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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레미야(22) 11:1-17 응답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응답 - 하나님의 애달픈 심정
    예레미야서 2022. 3. 5. 11:24

    또 다시 심판을 말한다.

    - 지난 본문은 심판을 받는 이스라엘에 초점이 있었다.

    - 심판을 예고 받은 이스라엘이 해야 할 일은 짐을 꾸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 즉, 하나님께 의지할 수밖에 없도록, 하나님 외의 의지할 것을 제거하라는 뜻이다.

    - 아브라함이 본토와 친척을 떠나듯, 출애굽 한 이스라엘이 광야를 떠돌듯 말이다.

    그래야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여, 심판을 받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본문의 초점은 심판을 행하시는 하나님께 있다.

    - 구체적으로 말하면, 사랑하는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애달픈 심정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셨고, 필요한 것이라면 뭐든지 주고 싶으셨다.

    - 그래서 애굽의 억압에서 건지셔서 자유케 하셨고, 

    -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주셔서 풍요롭게 살게 하셨다.

    - 게다가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성전을 지어주셨다.

    - 성전에서 이스라엘은 원하는 것을 구했고, 하나님은 언제나 즉시 응답하셨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자유도, 땅도, 성전도 모두 빼앗아야만 하는 상황이다.

    - 그래서 이스라엘을 이방인에게 자유를 빼앗기고, 남의 땅에 살면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지도 못하는 처지로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다.

    - 사랑하는 이스라엘에게 사랑해서 줬던 모든 것을 전부 거둬들여야 한다.

    - 그래야만 이스라엘과 관계를 회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왜 멸망 당해야 관계 회복이 일어나는지는 충분히 말했으니 넘어가겠다.

     

    그런데 본문은 이 비극적인 상황을 하나님의 시선에서 본다.

    - 당연히 이스라엘은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 아픔, 슬픔, 고통, 좌절, 상실, 분노, 원망, 미련, 체념, 미안함, 암담함 등을 느꼈을 것이다.

    - 이스라엘이 느꼈을 참담함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느끼셨을까?

    - 죄로 인해 심판받아 사라져가는 이스라엘을 보시며 통쾌해하셨을까?

    - 세상에서 죄가 사라지고 공의가 세워지는 모습을 보시며 기뻐하셨을까?

    - 이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는 것을 보시며 평안하셨을까?

    언뜻 생각하면, 멸망하는 이스라엘을 보시며 하나님은 통쾌하고 기뻐하며 평안하셨을 것 같다.

    - 하나님은 쌓이고 쌓인 이스라엘의 죄 때문에 더 이상 참지 못하시고 진노를 쏟아내신다.

    [렘 11:11] 그러므로 나 주가 말한다. 보아라, 그들이 벗어날 수 없는 재앙을, 내가 그들에게 내리겠다. 그들이 나에게 도움을 간청해도, 내가 응답하지 않겠다.

    - 그렇게 이스라엘과 함께 이스라엘의 죄도 사라졌으니, 앓던 이가 빠지듯 시원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 우리가 배우길, 공의로운 심판이 집행되었을 때 하나님은 기뻐하신다고 배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말 하나님이 그렇다고 해보자.

    - 하나님은 세상을 바르게 통치하는 신으로서, 어떤 것보다 공의를 중요하게 여기신다고 해보자.

    - 그래서 공의롭게 질서가 지켜질 때 기뻐하신다고 해보자.

    - 반대로 공의가 깨지고 질서가 지켜지지 않을 때 참지 못하고 분노하신다고 해보자.

    - 그래서 적법하게 죄인이 벌을 받는 것을 기뻐하신다고 해보자.

    - 그래서 심판받는 이스라엘을 보면서도 기뻐하셨다고 해보자.

    그런데 이렇게 가정하면 하나님을 설명할 수 없다.

    가장 대표적으로, 창조를 설명할 수 없다.

    - 이전에 말했지만, 창조는 흠도 티도 없는 완전무결하신 하나님께 '불순물 생성'이다.

    - 질서의 파괴이다.

    - 창조는 '보시기에 좋은' 일이 아니라 분노하실 일이다.

    - 따라서 공의와 질서를 우선시하는 신은 창조하지 않는다.

    다음으로, 세상의 악을 설명할 수 없다.

    - 악이 뭐냐에 대한 논쟁은 있지만, 세상에 악이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 게다가 악이 아담의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순간도 없어졌던 때가 없다.

    - 하나님이 정말 공의를 최우선 삼으신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는가.

    - 이런 논리가 이끄는 결론은 하나님이 무능하시다는 것뿐이다.

    따라서 공의와 질서를 최우선시하는 신은 신의 자격이 없다.

    - 애초부터 창조하지 않았을 것이고,

    - 창조했다면, 결과적으로 자신의 무능함만을 증명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공의를 최우선시하지 않으시며,

    - 하나님의 본질은 공의가 아니다.

    - 그렇다고 하나님이 무질서하시다는 것이 아니다.

    - 공의와 질서는 중요한 가치이다.

    - 하지만 사랑을 드러내는 여러 표현 방식 중의 하나일 뿐이다.

    - 다른 말로, 공의는 사랑에 의해 제어되고 한계 지어지는, 사랑 표현 수단일 뿐이다.

    - 사랑을 지속하기 위해 때때로 선택되는 수단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심판받는 이스라엘을 보며 어떠셨을까?

    이것이 11장부터 13장까지 이어지는 단락의 메시지이다.

    - 그중에 이번 본문은 서론이다.

    - 하나님의 현재 심정을 설명하기 위한 준비 작업으로, 출애굽부터 현재까지 있었던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얽힌 관계를 제시한다.

     

    하나님의 심정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구절은 다음과 같다.

    [렘 13:14~17] 그들이 서로 부딪쳐서 깨지게 하고, 아버지와 자녀 사이에도 서로 부딪쳐서 깨지게 하겠다. 나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않으며, 동정도 하지 않으며, 사정없이 멸망시킬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 (17) 너희가 이 말을 듣지 않으면, 너희의 교만 때문에 내 심령은 숨어서 울고, 끝없이 눈물을 흘릴 것이다. 주님의 양 떼가 포로로 끌려갈 것이므로, 내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흐를 것이다.

    -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대해 굉장히 분노하셨고, 심판을 계획하셨고 실행하시기 직전이다.

    - 이스라엘에 대한 긍휼과 동정 따위는 없고, 분노로 가득 차 있다.

    - 그러나 동시에 심판받는 이스라엘을 보시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신다.

    - 분노는 없고, 슬픔 뿐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심정은 복합적이다.

    - 매정하고 비장하며, 동시에 감정적이며 애처롭다.

     

    왜 이렇게 표현했을까?

    - 이것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과 관계를 끊고 떠날 때 갖는 감정이 복합적이기 때문이다.

    만약 사랑하는 사람이 떠날 때 분노하지 않는다면, 

    -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기대와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실망과 분노도 없다.

    반대로 사랑하는 사람이 떠날 때 슬퍼하지 않는다면,

    -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 그래서 소중한 것을 잃은 상실감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면 분노와 슬픔이 함께 온다.

    - 그만큼 소중하고, 소중한 만큼 기대도 크고, 기대한 만큼 실망도 크고, 실망의 정도만큼 소중히 여겼다는 것이다.

    - 반대로 분노와 슬픔이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분노와 슬픔 없는 쿨한 사랑을 자랑삼아 말하는 사람이 있다.

    - 떠날 때 쿨하게 보내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말한다.

    - 그렇다면 그때 그 사람을 붙잡고 당장 손목을 잘라보라.

    - 그리고 손목도 쿨하게 보내주라고 해보라.

    - 아마도 울며불며 손목 달라고 애원할 것이다.

    - 절대로 쿨하게 보내주지 못할 것이다.

    - 누구라도 분노와 슬픔을 주체하지 못할 것이다.

    - 이것이 사랑하는 것을 잃었을 때 보이는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면 손목이 잘려 나가는 것과 같은 분노와 슬픔을 느낀다.

     

    이렇게 사랑은 한 몸 되는 것이다.

     

    - 그만큼 소중히 여기고 그만큼 기대하는 것이다.

    -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몸이 잘려 나간 것처럼 분노와 슬픔이 뒤섞여서 솟구치는 것이다.

    이것이 심판받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정이다.

    - 떠나가는 이스라엘에게 너무 기대가 컸기 때문에 분노할 수밖에 없었고,

    - 너무 소중했기 때문에 슬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이스라엘의 심판 앞에 애달파하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표현한 본문이다.

     

    본문 간략 정리

    단락 구분은 다음과 같다.

    ① 1-5절: 언약 확인 - 그들은 나의 백성,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② 6-8절: 언약 재확인 후 진단 - 그들은 지키지 않았다.

    ③ 9-13절: 진단 후 심판 선포 - 내가 응답하지 않겠다.

    ④ 14-17절: 하나님의 심정 - 마음이 상하여 재앙을 내리겠다.

    - 한 마디로, 언약을 파기하고 하나님을 떠나 심판받는 이스라엘 때문에 하나님이 너무 속상하다는 뜻이다.

     

    기본적인 내용은 이미 나온 것이다.

    - 그래서 다시 언급할 필요 없다.

    - 초점을 두어야 할 것은 표현이다.

    본문 전체를 아우르는 핵심 단어는 '샤마(shama, 듣다)'이다.

    - 총 9회 나와서, 듣다, 순종하다, 응답하다, 들어주다로 번역되었다.

    [렘 11:2] “이 언약의 말을 듣고, 유다 사람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선포하여라. 

    [렘 11:3] ・・・・ 이 언약의 말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다. 

    [렘 11:4] ・・・・ 내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나에게 순종하고, 내가 명하는 모든 것을 실천하면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서,

    [렘 11:6] 너희는 이 언약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여라.

    [렘 11:7] ・・・・ 나에게 순종하라는 것을 오늘에 이르기까지 거듭거듭 경고하였기 때문이다.

    [렘 11:8] 그러나 그들은 듣지도 않고,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다.

    [렘 11:10] 그 조상이 나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고, 다른 신들을 쫓아다니면서 섬기더니,

    [렘 11:11] 그들이 나에게 도움을 간청해도, 내가 응답하지 않겠다.

    [렘 11:14] 예레미야야, 너는 이런 백성을 보살펴 달라고 나에게 기도하지 말아라. 너는, 그들을 도와 달라고 나에게 호소하거나 간구하지 말아라. 그들이 재앙을 당할 때에, 네가 나에게 부르짖어도, 내가 들어주지 않겠다.

    정리하면,

    -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언약을 '듣고'(2, 6) 하나님께 '순종하라'(3, 4, 7)고 말씀하셨다.

    - 그러나 이스라엘은 '듣지'(8, 10) 않았다.

    -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응답하지'(11) 않고 '들어주지'(14) 않겠다고 하셨다.

    - 이렇게 '샤마'를 이스라엘과 하나님 각각을 주어로 모두 사용했다.

     

    그렇다면 '샤마'를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결국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이다.

    - 하나님은 처음으로 언약을 세우실 때부터 관계를 염두해 두셨다.

    - 언약 체결을 촉발한 출애굽 사건부터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고통을 듣고(샤마) 응답하신(샤마) 사건이다.

    - 언약의 내용 역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듣고(샤마) 순종하라(샤마)는 것이다.

    - 그러면 하나님 역시 이스라엘을 듣고(샤마) 응답하시겠다(샤마)는 것이다.

    [렘 11:4] 이 언약은, 쇠를 녹이는 용광로와 같은 이집트 땅에서 너희 조상을 데리고 나올 때에, 내가 그들에게 지키라고 명한 것이다. 내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나에게 순종하고, 내가 명하는 모든 것을 실천하면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서,

    본문은 이렇게 언약의 처음과 끝이 전부 '샤마'로 표현한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어떻게 했냐?

    - 하나님께 '샤마'하지 않았다.

    [렘 11:8] 그러나 그들은 듣지도 않고,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자기들의 악한 마음에서 나오는 고집대로 살았다. 그래서 나는 지키라고 명한 이 모든 언약의 말씀대로 그들에게 벌을 내린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지키지 않았다.

    - 하나님과 관계 맺지 않고 완악하게 고집대로 살았다.

    - 그래서 벌을 주셨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샤마'하지 않았다.

    '샤마'하지 않는 이스라엘이 한 줄로 나오니 별것 아닌 것 같지만,

    - 출애굽을 하여, 광야 시대를 거쳐, 전쟁을 통해 가나안 입성 후, 사사 시대(300여 년)를 지나, 사울, 다윗 등의 왕정 시대(500여 년) 전체를 말한다.

    - 그 기간 동안 이스라엘은 반복해서 '샤마'하지 않았다.

    - 하나님은 정말 오래 참으셨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냐?

    - 하나님도 '샤마'하지 않기로 하신다.

    [렘 11:11] 그러므로 나 주가 말한다. 보아라, 그들이 벗어날 수 없는 재앙을, 내가 그들에게 내리겠다. 그들이 나에게 도움을 간청해도, 내가 응답하지 않겠다.

    이것이 심판의 본질이다.

    - 하나님께 응답하지 않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도 응답하지 않는 것 말이다.

    - 이를 통해 이스라엘이 응답하도록 이끄는 것 말이다.

     

    응답하지 않는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이 어떻게 그러실 수 있냐고 따질 수 있다.

    - 그런데 이 방식은 육아를 하는 우리에게 굉장히 익숙한 방식이다.

    예를 들어, 자녀가 소리 지르며 떼를 쓸 때, 두 가지 잘못된 반응이 있다.

    - 혼내서 멈추게 하는 반응과 요구를 들어주는 반응이다.

    - 이 반응은 당장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만, 자녀에게 잘못된 행동 패턴을 만들어 문제를 장기화시킨다.

    - 자녀는 마트에 올 때마다 드러눕게 된다.

    바른 반응은 무반응이다.

    - 예를 들어, 자녀가 마트에서 장난감을 사달라고 소리 지르며 드러누웠다면, 일단 그냥 놔둔다.

    - 왜냐하면 흥분 상태에서는 아무런 말도 안 들리기 때문이다.

    - 자녀가 울다 지쳐 흥분이 가라앉으면, 왜 안되는지, 그렇지만 어떻게 하면 장난감을 얻을 수 있는지 설명한다.

    - 그렇게 합의하고 약속하며 기분 좋게 나온다.

     

    물론 이러한 방식은 당장 문제를 해결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

    - 그러나 장난감을 얻는 바른 행동 패턴을 만들 수 있고,

    - 그렇게 되면 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수 있다.

    우리에게 반응은 무조건 좋다는 생각이 있다.

    - 사랑한다면 어떻게든 반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그러나 부적절한 반응보다 무반응이 더 좋다.

    - 무반응이 상대방의 적절한 반응을 끌어내는데 더 필요하다.

    그래서 하나님은 무반응 방식을 사용하신 것이다.

    - 우리에게 적절한 반응 패턴을 가르쳐주시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는 방식이 이채롭다.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겠다고 응답'하시기 때문이다.

    [렘 11:14] 예레미야야, 너는 이런 백성을 보살펴 달라고 나에게 기도하지 말아라. 너는, 그들을 도와 달라고 나에게 호소하거나 간구하지 말아라. 그들이 재앙을 당할 때에, 네가 나에게 부르짖어도, 내가 들어주지 않겠다.

    - 응답하지 않으시려면 그냥 아무 말씀도 안 하시면 되는데 말이다.

    왜 그러셨을까?

    -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반대로 생각해서,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실망했을 때 사람은 어떻게 반응할까?

    - 아무 말 없이 관계를 끊거나,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관계를 지속한다.

    - 왜냐하면 애초부터 그 관계가 소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그래서 그냥 헌신짝처럼 버린다.

    - 또는 애초부터 관계에 기대가 없었기 때문에 실망해도 신경 쓰지 않고 관계를 지속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둘 다 하실 수 없었다.

    - 이스라엘과의 관계가 너무 소중했기 때문이다.

    - 관계를 끊을 수도, 그냥 지낼 수도 없었다.

    - 그래서 응답하지 않겠다고 응답하신 것이다.

    이를 통해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회복하시려고 말이다.

     

    육아도 똑같다.

    - 자녀를 사랑하지 않는 부모는 떼쓰는 자녀를 무시하고 가버리던지, 요구를 들어준다.

    - 애초부터 자녀와의 관계가 소중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는, 반응하지 않으면서 여전히 자녀 옆에 있다.

    - 왜냐하면 자녀의 요구를 무시할 수도, 들어줄 수도 없기 때문이다.

    - 왜냐하면 사랑하기 때문이고, 자녀와의 관계가 소중하기 때문이다.

    - 이를 통해 살아가는 방식을 알려준다.

    - 그래서 자녀는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바른 방식을 배운다.

     

    그런데 이러한 무반응 방식 육아가 어려운 이유가 있다.

    - 막무가내로 떼쓰는 자녀를 보면, 부모도 감정을 절제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 말 안 듣고 고집부리는 자녀에게 화가 나고,

    - 동시에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해 괴로워하는 자녀가 안쓰럽다.

    - 부모가 느끼는 분노와 슬픔 모두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두 가지 감정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부모가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면,

    - 엄청나게 화를 내며 혼내거나, 화를 억누르기 위해 요구를 들어준다.

    - 그러면 자녀는 살아가는 방식을 배우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무반응 방식이 어려운 것이다.

    - 혼내서 억누르거나 요구를 들어주면, 쉽게 해결되는 문제인데,

    - 분노와 슬픔을 안고 문제를 오랫동안 마주해야 하기 때문이다.

    - 그렇게 부모가 인내하고 절제할 때만 자녀가 욕구 조절 방법을 배우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도 괴로우신 것이다.

    - 분노와 슬픔을 언제나 안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 하나님도 마음 같아서는 잘못된 요구를 하는 이스라엘을 쓸어버리시던지, 다 들어주고 싶으실 것이다.

    - 그러면 분노와 슬픔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러나 그 대신에 이스라엘과 관계 회복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하나님은 '분노와 슬픔을 안고', '응답하지 않겠다고 응답하신다.'

    - 사랑하는 이스라엘이 멸망당해 잡혀가는 모습을 말 없이 지켜보신다.

    - 그것이 얼마나 속 쓰린 일인가.

    - 그러나 그러한 하나님의 인내를 통해서만 이스라엘은 관계를 배울 수 있고,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

    이것이 본문이 전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애달픈 심정이다. 

    -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느낄 수밖에 없는 고통이다.

     

    결론 - 우리는 정말 사랑하고 있는가?

    사랑할 때 느끼는 긍정적인 감정이 많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고, 만나면 설레고 떨리며, 헤어지면 또 보고 싶다.

    - 부부 관계도, 부모 자식 관계도, 친구 관계도 사랑하면 다 그렇다.

    그러나 사랑의 긍정적인 감정은 반쪽짜리이다.

    - 사랑하면 모두 긍정적인 감정을 느끼지만,

    - 긍정적인 감정을 느낀다고 전부 사랑은 아니다.

    - 술, 담배, 마약, 도박도 긍정적인 감정을 준다.

    사랑을 참 사랑으로 확증시켜주는 것은 오히려 부정적인 감정이다.

    - 철 지난 유행어를 빌려 말하면, '불구하고 사랑'이다.

    - 분노와 슬픔, 인내와 애달픔이 그것이다.

    - 사랑으로 인한 부정적인 감정 때문에 괴롭지만, 그래도 사랑하는 것이 참 사랑이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생각이 다를 수 있다.

    - 그 차이가 아무리 노력해도 좁혀지지 않을 때, 분노와 슬픔을 동시에 느낀다.

    - 너무 기대가 크기에 분노가 생기고, 너무 소중하기에 슬픔을 느낀다.

    그런데 그때 참 사랑이 확인된다.

    - 분노와 슬픔이 싫어서 관계를 끊는다든지, 반대로 무조건 상대방에게 맞추는 선택은 참 사랑이 아니다.

    - 두 가지 반응은 모두 차이를 좁혀서 사랑으로 하나 되려는 노력을 포기하는 것이다.

    - 내 생각을 포기하고 한 걸음 나아가기를 포기하는 것이고,

    - 상대방에게 설명하고 이해시켜서 한 걸음 다가오도록 하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 그만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 그렇게 노력해서 사랑하기보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각자의 삶을 사는 것을 더 원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참 사랑은 분노와 슬픔을 가지고 끝까지 인내한다.

    - 관계를 끊거나 상대방의 요구를 들어줘서 분노와 슬픔을 해소하지 않는다.

    - 분노와 슬픔을 가지고 차이를 좁히려 애쓴다.

    - 어떻게든 내 생각을 포기하여 한 걸음 나아가려 노력하고,

    - 어떻게든 상대방에게 설명, 이해, 설득시켜서 한 걸음 다가오도록 노력한다.

    - 모든 노력의 순간마다 분노와 슬픔을 느끼지만,

    - 그때마다 인내하며 차이를 좁히기 위해 노력한다.

     

    참 사랑을 이렇게 풀어서 말하면 너무 복잡해서 우리에게 너무 멀어 보인다.

    - 하지만 육아의 모든 순간이 이렇다.

    - 육아의 매 순간마다 분노와 슬픔을 느낀다.

    - 내 뜻대로 따라와 주지 않는 자녀를 보며 분노를 느끼고,

    - 자기 뜻대로 하지 못하는 자녀를 보며 슬픔을 느낀다.

    - 그러면서도 내 생각을 포기하려 애쓰고, 자녀에게 바른 것을 이해, 설득, 가르치려고 애쓴다.

    모든 육아의 순간마다 분노와 슬픔을 느끼지만,

    - 그때마다 인내하며 차이를 좁히기 위해 노력한다.

    - 노력하지 않고 분노와 슬픔을 이기지 못하면, 화로 억누르거나 요구를 다 들어주어서, 자녀에게 살아가는 방식을 가르쳐줄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참 사랑이다.

    - 본문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렇다면 같은 사랑으로 배우자도 사랑하고 있는가?

    - 육아할 때와 똑같이 배우자와도 차이를 좁히기 위해 노력하는가?

    - 매 순간마다 분노와 슬픔을 느끼지만, 인내하고 있는가?

    - 차이 좁히기를 포기하고, 관계를 끊거나 요구를 다 들어주고 있지 않은가?

    - 내가 한 걸음 나아가는 노력과 동시에 상대방이 한 걸음 다가오도록 하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는가?

    - 그래서 분노와 슬픔을 해소하고만 있지 않은가?

    - 그렇게 상대방에게 간섭하지 않는 것이 사랑이라고 자신을 속이고 있지 않은가?

     

    사랑은 쿨하지 않다.

    - 사랑은 뜨겁다.

    - 너무 뜨거워서 마음이 다 타들어 갈 만큼 말이다.

    - 애간장이 녹아 애달플 만큼 말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사랑하셨다.

    - 그리고 그렇게 사랑하라고 요청하셨다.

    과연 우리는 어떻게 사랑하고 있는지 돌아보자.

    - 뜨겁게 사랑할 때에만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그리고 사람과의 관계 회복이 있다.

    - 그럴 때만 구원받아 천국을 누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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