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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서

예레미야(08) 4:19-31 어리석은 자에게 내리는 심판에 대한 어리석은 반응 - 화장

<미양교회 팟캐스트 양따양>

미양교회에서 했던 설교를 바탕으로 진솔하게 신앙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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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양을 따르는 어린양

예배 대신 예수님, 설교 대신 성경, 건물 대신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미양교회가 만드는 방송입니다.토끼와 개구리가 진솔하게 신앙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어린양과 같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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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서 가장 어리석은 것은 무엇일까?

- 인생을 낭비하는 것이다.

인생을 낭비한다는 것은?

- 한번 지나가면 절대 다시 얻을 수 없는 시간 중 일부를 의미 없이 흘려보내는 것도 포함되지만,

- 궁극적으로는 인생의 목표를 잘못 잡는 것이다.

- 목표를 잘못 잡으면, 인생의 '일부'를 낭비하는 것이 아니라 '전부'를 낭비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인생의 목표를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인가?

- 물론 우리는 교회 공동체이니 하나님만이 인생의 목표이고 나머지는 전부 틀렸다고 말하고 싶지만, 

- 그런 답은 너무 뻔하고, 특별한 전제가 동의될 때만 설득력이 있으니 배제하고 말하겠다.

대중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것 중에, 인생의 목표를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은 '각 사람의 마음'이다.

- 내 인생의 목표는 순전히 나만의 것이다. 

- 다른 누구도 평가할 수 없다.

- 나에게 중요하고, 내가 원하며, 나의 마음에 의미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를 반대로 말하면, 잘못된 인생의 목표는 원하지 않는 것을 목표로 삼는 것이다.

- 만약 하나님을 믿지 않는데 부모의 강요로 신학교에 가서 목사가 되었다면, 그만큼 불행하고 어리석은 인생이 어디 있겠는가.

- 그 인생은 자신에게만 해악일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영향을 받는 모든 사람에게 해악이다.

잘못된 목표로 사는 것은 목표 없이 방황하는 인생보다 더 나쁘다.

- 목표가 없으면, 목표를 찾을 기회라도 있다.

- 그러나 목표를 잘못 삼으면, 잘못된 목표를 쫓느라 바른 목표를 고민할 여유조차 없다.

- 그래서 잘못된 인생을 살 가능성이 더 높다.

물론 사람은 인생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원하지 않는 일을 해야 할 때도 있다.

- 또한 인생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원했던 일을 미뤄야 할 때도 있다.

- 원하는 인생의 목표 가지고 사는 것은 원하는 일만 하고 원하지 않는 일은 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 그러나 중요한 것은 원하는 일을 하건 원하지 않는 일을 하건, 이 이유가 하나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야 한다.

- 그리고 그 목표의 핵심은 '나'이다.

 

그런데 꼭 인생에 목표가 있어야 하나?

목표가 없는 인생은 없는가?

- '카르페디엠'처럼 목표 없이 현재를 즐기는 인생도 의미 있는 것 아닌가?

 

결론부터 말하면, 목표 없는 인생은 없다.

- 목표 없이 사는 것 역시 인생의 목표이다.

- 흘러가는 대로 주어진 인생에 만족하며 특별한 바람 없이 살겠다는 것 역시 목표이다.

'카르페디엠'도 마찬가지이다.

-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의 예를 들면, 카르페디엠은 아무렇게나 멋대로 흥청망청 살라는 것이 아니다.

- 고착화되고 획일화된 목표를 강요하는 사회에 순응하지 말고 저항하라는 뜻이다.

- 주입된 목표를 이루느라 당장 눈앞에 있는 소중한 것을 잃지 말고, 

- 현재 눈앞에 있는 소중한 것을 충분히 즐기고 느끼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목표 없는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 무작정 그때마다 생각나는 대로 아무거나 하고 살면 될까?

-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싫은 사람 죽이고, 갖고 싶다고 빼앗고, 아무 곳에서나 똥 오줌 싸며 살라는 것은 아니다.

-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서는 선택을 해야 하고, 선택하기 위해서는 기준이 있어야 한다.

목표 없이 '카르페디엠' 하며 사는 인생의 기준은 무엇일까?

- 결국 '나' 하나만 남는다.

- '현재'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기준이 된다.

- 이것을 알아야 선택을 할 수 있고, 선택해야 행동을 할 수 있다.

- 그래야 목표 없이 현재를 즐길 수 있다.

그래서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도, '그리스인 조르바'에서도 '나'에 집중한다.

- 세상은 인생에 정답이 있는 것처럼 속이며, 그 정답을 주입하여 인생의 목표로 삼도록 강요한다.

- 하지만 인생의 정답은 없다.

- 한 사람의 인생을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은 없다.

- 단, '나'조차 원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며 살아가는 인생은, 아무리 의미 있어 보여도, 의미 없고 어리석다.

  - 적어도 내 인생은 '나'로 채워질 때 의미 있다.

 

그렇다면 바른 인생의 목표는 뭐냐?

- '나'가 정말로 바라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면 '나'가 바라는 것은 뭐냐?

- 만약 지금 치킨이 먹고 싶다면, 치킨이 인생의 목표가 될 수 있나?

- 지금 용변이 급하다면, 용변이 인생의 목표가 될 수 있나?

- 그렇지 않다.

따라서 여기서 구분되어야 할 것은 '목표'와 '욕망'이다.

- 여기서 욕망은 충동적이고 일시적이며,

- 그렇기 때문에 대체될 수 있고, 

- 또한 욕망이 성취된다고 해서, 그 외의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욕망을 예를 들어 보면,

- 결혼을 한 사람에게 애인이 생겼다.

- 그런데 만약 그 애인을 위해 이혼하고, 자녀 양육권을 포기하며, 재산 분할 후 위자료와 자녀 양육비를 지불하는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애인을 원한다면, 이를 단순히 욕망이라고 치부하기 어렵다.

- 안타깝지만, 새로운 사랑을 만난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애인이 좋아도, 데이트 비용 외에는 아무것도 포기할 마음이 없다면, 

- 그래서 결코 가정을 포기할 마음이 없다면, 이는 충동적인 욕망이다.

- 마치 매일 집에서 밥, 찌개, 나물 반찬 먹다가, 가끔 치킨, 피자, 햄버거 생각이 나는 것과 같다.

- 가끔 새로운 것 먹으면 그 순간에는 좋지만, 먹고 돌아서면 김치가 생각난다.

- 만약 평생 치킨을 줄 테니 밥을 포기하라고 하면, 절대로 싫다고 할 것이다.

이렇게 욕망은 애인을 만나는 동기는 부여하지만, 

- 자신이 누리고 있는 가정의 안정감을 포기할 동기는 부여하지 못한다.

욕망은 포기를 감수하지 않는다.

- 우리의 전부를 걸지 못하게 한다.

- 원하는 것이지만, 그 정도로 원하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욕망은 하나가 충족되면, 또 새로운 욕망이 생긴다.

- 그래서 욕망은 인생의 목표가 될 수 없다.

- 애써서 하나의 욕망을 충족하는 순간, 그래서 새로운 욕망이 생기는 순간, 이전 욕망을 충족하는 데 소모한 인생은 쓸모없어져 버리기 때문이다.

- 예를 들어, 100억을 목표로 열심히 살았던 사람이 100억을 얻는 순간 암 진단을 받았다면,

- 그래서 돈에 대한 욕망은 사라지고 건강에 대한 욕망이 생겼다면,

- 그는 돈 좇다가 건강 잃어버린 과거의 인생을 후회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욕망이 아닌 목표는 무엇이냐?

목표를 이루기만 한다면, 모든 것을 감수할 수 있는 것이다.

- 모든 것을 잃어도 얻고 싶은 것이다.

- 마치 새로운 애인과 결혼할 수 있다면, 사회적 지위, 가정의 안정감을 전부 포기할 수 있는 마음이다.

- 그 정도는 되어야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처럼, 그 정도는 되어야 인생의 목표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인생에서 목표'만' 이뤄야 하고, 욕망은 절대로 가지면 안 되냐?

- 그건 아니다.

- 하나님이 유일한 목표였던 바울도 식욕, 수면욕, 배설욕 등을 가졌다.

그러나 분명한 차이는, 욕망이 인생의 목표가 되지 않았다.

- 그래서 욕망 때문에 목표가 훼손되지 않을 때는 욕망을 채웠지만,

- 욕망에 의해 목표가 훼손될 때는 욕망을 포기했다.

- 그래서 바울은 때때로 먹지도 자지도 않고 사역에 매진했다.

바로 이것이 목표와 욕망을 구분하는 삶이다.

 

만약 그런 목표가 없다면, 인생은 결국 욕망에 휘둘린다.

- 그러면 아무리 목표(욕망)를 이뤘다 하더라고, 새로운 목표(욕망)가 생길 것이고,

- 새로운 목표(욕망)로 인해 이전 목표(욕망)로 살았던 인생은 후회되고 부정될 것이다.

- 그런 삶을 반복하면, 죽을 때 인생 헛살았다는 후회로 눈을 감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 이는 모든 인생 중에 가장 비극적인 인생이다.

- 왜냐하면 인생의 가장 끝자락에, 그래서 인생을 돌이킬 기회가 전혀 없을 때, 인생 전체가 스스로에게 부정당하는 고통 속에서 인생이 끝나기 때문이다.

이는 단지 내 머리 속 사고 실험이 아니라, 내가 듣고 본 바이다.

- 평생을 돈과 성공만을 위해 살았던 사람이 어느 정도 성과를 이룬 후, 건강도 잃고 주변 사람과 관계도 나빠지자,

- 지난 인생을 후회하며 절망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것이 바로 가장 어리석은 인생이다.

 

이런 관점에서 이스라엘은 어리석었다.

욕망을 목표로 삼았다.

[렘 2:23~24] 네가 스스로의 몸을 더럽히지 않았고, 바알 신들을 따라가지도 않았다고, 감히 말할 수 있느냐? 네가 골짜기에서 한 일을 생각해 보아라. 네가 무엇을 했는지 깨달아라. 너는 이리저리 날뛰는, 발이 빠른 암낙타와 같았다. (24) 너는 사막에 익숙한 야생 암나귀와 같았다. 암내만 나면 헐떡이는 그 짐승, 그 짐승이 발정하면 누가 그것을 가라앉힐 수 있겠느냐? 그런 암컷을 찾아 다니는 수컷은 어느 것이나 힘들이지 않고서도 발정기가 된 암컷을 만나게 된다.

- 성적으로 표현된 욕망은 우상 숭배로 드러났다.

그리고 우상 숭배를 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 첫째로, 국내에서는 농업의 발전이다.

- 해 신, 비 신, 땅 신을 상징하는 바알에게 풍년을 기원했다.

- 둘째로, 국외에서는 국제적 지위 발전이다.

- 강대국의 우상 숭배를 통해 강대국으로부터 인정받으려고 했다.

그렇다면 '발전'이 나쁜 것이냐?

- 농업이 발전해야 식량 수급이 안정되고, 국제적 지위가 발전해야 전쟁으로부터 안정될 수 있는데도 말이다.

- 그래야 나라가 발전하고 백성이 안정될 수 있는데 말이다.

 

따라서 '발전'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발전 욕망이 목표가 되는 것이 문제이다.

- 어리석은 목표를 이루느라 정말 중요한 것을 포기하는 것이 문제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가장 중요한 하나님을 포기했다.

[렘 4:22] "나의 백성은 참으로 어리석구나. 그들은 나를 알지 못한다. 그들은 모두 어리석은 자식들이요, 전혀 깨달을 줄 모르는 자식들이다. 악한 일을 하는 데에는 슬기로우면서도, 좋은 일을 할 줄 모른다."

- 하나님 아는 것을 포기했고, 하나님 아는 것에 어리석었다.

- 반면 발전 욕망을 이루는데 슬기로웠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그 발전만 이루면 나머지 모든 것을 잃어도 만족했냐?

- 이스라엘은 그 발전 때문에 하나님을 잃어도 괜찮았냐?

- 발전이 진정으로 이스라엘 원하는 것이었냐?

- 발전이 목표로 삼기 합당했냐?

그렇지 않다.

- 이스라엘의 존재 기원이 하나님이었고,

- 삶 전체가 하나님 예배로 이루어진다.

- 이스라엘의 정체성은 하나님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하나님을 포기했다.

- 왜냐하면 발전 욕망이 목표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민족 중에 어느 한 사람도 하나님 포기를 선택한 사람은 없었다.

- 단지 발전 욕망을 목표로 삼았을 뿐이다.

- 그런데 문제는 발전 욕망을 목표로 삼는 것이 하나님 포기에 직결되는 선택이라는 것을 몰랐을 뿐이다.

- 인생은 선택의 결과이고, 선택은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지만, 

- 이스라엘은 자신이 무엇을 선택했는지는 알았지만, 무엇을 포기했는지는 몰랐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자신이 포기했던 것이 결국 '자기 자신'이었음을 몰랐다.

- 왜냐하면 이스라엘에게 하나님 포기는 자신을 포기한 것과 같기 때문이다.

- 그래서 발전을 선택한 이스라엘은 처음에 발전하는 듯 보였지만, 결국 자신을 포기했기에 멸망을 자처한 것이다.

 

바로 이것이 목표와 욕망을 구분하지 못하고, 욕망을 목표 삼은 인생이 처한 현실이다.

-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멸망이라는 심판을 받은 것이다.

- 엄밀하게 말하면, 하나님이 심판하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처한 것이다.

[렘 4:23~26] 땅을 바라보니, 온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다. 하늘에도 빛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24) 산들을 바라보니, 모든 산이 진동하고, 모든 언덕이 요동한다. (25) 아무리 둘러보아도 사람 하나 없으며, 하늘을 나는 새도 모두 날아가고 없다. (26) 둘러보니, 옥토마다 황무지가 되고, 이 땅의 모든 성읍이 주님 앞에서, 주님의 진노 앞에서, 허물어졌다.

- 자신을 잃었기에, 이스라엘은 모든 것을 잃었다.

어리석은 목표를 가진 사람도 결국 이렇게 멸망한다.

 

그런데 본문은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간다.

29-31절은 어리석음으로 인해 심판받는 이스라엘이 나타내는 반응을 보여준다.

- 한마디로, 반응조차 어리석다.

 

그들은 망하는 마지막 순간에 화장한다.

[렘 4:30] 그런데 너 예루살렘아, 네가 망하였는데도, 네가 화려한 옷을 입고, 금패물로 몸단장을 하고, 눈화장을 짙게 하다니, 도대체 어찌된 셈이냐? 너의 화장이 모두 헛일이 될 것이다. 너의 연인들은 너를 경멸한다. 그들은 오직 너를 죽이려고만 한다.

도대체 왜 이러는 것이냐?

- 적군이 쳐들어오면, 끝까지 싸우다 죽던지, 죽기 싫으면 항복해야 하는데 말이다.

- 그래서 예레미야는 어짜피 바벨론과 싸워서 이길 수 없으니, 항복하라고 말했다.

-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들이고, 이후에 있을 회복을 소망하자는 의미로 말이다.

여기서 화장이 상징하는 것은 '도박사의 오류'과 같다.

- 도박으로 전 재산을 잃었으면, 도박장을 떠나 새로운 살 길을 찾아야 하는 것이 마땅한데,

- 잃은 돈이 아쉬운 도박사는 어리석게도 또 다시 빚을 내어 도박을 한다.

이스라엘 역시 강대국 의지하다가 문제가 생겼다.

- 이스라엘은 화장을 하고 이성을 유혹하듯, 강대국을 의지했다.

- 그런데 그 강대국 때문에 멸망 위기가 왔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또 다시 화장을 한다.

- 그래서 또 다른 강대국에 의지하는 어리석음을 보여준다.

- 죽도록 싸우거나 항복하는 등 새로운 방법을 찾지 않는다.

- 어리석은 도박사와 같이 잘못된 선택 때문에 생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또 다시 잘못된 선택을 반복한다.

이것이 바로 어리석은 자에게 내리는 심판에 대한 어리석은 반응이다.

 

왜 이런 일이 생길까?

목표와 욕망을 구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과 일시적인 충동을 구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 마치 치킨 먹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는 것처럼 말이다.

- 그래서 치킨을 한 끼 배불리 먹었더니 금세 물린다.

- 그러면 다시 밥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새로운 치킨집을 또 찾고 있는 형국이다.

- 치킨으로는 절대 해결이 될 수 없는데도 말이다.

그래서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훼손됨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욕망만 추구한다.

- 하나님이 떠나고 나라가 멸망하는 중에도 이스라엘은 여전히 강대국을 의지하는 것처럼 말이다.

- 하나님이 떠나고 나라가 멸망하는 이유가 바로 강대국을 의지했기 때문인데도 말이다.

 

그러면 왜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이 훼손되는 것을 보고만 있을까?

- 문제의 핵심은 눈앞에서 훼손되고 있는 것이 내가 진정 원하는 것임을 모르기 때문이다.

- 나라가 멸망하기 직전까지 친-바벨론파와 친-이집트파가 서로 갈등하며 이권 다툼을 하고 있었던 이스라엘처럼 말이다.

- 이들은 권력을 얻는 것에만 집중한 나머지, 나라 자체가 멸망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 나라가 멸망하면 권력은 아무 소용 없는 것인데도 말이다.

-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조선도, 로마로 결국 이렇게 망했다.

왜 몰랐을까?

- 욕망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 욕망을 선택하는 대가로 자기 자신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 그래서 자기 자신이 훼손되는 것을 보면서도, 욕망만을 향해 돌진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이렇게 되었다.

[렘 4:31] 나는 해산하는 여인의 진통 소리를 이미 들었다. 첫 아이를 낳는 여인처럼 신음하는 소리, 딸 시온이 몸부림 치는 소리다. 딸 시온이 손을 휘저으며 신음하는 소리다. '이제 나는 망하였구나. 그들이 나를 죽이려고 달려든다' 하는구나.

- 멸망의 고통이 너무 커서, 마치 첫 아이를 낳는 여인처럼 괴로움에 울부짖는다.

그러나 누구를 탓할 수 있겠는가.

- 자처한 일인걸.

 

결론 - '나'가 누구인지 고민하자.

말했다시피, 문제의 핵심은 인생의 목표로 삼을 만큼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다.

- 그렇기 때문에 욕망에 휘둘리는 것이고,

- 그렇기 때문에 눈앞에서 가장 원했던 것이 훼손됨에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다.

- 그래서 자신이 고통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조차 모르는 것이다.

정말 비극적인 인생이다.

 

따라서 문제 해결 방법은 '나'에 있다.

-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 그래야 내가 원하는 인생을 살 수 있고,

- 그래야 욕망에 휘둘려 자기 자신까지 포기해버리는 실수를 하지 않을 수 있으며,

- 결국 모든 기회를 잃은 뒤에, 후회에 사무쳐서 죽기 싫어 발버둥 치며 죽는 비극에서 벗어날 수 있다.

 

사람이 쉽게 목표로 삼는 것은 돈, 명예, 안정, 인정이다.

- 이것을 얻는 것을 소위 성공이라 부른다.

그런데 스스로에게 되물어보자.

- 나는 이것을 정말로 원하는가?

- 반대로 말해서, 모든 것을 잃어도 이것만 있으면 되나?

-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도, 부자가 되어, 유명해지고, 안정 속에서, 사람들의 인정 받으면 충분한가?

돈, 명예, 안정, 인정은 욕망일 뿐이다.

-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괜찮다.

- 치킨 같은 것이다.

그것을 목표로 삼으면, 반드시 후회한다.

- 어리석은 것이다.

 

인생에 정답을 규정하긴 어렵다.

- 하지만 오답은 분명하다.

인생을 어떻게 살지 규정하긴 어렵다.

- 하지만 절대로 이렇게 살면 안 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는 제발 이렇게 살지 말자.

- 대신 어떻게 살지 고민하자.

- '나'가 누구인지 고민하자.

-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다.

- 신뢰하는 사람에게 묻고, 하나님께 묻자.

그래야지만 죽기 싫어서 눈 부릅뜨며 죽지 않을 수 있다.

- 편안하게 눈 감으며 죽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