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양교회 팟캐스트 양따양>
미양교회에서 했던 설교를 바탕으로 진솔하게 신앙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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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양을 따르는 어린양
예배 대신 예수님, 설교 대신 성경, 건물 대신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미양교회가 만드는 방송입니다.토끼와 개구리가 진솔하게 신앙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어린양과 같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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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서 하나님은 분노 폭발 일보 직전이다.
- 그래서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기 일보 직전이다.
[렘 6:2] 딸 시온은 아름답고 곱게 자랐으나, 이제 내가 멸망시키겠다.
- 하나님이 직접 적군에게 전쟁 명령까지 내리셨다.
[렘 6:6] 나 만군의 주가 이미 적군에게 이렇게 명하였다. ‘너희는 나무를 모두 자르고, 예루살렘을 점령할 흙 언덕을 쌓아라. 예루살렘은 심판을 받아야 할 도성이다.
특히 그 격정적인 감정을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투영하여 표현하신다.
[렘 6:11] 그들을 향하신 주님의 진노가 제 속에서도 부글부글 끓고 있어서, 제가 더 이상 주님의 진노를 품고 있을 수도 없습니다. ・・・・
- 이 폭발 일보 직전의 감정은 예레미야가 느끼기 이전에 하나님이 가지고 계셨다.
-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선지자로서 하나님 대신 그것을 드러낸 것뿐이다.
그리고 결국 그 감정은 폭발하여 쏟아진다.
[렘 6:11-12] ・・・・ 그러면 나의 분노를 길거리의 아이들에게 쏟아라. 젊은이들이 모인 곳에다가 쏟아라. 결혼한 남자들과 결혼한 여자들이 잡혀 갈 것이다. 청년이 잡혀 가고, 죽을 날을 기다리는 노인도 잡혀 갈 것이다. (12) 그들의 집은 다른 사람들에게로 넘어가고, 밭과 아내들도 다 함께 다른 사람들의 차지가 될 것이다. 내가 손을 들어서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을 칠 것이기 때문이다. 나 주의 말이다.
- 분노 표출 대상은 아이들, 젊은이, 남자, 여자, 청년, 노인 등 이스라엘 전체이며,
- 분노 표출 방법은, 한마디로 전멸이다.
-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이 모든 것을 빼앗긴다. 소유, 생명, 사랑하는 사람까지.
- 범위는 가장 포괄적이고, 정도는 가장 극심하다.
이를 통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분노케 했고, 그들이 하나님을 얼마나 극심하게 분노케 했는지 간접적으로 말해준다.
예레미야서는 하나님을 이렇게 분노케 한 이스라엘의 죄를 꼼꼼하게, 반복해서 고발한다.
- 지난 본문은 이스라엘을 '사람 사냥꾼'에 비유했다.
[렘 5:26] 나의 백성 가운데는 흉악한 사람들이 있어서, 마치 새 잡는 사냥꾼처럼, 허리를 굽히고 숨어 엎드리고, 수많은 곳에 덫을 놓아, 사람을 잡는다.
- 게다가 외도와 매춘에 빠져있고, 빈부격차, 고리대금, 정경유착, 사법농단의 불법을 자행했다.
- 즉, 윤리적, 도덕적, 법적, 육체적, 정신적, 종교적, 정치적, 경제적, 외교적으로 완전히 부패했다.
따라서 만약 성경의 고발이 사실이라면, 하나님의 분노는 충분히 납득된다.
-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억압하고, 하나님이 사랑하는 본인 자신을 망가뜨렸으며, 또한 하나님 자신을 부정하고 모독했다.
- 게다가 딱 한 번 우발적으로 잘못한 것이 아니라, 수백 년 동안 반복해서 잘못했고,
- 수백 년 동안 하나님이 타이르며 경고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돌이키지 않았다.
- 그래서 하나님조차 인내와 긍휼에 지쳐버리셨다.
[렘 15:6] 네가 바로 나를 버린 자다. 나 주의 말이다. 너는 늘 나에게 등을 돌리고 떠나갔다. 나는 이제 너를 불쌍히 여기기에도 지쳤다. 너를 멸망시키려고 내가 손을 들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경고를 비웃었다.
[렘 6:10] 제가 말하고 경고한들 누가 제 말을 듣겠습니까? 그들은 귀가 막혀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전하면 그들은 저를 비웃기만 합니다. 말씀 듣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 하나님의 경고를 몰라서 돌이키지 않은 것이 아니라,
- 듣고도 의도적으로 거역한 것이다.
나는 이 부분에서 감정 이입이 되는데,
- 자녀를 양육하면서 화를 참을 수 없었던 때 중의 하나가,
- 하지 말라고 1초 전에 타이른 일을 보란 듯이 일부러 할 때이다.
- 물론 자녀가 나쁜 마음을 품고 약 올리려고 한 것은 아닐지라도,
- 그 순간 무시당할 때 느끼는 굴욕감, 모욕감이 확 올라오면서,
- '내가 이런 취급 받으면서까지 얘한테 사랑과 인내를 쏟아야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하나님은 나와 같은 경박한 감정과는 차원이 다르시겠지만, 같은 결의 감정일 것이다.
- 하나님도 이스라엘 때문에 정말 화가 많이 나셨다.
- 이스라엘을 자신의 백성 삼고 자신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되고자 하는 마음을 포기하실 만큼 말이다.
[렘 12:7] 나는 내 집을 버렸다. 내 소유로 택한 내 백성을 포기하였다. 내가 진정으로 사랑한 백성을 바로 그들의 원수에게 넘겨 주었다.
- 비록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내 백성으로 삼겠다고 약속하셨음에도 말이다.
[레 26:12] 나는 너희 사이에서 거닐겠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제부터이다.
이스라엘을 행했던 하나님의 진노가 이스라엘을 지나 우리에게까지 온다는 점이다.
- 성경이 성경인 이유는 기록될 당시뿐만 아니라 현재 우리에게까지 유효하기 때문이다.
-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혼나는 이야기를 듣는데 괜히 우리까지 마음 졸이게 된다.
- 그 불똥이 나한테 튈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다.
그때 우리에게 일어나는 반응은 이것이다.
- 하나님은 꼭 저러셔야 했나?
- 이스라엘이 잘못한 건 알겠는데, 아무리 그래도 꼭 전멸시키셔야만 했나?
- 하나님은 너무 잔인하고 무자비하신 것 아냐?
- 더 좋은 방법이 있지 않았을까?
- 사랑의 하나님 정말 맞아?
이렇게 반응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 무의식적으로 찔려서이다.
-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이스라엘을 옹호하는 것이고,
- 이스라엘을 보호하기 위해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과하다고 부정하는 것이다.
- 그래야 이스라엘과 다르지 않은 삶을 사는 자신에게 돌아올 진노를 외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 과하다는 반응은 나 살기 위해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이다.
- 마치 바리새인들이 자신의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해 예수님을 부정하고 죽였던 것처럼 말이다.
- 2000년 전에 죽으셨던 예수님을 지금도 여전히 마음에서 죽이고 있다.
이러한 반응을 본문은 이렇게 말한다.
[렘 6:15] 그들이 그렇게 역겨운 일들을 하고도, 부끄러워하기라도 하였느냐? 천만에! 그들은 부끄러워하지도 않았고, 얼굴을 붉히지도 않았다. ・・・・
- 이스라엘이 그랬듯 우리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얼굴을 붉히지 않는다.
- 분명히 찔림을 받았는데도 말이다.
- 부끄러움을 외면하기 위해 이스라엘을 옹호하며 하나님을 분노 조절 장애 취급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다.
그렇게 반응하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어떻게 반응하시냐?
- 전멸로 반응하신다.
[6:15] ・・・・ 그러므로 그들이 쓰러져서 시체더미를 이룰 것이다. 내가 그들에게 벌을 내릴 때에, 그들이 모두 쓰러져 죽을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도대체 하나님은 왜 이러실까?
정말로 하나님은 분노 조절 장애이신가?
- 왜 아니신지를 따져보겠다.
핵심은 하나님이 분노가 폭발할 때까지의 정황을 보는 것이다.
- 하나님의 분노와 이스라엘의 잘못의 무게를 비교하는 것이다.
- 그래서 이스라엘의 잘못의 무게가 더 크다면, 하나님은 분노 조절 장애라는 오해에서 벗어날 수 있다.
- 마치 우리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소송을 판결하는 판사라고 생각하고 이 둘의 입장을 잘 들어보자.
엄밀하게 말해서, 결론을 확정할 수 없다.
- 감정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 99명이 공감한다고 하더라도, 1명이 공감 못 하겠다고 하면 그것으로 결론을 무마할 수 있다.
게다가 결론 내리는 것이 더 어려운 이유는, 결론을 내리는 우리가 문제의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 하나님 편을 들자니, 그 뒤에 우리에게 내려질 심판이 두렵고,
- 이스라엘 편을 들자니, 하나님을 정신병자 취급하는 신성 모독 죄를 범한 것 같아 두렵다.
그래서 결국 이 문제도 믿음의 영역에 있다.
-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감정을 절대 진리로 전제하여 문제를 바라본다.
- 그래서 하나님이 그렇게 분노하실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찾는 데 모든 에너지를 쓴다.
- 동시에 이스라엘에게 얼마나 흉악한 의도가 숨겨져 있는지 파헤치려 한다.
반면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도 실수하실 수 있다는 전제에서 문제를 바라본다.
- 그래서 하나님께 있는 사소한 실수를 찾는 데 매진한다.
- 만약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분노하기 전에 이런 선택을 하셨다면, 이스라엘이 멸망당하지 않고 돌이킬 수 있지 않았을까?
- 혹은 이스라엘에게 잘못이 있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멸망시키는 것보다 더 나은 선택이 있지 않았을까? 라고 말이다.
- 그러면서 이스라엘이 잘했다는 것은 아니지만, 상황상 어쩔 수 없었던 것 아닌가?
- 이스라엘이 선택할 수 있는 현실적인 대안이 과연 있었을까?
-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기대하셨던 선택은 너무 이상적이고 비현실적인 것 아닌가? 라고 말이다.
이를 통해 믿지 않는 사람은 숨겨진 의도를 드러낸다.
- 만약 지금 나에게 성경 말씀처럼 심판이 내려진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실수하신 거야.
- 심판으로 나를 망가뜨리는 것보다 하나님이 선택하실 수 있는 더 좋은 방법이 있어.
- 내가 잘했다는 것은 아니지만, 나도 어쩔 수 없었어. 최선이었어.
- 하나님이 나에게 지금보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하시는 것은 너무 이상적이고 비현실적이야.
- 나는 지금보다 더 잘할 수 없어.
- 지금으로 충분하니, 나에게 심판을 내리시는 하나님은 부당해. 라는 의도가 숨겨져 있다.
이러한 멘트는 혼자 상상한 것이 아니라, 성경에 나온 하나님의 심판을 설명했을 때 실제로 들었던 말이다.
- 이스라엘과 자신을 동일시하려는 노력조차 못 하는 사람과는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 그래서 이스라엘에게 선포된 하나님의 분노가 자신과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사람과는 신앙을 나누기가 어렵다.
- 왜냐하면 성경 이야기가 내가 아닌 남을 위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 혹은 성경 중 일부만 자의적으로 취사선택하여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 이는 결국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전부든 일부든 부정하는 것이고,
- 그것은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 전부를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불신자로서 전도의 대상, 사랑과 긍휼을 베풀 대상이지, 공동체로서 한 몸으로 서로 사랑할 대상은 아니다.
잘 알겠지만, 내가 이런 사람들과 대화를 하면서 받은 상처와 충격이 커서 그렇다.
- 자신도 성경의 '일부'를 믿으니 신앙이 있는 것이라고 우기며,
- 오히려 나를 비현실적인 신앙을 주장하는 이상한 사람으로 매도하는 사람이 있었다.
게다가 그런 사람들을 신자로 받아주며, 문제를 지적하지 않는 대부분의 교회가 너무 밉다.
- 그 교회들은 악한 의도로건, 무식해서건 그런 선택으로 부당한 이익을 얻고 있는데 말이다.
- 그 때문에 오히려 내가 더 이상한 사람으로 보이게 되는 게 너무 억울하다.
- 나는 단지 성경 말씀을 그대로 말한 것뿐인데 말이다.
- 물론 나에게 틀린 것이 많지만, 성경이 우리를 심판받아 마땅한 죄인이라고 말한다는 사실 자체는 교회 다니는 모든 사람이 적어도 말로는 인정하는 것인데 말이다.
- 그 말씀을 대충 얼버무리지 않고, 정확하게 곱씹어서 말한 것에 불과한데 말이다.
그러니 적어도 우리는 성경을 부정하지는 말자.
- 성경의 모든 말씀이 이해되지 않을 수 있다.
- 받아들여지고 공감되지 않을 수 있다.
- 그러나 그것은 내가 모르는 영역이고 앞으로 알아야 할 영역이지, 성경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진 말자.
더 양보해서, 성경이 이상하다고 생각한다면,
- 이상하다고 치부하고 제쳐두지 말고, 왜 이상한지 고민하는 노력이라도 하자.
- 그래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려는 노력이라도 하자.
- 그것이 성경 앞에 진지한 태도이다.
고민하지도 않고 믿거나, 고민하지도 않고 믿지 않는 것은 모두 똑같이 성경을 모독하는 것이다.
- 이는 단지 성경만 모독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인생 자체를 모독하는 것이다.
- 인생에서 중요한 결정을 대충 했기 때문이다.
- 이는 곧 인생을 하찮게 여기는 것이다.
- 그렇게 대충 사는 사람은 뭘 해도 안 된다.
- 아무리 능력이 있을지라도, 의지가 없어서 실패한다.
- 능력이 없더라도, 의지가 있으면 능력은 보완된다.
진지하게 고민하며 살자.
- 신앙이던, 직장이던, 가정이던, 인생이던.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지난 행보
그러면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지난 행보를 간단하게 보자.
- 나 역시 문제의 당사자로서 객관적일 수 없다.
- 함께 고민하고 함께 비판하자.
① 관계의 시작
대표적으로, 두 가지이다.
첫째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주신 약속이다.
[창 17:4~8] “나는 너와 언약을 세우고 약속한다. ・・・・ 이 언약을 따라서,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될 뿐만 아니라, 뒤에 오는 너의 자손의 하나님도 될 것이다. ・・・・
- 이 약속의 증거로 하나님은 아들 이삭을 주신다.
둘째로, 모세가 이스라엘을 출애굽하여 시내산에서 받은 언약이다.
[출 19:3~6] 모세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 가니, ・・・・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선택한 백성이 되고, (6) 너희의 나라는 나를 섬기는 제사장 나라가 되고, 너희는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 ・・・・
- 이후 십계명을 비롯하여 많은 율법(출 21-23장)을 주신다.
어쨌든 관계의 시작은 하나님의 약속이고,
-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영원토록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될 것을 약속하신다.
- 아브라함과 모세가 특별한 헌신을 했기 때문이 아니다.
- 하나님의 선택이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선물을 받는다.
- 99세까지 자식을 얻지 못한 아브라함은 100세에 이삭을 받는다.
- 이스라엘은 400년 동안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벗어나, 약속의 땅 가나안을 받는다.
- 이러한 선물은 한마디로, 육체적, 사회적, 영적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져주신 은혜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죽어있는 이스라엘과 관계를 맺으시며 선물로 생명까지 주셨다.
② 관계의 과정
그러나 하나님은 항상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셨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여기지 않는다.
- 대표적인 예가 사사기이다.
-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거부하여, 민족 멸망 위기 속에서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자, 하나님께서 사사를 보내셔서 구원하시고 관계를 회복한다는 이야기인데,
- 비슷한 이야기를 12번 반복하여 12명의 사사가 나온다.
게다가 또 같은 이야기가 열왕기에서도 반복된다.
- 통일 왕국 시대의 다윗과 솔로몬을 비롯해서, 남유다, 북이스라엘 왕들 대부분이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위기를 겪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하는 과정을 반복한다.
정리하면, 이스라엘은 한결같이 불순종한다.
- 그로 인해 반복해서 멸망 위기에 몰린다.
- 그래서 절망 속에서 절규한다.
- 멸망 위기는 언약을 파기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심판임과 동시에,
- 이스라엘 스스로가 잘못된 선택을 하여 초래한 결과이다.
- 이는 예레미야서에서 심판의 주체가 하나님이심과 동시에 이스라엘 자신이라는 것을 배웠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량없는 사랑으로 이스라엘을 반복해서 구원하신다.
- 수백 년 동안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약속을 어기고, 반복해서 하나님을 거부한다.
-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 없음으로 인해 멸망 위기에 빠지는 이스라엘의 절규를 무시하지 못하신다.
- 반복해서 거절당하는 수모를 참고, 하나님은 다시 이스라엘을 품으신다.
③ 관계의 결말
엄밀하게 말해서, 관계의 결말은 아직 오지 않았다.
- 미래의 사건이며, 종말이 되어야 관계가 결정된다.
- 하나님과 영원히 사랑의 관계를 맺는 사람과 영원히 관계가 끊어진 사람으로 말이다.
왜 이렇게 말하냐면, 이스라엘은 바벨론에게 멸망당했지만, 또 다시 회복되기 때문이다.
- 마치 사사기에서 12번이나 반복된 것처럼, 열왕기에서 셀 수 없이 반복된 것처럼 말이다.
- 그리고 그 반복은 지금도 반복되고 있다.
- 우리의 인생도 멸망과 회복이 반복될 것이다.
- 차이가 있다면, 반복을 통해 하나님과 더 멀어지는 사람과 더 가까워지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어쨌든 이스라엘은 멸망과 회복을 반복했으면서도, 또 하나님을 거부한다.
- 하나님 없으면 어떻게 되는지 수없이 반복해서 경험했지만, 그래도 탕자처럼 하나님 없이 살겠다고 하나님을 떠난다.
- 그래서 탕자가 모든 재산을 잃듯, 이스라엘도 모든 것을 잃을 위기에 있다. 나라까지도.
바로 이 시점에 하나님께서 분노를 표출하시는 것이다.
분노의 의미는 다양하다.
첫째로, 말 그대로, 심판 혹은 처벌이다.
- 너희 잘못했지? 그럼 그만큼 벌을 받아야 해.
- 죄의 삯은 사망이다.
- 그러니 너희는 멸망당해야 해.
- 그것이 우리 사이의 약속이야.
둘째로, 본문의 말씀처럼, 경고이다.
[렘 6:8] 예루살렘아, 이 고난을 경고로 받아들여라. ・・・・
- 너희 잘 알지? 나 떠나면 고생이라는 것. 이미 수없이 경험했잖아.
- 너희 계속 이러면, 저번처럼 절망 속에서 절규할 거야.
-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빨리 나에게 돌아와.
- 더 늦기 전에 경고하는 거야.
셋째로, 돌아오라는 애절한 사랑이다.
- 분노 이면에 있는 하나님의 감정은 사랑이다.
- 사랑하는 사람이 잘못된 선택을 할 때 느끼는 안타까움이 극대화된 상태이다.
- 그래서 하나님은 심판을 내리는 중에도 '남은 자'를 찾으신다.
- 한 명이라도 더 건지시려고 눈에 불을 켜고 찾으신다.
[렘 6:9] ・・・・ 그러니 예레미야야, 아직 시간이 있을 때에, 포도 따는 사람이 포도덩굴을 들추어보는 것처럼, 네가 구할 수 있는 사람들을 구해야 한다.
이래도 하나님의 분노를 욕할 수 있는가?
하나님께 잘못이 있다면, 물에 빠진 이스라엘을 구해준 것이다.
-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하시면서 '보따리'도 함께 건져 주셨다.
- 그래서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살 땅과 땅에서 경작할 때 필요한 이른 비와 늦은 비까지 필요한 모든 것을 준비해주셨다.
- 하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받은 모든 '보따리'를 가지고 또 다시 물가에서 놀다가 또 빠진다.
- 그래서 하나님은 또 건져 주신다.
- 게다가 이를 셀 수 없이 반복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참다 참다 못하여, 근엄하게 경고 조로 말씀하신다.
- 너 물가에서 위험하게 놀면 또 빠진다!
- 너 빠지면 '보따리' 다 잃어버린다!
이러한 하나님을 어떻게 욕할 수 있는가!
- 그럼 애초부터 이스라엘을 건져주지 말았어야 한다는 말인가.
- 그랬다면 하나님이 화낼 일도 없었을 텐데 말이다.
- 그랬다면 화냈다는 이유로 욕도 안 들으셨을 텐데 말이다.
- 하나님께 잘못이 있다면, 세상을 창조하시고, 이스라엘을 선택하셔서, 사랑하셨다는 것뿐이다.
하나님은 애초부터 사랑하지 말았어야 했다.
- 그러면 애초부터 사랑으로 존재하지 말았어야 했다.
- 그래서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서로 사랑하지 말았어야 했다.
- 그냥 성부 하나님의 독점 권력 안에서 성자, 성령 하나님은 굴복했어야 했다.
- 즉, 하나님의 존재 근원 자체가 문제였다.
- 하나님의 존재 근원이 사랑이 아니었다면, 창조하지도 않으셨을 것이고, 이스라엘을 죽음에서 건져주지도 않으셨을 것이며, 이스라엘의 거부에 마음 아파하지도 않으셨을 것이고, 이스라엘에 분노하지 않으셨을 것이며, 분노한다는 이유로 욕먹지도 않으셨을 텐데 말이다.
그러나 어떻게 이렇게 말할 수 있겠는가.
- 하나님의 본질은 사랑이고, 이스라엘은 죽음 속에서 절규하고 있는데,
- 어떻게 하나님은 태평하게 계실 수 있겠는가.
- 죽음 속에서 이스라엘을 건져내셔야 하며,
- 이스라엘이 아무리 죽음 속이 좋다고 계속 있겠다고 떼를 써도,
-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데리고 나와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물론 그렇다고 부모가 원하는 대로 자녀를 폭력적으로 다루면 안 된다.
- 자녀의 선택은 부모로부터 보호받아야 하고 존중받아야 한다.
-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누구보다 내가 잘 안다.
-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건 자녀가 고통스러워할 때, 부모는 자녀를 고통에서 건져내야 한다.
- 마치 탕자 아버지가 탕자를 건져주듯이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하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고작 경고와 분노였다.
- 하나님은 원하신다면 이스라엘을 굴복시키실 수 있다.
- 그런 능력을 가진 분이시다.
- 하지만 그 능력을 사용하지 않으셨다.
- 그것은 사랑이 아닌 폭력이기 때문이다.
대신 경고만 하신다.
- 이스라엘이 계속 잘못된 선택을 반복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려주시기만 한다.
- 대신 선택해주시지 않는다.
- 이스라엘의 선택을 하나님으로부터 보호하시고 존중하신다.
그와 함께 잘못된 선택을 하는 이스라엘을 향한 속상하고 아픈 마음을 표현한다.
- 그것이 분노이다.
- 분노는 표면적으로 하나님을 거부하고 떠나는 이스라엘을 향하지만,
- 본질적으로는, 떠나고 없는 이스라엘을 보고 싶어도 볼 수 없어 그리운 상황에 더 화가 나실 것이다.
- 너무 보고 싶은데 볼 수 없어서 화가 나는 것이다.
본문은 그런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반응을 세 가지로 보여준다.
첫째로, 말씀을 부정한다.
[렘 6:10] 제가 말하고 경고한들 누가 제 말을 듣겠습니까? 그들은 귀가 막혀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습니다. ・・・・
둘째로, 말하는 사람을 부정한다.
[렘 6:10] ・・・・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전하면 그들은 저를 비웃기만 합니다. 말씀 듣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셋째로, 말씀을 왜곡한다.
[렘 6:14] 백성이 상처를 입어 앓고 있을 때에, ‘괜찮다! 괜찮다!’ 하고 말하지만, 괜찮기는 어디가 괜찮으냐?
이를 통해 이스라엘은 자신을 합리화하고, 분노하시는 하나님을 부정한다.
결론 - 그렇다면 하나님의 분노에 대한 올바른 반응은?
우선 공감이어야 한다.
- 사랑하는 사람이 갑자기 화를 낸다면, 이상하게 생각하고 조롱하고 무시하기보다, 분명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경청해야 한다.
- '너 갑자기 왜 그래? 오늘 컨디션 안 좋아? 왜 괜히 성질이야?'라는 말은 상대방을 분노 조절 장애 정신병자로 취급하는 태도이다.
- 그러면 분노는 폭발하고 대화는 단절된다.
반면에 '나 때문에 많이 화가 났구나. 미안해. 얼마나 속상했는지 말해줄 수 있니?'라며 상대방의 분노를 인정하고, 들을 준비를 해야 한다.
- 그래야 분노는 가라앉고, 분노의 열정이 대화의 열정으로 옮겨진다.
- 그런 후 열정적인 대화를 통해 이해와 사랑이 깊어진다.
그런데 이렇게 공감을 하려면 두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 첫째로, 상대방은 정신병자처럼 아무렇게나 화내는 사람이 아니라는 확신이다.
- 둘째로, 나에게는 나도 알지 못하는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확신이다.
- 그래야 화내는 상대방 앞에서 경청하며 공감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둘 다 갖기 어렵다.
- 상대방이 화내는 데에는 분명히 합당한 이유가 있을 것이란 확신을 갖기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신뢰 관계가 있어야 한다.
- 오랜 시간 동안 다각도의 모습을 경험해야 하고, 피상적이지 않고 내밀한 관계를 맺어야 한다.
- 그렇기 때문에 상대방을 오랜 시간 동안 한결같이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어려운 것은 자신에게 문제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 이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래서 하나님의 분노를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다.
- 우리는 그만큼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고, 하나님을 존중하지도 않으며, 나에 대한 헛된 확신만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 그래서 분노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분노를 인정하고 경청하지 못하는 것이다.
- 오히려 분노하시는 하나님을 정신병자로 조롱하며,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가 계속되면, 본문처럼 우리는 멸망당할 것이다.
-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우리는 파괴될 것이다.
차분하고 냉정하게 우리의 10년 후를 상상해보자.
- 지금 우리의 현실이 10년 동안 계속된다고 생각해보자.
- 몸은 피로와 스트레스 때문에 상당히 망가져 있을 것이다.
- 마음은 지쳐서 피폐해져 있을 것이다.
- 돈은 지금보다 많을 수 있겠지만, 여전히 부족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바라시는 인생도 아니고, 내가 원하는 인생도 아니다.
- 하나님은 우리가 정말 재밌게 잘 살길 바라신다.
- 소중한 것을 소중히 여기며,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하며 살기를 바라신다.
- 우리도 그것을 바란다.
그래서 하나님은 분노를 토하시면서까지 새로운 인생을 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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