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예레미야서

예레미야(09) 5:1-19 심판의 정당성 - 이런 일을 내가 벌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미양교회 팟캐스트 양따양>

미양교회에서 했던 설교를 바탕으로 진솔하게 신앙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팟캐스트도 많이 들어주세요.

https://www.podbbang.com/channels/1790233/

 

어린양을 따르는 어린양

예배 대신 예수님, 설교 대신 성경, 건물 대신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미양교회가 만드는 방송입니다.토끼와 개구리가 진솔하게 신앙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어린양과 같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

www.podbbang.com

 

 

이것이 본문의 결론이다.

[롬 3:10~12]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의인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 (11) 깨닫는 사람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사람도 없다. (12) 모두가 곁길로 빠져서, 쓸모가 없게 되었다.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

- 로마서에서 바울이 한 말이지만, 예레미야도 같은 말을 한다.

- 신약 시대인 초대 교회 당시에도, 남유다가 남아 있는 예레미야 시대에도, 그리고 지금도 동일하게 의인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심판하셨다.

- 예루살렘에서 의인을 한 사람도 찾지 못하셨기 때문이다.

[렘 5:1]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아, 예루살렘의 모든 거리를 두루 돌아다니며, 둘러보고 찾아보아라. 예루살렘의 모든 광장을 샅샅이 뒤져 보아라. 너희가 그 곳에서, 바르게 일하고 진실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을 하나라도 찾는다면, 내가 이 도성을 용서하겠다."

죄의 삯이 사망이듯, 심판의 결과는 멸망이다.

-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이스라엘의 완전한 멸망을 예언하셨고,

- 그 예언대로 이스라엘은 남김없이 사라졌다.

- 이스라엘 민족 정체성의 핵심인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었고, 약속의 땅 가나안도 빼앗겼다.

- 즉, 멸망의 핵심은 정체성의 소멸이다.

 

그렇다면 왜 이스라엘은 멸망당할 수밖에 없었냐?

- 자신이 자기 자신을 내버렸다.

- 욕망을 선택하는 대신 목표를 포기했다.

- 돈, 명예, 안정, 인정 욕구를 채우기 위해 육체적, 정신적, 경제적, 정치적, 외교적 발전을 포기했다.

- 게다가 민족 정체성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렸다.

- 그러니 멸망은 자처한 것이며, 이스라엘의 숙명이다.

성경은 이러한 심판의 주체를 하나님으로 표현했다.

[렘 4:12] 백성에게 심판을 선언하시는 분은 바로 주님이시다.

- 이는 물론 맞지만, 반만 맞다.

- 다른 반쪽이 있다.

심판의 주체는 이스라엘 자신이다.

[렘 2:17] 주 너의 하나님이 길을 인도하여 주는데도, 네가 주를 버리고 떠났으니, 너 스스로 이런 재앙을 자청한 것이 아니냐?

[렘 4:18] 너의 모든 길과 행실이 너에게 이러한 재앙을 불러왔다. 바로 너의 죄악이 너에게 아픔을 주었고, 그 아픔이 너의 마음 속에까지 파고들었다.

- 이스라엘의 멸망 원인은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 있었다.

이렇게 이스라엘은 자멸했다.

 

현재 우리에게도 2500년 전과 똑같은 일이 일어난다.

돈, 명예, 안정, 인정 욕구를 인생의 목표로 삼고, 그것을 향해 내달린다.

- 그러면서 우리는 욕구를 선택하는 대가로 나 자신을 포기한다.

- 내가 무엇을 선택했고, 무엇을 포기했는지조차 알지 못한 채 말이다.

이러한 우리를 성경은 이렇게 표현한다.

[렘 5:8] 그들은 살지고 정욕이 왕성한 숫말과 같이 되어서, 각기 이웃의 아내를 탐내어 울부짖는다.

- 음행에 빗대어, 욕망에 매몰된 우리를 비판한다.

- 우리는 욕망에 장악되어, 아무런 의심 없이 욕망을 향해 돌진한다.

- 정작 그 욕망에 의해 나의 가정이, 이웃의 가정이 얼마나 파탄나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한채 말이다.

- 내가 지금 무엇을 향해 가는지도 모르며 달려가는데, 나로 인해 망가지는 주변 상황이 보일리 만무하다.

 

그것을 지난 교회 공동체 기도회에서 '먹기 위해 사는 인생'으로 표현했다.

- 인생이 욕망에 장악되어, 인생이기를 포기했다는 뜻이다.

- 이는 단지 식도락같이 먹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나 지나치게 탐욕적인 사람만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다.

- 돈, 명예, 안정, 인정 욕구를 채우기 위해 최선을 다해 성실하고, 정직하고, 바르고, 열심히 살고 있는 우리 모두를 지칭하는 말이다.

성경은 이스라엘을 외도와 매춘을 일삼는 파렴치한으로 묘사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 그들은 율법을 지키며 지도자로서의 규율을 엄격하게 지켰다.

외도와 매춘 비유의 핵심은 방향성이다.

-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성실하고, 정직하며, 바르고, 열심히 살았지만,

- 왜 그렇게 살았냐면,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 아무리 점잖고 격식 있고 고급스럽더라도, 외도와 매춘은 역겨운 것이다.

- 왜냐하면 욕망만을 위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 마찬가지로 아무리 성실하고 정직해도, 욕망을 위한 삶은 역겨운 것이다.

- 우리의 인생이 그런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좋은 평판을 받고, 어제와 같은 오늘을 살기 위해, 그리고 오늘과 같은 평생을 살기 위해 인생 전부를 갈아 넣고 있다.

- 인생의 의미를 알지도 못하고, 스스로에게 묻지도 않은채 말이다.

- 이렇게 인생의 목적은 생존으로 전락한다.

이는 결국 운전대 없는 자동차와 같다.

- 명확한 목표 없이 내달린다는 점에서 말이다.

이러한 자동차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 첫째로, 자동차는 결국 어딘가에 부딪혀서 완전히 박살 날 것이다.

- 왜냐하면 완전히 박살 나서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을 때까지 내달릴 테니까.

- 둘째로, 스스로 박살 나기 전까지 수많은 것을 박살 낼 것이다.

- 주변에 무엇이 있는지 전혀 살피지 않을 테니까.

 

따라서 '욕망에 장악되어 목표 없이' '먹기 위해 사는 인생'은 자신도 파괴하고 이웃도 파괴한다.

- 이러한 예를 내 안에서는 찾기 힘들다.

- 자기 객관화가 어렵기 때문이다.

- 그런데 주변에서는 찾기 쉽다.

- 특히 부모이다.

그분들의 인생은 '먹기 위해 사는 인생'의 전형이다.

- 자신이 먹기 위해 그리고 자식을 먹이기 위해 인생을 쏟아부었다.

- 하지만 그 대가로 자신의 인생과 자식의 인생을 파괴했다.

- 욕망만을 채우느라 목표 없이 짐승처럼 살았고, 

- 자식 역시 욕망의 화신으로 키웠다.

이렇게 물려받은 유산 때문에 우리도 여태껏 이렇게 사는 것이다.

- 30대까지 목표 없이 안정과 인정만을 위해 사는 것뿐만 아니라,

- 목표를 찾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 거세된 동물처럼 말이다.

- 그래서 간신히 노력하지 않으면, 내 인생이 파괴되었다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하도록 말이다.

- 그래서 인생을 재건하려는 일말의 노력조차 하지 못하도록 말이다.

 

참고로, 부모를 욕하려는 것이 아니다.

- 그분들의 인생이 그렇게 된 것도 그 윗 세대 때문이다.

- 그분들도 어찌할 수 없었다.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비극이 인류의 피할 수 없는 숙명이라는 것이다.

- 그렇기 때문에 웬만한 노력으로는 이 숙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

- 분명한 것은, 우리가 오늘과 같은 내일을 바라고 산다면, 반드시 우리 인생과 더불어 자녀의 인생까지 파괴할 것이라는 점이다.

- 내가 느끼는 인생의 공허함과 방황을 나 때문에 자녀까지 느끼게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알아야 한다.

- 욕망의 덫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말이다.

- 오늘 같은 내일을 바라는 것이, 그리고 좀 더 많은 사람에게 인정받고 칭찬 듣고자 하는 것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는지 말이다.

- 그것을 가졌던 부모 때문에 내 인생이 망가졌고, 그것을 가진 나 때문에 나와 내 자녀의 인생까지 파괴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것을 직시하고 인정할 때, 인생의 목표를 가질 수 있다.

- 그래야 나도 살고, 내 자녀도 살리고, 주변 사람들까지 살릴 수 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몰랐다.

심판받기 전에 몰랐던 것은 물론이고, 심판받은 이후에도 몰랐다.

- 자신들이 왜 멸망당했는지 몰랐다.

- 자신들이 얼마나 욕망에 빠져있는지, 그 욕망이 얼마나 무섭게 자신을 파괴했는지 몰랐다.

- 그러면서 못된 바벨론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하나님의 실수라며 원망했다.

- 하나님 심판의 정당성을 의심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 물었다.

- 왜 하나님께서 이라스엘의 멸망을 일으키셨냐고 말이다.

[렘 5:19] 예레미야야, 그들이 '무엇 때문에 주 우리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모든 일을 하셨는가?' 하고 너에게 물으면, ・・・・

하나님은 이렇게 대답하신다.

[렘 5:19] ・・・・ 너는 그들에게 말하여 주어라. '너희가 너희 땅에서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겼으니, 이제는 너희가 남의 나라 땅에서 다른 나라 사람을 섬겨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 너희 이스라엘이 자처한 것이라고 말이다.

 

게다가 이 대답을 하시는 논리가 흥미롭고, 정말 동의가 된다.

- 풀어 말하면, 너희가 너희 땅에 있을 때 너희의 신인 나를 섬겼어야 했다.

- 그러나 너희는 남의 나라의 다른 신들을 섬겼다.

그러니 내가 너희의 소원을 들어주마!

- 괜히 너희 땅에서 어렵게 남의 나라 신 섬기지 말고,

- 너희가 더 쉽게 남의 나라 신 섬길 수 있도록 남의 나라로 보내줄게!

- 너희들의 바람대로, 남의 나라에서 제대로 종처럼 섬기며 살게 해줄게!

- 그러면 비로소 너희의 선택이 너희를 얼마나 비극적으로 만들었는지 알게 될 것이다.

- 그리고 너희 땅에서 너희 신을 섬기는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똑같이 말씀하실 것이다.

- 안정과 인정이 아니라 사랑만이 너희에게 만족을 준다고 했는데,

- 너희는 여전히 안정과 인정만을 위해 살았다.

그러니 내가 너희 소원 들어주마!

- 내가 너희를 완전히 안정되게 해줄게.

- 그리고 내가 너희를 모든 이에게 인정받게 해줄게.

- 그러면 비로소 안정이 죽음과 같이 얼마나 지루한지 알게 될거야.

- 그리고 비로소 인정이 사람을 얼마나 눈치보고 치열하게 만드는지 알게 될거야.

- 그러면 비로소 인정과 안정이 얼마나 필요 없는지, 

- 그리고 불안정과 불인정 속에서라도 나답게 사는 것이 얼마나 귀한지 알게 될거야.

그런데 그래도 만약 모르자나?

- 그러면 너희는 결국 영원토록 안정적이고, 영원토록 인정받아야 하는 곳에 스스로 가게 될거야.

- 거기가 바로 지옥이야.

- 완전한 안정 속에서 너무나 차가움과, 완전한 인정 속에서 너무나 치열함을 반복해서 경험하게 될거야.

- 그래서 차가움과 치열함을 견디지 못하고 울부짖을거야.

- 그런데 그때는 돌이킬 수가 없어.

- 그러니 제발 그렇게 되기 전에 안정과 인정 포기해. 라고 말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돌이키지 않았다.

여전히 말하는 것과 사는 것이 달랐다.

[렘 5:2] 그들이 주님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고, 주님을 섬긴다고 말하지만, 말하는 것과 사는 것이 다르다.

왜 말하는 것과 사는 것이 달랐냐?

- 자기 자신조차 자신이 무엇을 말하는지, 어떻게 사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 그것을 본문은 이렇게 표현한다.

[렘 5:5] ・・・・ 그러나 그들도 한결같이 고삐 풀린 망아지들이다. 멍에를 부러뜨리고, 결박한 끈을 끊어 버린 자들이다.

왜 '고삐 풀린 망아지들'처럼 일정한 목표 없이 우왕좌왕하며 사냐?

- 욕망을 목표와 혼동하여, 욕망 성취만을 목표 삼았기 때문이다.

[렘 5:7~8] ・・・・ 내가 그들을 배불리 먹여 놓았더니, 그들은 창녀의 집으로 몰려가서, 모두가 음행을 하였다. (8) 그들은 살지고 정욕이 왕성한 숫말과 같이 되어서, 각기 이웃의 아내를 탐내어 울부짖는다.

- 그래서 외도와 매춘을 하듯, 욕망을 위해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하는 선택을 하기 때문이다.

- 욕망은 시도때도 없이 바뀌기 때문에, 욕망을 목표 삼은 인생은 우왕좌왕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결국 어떻게 되냐?

- 모든 것을 잃는다.

[렘 5:17] 네가 거둔 곡식과 너의 양식을 그들이 먹어 치우고, 너의 아들과 딸들도 그들이 죽이고, 너의 양 떼와 소 떼도 그들이 잡아먹고, 너의 포도와 무화과도 그들이 모두 먹어 치울 것이다. 네가 의지하고 있는 견고한 성들도 그들이 모두 칼로 무너뜨릴 것이다.

- 몇 가지를 상징적으로 제시하고 있지만, 결국 말하고자 하는 것은 모든 것이다.

- 소유, 사랑하는 가족을 비롯하여, 돈, 명예, 안정, 인정 그리고 정체성과 인간다움을 잃는다.

 

본문은 이러한 멸망의 주체를 네 가지로 표현한다.

첫째로, 하나님이다.

- 창조주시며 통치자시기에 당연하다.

둘째로, 예레미야이다.

[렘 5:14] 그들이 그런 말을 하였으니, 보아라, 내가 너의 입에 있는 나의 말을 불이 되게 하고, 이 백성은 장작이 되게 하겠다. 불이 장작을 모두 태울 것이다.

- 예레미야의 말이 불이 되어, 이스라엘을 전부 태워버리는 심판이 일어난다.

셋째로, 이스라엘 자신이다.

[렘 5:19] ・・・・ 너희가 너희 땅에서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겼으니, 이제는 너희가 남의 나라 땅에서 다른 나라 사람을 섬겨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 이스라엘의 자발적인 선택이다.

넷째로, 바벨론이다.

[렘 5:15] 이스라엘 백성아, 내가 먼 곳에서 한 민족을 데려다가, 너희를 치게 하겠다. 나 주의 말이다. 그 민족은 강하며, 옛적부터 내려온 민족이다. 그 민족의 언어를 네가 알지 못하며, 그들이 말을 하여도 너는 알아듣지 못한다.

- 이스라엘을 실제로 멸망시키는 주체는 바벨론이다.

 

그러면 왜 하필 바벨론이냐?

- 하나님, 예레미야, 이스라엘 자신이 심판의 주체가 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데,

- 갑자기 왜 바벨론이 심판자가 되는 것일까?

바벨론이 이스라엘에게 가장 강력한 의지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가장 강력한 의지 대상을 심판의 주체로 삼으신 것이다.

-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선택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 이스라엘은 결국 자신을 파괴할 대상에게 굽신거리며 조공했던 것이다.

그것을 지난 본문에서 '화장'에 비유했다.

[렘 4:30] 그런데 너 예루살렘아, 네가 망하였는데도, 네가 화려한 옷을 입고, 금패물로 몸단장을 하고, 눈화장을 짙게 하다니, 도대체 어찌된 셈이냐? 너의 화장이 모두 헛일이 될 것이다. 너의 연인들은 너를 경멸한다. 그들은 오직 너를 죽이려고만 한다.

- 이스라엘은 '화장'을 하듯 충실하게 섬겼던 나라에게 오히려 멸망을 당한다.

- 그러나 멸망당하는 과정에서도 또다시 '화장'하듯 강대국을 의지한다.

- 얼마나 어리석은가.

 

이 역시 우리 인생에서 분명히 일어날 것이다.

- 우리가 의지하는 돈, 명예, 안정, 인정 욕망이 반드시 우리를 배신하여 인생을 파괴할 것이다.

- 게다가 우리는 파괴되면서까지도 욕망을 의지할 것이다. 

예를 들어, 오랫 동안 외모 컴플렉스를 가졌던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 그런데 성형을 통해 외모가 출중해졌다.

- 그래서 자신감이 생기자, 연애를 해서 결혼도 하고, 사업까지 잘 된 것이다.

- 그러나 시간이 흘러 늙게 되자, 다시 외모 컴플렉스가 되살아난다.

- 왜냐하면 그동안 컴플렉스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수면 아래 가라앉아 있었던 것뿐이기 때문이다.

- 그래서 그동안 모은 재산으로 반복해서 전신 성형을 하지만, 세월의 흔적은 피해갈 수 없다.

- 그렇게 성형 중독자가 되니, 어느새 재산도 잃고, 사랑하는 사람들도 잃게 된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성형 수술을 하다가, 부작용으로 사망한다.

이 사람에게 정말 필요했던 것은 외모에 대한 욕망을 채워주는 것이 아니다.

- 세상과 자신을 외모로 평가하는 기준을 제거하는 것이다.

- 물론 욕망이 충족되면 일시적으로 해방감, 자유함, 자신감이 생긴다.

- 마치 치킨이 정말 먹고 싶었는데 몇 달동안 못 먹다가, 어렵게 치킨을 시켜서 첫 입을 베어 물 때 역시 해방감, 자유함,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 그러나 상황이 변하여 욕망을 충족할 수 없는 상황이 오면, 다시 욕망은 들끓는다.

- 즉, 욕망을 채울 때가 아니라 욕망의 근원이 제거될 때에만 진정한 자유을 얻을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돈, 명예, 안정, 인정 욕망을 향해 돌진하면,

- 일시적으로는 충족감, 자유함을 느낄 수 있다.

- 그토록 바랬던 돈이 생겼을 때의 짜릿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 하지만 반드시 욕망은 우리를 배신할 것이다.

- 그리고 다시 욕망의 노예로 전락할 것이다.

- 그래서 그 욕망이 우리 인생 전체를 파괴할 것이다.

- 우리가 욕망을 향해 내달리는 걸음을 멈추기 전까지 말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돈이 많은 이건희도 돈에 만족하지 못했다.

- 그 많은 돈으로 기껏 한다는 것이 여러 명의 여자와 매춘하는 것이다.

- 이것이 욕망의 위력이다.

 

절대로 남 일이 아니다.

우리도 이건희와 이미 똑같은 삶을 살고 있다.

- 지금은 돈이 부족해서 항상 쪼들리고 부자유한데, 재산이 조금만 더 불어나면 편안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 분명히 말하지만, 사람은 이건희만큼 재산이 불어날 때까지 절대 만족할 수 없다.

- 게다가 만약 우리에게 이건희만큼의 재산이 생긴다면, 이건희보다 더 더럽고 추하게 살 것이다.

- 왜냐하면 이건희는 그만큼 재산을 불릴만큼의 절제력이 있는 사람이다.

- 우리에게는 그조차도 없다.

우리가 매춘하지 않는 이유는 딱 하나이다.

- 마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돈이 없어서이다.

 

이스라엘도 그래서 멸망한 것이다.

- 욕망의 노예가 되어, 욕망에 의해 사로잡혀 죽은 것이다.

- 그 욕망이 바벨론을 통해 드러난 것뿐이다.

우리의 인생도 이스라엘과 결코 다르지 않을 것이다.

 

결론 - 이런 일을 내가 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본문은 이스라엘이 받은 심판의 정당성을 변론한다.

-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가혹한 심판을 내리신 것은 하나님이 매정하고 가혹하기 때문이 아니다.

- 이스라엘이 욕망에 사로잡혀 매정하고 가혹했기 때문이다.

- 하나님이 아니라 누구라도 이스라엘의 폭주를 막았어야만 했다.

그 심판이 이토록 가혹했던 것은 하나님께 분노 조절 장애가 있기 때문이 아니다.

-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스스로 욕망을 절제할 수 있도록 셀 수 없이 타이르셨다.

- 참고 참고 또 참으셨다.

- 그런데 타이름이 훈계가 되고, 또 명령이 되고, 책망이 되고, 경고가 되고, 위협이 되고, 협박이 되어, 결국 가혹한 심판에까지 이른 것이다.

- 셀 수 없는 단계를 거쳐서 이지경까지 이른 것이다.

- 이를 다르게 말하면, 이스라엘에게는 돌이킬 수 있는 셀 수 없는 기회가 있었는데, 그 모든 기회를 무시했기 때문에 이지경까지 이른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심판은 전적으로 이스라엘 탓이며, 그 심판을 집행하신 하나님은 전적으로 옳다.

 

이제 공은 우리에게 넘어온다.

우리도 이스라엘처럼 욕망에 사로잡혀 매정하고 가혹한가?

-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것이 정당한가?

- 우리에게도 하나님은 벌하지 않으실 수 있겠는가?

- 우리에게 임할 심판은 전적으로 우리 탓이며, 우리를 심판하실 하나님은 전적으로 옳은가?

 

우리 역시 이스라엘과 똑같다.

- 외도하고 매춘하듯, 욕망만을 위해 살고 있다.

- 돈, 명예, 안정, 인정 욕망을 위해 인생을 쏟아붓고 있다.

- 욕망을 위한 인생은 먹기 위한 삶일 뿐이고,

- 먹기 위한 삶은 욕망을 선택하는 대신 인생을 포기하는 삶이며,

- 그러한 인생은 인간이길 포기한 짐승과 같은 삶이고,

- 결국 후회와 원망에 휩쌓여 죽기를 거부하며, 살려고 발버둥치는 가장 비극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다.

이것이 가장 정확한 우리의 현실이다.

 

우리 삶의 겉모습이 외도하고 매춘하듯 타락했다는 뜻이 아니다.

- 우리는 점잖고, 세련되며, 성실하고, 규범적이며, 정직하고 바르다.

- 그런데 이는 이스라엘도 그랬다.

- 게다가 우리보다 훨씬 더 엄격했다.

문제는 방향성이다.

- 욕망이 인생의 목표가 되버린 것 그 자체이다.

- 이건희는 돈이 있어서 욕망을 현실화했고, 우리는 돈이 없어서 욕망을 현실화하려고 노력하는 차이만 있다.

결국 현실화 되었건 아니건, 그 욕망은 우리를 파괴할 것이다.

- 운전대 없는 자동차가 그렇듯, 나와 내 주변을 모두 파괴할 것이다.

- 우리 부모 세대가 자신과 자식을 파괴해서 우리가 고통스러워하는 것처럼, 우리도 자신과 자식을 파괴해서 아이들에게 고통을 물려줄 것이다.

- 우리 때문에 자녀들은 고뇌하고 방황할 것이며, 우리를 우리처럼 원망할 것이다.

 

이것이 인정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리시는 가혹한 심판의 정당성이 인정될 것이다.

- 그럴 때에만 저주의 심판을 기록한 성경의 권위가 인정될 것이며,

- 그럴 때에만 성경이 보여주는 하나님만을 참 하나님으로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 만약 나에게 내려질 심판의 정당성이 의심된다면, 결코 하나님을 참 하나님으로 인정할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