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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서

예레미야(04) 2:20-37 '나에게는 아무런 죄가 없다!' - '무'죄 의식의 원인

<미양교회 팟캐스트 양따양>

미양교회에서 했던 설교를 바탕으로 진솔하게 신앙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팟캐스트도 많이 들어주세요.

https://www.podbbang.com/channels/1790233/

 

어린양을 따르는 어린양

예배 대신 예수님, 설교 대신 성경, 건물 대신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미양교회가 만드는 방송입니다.토끼와 개구리가 진솔하게 신앙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어린양과 같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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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이스라엘을 살벌하게 비난한다.

- 자극적인 몇 가지 구절만 보면,

[렘 2:24] 너는 사막에 익숙한 야생 암나귀와 같았다. 암내만 나면 헐떡이는 그 짐승, 그 짐승이 발정하면 누가 그것을 가라앉힐 수 있겠느냐? 그런 암컷을 찾아 다니는 수컷은 어느 것이나 힘들이지 않고서도 발정기가 된 암컷을 만나게 된다.

- 발정기가 된 짐승처럼 아무나 붙잡고 음행을 저지른다고 고발한다.

[렘 2:25] 너는 너의 발을 돌보아, 맨발로 다니지 말고, 너의 목을 돌보아, 목타게 다니지 말라고 일렀건만, 너는 말하였다. '아닙니다. 공연한 말씀이십니다. 오히려 나는 이방 신들이 좋으니, 그들을 쫓아다녀야 하겠습니다.'"

- 노골적으로 우상을 좋다고 따라다닌다.

[렘 2:31] 이 세대의 사람들아, 너희는 그래도, 나 주의 말을 명심하여 들어라. 내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막막한 광야가 되었느냐? 어둡고 캄캄한 땅이 되었느냐? 어찌하여 나의 백성이 우리가 자유롭게 돌아다니게 되었으니, 다시는 주께로 돌아가지 않겠다' 하고 말하느냐?

- 다시는 주께 돌아가지 않겠다고 대놓고 말한다.

[렘 2:33~35] "너는 연애할 남자를 호리는 데 능숙하다. 경험 많은 창녀도 너에게 와서 한 수 더 배운다. (34) 너의 치맛자락에는 가난한 사람들의 죄없는 피가 묻어 있다. 그들이 담을 뚫고 들어오다가 너에게 붙잡힌 것도 아닌데, 너는 그들을 죽이고서도 (35) '나에게는 아무런 죄가 없다! 하나님이 진노하실 일은 하지 않았다' 하고 말한다. 네가 이렇게 죄가 없다고 말하기 때문에, 내가 너를 심판하겠다."

- 창녀에게 음행을 가르치는 선생이며, 죄 없는 사람들을 마구 죽이는 살인마다.

이스라엘은 이보다 더 나쁠 수는 없는 흉악범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자신의 무죄를 주장한다.

[렘 2:23] 네가 스스로의 몸을 더럽히지 않았고, 바알 신들을 따라가지도 않았다고, 감히 말할 수 있느냐?

- 음행도 우상 숭배도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렘 2:35] '나에게는 아무런 죄가 없다! 하나님이 진노하실 일은 하지 않았다' 하고 말한다.

- 아무런 죄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오히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비난한다.

[렘 2:29] 그런데도 너희가 어떻게 나와 변론할 수 있겠느냐?

- 여기서 '변론'은 법정 용어로서, '고소'를 의미한다.

- 즉, 이스라엘은 자신에게 부적절한 재앙을 내리신 하나님을 비난하며 고소한다.

- 그만큼 당당했고, 당당한 만큼 억울했다.

- 자신에게 재앙이 내린 이유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어떻게 흉악범이 이럴 수 있을까.

- 죄를 지적하는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거나 변명하기는커녕, 오히려 무죄를 주장하며 맞고소를 할 수 있을까?

- 이스라엘은 어떤 과정을 거쳐서 이런 심리 상태가 되었을까?

- 이것을 생각해보려고 한다.

 

따라서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 첫째로, 이스라엘의 죄가 얼마나 심각한지.

- 둘째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스라엘은 무죄를 주장하는지.

그런데 이것보다 본문이 더 근원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다.

- 첫째로, '나'의 죄가 얼마나 심각한지.

- 둘째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나'는 무죄를 주장하는지.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 우리가 창녀의 선생이 될 만큼 음행에 절어 있고,

- 죄 없는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죽이는 살인마임에도 불구하고,

- 철면피처럼 무죄를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본문은 이스라엘에 대한 정죄를 넘어서, 인류에 대한 고발이며 '나'에 대한 정죄이다.

- 하나님의 정죄와 이스라엘의 무죄 주장이 지금 하나님과 '나' 사이에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도록 하는 것이 본문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성경 전체 맥락에서 볼 때, 성경은 사람의 죄를 어느 정도 감안해준다.

- 사람이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전제가 있기 때문이다.

- 죄 짓는 것 자체를 비난하지 않는다.

하지만 죄 지은 이후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다룬다.

- 죄 지은 후 용서를 구하는 사람에게는 무한한 용서가 임한다.

- 반면에 죄 지은 이후에도 여전히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하고 합리화하며 무죄를 주장하는 사람에게는 무서운 재앙이 임한다.

 

따라서 본문의 핵심은 이스라엘의 '무'죄 의식이다.

- 이스라엘의 범죄는 들러리이다.

- 무죄 의식을 고발하기 위한 밑밥을 깔기 위해 이스라엘의 범죄를 살벌하게 정죄한 것이다.

'범죄 그 자체'와 '범죄 이후의 무죄 의식' 이 두 가지를 잘 구분해야 한다.

- 만약 이를 구분하지 못하면, 두 가지 극단에 빠진다.

- 범죄 행위 자체에만 매여서 행동주의, 율법주의로 변질되거나,

- 아무리 노력해도 여전히 죄를 짓고 있는 자신의 무능함에 지쳐서 방종해 버린다.

- 이렇게 율법주의와 방종은 완전히 반대로 보이지만, 실상은 하나이다.

- 범죄 그 자체에 매몰된 사고 방식의 두 가지 다른 얼굴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은 범죄보다 무죄 의식을 비판한다.

- 범죄와 무죄 의식을 구분하고, 만연한 범죄 사이에서 무죄 의식이 뚫고 올라올 때,

- 그래서 범죄보다 무죄 의식이 얼마나 심각한 죄인지 알 때,

- 그때에야 비로소 율법주의와 방종 사이를 진자처럼 오가지 않고,

- 범죄와 무죄 사이를 의미 없이 오가지 않고,

- 하나님께 돌아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수 있다.

 

하나님은 죄악 그 자체를 싫어하지 않으신다.

- 죄악 역시 하나님의 피조물일 뿐이다.

-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은 죄악으로 인해 사람과 '끊어진 관계'이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아담의 예를 들어보면,

- 아담의 죄는 선악과를 먹은 것이다.

- 왜 먹었냐면, 하나님처럼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 따라서 죄의 본질은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욕망이다.

그런데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것이 왜 나쁜가?

-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 형상을 따라 '하나님처럼' 만드셨다.

- 즉, 사람이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것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직접 만들어 넣으신 사람의 본질이다.

- 그리고 이는 만물과 사람이 구분되는 사람의 본질이다.

따라서 사람이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것은 나쁜 것이 아니다.

- 다시 말하면, 죄의 본질인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욕망 그 자체는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창조 목적은 사람이 하나님처럼 되는 것에 있다.

- 그래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신 것이다.

왜냐?

- 사람이 하나님처럼 돼야 비로소 관계를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래야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고, 그것을 통해 사랑의 관계를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

-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끊임없이 해왔던 사랑의 관계를 사람에게 확장하는 것이 창조의 본질인데,

-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람은 하나님처럼 되어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아담이 하나님처럼 되고자 한다고 비난할 수 있겠는가.

- 이는 하나님의 계획이었다.

 

따라서 정죄의 포인트는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욕망 그 자체가 아니다.

- 하나님처럼 되기 위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고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다.

- 이는 창조의 목적을 역행하는 것이다.

- 관계 확장을 원하시는 하나님을 고립시키는 행위이다.

-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을 정죄하신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창조 행위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 하나님은 언제나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

- 하나님의 창조 행위에는 처음부터 아담의 배신이 포함되어 있었다.

- 그리고 배신 이후의 돌아옴까지 계획되어 있었다.

어떤 과정을 통해 아담이 돌아오냐?

- 아담은 하나님처럼 되기 위한 욕망 때문에 하나님을 떠났다.

- 왜냐하면 한 하늘에 두 태양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 아담은 하나님과 왕권을 두고 충돌했고, 자신의 왕권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세계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세계에서 스스로 왕이 되고자 했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 왕이 되려 했지만, 현실에서 아담은 노예가 되었다.

- 땅과 하늘의 노예가 되었다.

- 땅은 아담에게 잡풀을 뽑으라고 명령했고, 하늘은 비로 아담을 통제했다.

[창 3:18] 땅은 너에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다. 너는 들에서 자라는 푸성귀를 먹을 것이다.

- 왕이 되려 했던 아담은 땅과 하늘의 지배를 받으며 간신히 연명한다.

- 누구의 지배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도 마음껏 먹을 수 있었던 에덴 동산과 대비된다.

- 이것이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나님을 떠난 인류의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은 탕자 이야기에서도 그대로 재현된다.

- 탕자는 자유를 얻기 위해 아버지를 멸시하고 유산을 받아 집을 떠난다.

- 아버지를 떠나면 왕처럼 자유롭게 살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 그러나 아버지를 떠난 현실은 왕이 아닌 노예의 삶이었다.

- 그래서 노예로도 살길이 막막했던 탕자는 결국 다시 아버지께 돌아간다.

 

이것이 태초부터 계획된 하나님의 창조 과정이다.

- 사람은 하나님처럼 되면 하나님을 떠나고 싶어 한다.

- 자신이 하나님이 되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을 떠나는 것밖에 없는 줄 알기 때문이다.

- 그러나 실상은 하나님을 떠나면 하나님이 되는 것이 아니라 노예가 된다.

- 그래서 하나님이 되는 방법은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경험으로 깨닫는다.

그제서야 사람은 고민이라는 것을 시작한다.

- 하나님을 떠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이 될 수 있는 창의적인 방법을 생각하게 된다.

- 한 하늘에는 두 태양이 뜰 수 없다고 철석같이 믿었는데, 

- 하나님처럼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을 떠나야 한다고 믿었는데,

- 자신의 신념을 부정하고 한 하늘에서도 두 태양이 뜰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한다.

 

그것이 바로 관계이다.

- 사람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사랑을 하게 되면,

- 그래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너무 깊어져 더이상 구분조차 할 수 없게 되면,

- 즉, 태양이 둘이며 동시에 하나인 상태가 되면,

- 그때 사람은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서도 하나님처럼 되는 영광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관계의 청사진이 바로 삼위일체다.

- 하나님은 완전한 세 분이심과 동시에 완전한 하나이시다.

- 왜냐하면 독립적인 세 분이 완전한 관계를 맺으셨기 때문이다.

- 그래서 한 하늘에 세 태양이 뜰 수 있는 것이다.

- 왜냐하면 세 분이 서로 완전히 사랑하셔서 완전한 하나가 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창조는 아담을 만드신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 그 아담을 노예로 전락시키시고, 다시 돌아오게 하셔서, 참 관계를 맺는 것까지이다.

- 그리고 그 관계를 아담의 자녀의 자녀의 자녀까지 계속해서 확대하시는 것,

- 그래서 결국 인류 전체에 관계가 확대되는 것까지가 창조 행위이다.

- 그러니까 지금도 하나님은 창조를 계속하고 계신 것이다.

- 우리는 창조 완료된 세상에 사는 것이 아니라, 창조 중인 세상에 사는 것이다.

- 그리고 결국 창조의 완성은 종말이다.

 

그렇다면 창조의 과정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

- 하나님처럼 되기 위해 하나님을 떠났지만, 오히려 노예가 되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 자유를 얻기 위해 탕자는 아버지를 떠났지만, 오히려 노예로서의 삶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그래서 노예가 된 결정적인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 자신이 하나님처럼 되기 위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었기 때문이다.

- 그것 때문에 죄의 노예가 된 것이고,

- 그것 때문에 범죄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 그래서 이스라엘은 우상 숭배와 음행과 살인을 저지른 것이다.

 

그것만 깨달으면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다.

-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여, 노예의 삶을 청산하고, 참된 왕으로 하나님처럼 살아갈 수 있다.

- 더 이상 죄의 노예로 살아갈 필요가 없으며, 죄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런데 문제가 뭐냐면,

- 노예가 되어 재앙에 빠진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모른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무죄 의식이다.

- 자신에게 재앙이 임한 것은 자신에게 잘못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 하나님의 잘못 때문이라는 것이다.

- 마치 본문에서 이스라엘이 재앙을 내리신 하나님을 고소하는 것처럼 말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냐? 어떤 심리 상태이기 때문이냐?

- 정확하게 말하면, 자신이 하나님처럼 되기 위해 하나님을 부정하고 하나님을 떠났는데,

- 그것으로 인해 노예가 되고, 재앙에 빠지고, 범죄를 반복하는데,

- 그것이 왜 자신의 문제라는 죄 의식을 갖지 못하고,

- 무죄를 주장하게 되는 것일까?

왜 이런 이야기를 하냐면, 이것이 바로 우리가 처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 죄로 인해 고통당하는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죄를 전혀 발견하지 못하는 현실 말이다.

 

답은 단순하다.

- 한 하늘에는 두 태양이 뜰 수 없다고 철석같이 믿기 때문이다.

풀어 말하면, 

- 모든 인류에게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

- 다르게 말하면, 초월 욕구이다.

- 이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처음 만드실 때 다른 만물과 구분되는 사람의 본질로 삼으신 것이다.

그런데 그 욕구를 해소하는 방법이 하나님을 거부하고 떠나는 것밖에 없다고 믿는 것이다.

- 왜냐하면 두 하나님이 공존하는 한 누구도 하나님이 될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처럼 되기 위해 하나님이 없는 자신만의 세계로 숨는 것이다.

- 그곳에서만 자신이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이 하나님을 떠난 것은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 사람의 지극히 당연한 욕구를 채우려 했을 뿐인데 뭐가 문제냐는 것이다.

-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욕구를 채우려는 것이 왜 문제냐는 것이다.

- 오히려 욕구를 채우려 했다는 이유로 노예가 되고, 재앙에 빠지며, 죄를 짓도록 한 하나님이 문제라는 것이다.

- 이러한 생각 속에서 이스라엘은 무죄를 주장하며 하나님을 고소한 것이다.

 

이러한 사고 방식을 현재에 적용해보면,

- 주어진 인생 속에서 먹고 살고자 하는 욕구는 당연하다.

- 그런데 먹고 살려면 돈이 필요하고,

- 돈을 벌려면 일을 해야 하고,

- 일을 하려면 직업이 있어야 하는데,

- 현실이 워낙 치열하기 때문에, 좋은 직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일에 치열하게 몰입해야 하고,

- 그러다 보면 먹고 살기 빡빡한 현실 속에서 신앙까지 어떻게 챙기냐는 것이다.

- 나는 단순히 먹고 살려는 것뿐인데, 그 과정 중에 '어쩔 수 없이' 신앙 좀 소홀했다고 그게 무슨 큰 잘못이냐는 것이다.

잘못이 있다면, 

- 태어나서 먹고 살아야만 하도록 하신 하나님 잘못이고,

- 먹고 살 수 있는 돈을 안 주신 하나님 잘못이며,

- 널널하게 일할 수 없도록 현실을 치열하게 만드신 하나님 잘못이지,

- 주어진 현실 속에서 나름 열심히 살아가려는 내가 왜 잘못이냐는 것이다.

이렇게 쎄빠지게 일하는 나한테, 

- 잘했다고 격려하고, 기적까지 얹어주시며, 

- 일이 더 잘 풀릴 수 있도록 문제를 해결해주셔도 모자란 판에,

- 어쩔 수 없이 신앙 좀 소홀했다고 그렇게 화내시며 정죄하시는 것은 너무 불합리하며,

- 하나님이 정말 그런 야박한 분이시라면, 있어도 필요 없는 분이라는 것이다.

- 그럴 바엔 안 믿고 혼자 알아서 살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 이렇게 우리도 무죄를 주장하며 하나님을 고소하는 이스라엘과 완전히 일치한다.

 

결론

그렇다면 사람은 왜 한 하늘에 두 태양이 뜰 수 없다고 착각하는가?

- 풀어 말하면, 왜 사람이 하나님처럼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떠나야만 한다고 생각하는가?

- 이런 사고 방식 속에서는, 하나님이 창조하셔서, 하나님처럼 되려는 초월 욕구를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을 떠날 수밖에 없다.

- 그러면 무죄 의식을 가질 수밖에 없고, 하나님을 고소할 수밖에 없다.

- 그러면 영원히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할 수 없고, 영원히 노예로 살아야만 한다.

 

또 답은 관계이다.

사랑을 모르고 거래 밖에 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 사랑의 관계 속에서는 한 하늘에 두 태양이 뜰 수 있다는 것을 모른다.

- 거래를 통한 갑을 관계, 주종 관계밖에 알지 못한다.

- 거래 관계에서는 하나의 물건에 주인이 둘인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 예를 들어, 공동 명의는 하나의 물건을 쪼개서 둘이 소유한다는 개념이다.

- 완전히 공동으로 소유한다는 개념은 없다.

- 그래서 한 하늘에 두 태양이 뜨는 것을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 한 세계에 하나님이 되기 위해서는 이전의 하나님을 없애야만 하는 것이다.

- 한 세계의 주인은 반드시 한 하나님이어야 한다.

 

그러나 사랑을 알면,

- 그래서 하나님처럼 되기 위해서 굳이 하나님을 떠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면,

-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맺어 완전한 하나가 되면,

- 한 세계 안에서도 두 하나님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알면,

- 한 세계를 두 하나님이 공동 소유 할 수 있다는 것을 알면,

- 그래서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는 것이 하나님처럼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알면,

- 사람의 근원 욕구인 초월 욕구를 채우는 동시에,

- 하나님과의 관계도 회복하며,

- 노예로부터 해방되고,

- 죄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그렇게 하나님처럼 되었을 때만,

- '어쩔 수 없이'와 같은 노예 의식에서 벗어나,

- 무죄 의식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 자신에 대한 참된 주인 의식 속에서, 범죄했다는 것을 자각하고 인정할 수 있으며,

- 그제서야 비로소 노예 상태에서는 절대로 가질 수 없었던 죄 의식을 갖게 된다.

 

그리고 죄 의식은 다시 우리의 시선이 하나님을 향하도록 한다.

- 범죄했음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 그리고 죄 용서에 대한 고마움 때문에,

- 또한 죄인이었을 때도 여전히 나를 기다려준 사랑 때문에 말이다.

마치 탕자가 돌아온 후에는 아버지에 대한 미안함, 고마움, 사랑 때문에 평생토록 아버지 곁을 지킬 수밖에 없는 것처럼 말이다.

- 노예처럼 '어쩔 수 없이'가 아니라, 

- 하나님처럼 능동적, 주체적, 자발적, 주인 의식으로 말이다.

- 한마디로, 너무 사랑해서 말이다.

 

이스라엘은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 우상 숭배, 음행, 살인 모두 '어쩔 수 없었다'고 말이다.

- 농사 지으려면 해 신, 비 신, 땅 신을 섬길 수밖에 없었다고.

- 그것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발정기가 된 암나귀같이 헐떡거렸고, 경험 많은 창녀의 선생이 된 것뿐이라고.

- 강대국 사이에서 살아남으려면, 이집트 신, 앗수르 신을 섬길 수밖에 없었다고.

- 전쟁에서 이스라엘을 지키려면 '어쩔 수 없이' 농민들을 수탈할 수밖에 없고,

- 수탈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소수의 피해자는 나올 수밖에 없고,

- 소수의 피해자 중에 또 소수는 죽는 일도 생길 수 밖에 없다고 말이다.

- '어쩔 수 없이'라는 변명을 하며,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을 것이다.

- '어쩔 수 없는' 상황을 만드신 하나님을 원망하며 말이다.

 

우리도 이스라엘과 똑같이 말한다.

- 먹고 살려면 어쩔 수 없다고.

- 먹고 살려면 직업이 필요하고, 일을 하다 보면 사소한 불의는 어쩔 수 없다고.

- 빡시게 일하는 데 잠이라도 편하게 자려면 집은 있어야 하고, 

- 요즘 같은 세상에 집 사려면 어쩔 수 없이 편법 안 쓸 수 없다고.

- 이런 것은 욕심 축에도 끼지 못한다고.

- 해외 여행 가자는 것도 아니고, 명품 입자는 것도 아니고, 

- 단지 조금 안정적으로 먹고 잠자자는 것인데, 뭐가 그리 문제냐고.

 

그런 노예 의식, 그리고 그로 인한 무죄 의식이 이스라엘을 정말 노예로 만들었다.

- 그래서 이스라엘은 70년 동안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다.

하지만 이는 성경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지금 우리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이다.

- 우리도 사랑이 아니라 거래 관계로 살면,

- 그래서 하나님처럼 되기 위해 하나님을 거역하고 떠나면,

- 어쩔 수 없이 노예가 되어,

- 죄를 지었다는 것조차도 의식할 수 없게 될 것이다.

- 죄 없다고 주장하며, 죄 없는 자신에게 재앙을 내리신 하나님을 원망할 것이다.

- 그러면서도 어쩔 수 없이 창녀가 되고, 살인마가 될 것이다.

이것이 본문이 우리에게 하는 경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