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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서

예레미야(05) 3:1-13 배신한 이스라엘아 돌아오너라! - 하나님의 심판과 용서

<미양교회 팟캐스트 양따양>

미양교회에서 했던 설교를 바탕으로 진솔하게 신앙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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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양을 따르는 어린양

예배 대신 예수님, 설교 대신 성경, 건물 대신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미양교회가 만드는 방송입니다.토끼와 개구리가 진솔하게 신앙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어린양과 같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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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이스라엘의 두 가지 착각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 첫째로, 하나님께는 언제든지 다시 돌아갈 수 있다는 착각이다.

[렘 3:1] 그런데 너는 수많은 남자들과 음행을 하고서도, 나에게로 다시 돌아오려고 하느냐? 나 주의 말이다.

- 둘째로, 하나님은 언제까지나 진노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착각이다.

[렘 3:5] 하나님은 끝없이 화를 내시는 분이 아니다. 언제까지나 진노하시는 분이 아니다' 하면서, 온갖 악행을 마음껏 저질렀다.

이런 착각을 하는 이스라엘의 속마음은 다음과 같다.

- 지금은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우상 숭배를 하고 있다.

-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얼마나 화를 내고 계시는지 안다.

- 하지만 이번 문제만 해결되면 하나님께 돌아갈 것이다.

- 그러면 하나님은 분명히 화를 푸시고 두 팔 벌려 맞아주실 것이다.

- 우리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니까.

그래서 이스라엘은 마음껏 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

- 언제든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 그리고 돌아가기만 하면 하나님은 화를 풀고 맞아주실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한 착각 때문에 이스라엘이 범한 죄를 1-11절까지 자세히 설명한다.

- 특히 6-7절에서 북 이스라엘은 돌아오려니 했지만 돌아오지 않았다.

[렘 3:7] 그래도 나는, 그가 이 모든 음행을 한 다음에 다시 나에게로 돌아오려니, 하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 그리고 8-11절에서 남 유다는 돌아온 척만 하고 돌아오지 않았다.

[렘 3:10] 이런 온갖 음행을 하면서도, 배신한 자매 유다는, 건성으로 나에게 돌아온 척만 하고, 진심으로 돌아오지는 않았다. 나 주의 말이다.

이렇게 본문은 하나님께서 죄에 대하 얼마나 엄격하신지 보여준다.

 

하지만 동시에 본문은 이스라엘의 착각이 착각이 아니라고 말한다.

[렘 3:12] 너는 북쪽으로 가서, 이 모든 말을 선포하여라. 배신한 이스라엘아, 돌아오너라! 나 주의 말이다. 내가 다시는 노한 얼굴로 너를 대하지 않겠다. 나는 자비로운 하나님이다. 나 주의 말이다. 내가 노를 영원히 품지는 않겠다.

-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돌아오면 맞아주실 것이고,

- 그리고 화도 푸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물론 하나님은 조건을 제시하셨다.

- 죄에 대한 깨달음이다.

[렘 3:13] 다만, 너는 너의 죄를 깨달아라.

- 즉, 죄를 깨닫고 인정하면, 화를 풀고 받아주시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은 죄에 대해 관대하시고 자비로우시다.

 

그렇다면 도대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은 죄에 대해 자비하신가, 무자비하신가?

- 왜 본문은 죄에 대해 엄격하신 하나님과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동시에 담고 있는가?

같은 질문을 이렇게 바꿀 수 있다.

-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지적하시고 심판하시는가, 눈감아주시고 용서해주시는가?

같은 질문을 예수님께 하면,

-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신 것은 우리 죄를 심판하시기 위한 것인가, 용서하시기 위한 것인가?

 

어떤 질문도 우리는 쉽게 답할 수 없다.

- 하나님은 우리를 심판하시며 용서하신다.

-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우리를 심판하시며 용서하셨다.

하지만 심판과 용서는 함께 있을 수 없다.

- 심판하면 죗값을 치렀기 때문에 용서가 필요 없다.

- 반대로 용서하기 위해서는 심판하면 안 된다.

- 심판한 후 또 용서하는 것은 마치 내가 가해자로 징역 1년을 살고 나왔는데, 피해자가 용서해줄 테니까 앞으로 고마워하라는 것과 같다.

- 징역은 징역대로 살았는데 왜 또 마음에 고마움이라는 짐을 지고 살아야 하는가.

- 심판을 받았으면 더 이상 피해자에게 아무런 마음의 짐을 가질 필요가 없다.

- 즉, 용서받을 필요가 없다.

심판 후에 용서에 대한 고마움을 또 요구하는 것은 죗값에 대한 이중 부과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그러셨을까?

- 왜 심판 후에 용서에 대한 고마움을 또 요구하셨을까?

하나님도 마찬가지이다.

- 이스라엘을 심판하셔서 수많은 재앙을 내리셨고, 결국 나라를 멸망시키셨다.

- 그런 후 회복시키셔서 용서에 대한 감사를 요구하셨다.

왜 이렇게 이중 부과를 하실까?

- 우리는 왜 심판은 심판대로 받고, 용서에 대한 감사를 또 가져야 할까?

 

이는 전적으로 오해이다.

- 하나님은 이중 부과를 하지 않으셨다.

- 이중 부과로 느끼는 이유는 우리의 오해 때문이고,

- 그 오해의 핵심은 무죄 의식이다.

풀어 말하면,

- 하나님께서 내리신 심판의 크기와 우리 죄의 크기가 같다는 착각 때문이다.

- 다시 말해서, 내 죄가 내가 받은 심판으로 사해질 수 있을 정도로 작다는 착각 때문이다.

- 즉, 내 죄의 크기가 그리 크지 않다는 착각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 죄의 실제 크기, 즉 우리가 받을 심판의 크기는 어느 정도인가?

죄의 삯은 사망이다.

- 우리가 어떤 죄를 지었건 죽음으로만 죗값을 치를 수 있다.

- 하지만 이런 논리는 논리적일 뿐,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지는 못한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가 죄를 자각하도록 정말 다양한 방법으로 설명한다.

- 그중에 가장 익숙하면서도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예수님 십자가 죽음이다.

자세히 설명하면,

- 사람은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본능이 있다.

- 이는 하나님께서 사람과 관계 맺기 위해 만드신 사람 고유의 본질이다.

- 하지만 사람은 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 그래서 하나님처럼 되기 굳이 불필요하게 하나님을 떠난다.

- 대표적인 예가 아담이다.

 

그런데 탕자 아버지는 아담처럼 떠나는 탕자를 잡지 않았다.

- 그냥 보고만 있었고, 애타는 마음으로 기다리기만 했다.

하지만 실제 하나님은 조금 다르다.

- 가만히 계시지 않고, 찾아 나서셨다.

- 하나님을 떠나 자기 멋대로, 그러나 노예처럼 괴로워하며 살는 사람들을 돌이키기 위해,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내려오신다.

- 그것이 예수님의 성육신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돌아오라고 외치셨다.

- 헛된 제사, 헛된 성전 믿지 말고,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 맺으라고 다양한 방법으로 말씀하신다.

- 그것을 위해 안식일을 범하기도 하고, 성전을 뒤엎으시기도 하신다.

- 이는 떠나간 사람들을 돌이키도록 하기 위한 사랑의 몸부림이다.

 

그러나 사랑의 몸부림의 대가는 무엇이었는가?

- 죽임당함이었다.

- 사람은 사랑하려고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죽였다.

왜 죽였냐?

- 오해 때문이다.

- 자기 세계 안에서 자신을 하나님 삼아 사는 사람에게 진짜 하나님이 다가오시자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다.

- 자신의 세계에서 자신의 왕 자리를 하나님께서 빼앗으실 것이라고 착각했기 때문이다.

- 이는 지난 본문에서 말했듯이, 한 하늘에 하나의 태양 밖에 뜰 수 없다는 착각 때문이다.

- 그래서 바리새인은 기득권의 위협을 느끼고 예수님을 죽인다.

그래서 사람은 자신의 왕 자리를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을 죽인다.

- 그러한 본능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죽음은 2000년 전에 한 번 일어나고 끝난 사건이 아니다.

- 착각을 가진 사람이 존재하는 한 모든 사람에 의해 매 순간 반복해서 발생하는 사건이다.

- 지금도 내 안에서 반복해서 발생한다.

이것을 증명하는 쉬운 예가, 예수님을 믿은 이후에 대한 알 수 없는 불안감이다.

- 예수님 믿어서, 하고 싶은 것 아무것도 못 하고, 재산은 다 털리고, 고생만 하다가, 비극적으로 죽으면 어떡하지?

- 예수님, 베드로, 바울처럼 되면 어떻하지?

- 이런 불안감 때문에 신앙에 헌신하지 못한다.

이 불안감의 근원이 바로 자신의 세계에서 자신의 왕 자리를 빼앗길 것이라는 두려움이다.

- 이 두려움 때문에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밀쳐내는 것이다.

- 그리고 이 두려움이 어느 선을 넘어서면, 밀쳐내는 것을 넘어서 죽이기까지 하는 것이다.

- 바리새인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죄의 크기이다.

-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을 넘어서, 하나님을 죽여서 제거하려는 마음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받아야 할 죗값은 죽음이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죗값의 전부를 부과하지 않으셨다.

- 우리는 죄에 대한 심판에 따라 죽어야 하는데, 죽지 않고 살아 있다.

- 극히 일부만 심판하시고, 대부분의 죗값은 용서하셨다.

이렇게 심판과 용서를 모두 하셔서 이중 부과를 하신 것처럼 보이지만, 

- 실제로는 정확하게 계산하신 것이다.

- 그러나 우리는 우리 죄의 크기를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가 범한 죄보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하시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착각하는 사람의 전형적인 사고 패턴이 있다.

- 첫째가, 하나님께는 언제든 돌아갈 수 있고, 돌아가기만 하면 하나님은 언제나 화를 푸시는 자비로운 분이라는 착각이다.

- 둘째가, 반대로 하나님께는 결코 돌아갈 수 없고, 돌아가더라도 하나님은 절대 화를 푸시지 않는 무-자비하신 분이라는 착각이다.

- 그래서 하나님의 자비하심만 믿고 방종하던가, 하나님의 무-자비하심만 믿고 율법주의자가 되는 것이다.

왜 이렇게 생각하냐면,

- 자신의 죄가 작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한없이 자비롭게 대하실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 반면에, 하나님을 작은 죄에도 과하게 심판하신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언제나 무-자비하게 대하실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하심과 무-자비하심을 동시에 가지신 분이다.

- 그래서 하나님께는 언제든 돌아갈 수 있지만, 아무렇게나 돌아갈 수 있는 분은 아니다.

- 또한 하나님은 돌이키는 사람에게 언제나 화를 푸시지만, 아무 때나 푸시는 분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비하심만 혹은 무-자비하심만 보여주실 수 없는 것이다.

- 자비하심으로 용서만 보여주시면, 사람은 방종에 빠질 것이고,

- 무-자비하심으로 심판만 보여주시면, 사람은 율법주의에 빠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 때문에 본문이 심판과 용서를 동시에 보여주는 것이다.

- 하나님을 언제든 돌아갈 수 있으면서도 돌아갈 수 없는 분으로,

- 그리고 언제나 화를 푸시면서도 푸시지 않는 분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심판과 용서를 동시에 경험하는 사람의 마음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 이미 알겠지만, 사랑의 관계가 깊어진다.

-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깨닫게 되고, 그 깨달음으로 인해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

이것이 하나님의 유일무이한 목적이다.

-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알려주시는 것,

- 그래서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하는 것 말이다.

그런데 그것을 위해 심판과 용서, 자비와 무-자비가 모두 필요하다.

- 심판만 하면, 사람은 하나님께 비굴하게 굴복할 것이고,

- 반면 용서만 하면, 사람은 하나님을 가지고 놀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심판과 용서가 어떻게 사랑의 관계를 맺게 하냐?

심판의 목적은 공감이다.

-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죄를 짓는 것을 얼마나 속상해하는지 알려주는 것에 목적이 있다.

- 그래서 처음에는 속상하다는 표현을 말로 하신다.

- 그런데 듣지 않으니까 감정을 드러내신다.

- 그런데도 듣지 않으니까 심판의 극히 일부를 보여주셔서 사람이 경각심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 고문을 통해 원하는 것을 비자발적으로 고백하도록 하는 것과 달리, 

- 현실의 문제를 통해 경각심을 갖고, 그것을 통해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해보려 노력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을 성찰하여 죄를 깨닫도록 하는 것이다.

- 마치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있는 70년 동안 자신의 죄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던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죄를 깨달을 때, 

- 내가 얼마나 하나님을 아프게 했는지 이해하게 되고,

- 그때 하나님의 속상함에 공감하게 되며,

- 그렇게 속상한데도 죗값에 따라 나를 심판하시지 않고, 

- 끝까지 기다려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다.

심판의 역할을 정리하면, 

- 별 볼 일 없는 나 떠났다고 그토록 애절하게 아파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게 하며,

- 그 아픈 마음에도 불구하고 나와 관계를 완전히 끊어 심판하시지 않고, 끝까지 나를 기다리셔서 나와 관계 맺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한다.

 

여기에 용서는 화룡점정이다.

- 하나님의 마음에 공감하여 고마움과 죄의식이 뒤섞여 어찌할 바를 모를 때,

- 고마움 때문에 하나님께 다가가고 싶지만, 죄의식 때문에 감히 다가가지 못할 때,

- 하나님은 용서를 선포하신다.

- 그래서 아무런 죄 의식 없이 마음껏 고마움을 표현하며, 아무런 방해도 없이 하나님과 더 친밀한 관계를 갖도록 하신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고백했던 사랑의 능력이다.

[롬 8:38~39]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39) 높음도, 깊음도, 그 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 이는 심판과 용서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갖는 사랑의 확신이다.

 

결론 - 다만 너는 너의 죄를 깨달아라.

심판과 용서를 통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이 사랑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 그러나 또 분명한 것은, 사랑을 통한 하나님과의 하나됨으로 가는 길에는 반드시 죄의식, 즉 회개가 있다는 것이다.

- 그래서 본문은 마지막에 회개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렘 3:13] 다만, 너는 너의 죄를 깨달아라. 너는 너의 주 하나님을 배반하고 떠나서, 푸른 나무마다 찾아 다니며, 그 밑에서 다른 신들에게 너의 몸을 내맡겼으며, 나에게 순종하지 않았다. 너는 이것을 깨달아라. 나 주의 말이다.

 

회개의 본질은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한 살의가 있음을 아는 것이다.

- 우리 인생의 목적이 자신의 세계 안에서 자신이 하나님처럼 되기 위해 하나님을 제거하는 것임을 깨닫는 것이다.

- 그것을 위해 돈을 모으고, 사람들의 호감을 얻으려 하며, 안락한 집을 갖고,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 그래야만 자신의 세계가 더욱 튼튼해져서, 자신의 허락 없이는 아무도 들어올 수 없기 때문이다.

- 그래서 자신의 세계 안에서 하나님의 간섭 받지 않고 마음껏 살아갈 수 있는 자유를 얻기 위해 인생 전부를 쏟아붓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알 때, 하나님의 분노와 절망, 아픔, 고통에 공감할 수 있다.

- 그것에 공감할 때,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사랑에 감격할 수 있다.

- 그 사랑에 감격할 때, 그 하나님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사랑할 때, 그때에야 비로소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되는 것이다.

- 그때에야 비로소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고, 배우자와 자녀를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 그때에야 비로소 인생다운 인생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심판을, 부활하심으로 용서를 보여주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