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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서

예레미야(15) 7:30-8:3 살육의 골짜기라고 부를 것이다. - 자업자득의 비극

<미양교회 팟캐스트 양따양>

미양교회에서 했던 설교를 바탕으로 진솔하게 신앙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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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양을 따르는 어린양

예배 대신 예수님, 설교 대신 성경, 건물 대신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미양교회가 만드는 방송입니다.토끼와 개구리가 진솔하게 신앙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어린양과 같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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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가 성전 문에 서서 선포하는 마지막 메시지는 심판이다.

[렘 7:32] 그러므로 보아라, 그 날이 오면, 다시는 이 곳을 도벳이나 ‘힌놈의 아들 골짜기’라고 부르지 않고, 오히려 ‘살육의 골짜기’라고 부를 것이다. ・・・・

- 여기서 힌놈의 아들 골짜기는 예루살렘 남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 몰렉신에게 인신 제사를 바치는 도벳 산당이 있는 곳이다.

- 그러니까 한마디로, 우상에게 바칠 수 있는 최고의 제물인 '사람'으로 제사를 지내는 우상숭배의 성지이다.

- 그런 의미에서 예루살렘 성전에 버금갈 만큼 '거룩하고 성결한 곳'이다.

그런데 그곳이 '살육의 골짜기'가 된다.

- 그곳이 거룩한 성지에서 살육의 참혹한 현장으로 전락한다.

- 죽은 사람이 너무 많아 매장할 곳조차 없어 시체를 쌓아두고, 짐승의 먹이가 되도록 방치하는 곳이 된다.

[렘 7:32~33] ・・・・ 그 때에는 매장할 자리가 더 이상 없어서, 사람들이 도벳에 와서 시체를 묻을 것이다. (33) 그 때에는 이 백성의 시체가 공중의 새와 땅에 사는 짐승의 먹이가 될 것이며, 아무도 그것을 쫓아 줄 사람이 없을 것이다.

게다가 참혹한 살육 심판이 이스라엘 전체까지 확산된다.

- 이스라엘 지도자부터 주민까지 모든 사람이 죽는 것도 모자라,

- 그들의 무덤이 파헤쳐지는 것뿐만 아니라,

- 그들의 뼈가 우상들에게 마구 뿌려진다.

- 끝으로, 그것들이 결국 땅바닥의 거름으로 썩어 없어진다.

[렘 8:1~2] 나 주의 말이다. 그 때에는 사람들이 유다 왕들의 뼈와, 유다 지도자들의 뼈와, 제사장들의 뼈와, 예언자들의 뼈와, 예루살렘 주민의 뼈를, 그들의 무덤에서 꺼내다가, (2) 그들이 좋아하고 노예처럼 섬기고 뒤쫓아 다니고, 뜻을 물어 보면서 찾아 다니고 숭배하던, 해와 달과 하늘의 모든 천체 앞에 뿌릴 것이다. 그래도 그 뼈들을 모아다가 묻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니, 그것들은 이제 땅바닥에서 거름이 되고 말 것이다.

- 죄에 대한 최대 형벌인 죽음이 선포된 것을 넘어서,

- 사체가 훼손되고, 수습되지 못한 채 그대로 썩어 없어지는 최고로 모욕적인 죽음을 예고한다.

심판 예고는 마지막 한 가지가 더 남았다.

[렘 8:3] 그리고 이 악한 백성 가운데서 남아 있는 자들은, 내가 쫓아 보낸 여러 유배지에서 사느니보다는, 차라리 죽는 쪽을 택할 것이다. 나 만군의 주가 하는 말이다.

- 만약 살육의 참혹한 현장에서 살아남았다고 해도, 그들의 삶은 모욕적으로 죽은 사람보다도 더 참혹할 것이다.

- 여기서 참혹한 살육은 바벨론의 공격 때문이고, 죽음보다 참혹한 삶은 바벨론 포로를 의미한다.

 

도대체 바벨론 포로의 삶이 어땠길래 그렇게 참혹했을까 질문할 수 있다.

- 그러나 이스라엘이 얼마나 가혹한 심판을 받았느냐는 우리에게 그렇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 어차피 지나간 일이고, 만약 우리에게 심판이 내려진다 해도 그와 같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죽음의 형벌을 내리는 것으로도 모자랄 만큼 하나님의 진노가 크다는 점이다.

- 그리고 그만큼 이스라엘의 죄가 크다는 점이다.

따라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을 그렇게 분노하도록 만든 이스라엘의 죄이다.

① 이스라엘이 어떤 죄를 지었길래, 하나님께서 그렇게 분노하셨고,

② 하나님은 왜 그 죄에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하셨으며,

③ 왜 그 분노를 꼭 저런 식으로 표출해야만 하셨느냐이다.

이것을 알아야 우리도 이스라엘과 같은 죄로부터 돌이킬 수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어마어마하게 가혹한 폭력을 보이시는 하나님을 판단한다.

- 하나님을 폭군, 사이코패스, 정신병이라고 의심한다.

-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이 사랑하는 이스라엘에게 저럴 수 있냐고 비난한다.

- 그런 하나님은 있을 수도 없고, 있다고 해도 믿을 필요 없다고 말한다.

- 즉, 사랑과 심판의 공존을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 인내와 자비와 긍휼이 넘치시는 분이다.

- 폭력의 심판을 예고하는 중에도 여전히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신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랑과 심판이 공존할 수 있는가?

탕자 이야기를 빗대어 말해보면,

- 탕자 아버지는 탕자를 정말 사랑하셨다.

- 그러나 탕자는 아버지께 유산을 달라고 하며, 떠날 것을 준비한다.

- 탕자가 떠날 것을 알면서도 아버지는 유산을 주신다.

그때 상황을 상상하면,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 너를 사랑하기에, 너의 선택을 존중한다. 그래서 유산을 준다.

- 그런데 네가 유산을 갖고 떠나면, 너는 반드시 멸망할 것이다.

- 허랑방탕하게 살다가 유산을 순식간에 탕진할 것이고,

- 먹을 것조차 없어서 굶어 죽을 위기에 빠질 것이며,

- 결국 노예가 되어, 돼지나 치며 가장 비참한 지경에 이를 것이다.

- 그런데 그러면서도 배가 고파서 돼지 여물을 탐할 것이다.

- 이것이 앞으로 멸망할 너의 인생이다. 라고 말했을 것이다.

- 그리고 그대로 이루어졌다.

그렇다면 과연 이것은 사랑일까, 심판일까?

- 말하기가 어렵다.

- 아버지는 탕자를 분명히 사랑하신다.

- 뭐라고 딱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아버지의 행동에서 사랑을 느낄 수 있다.

- 하지만 아버지 말의 내용은 너무 무섭다.

- 완전한 멸망을 예고한다.

- 내용 자체만 보면, 사랑은 없고 심판만 있다.

 

이것이 바로 사랑과 심판이 공존할 수 있는 이유이다.

- 탕자 아버지는 탕자를 정말 사랑하지만,

- 그 사랑 때문에 멸망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는 탕자를 막지 못하고 유산을 준다.

- 그러면서 탕자에게 앞으로 있을 멸망의 운명을 심판처럼 예고한다.

- 그래서 결국 탕자는 멸망의 심판을 전부 지나간 다음에 비로소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는다.

- 이렇게 처음부터 한결같이 아들을 사랑했던 아버지와 심판을 통해 뒤늦게 아버지의 사랑을 깨달은 탕자는 드디어 사랑의 관계를 맺는다.

- 이것이 사랑했지만 혹은 사랑했기에 탕자를 멸망당해 심판 받도록 놔둔 아버지의 사랑이다.

사랑했기에 아들의 멸망 심판을 막고 싶었지만,

- 동시에 사랑했기에 아들의 멸망 심판을 감수하고서라도 아들과 관계 맺고 싶었던 아버지의 사랑이다.

 

하나님의 사랑도 이와 같다.

- 이스라엘을 사랑하셨기에, 멸망의 심판을 당하지 않도록 예언자를 통해 반복해서 경고하셨다.

- 동시에 이스라엘을 사랑하셨기에, 멸망의 심판을 당하도록 놔두신 후,

- 잔혹하고 처참한 멸망의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신 것이다.

-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참된 관계를 맺고자 하셨다.

그랬기 때문에 사랑의 하나님임에도 불구하고 가혹한 폭력의 심판을 예고하신 것이다.

- 심판의 과정만이 참된 사랑의 결실을 맺도록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심판에서 굉장히 중요한 포인트가 하나 있다.

심판의 주체이다.

- 탕자가 유산을 탕진하고 돼지 여물까지 탐할 정도가 되도록 한 주체는 누구인가?

- 아버지가 아니라 탕자 자신이다.

- 즉, 심판의 핵심은 '자업자득'이다.

- 탕자에게 있던 욕망이 유산을 받아 아버지를 떠나게 했고,

- 똑같은 탐욕이 유산을 탕진하고 돼지 여물까지 탐할 정도로 비참하게 만들었다.

- 아버지가 한 일은 탕자의 선택을 존중해준 것뿐이다.

 

왜 아버지는 탕자의 인생이 멸망할 것을 아셨음에도 말리지 않으셨을까?

- 욕망은 말린다고 없어지지 않는다.

- 말리면 오히려 더 타오른다.

- 깨달아야 없어진다.

- 욕망의 끝이 결국 멸망이라는 것을 경험해봐야, 욕망이 덧없음을 깨닫는다.

욕망 속에서는 관계와 사랑 따위는 욕망 성취 방해꾼일 뿐이다.

- 그래서 욕망의 덧없음을 깨달아야, 욕망에서 벗어나 사랑의 관계로 눈을 돌릴 수 있다.

- 그래야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고, 아버지를 온전히 사랑할 수 있다.

그렇게 맺을 사랑의 관계를 위해 아버지는 탕자를 말리지 않으셨다.

 

만약 아버지가 탕자를 말렸다면?

- 혹은 탕자 스스로가 양심, 예절, 규범 때문에 욕망을 억눌렀다면?

- 그래서 유산 갖고 떠나지 않고, 아버지 곁을 지켰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 사랑의 관계를 맺을 수 있었을까?

탕자 이야기는 그러한 질문에 대해서도 답한다.

- 탕자 형처럼 된다.

- 아들이 돌아온 것에 기뻐 잔치를 벌이는 아버지가 소모하는 송아지를 아까워한다.

- 아버지의 감정은 무관심한 채, 자신의 입장에서 쓸모없이 낭비되는 송아지 생각만 한다.

- 그래서 탕자가 돌아온 것을 기뻐하시는 아버지의 감정에 공감하여 함께 기뻐하지 않고,

- 자신의 유산이 없어지는 것에만 분노했다.

- 즉, 탕자 형은 아버지와 사랑의 관계가 아닌 거래 관계만 맺었다.

- 아버지를 사랑의 대상이 아닌 돈 줄 대상으로만 봤다.

그런데 탕자와 차이가 있다면, 

- 합법적인 방법으로 유산을 받으려고 규범으로 욕망을 억누른 것뿐이다.

- 이렇게 욕망은 억누른다고 없어지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는 탕자를 말리지 말아야 했다.

- 반드시 떠나서 멸망당한 후 돌아올 때만 사랑의 관계를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

- 말려봤자 아무 소용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심판을 예고하시는 것도 이와 같다.

- 이스라엘이 받는 심판은 자업자득의 결과이다.

- 이스라엘은 풍요를 욕망했고, 풍요를 얻기 위해 신앙에서도, 민족 내부에서도, 강대국과도 거래 관계를 맺었다.

- 그 결과 신앙에서는 우상숭배, 민족 내부에서는 빈부격차, 강대국과는 약탈적 조공을 하게 된다.

- 그로 인해 이스라엘은 내부 붕괴와 외세 침략으로 멸망한다.

이러한 결과는 소수의 악행 때문이 아니다.

- 특별히 나쁜 몇몇 사람만 처벌하면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 이스라엘 전체가 함께 풍요를 욕망했기 때문이다.

- 그것을 지도자는 풍요를 조장하는 법과 제도를 만들어서 이끌고, 

- 일반 백성은 그것에 동참하여 풍요를 욕망한다.

- 이러한 악순환을 통해 이스라엘은 풍요의 욕망이 계속해서 강화된다.

- 마침내 자멸할 때에야 비로소 욕망 강화는 멈춘다.

이것이 자업자득의 결과이다.

 

본문에서 이스라엘이 멸망당하는 이유도 자업자득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우상숭배를 했는데,

- 그중에 특히 인신 제물을 바쳤다.

- 추정하기로, 인간의 생명이 곡식이나 동물보다 훨씬 더 가치 있다는 상식적인 판단을 했고,

- 더 가치 있는 제물로 제사를 드리면 더 가치 있는 것을 얻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 전형적인 거래 사고 방식이다.

우상숭배의 문제는 숭배의 대상이 하나님이 아닌 우상이라는 것도 문제지만,

- 더 큰 문제는 작동 방식이 거래라는 점이다.

- 더 나아가, 만약 하나님을 숭배한다고 해도 숭배 방식이 거래라면, 그 역시 우상숭배이다.

 

당시 인신 제사를 엿볼 수 있는 자료를 보면,

- 아이를 우상 제단에 묶으면, 아이의 부모와 아이가 절규하는데,

- 그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커다란 북을 요란스럽게 친다.

- 그러면서 아이는 불 속으로 들어가, 우상에게 바쳐진다.

신성함과 거룩함으로 포장된 살육의 참혹한 현장이다.

 

이러한 장면을 생각하면, 사람이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생각된다.

-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우상에게 사람을 불로 태워 죽인다는 것 자체가 이해되지 않는다.

- 고대의 미개한 인종들이나 하는 어리석은 행동이라고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그러나 인신 제사는 안타깝게도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

- 여전히 풍요를 위해 사람을 죽이는 일은 일어난다.

- 지금도 사람의 생명과 돈을 바꾸는 거래는 일어난다.

 

몇 가지 예를 들면,

- 지하철 스크린도어를 정비하던 하청 노동자의 죽음이다.

- 한두 건이 아니다.

- 본청은 위험을 돈을 주고 하청에 넘겼고, 하청은 노동자의 생명을 대가로 돈을 벌었다.

- 또 고등학교 현장실습생 사망 사고도 있다.

- 교육 목적으로 하는 현장 실습을 값싼 노동력 이용 기회로 삼아 돈을 벌었다.

- 그 돈에는 현장실습생의 생명 값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생명을 풍요와 바꾸는 인신 제사의 잔혹한 거래가 이런 방식으로 계속된다.

 

이보다 우리에게 더 와닿는 인신 제사의 거래는 아이들의 '학원 뺑뺑이'이다.

- 부모는 풍요(자녀의 풍요건, 자녀를 통해 주어질 부모의 풍요건)를 위해 소위 학원에 돌린다.

- 학교가 끝난 후부터 저녁까지 학원을 순회한다.

'학원 뺑뺑이'의 이유는 정말 다양하다.

- 아이의 교육, 부모의 직장, 정부의 잘못된 정책 등 때문이다.

-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러한 모든 이유가 아이의 생명을 위한 것이 아니라,

- 전부 돈 때문이라는 것이다.

- 결국 이렇게 돈 때문에 아이의 생명은 무참히 짓밟힌다.

- '학원 뺑뺑이'가 아이의 생명을 얼마나 짓밟는지는 누구보다 내가 잘 안다.

 

그렇다고 아이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 100년 전에도 농번기에 아이들은 방치되었다.

- 제대로 된 양육과 돌봄은 없었다.

- 생업을 포기하고 아이들을 지키는 부모는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이 없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차이가 있다.

- 그때는 부모가 생업을 포기하면, 부모뿐만 아니라 아이 역시 곧바로 죽는다.

- 즉, 생존을 위한 생업이었고, 아이의 생존을 위해 아이의 생명 일부가 희생된 것이다.

- 반면 지금은 부모가 생업을 포기한다고, 부모와 아이가 죽지 않는다.

- 생존을 위한 생업이 아니라, 풍요를 위한 직업이 되었다.

- 풍요의 욕망을 위해 아이의 생명 일부가 희생되고 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는 아이의 생명을 대가로 풍요를 얻고 있는 셈이다.

- 마치 자녀를 제물로 바쳐 우상에게 풍요를 얻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추구하는 풍요의 욕망이 과연 생명만큼 중요한 것인가?

- 다르게 질문하면, 우리가 자신과 자녀의 생명을 포기하고 얻는 노동의 대가가 자신과 자녀의 생명만큼 크고 중요한가?

무조건 일하지 말고 아이나 보자는 것이 아니다.

- 문제의 핵심은 우리가 아무런 고민 없이, 세상에서 세뇌한 방식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서, 아무런 가치 비교도 하지 않은 채, 그냥 남들이 하는대로 시키는 일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 자신과 자녀의 생명과 노동의 대가를 서로 가치 비교하여, 자신에 필요한 만큼의 노동만을 해야 하는데 말이다.

100년 전에는 자신과 자녀의 생명을 지킬 수 있는 만큼만 노동의 대가를 받았다.

- 즉, 생명을 지키기 위한 노동이었다.

- 그래서 그때 노동은 생명 만큼의 가치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세뇌되어서 혹은 어리석어서' 생명과 돈을 바꾸는 거래를 한다.

- 생명 대신 얻은 돈으로 무엇을 할지 아무런 계획도 없이 말이다.

- 그렇게 얻은 풍요가 정말 생명 만큼 가치가 있는지 고민해보지 않고 말이다.

- 마치 이스라엘이 '세뇌되어서 혹은 어리석어서' 자녀를 불로 태워 죽이는 대신 풍요를 얻는 거래를 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랬던 이스라엘은 어떻게 되었냐? - 자업자득이다.

그들은 우상에게 자녀의 생명을 바치는 것을 기뻐했다.

- 그래서 자업자득의 결과로, 그들 자신의 생명까지도 우상에게 바치는 꼴이 된다.

[렘 8:2] 그들이 좋아하고 노예처럼 섬기고 뒤쫓아 다니고, 뜻을 물어 보면서 찾아 다니고 숭배하던, 해와 달과 하늘의 모든 천체 앞에 뿌릴 것이다. ・・・・

'힌놈의 아들 골짜기'가 '살육의 골짜기'가 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 원래부터 그곳은 살육의 골짜기였기 때문이다.

- 자녀가 산채로 불태워지던 곳인데, 살육의 골짜기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 그러니 그 골짜기가 시체 더미로 쌓이는 것이다.

[렘 7:32] ・・・・ 그 때에는 매장할 자리가 더 이상 없어서, 사람들이 도벳에 와서 시체를 묻을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 전체가 생명 없는 '황무지'로 바뀌는 것 역시 자업자득이다.

[렘 7:34] 그 때에는 내가 유다의 성읍들과 예루살렘의 모든 거리에서, 흥겨워하는 소리와 기뻐하는 소리, 즐거워하는 신랑 신부의 목소리를 사라지게 하겠다. 온 나라가 황무지로 바뀔 것이기 때문이다.

- 이스라엘이 생명을 가치 없이 여겼기 때문이다.

- 그랬기 때문에 모두가 이스라엘의 생명을 가치 없이 여겼고,

- 그래서 이스라엘 땅에 생명이 전부 사라진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상 앞에 불타는 자녀의 죽음에 그렇게 열망했기에,

- 이스라엘은 사는 것보다 죽음을 택하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의 상황에 처하는 것이다.

- 자녀의 죽음에 열광한 만큼 자신의 죽음도 열광적으로 바라게 되었다.

[렘 8:3] 그리고 이 악한 백성 가운데서 남아 있는 자들은, 내가 쫓아 보낸 여러 유배지에서 사느니보다는, 차라리 죽는 쪽을 택할 것이다. 나 만군의 주가 하는 말이다.

 

이것이 하나님 심판의 원리이다.

- 함부로 아무렇게나 죽이는 것이 아니다.

- 자신의 선택이 자신에게 돌아가도록 하신다.

- 탕자의 탐욕이 결국 탕자를 멸망시켰던 것처럼, 이스라엘의 살육이 이스라엘을 살육하게 한다.

- 마찬가지로, 거래로 관계를 맺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 의해 철저히 거래 대상으로 전락하게 된다.

반면에 사랑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 의해 사랑의 대상이 된다.

- 그래서 결국 하나님에 의한 사랑의 대상이 되어, 천국에서 하나님과 영원토록 사랑을 나눈다.

 

결론 - '학원 뺑뺑이'를 돌렸던 부모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결국 부모 역시 어딘가에서 뺑뺑이를 돌다가 죽을 것이다.

- 요양원일 수도 있고, 병원일 수도 있고, 자식이나 친척 집일 수도 있다.

- 어쨌든 누군가의 사랑, 돌봄, 존중을 받지 못한 채 비참하게 죽을 것이다.

불평할 필요 없다. 자업자득이다.

 

그러니 비참하게 죽지 않으려고 자녀한테 잘하라는 것이 아니다.

- 사랑이라는 형태의 거래를 하라는 것이 아니다.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의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자는 것이다.

- '학원 뺑뺑이'라는 남들 다하는 선택이 우리 인생 전체를 얼마나 비극적으로 만드는지 알자는 것이다.

- 인신 제사도 당시에는 남들 다 하는 일상적인 선택이었지만, 

- 결국 '일상적 선택'이 이스라엘을 황무지로 만들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사소하고 일상적이며 자연스러운 선택이 우리를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정도로 살육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 그리고 살육의 근원에는 거래 사고 방식이 있고,

- 거래를 선택하는 이유는 풍요의 욕망에 있다.

따라서 우리가 여전히 풍요의 욕망을 가지고 있으면, 거래할 수밖에 없다.

- 그런데 거래를 하면, 거래를 당할 수밖에 없고,

- 그러면 사랑, 돌봄, 존중받지 못하고, 

- 이용당하고, 다 쓰면 버려질 수밖에 없다.

이것이 선택의 결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