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양교회 팟캐스트 양따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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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양을 따르는 어린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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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자본주의를 비판해보겠다.
-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이유는 자본주의를 전복하여 사회주의로 가거나, 수정 보완하여 수정-자본주의가 되어,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다.
-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이유는 자본주의 자체에 있지 않다.
오히려 우리를 비판하기 위해서이다.
- 우리 죄를 지적하기 위해서이다.
- 자본주의를 떼어 놓고는 우리의 일상을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우리에게 너무 가깝다.
- 그래서 자본주의를 비판하면, 우리의 일상 전체를 비판할 수 있고,
- 그만큼 우리가 죄에 얼마나 깊이 젖어있는지, 그래서 죄를 얼마나 의식할 수조차 없는지 고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본문은 죄의 경제적 측면을 부각한다.
[렘 5:26~28] "나의 백성 가운데는 흉악한 사람들이 있어서, ・・・・ (27) 조롱에 새를 가득히 잡아넣듯이, 그들은 남을 속여서 빼앗은 재물로 자기들의 집을 가득 채워 놓았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세도를 부리고, 벼락부자가 되었다. (28) ・・・・ 고아의 억울한 사정을 올바르게 재판하지도 않고,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를 지켜 주는 공정한 판결도 하지 않는다.
- 빈부격차, 고리대금, 정경유착, 사법농단을 암시한다.
- 물론 이런 문제가 있다고 당시 이스라엘 사회를 자본주의라고 볼 수는 없다.
- 하지만 경제 권력의 확대로 사회 전반에 악영향이 미친다는 관점에서 당시 이스라엘과 현대 자본주의를 연결할 수 있다.
이스라엘 사회가 가진 문제의 핵심을 하나로 정의하긴 어렵다.
- 신앙이 해이해지면서, 경제, 정치, 외교에서 문제가 생긴 것인지,
- 반대로 경제적 탐욕 때문에, 신앙을 외면한 것인지,
- 아니면 근원적으로 사람들의 사고 방식이 관계에서 거래로 전환되어서인지 규정하기 어렵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문제의 소용돌이 속에서 경제가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 적어도 성경은 그렇게 본다.
- 그래서 성경 전체에서 사치, 고리대금, 가난한 자에 대한 차별을 비판한다.
그리고 같은 경제 문제는 지금도 동일하다.
그런 관점에서 현대의 경제 문제를 비판하려 한다.
- 경제 문제의 핵심은 경제 체제 그 자체인 자본주의에 내재해 있다고 본다.
- 그렇게 자본주의를 비판해야, 현대 사회의 경제 문제 전체를 비판할 수 있고,
- 그러면 자본주의에 완전히 동화되어 있는 우리를 비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본주의가 너무 익숙해서 자본주의 안에서 일어나는 죄를 의식하지 못한다.
- 그래서 표면적이 죄만 지적하면, 그것이 어떻게 죄일 수 있냐며 반발한다.
- 예를 들어, 나는 거래 관계 자체를 비판했다.
- 이를 확대하면, 단순히 편의점에서 껌 하나 사는 것조차 죄가 된다.
- 그러나 나를 포함해서 누구도 껌 사는 것을 비판하면 이상하게 생각한다.
- 왜냐하면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껌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껌이, 돈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돈이 분배되어 같은 재화로 더 큰 만족을 주기 때문이다.
- 일상적인 거래가 갖는 문제를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는 미시적인 관점에서만 그렇다.
- 거시적인 관점에서의 평가는 완전히 다르다.
- 마치 가정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비닐을 구입해서 사용하는 것은 비닐 가게 사장은 돈 벌어서 좋고, 나는 편하게 물건을 담을 수 있어서 좋지만,
- 지구라는 테두리 안에서는 비닐을 사용하는 것이 큰 해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 그래서 예전에는 거리낌 없이 비닐을 사용했지만, 지금은 쓸 때마다 죄책감을 갖는다.
마찬가지로 껌 사는 것 역시 경제 시스템 전체 범위까지 확대해서 바라보면, 그것이 얼마나 심각한 죄인지 비로소 알게 될 것이다.
- 그래서 결국 거리낌 없이 사던 껌에서조차 죄책감을 갖게 될 것이다.
이것이 내가 의도하는 바이다.
- 자본주의 체계 안에서 숨 쉬며 사는 것 자체에서 죄책감을 느끼도록 하려는 것이다.
- 그래서 자본주의에서 벗어나려 해보지만, 아무리 발버둥 쳐도 불가능함을 느끼도록 하려는 것이다.
- 그래서 죄책감에 사무쳐 절망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 그래서 죄책감을 스스로 해결할 방법이 전무하다는 절망감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실낱같은 소망을 보게 하려는 것이다.
이것을 위해 자본주의를 비판하려는 것임을 꼭 기억해주길 바란다.
- 사회 변혁에 있지 않다.
자본주의 비판
자본주의 전체를 비판하기보다는, 일부이지만 상당한 영향력을 갖는 하나만 비판하겠다.
- 바로 '빈부격차'이다.
- 빈부격차는 용납할 수 없는 심각한 문제이다.
- 개인적으로 상대적 박탈감을 갖는 것도 문제지만, 빈부격차가 심해지면 사회 유지가 어렵다.
그래서 비판 포인트는 다음과 같다.
- 빈부격차는 자본주의의 부작용(side-effect)인가, 아니면 작용, 즉 목적이며 본질인가?
이렇게 질문하는 이유는,
- 만약 부작용이라면, 다양한 방법으로 축소, 완화, 보완해야 하며, 어느 정도 감수해야 하지만,
- 반면에 작용이라면, 자본주의가 가지고 있는 심각한 결점이며, 자본주의 자체를 부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해서, 작용이다.
- 자본주의는 빈부격차를 벌리는 것이 목적이며 본질이다.
- 빈부격차는 자본주의에서 필연이고,
- 반대로 말해서, 만약 빈부격차를 철저히 규제한다면, 그 사회는 더 이상 자본주의를 유지할 수 없다.
- 그만큼 빈부격차는 자본주의를 자본주의답게 만드는 핵심이다.
왜 그렇게 말하냐?
- 무식하게 말하면, 자본주의 사회는 자본이 중심이 된 사회이다.
- 즉, 생존이 자본에 의해 결정된다.
- 그래서 가치의 기준이 자본이다.
반면, 사회주의 사회는 공동체(community)가 중심이 된 사회이다.
- 물론 '이론적'으로만 그렇다.
- 그래서 생존이 공동체에 의해 결정되고, 가치 기준이 공동체이다.
그렇다면 자본이 가치 기준이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나냐?
- 당연히 자본을 더 많이 갖기 위해 애쓴다.
그러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을 더 많이 갖기 위한 가장 강력한 수단은 무엇인가?
- 역시 자본이다.
- 개인의 관점에서, 자본이 많은 사람은 더 가치 있는 사람으로 평가되고, 가치 있는 사람에게 더 많은 투자가 몰린다.
- 집단의 관점에서, 큰 자본은 더 안정적으로 더 높은 이익을 얻을 수 있다.
- 대표적인 예로, 규모의 경제이다.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을 모아서 집중시키는 것이 최고의 목표이다.
그런데 여기서 자본을 집중시킨다는 것의 의미가 뭐냐면,
- 상대적인 개념에서이다.
- 단순히 많이 모으는 것이 중요지 않다.
- 100명이 모두 똑같이 100원을 얻었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얻지 못한 것과 같다.
상대적으로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얻어야 한다.
- 100명 모두 똑같이 100원을 얻는 것보다, 99명이 아무것도 얻지 못할 때 나만 1원 얻는 것이 더 가치 있다.
- 100원이 1원보다 훨씬 크지만, 상황에 따라 1원이 더 큰 가치를 갖는다.
- 더 극단적으로 말해서, 99명이 모두 1원 잃었을 때, 1명이 아무것도 잃지 않는 것도 결과적으로 이익이다.
- 예를 들어, IMF 때 현금이 아닌 부동산을 소유했던 사람들이 엄청난 유익을 얻었던 것과 같다.
- 현금 가치는 낮아졌지만 부동산 가치는 그대로였기 때문에, 현금 가진 사람은 모두 손해를 보았지만 부동산 가진 사람은 손해를 보지 않아서, 상대적인 이익을 얻었다.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 자본주의는 자본의 집중을 목표로 삼는데,
- 그 결과 상대적으로 자본의 부족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를 반대로 말하면, 자본주의 사회는 자본의 부족을 목표로 삼는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 그래야 상대적으로 자본의 집중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때 자본의 집중과 부족 사이의 간격, 즉 빈부격차가 생긴다.
- 그래서 자본주의는 빈부격차를 목표로 삼는다고도 볼 수 있다.
- 빈부격차를 의도했다기보다, 한 곳에서는 자본이 더 집중되는 동시에 다른 곳에서는 더 부족하게 만드는 것이 자본주의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빈부 격차를 너무 벌리면 사회 문제가 생기기 때문에 속도를 조절한다.
- 그것이 수정-자본주의 혹은 복지 사회이다.
- 경제가 활성화되고 자본의 이동이 너무 많아서 자본 집중이 너무 빨라지면, 인위적으로 집중된 자본을 사회 기반 시설 확충이나 복지 정책으로 분산시킨다.
- 대표적으로, 기본 소득 논의가 그렇다.
반면에 경제가 비-활성화되고 자본의 이동이 줄어서 자본 집중이 너무 느려지면,
- 인위적으로 세금을 거둬서 대기업에 몰아 준다.
- 그래서 2007년 금융 위기 때 정부는 침체된 경제를 활성화하기 위해 천문학적인 공적 자금을 투입하여 대기업을 지원했다.
하지만 만약 빈부 격차가 나쁘다는 이유로 빈부 격차 진행 속도를 0으로 만들면 어떻게 될까?
- 이를 다르게 말하면, 자본의 집중을 금지하는 것이고, 누구든 돈을 벌면 모아두지 못하고 전부 써버리도록 강제하는 것이며, 더 이상 돈을 벌지 못하도록 막기까지 하는 것이다.
- 자본가가 돈을 벌고 모으는 것 자체가 자본을 집중시켜서 빈부 격차를 벌리기 때문이다.
그러면 사회는 무너진다.
- 왜냐하면 돈을 벌지 못하니, 일하지 않고, 그러니 개발, 개선, 발전이 멈추고, 그러니 아무도 투자하지 않고, 그러니 경제 전체가 멈춘다.
- 그러면 모든 기업은 망하고, 기업의 노동자도 망하고, 노동자의 가족도 망하고, 그들이 다니던 모든 가게가 망한다.
그렇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정부는 빈부 격차 진행을 암묵적으로 유도한다.
- 그러면서 그것이 가난한 사람에게도 필요하다고 내세운다.
- 예를 들어, 삼성이 망하면 나라 경제가 어려워지고, 그러면 결국 가난한 사람까지 경제적으로 어려워진다며, 삼성에 정부 지원이 필요하다고 설득한다.
이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 맞는 이유는 실제로 삼성이 망하며 가난한 사람에게까지 타격이 온다.
- 삼성 직원이 어려워지면 그들의 소비로 돈을 버는 식당이 어려워지고, 그 식당이 사용하는 식자재 가게가 어려워지고, 식자재를 만드는 농가가 어려워진다.
- 모든 사람이 경제적으로 위축된다.
- 그래서 삼성이 망하면 안 된다.
하지만 삼성에 자본이 집중되면, 결과적으로 빈부 격차는 더 벌어진다.
- 가난한 사람은 실제로 들어오는 돈이 적어지지 않지만,
- 물가가 올라서 실질 소득은 줄어든다.
그렇다면 자본의 집중이 필요하냐 아니냐?
- 자본이 집중되면 가난한 사람의 실질 소득이 주니, 집중되면 안 된다.
- 반대로, 자본 집중이 안 되면 경제 전체가 어려워지니, 집중되어야 한다.
-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
이것이 자본주의의 결정적인 한계이다.
자본이 집중 되도 집중되지 않아도, 가난한 사람은 어려워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 이를 다르게 말하면, 자본주의는 '가난한 사람을 연료로 태워서 작동하는 기관차'이다.
- 연료를 넣지 않아도 멈추고, 연료를 너무 많이 넣어도 연료가 빨리 소진되어 멈춘다.
그래서 자본주의에서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연료, 즉 가난한 사람이다.
- 제국주의 시절에는 연료를 식민지로 개척 전쟁으로 얻었고,
- 그 이후에는 한국, 중국, 베트남, 인도 등 개발 도상국이 연료로 태워졌고,
- 최근에는 가장 세련된 방식인 '플랫폼'을 통해 연료를 구하고 있다.
- 이렇게 얻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물건을 싸게 만들든, 물건을 비싸게 팔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본을 끌어와 집중시킬 때에만 자본주의가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연료 구하는 것이 힘들어지면 어떻게 되냐?
- 연료는 곧 생명이다. 연료가 떨어지면 죽는다.
- 그러니 죽음을 감수하고 싸운다.
- 대표적인 예가 '세계 대전'이다.
- 또 다른 예가 '일제 식민 지배'이다.
- 모두 연료 구하기 전쟁이었다-
그러니까 우리 나라가 35년 동안 일본에 처참히 짓밟힌 이유가 전부 자본주의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주의에서는 빠르건 느리건 빈부 격차는 일어날 수밖에 없다.
- 부자와 가난한 자는 동시에 모두 늘어난다.
- 부자는 점점 더 가치 있는 사람이 되고, 가난한 사람은 점점 더 형편없는 사람이 된다.
- 부자는 더 큰 힘을 가지고, 힘 없는 가난한 사람을 더 가혹하게 내리누른다.
- 물론 법이 차별을 막고 있지만, 그 법을 좌우하는 사람 역시 큰 힘을 가진 부자이다.
게다가 부자는 너무 똑똑해서 가난한 사람을 함부로 내리누르지 않는다.
- 너무 가혹하면 반발심이 생겨서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 문제가 되지 않는 범위 안에서만 내리누르고, 내리누르면서도 반발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위안거리들을 건네준다.
- 돈이 없으면 힘이 없고, 그러면 똑똑해질 수 없고, 그러면 이렇게 당할 수밖에 없으며,
- 선심 쓰듯 던져준 위안거리 붙잡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상황을 견딜 수밖에 없다.
이것이 자본주의의 현실이다.
이것에 저항하지 않고, 묵인하고, 적응하고, 동조하는 것은 결국 빈부 격차에 동참하는 것이다.
- 내가 직접 가난한 사람을 압제하지는 않았지만,
- 노동으로 인해 자본이 집중되었고, 그로 인해 부자들이 더 강해졌고, 그렇게 강해진 힘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압제했다.
- 우리가 열심히 일한 결과 가난한 사람이 더 가난해졌다.
- 이런 점에서 우리는 자본주의의 피해자임과 동시에 가해자이다.
- 적어도 우리는 방조자이다.
게다가 아무리 우리가 현재 가해자가 아니더라도, 가해자가 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 우리의 목표는 자본의 집중 한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이다.
- 그곳에서 모이는 돈을 끌어 담아, 그 돈으로 더 많은 돈을 버는 것이 목표이다.
- 그것이 아니라면, 적어도 자본의 부족에서 벗어나서 자본의 집중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 그곳에서 돈을 끌어모으지는 않더라도, 지금 가진 자본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런데 자본주의 안에서 피해자에서 벗어나려면 가해자가 되어야 한다.
- 중간 지대는 없다.
- 피해자에서 벗어나는 순간 가해자가 되며,
- 가해자 지위를 유지하려면 나도 모르게 피해자를 압제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피해자를 옹호하고 미화하려는 것도 아니다.
- 대부분의 피해자는 가해자가 되기를 갈망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주의에는 두 부류의 사람밖에 없다.
- 현재 가해자와 가해자가 되는 것을 목표로 삼은 피해자뿐이다.
- 우리도 이 둘 중 하나이다.
- 이러한 참혹함을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으로 절묘하게 숨기고 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본문은 이스라엘을 흉악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본문은 이스라엘을 흉악한 '사람 사냥꾼'으로 규정한다.
[렘 5:26] 나의 백성 가운데는 흉악한 사람들이 있어서, 마치 새 잡는 사냥꾼처럼, 허리를 굽히고 숨어 엎드리고, 수많은 곳에 덫을 놓아, 사람을 잡는다.
- 그런데 정말 이스라엘이 사람을 덫으로 붙잡았겠느냐?
- 아니면 대놓고 대놓고 거짓말로 재물을 빼앗았겠느냐?
[렘 5:27] 조롱에 새를 가득히 잡아넣듯이, 그들은 남을 속여서 빼앗은 재물로 자기들의 집을 가득 채워 놓았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세도를 부리고, 벼락부자가 되었다.
아니다.
- 정치꾼을 도둑이라고 비난한다고, 그가 대놓고 물건을 훔친 것은 아니다.
- '합법적'으로 다른 사람의 재산을 가져간다.
- 그것을 위해 입법, 행정, 사법 권력을 통해 불법을 합법으로 만든다.
이스라엘도 그랬다.
- 돈을 얻기 위해 권력을 이용했고, 권력을 얻기 위해 종교를 이용했으며, 종교 주도권을 얻기 위해 돈을 사용했고, 그렇게 얻은 종교 주도권으로 돈과 권력을 얻었다.
그러한 악순환의 과정에 가난한 사람에게 크게 두 가지 문제가 생겼다.
첫째는, 직접적으로 가난한 사람의 재산이 세금이나 제사 재물로 수탈되었다.
- 세리는 세금을 과도하게 걷는 수단이었고, 성전 뜰에서 재물을 파는 사람과 돈 바꿔주는 사람은 재물로 돈을 버는 수단이었다.
[막 11:15] ・・・・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 뜰에서 팔고 사고 하는 사람들을 내쫓으시면서 돈을 바꾸어 주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고,
둘째는, 부가 집중되면서 간접적으로 가난한 사람의 재산에 손실이 생겼다.
- 이스라엘이 부를 집중시키기 위해 한 일은 '대토지화'이다.(Marvin L. Chaney, 농경사회 시각으로 바라본 성서 이스라엘)
- 이전에 개인이 소규모로 식용 작물을 혼작(다품종 경작)하던 소규모 토지를 저당물로 잡아 대규모 토지로 바꾸고 단일한 환금 작물(포도와 올리브)을 경작하였다.
- 포도와 올리브로 포도주와 기름을 만들면 가격대비 부피가 크게 줄어, 주변 강대국에 조공을 하거나 사치품을 수입하기 편하기 때문이다.
- 대신에 물가 상승으로 인해 생필품의 가격이 올라가, 가난한 사람의 삶은 더 어려워졌다.
이러한 악순환은 자본주의에서 일어나는 규모의 경제와 그로 인해 발생한 문제와 일맥상통한다.
그렇기 때문에 본문은 이스라엘을 흉악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 '대토지화'를 위해 은근한 거짓말을 했고,
[렘 5:27] ・・・・ 그들은 남을 속여서 빼앗은 재물로 자기들의 집을 가득 채워 놓았다. ・・・・
- 그 거짓말을 숨기기 위해 판결을 조작했다.
[렘 5:28] ・・・・ 고아의 억울한 사정을 올바르게 재판하지도 않고,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를 지켜 주는 공정한 판결도 하지 않는다.
그 대표적인 예가 악녀 이세벨의 '나봇의 포도원 사건'이다.
[왕상 21:1~16] ・・・・ 이스르엘 사람 나봇이 이스르엘 땅에 포도원을 하나 가지고 있었는데, ・・・・ (2) 아합이 나봇에게 말하였다. "그대의 포도원이 나의 궁 가까이에 있으니, 나에게 넘기도록 하시오. ・・・・ (4) 아합은, 이스르엘 사람 나봇이 그 포도원을 조상의 유산이라는 이유로 양도하기를 거절하였으므로, 마음이 상하였다. ・・・・ (8) 그런 다음에, 이세벨은 아합의 이름으로 편지를 써서, 옥쇄로 인봉하고, 그 편지를 나봇이 살고 있는 성읍의 원로들과 귀족들에게 보냈다. (9) 그는 편지에 이렇게 썼다. "금식을 선포하고, 나봇을 백성 가운데 높이 앉게 하시오. (10) 그리고 건달 두 사람을 그와 마주 앉게 하고, 나봇이 하나님과 임금님을 저주하였다고 증언하게 한 뒤에, 그를 끌고 나가서, 돌로 쳐서 죽이시오." (11) 그 성 안에 살고 있는 원로들과 귀족들은, 이세벨이 편지에 쓴 그대로 하였다. ・・・・ (15) 이세벨은 나봇이 돌에 맞아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곧 아합에게 말하였다. ・・・・ (16) 아합은, 나봇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일어나서, 이스르엘에 있는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려고 내려갔다.
- 이세벨은 나봇의 땅을 빼앗기 위해 거짓 모함을 했고,
- 그것을 가지고 거짓 재판을 했다.
- 이를 통해 나봇을 죽이고 땅을 빼앗았다.
- 이는 당시를 보여주기 위한 극단적이고 전형적인 사건이지, 실제로 이런 일이 빈번했다고 할 수는 없다.
- 하지만 이를 통해 당시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렘 5:22] 너희는 내가 두렵지도 않으냐? 나 주의 말이다. 너희는 내 앞에서 떨리지도 않느냐? 나는 모래로 바다의 경계선을 만들어 놓고, 바다가 넘어설 수 없는 영원한 경계선을 그어 놓았다. 비록 바닷물이 출렁거려도 그 경계선을 없애지 못하고, 아무리 큰 파도가 몰아쳐도 그 경계선을 넘어설 수가 없다.
- 하나님은 강력한 파도조차 넘을 수 없는 '경계선'을 만드신 분이다.
- 하지만 미약한 사람은 '경계선'을 마구 넘나든다.
- 경계선을 만드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다.
[렘 5:23] 그러나 너희는 목이 곧아 고집이 세고 반역하는 백성이어서, 나에게서 돌아서서 멀리 떠나고 말았다.
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냐?
- 사람은 본성적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한다.
- 하나님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사람은 없다.
- 보이지 않는 강력한 힘이 있다는데 어떻게 두렵지 않겠는가.
그런데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이유는 특정한 상황 때문이다.
- 그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실험이 '보이지 않는 고릴라' 실험이다.
- 사람은 하나에 집중하면 다른 것을 보지 못한다는 뜻이다.
- 이처럼 사람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 것은 하나님이 실제로 두렵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 하나님보다 더 두려운 것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것이 뭐냐면, '자아 상실감'이다.
- 하나님께 의존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며, 하나님을 주인 삼아 살면, 자신은 종이 되어, 자신에게조차 자신이 주인 될 수 없다는 두려움이다.
- 자신이 사라진다는 두려움에 휩싸여,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잊어버린 것이다.
- 그래서 아무리 하나님이 외쳐도 아무것도 듣지 못하는 것이다.
[렘 5:21] 이 어리석고 깨달을 줄 모르는 백성아, 눈이 있어도 볼 수가 없고, 귀가 있어도 들을 수가 없는 백성아, 너희는 이제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어라.
'자아 상실감'에 대한 두려움이 생기면 어떻게 되냐?
- 통제 욕구가 생긴다.
- 주변 상황과 사람을 통제하려 하고, 적어도 파악은 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 주변에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생기는 것을 두려워한다.
- 왜냐하면 자신이 주변 상황에 주인 되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할 수 없는 것이다.
- 하나님은 절대로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 하나님이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주신다는 약속은 약속일 뿐 자신은 어찌할 수 없는 통제 밖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그럼 왜 '자아 상실감'이 생기냐?
- 거래 사고 방식 때문이다.
- 한 하늘에 두 태양이 뜰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다.
- 인생이 제로섬 게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그래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순간에 자신의 주권을 훼손된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 거래할 때 소유권은 언제나 한 사람에게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자아 상실감'을 만회하고 자신이 가치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자본을 모으는 것이다.
-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이 최고 가치이기 때문이다.
- 그리고 자본이 있을 때 주변 상황을 통제하기 훨씬 쉽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거래 사고 방식은 필연적으로 자아 상실감을 만들고,
- 자아 상실감은 자본을 모으려 하고,
- 의식하지는 못하지만, 자본이 자아의 지지 기반이 되며,
- 결국 자본에 목숨이 매달린 사람으로 전락하게 된다.
- 자본이 없어지면 육체적 목숨을 잃는 것은 아닐지라도, 정신적, 사회적 목숨을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목숨 걸고 돈을 버는 것이다.
- 그러니 하나님이 두렵지 않은 것이다.
- 그러니 사랑하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 그러니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신이 자본을 집중시키는 것이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자본의 부족을 일으키는지 알지 못하는 것이다.
- 두려움에 완전히 빠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도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고 사는 것이다.
- 사랑이 없어서가 아니다.
- 두려움이 너무 커서이다.
그래서 우리로 인해 사회에서 소외되는 사람들에게 무관심한 것이다.
결론 - 두려움에서 벗어나려면?
엄밀하게 말해서, 자본주의가 문제가 아니다.
- 우리가 문제이다.
- 자본주의는 우리의 문제를 숨기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문제는 거래 사고 방식이 만든 두려움 때문이다.
- 자신의 주권이 사라질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 그래서 다른 사람을 짓밟아서라도 상위에 가려고 발버둥 치는 것이다.
- 그래서 자신의 발에 짓밟히고 있는 사람들의 고통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 무엇보다 자신이 너무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 그래서 다른 사람의 고통에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다.
해법은 하나이다.
- 하나님이 두려움의 감옥에서 꺼내주시는 것뿐이다.
- 마치 애굽 땅에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민족을 출애굽 하시듯 말이다.
- 그것이 참 구원이다.
그렇게 두려움에서 벗어나면,
- 그제야 주변에서 고통스럽게 울부짖는 사람들이 보인다.
- 그리고 그 고통이 나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 그래서 그들의 고통에 책임감을 갖게 된다.
그리고 그제야 참 두려움을 알게 된다.
- 바로 하나님이 얼마나 두려운 분이신지 깨닫게 된다.
-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다른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 그때 느끼는 두려움 없는 담대함이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자유'이다.
[요 8:32] 그리고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 그래서 바울이 그토록 자유로웠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두려움에서 꺼내주시냐?
진부하지만, 유일한 방법은 예수님이다.
- 죽고 부활하심이다.
- 십자가에서 죽음을 죽이심이다.
두려움과 십자가가 어떻게 연결되냐?
- 두려움의 근원은 자신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두려움이다.
- 그런데 그 두려움은 자신을 자신이 소유하고 있다는 착각에서 온다.
- 그 착각에 기반하여 소유에 바탕을 둔 거래 사고 방식을 갖는 것이다.
- 결국 거래 사고 방식 속에서 사람에 대한 무관심이 생긴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실 때, 자신과 함께 우리도 죽이셨다.
- 다르게 말하면, 우리가 이미 죽은 자라는 것을 증명하셨다.
- 이를 통해 우리 소유의 나 자신을 죽이셨다.
- 이 또한 다르게 말하면, 내가 나를 소유하고 있다는 착각을 부수셨다.
그런 후 예수님이 부활하실 때, 자신과 함께 우리도 부활시키셨다.
- 그런데 이렇게 부활한 우리는 이전과 차이가 있다.
- 이전에는 내가 나를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 이제는 나의 소유권이 나를 부활시키신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 이를 다르게 말하면, 원래부터 하나님 소유였던 나를 나의 소유로 착각하고 있었는데, 십자가 죽음 부활을 통해서 그것이 착각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런 깨달음 이후에야 비로소 처음 경험하는 것이 있는데,
- 바로 진정한 의미의 '공동 소유'이다.
- 내가 나와 하나님의 공동 소유라는 것을 드디어 경험하게 된다.
- 드디어 한 하늘에 두 태양이 뜰 수 있고, 세계는 논-제로섬 게임이라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의 소유가 된다고 내 주권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 그래서 '자아 상실감'에서 벗어나게 된다.
- 나는 하나님의 소유임과 동시에 하나님께서 소유권을 지켜주시는 나의 소유라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
- 그래서 안정감을 갖게 된다.
그러니 자본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할 필요가 없고,
- 온전히 나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된다.
- 그러니 하나님께서 나 자신 안에 넣어주신 나의 개성과 정체성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다.
-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말이다.
그와 동시에 주변 사람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생긴다.
- 두려움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 그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하나님 외에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자유를 얻었기 때문이다.
- 그 자유로 마음껏 사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갈 5:13]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부르셔서, 자유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 자유를 육체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구실로 삼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
그러니 자본의 부족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과 함께 고통스러워한다.
- 동시에 자본의 집중하는 것에 거리낌이 생긴다.
그래서 만약 우리가 자본의 집중을 멈추고 빈부격차를 줄이는 데 온 힘을 쓰면 어떻게 될까?
- 우리는 분명히 거지가 될 것이다.
- 현재 사회적 지위를 잃을 것이다.
- 자본의 부족 집단으로 빨려 들어갈 것이다.
- 현재 상황에서는 그것이 우리의 숙명이다.
그런데 만약 극단적인 가정을 해서, 우리가 6명이 아니라 600만 명이 된다면?
- 그래서 600만이 함께 빈부격차를 줄이는 데 온 힘을 쓴다면?
- 적어도 우리 나라는 달라질 것이다.
- 물론 자본주의 시스템은 파괴될 것이고, 그 사이에 엄청난 혼란이 있을 것이다.
- 그러나 시스템 없이도 사랑으로 운영될 것이다.
아무도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는,
- 모두가 담대하게 자기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는,
- 동시에 모두가 서로를 공감하며 배려하고 살아가는 나라가 될 것이다.
이곳이 천국이다.
-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다.
- 그러나 우리가 유일하게 소망해야 할 세상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 천국이 이미 임했다.
- 우리는 그 천국의 주역이 될 수 있다.
- 우리에게 두려움이 없어진다면 말이다.
예수님은 이미 죽고 부활하셨다.
- 그래서 이미 두려움을 죽이셨다.
이제는 우리의 믿음에 달려있다.
- 평생토록 두려움에 시달리다가 결국 지옥에 빠질지,
- 아니면 믿음으로 두려움에서 벗어나 지금 당장 천국에서와같이 살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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