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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서

예레미야(13) 7:1-15 너희가 의지하는 이 성전을 무너뜨리겠다. - 돈의 운명

<미양교회 팟캐스트 양따양>

미양교회에서 했던 설교를 바탕으로 진솔하게 신앙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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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양을 따르는 어린양

예배 대신 예수님, 설교 대신 성경, 건물 대신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미양교회가 만드는 방송입니다.토끼와 개구리가 진솔하게 신앙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어린양과 같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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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 제사에 대한 비판은 구약과 신약 모두에서 나오는 메시지이다.

- 사울 왕은 아말렉 사람들을 전멸시키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쓸모있는 사람과 물건을 전리품으로 남겨두었다.

- 그래서 사무엘 선지자가 불순종한 사울 왕을 꾸짖는다.

[삼상 15:22] 사무엘이 나무랐다. “주님께서 어느 것을 더 좋아하시겠습니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겠습니까? 아니면, 번제나 화목제를 드리는 것이겠습니까? 잘 들으십시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말씀을 따르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습니다.

- 즉, 제사 의식보다 제사의 본질인 순종, 관계, 사랑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신약에서 유명한 '성전 청결 사건'이다.

[막 11:15~17] 그리고 그들은 예루살렘에 들어갔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 뜰에서 팔고 사고 하는 사람들을 내쫓으시면서 돈을 바꾸어 주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고, (16) 성전 뜰을 가로질러 물건을 나르는 것을 금하셨다. (17) 예수께서는 가르치시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기록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너희는 그 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 예수님은 성전에서 장사하는 것을 보며 '강도들의 소굴'이라 비판하셨다.

- 그래서 결국 예수님은 성전의 실질적 주인이었던 대제사장과 사두개인, 그리고 율법의 실질적 주인이었던 바리새인에 의해 죽임당했다.

- 이를 통해 오히려 성전과 율법이 얼마나 타락하고 제 기능을 잃었는지 증명되었다.

- 하나님을 드러내야 할 성전과 율법이 하나님의 아들을 죽였으니 말이다.

이렇게 성전 제사는 이스라엘과 하나님이 관계를 맺는 가장 상징적인 의식이었지만,

- 현실에서는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가 끊어졌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의식이 되었다.

 

본문도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를 예고한다.

[렘 7:14] 그러므로 내가 실로에서 한 것과 똑같이, 내 이름으로 불리며 너희가 의지하는 이 성전, 곧 내가 너희와 너희 조상에게 준 이 장소에, 내가 똑같이 하겠다.

- 실로는 사사기 시대부터 엘리 제사장, 사무엘 선지자까지 언약궤를 두었던 성소였으며,

- 북이스라엘이 멸망하기 전까지 중요한 성소였다.

- 그러나 북이스라엘의 멸망과 함께 파괴되었다.

- 그런데 실로처럼 예루살렘 성전도 파괴될 것을 예고한다.

게다가 성전의 파괴는 이스라엘의 파괴로 확대된다.

[렘 7:15] 내가 너희의 모든 친척 곧 에브라임 자손 모두를 내 앞에서 쫓아 버렸던 것과 똑같이, 너희도 내 앞에서 멀리 쫓아 버리겠다.

- 하나님의 거처인 성전의 파괴는 하나님의 떠나심을 의미하고,

- 하나님이 떠난 땅에서 이스라엘 민족은 더 이상 머무를 수 없기 때문이다.

 

파괴 이유는 세 가지이다.

첫째로, 율법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렘 7:9] 너희는 모두 도둑질을 하고, 사람을 죽이고, 음행을 하고, 거짓으로 맹세를 하고, 바알에게 분향을 하고, 너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섬긴다.

- 이는 십계명을 요약한 것이다.

- 율법의 가장 기본인 십계명조차 지키지 않았기에, 하나님과의 약속은 파기되고,

- 결국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약속의 땅에서 살게 해주신다는 약속도 파기된다.

둘째로, 그러면서도 '우리는 안전하다.'는 거짓말을 의지했기 때문이다.

[렘 7:8] 그런데도 너희는 지금 전혀 무익한 거짓말을 의지하고 있다.

[렘 7:10] 너희는 이처럼 내가 미워하는 일만 저지르고서도, 내 이름으로 불리는 이 성전으로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우리는 안전하다’ 하고 말한다. 너희는 그런 역겨운 모든 일들을 또 되풀이하고 싶어서 그렇게 말한다.

- 이스라엘은 율법을 범하는 것에 대한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화려한 제사를 드렸고,

- 제사가 주는 거짓 평안을 통해 불안감을 완화했다.

- 특히 그렇게 했던 이유는 한마디로, 율법을 되풀이해서 범할 담대함을 얻기 위해서였다.

[렘 7:10] ・・・・ 너희는 그런 역겨운 모든 일들을 또 되풀이하고 싶어서 그렇게 말한다.

- 즉, 제사는 율법을 당당하게 범하도록 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 '율법 거부권' 또는 '면죄부'를 돈 주고 산 꼴이다.

- 이를 하나님은 '역겹다'고 하셨다.

셋째로, 그런데도 계속된 하나님의 경고를 반복해서 무시했기 때문이다.

[렘 7:13] 너희가 온갖 죄를 지었으므로, 내가 너희에게 서둘러서 경고하였으나, 너희는 듣지 않았다. 내가 불렀으나, 너희는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나 주의 말이다.

-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율법을 범할 때도 참으셨다.

- 제사가 면죄부를 판매, 구매하는 처참한 현장이 되었을 때도 기다리셨다.

-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돌아오도록 타이르고 다그치며 경고하셨다.

- 게다가 이러한 전체 과정을 셀 수 없이 반복하셨다.

- 그러나 그조차 이스라엘은 무시했다.

-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파괴라는 충격 요법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돌아오도록 말씀하신다.

 

게다가 예레미야는 이러한 경고를 성전 문 앞에서 선포한다.

- 특히 주님께 예배하려고 오는 유다 사람들에게 말이다.

[렘 7:2] 주님의 성전 문에 서서, 주님께 예배하려고 문으로 들어오는 모든 유다 사람에게 주님의 말씀을 큰소리로 일러주라고 하셨다.

- 그렇게 신앙에 열심인 사람들에게 멸망을 선포한다.

도대체 그들의 삶이 어땠기에 멸망당해야 마땅한 정도로 죄를 지은 것일까?

 

결론부터 말해서, 그들은 평범하게, 열심히, 적당하게 우리처럼 살았기 때문이다.

- 살인마, 강간범, 도둑, 파렴치한이 아니었다.

- 하나님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그래서 성전에 예배하러 왔다.

- 하지만 그 생각을 성전 밖에서까지 갖지는 못했다.

- 일상에서는 우리처럼 평범하게 살았다.

물론 본문은 이들이 일상에서 범한 죄를 무섭게 표현했다.

[렘 7:9] 너희는 모두 도둑질을 하고, 사람을 죽이고, 음행을 하고, 거짓으로 맹세를 하고, 바알에게 분향을 하고, 너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섬긴다.

- 그러나 만약 이들이 정말 이러한 죄를 대놓고 지었다면, 절대로 성전 앞에 있을 수 없다.

- 이 당시는 이스라엘 멸망(BC 586) 직전으로 소크라테스가 태어나기(BC 470) 불과 100여 년 전이다.

- 이미 사법 제도가 형성된 시기이다.

- 도둑질, 살인, 음행은 분명히 처발 받았고, 이스라엘 종교 권력이 우상 숭배를 엄격히 제한했다.

- 따라서 이들의 범죄는 합법적이며 암묵적이다.

- '나봇의 포도원 사건'처럼 말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기준은 단순한 법 이상이었다.

- 신약의 예를 들어,

[마 5:21~22] 옛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살인하지 말아라. 누구든지 살인하는 사람은 재판을 받아야 할 것이다’ 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22)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나 자매에게 성내는 사람은, 누구나 심판을 받는다. 자기 형제나 자매에게 얼간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누구나 공의회에 불려갈 것이요, 또 바보라고 말하는 사람은 지옥 불 속에 던져질 것이다.

- 즉,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은 단지 수동적으로 생명만 보전하라는 것이 아니라, 

- 적극적으로 미워하지 말고 사랑하라는 것이다.

- 또 간음하지 말라는 율법은 수동적으로 매춘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 적극적으로 이성을 성적 대상화(성적 욕구를 위한 물건 취급) 하지 말고 사랑하라는 것이다.

[마 5:27~28] ‘간음하지 말아라’ 하고 말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28)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사람은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를 범하였다.

또 부자 청년의 예도 있다.

[마 19:16~22] 그런데 한 사람이 예수께 다가와서 물었다. “선생님, 내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살인하지 말아라. 간음하지 말아라. 도둑질하지 말아라. 거짓 증언을 하지 말아라. (19)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 (21)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고 하면, 가서 네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22) 그러나 그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근심을 하면서 떠나갔다. 그에게는 재산이 많았기 때문이다.

- 하나님의 기준은 율법을 문자적으로만 소극적으로 지키는 것이 아니다.

- 단순히 해를 입히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전부로 상대방에게 유익을 주는 것이다.

구약도 마찬가지이다.

[겔 18:5~9] 어떤 사람이 의로워서 법과 의를 실천한다고 하자. (6) 그가 산 위에서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지 않으며, 이스라엘 족속의 우상들에게 눈을 팔지 않으며, 이웃의 아내를 범하지 않으며, 월경을 하고 있는 아내를 가까이 하지 않으며, (7) 사람을 학대하지 않으며, 빚진 사람의 전당물을 돌려 주며, 아무것도 강제로 빼앗지 않으며,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며, 헐벗은 사람에게 옷을 입혀 주며, (8) 돈놀이를 하지 않으며, 이자를 받지 않으며, 흉악한 일에서 손을 떼며,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공정한 판결을 내리며, (9) 나의 모든 율례대로 살아 가며, 나의 모든 규례를 지켜서 진실하게 행동하면, 그는 의로운 사람이니, 반드시 살 것이다.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 단순한 것 몇 가지만 보면, 

- 누군가 돈을 빌려 가면 받을 생각 하지 말라고 한다.

- 전당물도 돌려줘야 하고, 강제로 빼앗지도 못하니까.

- 또 먹을 것, 입을 것을 항상 베풀어야 하고,

- 투자를 하거나, 이자를 받아도 안 된다.

이를 정리하면, 

-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이 그것으로 돈과 권력을 더 얻는 것을 금지하며,

- 돈과 권력이 없는 사람이 그것 때문에 돈과 권력을 더 잃는 것도 방지한다.

- 그래야 빈부격차가 심해지지 않고, 서로가 존중하며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래서 율법에서는 일정 기간이 지나면, 노예도 자유롭게 해주고, 전당물로 얻은 땅도 돌려주라고 했다.

- 이것이 '희년'이 갖는 상징적인 의미이다.

이는 자본주의의 핵심 본질인 빈부격차를 완전히 부정한다.

- 대신에 사랑하라는 것이다.

- 이것이 하나님의 기준이다.

 

분명하게도, 이스라엘은 소극적 의미로 율법을 지키려 했다.

그러나 마치 초등학생이 방학 숙제하듯이 말이다.

-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았다는 것에 엄청난 자부심을 가졌고,

- 만약 해를 준다고 해도, 제사 한 번으로 부담을 완전히 털어 버렸을 것이다.

부부 관계에서도 이런 일이 많다.

- 돈 잘 벌어오고, 외도 안 하고, 외박 안 하고 집에만 잘 들어오면, 좋은 배우자라고 자부심 느끼는 사람도 있다.

- 재테크 잘하고, 자식 대학 잘 보내고, 살림 잘하면, 좋은 배우자라며 당당한 사람도 있다.

- 생일만이라도 잘 챙겨달라는 부탁에 딱 생일만 챙겨주고 뿌듯해하는 배우자도 있고,

- 화장실 청소만이라도 해달라는 부탁에 화장실 청소만 대충해놓고 맘 편히 쉬는 배우자도 있다.

부부는 이러려고 결혼한 것이 아니다.

- 서로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 이것으로 고마움을 느끼는 배우자는 없다.

- 그 이상으로 더 아껴주고 사랑하려고 결혼한 것이다.

- 배우자가 희생을 감수하고 헌신할 때에만 고마움을 느낀다.

- 반대로 부부 사이에서 '희생 없는 헌신'은 아무런 고마움을 느낄 수 없다.

- 부부와 같이 가까운 사이는 특히 그렇다.

 

성전 제사와 예배도 마찬가지이다.

- 일주일에 한 번 모여서 한두 시간 말씀 듣고 나누는 것이 예배의 목적은 아니다.

- 일주일 내내 예배 때와 같이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사랑하며 살라는 말씀을 기억하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는 예배 참석했고, 하나님께 큰 잘못 안 했으니, 하나님이 기뻐하시며 상 주실 것으로 기대한다.

- 그러나 하나님의 기대는 희생을 감수한 헌신이다.

- 하나님이 욕심쟁이라서가 아니라,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너무 깊어서이다.

- 옆집 사람과 배우자에 대한 기대가 다르듯, 하나님이 우리를 특별하게 생각하시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성전 제사와 율법을 문자적으로만 지켰다.

- 적극적 의미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지 않았다.

- 마치 우리가 아무런 손해도 없이 예배를 드리는 것처럼 말이다.

오히려 성전 제사와 율법을 지켰다는 빌미로 더 당당하게 이웃을 괴롭혔다.

- 가지고 있는 돈과 권력으로 더 많은 돈과 권력을 가지려 했고,

- 그러한 과정 때문에 돈과 권력이 없는 사람들은 생존마저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 그러면서도 제사를 드렸다는 이유로 피해자보다 가해자가 더 당당할 수 있었다.

- 게다가 그 당당함 때문에 더 가혹하게 피해자를 괴롭혔다.

예를 들어, 

- 딱 일 년 동안만 연명할 수 있는 소출의 땅을 가진 사람이 있는데,

- 흉년이 들어서 일 년을 버틸 수 없게 되었다.

-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부자에게 돈을 빌려서 남은 일 년을 버텼는데,

- 다음 해에 또 흉년이 들어 돈을 갚을 수 없게 되었다.

- 그래서 빚에 이자까지 더해져서, 결국 전당물인 땅까지 빼앗기고 거지로 전전하다가 죽는 경우가 있다.

소극적 율법의 기준에서 부자는 잘못이 없다.

- 돈을 빌린 게 잘못이고, 갚지 못한 게 잘못이다.

- 부자는 법과 계약을 준수했다.

- 만약 미흡한 것이 있다고 해도, 제사를 드렸기에 완전히 거룩하다.

그러나 적극적 기준에서 부자는 율법을 어겼다.

- 빚에 이자를 받았으며,

- 굶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 그 때문에 간접적으로 살인을 저질렀다.

이것이 하나님의 기준이다.

 

본문의 정죄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 그렇게 율법을 범한 사람들은 제사를 이용하여 죄책감을 털어버리고 당당해졌다.

- 부자들은 가진 돈과 권력으로 화려한 제사를 드렸고,

- 제사장들은 그 제사를 근거로 무죄를 선언해주었다.

- 그래서 부자들은 죄책감 털어서 좋고, 제사장은 돈 벌어서 좋았다.

반면에 가난한 사람들은 이중고에 시달린다.

- 부자 때문에 수탈당해서 괴롭고,

- 어쩌다가 죄를 지어도, 돈이 없어 제사를 드리지 못하니 죄책감에 시달렸다.

- 그래서 가난한 사람은 주변 사람에게도 손가락질당하고, 하나님께도 당당하지 못한 절망적인 상태가 된다.

 

이를 본문은 이렇게 묘사한다.

[렘 7:10] 너희는 이처럼 내가 미워하는 일만 저지르고서도, 내 이름으로 불리는 이 성전으로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우리는 안전하다’ 하고 말한다. 너희는 그런 역겨운 모든 일들을 또 되풀이하고 싶어서 그렇게 말한다.

- 부자들은 제사를 이용해 '면죄부'를 구매했다.

- 또 제사장은 제사를 통해 '면죄부'를 판매했다.

- 그 결과 부자들은 돈만 있으면 마음껏 죄를 지을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되었다.

- 이것이 자본주의 시스템에서의 '자유'와 똑같다.

- 이 '자유'의 핵심은 마음껏 죄를 지을 수 있는 자유이다.

또한 본문은 이러한 거래를 이렇게 표현한다.

[렘 7:11] 그래, 내 이름으로 불리는 이 성전이, 너희의 눈에는 도둑들이 숨는 곳으로 보이느냐? 여기에서 벌어진 온갖 악을 나도 똑똑히 다 보았다. 나 주의 말이다.

- 하나님은 죄인에게 면죄부를 판 성전을 '도둑들이 숨는 곳'이라고 부르셨다.

- 제사의 역할이라는 것이 고작 다른 사람의 돈을 빼앗은 사람이 면죄부를 구매하여 죄책감으로부터 숨도록 한 것이기 때문이다.

- 그래서 예수님도 성전을 '강도들의 소굴'이라고 부르신 것이다.

- 성전 안에 돈을 빼앗아 부자가 된 사람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 이 둘은 원어로도 같은 말이다.

정말 맛깔나게 정확한 표현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속이는 말, 거짓말을 의지하지 말라고 경고하신다.

[렘 7:4] ‘이것이 주님의 성전이다, 주님의 성전이다, 주님의 성전이다’ 하고 속이는 말을, 너희는 의지하지 말아라.

[렘 7:8] 그런데도 너희는 지금 전혀 무익한 거짓말을 의지하고 있다.

- 성전에서 드리는 화려한 제사는 면죄부를 통해 얻는 거짓 평안만 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거짓 평안의 수단으로 전락한 성전의 운명이 파괴인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렘 7:14] 그러므로 내가 실로에서 한 것과 똑같이, 내 이름으로 불리며 너희가 의지하는 이 성전, 곧 내가 너희와 너희 조상에게 준 이 장소에, 내가 똑같이 하겠다.

- 성전이 하나님의 경고와 심판을 정면으로 반박하며 방해하는데, 어떻게 가만히 놔둘 수 있겠나.

- 사람들이 성전에서 선포하는 거짓 평안에 속아, 하나님의 무서운 경고를 외면하는데, 어떻게 놔둘 수 있겠나.

- 면죄부를 팔아서 하나님의 경고로부터 숨겨주는 성전을 어떻게 파괴하지 않을 수 있겠나.

 

그렇다면 우리에게 성전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성전과 같이 거짓 평안을 주고, 하나님 말씀에 귀를 닫게 하며, 거짓말로 죄책감을 덜어주고, 죄를 숨겨주는 것은 무엇일까?

- '돈'이다.

돈은, 단순하게 말해서, 욕망 성취 수단이다.

- 돈은 그 자체로 의미 없다. 종이며 숫자일 뿐이다. 허상이다.

- 그러나 돈은 우리 욕망을 성취해줄 수 있기 때문에 욕망한다.

- 돈이 모든 욕망을 성취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아니지만, 

- 돈을 통한 거래가 욕망을 성취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다.

- 왜 쉬운지는 지난 본문에서 이야기했다.

그래서 사람은 돈을 모은다.

- 그래야 지금 가진 욕망 혹은 지금은 모르지만, 미래에 생길 욕망을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렇기 때문에 당장 돈이 필요 없어도 돈은 모아야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마다 돈을 모으는 동기는 다르지만, 돈을 모으는 행위는 똑같다.

 

그런데 이것이 돈의 사악함이다.

- 돈에 돈을 모으는 동기까지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 돈을 모은다는 정당한 행위 속에 돈을 통해 얻으려는 악한 욕망을 숨길 수 있기 때문이다.

- 죽은 사람을 살리는 돈과 산 사람을 죽이는 돈이 전혀 구별되지 않기 때문이다.

돈으로 사람을 어떻게 죽이느냐?

- 싫어서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을 때, 육체적 살인은 손해가 너무 크니까 은밀하게 사회적 살인을 계획한다.

- 사회적 살인을 위해 돈을 많이 모으고, 그 돈의 힘으로 그를 굴복시킨다.

- 반대로 좋아서 갖고 싶은 사람이 있을 때, 강제로 끌고 오는 대신 돈으로 외모, 지식, 경험, 지위를 사서 다방면의 매력을 갖춘 후 그가 자신에게 끌리도록 한다.

이러한 악한 욕망을 돈이라는 가치 중립적인 대상 뒤에 숨길 수 있다.

- 그래서 돈은 '욕망 성취 수단'임과 동시에 '욕망 숨김 수단'이다.

 

그렇기 때문에 돈은 자유를 준다.

- 돈이 많을수록 악한 욕망을 더 두텁게 숨길 수 있다.

- 돈으로 외모, 지식, 경험, 지위를 사서, 지혜롭고 따뜻하며 의로운 사람으로 위장할 수 있다.

- 마치 성전에서 화려한 제사를 통해 의로운 사람처럼 될 수 있는 것같이 말이다.

하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돈이 주는 자유는 마음껏 죄 지을 자유이다.

- 실상은 더럽고 유치한 욕망을 위한 인생인데도, 사람들에게 점잖고 의미 있는 인생으로 위장할 수 있다.

- 그래서 돈은 악한 욕망을 성취할 담대함을 갖게 한다.

- 마치 투명 망토를 쓴 사람이 욕망을 성취할 담대함과 자유를 갖는 것처럼 말이다.

- 그래서 이건희는 모은 수천억으로 기껏 한다는 일이 고작 담대하고 자유롭게 여러 사람과 매춘하는 것뿐이다.

- 이것이 돈이 주는 자유의 본질이다.

 

경제적 자유란 말이 유행이다.

- 투자를 통해 돈이 돈을 벌게 해서, 노동에서 벗어나 경제적 자유를 이루면, 돈의 제약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더 중요한 일을 할 수 있다고 한다.

- 그래서 노동을 통한 돈에 만족하지 말고, 투자를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당연히 옳은 말이다.

- 자본주의에서 가장 큰 가치는 노동이 아니라 자본이다.

- 자본이 노동보다 훨씬 더 큰 힘으로 자본을 끌어당긴다.

- 돈이 돈을 벌게 하는 방식이 자본주의에서 핵심이다.

- 그러면 노동에 시간을 빼앗기지 않고, 노동으로부터의 자유, 돈을 통한 자유를 얻을 수 있다.

 

하지만 비판 포인트는 두 가지이다.

첫째로, 돈이 많아진다고 돈으로부터 자유로워지지 않는다.

-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

- 1억 있으면, 좋은 전세로 이사 가고 싶고, 10억 있으면 좋은 집 사고 싶고, 100억 있으면 좋은 건물 사고 싶고, 1000억 있으면 좋은 빌딩 사고 싶고, 1조 있으면 좋은 섬 사고 싶은 것이 사람 마음이다.

둘째로, 게다가 돈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고 해서 정말 자유로워지는 것도 아니다.

- 돈이 많아져서 돈에 대한 욕망이 없어지면, 숨어있던 다른 욕망이 올라온다.

-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권력 욕망이 생기고, 가진 자유를 오래 누리기 위해 안정 욕구가 생긴다.

- 그래서 진시황은 가장 높은 자리에서조차 만리장성을 통해 인정 욕구를, 불로초를 통해 안정 욕구를 드러냈다.

 

결론 - 돈의 운명은 어떻게?

성전이 그렇듯, 돈 역시 우리에게 면죄부를 준다.

- 돈이 많을수록, 우리의 욕망은 더 철저히 숨겨지고,

- 욕망이 철저히 숨겨질수록, 더 강력하게 욕망을 표출한다.

- 그래서 우리는 더욱 악한 사람이 된다.

따라서 성전이 그랬듯이, 돈 역시 파멸될 것이다.

- 이것은 100% 확실하다.

- 세상 만물 중에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물론 돈이 파멸된다고, 악한 욕망이 사라진 유토피아가 되지는 않는다.

- 또 새로운 것이 나와서 욕망 숨김 도구 또는 욕망 성취 도구가 될 것이다.

- 이스라엘이 계속해서 새로운 도구를 개발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렇지만 돈이 파멸되면, 돈에 자신을 숨기며 살았던 사람들의 더러움이 드러날 것이다.

- 그리고 돈과 함께 그들도 파멸될 것이다.

- 마치 성전 파괴와 함께 이스라엘의 죄가 드러났듯이,

- 그리고 성전과 함께 이스라엘 전체가 파괴되었듯이 말이다.

 

그러나 살아남은 사람이 있다.

- 대표적으로, 예레미야이다.

- 성전 파괴로 인해 죄가 드러나지도 않았고,

- 육신은 괴롭게 죽었지만, 그의 말은 영원토록 살아남아, 지금 우리에게까지 들린다.

왜냐하면 성전을 의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죄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죄를 성전으로 숨기지 않고, 하나님께 드러내 고백했기 때문이다.

 

돈에 의지하면, 돈으로부터의 자유를 얻는 것이 아니라, 돈과 함께 파멸당한다.

- 이스라엘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이 왜 파멸당하는지조차 모른 채, 억울함과 고통과 혼란스러움 속에서 비참하게 죽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 당장 돈을 모두 포기하자는 뜻이 아니다.

- 적어도 돈 뒤에 숨었던 우리의 악한 욕망을 드러내자는 것이다.

- 우리가 돈을 갖고 싶은 이유가 얼마나 추하고 더러운지 알자는 것이다.

그래서 그 죄를 하나님께 고백하고 돌이키자는 것이다.

 

그 이후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 돈을 모두 잃고 거지가 될 수도 있다.

- 반대로 돈이 더 생겨 선한 부자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거지가 되건 부자가 되건 아무 상관 없게 될 것이다.

- 정말 돈으로부터 자유를 얻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 돈을 통해 얻은 마음껏 죄 지을 자유가 아니라,

- 하나님을 통해 마음껏 사랑할 자유를 얻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사랑 속에서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은, 정말로 자유로운 사람이 될 것이다.

- 그것만이 참 자유이며 참 구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