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양교회 팟캐스트 양따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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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양을 따르는 어린양
예배 대신 예수님, 설교 대신 성경, 건물 대신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미양교회가 만드는 방송입니다.토끼와 개구리가 진솔하게 신앙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어린양과 같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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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보호하심 중에 무엇을 더 원하는가?
- 길게 말할 것도 없이, 보호하심이다.
- 그것이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 가장 실제적인 이유이다.
- 영생을 통한 죽음으로부터의 보호부터 시작해서,
- 돈이 없을 때 경제적 보호,
- 건강을 잃었을 때 육체적 보호,
- 마음이 아플 때 정신적 보호,
- 사람들 사이에서 소외감을 느낄 때 사회적 보호를 기대한다.
그 기대 때문에 힘들어도 신앙생활 하는 것이다.
- 말씀 기도도 억지로 하고, 일요일에 교회도 가며, 가능하면 나쁜 일 안 하고 살려고 애쓴다.
- 그래야만 힘든 일이 있을 때, 혼자서는 해결할 수 없는 일을 당했을 때,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 일종의 보험같이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신앙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 욕망이 우리를 이러한 잘못된 기대로 자꾸만 끌고 간다.
- 그래서 문제에 매몰되어, 정신없이 상황이 돌아가면, 우리는 두 가지의 생각을 반복한다.
- 하나는, 하나님께서 이 문제를 해결해주셨으면 좋겠다. 라는 소망이고,
- 다른 하나는, 하나님은 왜 이 문제를 해결해주시지 않는가? 라는 원망이다.
- 소망을 가져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소망은 어느새 원망으로 바뀌고,
- 원망에도 불구하고, 문제를 해결할 다른 방법이 없어 다시 하니님께 소망을 가진다.
- 소망과 원망을 반복하다가, 문제가 해결되거나 해결되지 않은 채 잊혀지면, 하나님도 함께 잊혀진다.
이것이 본질에서 벗어난 신앙의 패턴이다.
왜 이런 일이 생기냐?
- 어차피 결론은 관계이다.
- 즉, 신앙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는 배제한 채, 보호하심만 기대하기 때문이다.
- 그리고 보호하심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필요한데,
- 관계를 맺기 싫으니, 그 대신에 하나님께 일정 정도의 노동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 노동이 바로 종교 행위이다.
- 말씀, 기도, 예배로 하나님께 노동을 했으니, 그 대가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달라는 것이다.
- 우리 딴에는 이만큼 힘든 노동을 제공했으니, 바라는 정도의 보호하심을 받을만한 충분한 자격이 된다는 것이다.
- 그렇기 때문에 종교 행위는 보호하심을 사기 위한 노동이 된다.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로, 등가 교환이 아니라는 점이다.
- 우리가 하나님께 제공한 노동의 가치와 우리가 하나님께 바라는 보호하심의 가치 차이가 너무 크다.
- 우리가 제공한 노동의 가치는 하루에 10분, 토요일에 한 시간, 일요일에 두 시간이다.
- 이는 넉넉잡아 시급을 10만 원으로 잡아도, 월금 130만 원짜리 노동이다.
그러나 우리가 바라는 보호하심은,
- 수천만 원짜리 집값을 해당하는 안락한 거처,
- 수천만 원의 병원비에 해당하는 건강한 몸,
- 수백만 원짜리 심리 상담에 해당하는 건강한 정신,
- 수천만 원을 써야 얻을 수 있는 사람들의 관심과 인정이다.
너무 날로 먹는 장사이다.
- 월 130만원 노동의 대가로 수억 원을 얻으려 하기 때문이다.
- 이런 거래에 하나님이 응하실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을 너무 얕잡아 보는 것이다.
- 하나님을 속여서 남는 장사를 할 수 있다는 교만함이다.
- 도둑놈 심보이다.
- 말 그대로 신성모독이다.
둘째로,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거래하려는 마음 자체가 문제이다.
- 만약 우리가 하나님께 전 재산, 전 시간, 전 인생을 다 드렸다고 해보자.
- 그래서 간신히 등가 교환을 이루었다고 하더라도,
- 그 대가로 하나님께 보호하심을 구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다.
왜냐하면, 한마디로 말해서, 완전하신 하나님이 왜 굳이 우리와 거래를 하시겠는가.
- 거래의 목적은 자신에게 부족한 것과 남는 것이 있을 때, 남는 것을 대가로 부족한 것을 채우는 것이다.
- 그런데 하나님께는 부족한 것이 없다.
- 그래서 하나님은 누구와도 거래하시지 않는다.
- 하나님이 거래에 응하실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신성모독의 절정이다.
- 하나님의 완전함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인식 때문에 소망과 원망을 반복하는 것이다.
- 하나님과 관계 없음 때문이다.
- 그래서 하나님의 보호하심만 기대하기 때문이다.
- 그리고 그것을 위해 종교 노동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보호하심이 아니라 관계이다.
보호하심을 기대하기 전에 관계를 맺어야 한다.
-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아시듯, 우리도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알아야 한다.
- 또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듯, 우리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헌신해야 한다.
- 그렇게 하나님과 같은 생각을 갖고, 같은 목표를 가지며, 같은 마음을 느끼고, 같은 길로 나아갈 때 관계가 깊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본문에서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부르신 것이다.
[렘 1:5] "내가 너를 모태에서 짓기도 전에 너를 선택하고, 네가 태어나기도 전에 너를 거룩하게 구별해서, 뭇 민족에게 보낼 예언자로 세웠다."
- 부르셔서, 하나님과 같은 마음으로 같은 길로 가기를 요청하신 것이다.
[렘 1:7]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그에게로 가고, 내가 너에게 무슨 명을 내리든지 너는 그대로 말하여라.
- 이를 통해 관계를 깊이 맺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오해하는 경우가 있다.
- 사랑의 관계가 아니라, 폭력적인 주종 관계로 말이다.
- 왜냐하면 부르심이 하나님의 명령으로 시작되기 때문이다.
- 그리고 예언자는 언제나 순종으로 일관하기 때문이다.
- 그래서 하나님은 명령하는 주인, 예언자는 순종하는 종으로 보인다.
특히 현실에서 주종 관계 경험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 오해하게 된다.
- 현실에서 주종 관계는 언제나 폭력을 기반으로 한다.
- 그래서 하나님도 우리를 폭력적으로 다루실 것으로 생각한다.
- 그래서 폭력적인 하나님 앞에 종인 우리는 무조건 순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실제로 이런 주종 관계를 근거로 교회가 노예 제도를 지지했던 적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주종 관계는 현실에서 경험하는 주종 관계와 다르다.
- 하나님과 우리가 주인과 종이라는 외형적인 역할 차이가 있는 것은 맞다.
- 그러나 현실에서와같이 폭력과 강압이 빠진 주종 관계이다.
- 우리는 종이지만 주인이신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할 자유가 있고,
- 하나님은 주인이지만 종인 우리의 요청을 어떻게든 응답해야 할 의무가 있다.
- 마치 이상적인 부모와 자식 관계처럼 말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부르심은 사랑의 관계이다.
- 사랑하기 때문에 더 사랑하기 위해 부르신 것이다.
- 단순히 주인이 종을 부리듯 일을 시키기 위한 부르심이 아니다.
그래서 부르심에 응답하면, 하나님과 함께 있을 수 있는 최고의 영광이 주어진다.
[렘 1:8] 내가 늘 너와 함께 있으면서 보호해 주겠다. 나 주의 말이다.
[렘 1:19] 내가 너를 보호하려고 너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나 주의 말이다.
- 즉, 하나님은 관계를 맺기 위해 예레미야를 부르신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면 생기는 부-작용(side effect)이 있기 때문이다.
- 그것은 바로 이 나라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공격을 받는 것이다.
[렘 1:18] 이 나라의 모든 사람, 곧 유다의 왕들과 관리들에게 맞서고, 제사장들에게 맞서고, 이 땅의 백성에게 맞서게 하겠다.
왜 공격을 받나면, 그들의 멸망을 선포하기 때문이다.
[렘 1:9~10] 그런 다음에, 주님께서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고, 내게 말씀하셨다.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맡긴다. (10) 똑똑히 보아라. 오늘 내가 뭇 민족과 나라들 위에 너를 세우고, 네가 그것들을 뽑으며 허물며, 멸망시키며 파괴하며, 세우며 심게 하였다."
[렘 1:15] 내가 북쪽에 있는 모든 나라의 백성들을 이 땅으로 불러들이겠다. 그러면 그들이 모두 몰려와서, 예루살렘 모든 성문 바로 앞에 자리를 잡고, 사방에서 그 성벽을 공격하고, 유다의 모든 성읍을 칠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그렇다면 예레미야는 왜 멸망을 선포하냐?
단순히 종으로서 하나님이 시키시는 대로 무조건 따라 하는 것일 뿐인가?
- 하나님이 예레미야의 입에 손을 대셔서 해야할 말을 넣어주셨기 때문인가?
아니다. 사랑하기 때문이다.
-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에 공감하기 때문이다.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보시고 아파하시는 마음을 함께 느끼기 때문이다.
- 그 아픔을 자기 일처럼 느끼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아픔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 이스라엘의 죄를 지적하고,
- 죄에 대한 심판을 선포하며,
- 심판 후에 있을 회복을 약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그것이 10절에 나온, 뽑으며, 허물며, 멸망시키며, 파괴하며, 세우며, 심는 것이다.
왜 그렇게 생각하냐면, 다음 말씀 때문이다.
[렘 20:8~9] 내가 입을 열어 말을 할 때마다 '폭력'을 고발하고 '파멸'을 외치니, 주님의 말씀 때문에, 나는 날마다 치욕과 모욕거리가 됩니다. (9) '이제는 주님을 말하지 않겠다. 다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외치지 않겠다' 하고 결심하여 보지만, 그 때마다, 주님의 말씀이 나의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뼛속에까지 타들어 가니, 나는 견디다 못해 그만 항복하고 맙니다.
- 예레미야도 계속된 공격 때문에 지친다.
- 그래서 '폭력 고발'과 '파멸 외침'을 그만두고 싶어한다.
하지만 멈출 수 없다.
-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뼛속'에서부터 불타오르기 때문이다.
- 세상의 공격보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더 크기 때문이다.
-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에 공감할 수밖에 없고,
- 하나님과 함께 아파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 세상의 공격이 주는 아픔보다 하나님과 공감할 때 느끼는 아픔이 훨씬 크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 그래서 세상이 주는 아픔을 감수하는 것이다.
- 그리고 하나님과 공감할 때 느끼는 아픔을 해결하기 위해, 다시 또 나가서 이스라엘의 파멸을 외치는 것이다.
- 그럴 때에 가장 행복하기 때문이다.
마치 자녀가 아플 때,
- 내가 피곤해서 느끼는 아픔보다 자녀의 아픔으로 인한 아픔이 더 크게 느껴지듯 말이다.
- 그래서 자신의 피곤함을 느끼지 못하고, 아픈 자녀를 계속 간호하는 것처럼 말이다.
- 피곤하다고 들어가 자는 것보다 아이 옆에서 간호하는 것이 훨씬 더 마음 편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제야 주어지는 것이 '보호하심'이다.
하나님도 똑같이 우리 아픔에 공감하신다.
- 우리가 파멸을 외치다가 고통스러워할 때, 그 고통을 똑같이 느끼신다.
- 그러니 가만히 계실 수 있겠는가.
그래서 우리를 보호해주시는 것이다.
- 우리를 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 그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 때문에 고통받고 있기 때문이다.
- 그 고통이 자신의 고통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 그 고통을 없애기 위해 우리를 고통에서 건져주시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공감과 하나님의 공감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말 그래로 공감뿐이다.
- 우리는 아픔을 해결할 수 없다.
- 그러나 하나님은 공감하실 뿐만 아니라, 그 아픔을 해결하실 수 있다.
- 마치 부모 자식 관계에서, 자녀는 공감만으로도 충분하지만, 부모는 해결까지 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보호해주시는 것이다.
[렘 1:18~19] 그러므로 내가 오늘 너를, 튼튼하게 방비된 성읍과 쇠기둥과 놋성벽으로 만들어서, 이 나라의 모든 사람, 곧 유다의 왕들과 관리들에게 맞서고, 제사장들에게 맞서고, 이 땅의 백성에게 맞서게 하겠다. (19) 그들이 너에게 맞서서 덤벼들겠지만, 너를 이기지는 못할 것이다. 내가 너를 보호하려고 너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나 주의 말이다."
- 예레미야에게 성벽을 쌓아 주신다.
-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공격으로부터 지켜주신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성벽이 실제적, 물리적 해결이 아니라는 점이다.
- 이스라엘 사람들을 다 죽여 없애시는 것도 아니고, 공격을 완전히 차단하는 것도 아니다.
- 예레미야는 죽을 때까지 사람들의 공격을 지속해서 당한다.
여기서 말하는 성벽은 하나님 자체를 상징한다.
[시 94:21~23] 그들은 모여서 의인의 생명을 노리며, 무죄한 사람에게 죄를 씌워 처형하려 합니다. (22) 주님은 나의 요새, 나의 하나님은 내가 피할 반석이시다. (23)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물으시며, 그 악함을 벌하셔서, 그들을 없애 버리실 것이다.
- 그런데 하나님을 성벽으로 상징한 이유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만큼 튼튼하다는 뜻이다.
- 그래서 공격은 공격대로 다 받지만, 그래서 더 이상 공격받지 않기 위해 하나님과의 공감을 멈추고, 멸망 선포를 그만두고 싶지만, 그래서 하나님과 거리를 두고 싶지만,
-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예레미야와의 관계를 성벽처럼 튼튼하게 유지하실 것이라는 약속이다.
- 그래서 예레미야는 끊임없이 핍박 받고, 감옥에 갇히고, 매 맞고, 이집트에 끌려가기도 하지만,
- 그래서 세상의 공격에서 벗어난 적은 없지만,
-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는 끝까지 유지된다.
- 끝까지 하나님과 공감하며 하나님의 아픔에 동참한다.
- 이것이 참된 하나님의 보호하심이다.
이를 부정적인 면을 부각해서 비유하면,
- 내가 '성벽'처럼 튼튼한 나무에 튼튼한 줄로 묶여 있다.
- 그리고 사람들이 나를 마구 때리고 짓밟는다.
- 그래서 나는 어떻게든 나무를 뽑든, 줄을 끊든 해서 도망가고 싶다.
- 하지만 나무와 줄이 '성벽'처럼 너무 튼튼하다.
- 맞아 죽을 때까지 절대로 빠져나갈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 이와 같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튼튼해질 것이라는 뜻이다.
반대로 긍정적으로 표현해보면,
- 어떤 아픔과 시련에도 불구하고,
- 그래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 하나님만 사랑할 수밖에 없도록,
-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어마무시한 매력을 보여주실 것이라는 뜻이다.
- 폭력과 강압으로 우리의 몸만 묶어두시는 것이 아니라,
- 사랑과 이해와 공감과 선물과 매력과 기적 등을 통해 우리의 몸과 마음이 전부 하나님께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도록 그만큼 우리에게 잘해주실 것이라는 뜻이다.
- 마치 연애 초기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얻기 위해 했던 수 많은 행동처럼 말이다.
그것이 참된 보호하심이다.
그래서 진짜 하고 싶은 말은, 부르심과 보호하심은 구분할 수 없다는 것이다.
부르심은 하나님과 관계로의 부르심이고, 보호하심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보호하심이다.
-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보호하심이 주어질 수밖에 없고,
- 보호하심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밖에 없다.
- 그래서 부르심과 보호하심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 깊어지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 이렇게 부르심과 보호하심은 완전히 하나이다.
그런데 만약 부르심과 보호하심을 구분해서 생각한다면,
- 그래서 부르심에는 응답하지 않으면서 보호하심만 기대한다면,
-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건강, 부귀, 안전, 명예 등의 욕구를 채워주실 것이라고 믿는다면,
- 그에게는 파멸 심판이 내려질 것이다.
- 왜냐하면 16절 말씀이 그렇게 말한다.
[렘 1:16] 내가 이렇게 내 백성을 심판하는 까닭은, 그들이 나를 버리고 떠나서 다른 신들에게 향을 피우고, 손으로 우상을 만들어서 그것들을 숭배하는 죄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 한 마디로, 하나님을 우상 숭배하듯 거래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 그런 사람에게 필요한 하나님의 사랑은 파멸 이후의 회복이다.
- 이스라엘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본문은 부르심과 보호하심의 하나됨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냐?
본문의 구조를 간단하게 보면 다음과 같다.
- 참고로, 이는 교회에서 지원해준 Anchor Yale Bible Commentary를 통해 얻은 문학비평적 관점이다.
구조의 특징은 두 가지이다.
첫째로, 크게 세 단락(a - b - a')으로 나뉜다.
- a와 a'는 모두 '부르심과 보호하심'이 가운데 위치한다.
- b는 '부르심'과 '보호하심'에 대한 비유로, a와 a'를 연결한다.
- 그래서 a의 부르심과 a'의 보호하심을 b가 역순으로 보호하심과 부르심의 순서로 연결한다.
둘째로, 그래서 부르심과 보호하심이 엇갈려서 반복된다.
- a에서 부르심, b에서 보호하심과 부르심, a'에서 보호하심의 순서로 나온다.
이를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 바로 부르심과 보호하심의 하나됨이다.
- 부르심과 보호하심을 뒤섞여 있는 구조를 가진다.
- 그래서 보호하심만 기대하고 부르심은 거역한 이스라엘과 대비하여,
- 부르심과 보호하심을 함께 받은 예레미야의 모습을 부각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나라가 멸망당하는 것을 보고만 있어야 하는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다.
- 보호하심을 받지 못하고 멸망당한 이유는 부르심을 거역했기 때문이다.
- 부르심을 거역했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었다는 것이다.
- 그러면서도 계속해서 종교 행위를 했다는 것은 하나님과 거래하려 했다는 뜻이다.
- 하나님과 왜 거래하려 했냐?
-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 그래서 이스라엘은 멸망을 당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광야로 내던져져야 한다.
- 광야만이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하나님만 바라보며, 하나님을 알아갈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 하지만 이전에 이스라엘이 광야 40년 이후 약속의 땅 가나안에 도착했듯이, 이번에도 하나님과의 관계는 반드시 회복될 것이다.
- 그렇게 회복될 때, 그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다시 깨닫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때,
- 부르심에 순종했던 예레미야처럼 튼튼한 성벽으로 보호하심을 받게 될 것이다.
결론
이렇게 오해하지 말기를 바란다.
- 보호하심만 구했던 이스라엘이 멸망을 당했으니, 이제 보호하심을 구하지 말아야겠다.
이는 비유로 하면,
- 상대방을 너무 사랑해서 결혼했는데, 결혼하니 자꾸 싸우게 된다는 이유로 이혼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 자꾸 싸우면, 헤어질 것이 아니라 싸우지 않도록 더 사랑해야 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구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 보호하심은 피조물인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께 보호하심을 구해야 한다.
문제는 보호하심'만' 구하는 것이다.
- 그러면서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는 것이다.
- 더 적확하게 말해서, 하나님과 관계 맺지 않는 것이 문제이다.
- 하나님께는 아무 관심 없으면서, 하나님을 이용해서 이익만 얻으려는 것이 문제이다.
'그러니 그럴 바에는 신앙 떠나라!'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 반대로, '그러니 제발 바른 신앙 갖자!'는 것이다.
- 부부 관계에서 생기는 문제를 풀기 위해 사랑하는 마음으로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자기 이야기를 하고, 충돌되는 부분을 조정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과도 그렇게 하자는 것이다.
- 부부 관계에서도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서로를 향한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필요하듯, 우리도 하나님께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쏟자는 것이다.
- 왜냐하면 이미 하나님은 우리에게 에너지를 쏟고 계시기 때문이다.
에너지를 쏟는다는 것이 더 열심을 내어, 더 어렵고 힘든 노동을 하라는 것이 아니다.
- 부부 관계의 문제에서도 자신의 문제를 인정하고, 상대방의 노력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할 때 대부분 해결된다.
- 하나님과도 이러한 에너지를 쏟으라는 것이다.
- 내가 하나님을 얼마나 괴롭게 하는지 인정하고, 하나님은 날 위해 얼마나 헌신하시는지 깨닫는데 에너지를 쏟으라는 것이다.
물론 그러면 힘든 노동을 하게 될 때도 있다.
- 설거지를 한 번 더 하고, 빨래를 한 번 더 돌리고, 퇴근을 좀 더 일찍 하게 된다.
- 그런데 그런 것이 사랑으로 인한 부산물로 나온 것이 아니라면, 열심으로 드리는 이스라엘의 제사를 하나님께서 역겨워하셨듯, 그 노동 역시 역겨울 뿐이다.
- 거래 관계로 전락한다.
- 상대방을 대가를 받으면 사랑을 주는 매춘부로 취급하는 것일 뿐이다.
그만큼 에너지를 상대방 그 자체에게만 집중해야 한다.
- 어떻게든 상대방의 불만을 해결하기만 하면 된다는 마음은 안된다.
- 상대방의 마음을 듣고 이해하고, 자신의 마음을 말하고 이해시키고, 두 마음을 조정하여 하나로 합치는 것이 관계에 에너지를 쏟는 것이다.
이것만이 신앙생활이다.
- 이것만이 부부 생활이다.
- 이것만이 인생이다.
이렇게 살 때에만 인생을 인생이라 부를 수 있다.
- 그럴 때에만 신앙과 인생의 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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