- 그 결과 이성과 감정이 모두 중요하다는 현재의 인식에 이른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혼란스러운 감정, 즉 울분의 근원은 무엇일까?
-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용납할 수도, 내칠 수도 없어서 혼란스러워하신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그런 혼란에 빠지신 것일까?
만약 하나님이 인류를 무조건 사랑하기'만' 했다면?
- 반대로 만약 하나님이 인류에게 실망하고 포기하기'만' 했다면?
- 두 경우 모두 하나님은 평안하셨을 것이다.
- 우리가 막연히 상상하는 전지전능한 신이 그러한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런 신은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은 인간에 대해 무한한 신뢰를 가지셨다.
- 인간만이 피조물 전체를 바르게 관리할 수 있으며,
- 아무런 갈등도 없이 모든 인류가 연결되고 하나 되어 서로 사랑하고,
- 하나님을 진정한 창조주로 사랑할 수 있는 존재라고 믿으셨다.
하지만 동시에 현재는 인간의 무한한 잠재성이 전혀 발휘되지 못하고 있다는 아쉬움을 가지셨다.
- 여기에 더하여, 인간은 스스로 그 잠재성을 발휘할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판단하셨다.
이 두 가지 반대되는 감정 때문에 하나님은 혼란스러움 속에서 울분을 토하신다.
- 잠재성 때문에 내칠 수 없고, 가능성 없음 때문에 수용할 수 없으셨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의 인간관에 대해서도 상반된 두 관점으로 나뉜다.
- 의인으로 보는 사람이 있고, 죄인으로 보는 사람이 있다.
- 물론 의인으로 보는 사람도 인간의 죄를 인정하고, 죄인으로 보는 사람도 인간의 의로움을 인정한다.
- 엄밀히 말하면, 어느 쪽으로 더 치우쳐있느냐이다.
그래서 의인으로 보는 사람은 인간의 잠재적 가능성을 강조한다.
- 그러니 잠재성을 끌어내기 위해 노력하자는 구호를 외친다.
- 여기에는 의식하든 의든, 인간이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희미하게 담겨있다.
- 그래서 이러한 관점은 예수님이 독점하고 계신 구원의 능력을 희미하게 약화시킨다.
반면에 죄인으로 보는 사람은 인간의 회복 가능성 없음을 강조한다.
- 그러니 변화를 위한 노력보다는 자신의 죄를 깨닫자는 구호를 외친다.
- 여기에도 역시 의식하지 못하더라도, 하나님조차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는 의미가 희미하게 담겨있다.
- 그래서 이러한 관점도 예수님의 구원 능력을 희미하게 약화시킨다.
따라서 올바른 성경의 인간관은 의인이며 동시에 죄인이다.
- 무한한 가능성이 있으면서도, 동시에 완전히 가능성 없는 존재이다.
-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이 구원하시기만 한다면, 완전한 서로 사랑하여 온 인류가 아무런 갈등 없이 연합할 수 있으면서,
- 동시에 하나님 없이는 어떤 노력과 시도도 아무런 문제도 해결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같은 성경을 보고도,
- 자신과 주변 사람에 대해 부정적인 경험보다 긍정적인 경험을 하나라도 더 한 사람은 인간이 의인이라는 쪽으로 치우치게 되고,
- 부정적인 경험을 하나라도 더 한 사람은 죄인 쪽으로 치우친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 세상에서 긍정적인 경험을 한 사람은 하나님도 사랑 쪽에 치우친 분으로 생각하고,
- 부정적인 경험을 한 사람은 하나님을 심판 쪽에 치우친 분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알다시피 둘 다 틀렸다.
- 긍정적인 사람은 긍정적인 왜곡을 갖고,
- 부정적인 사람은 부정적인 왜곡을 갖는다.
- 그래서 둘 다 똑같이 잘못된 판단을 하고, 인생에서 실패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긍정적이지도 부정적이지도 않게, 인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신다.
- 그래서 잠재적 가능성과 가능성 없음을 모두 보신다.
그런데 이렇게 양 극단의 인식을 동시에 가지셨기 때문에, 언제나 혼란스러운 감정 속에서 울분을 토하시는 것이다.
- 역설적으로 말해서, 이러한 혼란과 울분이 바로 전지전능한 존재의 숙명이다.
- 전지전능하기 때문에, 현실을 긍정 혹은 부정으로 왜곡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언제나 혼란과 울분 속에 갇혀 계실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언제 이 감옥에서 벗어나시냐?
- 결국 종말에 이르러야 비로소 벗어나신다.
- 천국과 지옥이 양분되어, 잠재성을 완전히 회복한 쪽과 가능성을 완전히 잃어버린 쪽이 구분될 때, 하나님은 평안 속에서 기쁨을 누리실 수 있을 것이다.
우리도 똑같다.
- 우리가 말씀과 성령으로 현실을 왜곡 없이 있는 그대로 보게 되면, 평안이 아니라 혼란에 빠질 것이다.
- 그리고 혼란에서 벗어나 구원될 날은 내 육신이 죽거나 세상이 끝나는 날이다.
물론 그렇다고 그때까지 구원의 기쁨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는 뜻은 아니다.
- 온전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통해, 그리고 하나님에 의해 사랑을 회복한 교회 공동체를 통해 무한한 평안과 기쁨을 느낄 것이다.
- 그러나 일시적이라는 점이다.
이는 하나님도 마찬가지이다.
- 하나님도 현실에서 혼란과 울분 속에 계시지만,
- 하나님으로 인해 사랑을 회복한 교회 공동체를 통해 사랑의 기쁨을 누리실 것이다.
- 그리고 교회 공동체가 서로 사랑하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쁨에 겨워하실 것이다.
- 그러나 일시적이다.
하나님은 또 다시 현실을 보시며 울분에 빠지실 것이다.
- 그것이 본문에서 표현된 것이다.
결론 - 성경이 제시하는 삶은?
혼란 속에서 의문과 울분을 토로하는 삶이다.
- 세상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혼란이 아니라,
- 세상을 바르게 이해했기 때문에 생기는 혼란이다.
인간의 잠재성을 믿고 무한한 신뢰와 기대를 가짐과 동시에
- 인간 스스로는 잠재성을 전혀 발휘할 수 없다는 좌절과 실망을 갖는 것이다.
- 기대가 컸기에 더 큰 실망을 하게 되고,
- 크게 실망했기에 기대가 성취될 때 더 큰 기쁨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당장의 평안과 안정을 원한다.
- 그래서 세상에 대한 기대와 실망 중에 하나를 선택한다.
하지만 그 선택은 평안을 얻는 대신 자신을 잃게 한다.
- 기대를 선택한 사람은 희망이라는 헛된 꿈을 따르다가 자신을 잃고,
- 실망을 선택한 사람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주어진 현실에 자신을 껴맞추다가 자신을 잃는다.
- 우리 각자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어느 하나에 속해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당장의 평안이 아닌 혼란을 감수하는 믿음이다.
- 먼저 인간의 잠재성과 가능성 없음의 혼란 속에 동참해야 하고,
- 그 속에서 가능성 없음을 있음으로 바꾸시며, 인간의 잠재성을 극대화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기대해야 한다.
- 이 과정을 통해서만 인간에 대한 진정한 존중이 가능하다.
하나님은 이미 이러한 능력을 보이셨다.
- 예수님의 죽음 부활을 통해 가능성 없음을 있음으로 바꾸실 수 있음을 보이셨고,
- 예수님께서 보이신 사랑의 모습을 통해 온 인류와 연대하시는 인간 잠재성의 극단을 보이셨다.
이제는 그 잠재성이 우리에게 나타날 차례이다.
- 우리는 온 인류와 완전한 사랑을 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 나뿐만 아니라 상대방에게도 사랑의 능력이 있다는 믿음으로,
- 성경이 제시하는 인간의 본질이 허상이 아니라 실제라는 믿음으로,
- 내가 그런 인간이 될 것이고, 상대도 그런 인간으로서 나를 대할 것을 믿음으로 말이다.
그러니 서로를 더 믿고, 더 의지하고, 더 신뢰하고, 더 기대하고, 더 헌신하자.
- 물론 현실에서는 헌신하면 헌-신짝처럼 버려지지만,
- 버려짐을 감수하는 사랑을 하자.
- 예수님이 그러하신 것처럼 말이다.
솔직한 말로, 난 못하겠으니까, 여러분이라도 좀 해달라.
- 그런 사랑 받고 싶다.
- 그래서 그런 사랑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 우리 서로 그렇게 되자.
그리고 하나님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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