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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서

예레미야(07) 4:5-18 이제 우리는 망하였다. - 하나님 심판의 정당성과 본질

<미양교회 팟캐스트 양따양>

미양교회에서 했던 설교를 바탕으로 진솔하게 신앙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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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의 예레미야서를 짧게 정리하면,

- 1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부르시고,

- 2장에서는 예레미야를 통해 이스라엘의 죄를 지적하신 후(정죄),

- 3장에서는 이스라엘에게 돌아오라고 회개를 요청하셨다(회개).

- 그리고나서 4장에서는 돌아오지 않는 이스라엘을 향해 심판을 선포하신다(심판).

- 이러한 심판 선포는 6장까지 이어진다.

예레미야서가 정죄, 회개, 심판으로 시작하는 것은 참으로 적절하다.

- 왜냐하면 이 셋은 하나님을 떠난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말씀이며,

- 서로 떼어 놓을 수 없는 완전한 하나이기 때문이다.

- 이 세 가지를 정확하게 이해할 때, 자신이 하나님을 떠나 얼마나 심각한 죄를 지었는지, 

- 그래서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지, 

- 그러나 돌아가지 않으면 얼마나 가혹한 심판에 처할 수밖에 없는지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 그럴 때만 자발적, 능동적, 주체적으로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다.

 

그런데 이 세 가지의 참 의미를 깨닫는 것을 방해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있다.

- 그것은 이 셋을 완전히 연결된 하나로 이해하지 못하고, 파편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 정죄를 이해 못 하면, 나름 선량하게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데 심판으로 협박하면서 어디로 돌아오라는 거야? 라고 하고,

- 회개를 이해 못 하면, 모든 것이 죄이고 그래서 심판받아야 한다는 것은 알겠는데, 도대체 하나님은 사람을 왜 이렇게 만든 거야? 라고 하며,

- 심판을 이해 못 하면, 죄인이라서 회개해야 한다는 것은 알겠는데, 꼭 이렇게 가혹하게 심판해야 해? 하나님 너무하신 것 아냐? 라고 한다.

다르게 말해서, 

- 죄를 모르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가야 할 이유를 이해할 수 없다.

- 회개를 모르면, 죄를 짓는 자신을 자책하거나, 죄 짓도록 만든 하나님을 원망한다.

- 심판을 모르면, 머리로는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위기감, 절박함을 느낄 수 없어서 안주한다.

이렇게 이 셋 중에 하나라도 이해하지 못하면 하나님께 돌아갈 수 없다.

 

그렇다면 정죄, 회개, 심판은 어떻게 연결되냐?

- 죄를 정확하게 이해할 때, 죄로부터 돌이키는 회개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고,

- 회개를 바르게 이해할 때, 회개하지 않을 때 주어지는 심판이 얼마나 타당한지 알 수 있으며,

- 심판을 바르게 이해할 때, 비로소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는 동력을 얻을 수  있다.

그래서 본문은 심판을 잔인하고 가혹하게 선포하는 것이다.

- 이는 하나님이 얼마나 잔인하고 가혹한 분이신지 드러내려는 것이 아니다.

- 오히려 그만큼 이스라엘의 죄가 잔인하고 가혹하다는 것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 하나님의 심판이 정당하다는 전제에서 말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잔인하고 가혹한 죄를 범하여, 그에 합당한 심판을 받아야 마땅하지만,

- 그런데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돌아와 회개하면 용서하고 다시 사랑할 것을 약속하신다.

즉, 심판 선포는 말 그대로 심판을 전부 받으라는 것이 아니다.

- 오히려 심판받지 말라는 것이다.

- 심판만큼 잔인하고 가혹한 이스라엘의 죄를 인정하고, 돌이켜 회개하라는 것이다.

- 그래야 심판받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 따라서 심판 선포는 정죄와 회개 요청의 또 다른 표현이다.

이것을 알아야 본문의 심판 선포를 통해 하나님의 애절한 사랑을 느낄 수 있다.

 

이는 세상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심판'과는 전혀 다른 의미이다.

- 그래서 성경에서 심판 선포 메시지를 읽으면 헷갈린다.

일반적으로 심판은 죄를 처벌하기 위한 수단이다.

- 심판을 받으면, 더 이상 죄를 묻지 않는다.

- 그래서 죄의 정도만큼 심판의 정도가 결정된다.

그런데 만약 성경의 심판이 처벌 수단이었다면,

- 이스라엘은 단순히 나라만 잃는 것이 아니라, 영생을 잃어야만 한다.

-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고 도망쳤으니, 영원히 생명을 잃고 지옥에 떨어져야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지 않으셨다.

- 잠시동안 나라를 잃게 하셨을 뿐이다.

-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오히려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셨다.

- 바벨론 포로 시기를 통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셨고, 그를 통해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셨다.

따라서 성경의 심판은 처벌 수단이 아니다.

- 오히려 사랑 표현 수단이다.

- 현재 이스라엘에게 심각한 문제가 있고(정죄), 

- 그 문제를 그냥 놔두면 심각한 불상사가 일어날 것이니(심판 선포), 

- 빨리 하나님께 돌아와 문제를 고치고 심판으로부터 벗어나라는 것이다(회개).

- 이스라엘이 가진 문제로 하나님은 마음에 큰 상처를 받으셨지만, 그런데도 돌아온다면 과거의 잘못을 전혀 묻지 않고, 과거처럼 열렬히 사랑하고 싶다는 애절한 사랑 고백이 심판 선포를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메시지이다.

 

쉬운 예를 들어, 이러한 심판 선포는 육아에도 빈번하다.

- 마스크를 안 쓰면, 코로나에 걸려서 어떻게 되는지,

- 양치를 안 하면, 이가 썩어서 얼마나 아프게 되는지,

- 손을 안 씻으면, 세균이 입에 들어가 어떤 병에 걸리는지,

- 밥을 안 먹고 잠을 안 자면, 건강에 얼마나 안 좋은지,

- 설명하고 설명하고 지겹도록 설명한다. 

- 어떨 때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어조로, 어떨 때는 차갑고 차분한 어조로, 또 어떨 때는 단호하고 위협적인 어조로 한다.

- 상황에 따라 다른 어조가 필요하다.

그렇게 설명하는 이유가 코로나 걸려서 죽고, 이가 썩어서 뽑고, 세균이 들어가서 아프라는 말인가?

- 그런 나쁜 일을 통해 자녀를 처벌하려는 것인가?

절대 아니다.

- 절대로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해서이다.

- 마스크를 쓰지 않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알려주려는 것이다(정죄).

- 마스크를 쓰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려주는 것이다(심판).

- 그래서 마스크를 쓰도록 하려는 것이다(회개).

- 그만큼 아끼고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성경에서 심판을 선포하는 이유이다.

- 그렇기 때문에 가혹한 심판이 선포되는 본문 한가운데 회개를 요청하는 하나님의 애절한 부르짖음이 나오는 것이다.

[렘 4:14] 예루살렘아, 네가 구원을 받으려면, 너의 마음에서 악을 씻어 버려라. 네가 언제까지 흉악한 생각을 너의 속에 품고 있을 작정이냐?

 

그러한 심판을 본문은 두 가지로 나눠서 설명한다.

① 5-10절: 심판의 임박함 

- 이미 적들이 가까이 와서 대피 신호가 필요한 상황이다.

[렘 4:5] 너희는 유다에 알리고, 예루살렘에 선포하여라. 너희는 이 땅 방방곡곡에 나팔을 불어서 알리고, 큰소리로 외쳐서 알려라. '어서 모여서, 견고한 성으로 들어가자!' 하여라.

- 그 긴박한 파멸이 북쪽에서 온다.

[렘 4:6] 시온으로 가는 길에 깃발을 세우며, 지체하지 말고 대피하여라. 내가 북쪽에서 재앙을 몰아와서, 크나큰 파멸을 끌어들이겠다.

- 모든 성읍을 폐허로 만들 적이 이미 출발했다.

[렘 4:7] 사자가 일어나서 숲 속에서 뛰쳐 나오듯이, 세계 만민을 멸망시키는 자가 길을 나섰다. 그가 너의 땅을 황무지로 만들려고 제자리를 떴다. 이제 곧 너의 모든 성읍이 폐허가 되어, 주민이 없을 것이다.

- 적의 칼이 목에 닿을 만큼 임박했다.

[렘 4:10] 그 때에 내가 이렇게 아뢰었다. "아, 주 나의 하나님, 진실로 주님께서 이 백성과 예루살렘을 완전하게 속이셨습니다. '예루살렘은 안전하다' 하셨으나, 이제는 칼이 목에 닿았습니다."

② 11-18절: 심판의 강력함

- 팔레스틴에서 악명높은 '시로코'라는 바람에 빗대어 적의 강력함을 표현한다.

- '시로코'는 동쪽 사막에서 불어오는 바람으로, 세고, 뜨겁고, 많은 모래를 몰고 와서, 아무것도 볼 수 없게 하고, 굉음을 내며, 땅을 말려버려서 농작물을 죽게 한다.

[렘 4:11~12] 그 때가 오면, 이 백성과 예루살렘이 이런 말을 들을 것이다. "소용돌이치는 열풍이 사막에서 불어온다! 나의 딸 나의 백성이 사는 곳으로 불어온다. 이 바람은 곡식을 키질하라고 부는 바람도 아니고, 알곡을 가려내라고 부는 바람도 아니다. (12) 그것보다 훨씬 더 거센 바람이 나 주의 명을 따라 불어 닥칠 것이다." 백성에게 심판을 선언하시는 분은 바로 주님이시다.

- 적이 먹구름, 회오리바람, 독수리처럼 강력하게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러 온다.

[렘 4:13] "적군이 먹구름이 몰려오듯 몰려오고, 그 병거들은 회오리바람처럼 밀려오며, 그 군마들은 독수리보다도 더 빨리 달려온다." "이제 우리는 화를 당하게 되었다. 우리는 망하였다."

정리하면,

- 북쪽에서 오는 멸망이 임박했으며, 

- 그 멸망은 소용돌이치는 열풍, 먹구름, 회오리바람, 독수리처럼 강력하다.

- 집행하지 않은 사형 제도처럼 아무리 강력해도 임박하지 않은 심판은 위협적이지 않다.

- 벌금형처럼 임박해도 강하지 않은 심판은 효과가 작다.

-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임박했으며 강력하다.

- 따라서 신속하게 그리고 강력하게 죄로부터 돌이키도록 한다.

 

여러 가지 표현을 통해 짐작할 수 있는 심판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북쪽에서 온다.

[렘 4:6] 내가 북쪽에서 재앙을 몰아와서, 크나큰 파멸을 끌어들이겠다.

- 바벨론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② 예루살렘이 멸망한다.

[렘 4:16] 이 소식을 여러 나라에 알리고, 예루살렘에 전하여라. 적군이 먼 땅에서 몰려와서 에워싸고, 유다의 성읍들 쪽으로 전쟁의 함성을 지른다. 

-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민족의 육체적, 정신적, 경제적, 종교적 지지 기반을 상징하는 것이기에, 그 모든 것이 무너진다는 표현이다.

따라서 바벨론에 의한 이스라엘의 멸망이 '곧' 그리고 '강력하게' 일어날 것을 다양한 비유로 선포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왜 이런 심판을 받아야 하는가?

- 과연 이스라엘에게 이러한 심판은 정당한가?

여러 번 말했듯이, 이스라엘의 경제는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 지도자가 무능했고 부도덕했다.

- 나라의 부가 분배되어 나라 전체 경제를 발전시켜야 했지만,

- 나라의 부를 독점하여 나라 전체 경제를 후퇴시켰다.

왜 부를 독점했냐?

- 값비싼 포도주로 흥청망청 즐기기 위해서이다.

- 그래서 지도자들은 즐기느라 육체적, 정신적으로 망가졌고,

- 백성들은 지도자들에 의해 재산과 노동력을 수탈당해서 육체적, 정신적으로 망가졌다.

그런데도 지도자는 사치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강대국의 도움을 요청한다.

- 이를 통해 도움도 받지만, 우상도 함께 들어온다.

- 강대국의 도움을 받기 위해 지도자는 하나님과 함께 우상을 섬겼다.

- 이로 인해 종교적으로도 타락한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에게 예루살렘 성 함락이라는 심판이 일어난 것은,

-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의 육체적, 정신적, 경제적, 종교적 기반이 붕괴한 것은,

- 어느 날 하나님께서 불벼락을 내리시듯 갑자기 일어난 일이 아니라,

- 이스라엘이 잘못된 선택을 반복해서 자초한 육체적, 정신적, 경제적, 종교적 타락 때문이다.

 

따라서 정리하면, 이스라엘이 멸망한 것은 바벨론이 침략했기 때문인가? 아니면 내부적으로 이미 멸망한 이스라엘에 바벨론이 숟가락만 얹은 것인가?

- 물론 이스라엘 당시 사람들은 멀쩡히 잘살고 있는 자신들을 바벨론이 괴롭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 바벨론이 침략하지 않았다면, 이스라엘은 아무 문제 없이 잘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인 자신들이 멸망당한다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 멸망의 원인을 짐승보다 못한 이방인 바벨론 때문이며, 잘못 판단하신 하나님 때문이라고 원망했을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 이스라엘은 이미 멸망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 자생 능력을 잃었다.

- 이미 육체적, 정신적, 경제적, 종교적 지지 기반을 잃었다.

- 그때 바벨론이 그것을 드러내 보여준 것뿐이다.

그래서 본문은 이스라엘의 멸망 원인이 이스라엘 자신에게 있다고 명확하게 밝히는 것이다.

[렘 4:18] 너의 모든 길과 행실이 너에게 이러한 재앙을 불러왔다. 바로 너의 죄악이 너에게 아픔을 주었고, 그 아픔이 너의 마음 속에까지 파고들었다.

- 이스라엘에 재앙을 일으킨 주체는 악한 행실을 한 이스라엘 자신이다.

- 그 죄악으로 인해 마음 속 깊이 파고드는 아픔을 당한 것이다.

- 이스라엘의 멸망이 바벨론 침략 때문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부패 때문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는 방법이다.

하나님은 굳이 당할 필요 없는 고통을 강압적으로 부과하지 않으신다.

- 심판은 자신이 자초하는 것이다.

- 자신의 선택 결과이다.

- 하나님은 아무 개입도 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하나님은 심판받지 않도록 간청하신다.

- 멸망으로 가는 선택을 하지 말라고 애원하신다.

- 단지 같은 선택을 계속했을 때 일어나는 멸망을 경고하실 뿐이다.

- 경고는 협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켜주기 위해서이다.

- 그 간청, 애원, 경고가 성경에서 말하는 심판이다.

 

이러한 원리는 종말에 있을 심판에도 동일하게 나타날 것이다.

- 종말 심판은 하나님께서 독단적으로 사람의 마음과 행실을 판정하신 후, 그에 알맞게 영원한 생명이나 영원한 죽음으로 보내시는 것이 아니다.

- 아마도 하나님은 심판장에서조차 누구도 영원한 죽음으로 가지 못하도록 막아서실 것이다.

-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우리를 붙잡으시려고 애절하게 손을 뻗으실 것이다.

- 그런데도 그 손을 뿌리치고 죽음으로 달려가는 우리를 보시며 절규하실 것이다.

- 마치 하나님께서 수많은 예언자를 통해 이스라엘의 멸망을 애절하게 경고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멸망의 선택을 반복하는 이스라엘처럼 말이다.

사람이 종말 심판장에서 죽음의 길로 가는 것은 누구의 강압도 아닌 스스로의 선택일 것이다.

-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으며 영원토록 사는 것보다, 죽더라도 거래 관계를 이용하여 더 많은 이익을 독점할 기회를 원하기 때문이다.

- 오히려 그들은 사랑이라는 명목으로 자신의 유익을 빼앗는 것처럼 보이는 하나님을 피해 도망칠 것이다.

- 적어도 죽음의 세계에서는 경쟁을 통해 다른 사람을 짓밟으면 자력으로 살아남을 수 있다는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이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을 돌이키시려고 애쓰셨지만, 그 바리새인은 오히려 예수님을 죽인 것과 같다.

- 우리도 하나님이 부르시는 사랑의 세계(생명의 세계)보다 자유롭게 이익을 독점할 수 있는 거래의 세계(죽음의 세계)를 더 좋아한다.

- 그래서 신앙에 헌신하기보다 세상에서 경쟁하며 사는 것을 더 원한다.

- 결국 그 길의 끝에는 영원한 죽음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우리는 이러한 선택으로 인해 가혹한 경쟁의 세계로 점점 더 깊이 들어가게 될 것이다.

- 물론 경쟁으로 인해 괴로워하고, 사랑을 막연히 갈구할 것이다.

- 하지만 거래와 경쟁이 주는 만족이 훨씬 즉각적이고 강렬하기 때문에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 게다가 군중 심리에 의한 안정감도 무시할 수 없다.

- 모두가 경쟁하고 있는데, 나만 사랑 타령하고 있으면 불안하기 때문이다.

- 나만 도태되고 있다는 불안감은 없던 열정도 타오르게 한다.

게다가 거래와 경쟁에 몰입하게 만드는 또 다른 이유는,

- 그 폐해가 즉시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 이스라엘 지도자가 술 건하게 마시고 상아 침대 하나 들여놨다고, 나라의 자생력이 갑자기 낮아지고, 바로 그때 바벨론이 처들어와서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것이 아니다.

- 수많은 잘못된 선택이 누적되어야 한다.

- 누적된 결과가 어느 순간 갑자기 밀려온다.

- 물론 그전에도 경고의 메시지는 반복해서 울린다.

- 하지만 경쟁에 매몰되면 들리지 않는다.

- 더 이상 거래와 경쟁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야만, 그래서 스스로 회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사라진 상태가 돼서야만, 그제서야 지금 자신의 상태가 얼마나 참혹한지 보인다.

- 이스라엘이 멸망을 당해서 바벨론에 끌려가서야 비로소 예언자 예레미야의 외침의 참 뜻을 깨달았던 것처럼 말이다.

본문은 그러한 우리의 상태를 이스라엘의 멸망을 통해 경고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내리신 심판은 정당하다.

- 스스로 자초한 것이기 때문이다.

- 선택에 의한 결과이며, 수많은 경고를 무시한 대가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 심판을 멈추시기 위해 애쓰셨다.

- 그것이 예레미야를 통해 심판을 선포한 이유이다.

- 진짜 심판이 일어나서 돌이킬 수 없게 되기 전에, 계속해서 심판을 경고하셨다.

- 심판을 내리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심판을 거두시기 위해서 말이다.

이것이 심판의 본질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심판은 내려졌다.

- 하나님의 심판 경고는 결국 실제가 되었다.

- 이스라엘은 북쪽에서 온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했다.

왜?

- 잘못된 선택을 수백 년 동안 반복했기 때문에.

- 잘못된 선택에 의한 문제가 수백 년 동안 누적되었기 때문에.

- 게다가 수백 년 동안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했기 때문에.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자신에게 내려진 심판을 이해하지 못했다.

- 심판이 정당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 이런 심판을 내리신 하나님이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심판받는 이의 전형적인 태도이다.

- 죄로 인한 심판을 받아도, 결코 죄를 인정하지 않는다.

- 죄를 인정하고 돌이킬 기회를 수도 없이 걷어 차버렸기에 이 지경에 이른 것이다.

- 만약 죄를 인정할 사람이었다면, 이 지경에 이르지도 않았을 것이고,

- 심판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할지라도, 죄를 인정하고 돌이켜서 회복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결론 -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하며 살고 있는가?

- 우리는 거래와 경쟁보다 사랑과 연합을 더 원한다고 말한다.

- 하지만 현실에서 우리는 반복해서 거래와 경쟁을 선택하고, 사랑과 연합을 포기한다.

- 좀 더 많은 것을 소유하려 하고, 적어도 지금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 치열하게 싸운다.

- 경쟁에서 상위로 올라서기 위해 피 흘리며 싸우고, 올라가진 않아도 적어도 내려가지 않고 현상 유지라도 하기 위해 발버둥 친다.

- 정말 내가 그런지 고민해보자.

 

왜 그럴까?

- 대부분은, '다들 그러니까.'라고 답할 것이다.

- 딱히 자신이 왜 그러는지 알지 못한다.

- 배운 것이 그것밖에 없어서 그런다.

그러면 다들 왜 그럴까?

- 잘 살고 싶고, 편하게 살고 싶고, 하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하며 살고 싶기 때문이다.

- 이것은 사람의 본능이기에, 어쩔 수 없는 것이며 나쁜 것이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면 이것이 정말 사람의 본능일까?

- 이것만 채워지면 사람은 만족할까?

- 혹은 이것이 채워지지 않으면 사람은 절대로 만족할 수 없을까?

같은 질문을 부정적으로 하면,

- 돼지처럼 마음껏 진흙탕에 뒹굴면서 사료만 충분히 받으면 사람은 행복해지는가?

- 혹은 배고프고, 불편하며, 제약된 삶 속에서도 만족하며 살 수 없을까?

만약 편하고 자유롭게 잘 사는 것이 사람의 본능이라면, 돼지와 다를 바 없다.

- 그런 사람은 사람이 아니다.

- 그래서 거래와 경쟁을 통해 더 나아지려는 사고 방식은 이렇게 사람을 돼지로 만든다.

- 그것이 사람의 본능이라는 말로 합리화하지만,

- 그 말은 자신이 돼지와 같다는 것을 자백하는 꼴이다.

사람이라면, 사람'만'의 본능을 가져야 한다.

- 그것이 사랑과 연합이다.

- 그것은 거래와 경쟁을 통한 편하고 자유롭게 잘 사는 삶을 포기하는 것이다.

- 대신 불편하고 소외되고 도태될 수 있지만, 사랑으로 사람과 하나님과 연합할 때 참으로 만족할 수 있다.

 

우리에게 언젠가 반드시 이런 하소연을 할 날이 올 것이다.

- 나는 평생을 잘 살려고 발버둥 치며 살았는데, 이제 와서 돌아보니 남은 것이 하나도 없구나.

- 돈도, 건강도, 친구도, 자식도 다 소용없구나.

- 나는 큰 욕심 가졌던 것도 아니었는데, 왜 이렇다 할 성과가 없을까.

- 인생 참 허망하구나.

- 내 인생 이렇게 만드신 하나님이 원망스럽구나. 라며 말이다.

- 꾸며낸 말이 아니라, 실제로 주변에서 들은 말이다.

우리 인생이 왜 이렇게 되겠는가?

- 결국 다 우리의 잘못된 선택 때문이다.

- 잘못된 선택이 수십 년 동안 누적된 결과이다.

- 하나님은 계속해서 우리보고 돌이키라고 외치셨지만, 우리가 눈, 귀 닫고 내달렸기 때문이다.

- 우리가 자초한 심판이다.

- 그 결과가 왜 나타났는지 자신만 모를 뿐이다.

- 마치 이스라엘이 멸망당할 때 왜 이런 심판이 내려졌는지 자신들만 몰랐던 것처럼 말이다.

- 우리는 다 아는데 말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인생이 어떻게 될지 나만 빼고 다른 사람은 다 알 것이다.

 

이스라엘은 심판을 받은 이후에야 돌이킬 수 있었다.

- 그렇게라도 했으니 다행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지 말자.

- 심판받기 전에, 경고만 받을 때 돌이키자.

- 거래와 경쟁은 승리자와 패배자 모두에게 아픔만을 남긴다.

- 하지만 사랑과 연합에 참여하는 모두는 하나님처럼 되는 영광을 얻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